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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0
    [옛글] 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손을 내밀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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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8/23
    옛날에 쓴 거...(4)
    손을 내밀어 우리

[옛글] 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전문노련> 기관지 1993년 3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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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이 성 우(유전공학연구소노조 조합원)

 

얼마 전의 일이다. 고교 동창 녀석이 우리 연구소를 찾은 적이 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손님 대접한답시고 유성에 가서 점심을 사고,

커피 한잔 마시며 지난 얘기들과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나누고 있던 중에,

그 친구가 불쑥 물었다.

 

"여기서 월급은 얼마나 받냐?"

"......"

"먹고 살 만큼은 주니?"

 

우물쭈물하다가, 이윽고 궁색한 답변,

"월급에다 보너스에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 합쳐서 대략 천 삼, 사백 될 것 같애.

 먹고 살 만큼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둘다 실험실에서 지내다 보면 생활비가

 서울보다는 덜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사는 거지 뭐. 3년 전, 1500만원에

 세들어 살던 서울 상도동의 전셋값이 지금 아마 3000만원 정도 할텐데, 난

 그보다 넒은 집에 아직도 천오백에 살고 있거든."

 

이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드는 것이 답변이라기보다는 숫제 변명에 가까왔다.

친구가 덧붙이기를,

"쬐금 힘들겠다!"

 

-그래 힘들다, 임마, 어쩔래, 그나저나 내 작년 연봉이 정말 1300이나 되었나 모르겠다.

적당히 둘러붙인 건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서랍 속에 간직해 둔, 정말이지 받고 나서

그 동안 한번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연말정산서(공식 이름은 '소득자별 근로소득 원천

징수부'라고 되어 있다)를 꺼내 보게 되었다. 그 서슬퍼런 문서에 가로되,

"KIST 유전공학연구소에 다니는 주민등록번호 6*****-1******인 이성우는 1993년

 한해동안 급여총액 11,307,868원, 상여총액 1,880,000원으로 계 13,087,868원의

 소득을 올려 513,352원의 세금을 국가에 충실히 납부하였음"

을 훌륭히도 증명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도, 1300만원대는 되는구나, 하고 짐짓 흡족(?)해 하고 있다가, 아니 50만원

이라니, 내 세금이 50만원이라니? 벌떡 일어나서 지난 해의 같은 문서를 꺼내어 비교해

보았다. 역시 가로되,

"위 이성우는 91년 한해동안 급여총액+상여총액 = 계 11,362,600의 소득으로

 130,791원의 세금을 냈노라!"

 

뒤늦게 꼼꼼히 계산해 보았다. 내 연봉은 작년에 15.2%가 올랐다. 총액 5% 지침에

저항하여 92년도 기본급을 동결했는데도 15%나 올랐다는 건, 내가 일을 잘한건지

(능률평가수당 등), 출근이라도 열심히 한 건지(연월차수당), 아니면 호봉 승급이

그만큼 되었다는 건지(?!)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올랐으니 흐뭇하다치고, 그 오른

금액 170만원(정확히 1,725,268원)의 22.2%(382.561원)를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정부의 횡포는 도대체 뭐냐? 말이 인상분의 22.2%이지 91년도 세금에 비해 무려

292.5%가 오른 것 아닌가, 이런......(이하 줄임, 고운 말을 써야 할 것 아니오.)

 

다시 그 친구와 먹은 점심값을 생각해 보았다. 돌솥밥 1인분에 5000원, 그래 삼년 전에

우리가 대덕벌에 처음 왔을 때, 그 때는 3000원이었어. 세금보다는 덜 올랐군, 어디

다른 집들 한번 보자. 가끔 들러서 소주 한잔에 곁들이는 할매낙지, 그 매콤한 낚지볶음

한접시에 3000원이다(삼년 전에는 1500원), 먹는 것만 그러냐, 서울가는 고속버스는

2000원도 안했는데 3년만에 3000원이 넘어섰고, 우리 집에서 연구단지 들어오는

택시비는 작년만 해도 3000원이면 떡을 쳤는데, 이제는 5000원, 그나마 교통이 막히던

어느 날에는 8000원을 주었다는 내 아내의 푸념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에고에고 친구야, 이게 내가 그럭저럭 사는 거냐, 정말 3%만 올려받고도

백일도 안된 딸까지 먹여 살릴 수 있는 거냐? 조용한 웃음 뒤에 안스러워하던 그 표정의

의미, 이제야 바로 알겠구나. 이제 니가 점심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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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대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서 받은 엽서.

 

옛날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세월이 좀 더 가면 되찾아볼 기회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 올려 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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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우리 아파트는 1992년 12월엔가 입주를 시작했고

내가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3월부터이다.

아파트를 지은지 어언 18년이 지났고

몇 년전에 주민들 사이에 큰 분쟁이 있기도 했지만

낡은 중앙난방을 지역난방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3천 세대가 넘는 규모 있는 아파트 단지라서

공사기간만 하더라도 석달쯤 되는 모양인데,

드디어 이번 주가 우리 집 차례이다.

주방과 주방에 연결된 발코니에 구멍을 뚫고

새로운 난방관을 집어넣고 계량기도 설치하는가 본데

문제는 주방과 연결된 발코니를 비우는 일이었다.

 

지난 일요일 밤새

발코니에 설치된 붙박이 책장에 있던 것들과

그 앞을 가리고 있던 케케묵은 박스들을 정리하느라 땀 꽤나 쏟았다.

대학 이후 30년간 내가 살았던 흔적들이

수첩, 노트, 메모지, 소식지 따위에 즐비하다.

