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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투쟁 전망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투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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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복수 원전의 동시 사고, 대규모 해양오염, 핵발전 사고의 장기화라는 점에서 1979년에 발생한 미국의 스리 마일드(TMI)원전 사고와 1986년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비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고이자 인재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덮치며 시작된 방사능물질 누출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에도 지속할 자본주의 재난이다. 도쿄전력은 1~3호기 원자로 안에 핵연료 덩어리가 880톤 정도로 추정하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방사능이 생성될지 전망도 못 하고 있다. 향후 40년 동안 이를 꺼내겠다고 말은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핵폐기물 해양투기가 언제까지 얼마나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예고대로 8월 24일부터 핵폐기물 해양투기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에서 공개한 64종 핵종 중 세슘-135, 플루토늄-239, 아이오딘-129는 반감기1)가 2만 4천 년에서 1,570만 년까지 매우 긴 방사성물질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64종의 핵종 역시 생성된 핵종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방사능 총량은 밝히지도 않고 있다. 주변국과 어민들의 반대 목소리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IAEA, 제국주의 강대국, 일본 정부, 도쿄전력은 환경오염, 생태계 타격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안전하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핵사고를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및 원인을 '예상을 벗어나는 대규모의 쓰나미' 탓이라고 주장하며, 사업자의 배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부근의 타사 원전들의 쓰나미 피해는 적은데 왜 유독 후쿠시마 제1 원전에서만 침수와 대규모 사고가 발생했는지를 검토해 보면2), 도쿄전력이 그동안 안전성보다 경제성 제고에만 치중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초기대응 지체와 부적절한 대책, 사고 규모 축소, 수많은 은폐는 경제적 비용을 고려한 조치였고 피해를 크게 했다. 사고 처리 과정은 일본 정부의 묵인하에서 때로는 무능하게, 때로는 비민주적으로 철저하게 자본의 이윤을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해양투기 반대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후쿠시마 핵사고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제2, 제3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 반대를 넘어 탈핵으로 이어져야 한다.

 

2. 국제 핵 자본과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

 

자본은 기후위기뿐만 아니라 경제위기, 전쟁, 대유행 등 각종 위기에 처할 때마다 노동자에게 고통 분담과 희생을 강요하였다. 노동자에 대한 고통 전가는 동전의 양면처럼 자본에는 이윤추구의 기회이기도 하다. 경제위기 때에는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집적과 인플레이션을 통해 노동자 고혈을 도둑질하며 부를 증대시켰다. 그리고 기후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핵발전도 예외 없이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국제 핵 자본은 각국 정부의 지원정책(일정 이익을 보장받는 전력 요금제도와 핵사고 시 배상 금액 축소 및 국가 지원 보증제도 등)과 지역 독점체제를 보장받으며 규모와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핵 마피아’가 탄생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핵 자본은 핵 전공 학자, 퇴직 후의 재취업을 기대하는 관련 부처 공무원, 거대한 설비투자의 수주에 매달리는 건설·전기기기 등의 자본, 광고비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언론, 정치헌금과 선거 지원을 기대하는 정치인, 금융·보험업계 등으로 확대재생산 구조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내의 거대한 카르텔을 바탕으로 핵 자본은 반대파를 배제, 제거하는 한편, 핵 자본의 이익 유지 및 확대를 꾀하며, 핵산업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후쿠시마 핵사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배상 책임 부정을 위한 은폐, 축소, 정보 미공개는 핵 자본에는 안전성보다는 이윤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핵사고 직후 초기 긴급대처 없이 중요한 시간을 허비했던 이유 역시 그들의 무능함을 가장했지만, 자본 간 이해타산과 이익 관계에 의한 유착 때문이었다. 이것은 핵 자본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과 국가, 각종 지배기구의 행태이자 그들의 생존방식이다.

 

후쿠시마 핵사고 발생과 처리 과정은 자본주의에서 핵발전의 사회∙경제∙과학적 문제와 계급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고농도 오염수는 130만 톤을 넘어섰다. 지하에 매장하거나 기화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바다에 방류하는 것이 가장 저렴하여서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물론 지하에 매장하거나 기화시키는 방법 역시 근본 대책은 아니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과학기술로도 방사성물질의 방사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폐기물을 특수보관 장치에 넣어 지하에 격리, 보관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이미 많은 양이 누출된 세슘과 플루토늄 등의 핵종이 남아있는 지역은 생명체 생존이 불가능하며 반감기가 지나도 피폭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거리낌 없이 핵발전소 재가동 쪽으로 돌아섰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핵발전은 여전히 증가 추세이며, 핵무기까지 포함하면 지구상 핵물질의 양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한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윤석열 정권은 2022년 10월 ‘탄소중립 녹색성장 추진전략’을 통해 노골적으로 핵발전 확대를 공언했다. 문재인 정권은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의 시대로 가겠다'라고 선언했지만, 오히려 핵발전소가 늘어났다. 세계 5위의 원전 대국이며 가장 높은 원전 밀집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윤석열 정권의 '탈(脫)원전'을 계기로 전국에 총 25기의 원전에,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원전도 9기에 달하며 핵발전 비중을 늘리고 있다.

 

에너지 위기에 대한 부담을 줄이자는 핵발전은 무늬만 대체 에너지적 성격으로 치장하였을 뿐 자본 논리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상품생산에서 친환경에너지, 재생에너지는 환경보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윤추구를 위한 에너지 분야의 독과점 장치로 활용될 뿐이다.

 

3. 탈핵으로

 

후쿠시마 핵폐기물은 방사능 유출의 유일한 진원지가 아니다.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모든 국가에서 방사성물질을 항상 배출해 왔다. 핵실험, 핵발전소와 핵 재처리 공장 등 핵시설에서는 끊임없이 방사성물질을 방출하고 있다. 고체 상태의 핵폐기물은 드럼통 같은 별도 용기에 담아 장기 보관하지만, 액체나 기체 상태의 핵폐기물은 농도를 낮춰 하천이나 바다, 대기 중으로 내보내고 있다.

