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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Ⅱ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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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후

 

헤이그 회의 이후 몇 년 동안 두 개의 인터내셔널이 존재했다. 미국의 제1 인터내셔널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맑스는 그 일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급성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연구하고 조언하는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회의는 공식적으로 미국 제1 인터내셔널을 해산시켰고, 이들은 불과 며칠 후에 사회주의 노동당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헤이그 회의 직후, 결의안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은 세인트 이미어(St. Imier) 인터내셔널로 재집결했다.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바쿠닌은 1873년에 공식직함에서 은퇴했다. 말년에 그의 가까운 동지인 기욤(Guillaume)과 카피에로(Cafiero)와 사이가 틀어져 1876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이미어 인터내셔널은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일부 진출했고, 한동안 미국의 제1 인터내셔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주도했지만, 봉기와 개인의 폭력 행위(행위에 의한 선전이라고 불리는 것)의 경로를 따라 지금은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로 회원들의 출혈이 있었다. 1877년 베르비에르 회의가 마지막이 되는 것이었다.

 

통념과는 달리, 두 경향의 통일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이 중 첫 번째는 이미 1877년 겐트에서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회주의 회의의 대표자 중에는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프란켈(Fränkel), 기욤(Guillaume), 크로포트킨(Kropotkin: 최근에는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여 곧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이 있었다. 공동 재산과 산업 투쟁에 관한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그 행위에 의한 국가, 정당, 의회주의, 선전의 주제가 나오자 오래된 주장이 다시 나타났다. 겐트 회의 이후 구체적인 조치는 없었지만, 이는 논쟁하는 용어의 변화를 상징했고, 맑스와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이제 각각 사회민주주의자와 봉기주의자가 되었다. 1881년, 전자는 제2 인터내셔널을 결성하기 위한 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처르에서 만났고, 후자는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일명 흑인 인터내셔널)를 설립하기 위해 만났다. 사회민주주의가 전국적 기초 위에 노동계급 대중정당을 만드는 데 기반을 둔 것이라면, 봉기주의자들은 기권을 설파하고 폭력적 직접행동에 전념했다. 제2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 블랙 인터내셔널은 헤이마켓(Haymarket) 대학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1880년대에는 다양한 반(反)사회주의 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맑스는 1883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것의 탄생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9년 제2차 인터내셔널 회의가 열렸을 때, 수천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수백 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그것은 전(前)아나키스트자에서 개량주의자로 변신한 폴 브루스가 이끄는 실증주의자와 전 아나키스트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한 쥘 게드와 라파르그가 이끄는 맑스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수반되었다(엥겔스는 이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지지했지만, 일반적으로 대회에 거의 희망을 두지 않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파리에는 실제로 두 개의 협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제2 인터내셔널이 태어났으며 헤이마켓 대학살을 추모하여 메이데이를 8시간 동안의 투쟁에서 연례 국제 노동 시위로 선언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현재 그리고 이전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말라테스타(Malatesta)와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3년 취리히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해 아나키스트들을 따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모든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조직과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회당 및 조직으로 회의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이란 노동계급 조직이 가능한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증진과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해 정치적 권리와 입법 기구를 활용하거나 정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2 인터내셔널 결의안, 1893년)

 

그런데도 그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1896년 런던 회의에서 이 문제는 다시 논의되었다. 말라테스타는 반(反)의회주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고, 그는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웬후이스(Ferdinand Domela Nieuwenhuis),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톰 만(Tom Mann), 키르 하디(Keir Hardie)의 지지받았다. 그러나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하인리히 하인드만(Henry Hyndman)은 취리히 결의안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리프크네흐트는 입법과 의회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당과 노동조합만이 다음 회의에 초대될 것이라고 명시한 새로운 결의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통과되었고 아나키스트들의 제명은 이제 공식화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제2 인터내셔널은 맑스주의자의 세계관이긴 하지만, 중앙조직(국제사무국이 설립된 1900년까지)이 없는 강력한 국가 부문으로 구성된 더욱 연방적인 형태의 조직과 비슷한 것이었다.

 

1890년대와 1910년대 사이에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한 사회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선거에서 성공을 거둔 것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 내에서 혁명적 경향이 커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다시 한번 논쟁의 조건이 바뀌었지만, 러시아혁명과 제3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단순하게 모인 것은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무엇이 맑스와 바쿠닌을 갈라놓았는지 돌이켜보면 원망과 오해, 편견은 물론 추종자들의 부정적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도, 실제 조직과 그 이면에는 정치적 차이가 존재했다.

 

• 맑스는 노동계급의 모든 경제적 투쟁을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고, 유일한 문제는 어떤 사상이 흔들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그러한 정당은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 선거, 집회 및 결사의 권리, 언론의 자유를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다가올 전투에 대한 훈련과 경험을 제공할 것이었다.

 

•바쿠닌은 노동계급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이미 사회주의적이라고 보았고, 그는 정치를 대중을 지배하는 예술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기권을 촉구했다. 대신 그는 모든 노동자가 부문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단일한 보편적 협회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조직 내에서 소수를 형성하고 비밀리에라도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하기 위해 함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맑스는 제1 인터내셔널이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쓸모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반면에 바쿠닌은 제1 인터내셔널이 미래 사회의 배아였다. 바쿠닌은 처음에는 총협회의 권한 이 증대되는 것을 승인했지만, 자치 구역 간의 단순한 통신 및 통계국으로 축소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맑스는 총회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행동을 중앙집중화하는 수단으로 보았고, 우편함에 지나지 않는 총회보다는 총회 폐지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그들의 서로 다른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었고 양립할 수 없었다. 맑스와 바쿠닌은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술을 사용했고, 곧 "중앙파"와 "연방파" 사이의 갈등(엥겔스가 공개적으로 거부한 차이)으로 비화되었다. 보기를 들어, 맑스는 비밀 조직(코뮤니스트 동맹)의 일원이었고, 바쿠닌은 선거에 출마하여 부르주아 정당과 전술적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카를로 감부치와 셀소 케레티에게 보낸 편지에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맑스와 바쿠닌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각각 총회와 동맹을 대표하여 서로 권위주의를 비난하였다.

 

다양한 국가적 관점은 어떤 맥락을 제공한다. 맑스에게 중앙집권화(국가, 자본, 생산수단, 재산, 사람)는 봉건주의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노동계급 운동의 기초를 만든 역사적 경향이었다. 바쿠닌은 이 과정이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 침탈에 맞서 개인, 협회, 공동체, 지구 및 지방의 연합을 옹호했다. 그러나 맑스는 '진보'를 맹목적으로 방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일단 러시아의 조건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농민 공동체가 코뮤니스트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그러나 서유럽에서의 차리즘의 몰락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관련해서만). 그런데도 맑스의 사상이 산업화한 서유럽과 자본주의가 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남유럽, 바쿠닌의 농촌에서 그들의 거점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쿠닌은 프루동주의와 코뮤니즘을 혼합한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그가 자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 발전을 통해 발생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폐지해야 할 주요 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국가를 주요 악으로 간주한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국가 권력이란 지배계급, 지주, 자본가들이 그들의 사회적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제공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바쿠닌은, 자본가는 국가의 비호에 의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국가는 주요 악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없어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르 쿠노에게 보내는 엥겔스 편지, 1872년 1월 24일)

 

맑스와 아나키즘 사이 현대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맑스는 "국가주의자"이고 바쿠닌은 "반(反)국가주의자"라는 주장이었다. 맑스는 바쿠닌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모든 사회주의자는 아나키 상태를 다음과 같은 강령으로 본다: 일단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목표, 즉 계급의 폐지가 이루어지면, 대다수 생산자를 극소수의 착취자, 소수에게 속박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가의 권력은 사라지고 정부의 기능은 단순한 행정 기능이 된다.” (맑스와 엥겔스, 인터내셔널의 가상의 분열, 1872)

 

바쿠닌의 많은 공격은 실제로 맑스가 아니라 독일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요소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맑스가 바쿠닌이 그를 비난했던 "국가 코뮤니스트들"과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맑스가 비판한 내용 대부분은 사후에 출판된 친서와 문서에 국한되어 있으며, 바쿠닌에 대해서는 그것을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쿠닌은 또한, 맑스의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소동이 있었지만, 바쿠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는 비스마르크(Bismarck)는 말할 것도 없고 라살레(Lassalle)의 "인민국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맑스와 엥겔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란 정치권력 획득과 모든 계급을 폐지하는 것으로 전환을 의미했다. 1848년 혁명의 경험 이후 그들은 이미 오래된 국가 기계의 해체를 수반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고,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기는 파리 코뮌(프랑스 내전, 1871년 맑스)이었다.

