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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난방비 폭탄: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다

난방비 폭탄: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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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에너지 파동은 자본 축적 위기의 또 다른 모습

 

북극권의 초강력 한파에 이은 난방비 폭탄이 지난 겨울 북반구를 덮쳤다. 환경위기, 기후위기의 도미노는 물가상승과 맞물려 에너지 가격 폭등을 더욱더 부추겼다. 에너지 가격 폭등 원인으로 지목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기보다는 자본 위기의 산물이었다. 그런데도 세계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산업 적자라는 명분으로 가격 폭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윤석열 정권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공공요금 인상을 예외 없이 진행하고 있다.

 

난방비 폭등에 책임 있는 정부와 부르주아 정치권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책임회피를 위한 네 탓 공방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이는 지배계급이 에너지 자원과 환경/기후위기에 대한 원인진단과 대책을 내놓을 능력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오로지 생존과 축적에만 관심을 둔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된 세계 경제 대공황을 대자본은 오히려 집적과 집중의 기회로 이용했고, 노동계급에는 노동강도 강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임금 감소, 생계비 위기의 고통을 떠넘겼다. 따라서 자본 축적 위기를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과 착취로 해결하려는 지배계급에 에너지 자원에 대한 근본 대책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전 세계적인 환경/기후 위기는 자본 축적 위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인플레이션, 실질임금 하락과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의 단적인 사례가 난방비 폭등이다. 난방비 폭등으로 드러난 국내 LNG 직도입 자본(GS에너지, SK E&S, 포스코에너지, 한화에너지, 발전사 등)은 천문학적인 영업 이익과 당기 순이익을 올렸지만, 노동계급은 삼중의 고통 속에서 추운 겨울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

 

앞서 말했듯이 난방비 폭등은 노동계급에는 재앙이지만, 자본에는 이윤 창출 기회이기도 하다. 에너지 자원의 폭등 현상은 환경/기후위기가 일반화된 자본주의 쇠퇴기에 언제든 나타난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배계급은 이러한 자본 축적의 지속적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계급전쟁을 선포하며 선제공격하고 있다.

 

에너지 위기에 맞닥뜨린 지배계급은 얄팍한 땜질 처방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면서도 본질에서는 자본 축적의 기회를 창출하고 보장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특히 윤석열 정권은 에너지 위기가 핵발전에 대한 저투자에서 기인한다며, 핵발전 확대안을 제시했다. 이것은 기후위기와 에너지 자원에 대한 자본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이윤 추구 체제에서 비롯된 환경/기후위기 상황에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위기를 이윤 창출 기회로 활용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축적과정이 위기라는 점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작용하는 자본구성의 고도화와 평균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본 축적 과정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그 결과 에너지 대란에서 나타나듯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과 사회의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생산의 근본적 필요성 사이의 모순은 더욱 격렬해진다.

 

앞으로도 빈번하게 발생할 에너지 대란에서 이윤이 목적인 생산체제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책을 요구한다고 해결책이 나올 리는 없다. 그것은 오직 자본 운동을 정지시키고 파괴해야 가능하다. 에너지 가격통제와 에너지산업 국유화, 공공주도의 재생에너지 전환 요구 또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공주도는 자본 주도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목표가 아닌 체제 내에서의 국유화와 가격통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으로 작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착취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환경/기후위기, 에너지 대란과 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코뮤니즘만이 인류와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대공황, 팬데믹, 제국주의 전쟁, 기후위기 속에서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면서 노동자들은 난방비 폭등과 물가 폭등으로 실질임금 감소와 생계비 위기의 고통을 겪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대자본에 대한 세금은 인하해주면서 복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산은 삭감했다. 자본가 정권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본 위기에 대한 비용을 치르기를 거부할 때마다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잉여노동을 착취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본이 더 많은 잉여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경쟁으로 전쟁, 환경 파괴와 기후위기를 일으키면서도 모든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려 공격에 나서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계급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제 노동계급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원인인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기 위해 계급을 조직하고 싸워야 한다. 현재의 모든 위기는 자본이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국가를 넘어 노동계급의 국제연대로,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사회적 필요에 의한 생산을 건설해야 한다.

 

난방비 폭탄, 물가 폭등, 실질 임금감소, 생계비 위기, 복지 축소, 노동강도 강화, 노동자 운동 공격...이 모든 것을 계급전쟁이라고 부르자! 이제 노동계급이 이 전쟁에서 반격할 때이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에 의지하지 말고 계급의 독립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대중집회, 노동자평의회를 구성해 반격해야 한다.

 

난방비 폭탄: 자본주의가 원인이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 전면화!

노동자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3년 2월 14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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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장애인 권리투쟁,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다

장애인 권리투쟁,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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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출근길 선전전을 진행했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2년이 지났지만, 정부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혜와 동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전장연은 지적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정부가 정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장애인의 수많은 차별과 억압을 은폐시키는 날로 기능하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차별에 맞서 함께 싸워나가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장애·인권·노동·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공동투쟁기구이다.

 

그동안 전장연은 단순히 장애인 이동권 보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해 4대 법률(장애인 권리보장법,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장애인 평생교육법, 장애인 특수교육법) 제•개정과 이와 관련된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장애인 권리 요구는 최근의 지하철 탑승 시위로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알려졌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내용이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전장연이 요구한 증액 예산 중 106억 8,400만 원(고용노동부 장애인 고용관리 지원 사업)만을 반영했다. 이는 전장연 요구안의 0.8%에 불과하다. 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자적 자세는 다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방치와 무시, 억압으로 일관하였고, 결국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 반영되었다. 게다가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을 상대로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 6억여 원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했다.

 

지난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과 화물노동자 파업을 제압한 이후 윤석열 정권의 강경 대응 기조는 자신감을 얻었고 서울시의 대응도 그 연장선이다. 서울중앙지법은 민사에 대해 전장연이 시위를 중단하는 대신 서울시가 19개 역사에 내년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조정안을 내놓았다. 시위가 5분 넘게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면 전장연이 공사에 회당 500만 원씩 지급하는 조건도 달았다. 하지만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법원의 강제조정 안을 거부했다. 윤석열 정권과 서울시는 장애인들의 절박하고 정당한 투쟁을 ‘불법’, ‘민폐’로 매도하고 혐오를 조장하면서, 장애인들을 대화 상대가 아닌 제거 대상, 지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원천으로 지목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위한 ‘전장연의 시위가 비장애인의 불편과 비용 낭비를 초래한다’라는 논리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손실을 초래한다’라는 자본가계급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권리는 이동할 권리,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이다. 이런 점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허울뿐인 정의와 공정으로 치장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에도 해당한다. 이는 장애인 권리투쟁에 노동계급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사이 협상은 계급적 역량과 투쟁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데,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요구가 협상테이블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계급적 연대가 필요하다.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는 노동자의 파업과 같이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위한 실질적인 협상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은 장애인 권리 요구와 함께 20년 넘게 지속해 왔지만, 이번처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 탑승 등 노동과 일상 공간으로 나와 자신을 집단으로 드러냈을 때 그나마 사회적 관심과 논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투쟁을 통한 권리 쟁취의 역사

 

한국보다 장애인 권리가 훨씬 더 보장되는 이른바 장애인 복지 선진국의 장애인 권리도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결과이지, 자본주의 사회와 정부의 선의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에 장애인 운동단체가 건설되면서 장애인 권리투쟁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 1995년에는 장애인들이 버스와 기차를 점거했다. 약 1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장애인들은 이 싸움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을 만드는 거라고 주장하며 교통수단에 자기 몸을 수갑으로 연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이어갔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 2015년 6월에는 중증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정부 보조금인 자립생활기금(ILF)을 폐기하려는 정부 계획에 항의하기 위해 장애인 활동가들이 영국 의회 하원 건물 로비를 점거했다.