 

핵발전을 운영하는 모든 국가가 IAEA 지침에 따라 삼중수소 배출 농도 기준치를 각각 정한 뒤 이에 맞춰 바다에 냉각수를 방류하고 있고, 이러한 국제적 관례는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의 명분이 되어주고 있다. G7 또한 IAEA의 검증을 지지하면서 중대한 핵사고에 따른 핵폐기물의 해양투기를 국제사회가 승인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는 핵을 이용하며 생태계로 위험을 전가해 온 핵 자본의 핵발전 공조 시스템의 결과이다. 핵발전 공조 시스템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이윤 중심의 시스템으로 어민의 생업 위기와 발전소 노동자와 주변 지역 주민들이 피폭을 경시하고 은폐한다.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핵무기, 핵발전, 방사능 유출, 핵폐기물 투기는 더는 사고가 아닌 일상적인 위험의 양상으로 계속될 것이다.

 

찬(贊)핵 진영에서는 이미 국내외 원전의 정상적인 가동에 따른 삼중수소를 포함한 냉각수가 방류되고 있고, 그 양이 후쿠시마 오염수가 포함하고 있는 삼중수소의 양보다 훨씬 많다며 오염수의 안전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후쿠시마 핵폐기물 투기에 대해 의견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후쿠시마 핵폐기물 투기에 문제가 없어야 국내 핵발전 시설도 문제가 없다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즉, 국제 핵 자본에 해양투기는 지속해서 핵을 이용한 이윤추구를 해야 하는 핵 자본의 생존 문제로 ‘안전한 원자력’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핵 자본과 관료 집단은 자본 이윤 획득의 정당성과 핵의 위험성을 희석하기 위해 자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처리수, 다핵종 제거 설비 등의 용어로 마치 핵폐기물이 아닌 핵종이 제거된 듯한 안전한 ‘처리수’로 둔갑시키고 있다.

 

하지만, 방류(대안을 고려하여 특별한 불확실성이 없는 상황에서 모아둔 물을 흘려보냄)와 투기(대안을 고려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확실성을 안고 버리는 비정상적인 처리)는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일본 정부에서 부르는 ‘다핵종 제거 설비’ ALPS(Advanced Liquid Processing System)는 핵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농도를 저감하는 장치에 불과해서 핵종이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삼중수소, 탄소-14는 줄일 수도 없다. ALPS에 대한 검증도 남아있는데, 도쿄전력은 30개 핵종만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처리수’라고 부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희석해서 투기하든, 그렇지 않든 방사능의 양은 변함이 없다.

 

후쿠시마 핵사고와 해양투기는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핵 문제와 핵 자본,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반일 감정에 기반을 둔 해양투기 반대 운동은 주체의 문제, 핵에 대한 위험성 간과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기후 위기와 탈핵 해결의 큰 걸림돌이다.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를 자행한 일본 정부와 그들에 찬성한 윤석열 정권에 맞서 한일 노동자들의 연대와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탈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코뮤니즘이 일국에서 불가능하듯이 핵, 기후, 환경 문제 역시 국가 단위를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4. 나오며 - 탈핵은 코뮤니즘에서만 가능

 

이처럼 자본은 기후위기와 마찬가지로 핵 역시 이윤추구의 대상으로만 이용할 뿐, 방사능 유출, 생태계 보전과 종 전체에 대한 위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자본의 이윤추구 대상이 된 핵은 지속해서 방사능 유출과 핵전쟁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계급적 성격을 띠듯이 핵 역시 마찬가지이며, 지배계급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양투기 반대를 넘어 탈핵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와 민족주의 극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핵 자본을 비롯한 자본의 이윤추구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멸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 탈핵으로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핵 자본과 각국의 부르주아 정부는 탈핵과 환경적 요구에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문제 본질은 자본 이익에 반(反)하는 요구를 정책으로 시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후쿠시마 핵사고와 해양투기가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없이 부르주아 정부에 요구·기대하는 것은 방사능 오염과 기후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일 뿐이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상품으로 만드는 약탈과 착취의 생산이 지속한다면, 인류를 포함한 종 전체가 탈출구 없는 멸종의 길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결국, 선택지는 코뮤니스트혁명이냐, (종의 멸종을 포함한) 생태계 파멸이냐의 갈림길이다. 부르주아지는 자본 운동을 억제하거나 중단시키는데 조금의 이해관계도 없다. 오직 기후위기, 환경파괴, 종의 멸종을 향해 폭주하며 달리는 자본의 운동에만 전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핵 오염과 기후위기를 비롯한 각종 위기,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자본주의 폭주를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자본의 무한이윤 경쟁은 기후위기가 한 국가만의 대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혁명만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인류, 생산 및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건설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이윤추구 체제를 넘어서지 않는 대안과 정책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구체적 전망에 관한 대안 없이 막연하게 반(反)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핵폐기물 투기 세력인 한일 자본가정권 타도를 위한 한일 노동계급 연대와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 착취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지구 파괴와 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코뮤니즘만이 인류와 지구를 구할 수 있다.

 

핵폐기물 투기, 핵 오염, 기후재앙! 자본주의가 원인이다!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으로 멈출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삶과 지구를 파괴한다.

혁명을 통한 코뮤니즘만이 지구와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다!

 

2023년 9월 22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주>

1. 불안정 핵종이 자체적으로 붕괴하면서 방사선을 배출해서 안정 핵종이 되려고 한다. 이렇게 붕괴하면서 핵종이 갖고 있던 방사선을 방출하여 처음과 비교했을 때 방사능물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간을 반감기, 반감기는 방사능이 절반 줄어든 것에 불과해서 반감기가 지났어도 피폭 위험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2. 후쿠시마 제1 원전의 1, 2, 3, 4호기는 해발 10m의 위치에 건설되어 있는데, 비상용 디젤발전기와 같은 주요 설비를 밀폐성(방수성)이 높은 원자로 건물이 아니라 낮은 터번 건물의 지하에 설치하였다. 게다가 예상 쓰나미의 높이도 최고 5.7m로 낮아, 후쿠시마 제1 원전 부지는 쓰나미에 4~5m 침수했다. 이 때문에 지하에 있던 비상용 디젤발전기가 작동 불능에 빠졌다. 1~4호기에서 약간 떨어진 5, 6호기의 경우, 해발 13m에 있었고 지상 3m 정도에 있었던 6호기의 비상용 디젤발전기 1대가 작동하여 사고 직후에 곧 안정화를 꾀할 수 있었다. 1~6호기의 비상용 디젤발전기 총 13대 중에 작동한 것은 오직 이 6호기의 1대뿐으로, 해수에 의한 냉각방식이 아닌 공랭식의 발전기였다.

