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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16일) 보스톤의 MIT 교정에서
한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다고,
그리고 한국에서의 추도식이 내일 오후 4시에 전주에서 있다고,
오래된 벗이 오늘 저녁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를 10년전쯤 나우누리에서 처음 만났고
(같은 또래인 우리는 만나기 전에도 많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 6월의 어느 주말에
대전에서 만나서 마구마구 낮술을 퍼마셨고
그리고는 끝이었다.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 그린스펀 의장이 그의 논문을 인용할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나와 대화를 나눌 때
진실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노동자라면서 격려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노동자편은 아니었다...)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하종강의 노동과 꿈(http://www.hadream.com)에 가 보면 되겠다.
거기에 올라온 글 중에서
그가 죽기 전의 심경을 옆에서 함께 나누었던
또다른 벗의 글 하나를 여기에 덧붙인다.
내일 나는
서울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나 맡았고
저녁까지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에
전주에는 안타깝지만 갈 수가 없다.
그에 대한 추도사를 쓰고 싶지만
지금같이 먹먹한 느낌으로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겠다.
우선은 짧게,
그의 명복을 빈다.
신규의 최근 심경(김희경)
신규의 최근 심경 July 20, 2005.
우울증이라는 병은 통계를 보면, 85%정도는 약을 먹어서 치료가 된다고 한다. 여기서 약을 먹어서 치료한다는 뜻은 꼭 약을 안먹어도 되게 낫는다는 뜻이라기 보다 약을 계속 먹는 걸로 전제하고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의 우울증은 그 당시 보스턴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미 1990년 대 말 엠아티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였던 것 같다. 그는 이미 경영학 석사과정을 끝낼 때, 아주 주목할만한 논문을 썼고 (그의 지도교수 말로는 the most profound master’s degree thesis), 그 논문이 박사과정의 논문이 된 것 인데, 박사과정을 끝내는데, 다시 5년이 걸렸다. 2-3년만에 끝냈을 수 있을만큼, 그는 이미 논문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5년이나 걸려서 박사과정을 끝냈는데, 이건 우울증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지도교수가 이미 그가 졸업하기 이전인 90년대 말에 그에게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고 약물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가 치료를 받고 우울증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2002년 1월이었다. 그 이후 약 1년 6개월정도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 약을 먹고 상당히 상태가 좋아졌었다. 그 당시 장국영의 자살에 대해서, 우울증 환자가 옆에 있으면 도와주어야 한다고 한겨레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2003년 가을 이후에 약을 먹기도 하고 안먹기도 하는 걸 몇 번 거친 후에, 본인이 더 이상 약을 안먹기로 결정하고, 약을 전혀 먹지 않은 지 아마도 8개월 정도만에 자살을 한 것 같다.
왜 그는 죽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다던가, 혹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서 너무나 외로웠다던가, 혹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던가…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직장의 경우, 신규는 2003년까지 대단히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었다. ICIS (International Conference Information System)이라는 Information Technology field에서는 상당히 권위있는 학회에서 6개의 페이퍼를 발표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학회는 한 사람이 4개 이상의 페이퍼를 발표할 수 없도록 하고 있어, 신규는 4개의 페이퍼에만 이름을 넣고, 2개의 페이퍼는 본인의 이름을 넣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뉴욕대학교 박사과정 1학년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낳은 기록인데, 뉴욕대 신기록일뿐아니라, 어느 학교라 해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거라고 생각이 된다. 대체로, 이렇게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논문들은 저널에 발표하는 순서를 밟는데, 그는 그걸 하지 않았다. 우울증때문이었기도 했을테고, 이미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닌 것을 저널에 발표하느라고 시간을 쓰는 것을 그의 성격으로는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울증이 깊어진 2005년 초에는 이미 직장에 사직의사를 밝히고, 사표를 전한 채, 연구활동을 중단했었다. 당시 신규를 매우 인정하고 아끼던 그의 직장 상사인 MIT의 Erik Bryonolfsson교수는 사표 수리를 해주지 않고 신규가 우울증 치료를 받기를 계속적으로 권유했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지난 반년동안 아무런 연구활동을 하지 않았던 신규에게, 본인만 원하면, 또 다시 계약을 갱신해서 엠아티에서 연구 교수로 있어줄 것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물론 본인은 원하지 않았었다.
