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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 정신을 차릴 사이가 없었다.
그 중에 하나, 노동자 역사 <한내>(http://www.hannae.org)에 보낸 것을 여기 올려둔다.
실은 시간에 쫓겨서 오래 전에 썼던 것에 살을 좀 붙였다. 암튼...
[내가 살아온 길]
애창곡에 어린 추억들
대학교에 꼭 가야 하나, 하는 사치스런 생각에 빠져 살던 사춘기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 나는 대학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지방 도시에까지 대학생 시위대가 거리를 휩쓸던 시기, 우리 고등학생들 사이에도 독재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화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평생 하는 줄 알았던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의 20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음악시간에 가창력 시험 칠 때 말고는 남들 노래할 때 입만 벙긋거렸던 나에게 노래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운동가, 민중가요, 노동가요, 그런 이름으로.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로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난 30여년간 내가 불렀던 애창곡(?)들을 되새기면서 내 살아온 내력을 슬쩍 훑어본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듣고 불렀던 운동가는 「아침이슬」, 「흔들리지 않게」, 「정의가」정도였고, 개사곡이 몇 개인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래실력은 그야말로 음치 수준이기는 했지만, 나는 집회에서나 술집에서나 어깨를 걸고 함께 부르는 「아침이슬」같은 노래들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고, 술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서 혼자서도 목청껏 불러젖히곤 했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이렇게 시작하던 「정의가」는 그 시절에 내가 열린 공간에서 주먹을 내지르며 곧잘 부르던 노래였다. 그렇지만 동아리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조용한 모임에서는 뒤늦게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의 노래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금관의 예수」, 「가뭄」, 「강변에서」, 「기지촌」, 「친구」, 「작은 연못」, 「바다」와 같은 김민기의 노래들은 아직도 가사를 대부분 기억하고, 운전을 하다가 졸릴 때 이따금씩 부르는 노래들이다.
무리들 속에 파묻혀 조용히 지내던 내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농민가」를 통해서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을 부르면서 나는 연극반에서 배운 사박자 춤을 단과대학 체육대회에서 선보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자주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다. 나를 아는 동지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 판소리에서 유래한 「농부가」를 다른 단과대의 신입생들에게까지 가르치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후에 동급생들을 불러 모아 민요를 부르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노래를 못해도 제자(^^)들은 훌륭하게 잘 소화했기에, 나중에는 장단만 쳐주는 것으로 내 역할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민가」와 「농부가」는 나를 사람들과 호흡하게 해준 노래들이었고, 요즘도 거나한 술자리에서는 한 번씩 부르기도 한다. 농촌활동을 가서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무기 중의 하나가 내 막걸리 실력이요, 그 다음이 이들 두 노래였다.
내 기억으로는 82-84년 사이에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무척 다양해졌다. 광주항쟁에서 비롯된「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이 시기에 집회에 등장했고, 「광야에서」, 「불나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단결하세」, 「선봉에 서서」를 기억한다. 그리고 샹송의 곡에 가사를 붙인「오월의 노래」도 해마다 5월이면 불끈불끈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는 젊은 내 가슴을 분노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서관 난관에 밧줄을 타고 올라가 시위를 이끌다가 떨어져 죽기도 하고, 날마다 수천의 학생들이 도서관 앞 광장에 모여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던 때, 학교측은 도서관 창밖에는 쇠창살을 치고 잔디광장에는 수백 포기 가시 돋힌 장미나무를 심음으로써 집회를 효과적으로 막으려 했다. 어느 봄이었던가, 독재 타도와 졸업정원제 폐지를 외치던 집회 대오들은 한순간에 잔디광장을 채우고 있던 장미나무들을 모두 뽑아버렸는데, 그 사건 이후 내가 이따금 불렀던 노래가 있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붉은 넋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피 흘리던 그 목소리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이른바 아크로폴리스는 어떤 대학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막 시작했던 90년대 초반에도 가끔씩 옛 생각에 젖어 술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 호된 질책을 겸한 조언을 들었다. “동지에게서는 아직도 그 대학의 냄새가 나, 노동자 냄새가 안 나고 말이야!”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노동자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아직도 출신 대학의 냄새나 풍기고 다니다니, 그 날 이후 아무리 취했어도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진짜 노동자들의 투쟁을 얘기하는 노래를 불렀다. 80년대 중반까지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부르던 노래를 노동자에게 배급했다면, 87년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학내로 마구 유입되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바야흐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89년에 직장에 들어와서 조합원이 되자마자 잘 불렀던 노래가 「파업가」와 「전노협진군가」이다. 