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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을때는 일을, 컨디션이 좋을 때는 눈치껏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몸이 좋을 때는 좋아하는 일도 싫어지게 되니까.
그게 회사 생활을 그나마 견디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강아지 두마리가 생기고 나서
햄스터들에게 많이 소홀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마음의 소홀함을 깨닫고 의무감으로라도 저녁이면 꼭꼭
밥챙기고 물챙기고 채소 챙겨주고,
잘 살아있는지 떠들어보기도 하였는데,
시름시름 앓던 금동이가 오늘 아침에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 녀석의 볼에 직경 약 5미리 정도의 상처가 생긴것이 몇 달 전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로 여겼건만 점점 자라나 혹이 되더니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은 점점 자라나 한쪽 볼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살도 점점 빠지더니 작은 뼈들이 다 만져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일요일까지 녀석은 먹이를 주면 필사적으로 내 손으로 달려왔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는 듯.
어젯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슬슬 햄스터들을 보는데,
녀석이 먹이통에 꼼짝않고 엎드려있다.
아 시간이 왔구나, 직감이 왔다.
한 주먹도 안되는 털뭉치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그때만 살짝 반응할 뿐, 다시 눈은 게슴츠레 해지고 몸은 축 늘어진다.
혹시나 해서 방금 찐 고구마를 조금 떼어 먹이통에 넣어준다.
부드럽고 달콤한 고구마의 식감이 다시 이녀석을 조금더 살아있게 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그리고 약 10분간 가만히 그녀석의 숨을 지켜보았다.
죽음 직전의 그 숨,
멈추는가 싶으면 다시 살아나는 숨
어떤 미련으로
어떤 습관으로
어떤 의지로
놓지 못하는지.
그렇게 한 생명이 잠시 끊질기게 머물다 갔다...
2만원 상당의 책을 중고로 만원에 구입했다.
<사육과 육식> 리처드 W. 불리엇 저, 임옥희 옮김, 알마 출판사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햄스터5마리와 개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의문,
집지키는 개, 복날에 잡아먹는 개, 장난감처럼 키우는 개, 반려동물로 변화되고 확장되는 개에 대한 인식의 복잡 다단함과,
반려동물을 맞이하면서 맞딱뜨린 동물을 향한 그 엄청나고 방대한 모순들,
가령 먹어도 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개, 먹으면 안되는 동물, 먹어도 되는 동물,
유기견의 보호와 안락사, 동물의 기본권과 사회적 합의의 문제, 동물의 보호와 동물의 자유 등등,
그리고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가슴을 면도날로 긋는것 같은 아픔을 주었던 그 사건...
어릴 적 삼촌이 우리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를 잡는 장면을 엿보았다.
목에 올가미를 씌워 베란다 난간에 매달았다.
그 눈빛, 처절하게 목졸려 죽어가던 우리 강아지, 그 옆에서 무표정으로 물을 끓이고 있는 삼촌
요즘 나는 기억의 창고에 오래 묻어둔 이 장면을 꺼내어 되내이고 되내인다.
끔찍한 기억이라 꼭꼭 닫아걸고 싶지만, 이 기억에서 나는 뭔가를 도출해야하는 강박 같은 걸 느낀다.
뭔가 이 기억 속에 내가 요즘 고민하는 모순들의 실마리가 들어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다른 살육의 장면보다 더 끔찍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무력하게 희생되는 개의 고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장면에는 비록 가젤에 대한 연민은 있지만 끔찍하거나 잔혹하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렇다면, 그 개가 나와 친밀함을 나눈 존재이기 때문일까?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고, 학교 갔다 오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존재라서 더 끔찍한 것일까?
하지만 내 기억에 그 강아지와 다정하게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워낙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사실 앞뒤 맥락은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면, 삼촌이 물을 끓이고 그 옆에 강아지고 목졸라 죽어가고 있는 그 장면만이 나에게 문제가 된다.
아마도 삼촌의 존재가 그 장면을 더욱 몸서리치게 만드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개가 사고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큰 연민의 마음은 있을지언정,
불쌍함과 뒤섞인 몸서리치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육자가 삼촌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공포스럽게 했을 것이다.
'어느 인간이 힘없는 동물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 있다.
그 동물을 눈이 튀어나오고 혀가 축 늘어진채로 헐떡이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고통은 극에 달해 있다.
그 가해자는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이고, 나의 삼촌이다!'
죽음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고기가 되었을 때에 그것은 그저 무생물에 불과하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문제는 개가 고통받는 존재라는 사실이고
그 고통을 인간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얼마전 홍대에서 지인과 술자리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연히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분께 그 기억에 대해 이야기 했다.
덧붙여 얼마전 인터넷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에 서명했다고 했다.