• 그와 동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주창한 전체 혁명계급의 독재를 '혁명을 일으킨 소수'의 독재 그리고, 이전에는 한 명 또는 여러 개인의 독재하에 조직되어 있던 그들 자신의 독재라는 블랑키스트의 입장과 구별했다. (엥겔스, 1874년 파리 코뮌의 변하기 쉬운 블랑키스트 강령)

 

이미 적시한 바와 같이, 제1 인터내셔널은 항상 불안한 정치적 경향들의 동맹이었다. 이론적으로,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스트, 라살레주의자 등의 메들리 옆에 맑스, 바쿠닌과 그 추종자들이 그 안에서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분열이 되었든 아니든 제1 인터내셔널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들의 개인 편지에서 맑스와 바쿠닌은 곧 이러한 부분을 인식했다. 노동계급 운동이 파리 코뮌에 이은 억압으로부터 회복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다른 세계로 나타났다. 187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제2차 산업 혁명은 세계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속했다. 노동자 운동의 무게중심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갔다. 자본주의 대도시에서는 바리케이드 시대가 끝나고 대대적 파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50년 후

 

제1 인터내셔널 이후 아나키즘은 가끔 모순된 입장을 드러내면서 더 많은 경향으로 분열되었다. 일부는 제국주의 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거나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체라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혁명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했다. 바쿠닌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유물론적 방법의 전부는 아닐지라도)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우리 코뮤니스트를 어떠한 아나키스트들과 결속시키는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과 무국적 사회 설립의 목표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가 지지하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거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것들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반사 과정의 산물이다. 맑스는 노동계급 운동에 절실히 필요한 유물론적인 근거를 제공했지만, 그것이 그가 자본주의 초기에 옹호했던 모든 전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맑스와 바쿠닌 사이의 갈등이 1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면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위기, 전쟁, 혁명의 폭풍을 이겨냈다. 그것은 최근 축적 주기의 진통 속에서 이제 세계적인 시스템 되었다. 그것은 중심지에서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거의 없애고, 세계 인구의 대다수에 임금 노동을 부과했으며, 사회주의 대안이 실행할 수 있는 정도로 생산수단을 발전시켰다. 국가기구가 확장되고, 금융자본이 지배하며, 이제 글로벌 전쟁의 대량파괴를 통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 없이는 새로운 축적 사이클의 시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경쟁과 환경 악화는 지구상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국가적 관점은 부적절하다. 맑스와 바쿠닌이 독일과 러시아의 국가 발전에 대해 도달한 서로 다른 결론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해결되었다. 두 나라 모두 자본주의의 우위에 있으며, 더욱이 그들은 제국주의 강국이 되었다. 점진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를 혁명적 호민관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고갈됐다. 현대 민주주의는 조직적인 억압과 방대한 선전 기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의 독재 뒤에 놓여 있는 무화과 잎에 불과하다. 오늘날, 대중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국가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권위와 자유의 진정한 통합은 1905년 노동계급이 발견한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대안인 노동자평의회이다.

 

이처럼 국제주의, 반(反)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자기조직화, 노동자평의회 통치는 모두 화해의 잠재적 지점으로 작용한다. 인터내셔널 정치조직이 정치적 나침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분명한 강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점, 노동자평의회가 독점적인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코뮤니즘으로의 불가피한 과도기적 단계 등 여전히 남아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들은 순전한 의지를 통해 해결될 수 없으며, 역사가 확인하듯이 훨씬 더 첨예한 반대 속에서 똑같은 차이점을 다시 한번 포기하는 통합에 호소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제1 인터내셔널의 분열과 종말이 젊은 노동계급 운동의 후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개량주의에 의해 쇠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하여 붕괴)이나 제3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 1920년대 러시아 및 국제혁명의 패배에서 나타난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의 외교정책 부문으로 끝남)의 실패는 재앙이 아니었다. 국가 자본주의 계승자들 모두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반대자로 남아 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 창설에 전념하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스스로 규정한 꼬리표에 근거하지 않고, 그 뒤에 모든 종류의 혼란과 속임수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진보적인 것을 제공할 수 없는 낡아빠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처에 있는 임금 노동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공통의 강령에 대한 합의에 따라 혁명가들을 통합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해답을 가진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쿠닌과 맑스 시대에 여전히 열려 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계급투쟁, 경제 위기, 전쟁 및 혁명의 굴곡진 역사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강령을 통한 대화에 항상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인류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는 이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자신을 계급투쟁에 헌신하는 아나키스트로 보는 모든 사람에게 150년 전 이후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향한 그 긴 노정에서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2022년 6월

다이즈버즈(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9-02/150-years-on-the-split-in-the-first-international
 

 

<이전 글>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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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독자의 소리

독자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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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전, 처음 제주에 올 때 책을 열권 정도 챙겼는데 그중 절반이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에서 발간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코뮤니스트」는 생각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고 싶은 책들이지요. 읽다가 다소 어렵게 느껴져서 책장을 수월하게 넘기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읽어나가며 종종 해방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특히 계급평등을 위한 여성해방, 장애해방과 관련한 내용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계급이 있는 곳에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으니 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든 자본주의는 코뮤니즘으로 끝장내야 할 것입니다.

 

또, 책을 통해 알게 된 국내 정세 및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는 앎의 차원을 넘어서 때때로 오랜 시간 동안 사유하게 하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삶에 대해 투지와 통찰력을 키워주기도 합니다. 비록 일상에서 쉽게 나눌 수 없는 내용이기에 주위 분들에게 책을 직접 권하지는 못하지만, 대화 중 은연중에 책 속에서 읽었던 부분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코뮤니스트」를 읽을 때면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기차게 짚어주며 혁명과 희망을 나누는 분들의 숨결이 글자 위로 느껴지기에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함께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문득 책장에 있는 책들을 보니 2018년에 ICP 동지들을 처음 만났나 봅니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알게 되면서 ‘진작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드는 분들이 있는데 ICP 동지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책을 알게 해주고 또 멀리서도 읽을 수 있도록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뮤니스트」 창간 10주년 축하 드리며 앞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분노하고 애도하며 연대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 제주에서 5년 차 독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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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주년 그리고 투쟁

 

2014년도 염호석 열사 투쟁을 거치며 힘겹게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노동법 세미나로 연대하시던 부산반빈곤센터 고 윤웅태 대표님과 당시 사무국장인 최고운 동지를 만나며 함께 운동의 길을 모색할 때였습니다. 11월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총파업 투쟁 이후 밤에 만났던 ICP 동지들을 뵈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어리둥절하게 「코뮤니스트」 책자를 받았고, 그날 모인 모 동지는 “여기까지 오면 참 많이 온 거다.” 잘 생각하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선 조금 뒤로 많이 가는 행보인데 괜찮냐는 의미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동을 함께 하며 너무 힘이 차올라 하루하루가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깨닫는 요즘입니다.