후쿠시마 제1 원전으로부터 약 10km 남쪽에 있는 일본 원자력 발전회사의 후쿠시마 제2 원전 지역에도 예상 쓰나미 높이 5.7m를 넘는 최고 14m의 쓰나미가 닥쳤다. 그러나 주요 건물의 대부분이 해발 12m이상에 있었으며, 또 증기를 냉각시키는 바닷물을 취수하는 펌프의 주변에 측면 방호벽도 건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치 덕분으로 비상용 디젤발전기도 3대 중의 2대가 작동하여 큰 사고에 이르지 않았다. 건설 당시에는 예상 쓰나미 높이도 4m에 불과하였으나, 2007년에 발생한 니이가타현 주에쯔오끼(中越沖) 지진을 교훈으로 추가로 강화하는 대책을 도입하였다. 북쪽의 오나가와(女川) 원전을 소유하고 있는 토후꾸(東北)전력의 경우, 869년에 발생한 대지진까지 연구하여 예상 쓰나미 높이를 9.1m로 높혔다. 3월 11일의 쓰나미로 이 원전도 일부 침수되었으나 부분적인 피해에 그쳤다. (장정욱 마쓰야마대 경제학부 교수, ‘후쿠시마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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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부르주아 선거 참여가 아닌 노동자 투쟁 확산,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부르주아 선거 참여가 아닌

노동자 투쟁 확산,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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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9월 12일 열린 임시 중앙집행위원(이하 중집) 회의에서 2026년 지방선거까지 연합정당 건설을 목표로 2024총선에서는 연합정당 건설부터 정책연대, 후보단일화, 공동 선거운동 등의 모든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형태로 총선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중집 안으로 승인했다. 또한,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과 4개 진보정당(노동당·녹색당·정의당·진보당) 대표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2024년 총선에서 모든 진보세력과 함께 단결하여 투쟁할 것”을 합의했다. 이들은 2024년 총선에서 진보 정치세력의 연대연합 실현을 위해 ‘민주노총 총선방침을 존중하여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총선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민주노총은 9월 14일 77차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중집 안과 같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을 확정했다. - 편집자)

 

우리는 다시 한번 민주노총의 정치·총선방침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선거주의와 조합주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 계급적 연대 강화를 통한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를 호소한다.

 

이번 중집 안은 여전히 선거주의와 야권연대 세력에 날개를 달아준 단지 봉합하는 방침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파산선고를 받은 실패한 진보(좌파) 정당 운동과 선거 전술에 대한 반성 없이, 야권연대/부르주아 정치로의 투항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정치세력 사이의 사상/노선 차이를 통일할 강령과 실천적 검증을 통한 정치적 신뢰 없이, 계급 정치의 장이 아닌 부르주아 정치 서커스 판에 뛰어들어 연대연합 실현과 연합정당을 건설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선거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민주노총 지지 후보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투표했다. 이것이 부르주아 선거에 포섭된 계급의 현실이며, 그동안 민주노총과 이른바 진보 정당들이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한 선거주의-조합주의 중심 노동자 정치의 결과다. 이들의 곁에는 ‘계급의식’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는 ‘선거주의 좌파’가 늘 함께하고 있다. 말로는 선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참여하는 선거는 훌륭한 전술로 둔갑한다. 그들은 노동자 정치를 노동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표 구걸하는 것을 ‘선거 투쟁’으로 미화해 왔다.

 

그동안 이러한 선택을 반복해 온 노동계급의 현실은 어떠한가?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했고, 누구도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가짜 ‘노동 존중’을 표방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노골적으로 친(親)자본 정책을 펼치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온갖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또한,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좌파/노동 정당들이 자신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그들은 제대로 된 반성도 없이 선거철만 되면 선거연합, 독자 후보, 비판적 지지까지 반복되는 선거 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노동자 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 위해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노동계급 정치, 코뮤니스트 전망을 제시해 왔다.

 

부르주아 의회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계급에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자신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고, 투표 행위로 자신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표가 필요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의 부르주아 선거에서도 주인공은 ‘유권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자본’이고, 모든 선거 과정과 결과는 그들이 정한 규칙대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희대의 코미디와 같은 선거법을 만들고 마음껏 농락한 자들이 바로 노동 악법을 함께 만들고,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또한, 그들은 장애인, 빈민,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체제를 지키는 수호자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정치에서는 대중 투쟁의 성과조차도 전문 정치인들이 위임받아 정파적으로 이용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르주아 정치에 기댄 투쟁이 어떠한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투쟁으로 지켜내지 못한 권리가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지는지를 수없이 경험해 왔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일상에 대한 지배를 지배받는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이른바 ‘민주적인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혁명의 과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제도 포함)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떠한 혁명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미래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 선거 사기극에 맞서 선거 참여 방침이 아닌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노동자평의회와 혁명당 건설에 나서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대의제와 수동성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 정치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과 계급적 연대를 통한 노동자 자기 조직화에 달려 있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니라 집단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노동 탄압 생존권 위협! 윤석열 자본가 정권 타도!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위기 전가-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2023년 9월 14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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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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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일은 부르주아 총선일이었다. 이날 한국에서 처음으로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는 이들이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를 열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심 있는 다양한 부문과 연령대의 동지들이 참여하여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서는 진정한 노동계급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류가 심각하게 경험한 감염병 대유행, 기후위기, 생태파괴, 일반화된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부르주아지의 온갖 처방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더욱 심화하였고, 그 부담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대유행에 이어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자본주의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장기간 지속해 온 위기 속에서 격렬해지는 제국주의 대립과 이윤추구 경쟁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과 빈곤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의 질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작동 결과이며. 이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 없이는 그 어떤 전망도 열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세계 노동계급은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혁명이냐, 제국주의 전쟁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이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뿐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 국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도 노동계급 내부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본의 좌파로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는 데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 선거 서커스에 ‘노동자’ 이름을 팔아 참여해 선거 환상을 퍼트려 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냐 혁명이냐’라는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적 의도와 관계없이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코뮤니스트혁명의 직접적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분들과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코뮤니스트 정치'를 소개하고, 자본주의 쇠퇴와 전쟁의 시대! 코뮤니스트 혁명의 전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제안)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는 위와 같은 취지로 개최했고, 이날은 특별히 선거 당일이었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강좌를 시작했다.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노동자 정당 집권인가, 노동계급이 직접 통제하는 노동자평의회-자기 권력인가.