전노협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알기도 전에 「전노협진군가」를 통해서 나는 노동해방의 길로 달려가는 노동자 군대의 위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로 시작하던 「골리앗의 그림자」가 내 30대 초반에 가장 열심히 불렀던 노래였다. 집 어귀에 들어서면 아내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노래 소리만 듣고 내가 오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한 날이면 꼭 이 노래를 불렀다. 그만큼 노동조합에 대한 열정과 연대에 대한 갈망이 아직 젊었던 내 가슴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평생을 투쟁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90년대 들어서서 영화 <파업전야>의 감동은 「철의 노동자」를 급속히 전파했고, 그 후로도 참 많은 노래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어디서나 부르던 우리들의 투쟁노래들은 노래방과 단란주점으로 포위되고 급기야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이 휘황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서 공연되면 박수치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TV에는 나오지 않아도 투쟁현장에는 어디나 온다는 노래활동가 동지들이 투쟁사업장에 왔을 때 노래를 따라 부르기보다는 박수치고 환호하기에 바쁘다. 투쟁가 한 가락이라도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르는 동지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술자리에서나 수련회 뒷풀이에서 개인적인 푸념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들이 투쟁의 노래를 대신하여 여과없이 술술 흘러나온다.
좀 과장스럽기는 해도 20대 이후의 내 삶은 노래와 함께 흘러왔고, 그것은 곧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한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가 부르는 투쟁의 노래들도 다채롭고 풍성해지고 또 분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내 삶에서 노래가 차지하는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쩌면 노동운동의 역동성이 퇴화되고 있다는 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는 혁명의 노래라고 해도 우리가 함께 부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금 내 삶이 동지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지기를 고대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고 밤하늘의 정적을 깼던 그 옛날의 술판 하나가 불현듯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2009. 5. 26)
성공회대 이광일 교수가 참세상에 올린 글을 바빠서 대강 읽고 지나갔는데
오늘 다시 생각이 나서 찾아가 꼼꼼히 정독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53151
제목에서부터 '대당'이라고 하는 논리학의 용어를 들이대어서 좀 당혹스러웠고,
글이 꽤 길어서 차근차근 읽지 않으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
(나만의 문제인가~~?^.~)
그래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민주주의의 의미와 실현방안,
이른바 추모 정국이라는 것에서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들,
그리고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잘 짚어준 것 같다.
또 찾아서 읽게 될 것 같아서 일단 링크를 걸고
눈에 띄는 몇 문장들을 그대로 옮겨다 놓는다.
특히, '살아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문제를 지적한 첫번째 인용문은
나를 뜨금하게 만들었다.
지난 번 글에서 나도 편리하게 그런 표현을 차용했으니 말이다.
어디 볼까...
요즘 많은 저널리스트들, 학자들이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관계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살아 있는 권력’인 이명박정권이 ‘죽은 권력’을 상징하는 노무현정권을 탄압, 조롱하였고 노무현전대통령은 그 상징적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들립니다. 물론 이런 대당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것은 주권자를 대상화,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벗어날 없습니다. 왜냐구요? 어떤 사회이건 민주주의를 표명하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오직 ‘자기지배를 실현하고자 하는 주권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그 어떤 부당한 장벽들, 경계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그를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은 그 어떤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만이 “이제 저를 버리라.”고 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제대로 독해하는 사람이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그를 살리는 참다운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개혁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는 오직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어져 왔다는 역사를 부정하거나 잊지 마십시오. ‘노무현의 꿈’은 열성지지자들인 당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로 거듭날 때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정말 잊지 말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추모하는 저 촛불이 지금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용산의 착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의 삶 속으로 자연히 이어질 때만이, 진정 ‘이 시대의 또 다른 바보들’과 어깨를 할 수 있을 때만이 그 또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요. 이제 당신들의 몫입니다.