 

거기에서 발견된 것들,

내 것이기도 하면서 낯설기도 한 옛날 옛적의 흔적들을

틈틈이 여기에 정리해 보자.

이번 공사가 아니었으면

이것들을 언제 한번 들여다 봤을까 싶다.

 

우선, 아래 수첩들은 81년, 84년, 86년에 내가 썼던 메모장들이다.

여기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는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 아래 술병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묵직한 박스가 하나 있어서 열어봤더니

95년인가 다른 연구소에 다니던 친구가 프랑스로 2년간 포닥을 나가면서

나한테 맡긴 술인데, 다 마셔 버려도 상관없다면서 그냥 준거나 다름없었다.

(그 친구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니 아마 시골 부모님이나 친척이 주신 거 아닌가 싶다.)

 

근데 받아서 보관만 하고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 술병들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고 살았던 거다.

라벨을 보니 1991년 2월 8일로 되어 있다.

더덕주 2병, 그리고 매실 비스무리하게 생긴 2병.

20년 가까운 세월을 저 혼자 익어간 이 술들은 맛이 어떨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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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쓴 거...

과기노조 13년 역사를 연표집으로 만드는 일을

노동자 역사 '한내'에 맡기기로 했다.

 

관련한 자료들을 챙기던 중에

<전문노련> 기관지 1994년 2월호에서

고 박성오 동지를 추모하는 내 글을 발견했다.

 

글을 보고 나서야

아, 이런 것도 썼었지, 하고 옛 일을 떠올렸다.

파일로 따로 남아있기도 할텐데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 남긴다.

 

고 박성오 위원장.

1993년 12월 16일에 자가운전으로 출근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12월 25일 오후에 돌아가셨고,

전문노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실험실에서 기대받던 젊은이(?)였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들 하던데

글쎄올시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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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오 동지여 고이 잠드소서>

 

유전노조에 가본 적이 있는지,

동지여 그 곳은 겨우 열여섯 평의 작은 공간에

창가에 책상 하나

물끄러미 입구를 마주 보며 놓여 있고

4개의 책장과 4개의 서류함들

회의용 탁자 둘과 의자 열 개

6인용 소파와 탁자

그리고 두 대의 컴퓨터와 두 대의 프린터

각자 다른 벽을 바라보는 사이로

사무원이 쓰는 작은 책상과

그 위에 놓은 팩스, 전화

그것이 전부다

참, 10리터 용량의 작은 냉장고 하나

모서리에 죽은 듯 박혀 있지

 

하여튼 좁게

게다가

좁은 공간을 더 좁게 갈라놓은 간이칸막이

거기에 몇 년째 걸린 걸개그림 한 폭

녹두장군의 부릅뜬 눈 치틀어 올린

상투 위로 쓰였으되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들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니라'

(갑오년 호남창의격문 중)

 

여기에서 한 사람이 살다 갔다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

유전공학연구소노동조합

고 박성오 위원장

52년, 전쟁 중에 공주에서 태어나

형님 넷 누님 둘의 귀여움

혼자서 고스란히 받으며 크더니

이 겨울 아침 찰나의 사고로

그 형님 누나 다들 뒤에 두고

부인과 어린 남매 세상에 남기고

마흔 두 살의 아직 젊은 나이로

20대 못지 않은 단단한 가슴팍을

붉은 심장을

언 땅에 묻었다

만장 속에

아련한 만가 속에

눈물 속에

우리는 그를 묻었다

누구라도 문을 열면

싱긋 웃으며 반겨주던 기억은

지금은 빈 책상으로

썰렁한 사무실로

여기에 뎅그라니 남아 있다

 

그러나 남은 것이 어디 친지며 가족이며

우리 몇몇의 짧은 기억 뿐이랴

생전에

짝사랑보다 더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얼싸안던 140여 조합원들

과기노협의 5,000여 동지들

나아가 연맹의 15,000여 식구들과 함께 나눈

87년 이래의 투쟁의 역사가 있다

나란히 서서 내지르던 우렁찬 함성이 있다

한번도 싸움에서 선봉이 된 적 없지만

사람들이 다들 힘들어할 때

주눅들어 있을 때

더 이상 일꾼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언제나 선뜻 나섰으니

2대와 5대, 그리고 6대 위원장으로서

그의 발자취는

유전노조 역사의 반을

혼자서 감당하고도 남아

이제

우리들 일상의 짐짓 식어버린

열정과

게으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타하고 있다.

 

부드러운 사람

온화한 사람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한다

그런 그는

무엇보다도 낚시를 좋아했다

3년 전쯤의 일이다

여름 폭우로 갑천이 넘치자

사람들은 서둘러 귀가하기에 바빴는데

다음 날 그가 말하기를

자기는 정말로 바빴노라

아, 글쎄

갑천에도 손바닥만한 붕어가 올라오더라

밤 9시까지 신명이 나서 낚싯대를 드리웠노라고

그랬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 천진한 웃음이 반가워서

절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환한 얼굴이 부러워서

우리는 함께 웃었다

 

어쩌면 우리들 중 몇몇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드리운 낚싯대에 걸려

오늘도 이렇게 노동조합을 찾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밤마다 그를 꿈꾸는 것이나 아닌지

이 저녁 갑천변을 걸으면서

우리는

녹두장군의 눈보다 더 선연한 빛으로 살아

남아있는 우리를 채찍질하는

그의 지긋한 눈초리를

온몸으로 받는다

실팍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기꺼이 맞는다

 

위원장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이성우 <유전공학연구소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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