 

노동자 투쟁을 약화하고 부르주아 정치에 의탁하는 진보좌파 정치인가, 자본주의에 맞선 계급투쟁과 부르주아 정치를 타파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인가,

 

체제 안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개혁하는 체제 전환인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착취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코뮤니스트혁명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과 역사적 쇠퇴’에서부터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인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혁명’을 이해해야 한다. 첫 강좌에서는 근본적 질문으로 “코뮤니즘 :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가능한가”와 구체적 실천으로 “코뮤니즘을 향한 투쟁,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해 연속으로 강좌를 진행했다. 강좌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코뮤니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가능한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연설할 때마다 자유, 평화, 번영을 외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미래는 거꾸로 착취, 전쟁, 쇠퇴와 종말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의 사상,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먼저 자기 입장과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고 말을 시작해야 한다. 알기 쉬운 정치이념으로 보수주의, 자유주의, 발본주의(맑스주의)로 구분한다면 나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구도를 거부하는 발본주의자다. 이 설명은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자유를 외치는 윤석열은 어떤 자유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따져야 한다.

 

제목을 뒤집어 보면 ‘평등해야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계급사회의 역사였기 때문에 계급 사이의 불평등과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인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한 맑스의 사상이론과 혁명적 실천을 아는 길이 배움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세철)

 

“여전히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反)혁명적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 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과제, 계급투쟁(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지난한 계급투쟁 속에서 주체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과정 일 수밖에 없다.

 

투쟁하는 노동자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하려면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혁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노동계급 자기 권력에 관해 이해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구분하고, 혁명을 주도할 계급조직인 혁명당과 노동자평의회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반(反)코뮤니즘에 맞서 사상투쟁을 하면서 계급의식과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코뮤니스트 정치는 위와 같이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밝히고, 노동자 운동의 당면문제를 해결하면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투쟁의 정치이다.” (이형로)

 

많이 늦었지만, 세계혁명, 국제주의, 코뮤니즘, 맑스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이야기를 나눌 강좌와 토론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자본의 좌파에 맞선 사상투쟁,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혁명적 실천이 절실한 시기에 [코뮤니스트 강좌]가 계급투쟁의 새로운 주체들에 기준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다음 강좌는 5월 15일에 “자본주의 위기와 대안 사회”라는 주제로 열린다.

 

 

 

▶강좌 신청 및 문의 :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  communistleft@gmail.com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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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2강 "자본주의 위기와 대안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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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2강
"자본주의 위기와 대안 사회"
 
강사ㅣ 오세철
일시ㅣ 2024년 5월 15일(수요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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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19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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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50개 이상의 분쟁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야만적인 잔혹 행위는 이 체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체제가 생존하는 방식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결과는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기존 자본에 비해 잉여가치의 양이 감소할수록 이 쟁탈전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볼 뿐인데도, 자본주의는 매일 전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세계 경제 위기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과 빈곤으로 고통을 겪게 할 것이다. 착취체제는 계속해서 지구를 황폐화하고 기후 재앙을 일으킬 것이며, 모든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첨예화되는 제국주의 대립과 이윤추구 경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에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생활수준을 강요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잔인함과 야만성을 더 많은 곳으로 확산할 뿐 인류의 삶에 미래를 제공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 인류 공동체를 위한 사회,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차 세계대전을 종식한 것은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전복함으로써 제국주의 긴장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인류에게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스트」 19호는 2024년 암울한 정세 속에서 노동계급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2024년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끔찍한 곳으로 보인다. ... 자본주의가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전쟁만이 아니다. 석유 매장량을 보호하거나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추진, 점점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 물 공급 분쟁, 리튬과 같은 원자재 확보에 이르기까지 환경 파괴는 전쟁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고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며, 그 자체가 전쟁의 원동력 중 하나이다. ...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가 되고, 정치 위기가 환경 위기나 군사 위기, 인도주의 위기가 되어 경제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등 위기를 양산하는 체제이다.”

 

“해결책은 있다. ... 그들은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분열될 수도 있지만, 하나의 중요한 방식으로 단결되어 있다. ...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통으로 착취당하는 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 쇠퇴의 세월은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점점 더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임금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할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다.

 

전 세계적으로 수십 년 동안의 계급적 침묵 끝에 노동자들이 더는 긴축과 생활수준 저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수년 동안 볼 수 없었던 파업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위기가 심화할수록 자본가들은 국내외에서 더 큰 폭력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국제주의자들의 대응은 이에 맞서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2024년 과제’)

 

□ 코뮤니스트 정치에서는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는 관점에서 한국 총선을 평가했고, 윤석열 정권이 총선용으로 기획한 의과대학 증원에 대한 비판과 근본적 대안을 제시했다.