 

 

힘들 때마다 ICP 동지들을 자주 만났었네요. 윤 대표님 돌아가시고 그해에 박근혜 몰아내는 투쟁을 할 때도 함께 만났고,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파괴 문건 6천 건이 터져서 난리일 때도 당시 대의원 활동을 하던 제게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준 ICP 동지들 기억납니다. 그때 노조의 이야기를 「코뮤니스트」에 실어준 이형로 동지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9개 지회장이 운영위 성원이 되어 회의록을 집필한 뒤 당연직 대의원으로 돌아와 고작 40명 넘는 대의원 회의를 좌지우지하는 체제에 반기를 들고, ‘대의원 당연직 폐지’ 안건을 주장하며 1대 다수와 싸우며 대의원 회의장을 박차고 들어갈 때도 역시 ICP 선배 동지들의 좋은 조언들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코뮤니스트」 10주년 속에 저의 투쟁과 반빈곤센터의 투쟁과, 돌아가신 열사의 염원과 먼저 가신 윤웅태 동지, 만나 뵈진 못했지만, 남궁원 동지의 뜻까지. 모두의 힘이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10주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늘 함께 오랫동안 건강한 투쟁 하면 좋겠습니다.

 

- 부산에서 독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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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과제

2024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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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전망」 23호(시리즈 4) 사설

 

 

2024년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끔찍한 곳으로 보인다. 물론 그 중앙 무대는 가자지구의 대학살이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잔인한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대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으로 인해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수만 명이 사망했는데, 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의 사망자 비율이 20:1에 달한다. 가자지구에서는 7,000명 이상이 '실종'되었고, 19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이스라엘에서도 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매일 새로운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명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청소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가자 지구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구의 강제 이동이 잘 끝난 경우는 거의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주민들은 하마스 민병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와 압도적 전쟁 장비를 갖춘 이스라엘 국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악랄한 덫에 걸려 있다. 모든 잔혹 행위는 상대방의 야만성에 공포를 느끼고 경악하는 더 많은 적(敵)을 만들어내고, 그 공포를 이용해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잔혹 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혁명적 전망」 이번 호의 첫 번째 기사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잔혹 행위의 역사적 맥락,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 이 지역의 여러 공동체 사이 관계의 역사, 지역 및 세계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이익을 위해 여러 집단과 국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설명한다.

 

전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레바논, 시리아, 이란, 예멘이 분쟁에 개입할 위험이 있다. 폭탄과 로켓 공격, 포격, 공습이 이 지역 전역에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인 1월 초, 헤즈볼라가 레바논 남부에서 '수백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는 뉴스 보도가 나왔다. 지금까지 헤즈볼라는 하마스에 대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거의 없이 말뿐인 지원에 만족해 왔다. 이 두 민병대는 서로 다른 이슬람 종파 출신으로,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의 수니파 단체가 동맹을 맺고 지원하고, 다른 하나는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민병대이다. 그러나 둘 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주요 후원자인 미국에 반대하고 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더 넓은 이란과 동맹을 맺은 후티 민병대가 국가를 장악하고 이를 홍해의 국제 선박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고 있는 예멘에서 더 넓은 분쟁에 연루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제국주의적 긴장이 고조되는 혼돈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담지 못했다. 이에 관한 추가 기사는 웹사이트에 게재할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물론 자본주의가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전쟁만이 아니다. 석유 매장량을 보호하거나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추진, 점점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 물 공급 분쟁, 리튬과 같은 원자재 확보에 이르기까지 환경 파괴는 전쟁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고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며, 그 자체가 전쟁의 원동력 중 하나이다. 한편 세계의 '지도자들'은 우스꽝스러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 협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온실가스 배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효과적인 조치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연례 잼버리는 이제 화석 연료 회사의 로비스트 수천 명과 국영 석유 회사에서 선발된 국가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 세계 화석 연료 산업의 선전 도구로 공공연하게 활용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에 합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화석 연료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목적과는 달리, 국가와 기업들은 지구의 천연자원에 대한 파괴적인 착취를 계속하기 위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무역 박람회로 이 회의를 이용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끝없는 이윤 추구로 인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녹색 자본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며,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인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두 번째 기사에서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회의와 그 즉각적인 결과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작한 진로를 바꿀 수 없는 경우 헤드라인 뒤에 숨겨진 과학적 사실과 세계가 나아갈 전망을 살펴본다.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가 되고, 정치 위기가 환경 위기나 군사 위기, 인도주의 위기가 되어 경제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등 위기를 양산하는 체제이다. 2차 대전의 엄청난 파괴와 고통, 그리고 그 여파로 냉전의 적대감이 고조된 가운데 전후 호황을 누렸던 세계 자본주의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 종료와 함께 전후 경제 합의를 종료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 이후 50년 이상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윤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반세기 동안 경제 위기, 일시 모면하는 해결, 새로운 시작, 경제적 황폐화가 이어졌고, 기술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 시리즈의 4부에서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이 종료되고 1991년 소련 블록이 해체된 후 케인즈주의 합의가 종식되고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계화'와 '금융화'가 시작된 시기 사이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이번 호의 마지막 기사는 레닌 사망 100주년을 맞아 레닌의 업적과 유산을 살펴보는 역사적 기사이다. 맑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역사가 '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개념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역사적 시기에 중요한 인물이 살면서 활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100년 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상징으로 새롭게 탄생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레닌이 사망한 1924년,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의 망토를 두른 소련을 포함해 세계 혁명의 물결이 가라앉고 반(反)혁명의 긴 밤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반혁명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지만,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레닌을 역사적 맥락에 놓고 그의 위대한 공헌과 오류, 그리고 반혁명의 후계자들이 레닌의 유산을 왜곡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에게 레닌의 가장 큰 공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내전', 즉 계급전쟁으로만 끝낼 수 있고, 계급전쟁의 무기로서 노동계급이 국제정치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 다른 세계적 분쟁의 심연에 다다른 지금, 이것은 혁명가들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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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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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의 주범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한다!!!

 

 

1.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결의대회

 

지난 2023년 12월 27일,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는 대구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단속촉구, 출입국관리사무소 규탄, 지역민 일자리 사수 건설노동자 총파업 투쟁결의대회'를 열었다. 그동안 건설노조 일부에서는 일자리, 임금, 노동조건을 지키겠다며 불법 이주노동자 단속을 계속 주장해 왔다. 이는 윤석열 정권과 건설 자본의 건설노조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일자리에서 배제되고 경기침체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 배제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한국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하는 한 축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한국에서 자본과 정권은 매년 이주노동자 도입을 더 많은 업종으로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따른 이주노동자 인권은 현대판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임금체불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엔 1,300억이 넘고, 이주노동자의 70% 이상이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 역대 자본가 정권에 이어 윤석열 정권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해 온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의 제한에 더해, 지역이동마저 제한했고, 올해 이주노동자 도입을 16만 명으로 늘리면서도 체불임금과 산재 상담, 인권 상담을 담당했던 전국의 외국인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을 전액 삭감해 버렸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이주노동자의 신분상 제약을 악용해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임금도 상습 체불해 왔다.

 

그런데도 대경 건설지부는 “가자 총파업!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퇴출시키자!”라는 반(反)노동자 슬로건을 걸고 조합원 2,000여 명을 집결시켜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방식은 정주 건설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분열정책에 부역하게 되어 그들의 공격에 맞설 힘마저 잃게 만든다. 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노동조합의 조직적 활동으로 더욱 확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는 자본의 분할통제 정책(이용하든 이용당하든)에 따라 노동자를 불법/합법, 이주/정주, 정규직/비정규직, 원청/하청, 남성/여성 노동자로 분열시키는 계급 단결-연대의 방해 세력에 맞서 노동자 국제주의 기치 아래 싸워나갈 것이다.