 

· 2017년 영국의 철도노동자는 자본의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공공 안전 조치와 평등한 권리를 후퇴시키는 정책에 맞서 파업을 진행했다. 장애인에 대한 공공안전 조치의 후퇴는 철도 이용객들에 대한 안전 조치 후퇴, 철도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건물을 점거해 26일 동안 농성을 벌인 역사적인 투쟁과 1978년부터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장애인들이 버스 운행을 막은 것을 시작으로 십수 년간의 장기 투쟁 끝에 '미국장애인법'(ADA)을 관철했다.

 

· 2006년에는 청각 장애 학생들이 워싱턴 DC의 갤러뎃 대학교(세계 유일의 청각 장애인 대학)에서 점거 투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청각 장애인 문화 발전에 전념하지 않겠다는 차기 총장의 임명에 반대하여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모든 입구를 막고 대학 건물을 점거하여 학교를 폐쇄했다. 이에 경찰이 점거 건물을 습격해 130명 이상의 청각 장애 학생들을 체포했다. 경찰은 1960년대 이후 워싱턴 DC에서 가장 큰 대규모 체포라고 밝혔다. 하지만, 점거는 계속되었고, 다른 청각 장애인들은 갤러뎃 대학과 같은 청각 장애인 '텐트 도시'를 만들어 지지를 보여주었으며,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50개가 넘게 만들어졌다.

 

폴란드에서는 2014년 장애인 부모들이 폴란드 의회를 점거했다.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지급하는 적은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부모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의회를 점거한 이들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언론인들이 우리의 행동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행동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녀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간의 투쟁 끝에 이러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승리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패배 후에 다시는 우리 자신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나라에서,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정상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지만, 우리의 사랑으로 음식 문제를 해결하거나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의회에서의 이러한 시위는 정부가 듣지 못하거나 적어도 모른 척하는 우리의 결단력과 절망의 외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장애인 권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투쟁과 연대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대공황 시기에 견고한 단결과 파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점거 투쟁’을 시작했고, 자본가들은 그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법률에 호소하며 경찰을 동원했다. 하지만, 자본가에 맞서 파업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맞서 투쟁을 지속했고 투쟁 형태를 발전시켜 왔다. 장애인들의 대중교통과 입법기관 점거 투쟁은 생산의 주인인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생산을 멈추듯이 사회의 주인인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동 수단을 멈추고 법 제도에 압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수단이다.

 

자본주의의 ‘장애’ 개념과 노동계급의 연대 필요성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한 잉여노동이 이윤의 원천이 된다. 이윤추구 압박은 노동강도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노동강도는 높아지며, 이러한 노동강도와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장애 개념에 대한 기원이었다.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다. 장애는 우리가 가진 손상 위에 부과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 없이 사회에 대한 완전한 참여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됨으로써 초래된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은 사회 안에서 억압받는 집단이 된다.” (영국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1976년)

 

이러한 개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자보건법 14조에서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예비 부모의 낙태를 허용•유도하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는 형법상 낙태죄를 남겨 두고 낙태 허용 범위만 일부 확대한 형법 270조 낙태금지 조항이 있다. 겉으로는 상충하여 보이지만, 낙태금지법과 모자보건법은 한편으로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인간의 결혼 및 출산을 장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등한 인간의 출산을 금지하는 국가통치 장치이며, 자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의 문제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문제 제기뿐만 아니라 가치 창출 기여도에 따른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필요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은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 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파괴해야 하는 싸움이다. 장애인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결코 따로 일 수 없다.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한 권리투쟁은 장애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고 노동계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국가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삭감한다.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 권리투쟁이 약해질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밀리면, 그 고통은 취약한 곳으로 향한다. 장애인과 노동자들이 견고하게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를 통해 공격을 강화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는 사람들이 할 수 있어야 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특정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본주의는 특히,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잉여와 생산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코뮤니즘은 사람들이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는 원칙에 따라 생산의 자체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배타적 관행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기반이 되는 소외의 논리를 극복한다. 손상과 같은 요소를 떠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재생산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통합되는 것이 코뮤니즘의 목표이며, 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장애해방과 노동해방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이 장애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이 필요하고, 이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자!

장애인과 노동자의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3년 4월 20일

제22회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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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젠더 대결이 아닌 계급단결을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젠더 대결이 아닌 계급단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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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전쟁, 팬데믹, 환경위기, 기후위기, 핵/방사능 위협, 기아, 난민, 빈곤 등 각종 위기는 인류를 비롯한 종 전체와 생태계 전멸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재앙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당 부분은 지치고 소외된 노동으로 하루를 소비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상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은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에서 착취와 억압 속에 살고 있다. 이 체제는 여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과 불평등을 구조화하며 폭력으로 체제를 유지한다.

 

우리가 수없이 밝혔듯이 위기의 본질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이다. 자본주의는 착취를 위한 질서유지를 위해 이데올로기 장치, 폭력/억압적 국가기구와 법 등을 무제한으로 사용한다. 거기에 지배계급의 공정과 정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차별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포장한다. 성차별과 성억압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성차별, 나아가 성 억압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했다. 1917년 세계여성의날은 이런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이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홀로 가족의 생존을 감당해야 했다. 하루 13시간 이상 노동하며 빵을 구하기 위해 영하의 날씨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1917년 3월 8일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아이에게 먹일 빵을 달라”, “참호에 있는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라고 요구하며 거리를 점거했다. 이것은 실제로 2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것이 세계여성의날이 여성과 노동자에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기념일인 이유이며, 성 해방이 사회 경제체제와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성차별과 성 억압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지배계급은 끊임없이 그것을 왜곡하고 피지배계급을 갈라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젠더 갈등이 부르주아 정치에 이용되었는데, 남성 역차별이 부각 되었다. 특히 ‘더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고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며 무지와 혐오를 자랑한 윤석열은 여성가족부 폐지 및 개편, (성폭력) 무고죄 신설 공약까지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르주아 정치가 젠더 갈등을 다루며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고 있지만, 그들이 젠더 갈등을 언급하는 목적은 여야를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자본주의 위기라는 현실을 감추고 젠더 문제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자본주의 체제 모순으로 인한 노동 착취 강도 증가, 생계비 위기, 실업, 주택난, 기후 위기, 환경파괴 등의 위기 앞에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는 노동계급을 다양한 집단으로 나누어 대립시키고 갈라치면서 분열을 획책한다.

 

자본은 노동계급에 온갖 위기를 떠넘기며 고통을 가중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노동자는 정리해고, 저임금, 폭력 등 가혹한 자본주의 공격의 첫 번째 대상이다. 여성 노동자의 고통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할수록 여성 노동자는 다중으로 착취당하고 차별받고 억압받는다. 하지만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자본에 착취당하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부르주아 페미니즘 역시 부르주아 일반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페미니즘 이름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전쟁 수행과 노동 착취를 자행하는 지도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등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수십 개의 광산을 폐쇄하고 수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여 실업자, 홈리스로 만든 대명사가 되었다.

 

세계여성의날의 역사적 뿌리는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에게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평등은 남녀 간의 문제가 절대 아니며 계급철폐와 인간해방의 주제이자 과정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파괴하지 않고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불가능하다. 자본, 상품생산, 임금 노동의 지배가 존재하는 한 여성의 실질적이고 완전한 권리와 평등은 보장받을 수 없다. 진정한 성 해방은 노동계급 내부의 모순과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한 무계급 사회인 코뮤니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해방 운동은 차별과 폭력의 피해자에 공감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권리를 방어하며, 가해 시스템에 맞서 근본적으로 투쟁하는 것,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차별과 혐오를 근본적으로 타파하고 성평등-성해방-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코뮤니스트 운동과 만나야 한다.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 기후 위기, 팬데믹에 이어 전쟁이 강타하면서 해결되지 못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는 다시 한번 노동계급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지배계급과 자본가 정권은 노동계급에 위기를 전가하며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 힘겹게 얻어낸 기본적 권리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모든 젠더 대결과 계급 분열을 거부하고, 계급투쟁의 전선에서 단결하여, 지배계급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 희생이 아닌 진정한 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계급전쟁으로 맞서야 한다.