 

“부르주아 선거는 철저하게 계급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지배 권력을 재편하는 목적에 맞게 작동했고, 노동계급의 분노는 또 다른 부르주아 분파를 지지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 부르주아 선거는 착취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일상의 계급투쟁에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누가 이기든 본질에서는 자본주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선거 이후 정치단체 대부분은 선거 득표 분석, 선거용 이합집산 비판, (아전인수식) 정권심판론 분석, 진보정당 및 노동자 정치세력화 몰락 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중요한 선거주의 폐해와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에 대해서는 반성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인 지금은 부르주아 선거제도(민주주의)가 노동자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으로 고착화하여 체제 위기 극복의 필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정치를 타파하는 관점에서 선거에 접근해야 한다.” (이형로,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의대 증원은 지역 사이, 의료의 종류, 기관별 의료공급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여 노동자·인민의 의료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총선 표심, 의사 집단은 기득권 지키기로 흘러가면서 시장 법칙에 매몰된 보건의료의 실태를 교묘히 숨기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공공의료 확충은 국가와 자본이 존재하는 이윤 중심의 의료체계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도 공공의료 확충은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이다. 자본은 노동력 재생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겼듯이, 건강과 생명도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 의료영리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공공의료 확충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진실은 의료를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 집단 사이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노동자·인민은 누구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인민의 건강권에 기반을 둔 실질적인 공공의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노동계급과 환자의 건강권 투쟁은 자본주의와 착취기반에 대한 도전이자 자신들의 기득권에만 혈안이 된 의사집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다.” (윤태상, ‘의과대학 증원 찬반의 허구’)

 

□ 특집,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에서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지금, 진정한 국제주의가 무엇인지 질문하며, 국제주의 원칙과 역사적 쟁점을 확인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데 관심이 없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모두, 민족주의 흐름에 맞서는 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반전 투쟁이 사회주의로 향하는 투쟁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전쟁은 일단 발발하면, 그것에 반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특히 자신이 직접 겪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때때로 생존하는 것조차 힘들다. 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가자와 이스라엘에서, 벌써 전쟁을 거부하고, 비난하고, 폐기 처분한 이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종류의 거부권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야 함을 지지하면서도, 평화주의와 자유주의, 인도주의에 근거한 개인적 행위들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을 주장해야 한다.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개별적 행위들이 아무리 영웅적이고, 자기희생적이고, 위험을 감수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쟁의 원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국제주의에 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공개회의 : 대차대조표’)

 

“트로츠키주의자든, 스탈린주의자든, 마오주의자든 이 모든 그룹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전술적 편법을 받아들인다. 사회민주주의 정당 입당, 좌파 정부 참여 또는 지지, 소련이나 중국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믿음, 통일 전선 또는 인민 전선 옹호, 또는 단순히 민족해방에 대한 지지 등을 통해 '선택적 국제주의'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 다음 질문에 대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국'이든 '억압국'이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反)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해방 전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터키와 중국 같은 곳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력(국가 또는 비국가) 간의 모든 갈등이 레닌 시대보다 훨씬 더 발전한 제국주의 체제에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의 표면상 국제주의 입장이 일시적인 정치적 편의주의이든(상황이 바뀌면 버려질), 진정으로 새로운 방향이든, 자본의 좌파 조직은 오래전에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들은 과거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결국 그들이 모집한 노동자와 자신을 자본주의 사각지대로 이끌 수 있는 공식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1915년 테제는 당시 그들의 견해를 가장 완벽하게 드러낸 것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들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가 더는 ’자본주의의 연장이나 확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이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는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더는 적절하지 않다. 국가의 억압에 대한 해결책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낡은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전체에 대항하는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에 달려 있다. 이들은 ’민족 자결권‘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제국주의 시대에는 실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국가가 더는 ’정치 경제적 단위의 성격‘을 갖지 않는)에도 적용될 수 없는 ’권리‘인 타락한 제2 인터내셔널의 유산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이 슬로건이 어떻게 ’사회혁명적 관점을 대체‘하고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분열로 이어지는지 경고한다. 그 결과는 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많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계급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렸음을 알 수 있다.(여전히 후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혁명적 소수일 뿐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라덱의 제국주의에 관한 테제(1915)

 

□ 특집, 레닌 사후 1세기 : 공헌과 오류에서는 레닌 사망 100주년을 맞아 레닌의 공헌과 오류, 그의 유산에 대한 왜곡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국제주의자들이 방어해야 할 원칙을 확인했다.

 

“레닌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그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요점을 보여준다.

 

• 당: 레닌은 계급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종종 동질적이고 독단적인 정당으로 묘사해 왔지만, 이렇게 묘사된 당은 스탈린주의 신화다. 볼셰비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상황에 항상 대응하며 발전하였다.

• 소비에트: 이미 1905년에 레닌은 당과 소비에트가 다가오는 혁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1917년에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켰다. 레닌은 최선을 다해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이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 국제주의: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의미를 이해하고, 노동자 운동 내에서 쇼비니즘, 민족주의, 사회애국주의 경향에 대항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논쟁은 레닌이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종종 추상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 자결권이 반동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했다.

두 번째 조건은 이른바 많은 '레닌주의자'들이 종종 잊어버리는데, 이들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의 '통일'과 '인민' 전선 개념을 받아들여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레닌 시대부터 모든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경쟁과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면, 자본주의 발전은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지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레닌과 레닌주의 ’)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필두로 한 좌파가 특히 자본주의 주변국의 민족해방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잠재력에 대해 심각한 착각과 왜곡을 했던 레닌의 오류('가장 약한 연결고리' 이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비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좌파들은 민족주의 구호와 한 제국주의 진영을 다른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지지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제국주의 분쟁의 총알받이가 되게 하려는 전쟁 선동을 펼치기 위하여 이러한 오류를 활용해왔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이는 레닌이 아주 단호하게 방어했던 혁명과 국제주의 관점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사실 레닌은 끈기, 조직에 대한 통찰력, 신념과 전술 면에서 존경을 받는 노동계급의 투사였다. 지난 세기 초에 혁명적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레닌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 운동, 투쟁, 국제적 논쟁에서 일어나며, 이 당시에는 레닌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했다. 맑스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출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행동하고 그 엄청난 업적을 달성할 수 없었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건설에 헌신하고 전투적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만 혁명적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레닌이 짧은 생애 동안 조직, 정치, 이론, 전략적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하고 유산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였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레닌 사후 1세기)

 

□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에 관한 국제주의 입장의 분석 글을 실었고, □ 이론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하)’를 실었다. 이 밖에도 국제 정세,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 독자의 소리 등 많은 글을 실었다.