=미디어충청(http://cmedia.or.kr)에 오늘 기고한 것.....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1.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 5. 23. 05:21)
2.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재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 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2009. 5. 3. 자결 확인된 이후 발견됨)
3.
'특별한 사람'의 유서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를 뒤덮고 있다.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크게 드러나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조직(공동체)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언제나 국익을 외쳤지만 국익을 위해 목숨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삶에 있음을 외쳤고 죽음으로 실천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전복의 역사 앞에서
나는 모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관과 무덤에서 되살아와서
산 사람들과 어울려
전복되지 않는 오늘의 역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을 꿈꾼다.
'특별한 사람'의 죽음이 미구에 태풍처럼 세상을 휩쓸고 가더라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듬고 지키며 우리는 그저 싸울 뿐이다.
2009-05-20 16시05분 이성우
일요일 낮 12시 10분쯤,
연행된 동지들 면회하러 대덕경찰서에 갔는데
경찰들이 정문을 틀어막고 먼저 온 동지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더라.
어차피 경찰서 안에 주차하기는 글렀구나 싶어서
경찰서 담벼락을 따라서 스르르르 굴러가고 있는데
어랍쇼, 전경들이 우르르 담장을 넘어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광경....
그 당시 대덕경찰서 정문에서는....
지난 주일(5/9-10)엔
식구들끼리 예정되었던 1박 2일 여행을 갔었다.
꽃이 지고 난 섬진강을 따라서
순천, 광양까지 갔다가
다시 하동, 화개장터, 구례로 거슬러왔고
다음 날에는 곡성을 거쳐서 성삼재를 넘어서 돌아왔다.
오자마자 곧바로 대전역 촛불집회에 갔고
밤에는 투쟁하는 동지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월요일(5/11)엔 모임이 있었고
아주 특별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밤을 새고 말았다.
화요일(5/12)에는 서울에서 집회와 회의(중집위)가 있었고
뒷풀이에 더해서 한잔의 술을 마시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수요일(5/13)에는 오전에는 지역본부 회의,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퇴근하고 촛불집회에 갔다.
서울가는 연맹의 간부들을 대전역까지 태워다주고
가볍게 시작한 저녁밥먹는 자리가
조용한 술자리로 길게 이어져 자정을 많이 넘겼고...
목요일(5/14)에는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저지 출근투쟁,
지부에 잠시 들러서 설문조사 얘기 마무리짓고,
오후 4시 회의가 있을 때까지 일하느라 좀 바빴고,
저녁 7시에 서울 회의는 30분쯤 지각했다.
뒷풀이가 유쾌하게 이어졌고
4년만에 택시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금요일(5/15), 오전 10시 회의에 지각했고
좀 일찍 퇴근해서 안양에 갔다.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모이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그 때의 담임선생님, 올해 초에 정년퇴임하셨지만
우리랑 여전히 젊고 활기차게 어울리신다.
토요일(5/16), 아침부터 마음이 바쁜 날이었고
비는 왔고, 전국노동자대회가 처음으로 대전에서 있었고,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사정상 빠져있었고
밤에 다시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다급한 전화를 여러통 주고 받았고 멀리까지 차로 다녀왔다.
일요일(5/17), 오늘이구나...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서울로 가는 도중에
어제 연행된 동지들이 너무 많아서(457명?)
면회투쟁을 같이 해달라는 연맹의 전화를 받고
다시 급히 대전으로 돌아왔다.
둔산경찰서, 대덕경찰서, 다시 둔산경찰서, 왔다갔다 하다가
오후 3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5시에 회의(민영화저지정책팀)에 갔다.
회의 마치고
저녁 같이 먹고
집에 들렀다가
사무실에 왔다.
12시 지나면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일은 끝이 보이지 않고
지난 일주일 생각나는대로 줏어섬기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하나하나의 일들이 모두 정리가 필요한 것들이지만
언제 다 정리하고 살겠나.
10분 후면, 다시 일주일이 새롭게 시작되는구나...