그분은 실은 부모님이 지방에서 보신탕집을 하신다고 했다. (헉~)
그분의 말씀이 개를 먹는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도 그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며 어릴적 길렀던 염소 얘기를 한다.
매일 동산에 데리고나가 풀을 먹이던 염소가 있었는데 어느날 사고로 죽었다.
그 염소 고기를 처음에는 잔인하다며 밥상 머리에 앉아 울면서 먹지 말라고 떼를 쓰고 있는데,
엄마가 맛이 기가막히다며 자기 입 속으로 자글자글 잘 구어진 고기 한점을 넣더라는 거다.
씹어보니 맛이 기가막히더라는 거다.
확실히 그분의 생각과 인식의 배경에는 <사육과 육식>에서 구분한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에서
인간과 가축동물이 공존하던 사육시대에 속해 있다.
그 시대에서 가축을 도살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고민이다.
실제로 동물보호를 부르짓는 문화는 대부분 서구 문화권이며 이들은 대체로 다른 나라보다 배가 부른건 맞다.
그리고 특별히 개 식용을 반대하는 것이 서구적 편견인 것도 맞다.
어쩌면 나의 고민도 사육가축과 인간이 멀어진 후기사육시대의 감수성에 의해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고통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단지
시대적 차원의 분석으로만 환원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그 어릴적 기억은 붙잡고 늘어져야할,
때론 가만히 바라보고 머물러야 할 화두이다.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에 도달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과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흐른다.
글은 경험에 의존한다.
글은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
글은 권위에 의존하고, 그 자체가 권위다.
글은 죽은 말이고, 말은 죽은 생각이고, 생각은 죽은 느낌이다.
일단 글을 쓰면 거기에 매인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쓰려 하고 있다. 시체 수집가처럼.
모순이다. 이처럼 모순된 갈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된 걸까?
어느 인도의 철학자는 글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글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것이다.
권위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군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 것처럼.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증폭시킨다.
마치 하얀 도와지같은 마음 가운데 선이 그어지면 자유롭던 공간이 좌,우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아, 선이 좌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좌우라는 사고가 그것을 좌우로 나눈 거였다!)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도 글을 쓰겠다는 것도 결국은 글에 대한 집착이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머물며 바라보는 것,
행위를 스스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머물며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보았다.
나는 순간 스스로를 검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뭐 대단치 않은 생각이지 않은가"
"인도 철학자라는 권위를 거들먹거리다니"
"어느 책에서 본 나부랑이들을 주절대고 있구나"
크리슈나무르티의 "생활의 기술"을 소개하고 싶은 욕망은
내가 그 책을 읽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발로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조롱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구나 하고 관찰하면 될 것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공포에서 한발짝 떨어지는 듯 싶다...
아직 써보진 않아 어떤 기능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느낌이네요~~
블로그에 두문불출하는 11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이사를 했고, 새식구가 생기고, 찍찍이가 죽었다.
그 녀석 내 손 위에 차갑게 식어 죽은 모습이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비누곽에 넣고 평소에 좋아하던 호박씨와 해바라기씨 넣어 장래를 치뤄주고
집 근처 나무 밑에 묻어줬다.
이젠 그녀석 사진만 봐도 가슴이 아려온다.
녀석들의 엄마이면서 가장 똑똑하고 활발하던 아이.
사고도 많이 치지만 늘 나를 따르던 아이.
더 미안한 건 새식구가 생기고 그녀석이 죽었다는 거다.
새식구 때문에 소홀한 틈을 타 죽어버린건 아닌가, 그날 밤새 "나 때문에" 죽었다고
가슴을 치고 울었다.
편지에 다음 생에는 좀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라고 썼다.
이사 가기 한 주 전, 동물병원에서 유기견 한마리를 임양했다.
원래 인터넷에 찍어둔 발발이가 있었는데, 유기견 보호 활동가가 처음 개를 키우는 걸로는
발발이는 비추라고 한다. 그래서 인연을 맺은 녀석이
이녀석
똘똘하게 생겼길래 똘똘이라고 이름부터 짓고
이녀석이 보호되고 있다는 동물병원에서 입양절차를 밟고
데리고 왔다.
한번 주인을 잃었던 녀석이라 나에 대한 집착이 크다.
내가 가는 곳만 졸졸...
교육도 잘 받았고, 똥오줌도 산책 시킬때만 한다. (좀 귀찮긴 하지만...)
기다려, 손, 일어서, 앉아, 안돼 등 기본 교육되어 있다.
좀 안쓰럽고 강박적이게 착하다.
다시는 혼자 되고 싶지 않다는 녀석의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은 가슴에 안고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널 버리지 않을꺼야 하고
속삭여주고 싶다.
한달이 지난 요즘은 좀더 편안해진 것 같다.