 

자본주의 쇠퇴기,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시기에 「코뮤니스트」 19호를 발행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한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을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정치적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강요하는 모든 희생을 거부하고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에 나서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대량학살과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

 

2024년 5월 1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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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4년 19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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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4년 19호
 
 
차례
 
 「코뮤니스트」 19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정치
▸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 의과대학 증원 찬반의 허구 
▸ 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비판 
▸ 2024년 과제 
▸ 3.8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 
▸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 특집,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 국제주의에 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공개회의 : 대차대조표 
▸ 좌파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지는 자본주의의 독약이다 
▸ 프라하 "반전 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내는 성명 
▸ 라덱의 제국주의에 관한 테제(1915) 
 
□ 특집, 레닌 사후 1세기 : 공헌과 오류
▸레닌과 레닌주의 
▸레닌 사후 1세기 
 
□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
▸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2) 
 
□ 국제
▸ 생계비 위기 = 자본주의 위기 
▸ 부르주아 정당은 분열되었으나 노동계급에 맞서 단결했다 
▸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 파업 - 전 세계 계급투쟁의 연장 
▸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와 녹색 자본주의의 신화 
 
□ 중동 전쟁
▸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 중동 전쟁. 레닌주의와 얽히거나 얽히지 않기 위해? 
▸ 부르주아 구호 뒤에 숨겨진 현실 
 
□ 이론
▸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하)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 독자의 소리
▸ 독자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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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위기 전가-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 가격 :  20,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코뮤니스트」19호는 2024 메이데이 집회에서 배포/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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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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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부르주아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 결과는 부르주아 정치 관점에서 윤석열 정권의 패배-야권의 승리이지만, 노동계급 입장에서는 누가 이기든 기대할 게 전혀 없는 '자본주의 승리'이다.

 

지난 수십 년의 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총선도 노동자 투쟁과 자기조직화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분노는 투표를 통한 '정권 심판론'에 갇혔다. 윤석열 집권 2년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 속에서 자본가 독재의 폭력성과 총체적 무능을 드러냈다. 물가 폭등, 실질임금 하락, 노동조합 탄압, 복지 후퇴로 생활 조건이 계속 악화하고, 사회적 참사에 대한 책임 회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옹호, 채상병 사건 수사 방해, 총선용으로 기획된 의대 증원 카드의 실패 등으로 안전한 삶마저 위협받는 상황은 노동자 투쟁-반격의 수준에 따라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면서 계급투쟁 부활과 정체성 회복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선거는 철저하게 계급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지배 권력을 재편하는 목적에 맞게 작동했고, 노동계급의 분노는 또 다른 부르주아 분파를 지지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총선에서 두 번 연속 다수당을 차지한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이끌던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권력'이었다. 이들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가 기반을 두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편입되기를 갈망하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을 꾸준히 유지한 자본가 정권이었다.

 

선거 이후 자본가 정권의 경찰은 한국옵티칼 결의대회서 금속노조 조합원에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17명을 연행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 권력기관은 의회 밖에서 국가 폭력을 행사하는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부르주아 선거는 착취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일상의 계급투쟁에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누가 이기든 본질에서는 자본주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이번 총선은 이미 오래전 파산한 진보좌파 정치세력을 부르주아 정치에 더욱더 종속하게 하였다. 그동안 부르주아 정치세력으로서 자본의 좌파 역할을 하던 정의당이 몰락하고, 그들을 대신해 민족주의-조합주의 정치세력인 진보당이 민주당과 손잡고 부르주아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태생적으로 의회주의가 지배하는 노동당은 원칙 없는 후보 전술로 노동자 운동 내부에 선거주의만을 강화했다. 후보를 내세워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노동자 투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성이 후보 중심의 전술을 강제하고, 위로부터의 공동전선, 심지어 부르주아 세력과의 선거연합(위성정당을 반대한 정의당도 부르주아 정당)을 허용하고, 결국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며 표를 구걸하는 선거주의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국가보안법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코뮤니스트 정치를 전면화해야 함에도, 다시 과거를 반복하며, 부르주아 시민단체 수준의 요구를 공약이라고 내걸고, 노동자 투쟁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개입이야말로, 노동계급 정치를 부르주아 정치에 종속시키는 행위이다.

 

선거 이후 이른바 진보좌파, 사회주의 단체 대부분은 선거 득표 분석, 선거용 이합집산 비판, (아전인수식) 정권심판론 분석, 진보정당 및 노동자 정치세력화 몰락 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중요한 선거주의 폐해와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에 대해서는 반성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인 지금은 부르주아 선거제도(민주주의)가 노동자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으로 고착화하여 체제 위기 극복의 필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정치를 타파하는 관점에서 선거에 접근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노동계급을 속인 낡은 ‘선거주의’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낡은 운동과의 단절 속에서만 새로운 운동과 주체를 창출할 수 있다.

 