 

여성해방을 막는 것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젠더 대결이 아닌 계급단결을 통한 '계급전쟁'으로!

혁명을 통해 성평등-여성해방 세상으로!

 

2023년 3월 8일

115주년 세계여성의 날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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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서는 진정한 노동계급 정치!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해 부르주아 총선일에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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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류가 심각하게 경험한 감염병 대유행, 기후 위기, 생태파괴, 일반화된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부르주아지의 온갖 처방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더욱 심화하였고, 그 부담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대유행에 이어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자본주의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장기간 지속해 온 위기 속에서 격렬해지는 제국주의 대립과 이윤추구 경쟁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과 빈곤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의 질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작동 결과이며. 이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 없이는 그 어떤 전망도 열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세계 노동계급은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혁명이냐 아니면 제국주의 전쟁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이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뿐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 국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도 노동계급 내부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본의 좌파로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는 데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 선거 서커스에 ‘노동자’의 이름을 팔아 참여해 선거 환상을 퍼트려 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적 의도와 관계없이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입니다. 코뮤니스트혁명의 직접적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계급투쟁의 미래는 노동계급이 노동조합과 자본의 좌파를 넘어 자신의 투쟁과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미래입니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분들과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코뮤니스트 정치'를 소개하고, 자본주의 쇠퇴와 전쟁의 시대! 코뮤니스트 혁명의 전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강좌 신청>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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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코뮤니스트좌파의 의회/선거 강령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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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의회 제도는 부르주아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이제 그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선거는 노동계급이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폭력을 통해 전 사회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특권이나 착취도 필요가 없는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의 국가를 그대로 이용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의 국가기구나 그 제도, 장치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체제 내부에서 개혁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선거 참여와 의회 진출을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써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19세기 동안,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보통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이 자신을 조직했던 가장 중요한 요구 중의 하나였다.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에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코뮤니스트혁명이라는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혁명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 개입에 대한 전술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를 유지하고, 노동자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 각종의 선거 연합은 그들이 내건 급진적이거나 혁명적 수사와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노동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의 환상일 뿐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위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의 군대, 사법기관, 국가 관료, 보안 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일상에 대한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노동자가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이른바 ‘민주적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가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의 과제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선거제도 포함)를 파괴하는 것이다.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시대를 맞아 세계의 노동계급은 의회주의 보통 선거권의 잔해 위에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세우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다른 잔재 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세워야 하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길에 서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적 의도와 관계없이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코뮤니스트혁명의 직접적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미래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 선거 사기극에 맞서 선거 참여 방침이 아닌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노동자평의회와 혁명당 건설에 나서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대의제와 수동성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 정치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과 계급적 연대를 통한 노동자 자기조직화에 달려있다.

 

현재와 같이 노동계급이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이제는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계급의 자립과 자기조직화로 나타나야 한다. 의회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부르주아 정치 형식인 대리주의는 계급의 자립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의 영역인 의회가 아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부르주아 정치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의회와 선거의 신비화

 

자본주의 상승기에 의회는 부르주아지 조직에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 특히 부르주아 기관으로서 의회는 노동계급의 활동을 위한 주요 무대가 결코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활동과 선거운동 참여는, 지난 세기의 혁명가들이 항상 계급에 경고했던 수많은 실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아직 의제로 다뤄지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량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노동계급이 의회 참여를 통해 개량을 촉구하고, 선거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강령을 위한 선전․선동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을 비난하는 호민관으로 의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의회는 더는 개량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제2차 총회에서 “정치적 삶의 무게 중심은 이제 의회의 경계를 넘어서 완전히 그리고 마침내 벗어났다."고 표현했다. 그 이후로 의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 즉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유일한 것은 신비화의 도구 역할이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의회를 활용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노동계급은 실질적인 정치 기능을 상실한 기관으로부터 불가능한 개량을 얻을 수 없다.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와 의회를 파괴하는 것이 기본 과업인 시대에, 그리고 보통선거의 폐허와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잔해 위에 노동계급이 자신의 독재를 건설해야 할 때, 의회와 선거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선거 전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죽어가는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선거와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더는 지난 세기에 가졌던 장점을 갖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은 특히 이른바 '노동자 정당'이 의회 다수를 장악함으로써 사회주의로 '평화적' 또는 '점진적' 이행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혁명적 의원단’을 통해 ‘내부에서 의회를 파괴’하는 전략은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 정치 조직의 타락과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결과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입증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활동이 본질적으로 전문가들의 관심사인 한, 의회는 대중의 자기 활동 공간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 간의 게임을 위한 경기장이다. 선거와 의회를 선전과 선동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전제를 유지하고,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혁명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그러한 약점이 용인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제의 유일한 과업이 바로 낡은 사회질서의 전복과 코뮤니스트 사회의 건설인 시대에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이 과업은 계급 전체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처음에 ‘혁명적 의회주의’ 전술이 주로 노동계급과 조직 내에서 과거의 무게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전술의 비참한 결과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의회

 

코뮤니스트는 노동자의 자유가 의회에서 과반수 당선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갖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 순진함’의 환상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위장하는 무화과 이파리일 뿐이다.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에서 국가 관료, 그 보안 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의회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을 잘못 다스리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환상을 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지에 쓸모가 있다.

 

 

따라서 혁명가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싸우라고 요구하면서 의회 선거에 반대한다.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의 파괴를 통해서만 노동계급이 완전한 표현과 조직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혁명당에 달려있다. 이것은 대표자를 단순히 노동자가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소환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의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일단 그들이 자본주의 관계의 진압을 수행하면, 평의회는 계급을 폐지하고 국가에 대한 모든 필요성을 없앨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반(半)국가적 기능을 가진 기구에서 단순한 경제 관리자로 변모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소멸'에 관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극에 불과하다. 그들은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선거는 부르주아지의 (의회/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출할 자유를 양보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줄 세력/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신비화를 지지하고,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독재를 돕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지 의회/대통령 선거의 사기극에 맞서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무관심과 정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혁명당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통령 선출/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정권장악은 결코 임금노동의 착취를 폐지하지 못하며,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 ‘권리’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직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자본이 조금이나마 노동자에게 일부를 양보할 수 있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착취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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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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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꺼내든 낡은 당 건설 노선 비판 -

 

노동자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한다는 세력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 장악 이후까지 일관되게 노동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지, 아니면 반대로 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에는 사회주의-혁명 세력을 자임하면서 반(反)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자 등을 내걸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른바 좌파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 블록으로 모인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이른바 자민통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자기 운동의 최종 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하지 못한 운동의 퇴보에 기인한다. 이들은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 개혁을 넘어선 혁명적 이행 전략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 투쟁에서는 사회주의와 무관한 실천만을 하면서 대외적으로 급진적 구호와 기회주의적 전술을 섞어 자신들의 조합주의, 노동자주의, 선거주의 실천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렇듯 ‘좌파’의 정체성은 단지 다수파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적 기질과 줄서기로 드러낼 뿐이다.