 

2.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자본의 노동자 통치 방식

 

자본의 노동자 지배와 통제방식의 전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자본주의 주기적 공황과 그에 따른 차별 대우이다. 이것을 자본은 정의, 공정, 상대적 과잉인구, 인적 자본론, 성차별, 인종-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식적으로는 차별을 정당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차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용하도록 한다. 이것이 지배계급이 주장하는 공정의 전제이다. 정당한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인적 자본론’이다. 사람을 자본으로 보고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교육, 훈련)를 많이 할수록 인적자본(사람)이 받는 보상도 크다는 것이 인적 자본론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경영학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한 차별로 본다. 이 '능력'은 자본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며,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는 방향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소통과 연대보다 개인의 능력을 키우고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노동자 내부는 분열과 경쟁이 심해진다. 결국, 이것은 자본이 노동 전반을 통제하기 쉽게 만든다. 건설노동자 일부의 이주노동자 단속 주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시각이 여과 없이 투영된 결과이며, 민족주의-계급 협조주의에 기반을 둔 조합주의 병폐이다.

 

3. 노동계급 분열에 맞선 투쟁과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적대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계급의 연대를 약화하는데, 이것은 자본가계급이 민족국가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것과 부합한다. 그동안 자본가계급은 외국인(이주노동자) 혐오와 인종주의를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

정주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키고 부족한 노동력을 값싸게 채우는 역할, 불법 이주자의 지위와 존재를 이용하여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하락시키고 국경의 군사화를 이루는 데 이용하고, 종교적 인종주의로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것이다. ……

노동자들이 인종주의로 분열되고 분할지배에 순응한다면 투쟁은 약화하고 착취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종주의에 맞서 타협 없이 싸우는 것은 노동계급 단결을 복원하는 일이자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시급한 과제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혜원, ‘인종주의와 노동계급’, 「코뮤니스트」 8호)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대표적 통제방식인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과 맞물려있다. 조합원들의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이유로 정부의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을 정당화하고, 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에게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고 단속하라는 집단행동을 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서로 분열되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무력해진다. 자본주의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 전가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자본가계급에 이러한 노동계급 내부 분열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체제의 생명을 연장하고, 착취자들에게 새로운 이윤 창출 기회를 줄 뿐이다.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고 있고, 모든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 경제위기, 기후위기, 팬데믹, 환경파괴, 에너지 위기, 생계비 위기⋯. 위기의 폭주는 2024년에도 계속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 체제에서 고용불안, 저임금, 실업, 빈곤은 일상화되었다.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노동계급 일부를 배척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모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동의 적인 자본가계급에 맞서 다수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싸우는 길밖에 없다.

 

이주노동자, 난민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모든 세력에 맞선 국제주의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

 

우리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지배계급의 정책과 그에 부역하는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싸울 것이다. 나아가 모든 차별과 위기의 원인이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 분열과 희생을 거부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2024년 1월 24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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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그람시: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그람시: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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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신화는 끝이 없다. 가장 큰 신화는 공장점거 운동의 영웅이자 신질서( L’Ordine Nuovo)의 창시자이며, 1921년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d'I)」의 창설자라는 것이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전후 개량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I)」의 이론가들은 그람시의 이론적 개념과 범주를 사용하여 '유로 코뮤니즘'을 정당화하거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패한 시도로 러시아 블록에 대한 충성을 회피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국한되거나 소련의 붕괴와 유로 코뮤니즘의 소멸로 사라지기는커녕, 그람시의 방대한 저서는 이제 전 세계 학술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언어학에서 인류학을 거쳐 정치학, 사회학, '교차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람시의 헤게모니 사상, '수동적 혁명', '현대 군주론', '진지전', '실천철학'은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회를 개인의 집합체로 환원시키는 탈(脫)진리 시대에 번성하고 있다. 오래된 자본주의 중심지에서 산업 노동계급이 파괴된 후, 이 모든 생각은 노동당과 같은 이전에 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 조직의 재구성을 합리화하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그리스의 시리자 같은 자본주의 좌파의 새로운 포퓰리즘 운동에 기여하는 일에 이용되었다. 후자가 어떻게 차려입었는지에 관계없이, 그들은 대중의 노동계급 혁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전복시키지 않고 국가의 역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위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가 선거 지원으로 지지받는 기존의 정치 체제 내에서 일련의 운동과 동맹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기될 필요가 있다는 공통된 견해를 공유한다.

 

이전 시대에-자본주의의 현재 축적 위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노동계급이 사장의 공격에 저항하도록 자극받았을 때 - 자본주의의 좌파 정치 현장에서 아이콘의 무언가가 된 것은 또 하나의 그람시였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 토리노 공장점거의 대변자였던 「신질서」의 그람시가 공장점거와 노동자 협동조합의 급증으로 노동계급을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나키스트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우리가 이탈리아 좌파의 전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과 그 전신인 「혁명적 전망」(1970년대 초)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는 노동계급이 작업장을 장악함으로써 코뮤니즘을 창조할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항하고 자본가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단순히 앞과 뒤로 움직이는 국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람시와 동시대에 살았던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은 자신의 언어로 "10월 혁명의 불길로 촉발된 혁명적 시기를 공유했다." 그는 그람시가 신화든 아니든 당대의 노동계급에 남긴 유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맑스주의의 훼손과 코뮤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모호함, 그리고 정치적 계급투쟁의 본질에 대해서.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일두체'가 1943년 말에 혼란스러운 북부 이탈리아에서 나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 때, 데이먼은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정치 조직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은 국가자본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일부임을 증명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설립되었다.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당파에 등록시켜 '민주적인 이탈리아'를 위해 '독일 나치'와 싸우는 대가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예우를 표시했다. (그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데이먼은 톨리아티 암살단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의 동지인 마리오 아쿠아비바와 파우스토 아티와는 달리 살아남았다.) 물론 이 시기에 그람시는 사망했지만, PCI가 이탈리아 국가자본주의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주로 그의 사상과 점점 더 신화적인 인생 이야기였다. (실제로 1944년 러시아 망명지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은 PCI를 국가 통합,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PCI 당파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사회주의를 위한 무장투쟁'을 포기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을 점거하고 현상 유지로의 복귀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토리노, 밀라노, 제노바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영미 제국주의의 입맛에 맞았다.

 

PCI가 이탈리아 자본의 정치 체제 일부로서 전후 역할에 정착함에 따라, 데이먼은 1921년 리보르노에서 설립된 맑스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과 같은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고찰하고 있었다. 현재의 책은 데이먼이 수년에 걸쳐서 작성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분석적이고 실제적인 맑스주의자로서 그람시의 단점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다. 책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사망했고 초안은 사후에야 발견되어 1982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 구조가 느슨하다. 지식인의 역할, 그람시의 역사관에 대한 크로체(Croce)의 영향 등과 같은 주제 중 일부는 현대 독자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그람시의 글에서 계급: 역사의 비극적인 주인공, 그들의 경제적 이익, 사회적 관계의 복잡성, 진보와 쇠퇴의 역학관계는 단지 그림자로 표현되지만, 반면에 개성과 학문 그리고 개인에 관한 측면이 지배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데이먼의 관점은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가 단순히 영리한 개인의 추상적 비평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적 신념을 변화시킨 누군가에 의해 종종 만들어진 노동계급의 경험과 지속적인 상호 관계의 일부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다. ("「자본」을  썼던  바로 그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제1 노동자 인터내셔널 연설문」도 작성했다.")