맛있게 살자 <9>
밥상에 차려내는 향긋한 바다내음, 멍게깍두기
요즘 수산시장에 가면 싱싱한 멍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멍게는 수온이 높아지는 늦봄부터 여름까지 제철입니다. 멍게의 특유한 맛은 불포화알코올인 신티올(cynthiol) 때문이며, 근육 속에는 글리코겐의 함량(약 11.6%)이 다른 동물에 비해 많습니다. 멍게에는 또 인체에 필수불가결한 미량 금속성분인 바나듐이 들어 있어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합니다.
술안주로는 곧잘 멍게를 찾으면서도 반찬으로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해던가 장모께서 깍두기를 보내 주셨는데 멍게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후각을 자극했습니다. 바로 멍게깍두기였습니다. 그런 우연한 계기로 멍게를 밥상 위에 올리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멍게를 아예 먹을 줄 모르던 우리 딸도 멍게깍두기에는 쉽사리 손이 가곤 합니다.
멍게깍두기가 익숙해지자 숙성시키지 않고 곧바로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멍게무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멍게무침은 반찬으로도 손색이 없지만, 따끈한 밥에 구운 김과 참기름이랑 얹어 비비면 맛있는 멍게비빔밥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멍게 손질하기>
-멍게는 2개의 큰 돌기 부분을 먼저 잘라내고 속살을 빼냅니다.
-내장을 깨끗이 훑어서 제거하고 3-4등분으로 칼질합니다.
※멍게를 손질할 때는 멍게 자체의 물이 워낙 많이 나오므로 이것을 모아서 멍게속살을 씻으면 향도 손실되지 않고 맛이 훨씬 좋습니다.
※멍게는 손질하여 껍질을 제거하면 원래 무게의 1/3쯤으로 줄어듭니다.
※멍게의 표준어는 우렁쉥이인데, 멍게를 흔히 쓰다 보니 복수표준어가 되었습니다.
<멍게깍두기>
재료: 무 1.2kg, 멍게 600g, 쪽파 50g, 미나리 50g
양념: 고춧가루 6T, 멸치액젓(까나리액젓) 6T, 마늘 1T, 생강 1/2T, 설탕 1T, 소금 약간
-깍둑썰기를 한 무에 설탕 1큰술과 소금 약간을 뿌려 놓고, 무에서 물기가 생기면 고춧가루 1큰술을 넣어 버무려서 가볍게 고춧물을 들입니다.
-남은 고춧가루에 액젓, 마늘, 생강을 넣어 갠 다음 고춧물 들인 무에 넣어서 버무립니다.
-여기에 멍게 손질한 것과 3센티미터 길이로 자른 쪽파와 미나리를 넣어 가볍게 버무린 다음 실온에서 하루쯤 익힌 뒤 냉장고에 두고 먹습니다.
<멍게무침>
재료: 멍게 1kg, 무 100g, 쪽파 30g, 미나리 30g, 홍고추 1개
양념: 액젓 1T, 간장 1T, 고춧가루 1T, 설탕 1t, 마늘 1t, 파 1t, 깨소금 1T
-양념을 모두 섞어 멍게와 버무리고, 얇게 저며 썬 무와 손질한 쪽파와 미나리, 홍고추를 넣어서 한번 더 버무린 다음에 바로 먹습니다. (2009. 5. 12)
아래는 멍게 무침...
오전에 지역 회의 하나 끝내고 돌아와
오랜만에 느긋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컴퓨터 위에 놓인 달력이 아직도 4월이다.
한 장을 넘겨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5월 하고도 13일....
5월이 2주일 지나는 사이에 나는 뭘하고 있었나?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내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 다음날로 이어져 기어이 끝을 보고 말아야 할텐데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날마다 다른 일정과 다른 일들이 첩첩이 쌓여있고
무어 하나 말끔하게 끝나는 일이 없구나.
어디 오라고 해도 가지 말고
사무실에 붙어 있으려고 애 좀 써야 하나.
누구 말마따나
술이라도 끊고 밤낮 일중독자로 전환해야 하나.
달력 한장 넘겼는데
한달의 절반쯤을 그냥 잃어버린 것 같아서
투덜투덜 푸념 한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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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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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무장된 세상....시인보다 멋진 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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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시인의 칭찬을 듣다니...감사...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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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아래....' 너무 와닿는 싯귀네요...감비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는...멋져요!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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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슨 재주가 있겠어요? 그래도 고마워요~~ㅎ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