 

이들 좌파 중 다수는 혁명적 이행 전략인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소수파 운동의 한계 속에서도 현실에서 혁명적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 즉 노동계급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자기 조직화로 나아가는 장기적 목표를 향해 꾸준히 실천하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일종인 좌파 블록이 정치노선과 전략적 목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反)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 전술과 노동자 공동전선은 오히려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 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해 그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그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된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옹호하는 전술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로 인한 이합집산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에게 정치 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이 계급의 전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현장 투쟁에 개입하면서 투쟁의 목표와 원칙을 훼손하거나 계급의식 발전과 자기조직화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와 운동의 발전에 복무하지 않고,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위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길고 힘든 계급의식 발전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퇴조-상승의 모든 기간에)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투쟁하는 노동계급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방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신뢰와 영향력이 노동계급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계급의 전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위(혁명조직)가 노동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계급과 함께 투쟁하면서 혁명 강령을 방어하는 존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 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 경로에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적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코뮤니스트 노동자가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 대응에만 매달리거나,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지속해서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반성 대신 생존을 위해, ‘사회주의-좌파 대선후보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이름만 바뀐 낡은 전술을 들고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 노선이 불분명한 의회주의 제도권 소수 정당과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포기한) 비(非)제도권 소수 정당이 결합한 사회주의 대중정당 건설로 표현되었다. 이들 중 한 축은 9년 전에 선거주의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 투쟁(후보전술)을 통해 그리고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反)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 동력과 당 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다. 결국,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계급정당 건설 노선이 선거 전술과 혼합되어 타락하는 운동 세력의 유일한 생존전략이 되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이들은 더욱 우경화하여 ‘사회주의 좌파 후보’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제도권 정당으로 향하는 최악의 생존 전략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좌파로 전향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이들이 향하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비판은 아래 글로 대신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 (레닌, 「국가와 혁명」)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를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 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 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부르주아 선거판)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 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두지 않고 (다수의 비활동 당원을 포함한 채) 노동조합,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모아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선거가 아니라 계급전쟁을 준비하는 당,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한 계급 정당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끝 모를 위기의 시기, 노동계급에 필요한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혁명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하는 세계혁명당임을 명심하자.

 

2020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 이 글은 「코뮤니스트」 12호에 실린 글을 보완하여 재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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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가 끓는점에 도달하다

자본주의가 끓는점에 도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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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8)가 몇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이 회의는 의심할 것도 없이 공허한 약속과 막연한 변화의 구호만을 만들어 내며 이전 회의의 역사적 실패를 이어갈 것이다.

 

2023년 7월 6일은 지구의 평균 표면 온도가 섭씨 17.08도로 기록상으로 가장 무더운 7월의 날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단지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2023년 7월은 이전의 최고 기록이었던 섭씨 16.8°C를 넘어서 기록상으로 가장 무더운 달이 되었다. 현재의 추세로 볼 때, 2027년까지 지구 온도는 섭씨 1.5도 넘게 오를 것이 예상되며, 이 수치를 넘어서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치명적인 폭염과 기근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유일한 원동력은 이윤을 가능한 한 빠르게 늘리는 것이며, 이러한 자본주의적 성장이 낳는 죽음과 고통은 단순히 사업을 위한 비용일 뿐이다. 기후변화협약 회의들에서 나타난 모호한 희망들은, 지금까지 반복해서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작은 삶은 자본의 확장에 직면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떤 답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기록적으로 무더운 여름에 더 무서운 것은 해수면 온도이다. 2023년 8월 4일, 해수면 온도는 섭씨 20.96도를 기록하며 2016년부터 기록한 이전 기록을 깼다. 전례가 없었던 해수면 온도의 급작스러운 상승은 이전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지금과 같이 유지되는 한 내년에도 쉽게, 이전 기록을 넘어설 것이며, 앞으로도 매년 기록 경신은 계속될 것이다.

 

인류와 자연에 대한 대재앙

 

바다 온도가 1도 증가하면 해수면은 2.3m 상승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이동해야 할 위험에 놓인다. 2050년까지 12억 명의 사람들이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 때문에 강제적으로 이주해야 할 것이 예상된다. 지난 40년 동안 EU 내에서는 홍수 때문에 5,6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해수면의 온도 상승은 강수량과 폭풍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홍수는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가 마주한 재앙의 시작에 불과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8억 1천만 명의 사람들이 홍수 위험에 놓일 것이라 예상한다.

 

기후위기는 인류에게만 아니라. 우리가 의존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의존하는 자연에도 엄청난 위험을 준다. 또 다른 연구 결과는 해수면 상승 때문에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10,000개 이상의 섬이 늪으로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섬들 가운데 많은 섬이 그 섬들의 면적에 비례해 세계의 식물과 야생 동물의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프랑스의 섬들은 지구 표면의 0.08%만을 차지하지만, 식물의 1.4%, 연체동물의 3%, 어류의 2%, 조류의 0.6%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섬들 모두가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기후위기의 위험에 놓여 있다. 이 섬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자연과 야생 동물들도 우리 인류처럼 심각한 위험에 빠져있다.

 

우리는 올해 이란에서 발생했던 2일간의 ‘셧다운’을 초래한 기록적 폭염, 지난 50년 동안 극단적인 기후로 인한 약 200만 명의 사망, 미국, 캐나다, 유럽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의 증가한 산불로 인한 인류와 자연에 대한 파괴,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모두 멸종될 수도 있는 수백만 종에 관한 이야기 등을 소재로 몇 권의 책도 쓸 수 있다. 이러한 끝나지 않는 목록들은 지구가 위험 속에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추세가 지속한다면,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본질적인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려는 경향으로 인해서 이러한 추세가 지속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폭풍의 중심에 있는 노동계급

 

모든 사람이 이 상황 때문에 똑같이 고통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배계급은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날 수단을 갖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의 직격탄을 맞게 될 사람들은 다름 아닌 노동계급과 농촌의 빈곤층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의 참을 수 없는 무게와 그로 인한 결과가 우리의 어깨 위에 무겁게 놓인다면, 이 체제를 변화시킬 힘도 우리에게 있다. 이제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이 체제를 역사의 길가로 던져 버리고, 인류가 자연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화해시킨 사회인 코뮤니스트 사회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시작할 때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4일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4/capitalism-reaches-its-boiling-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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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한국 위원회를 제안하며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한국 위원회를 제안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과거 다른 제국주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도 세계 노동계급의 국제주의적 연대와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계급의 혁명적 의식을 잠식시키며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대학살에 참전시킨 거대한 쇼비니즘의 물결에 맞서 국제주의자들은 ‘혁명적 패전주의’를 방어하며 국제적으로 연대해서 싸웠습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라는 구호는 1917년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차르 체제를 전복하고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히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1918년 11월 마침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제국주의 학살을 종식한 노동자 대중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굳건하게 지킨 것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이러한 국제주의자 흐름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제국주의 전쟁 참화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세계의 국제주의자들은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굳게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주의자 흐름은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 성명을 발표하고 회의를 개최하고 공동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세계 지배계급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프롤레타리아트에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희생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양쪽 모두는 노동자 착취를 통제하기 위해 싸우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입니다. 침략자든 방어자든 지배계급을 위한 싸움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존과 생활 수준에 대한 일상적인 공격에 대한 전쟁, 즉 노동계급 자신을 위한 계급전쟁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입니다.

 

우리는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 참화를 종식하기 위한 ‘계급전쟁’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국제주의자들과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라는 기치 아래 국제 행동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 행동은 오늘날 흩어져 있는 국제주의자를 하나로 모아 더 넓은 노동계급에 반격의 필요성을 전달하고, 국제주의 원칙으로 함께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국제 행동에 동의하거나 관심 있는 동지들의 참여를 호소합니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행동 호소문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1945년 이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더욱 일반화된 전쟁 위기에 직면한 제국주의 경쟁의 새로운 시대 시작입니다.