부르주아 선거 서커스 쇼는 끝났다. 선거는 짧지만, 자본주의 위기는 길고 더욱 깊어지고 있다. 노동계급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선거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고 계급투쟁을 이끌 노동계급 정치의 부재이다. 노동자들은 '정권심판'의 환상을 넘어서야 한다. 노동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도 투표나 야권연대를 통해 얻을 수 없다.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투쟁 없이 정권심판 열망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선거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투쟁에 나서야 한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부르주아 정치에 청원하는 곳이 아니라 집단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선거주의, 조합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노총의 정치·총선방침을 근본적으로 반대해왔다. 진정한 노동계급 정치를 위해 선거주의와 조합주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 계급적 연대 강화를 통한 노동계급 자기조직화를 호소해 왔다. 선거 이전에도, 선거 이후에도 노동계급의 과제는 변함없다.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멈출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본권과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현재의 모든 위기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하는 한 경제위기, 전쟁과 학살, 생태 파괴, 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해결책은 오로지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 코뮤니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단절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위기 전가-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2024년 4월 25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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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2024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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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윤석열 정권과 서울시는 장애인들의 절박하고 정당한 투쟁을 ‘불법’, ‘민폐’로 매도하고 혐오를 조장하면서, 장애인들을 대화 상대가 아닌 제거 대상, 지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원천으로 지목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은 '권리 중심 일자리' 최중증 장애인노동자 400명을 해고했고, 서울교통공사는 오세훈의 지침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그리고 각 장애인권 활동가들을 상대로 지하철 탑승 시위와 관련하여 9억 9십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장애인의 정당한 목소리를 막강한 공권력도 모자라 금전적 압박으로 틀어막기 위한 목적이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위한 ‘전장연의 시위가 비장애인의 불편과 비용 낭비를 초래한다’라는 논리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손실을 초래한다’라는 자본가계급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권리는 이동할 권리,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이다. 이런 점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허울뿐인 정의와 공정으로 치장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에도 해당한다. 이는 장애인 권리투쟁에 노동계급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사이 협상은 계급적 역량과 투쟁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데, 장애인 권리 투쟁은 더욱 강력한 계급적 연대가 필요하다.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는 노동자의 파업과 같이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위한 실질적인 협상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은 장애인 권리 요구와 함께 20년 넘게 지속해왔지만, 이번처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 탑승 등 노동과 일상 공간으로 나와 자신을 집단으로 드러냈을 때 그나마 사회적 관심과 논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애인 복지 선진국의 장애인 권리도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결과이지, 자본주의 사회와 정부의 선의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장애인 권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투쟁과 연대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대공황 시기에 견고한 단결과 파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점거 투쟁’을 시작했고, 자본가들은 그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법률에 호소하며 경찰을 동원했다. 하지만, 자본가에 맞서 파업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맞서 투쟁을 지속했고 투쟁 형태를 발전시켜왔다. 장애인들의 대중교통과 입법기관 점거 투쟁은 생산의 주인인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생산을 멈추듯이 사회의 주인인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동 수단을 멈추고 법 제도에 압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수단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한 잉여노동이 이윤의 원천이 된다. 이윤추구 압박은 노동강도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노동강도는 높아지며, 이러한 노동강도와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장애 개념에 대한 기원이었다. 장애인을 ‘사회적 무능력자’로 낙인찍어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인식의 바탕에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자본의 경제적 논리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치부하고 부양의무제 등으로 거의 모든 것을 당사자와 가족이 책임지게 한다.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치료라는 명목 등으로 개인의 개선에 방점을 찍는 정책을 추진한다. 장애의 문제를 개인적인 부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보는 맑스주의 관점이 필요하다.

 

자본은 안정적이고 원활한 노동력을 공급받고, 노동자의 투쟁을 억제․ 통제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실업자를 필요로 한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장애인은 일반 실업자보다 노동시장에 편입하기 어려워서 그 일부가 노동시장에 편입되더라도 불안정노동자로서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내해야 한다. 노동과정에 편입하지 못한 대부분 장애인은 실업자 또는 사회와 격리 수용되어 살 것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의 문제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문제 제기뿐만 아니라 가치 창출 기여도에 따른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필요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은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 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파괴해야 하는 싸움이다. 장애인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둘 다 아주 중요하다.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한 권리투쟁은 장애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고 노동계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국가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삭감한다.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약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후퇴하게 되면, 그 고통은 취약한 곳으로 향한다. 장애인과 노동자가 견고하게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를 통해 공격을 강화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는 사람들이 할 수 있어야 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특정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본주의는 특히,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잉여와 생산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는 신체적 손상을 가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와 자본이 부여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코뮤니즘은 사람들이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원칙에 따라 생산의 자체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배타적 관행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기반이 되는 소외의 논리를 극복한다. 손상과 같은 요소를 떠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재생산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통합되는 것이 코뮤니즘의 목표이며,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장애해방과 노동해방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만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이 장애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이 필요하고, 이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따라서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 투쟁에 나서야 한다.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자!

장애인과 노동자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4년 4월 19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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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 위기 전가, 생존권 위협, 노동 탄압에 맞서

자본주의 위기 전가,

생존권 위협, 노동 탄압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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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와 윤석열 정권의 ‘계급전쟁’ 선포

 

지속하는 경제위기, 기후위기,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는 동안 세계의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에 더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랜 기간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고, 전쟁과 팬데믹이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 수준의 급격한 하락과 심각한 생계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정권은 취임 초부터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과 화물연대노동자 파업을 탄압하며 자본가 정권의 본색을 드러내더니, 건설노조 탄압, 집회 시위의 자유 제한, 온갖 노동 개악을 시도하며 노동계급에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일련의 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빈부격차가 커졌는데도, 오히려 부자 감세, 대기업 규제 완화, 민영화 추진, 복지 축소, 비정규직 양산, 노동시간 연장, 중대재해 처벌 완화 시도 등 노동계급에 위기를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노동 탄압의 상징이었던 옛 정권이 보란 듯이 무차별적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하고 있다. 자본가 정권, 자본가 단체, 반(反)노동 언론이 한 몸이 되어 더는 물러설 곳도 없는 노동자들을 향해 비열한 공세에 나섰다. 자본은 노동계급의 전투력이 약해지고 분열된 지금, 최대한 밀어붙여 양보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반노동 친자본 보수우파 일색으로 구성되어서가 아니라 탄생에서부터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위기를 떠안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은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적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이 체제는 전쟁에 의한 파괴를 통한 자본 가치의 대규모 평가절하 외에는 해결책이 없으며, 이윤율 하락의 더 깊고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세계의 지배계급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을 파괴하는 동안에도 이윤 창출을 위해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국익과 위기극복을 내세워 노동계급에 희생과 죽음만을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전쟁과 야만으로 질주하는 것은 이윤추구 체제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다. 이것은 잘못된 지도자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다.

 

윤석열 정권도 이윤추구 확대와 자본주의 위기 전가라는 자본의 요구로 탄생했으며, 이러한 요구를 노동계급에 폭력적으로 집행하는 자본가 독재정권이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 자본의 이익뿐 아니라 한, 미, 일 동맹 강화를 통해 세계 부르주아 분파의 요구에도 부응하고 있다. 첨예해지는 제국주의 패권 쟁투 속에서 미, 일 제국주의 세력의 이해관계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행보는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 조장,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등의 제국주의 전쟁 개입, 일본 자본과 지배계급을 위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적극 옹호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윤석열 정권을 포함한 세계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노동계급에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강요하는 어떠한 희생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과 제국주의 분쟁에서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침략자든 방어자든 모든 자본가 정권은 노동자 착취를 통제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싸워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착취자들과의 전쟁,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노동계급의 반격!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비용을 치르기를 거부할 때마다 자본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도 경제위기 심화에 따라 계급전쟁을 선포하고 노동계급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제 한국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멈출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본권과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현재의 모든 위기는 자본이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지속해서 공격할 뿐 아니라 전쟁과 생태파괴를 통해 지구 생명체의 미래까지 점점 더 위협한다. 이 모든 재앙은 자본주의 체제 존재 자체가 노동계급과 인류의 생존, 그리고 지구상의 생명체 존립과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대안은 ‘전쟁이냐 혁명이냐’이다. 해결책은 오로지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대체하는 것뿐이다.