 

그람시의 초기 「신질서」 시기(1919년 5월부터 1920년 가을까지)와 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화신으로 칭송되었던 대중 공장점거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 데이먼은 그람시의 환상에 대해  전형적으로 관대하면서도 그들에게  공감하지는  않는다. 그는 역설적으로 코뮤니스트  지오반니 파로디(이탈리아 사회당(PSI)의 기권주의 분파, 즉. 선거 참여에 반대)는  "국가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고 기업가 아그넬리는 피아트의 사장으로 남아있는 동안 전무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패권적 역할을 위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에 주목한다. 그러나 동시에 - 기존 국가 내에서 노동자 통제의 전후 PCI의 그림과는 달리 - 그는 그람시가 노동계급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기능으로 적어도 공장 위원회를 구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1920년 11월 말 이몰라 협약이 체결될 즈음에 「신질서」 그룹은 해체되었지만, 그는 그 흐름이 리보르노 이전의 정치 오리엔테이션 회의에 동등한 조건으로 참석했다고 관대하게 주장한다. 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된 그람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코뮤니스트-사회주의' 분파를 만들어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최대주의'와 근본적인 단절을 촉구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람시는 리보르노 대회에서 거의 일주일간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옛 토리노 그룹 중 오직 테라치니(Terracini)만이 강단에서 공장 평의회가 아닌 코뮤니스트 분파에 대해서 연설했다. (타스카와 톨리아티와 같은 그룹의 다른 주요 구성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PSI와의 분열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1919년에 설립된 코민테른의 규율)이 이탈리아당에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일어났다. 보다 근본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어느 조직이 혁명당을 구성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을 위한 혁명적인 맑스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보르디가에게 달려 있었다. 그 당이 결성되었을 때, 고립된 볼셰비키당에 의한 코민테른의 지배는 이미 반(反)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왜 '리보르노 좌파가 너무 분열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도구로서 러시아가 그람시를 첫 번째로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1922년 제4차 코민테른 대회 이후 모스크바에 남게 되었다. 보르디가가 1923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집행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을 거부한 후 결국 그람시는 1924년 5월 당의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의 책략으로 직책을 맡은 4명의 신입 회원 중 한 명인 톨리아티가 집행부에 포함되었다. 그런데도 원래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로서의 그람시의 역할에 대한 질문은 특히 자신의 개인적, 정치적 삶이 정책의 비참한 결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데이먼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 사건은 그람시의 약점이 노동계급 내부의 혁명 정당으로서 PCd'I의 소멸과 반(反)혁명의 과정을 어떻게 촉진하고 돕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든 혁명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실 CWO는 마테오티(Matteott)의 위기 동안 PCd'I에 대한 그람시의 지도력과 조정 위원회의 강령에 관한 두 장의 영어 번역본을 이미 출판했는데,  이는 1926년 리옹 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람시와 그의 모스크바 지지자들의 조작에 맞서는 전투에서 패배한 내용이었다. (설명 개요와 함께 이 팸플릿은 여전히 CWO 인터넷 주소에서 이용할 수 있다.)

 

이는 학계나 대중적인 오락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1926년 말 무솔리니의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 이후 그람시가 우스티카(Ustica)섬에서 그의 첫 정치적 망명 생활을 보낸 44일간의 유튜브 영화를 볼 수 있다. TV 시리즈 《인스펙터 몬탈바노》에서 파지오(Fazio)로 널리 알려진 페피노 마조타(Peppino Mazzotta)가 안토니오 그람시 역을 맡으면서, 이 영화는 '여론 형성자'로서 기획되었다. 망명한 동료 보르디가와 잠재적인 정치적 논의는 피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고 - 빌라 데이먼(Villa Damen)으로 알려진 '사라센 타워'가 즉흥적인 잔치 학교의 장소가 된 - 데이먼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보기이지만, 디지털 세계에서 변화하는 지적 풍토에 맞춰 그람시의 이미지가 지속해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데이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계급 정치 운동은 결코 일반적인 지적 풍토의 일부로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람시를 다시 읽는 것은 그의 가르침의 이름으로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것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의 그람시주의는 개인과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는 연쇄효과를 가진 세계적인 지적 집착이다. 21세기의 혁명가들은 거짓된 친구들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종식에 대한 열망을 국제주의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흐름으로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를 존속시키고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이러한 개요가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이 책이 읽기에 쉽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9년 7월

E. 레이너(E. Ray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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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람시의 시간

 

그가 그럴 자격이 있든 없든, 10월 혁명의 불길에 의해 촉발된 혁명의 시대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람시의 운명을 분명히 부러워할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이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의 투사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인 속임수의 수단으로 바꾼 당의 기구에 의해 이용되었다.

 

그의 삶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유난히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일부로 기억되지만, 특히 초기 전후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파시스트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있었던 코뮤니스트당 활동가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람시의 희생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인들이 홍보하는 그람시는 그들의 정치적 이미지와 그들에게 어떤 오래된 헛소리도 흡수할 준비가 된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무리 사이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름과 대의명분에 대한 그들의 필요에 맞게 조정되었다.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그러한 필요성은 지난 20년간 책 시장을 포화시켰던 점령된 전기 작가와 논평가, 역사가와 지리학자, 문학 비평가, 심지어 함께하는 시인들을 대신했다. 이 점진적인 그람시에 대한 재구성은 그에게 가장 해로운 이데올로기적 프로필 중의 하나를 갖게 되었지만, 글을 쓰게 한 정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프로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람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가 가장 큰 정치적 성숙기에 도달한 시기를 공유하고 그 이후 그의 후기 저술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람시의 작품은 그의 해석 방식이 제공하는 도구나 그 자신의 목표 측면에서 볼 때 맑스주의에 기반을 두지도 않았고 맑스주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문제들과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는 절박함이 그에게 팽배해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람시는 마치 자신이 앞으로 심각하고 지속적인 실천적인 방법을 찾음으로써 그의 신체적인 장애를 보충하고 싶은 것처럼 열정적인 창의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신화에 의해 생성된 철학 사이에서, 그람시는 분명히 전자에 해당했지만, 실제로는 교육, 취향 및 경향 면에서 후자로 기울어졌다. 어쩌면 그람시의 성격과 그 불완전성, 그의 이론적 방법의 단점과 정치적 계획의 경험주의에 대한 이 논쟁은 기회주의가 어떻게 계속해서 자신을 정당화할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 어쨌든 "좌파" 지성주의의 해부학적 표에 있는 그람시의 이 놀라운 생체 해부는 맑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방대한 가정과 관점들을 밝혀냈다. 여기서 빠르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직면하여 그람시는 전쟁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문제에 대한 혁명이론의 발전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달리 계급적 관점과 혁명 전략 측면에서 제국주의의 현상을 감지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1914년 10월, 그람시는 일 그리도 델 포폴로 [인민의 외침]에 등장한 전쟁의 문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했다.

 

"...역사를 사회의 다른 능동적, 수동적 세력에 대한 일종의 중단 없는 공격으로 구성된 자기 의지력 창조로 생각하고, 마지막 단절(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준비하는 혁명가들은 '절대적 중립'이라는 잠정적 공식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솔리니를 파시즘의 논리적 서막인 혁명전쟁 이론으로 이끈 것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이었지만, 그것은 그람시를 혁명적 패전주의 이론이나 실천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람시가 자유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크로체의 역사주의(정신의 창조로서의 역사)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념적인 용어 외의 어떤 것으로도 맑스주의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실제로, 그람시는 「10월혁명」(라반티!(앞으로) 1918년 7월 25일)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그람시는 "역사의 발전은 모든 기존 구도를 무너뜨리는 역사의 내재적 힘"이라고 하는 자유의 리듬에 의해 지배된다"라는 글을 작성했다."

 

그와 같은 관념론적 성향으로 인해 그는 평의회가 자본주의의 줄기 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객관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 혁명당 건설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우리가 리보르노 및 리옹 대회에서 처음으로 알았던 사람, 그리고 마테오티 살해에서부터 예외적인 법에 이르기까지 당을 주도했던 후기의 그람시는 훨씬 덜 독창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자생주의와 개성의 역할

 

같은 과정의 순간으로서 당과 계급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년)에서 카우츠키의 사고에 대해 잘 언급한 것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 그는 경제주의 및 자생성 경향에 대항하는 날카로운 반론을 정당화한다.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로 나란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제에서 일어난다. 현대 사회주의 의식은 심오한 과학적 이해에 기초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현대 경제 과학은 현대 기술과 함께 사회주의 생산을 위한 조건 중 하나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느 것도 만들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은 모두 현대의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한다. 과학을 깍아내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지식인들인데, 비록 현대 사회주의가 이 사회 계층의 일부 구성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중 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일부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전달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조건이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도입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외부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유입되는 요소이지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요소가 아니다."1)

 

이는 레닌이 확인시켜 준다.