 

2.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밖에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제국주의 경쟁 심화는 수십 년 된 자본주의의 미해결된 경제 위기 산물입니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많은 수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세계 노동계급에 가져온 것은 더욱 강도 높은 착취, 더욱 큰 고용 불안정, 그리고 그들이 생산하는 부에서 노동자 몫의 지속적인 감소입니다. 이 체제는 전쟁을 부를 뿐만 아니라, 끝없는 이윤 추구는 지구 파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세계화, 금융화, 그리고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윤율 하락에 대한 모든 반응은 2008년 세계 투기 거품의 극적인 붕괴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모면했을 뿐,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체제 모순은 증가하고 있고 어떤 국가도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4. 가장 두드러진 모순 중 하나는 1980년대에 서유럽이 저임금 경제로 투자를 이전한 것입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은 서유럽 노동자들의 소득 감소에 대한 압력 완화를 위해 저임금 노동력의 대규모 착취를 통해 값싼 상품 공급하면서 경제를 구축했습니다. 2008년 투기 거품 붕괴 이후 경제적 편의를 위한 결합이 파경에 이르고 더욱 명백해지면서 이미 존재하는 체제 모순은 깊어졌습니다.

 

5. 양적 완화는 전반적인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착취를 비인간적인 수준까지 강화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기존 자산을 탕감하는 것을 넘어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이며, 이는 일반화된 전쟁이 필요합니다. 세계 지도자들에게 열려 있는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면서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타협의 여지가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절박해질수록 인류 미래를 위협하는 대량 파괴 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실 세계전쟁 위협은 점점 더 위기에 처한 체제에 의한 자연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가속화로 인해 이미 발생하고 있는 환경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6. 이 재앙과 전쟁 전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세계 노동계급입니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은 먼저 전쟁을 마비시킨 다음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임금노동자는 착취자 손에 들어가는 세계 부의 창조자라는 공통의 물질적 위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에게는 지켜야 할 국가도, 국익도 없습니다. 노동계급만이 국가가 없고 생산이 협력적이며, 소수를 위한 이윤이 아닌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도록 설계된 새로운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의 세계 공동체를 위한 조건이 존재합니다.

 

7.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계급은 조직화하거나, 재조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는 일상적인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합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가 선출하고 소환할 수 있는 파업위원회를 결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본가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모든 파업위원회는 기존 국가를 정복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더 넓은 계급 운동으로 단결해야 합니다.

 

8. 이 과정에서 일부 노동자가 자본주의 존재의 막다른 골목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인식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9. 인도주의적 재난의 현 상황에서 역사가 새로운 절박한 국면을 맞이하더라도 우리는 계급 운동이 당장 일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취와 전쟁에 맞선 운동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위기가 어떤 미봉의 협상으로 끝나더라도 이것은 다음번 제국주의 충돌의 씨앗을 뿌릴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미 러시아를 중국 품으로 끌어들이고, 나토와 EU를 미국과 그 목표 주위로 결집시켰습니다.

 

10. 자본주의는 전쟁을 의미하며 멈춰야 할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모든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자본주의와 피비린내 나는 제국주의 충돌을 끝장내기 위한 계급전쟁이라는 것을 인식한 개인과 그룹에 참여를 요청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흩어져 있는 혁명적 소수가 힘을 모으고 더 넓은 노동계급에 우리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11.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는 국제적인 계획이지만,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은 아닙니다. 그것은 계급전쟁이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운동으로 발전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지지해야 할 '덜 나쁜 악'이라고 규정해 하나의 제국주의 또는 다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편들거나,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를 지지해 노동계급이 스스로 투쟁하는 것을 교란하고 무장 해제시키는 모든 기회주의를 거부하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국제주의자들에게 정치적 나침반을 제공할 것입니다.

 

12.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것이 평화주의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평화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탄원일 뿐입니다. 문제는 ‘정상’에 관한 것입니다. 전쟁으로 이끄는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입니다.

 

위 내용에 동의하는 동지들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행동할 것을 호소합니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를 지지하는 한국의 국제주의자 일동

 

 

<참여 문의>

▶메일 : communistleft@gmail.com

▶페북 메시지 : https://www.facebook.com/communist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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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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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되었다. 전쟁은 대규모 파괴와 학살의 확대라는 야만으로 고착되며 장기화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양국의 사상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민간인 사상자도 2만 명에 육박했다. 이번 전쟁은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최대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우크라이나 인구의 1/3인 1,30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고, 그중 800만 명이 해외로 떠났다. 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만이 아니라 영토의 황폐화와 생태계 파괴 등 환경 피해도 일으켰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유럽 분쟁이며, 전쟁의 본질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 전략적 입지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대리전쟁 끝에 나왔다. 이 전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핵무기 사용을 위협한 핵 강대국 러시아가 직접 참전하고 유럽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나라 국민의 재앙을 넘어 제국주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전 세계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푸틴은 미국의 경쟁자인 중국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한편으로 미국과 외교 군사적으로 오랜 적(敵)인 이란과도 가까워졌다. 미국과 다른 나토 국가들은 젤렌스키 정부에 무기와 훈련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가입을 결정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발트 3국에는 서방의 군대가 전진 배치됐다. 미국은 독일과 같은 일부 동맹국을 자국의 외교 정책에 더 부합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시대 전환”을 공표하며 전후 70여 년 동안 자제했던 “군사력 강화”의 길로 접어들며 미국, 중국에 이어 가장 많은 국방비를 쏟아 붓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 일본도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군비 지출을 늘리고 있고, 특히 중국의 군사 공격을 배제할 수 없는 대만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대규모 파괴, 기존 자본의 평가절하,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쟁과 분쟁은 거의 끊임없이 일어났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이윤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전쟁 중인 군사 기구에 의해 위협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 전쟁들은 몇몇 광적인 지도자들이 만든 결과도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작동 결과였다. 이 체제는 이윤율 저하와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지는 내부 모순으로 전쟁의 길로 내몰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경제 위기, 기후 위기, 팬데믹에 이어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앙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이미 전 세계를 휩쓴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군사비 지출 증가로 인한 경제 위기는 새로운 무역 전쟁으로 이어졌고, 세계 생산과 무역의 분열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며 새로운 공급 부족을 일으켰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 수준이 급격하게 하락하거나 심각한 생계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위기는 수십 년 동안 전체 자본주의 체제를 괴롭혀 왔고, 전쟁 파괴를 통한 자본 가치의 대규모 평가 절하 외에는 해결책이 없는 낮은 이윤율의 더 깊고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이다. 물론, 지배계급은 그들의 자본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적의 자본을 파괴하고, 원자재에 접근하고,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전략적 위치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승전국에서도 자본의 일반적인 평가절하를 초래한다. 그래서 오늘날 노동계급의 진정한 선택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전복이냐, 죽음과 폐허의 전쟁이냐"이다.

 

세계 지배계급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노동계급에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부과하는 희생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는 노동자 착취를 통제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반(反)파시스트 십자군”이나 젤렌스키의 “민주주의 수호”는 노동자가 피 흘리며 싸울 가치가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전쟁이다. 노동계급이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착취자들에 대한 전쟁, 우리의 생존과 생활 수준에 대한 일상적인 공격에 맞선 전쟁인 “계급전쟁”뿐이다. 노동계급이 생활과 노동 조건을 방어하려는 시도는 사유재산, 임금노동, 화폐와 국가의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더 넓은 운동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우리는 소수를 위한 이윤이 아닌 모두의 필요에 따라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 가능성을 제기해야 한다. 국가와 국경은 사라지고, 생산이 협력적이며, 노동계급이 만든 독립적인 기관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집단으로 다룰 수 있는 세계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은 전선과 국경을 넘어 계급적이고 우호적으로 연대하여 전쟁 기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임금과 생활 수준 하락에 저항하고, 전선 양쪽에서 야만적 학살에 연루된 모든 자본가 정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지지하고 방어하면서 국제적으로 계급투쟁을 확산해야 한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전쟁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묶여 분열되고 세력이 약해져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거나,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전환할 것을 거부하는 세력 또한,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제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는 역할을 해왔다.