 

생존권 투쟁 전면화! 계급적 연대 강화!

아래로부터의 투쟁 확산! 파업위원회 건설!

자본주의 위기 전가, 생존권 위협, 노동 탄압에 맞서

자본가 정권 타도-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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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중동에서의 대학살에 맞서

중동에서의 대학살에 맞서

민족주의를 넘어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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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하마스가 수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약 1,200명이 사망했고, 100명 이상 인질이 납치되었다. 이에 네타냐후 정부는 ‘길고 어려운 전쟁’을 선언하며 가자지구에 공습을 시작했다. 전쟁이 지속한 지 한 달을 앞두고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1만 명을 넘어섰고, 이 중 어린이 사망자 수가 절반 가까이 된다. 또 부상자 수는 2만 5408명에 이르고, 가자지구 내 건물 약 4만 채가 파괴되었다. 이 학살에서 대부분 희생자는 민간인이었다.

 

네타냐후는 2백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가자지구에 대한 전기, 연료, 각종 생필품 공급을 차단했고,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지구를 ‘잔해더미’로 만들어 버릴 거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자지구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군은 새로운 공격 단계에는 더 치명적인 새로운 공격이 포함될 것이라며 가자지구에 지상군 투입을 하고 있다. 이에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 시리아 등 ‘시아파 벨트’는 일제히 이스라엘을 향해 지상군을 투입하면 “(전쟁에) 개입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미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을 과시해 온 이스라엘에 추가로 군사 지원을 하기로 했다.

 

하마스의 전례 없는 공격은 자국뿐 아니라 중동 지배계급 사이, 세계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의 행동은 이스라엘에 억압받는 자국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 정부와의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NA)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냉전 시대에 이스라엘은 급진적 성격을 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입지를 약화하기 위해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하마스의 창설을 도왔었다. 1987년 팔레스타인에서 인티파타(민중봉기)가 일어나자, 1993년 가자지구와 서안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운다는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휴지조각이 되었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서안에서 허울뿐인 자치정부를 구성했으며, 이스라엘을 부정했던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부패와 관료주의로 인해, 급진적인 문구를 사용하는 하마스가 성장하게 되었다. 현재 마흐무드 압바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NA)도 부패와 무능으로 오랫동안 위기에 처해 있었고, 이스라엘 점령군과의 협력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에 하마스는 다른 저항 단체들과 함께 이스라엘 정부의 탄압과 도발 강화에 대한 반발을 구실로 자기 영향력 확대를 위해 무장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저항 세력의 지지를 받았을지라도, 얼마 전까지 하마스 정권에 맞서 단전, 식량 부족과 정권의 극심한 탄압에 항의하던 가자지구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사이 분쟁 논리에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를 중심으로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아브라함 협정을 흔들고, 자신을 지원하거나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해,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미제국주의의 시도였다. 이것은 하마스를 지원하는 아야톨라(ayatollahs) 이란 제국주의를 고립시키는 정책이기도 하다.

 

이에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지난 10월 7일 이스라엘을 공격한 후 방송에서 “저항자들 앞에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실체는 어떤 안전 보장도 해줄 수 없다. 당신들(아랍 국가들)이 이들과 서명한 모든 관계 정상화 합의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공격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전쟁 선포로 인해 이스라엘과 사우디 왕정과의 합의는 크게 복잡해졌다. 이 지역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에 맞서는 주요 강국인 이란은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하마스의 최근 작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란은 같은 시아파인 헤즈볼라와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에 속하는 아사드 정권을 지원해 왔다. 이란은 숙적인 이스라엘을 약화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중동 국가들과의 연대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마스의 공격에 따른 이스라엘의 전쟁 선포와 중동 지역 분쟁의 확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 군사적 긴장의 고조를 의미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다.

 

이 모든 참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자본주의 지배계급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의 결과이며, 양측 노동자들과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에 가혹한 고통과 희생만을 안겨주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자행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차별, 폭력으로 인해 대중의 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마스의 행동과 같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자국 지배계급을 위해 벌이는 테러와 살인은 부르주아 전쟁 논리이며 범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대학살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 정부의 야만적 보복은 반동적이고 폭력적인 지배계급의 전쟁 논리이며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이다.

 

양측에서 수십 년간 민족주의 선전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지배계급은 모두 이 문제를 끊임없이 부추겨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선과 악' 사이의 '성전'으로 묘사되는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는 이제 지배계급뿐 아니라 노동계급 안에도 넓게 퍼져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가장 해로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며, 민족/인종적 증오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산물이다. 세계의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야만적인 분쟁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항상 한쪽 편을 선택하라면서 '자국' 지배계급을 위해 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끼리 공격하고 죽이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든 팔레스타인에서든 노동계급은 자신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러서는 안 된다.

 

올여름 가자지구에서는 수천 명이 생활 수준에 대한 항의로 시위를 벌였고, 그전에도 하마스 정부에 맞선 파업을 벌였다. 이스라엘에서도 올해 공항 파업으로 공항을 중단시켰고, 그전에도 공공부문 파업으로 공항, 항구, 정부 기관이 폐쇄되었다. 비록 지금은 양측의 노동계급이 민족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논리에 갇혀 ’자국‘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을 전면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더 큰 학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계급적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양측의 착취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이 전쟁 고통과 대학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비롯한 양측의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과 국경을 넘어 투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강요하는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대량학살과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민족주의 반대! 대량학살 체제 타도!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멈추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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