 

"모든 국가의 역사는 노동계급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노동조합 의식, 즉 노동조합에 결합하고 고용주와 싸우고 정부가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만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론은 지식인들에 의해, 교육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정교화된 철학적, 역사적, 경제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러시아에서 사회 민주주의의 이론적 원칙은 노동계급 운동의 자발적인 성장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생했다. 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다."2)

 

분명히 그 질문은 전형적인 반론처럼 극도로 광범위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논쟁의 영지가 있는 진리는 항상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므로 배제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더욱 보편적인 진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들의 '궁극적인 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주의 의식만을 정교화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사회주의 의식을 전달하는 과학기술에 정통한 부르주아 지식인들 사이의 엄격한 구분으로 문제의 조건을 축소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학문적 결론에 빠지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전제로부터 생겨났지만,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여전히 하나의 과정: 계급의 존재-의 두 가지 얽히고설킨 순간의 결과이다.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과정에서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힘이 그것에 내재하여 있지 않다면 사회적 과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갈등과 투쟁 상황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는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다양한 사회 범주들 사이의 분열 의식이 나타나고 결국 계급 적대감으로 결정되는 맥락이다.

 

이론적, 과학적 지식의 축적은 삶의 질이 점점 더 높아지는 지표로서 인간 지식의 광범위한 증가, 미각, 감수성, 새롭고 미지의 것에 대한 더 예민한 호기심에 대한 필요성 등의 일부이다. 한마디로, 사물의 연결고리는 인간 활동의 연결고리와 얽혀 있다. 사회주의는 아무리 영리한 공식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험실 연구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과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 즉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등장하고 그 자체 모순의 무게로 점차 성장해 온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자본주의 자신의 경제 조직의 변증법이 사회주의적 결과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것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동경하는 인간의 목표이기도 하다. 보기를 들면, 맑스와 엥겔스 같은 과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심화시키고 있을 때,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후예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십 년에 걸쳐 기술적 변화와 과학적 성과를 형성해 온 연구 도구를 이용했다. 자본주의 생산의 지원 아래 특히 동력의 엄청난 상승이 단순히 자본주의 때문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만큼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 인간 노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헌을 부르주아 출신 학자들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랄한 비판과 그들이 고찰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를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진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한다'라는 것은 이러한 거장들의 중요한 업적을 과학적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계급의 대의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보수적 순응주의에 대항하여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발전을 위한 존재 이유를 인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대사에서 두 기본계급 사이의 억제할 수 없는 투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써 계급의 의의를 설명하고 혁명적 전복 이론을 발전시켰다. 「자본」을 쓴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제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연설문」도 썼다. 하나는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이탈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노동이 더는 인간에게 부담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자유로운 표현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소외된 노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맑스, 엥겔스, 그리고 후에 레닌과 함께 맑스주의와 연계된 사상가, 정치가,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에 그 상황과 그 사명에 대한 의식을 도입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형성 요소들은 노동계급에 역사적 모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다시 과학적 체계화의 실험실에서와 같이 일부 개인의 의식에 반영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계급에 반환하여 그것이 점점 더 분명하고 뚜렷한 방식으로 "목표를 의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은 또한 성격의 역할을 정의하는 방법인 것 같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성숙한 내재한 모순의 역사적 결과로써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과 분배, 그들의 비타협적인 과학적 분석은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대적인 역할을 강조하도록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혁명적으로 되기 위한 노동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무장을 위한 성향을 추정하는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규정하는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계급에 충실하도록 그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을 했다.

 

우리는 반복한다, 유물론의 초기 논문은 인간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만약 실제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들의 행동이 얼마나 정확하게 결정되는지 이해하는 것만 남게 된다. 이러한 부분에 관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국가에서 특정한 사람이 확실한 시기에 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순수한 우연이다. 하지만 그가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것보다[tant bien que mal] 좋은 것이 더 많았던 것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그는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폴레옹(이 특별한 코르시카인)이 프랑스 공화국의 소모적인 전쟁이 요구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어야만 했던 것은 우연의 문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발견되었다(시저(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크롬웰(Cromwell) 등)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물론 맑스는 역사 유물론의 개념을 발견했지만, 티에리(Thierry), 미그넷(,Mignet) 귀조(Guizot) 같은 영국 역사학자들이 1850년까지 연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그리고 모건이 같은 개념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것을 발견할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다른 모든 그리고 명백한 사건들과 함께. 우리가 연구하는 분야가 경제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순수하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 발전 과정에서 오류가 더 많이 드러나고 그 곡선의 흐름이 지그재그로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완만한 추세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더 포괄적으로 취급되는 분야가 경제 발전 추세와 더 밀접하게 나란히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

 

"정신적 또는 사회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의 '성격'은 경제적 발전과 병행하는 인류의 지적 발전의 '평균적' 선을 외모가 막지 못하는 사건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4)

 

이 점에서 레닌의 입장은 훨씬 더 정확한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이미 레닌이 당대의 경제주의와 자생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조합주의와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만으로 상사들에 대항하여 수행하는 투쟁에 내재한 근본적으로 협동조합주의적인 위험에 대해 어떻게 경고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와 그보다 더 준비된 간부들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으로 유입시키는 임무를 맡겼는지를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일방적이고 제한적인 해석, 즉 비(非)변증법적인 해석을 배제하기 위해, 그의 일반적인 접근법은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경향"이 저지르는 근본적인 오류는 자생성에 굴복하는 것과 대중의 자생성이 우리 사회민주당에 높은 수준의 의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의 자생성 급증과 운동의 확산이 클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조직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더 광범위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러시아 대중의 자발성 급증은 젊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러한 거대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준비 부족은 우리의 공통된 불행, 모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불행이다. 대중의 급증은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확산하였다. 그것은 시작된 장소에서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역과 인구의 새로운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노동계급 운동의 영향으로 청소년 학생, 일반적으로 지식인, 심지어 농민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동요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그들의 "이론"과 활동 모두에서 이러한 급격한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들은 전체 운동을 이끌 수 있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조직을 설립하는 데 실패했다."5)

 

진정한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전위대의 임무에 대한 명확한 비전속에 레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론적인 레닌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간, 그의 나라와 노동 대중의 현실과 접촉하고 있는 ― 침략적인 독점자본주의가 부과한 기계들의 새로운 노예화에 직면하도록 밀어붙일 필요와 본능에 의해 러시아 문명이 경제적, 정치적 중도주의의 마지막 흔적들과 결별하는―프롤레타리아트의 원인과 동일시하고, 오늘날 맑스주의의 이론적 정확성의 증거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혁명적 투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는 맹목적인 직감과 비합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투쟁에서 대중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투사이다. 이 경우 레닌은 집단적 열망의 구현으로서 이론, 강령과 구조 측면에서 그가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당과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과 하나가 되어서, 당은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노동계급이 추구하는 가장 높고 완전한 "최종 목표에 대한 의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발전 수준이 어떠하든, 노동계급 자신에 대한 의식과 혁명적인 임무는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상설 조직의 대변인으로 인정받는 그러한 개인들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된다.