 

반면,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은 서로 간에 의견 차이가 있어도 모두가 일관되게 이 전쟁이 제국주의적이며, 자본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전쟁이라며 반대했다. 코뮤니스트좌파와 지지자들은 모두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 행동을 벌여왔다. 이렇게 제국주의 분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코뮤니스트좌파가 20세기 초부터 방어해 온 입장의 초석이자 오늘날 그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모든 단체의 기본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록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방어적이고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투쟁의 물결이 세계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생계비 투쟁 등 계급영역의 기본투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국에서 계속되는 파업 물결,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부문에서 일어난 파업, 이란의 노동자 투쟁 등 모든 움직임은 노동계급이 자신감을 되찾고 장기적으로 잃어버린 계급 정체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동안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단기적인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망으로 노동계급 투쟁의 독립성을 촉진하고 옹호하며, 세계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문제를 위해 대응해 왔다. 지배계급의 자본주의 위기 전가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계급의 당면한 요구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와 연결하고, 일회적인 반격이 아니라 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계급전쟁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투쟁한다.

 

●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어떠한 "덜 나쁜 악"도 지지하지 않는다.

● 지배계급 간의 평화협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

● 현재의 전쟁과 앞으로의 전쟁이 노동계급에 가할 경제적, 정치적 공격에 맞서기 위해 계급전쟁을 전면화해야 한다.

● 계급전쟁은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한 투쟁, 즉 독립적인 파업위원회, 대중 집회, 노동자 평의회 건설을 통해 확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 우리는 모든 착취와 억압, 차별이 근본적으로 철폐된 사회! 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를 결성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멈추게 할 국제적인 계급투쟁에 나설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는 오늘날 제국주의 전쟁과 모든 전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답이며, 우리의 목표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유혈 낭자한 제국주의 전쟁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한 세계 노동계급의 정치적 저항을 구축하는 것이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2023년 2월 24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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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아나키즘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아나키즘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

 

지난 몇 년 동안 코뮤니스트좌파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그룹 내에서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흐름을 같은 선상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진정한 혁명적 흐름과 반(反)혁명적 흐름(종종 '개량주의자'로 표현됨)이 양쪽을 동등하게 관통하고 있다. 오늘날 기회주의적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아나키즘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특히 돋보인다. 주요 주장은 국제주의적 아나키즘과 비(非)국제주의 아나키즘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운동 또는 특히 "국제주의 아나키즘"은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일부이다: "구체적으로, 맑스주의자로 구성된 우리 조직은 국제주의 아나키즘 성원과 같은 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더 나쁜 것은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흐름이 똑같은 모순과 정치적 오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관된 맑스주의, 코뮤니스트좌파 그리고 국제주의 아나키즘에 도발적인 제목의 2010년 기사: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세계혁명」 414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ICC는 "같은 '맑스주의자'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동적인 조직을 숨기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아나키스트'라는 꼬리표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즘에 대한 맑스주의 원칙과 정치의 역사적 투쟁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반(反)종파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러므로 자신의 '예배당', 자신의 '가족'(아나키스트 또는 맑스주의자)을 방어하려는 여전히 너무 큰 경향과 상점주인 정신(제1 인터내셔널 내 바쿠닌 세력과의 싸움 때문에 소작인으로 전락한 불쌍한 맑스와 엥겔스!)에 맞서 투쟁하는 것도 필요하다."라고 단언한다) 노동계급의 진영에서는 아무 관련이 없는 (...) 그리고 '맑스주의' 또는 '아나키즘'이라는 유일한 꼬리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혁명가들을 (...) 반동과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 정치 흐름의 계급적 성격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오늘날의 신세대 혁명가를 비롯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흐노(Makhno)와 "마흐노비시나(Makhnovishina)"의 특정 사례에 대한 다음 글을 게재한다. 이 글은 현재 우리 그룹의 일원이 된 동지 중 한 명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북미 지역 내 토론과 논쟁을 거쳐 작성한 글이다.

 

마흐노 운동의 비(非)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 성격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는 아나키스트 운동, 특히 마흐노비스트 운동의 성격에 대해 종종 혼란을 겪었다. 어떤 이들은 마흐노비스트 운동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실제로 마흐노의 통지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경제적 상황을 어떻게 대했는지, 마흐노의 경험을 살펴보자.

 

아나키스트들은 마흐노비스트 운동이 노동자 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마흐노 동지 중 한 명인 볼린은 "운동의 단점" 중 하나는 "농민 봉기를 지원할 수 있는 활발하게 조직된 노동자 운동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말했다. [2] 이로 따라 마흐노비스트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계급 정당의 정치적 지도력이 부족한 농민의 편을 공개적으로 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흐노비스트의 경험으로 돌아와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또한,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이며 마흐노 봉기의 기록자인 피터 아르시노프는 마흐노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노동자와 대중이 코뮤니스트(볼셰비키)의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 "(...) 코뮤니스트와 랑겔( Wrangel )의 차이점은 코뮤니스트는 혁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3]. 그러나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스키르다(Alexandre Skirda)에 따르면, 볼셰비키와 좌파사회주의노동자당[4]의 노동자 입장을 지켜본 마흐노는 "노동계급은 가난한 농민보다 덜 급진적이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흐노는 1919년 11월 9일부터 한 달 반 동안 예카테리노슬라브(Ekaterinoslav)를 점령했을 때 이를 충분히 파악하였다.[5].

 

그러한 언급은 스탈린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의 말이 아니라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아나키스트 역사가들이 주장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 마흐노주의 운동을 자본주의 관계를 폐지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제시하려는 모든 그룹은 기회주의에 빠졌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

아나키즘의 연방주의 원칙과 맑스주의의 민주적 중앙집중제를 비교하거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이 단지 용어상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거나 "부르주아 진영과 프롤레타리아 진영을 구분하지 않는다"[6]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거짓이며, 이는 이론적으로 코뮤니즘과 일치하지 않는 반(反)맑스주의적 비교에 해당한다.

 

1926년 아나키스트 "마흐노비스트" 조직 강령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게는 1926년 조직 강령[7](이하 강령)이 "러시아에서 반(反)혁명에 대한 저항이 분쇄된 이유 중 하나는 저항하는 사람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 그리고 강령의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올바르게 주장한 "점은 흥미롭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혁명의 퇴보에 반대하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계급적 반응이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은 무엇인가? 이러한 대응은 정확히 무엇이었나? 그것은 모든 생산 단위를 조정하는 중앙 조직 없이 모든 생산 단위가 다른 생산 단위와 직접 거래하는 아나키스트 사회의 생산 시스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들은 지방 정부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상품 생산을 통한 상업주의 경제에서 규모가 변화한다고 해서 사회의 기본 구조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개 기능(상업 등)을 수행하는 중개 계급은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입장에서 새로운 생산체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생산체제에서 조직 기능은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또는 공장과 공장의 노동자 행정과 같이 노동자 대중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진 기구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구는 시, 도, 국가 차원에서 서로 연계하여 생산 관리 및 운영을 위한 시, 도, 그 이후 일반(연방)기구를 구성하게 된다." [8]

 

ICC는 강령의 계급사회에 대한 인식과 그 핵심에 뿌리를 내린 계급 적대감이 맑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그 강령에서 맑스주의 영향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맑스가 J. 바이데마이어(Weydemey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계급 간의 투쟁에 대해서 발견한 공로는 나에게 있지 않다. 나보다 훨씬 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과 부르주아 경제, 계급의 경제를 설명했다. 내가 한 일은 새로운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계급의 존재는 생산 발전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와 결부되어 있을 뿐이며,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 이 독재 자체가 모든 계급의 철폐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에 불과하다." [9]

 

따라서 계급사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맑스주의 이론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하고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는 맑스주의적 방법에 따라 진전된 것이다.