지난주에는 퇴근했는데 해드셋의 귀 스폰지를 물어뜯어놨다.
이제 제 집이고 엄마라는 인식을 하는 것 같다.
왠지 늠름해 보이는 모습
털깎고 목욕시키고 이름표 달아주고...
일어서
기다려
그리고 뽀너스
짱구 똘똘
미누의 표적단속 소식에 기사를 썼다.
원래 영문기사를 쓰려고 했는데 영어빨이 안서서
우선 한글로 쓰고 디디한테 고쳐달라고 했다.
오늘 내일로 범한테 영문으로 번역해달라는 참이다.
언제 미누씨가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참 마음이 급하다.
맘에 안드는 부분은 알아서들 고치시고
널리 퍼트려주시길...
카피레프트, 영리허용, 개작허용, 작성자 바꿔치기
다 허용이니 널리 알려주세요.
오만한 단일민족국가 한국에 외국인이 영구체류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 뿐이다. 한국인과 결혼하거나 20억을 투자하거나. 한국 법에는 연속 5년 이상 합법 체류하는 자에 한해 영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조항이 있지만, 5년 이상 합법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이상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비두, 샤말, 아노아르, 마숨, 라주, 까지만. 이들은 모두 10년 이상을 일하다가 추방당한 이주노동자들이다.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한국 정부가 부르짖는 다문화라는 말도 허망한 껍데기에 불과해질 뿐이다.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의 권리를 위해, 미누의 석방을 위해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서를 보내자!
방금 용산에 있는 친구가 메신저로 전해왔다.
오늘 아침 신부님들이 계신 남일당 옆 건물이 철거당했다고 한다.
철거 도중에 신부님들이 폭행 당하고 옷 찢어졌다.
결국 문정현 신부님 들려나가고 한창 때려부수고 있는 중인가 보다.
보다 자세한 얘기는
http://korea.indymedia.org/drupal/에
그 친구가 기사 올리기로 했다.
노무현 장례일을 틈타 사람들이 관심이 한곳에 집중된 사이
쥐새끼처럼 강제철거를 한 거다. 정말 어이가 없다.
자칭 "진보"는 다른 곳에서 울고 있고,
정말 울어야 할 사람들은 뒷골목에서 두드려 맞고 있다.
미치고 환장하겠다.
노무현이 죽고 마음이 심숭생숭,
파병을 하고, 김선일이 죽고, 이주노동자를 추방하고, 대추리를 짓밟고, 한미FTA를 했지만,
그가 당선될때의 기쁨이 생각났다.
그에게 투사되었던(잘못되었건 잘되었건) 민주주의의 열망들이 생각났다.
아직 용산에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분들이 영안실에 차갑게 안치되어 있건만
가야할 길은 멀고 해야할 일도 많은데,
왜 마음이 쓸쓸하고 서글픈지....
아마도 같은 정치 패러다임 속에 살았던 같은 세대의 '공감' 같은 걸까?
386 끝자락에 매달린 감수성? 386식 민주주의를 담보했던 권력의 죽음?
그런데 프레시안에 난 다음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됬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26103009§ion=01
"살아있는 권력 vs. 죽은 권력" 담론이 결국은 소위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는 이 사회에서
'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
대의제 민주주의를 놓고 완성된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민주주의가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임을 즉각 부정하게 되는 셈이라는 것,
이 담론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닌가
나를 둘러싼 권력과 정치에 대한 성찰과 비판으로부터
'권력'에 대한 다른 식의 사고 방식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부터 진짜 민주주의가 뭔지 실천하는 것!
내가 스스로 미디어가 되고
내가 스스로 텃밭을 일구고 먹을 거리를 생산하고
내가 이웃과 함께 내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용산에 있는 친구들이 콩크리트를 거둬내고 텃밭을 만든다고 할때,
갑자기 노무현이 죽고 횡횡하고 있는386식 우울증에서 화악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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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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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엊그제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햄스터 두마리를 집에 데려 왔는데...걱정이네요...부가 정보
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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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는 정말 번식이 빨라요. 두마리가 암수이면 1년이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 있어요. 저도 처음에 두마리 기르다가 1달만에 다섯마리의 새끼를 났어요. 처음에는 이 다섯마리를 분양하려고 했는데, 햄스터 분양 쉽지 않아요 - -; 그래서 암 수를 분리해서 두개의 케이지에 넣었어요. 그, 러, 나 햄스터란 동물이 무척 반 사회적 동물이더군요. 서로 죽을때까지 물어뜯고 싸워요. 결국 한마리만 분양을 주고 5개의 케이지에 한마리씩 담아야 했답니다. 5개의 케이지!!! 꼭 둘을 분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부가 정보
허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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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그렇군요...ㅠㅠ 여튼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