 

<주>

1)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참조

2) 앞에서 언급함

3) 엥겔스, 「사회주의 학자」, 1895

4) 플레하노프, 「맑스주의의 근본 문제」

5) 레닌, 앞의 책. (영어판 53쪽: 9판) 프로그래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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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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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참여했다. 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反)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 되어야 했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독일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되는 과정과 개량주의의 한계를 매우 훌륭하게 서술한다

 

"오늘날 전쟁 탄생의 역사는 1914년 7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필연성으로 한 가닥 한 가닥 짜인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촘촘한 그물망이 5대륙을 감싸게 되는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그물망은 경제발달의 지각 심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외부 가지들이 희미하게 동터오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자, 광대함에 비해보면 죄과와 원죄의 개념, 방어와 공격의 개념이 공허하게 퇴색해버리는 그러한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병역’을 위해 자본주의 여성 운동과 동맹을 맺었고 민족적 사마리아 작업을 위한 동원 이후 남아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배치했다. 사회주의 여성 운동은 당을 위한 선동 활동 대신 무료 급식소와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반(反)사회주의법 아래서 당에 반대를 표명했던 계엄 상태와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은 선동을 확산하기 위해 의회선거를 활용했고, 대중에 대한 확고한 세력을 유지했다. 이 위기에, 독일의회와 주의회 선거 동안,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모든 선전과 교육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혁명가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관해 행한 연설에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敵)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 사실로 만들며,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2 인터내셔널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민족문제에서 레닌보다 더욱 명확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족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쇠퇴,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그의 교훈은 여전히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그에게 자본주의 쇠퇴기의 민족전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는 민족의 이익은 단지 대중을 오도하고,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도록 유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주의는 동등한 권리와 더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로도 그러한 민족을 창출할 수 있고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다른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건에 대한 사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혁신적, 적극적인 정책을 위한 이정표와 원동력과 같다.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제국주의 세계정치가 민족의 삶의 안팎을 결정하고 규제하는 한, 전시든 평시든 ‘민족자결권’은 있을 수 없다. 현 제국주의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결정적 역사적 환경에 의존하고, 전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국가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책은 사상누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억압받는 민족도 제국주의 또는 전쟁의 결과로써 주어진 국가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권력 집단에서 그들의 지배적인 동료들과 한통속이 된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게임에서 한낱 말에 불과하며, 그들을 위한 도구로서 전쟁에서 혹사당한, 그리고 전후에 버려지고 자본주의 이해관계로 인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자유로운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흡수되어야 하며 세계시장에 참가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운동에서 발생한 신생국은 그 크기 또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제국주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자 자본주의 존립의 최후 국면의 표현인, 자본주의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는 경제적 흐름을 야기한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킨다. 모든 구시대적이고 전(前)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사회는 일소된다.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부와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대중을 임금 노예로 전환한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어느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발전에서 성숙이라는 특정 단계의 산물이며, 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전 세계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정치적 세계지배의 가장 특색 있는 발현이자 자본주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하는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숙적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처음으로 엄밀한 과학적 사상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해방을 위한 길을 밝혀 주었다. 종파, 학파, 유토피아 및 다양한 국가에서 고립된 실험 대신에, 밧줄을 묶는 것과 같이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한결같은 국제적인 이론적 기초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맑스주의 이론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에 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확고한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의 정도를 항상 나타낼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제2 인터내셔널의 반역 이후, 룩셈부르크는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노동계급의 목표와 이익에 대해 그릇된 일을 저질렀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의 사회주의당 지도부의 반역 이후, 그리고 그들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서 부르주아 제국주의로 이동했던 퇴행 이후, 전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 행동을 이끌고 조직할 과업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사회주의에 가장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 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그는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문학과 문화 문제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한 점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는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에게,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에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년 1월 15일, 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이전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전후 1918년 11월 8일, 룩셈부르크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년 11월, 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월,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 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노동자 탄압 시기, 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 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 일자리, 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 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 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 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 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1919년 1월 15일,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기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 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 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는 후에 나치 정권, 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진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히려 독일 국민을 비난했다.

 

“이 독일 멍청이들은 무릎을 꿇고 노스케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거리와 광장은 모두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15일의 살인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노스케 치하의 수천 건의 살인의 시작이자 히틀러 시대의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건의 살인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호였다.

 

이러한 잔학행위의 90주년을 맞아 독일자유당은 베를린에 노스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애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포팔라는 노스케의 행동을 “공화국의 용기 있는 방어”라고 극찬했다. (2009년 1월 11일 베를린 신문 「Tagesspiegel」에서 인용)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反)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과 학살로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한 것이다. 나치즘의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거 자신이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사회민주당(SPD)과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 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反)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敵)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敵)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지배계급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다. 비록 문명화된 야만인들, 스스로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유럽의 심장에서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열망의 원천,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 제국주의 개념, 국가에 대한 질문 등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계급전쟁에서 살아 있다. 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4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고 있지만, 룩셈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나고 있다.

 

탄압받는 상황에서 자본의 질서에 관하여 쓴 마지막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은 질서를 되찾았다!” 비겁한 아첨꾼들아! 너희들의 ‘질서’는 모래성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내일, 혁명은 ‘다시 일어나,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고, 불타오르는 트럼펫 소리가 너희를 공포에 떨게 하며 증명할 것이다.

 

나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4년 1월 15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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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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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핵심에 있는 모순들이 상부구조 차원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데올로기·문화·언어·조직의 형태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으며, 이전 생산양식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인간 활동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자본주의적 모순이 격렬해지는 위기의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공개적인 정치적 싸움터가 된다. 멀리서 확인할 필요도 없다. 4세대 페미니즘, 여성 파업,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TERFs), 비자발적 금욕주의자들(incels) 같은 현상과 정체성, 성노동, 대리모, 가정 폭력, 성폭력, 성소수자 관련 분쟁들에서 대립과 적대가 명백하게 부각되고 있다. 부득이하게 많은 혁명가가 이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데, 특히 개인적 차원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자가 그 모든 지저분한 차원에서 섹슈얼리티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피해망상이 아니다. 우리가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다른 곳을 찾을 것이고, 자본의 우파 또는 좌파(둘 다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의 영향력 아래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충돌하는 권리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정당이 국가적 억압에 항의하고 저항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특별한 ‘국가의 권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데, 이것은 이를테면 남녀의 사회적·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 해방주의자들의 운동이 말하는 특별한 ‘여성의 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 의무는 계급 체제와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지배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한마디로 사회주의의 기본 입장으로부터만 발생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민족 문제」, 1909)

 

우파의 것이든 좌파의 것이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충돌하는 권리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적대관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권리 대 트랜스젠더의 권리, 세속적 권리 대 종교적 권리, 재산권 대 노동자의 권리 등 그 어떤 것이든 원칙은 동일하다. 즉 한쪽의 권리는 다른 한쪽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하며, 이 도덕적·법적인 체계 안에서 “우리”는 합리적인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개혁주의 또는 그들의 파생물들과 같은 부르주아 사고의 다양한 가닥은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극단적인 경우, 그것은 사회의 이 부분 또는 저 부분의 근절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했다―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인권, 즉 원래는 ‘인간(남성)의 권리(rights of man)’라고 알져진 것은 17~19세기에는 쇠퇴하는 봉건 질서에 맞서는 가장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와 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특정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부상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점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분리에 기초한다. 이러한 분리의 권리,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제한된 개인이 권리가 바로 자유권이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실제로 적용한 것이 사유재산에 대한 인간의 권리이다.” (칼 맑스,「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1844)

 

맑스주자들로서 우리의 체계는 다르다. 우리는 상충하는 권리라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합리적인 균형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맑스주의자에게 코뮤니즘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되는 권리는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권리의 세계는 국가, 군대, 경찰, 법률 시스템의 세계로 이 모든 것은 권리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제도들이다. 이 모든 제도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표현한다. 정의상 권리는 계급 사회를 의미하며, 계급 사회는 우리가 현대의 억압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유물론적 관념

 

인권이 실제로 인간들 사이의 인위적인 적대관계를 강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이제 우리는 역사적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적 체계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성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생물학적 결정론(보기를 들어 많은 스탈린주의자가 젠더 문제를 다룰 때 보여준 것처럼)과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섹슈얼리티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간 활동으로 간주한다.