 

그 강령 자체에서 " 이행기"는 "낡은 것의 흔적을 가진 새롭게 태어난 사회"[10]라는 역사적 유물론(즉 맑스주의자)의 입장과 전혀 다르다. 이행기라는 개념 자체가 강령에서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반(反)아나키스트적 일수 있다.

 

"사회혁명이 아나키스트 사회가 아니라 구(舊)자본주의 체제의 요소와 유물을 간직한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이행기 개념은 본질적으로 반(反)아나키스트적 발상이다.“

 

그 강령에는 관념적이고 반(反)맑스주의적 방법의 보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과 형식은 「코뮤니스트 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과 소부르주아 아나키스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보기를 들어:

 

"동시에 현재의 사회 구조는 노동 대중을 자동으로 무지와 정신적 침체 상태로 유지하며, 교육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못 하게 하여 통제가 더 쉬워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모든 그리고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 대중은 아나키스트에게 명확하고 정확한 답변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스트 혁명과 아나키스트 사회 구조의 개념에 대해서 대중이 관심을 두게 되면, 그들은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하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아나키즘의 일반적인 개념과 연결하여 효과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자원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체 아나키스트 연합」과 아나키스트 운동이 사회 혁명에서 사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또는 "아나키스트는 사실 국가가 대중의 모든 권리와 사회 및 경제생활에서 모든 기능을 박탈하기 때문에 국가를 가장 큰 장애물로 간주한다. 국가는 미래사회에서 단 하루도 좋은 날이 없어서는 안 되도록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승리의 첫날에 노동자들이 파괴해야 하며 다른 어떤 형태로도 복원해서는 안 된다. 그 자리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자체 관리 노동자 조직의 연합으로 구성된 체제로 대체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국가 권력의 조직과 어떤 정당의 독재를 모두 배제한다." (원문. 우리가 강조 추가).

 

이러한 설명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시대에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 된다“

 

"왜 반(反)권위주의자들은 정치적 권위, 국가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까? 모든 사회주의자는 다가오는 사회 혁명의 결과로 정치적 국가 그리고 그것과 함께 정치적 권위가 사라지는, 즉 공적인 기능이 정치적 성격을 잃고 사회의 진정한 이익을 감시하는 단순한 행정 기능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반(反)권위주의자들은 정치 국가를 탄생시킨 사회적 조건이 파괴되기도 전에 정치 국가를 단번에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혁명의 첫 번째 행동은 권위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신사들이 혁명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까? 혁명은 확실히 가장 권위주의적이다. 그것은 인구의 한 부분이 소총, 총검, 대포, 즉 권위주의적 수단을 통해 다른 부분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승리한 정당이 헛되이 싸우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무기로 반동 세력에 공포심을 불어넣어 이러한 지배를 유지해야 한다. 파리 코뮌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무장한 민중의 권위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을까? 반대로 자유롭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을 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따라서 두 가지 중 하나는 반(反)권위주의자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거나, 이 경우 혼란만 야기한다는 것, 또는 알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을 배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반동에 도움이 된다." [11]

 

아나키스트 강령은 계급투쟁을 사상투쟁의 입장으로 축소하거나 이행기에 관한 입장과 미래사회 구조에 관한 입장으로 축소함으로써 아나키즘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나키스트 방법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는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의 개념은 이론적 입장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개념으로 취급되었다.

 

이론과 실천의 아나키즘

 

아나키즘 흐름이 맑스주의 이론을 활용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들은 맑스주의 이론의 내용 중 자신의 도덕적 입장에 맞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과 방법 전체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기를 들어, 그들은 임금노동에 대해서 착취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도덕 개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제1 인터내셔널 이래 맑스주의 이론 일부이자 이론적 이바지해 온 자주적 생산 단위의 중앙집권화와 해체, 그리고 이들 사이의 상업과 무역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 이러한 기회주의적 글 및 코뮤니스트 운동과 아나키스트 운동 사이의 실제적이고 계급적인 차이를 무시하려는 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과 제1 인터내셔널 내부의 투쟁을 통해 아나키즘은 [12]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중도주의적 혁명당의 편을 직간접적으로 들었고, 그러한 비(非)정치주의와 경제주의적 실천을 통해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 정치적 흐름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1936-1939년 스페인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지지,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서 아나키스트가 어느 한 편을 지지했거나[13],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압도적 다수의 아나키스트가 어느 한 편을 지지하거나 군대에 합류한 상황 등, 근본적으로 반(反)노동계급적 성격을 가진 아나키즘의 역사적 사례는 오늘날까지 많이 존재한다. 노동자 운동의 발전 초기부터 아나키스트 조직원들은 아나키스트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충실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여 볼셰비키 당원이 되거나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같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옹호자가 된 많은 아나키스트가 정치적으로 아나키즘과 결별한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마흐노와 그의 성원들이 코뮤니스트 지지자, 볼셰비키, 그들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공격하고 처형한 다른 사례도 있다. 이를테면, 마이클 말레(이 책을 쓸 당시 아나키스트)는 「검은 군대」의 부대에 있던 폴론스키(Polonsky)라는 코뮤니스트에 관해 이야기한다. 불운하게도 폴론스키는 지방 볼셰비키 당 대회에 참석했고, 마흐노는 그의 첩보부대에 이들을 모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폴론스키의 니코필(Nykopil)에서의 활동과 카테리노슬라브(Katerynoslav)에 드나드는 모습은 비록 군대의 업무를 하는 중이기는 했지만 분명 눈에 띄었을 것이다. 지휘관 회의가 12월 4일 카테리노슬라브에서 열렸다. 폴론스키 외에도 다른 니코필 코뮤니스트들이 지방 당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는 자신의 활동에 관한 보고를 할 만큼 신중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후 자정이 되자, 폴론스키는 마흐노와 다른 친한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한 시간 후 카레트니크(Karetnyk), 추벤코(Chubenko), 바실리프스키(Vasylivsky)가 폴론스키와 니코필(Nykopil), 카테리노슬라프(Katerynoslav) 등 볼셰비키 몇몇을 결박했다. 사형 선고를 받기는 하였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며, 콘트라즈베드카(방첩대)에 넘겨져 처리된다. 그들은 강으로 끌려가서 총살 당했다." [14]

 

같은 작품에서 말레는 마흐노의 농민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마흐노에게 강탈당하고 마흐노가 실천에 옮긴 경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해의 결과로 고통받는 노동자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언급한다. 마흐노의 목표는 농민 공동체와 도시의 노동자 사이에 일종의 물물교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브스케의) 마흐노비스트들은 두 차례의 노동자 대회를 조직했고, 이 대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통제 아래 생산을 재개하고 농민들과 직접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고 임금을 원했다... 전형적인 오해는 마흐노비스트들이 백군에게 획득한 총의 자물쇠를 수리하기 위해 큰 브랸스크 공사에 보냈을 때 발생했다. 작업이 완료되었으므로 노동자들은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적은 금액의 현물 지급 제안에 당연히 모욕감을 느꼈다. 이런 배은망덕한 태도에 분노한 마흐노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는 것 없이 총을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 그는 이어서 반란군 신문에 기사를 실어 브랸스크 노동자들을 '최전선 전사들의 피와 영웅주의를 희생해서라도 자신들의 풍요를 늘리려는 쓰레기, 이기주의자, 협박범'이라고 공격했다"[15].