신규는 더 이상 연구활동을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고 했다. 왜? 경제학/경영학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학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실증 경제학 연구는 데이터를 토대로 연구를 해야하는데, 이미 있는 데이터로 할 수 있는 연구는 이미 모두 했고, 정부가 나서서 데이터를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 꼭 해야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이 없이 지금처럼 연구를 해서는 쓰레기 양산, 종이가 아까운 연구라고 했다. 경영학중에서 Finance 분야가 괜찮은 것은 그 경우 주식가격 데이터를 놓고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연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따라서 현재 아카데미아의 지도층들은 종이가 아까운 쓰레기 연구 그만하고, 데이터를 모으는 일,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모아야 하는 지를 정부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만 현재 신규의 미국 학계내에서의 위치에서는 그런 일을 하기는 어려웠고, 우선 그의 기준으로는 "쓰레기" 논문을 많이 써서 테뉴어를 받는 일을 해야만 했다. 신규는 아주 예전부터, 테뉴어를 받는 것같은 본인의 성공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 아주 무심했었다. 예를 들면, 노무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단일화가 되기 전에, 후보단일화에 관련된 글을 쓰는 일, 이랔 전쟁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밝히는 일 등 한국 정치에 관련된 일에 글을 쓰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써서, 내가 그거 그만 좀 하고 연구논문 쓰고 테뉴어를 받아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지금 한국에 전쟁이 날 지도 모르는데, 내가 테뉴어받자고 연구논문쓰고 있을 때냐’고 대답했었다.
나는 이번 가을에 경영학 박사과정을 진학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는 그일을 매우 말렸었다. 그가 말리는 이유는 보통 다른 사람들이 말리는 이유–그 나이에 어떻게 다시 박사과정을 하겠냐 든가, 지금 다니는 좋은 직장을 그만 두는 게 너무 아깝다든가, 그 나이에 졸업하고 직장을 성공적으로 얻은 확률이 얼마나 높겠냐든가 하는 등등의 이유–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경영학이 희망이 없는 학문, 실망스러운 학문이기 때문에 나의 진학을 만류한다고 했었다. 내가 그동안 해온 학문 – 과학 실험을 하고 그 실험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거나 새로운 센서를 만들어내거나 하는 이공학문-은 정직한 학문,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무언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는 학문이지만, 경영학/경제학의 경우 쓰레기 같은 연구, 종이가 아까운 연구를 하기가 너무 쉽다고 (그는 최근 경제학 저널 1년 치를 가져다 놓고 보면 그 중의 하나 정도 가치있는 연구라고 했다), 그건 리서처가 못나서라기보다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처럼 정직한 학문을 10년 넘게 해온 사람이 경영학/경제학의 실상을 보게되면 깊이 실망을 할테고, 그렇게 몇 년 이후에는 나도 자기처럼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너는 나의 양심이야. 네가 이런 얘기를 가끔 해줘서 나도 다른 사람들 연구결과를 들을 때, 이게 세상에 어떻게 공헌을 하는 연구인지 생각하게 돼, 내 연구가 세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보다, 어떻게 해서 테뉴어를 받는지만 생각하지 않게 해줘’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래서 내가 너에게는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인거야, 나처럼 생각하다가는 너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몰라’라고 했었다. 그게 지난 6월의 일이다.