 

마흐노비스트 운동은 노동자 운동이나 심지어 예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아나키스트 방식과 그 소부르주아적 성격의 정확한 결과였다. 아나키스트의 이러한 경험을 정화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회주의에 빠질 필요도 없다. 매우 다른 두 전통을 조화시키려 하기보다는 1873년 스페인 봉기에서의 활동과 제1 인터내셔널에서 그들의 모험주의를 통해 엥겔스가 아나키스트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주목해야 한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은 국가의 정치적 조직을 없애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조직은 바로 국가다. 이러한 국가는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기 전에 상당한 변화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 획득한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 적들을 억누르며 사회의 경제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는 모든 승리는 새로운 패배와 파리 코뮌 이후와 유사한 노동자들의 대량 학살로 끝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16]

 

역사적으로 아나키스트는 전술뿐만 아니라 이론적 이해에서도 체계적이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주의 국가를 지지하면서 처음에는 '국가의 죽음'을 외쳤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더는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는 조직을 대표하지 않는 것처럼, 이 시대의 정부(공화주의 국가)는 국가라는 조직을 규제하는 도구로써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적 힘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CNT의 개입으로 인해 국민을 억압하는 경향이 더욱 줄어들 것이다"[17].

 

또는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했다가 나중에 반대하고, 러시아혁명을 국제혁명으로 이해하고 코뮤니스트 사회 건설을 위한 국제혁명의 필요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볼셰비키 운동을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의 이러한 이론적 변화는 제1차 세계대전에 편승한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열여섯 가지 항목의 선언'을 거부하고 '국제주의자'의 입장을 취한 아나키스트도 받아들였다. 그들의 국제주의 혁명은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국제주의는 이름뿐이며 이론이나 행동이 아니었다.

 

이러한 비(非)정치주의 경향은 아나키스트 흐름이 혁명의 물질적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후퇴했지만 필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도 혁명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비호 아래 노동 수용소(당시에는 강제 수용소라고도 불렀다)의 설립을 요구하고 민족주의 선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18] 이러한 관행은 권위와 위계라는 그들의 개념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부르주아 국가와 동맹 및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노동자에 대한 억압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필요한' 행위가 된다.

 

연방주의: 자본주의의 유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푸르동의 경제적 이상주의는 아나키즘에 내재해 있다. 연방주의 또는 분권화와 자기 관리의 경제 구조는 다양한 아나키스트의 이론 작업에서 지속해서 견지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19]에 관한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이 선호하는 사회 구조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권력의 섬들이 서로 물물교환하고 재화를 직접 교환하는 방식으로 교환가치의 보존을 통해 상품생산과 임금노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물교환 방식을 통해 화폐 제도는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의 등가성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으며, 이러한 상품의 등가성은 상품의 소멸이 아니라 상품생산의 강화에 이바지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노동력 착취는 철폐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화폐는 교환의 매개체로써 생산과 소비 사이에 필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선진국 화폐 제도에서는 교환을 위해서만 생산하거나, 교환을 통해서만 그것을 생산하게 된다. 화폐를 없애면(보조적 물물교환에 해당하는) 낮은 생산 단계로 되돌아가거나, 교환가치가 더는 상품의 주요소가 되지 않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화폐를 대표하는 사회적 노동이 더는 사회적으로 매개된 사적 노동으로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20]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아나키즘이 자유 교환과 자유 시장의 지속,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회 및 경제 관계에 대한 소부르주아지의 꿈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이상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자본주의 관계의 구체적인 부분을 변화시키지 않는 행위와 개별 테러 행위에 의한 선전의 관행이다.

 

맑스와 엥겔스 당시에도 아나키스트는 프루동과 다른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의 이론에서 얻은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엥겔스가 파리 코뮌 20주년을 맞아 코뮌의 경제 상황을 언급하며 구시대적이라고 표현한 말이다.

 

"1871년에 이르러 수공업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도 대규모 산업은 이미 더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어서 코뮌의 가장 중요한 법령은 각 공장 노동자들의 연합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연합을 하나의 거대한 연합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산업과 제조업의 조직, 즉 맑스가 『내전』에서 올바르게 말했듯이 결국에는 반드시 코뮤니즘, 즉 프루동 교리와 정반대되는 조직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따라서 코뮌은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무덤이기도 했다. 오늘날, 이 학파는 프랑스 노동계급 사회에서 사라졌다; 지금 그들 중에서, 맑스주의 못지않게 가능성 있는 것 중에서, 맑스주의 이론은 도전받지 않고 지배적이다. "급진적인"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만 여전히 프루동주의자들이 있다." [21]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마흐노비스트의 연방주의에 대한 지지는 스페인 내전 당시 아나키스트의 연방주의와 프루동 경제학의 연방주의와 비슷하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 혁명가들의 용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국제 프롤레타리아 투쟁과의 관계에 대한 유산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좌파, 즉 부르주아적 성격이 스탈린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아나키스트 운동을 좌파, 즉 자본의 좌파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흐름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완전한 세력으로 간주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노동자 단결'이나 '아나키스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와 같은 변명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 동지 그룹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비판을 억누르고 자신의 당에 성찰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욕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통일의 단순한 사실이 노동자에게 만족스럽지만, 이러한 순간적 성공은 너무 큰 희생을 치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22]

 

2022년 10월

다론(Daron)

코뮤니스트좌파 국제그룹(IGCL)

 

<주>

[1] https://en.internationalism.org/wr/336/anarchism

[2] https://files.libcom.org/files/Volin%20The%20unknown%20revolution.pdf

[3] Peter Arshinov, 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 (1918–1921)

[4] 사회주의혁명당(SR)은 "농업 사회주의자"이자 민주적 사회주의 러시아 공화국을 지지하였다. 나로드닉의 이념적 후계자인 SR은 차르의 전복과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를 확보했다. 이 조직의 좌익은 나머지 조직보다 볼셰비키 및 아나키스트들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했다.

[5] 알렉산드르 스키르다, 폴 샤키 - 네스토르 마흐노 아나키의 코사크 우크라이나 자유 소비에트를 위한 투쟁 (1917-1921)

[6] https://en.internationalism.org/wr/336/anarchism

[7] https://libcom.org/article/organisational-platform-general-union-anarchists-draft

[8] "1926년 프랑스에 망명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인 디엘로 트루다(노동자 대의)그룹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에 관한 이러한 소책자('자유주의 코뮤니스트 조직 강령'으로도 알려져 있음)를 발간했다.“

(https://libcom.org/article/organisational-platform-general-union-anarchists-draft)

[9] Marx’s letter to J. Wydemeyer, March 5th 1852.

[10]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by Marx

[1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2/10/authority.htm

[12] 그것은 정치적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의 경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확신할 수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나 좌파를 위해서 우리가 하지 않는 것처럼 개인의 아나키스트 성원이 접근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명확하고 직접적인 논증을 통해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의 소부르주아 계급적 성격과 오늘날 좌파 또는 자본으로의 완전한 통합, 즉 정치적 기구로의 통합을 비판하는 것이다. 더욱이 아나키즘이나 트로츠키주의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환상을 정치적 흐름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편집팀에 의해 추가됨).

[13] "16가지 항목의 성명(프랑스어: Manifeste des seize) 또는 16가지 항목의 선언은 1916년 저명한 아나키스트 피터 크로포트킨과 장 그레이브가 작성한 문서로, 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주요 강대국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를 옹호했다." (위키백과)

[14]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ichael-malet-nestor-makhno-in-the-russian-civil-war

[15]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michael-malet-nestor-makhno-in-the-russian-civil-war

[16] Engels letter to Philipp Van Patten - 1883

[17] 솔리다리다 오브레라, CNT의 아나키스트 일간지, ICT 팸플릿 스페인 1934-39에서 인용: 노동계급 투쟁에서 제국주의 전쟁까지

[18] https://files.libcom.org/files/WorkersAgainstWork-Seidman_0.pdf

[19] http://igcl.org/Spain-1936-Can-There-be-a and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1-09-01/spain-1934-39-from-working-class-struggle-to-imperialist-war

[20]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7/grundrisse/ch04.htm#p213

[2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1/civil-war-france/postscript.htm

[22] Marx to W. Bracke In Brunswick, 1875,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5/letters/75_05_05.htm

 

 

 

<출처> 「혁명인가 전쟁인가」 23호, 2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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