그가 예전에는 한국의 학문계만 쓰레기같은 연구를 양산한다고 했었는데, 최근에는 미국학문계도 – 한국 학문계보다 낫다고는 해도- 마찬가지로 쓰레기같은 연구만 양산한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교편을 잡는 건 어떠냐고 말해본 적도 있는데, 그는 그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했었다. 그는 경영학 학문계에서는 더 이상 세상에 기여할 만한 일을 할 것이 없고, 기업에서 하는 일은 적어도 쓰레기가 되는 종이가 아까운 연구를 하지는 않으니 그래도 낫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는2005년 초에는 미국 기업의 직장을 알아보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 기업에서 직장을 못구했는데, 우울증이 이미 깊어지던 그가 얼마나 열심히 직장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 과연 인터뷰를 하러 갈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그가 그래도 살아볼까 하고 마지막으로 노력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었다. 그의 아들은 미국에서 미국식 경기고등학교인 수재들만 모아놓고 교육하는 공립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자신이 이제 직장을 그만 두면 그 아들의 양육에 대한 생활비를 댈 수도 없고, 그 아들의 비자도 만료가 되면서 더 이상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는 자책감이 매우 심했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쓰레기같은 연구만 하는 교수들이라도 적어도 그렇게 해서 자식들 공부는 시키고, 먹여살리지 않냐고, 자기는 정말로 못하겠는 일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보면 한편 존경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 보면, 그래서 자식들 다 잘 키울 수 있는 사람들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안생겨, 존경하게 돼’라고 말했다.
그는 우울증이 심해진 최근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고 했다. 자기는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 직장 동료로서 해주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에게 전자메일을 보내서 안부를 묻거나 진로를 상담해오는 후배들에게 아무런 답장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Guilt, Shame, Despair가 자기가 요즘 느끼는 전부라고 했었다. 너무나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했다. 아마도 이부분이 우울증 환자가 보통 겪는 심정인 것인 것 같다.
내가 ‘네가 말리든지 말든지 나는 경영학 박사과정에 갈거야. 그거 안해보고 죽으면, 너무나 한이 될 것 같아. I will regret it if I don’t this.’라고 말했더니, 그가 ‘그럼 해야지, 한이 되는 일은 없어야지. I feel guilt, shame and despair but I don’t have regret. I have run a good life. I have done all t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우울증의 심각함을 느끼고, 그를 살려보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했었는데, 지난 5월에 그를 잠깐 방문했을 때도, 지난 6월에 잠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해서 가는 것이라고, ‘네가 나서서 내가 죽고 싶다는데, 두들겨 패서 살릴 생각 하지 말아.’라고 했었다. 내가 주위 모든 사람, 가족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직장을 그만두고 경영학 박사과정을 가는 것과 비교해서, ‘너도 네 인생 네 마음대로 다른 사람이 말려도 굳이 경영학 박사과정에 가는 것 처럼, 나도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아무리 주위에서 말려도 내 인생은 내가 정해서 끝낼 수도, 살 수도 있는거야.’라고 말했었다. 죽음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인생의 한 선택일 뿐이라고…
그렇게 그가 갔다. 그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He changed my life. He inspired me to be brave, to stand up for what I believe in, to dare to fight what I think wrong, to try what I want for my life, to love who I am, to believe in myself, to be the best that I can be.
‘너 죽고 나면, 내가 어떻게 살 지 걱정안되니?’ 하고 물었더니, ‘너는 워낙 몸도 마음도 튼튼한 사람이니까 걱정 하나도 안돼.” 라고 대답했었다. 자식..너, 그렇게 꼭 가야했니… 세월이 지나면 그를 생각해도 아프지 않을 때가, 눈물이 나지 않을 때가 올거라는 걸, ‘몸도 마음도 튼튼한’ 나는 이 슬픔을 언젠가는 이겨내고 잘 살 거라는 걸 알지만, 오늘은 너무나 너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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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신규 선생이 자살하셨군요. 전 오프라인으로는 일면식도 없지만 몇년전에 온라인에서 한동안 티격태격한 적이 있었어요. skyang이라는 필명을 쓰셨는데...사실 그 분하고 생각이 아주 달랐지만 샤프한 사람이고 자아가 강한 엘리트주의자라고 생각했더랬는데..자아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겐지..기분이 묘하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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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에다가 같은 과라 그런지 모륵뎄지만 함운경에 대한 애정이 컸던 것도 갑자기 기억이 나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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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롯>> 1) 어, skyang을 알고 있었군요. 2) 이번 주에 보자고 했는데, 내 일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다음 주에는 어쩔까 모르겠네. 이 대표도 함께 보자고 한 건 알지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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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네 알고 있었어요. 동의여부를 떠나서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더랬죠2)어 전 그건 몰랐는데..하루 이틀 전에만 말씀주세요. 뵌지 오래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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