 

최근의 추정에 따르면 호모 속(屬)은 최대 300만 년 전에 출현했고, 우리 종(種)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 년 전에 출현했다. 최초의 원시적 성 분업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후기 구석기 시대(4만 년 전)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렵 채집 사회는 협력과 상호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업 자체가 아직은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12,000년 전) 무렵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 다시 말해 농업의 발달로 전환되면서 바뀌었다. 정착지가 발달하고 노동 생산성이 증대하고 잉여가 전유됨과 동시에, 사유 재산이 생겨나면서 최초의 계급 사회가 탄생한다. 평등주의는 점차 남녀 간의 위계와 불평등한 관계로 대체된다.

 

“인류 사회의 천년 역사를 통해 사랑은 단순한 생물학적 본능―최상위 생물부터 최하등 생물까지 모든 생물에 내재된 번식 충동―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지적·정서적 측면을 획득하는 가장 복잡한 감정으로 발전해 왔다. …… 역사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사회는 사랑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합법적”인지(즉, 주어진 사회 집단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정의하는 규범을 확립했다. …… 부족 단계에서 사랑은 혈연적 애착(자매들과 형제들 사이의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고대 문화는 무엇보다도 사랑-우정을 제일로 쳤다. 봉건 세계는 결혼하지 않은 이성 간의 플라토닉한 궁정의 사랑을 이상화했다. 부르주아지는 일부일처제의 부부애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날개 달린 에로스를 위한 길」, 1923)

 

분업과 재산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거치면서 크게 발전해 왔다. 이러한 생산양식은 (국가와 종교 단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 종종 잔인한 방식으로 자체적인 성 관련 법과 도덕을 강요했다. 당연히 이것은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나 현대 섹슈얼리티의 모든 측면에 상처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성, 섹슈얼리티 또는 젠더에 기초한 차별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우리는 이것을 재산을 소유하기 위해 사회를 부계 권력 아래의 가족 단위로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를 약화시켰지만, 가부장제를 완전히 종식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유재산과 분업이 폐지된 사회만이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가 오늘날 성적 억압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래 사회의 옹호자로서 우리는 입에 발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당대의 성적 적대관계의 사례들을 더 광범위한 자본주의 위기의 상황과 연결해야 한다.

 

“혁명운동은 …… 자본주의의 경제적 해체가 초래한 가부장적 가족의 쇠퇴 과정을 완성할 것이다. …… 정치적 반동 세력이 반동의 요인으로서 성적 억압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 억압을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면, 혁명 정당은 성적 반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와 자본에 대한 이 반란을 지지해야 한다.” (빌헬름 라이히,「성도덕의 출현」(The Imposition of Sexual Morality), 1932)

 

 

재무장한 에로스

 

자본의 좌파와 우파는 계급 사회를 어떻게 관리할지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땜질하면서 문제의 근원이 실제 놓여있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보존하려고 할 따름이다. 페미니즘과 그 이데올로기적 자손들이 여성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곤경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자본주의를 훼손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으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조차도 페미니즘을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임금 노동, 화폐, 국가의 폐지가 아니라 부의 재분배와 복지 국가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인류 전체가 나아갈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국가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국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적 이윤 욕구의 낡아빠진 압박에서 생산을 해방시키고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에 전념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을 창조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로 이전하는 것은 일부일처제 가족이 더는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페미니스트의 최후의 수단은 코뮤니즘이 가부장적 태도를 사회에서 자동으로 제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에 우리는 동의할 것이지만, 요점은 코뮤니스트 혁명 없이는 태도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어떠한 근거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CWO,「여성과 코뮤니즘」, 1986)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계급이 폐지되면 우리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동료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더는 상충하는 권리와 정체성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윤을 위한 경쟁 충동에도 얽매이지 않게 됨으로써, 미래 사회는 사람에 대한 통치를 사물에 대한 관리로 대체할 것이다. 상품 교환이나 편견이나 폭력보다는 사랑-동지애와 내적 연대가 성 관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곧 다가올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복 이후에 성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정돈될지 지금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부정적인 특성을 띠며 대부분은 사라질 것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성장했을 때 대답이 나올 것이다. …… 이 사람들이 출현하면, 그들은 오늘날은 누구나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관행에 대해 자신만의 관행을 따르고 그에 상응하는 여론을 형성할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족의 기원」, 1884)

 

혁명가들의 임무는 “에로스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구성체에 따라 그를 재무장시키고, 동지적 연대라는 위대한 새로운 심리적 힘의 정신으로 성 관계를 교육하는 것”이다.(콜론타이)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수천 년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뒤집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 과정이 끝나면 평등주의와 협력 노선을 따라 노동계급이 사회를 개조하는 과도기가 시작될 것이며, 더는 물질적 근거가 없는 가부장적 태도는 코뮤니즘이 현실화되면서 세월의 찌꺼기와 함께 휩쓸려갈 것이다.

 

다이즈바스(Dyjbas)

 

2020년 5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옮긴이ㅣ김종원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5-09/marxism-and-sex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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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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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발간
 
 
"현재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이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고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뿐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 국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진보/좌파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도 노동계급 내부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이다. 그들은 자본의 좌파로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계급투쟁의 미래는 노동계급이 노동조합과 자본의 좌파를 넘어 자신의 투쟁과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하는 것에 달려있다.
 
지금은 비록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방어적 투쟁으로 나타나지만, 투쟁 물결이 지구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계급영역 내의 기본투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인종주의, 민족주의 외피를 쓰고 대중의 심리와 의식을 왜곡시켜,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세계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노동계급에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강요하는 어떠한 희생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에서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침략자든 방어자든 모든 자본가 정권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통제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싸워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착취자들과의 전쟁,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뿐이다. 인류와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을 근본적으로 끝장내기 위해서는 국제적 계급전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코뮤니즘, 즉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세계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차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며 
‣ 계급투쟁 역사와 노동계급의 길 
‣ 자본주의 모순과 역사적 쇠퇴 
‣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코뮤니스트 사회 
‣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 
‣ 제국주의 전쟁, 민족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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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 6호]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와 계급투쟁 전망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와 계급투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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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경제 위기, 팬데믹, 기후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은 자본주의가 향하는 길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리 보여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프롤레타리아트에 폭탄과 총알의 홍수가 쏟아지고 있다.

 

“국제 관계에서 부르주아지는 전쟁과 정복 정책을 대표하는데, 현 단계에서는 관세와 경제 전쟁 체제를 대표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편적 평화 정책을 대표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민족 문제와 자율성」, 1909년)

 

계급 분열 사회의 결과이자 부르주아지가 발명한 최악의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라는 독(毒)이 양측의 노동계급에 퍼져 서로 공격하고 죽이도록 강요하고 있다. 양측의 지배계급은 위기를 모면하거나 선거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성급한 결정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징집해 ‘조국’의 이름으로 같은 노동자를 죽이도록 내몰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대외 조약을 체결하고, 내적으로는 전쟁경제와 착취 체제 유지를 위한 폭력적 정책을 집행한다. 이에 맞서 노동계급이 벌이는 전쟁 반대 시위나 경제적 파업은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즉시 진압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 모든 전쟁은 더 큰 폭력의 전조이며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 위기와 제국주의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다시 학살이 벌어진 것은 수많은 분쟁 지역 중 하나가 터졌을 뿐이며, 또 다른 분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전쟁은 자본주의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결과는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적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기존 자본에 비해 잉여가치의 양이 감소할수록 이 쟁탈전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쟁은 지난 120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다. 1914~1918년과 1939~1945년에는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제국주의 대학살 전쟁이 있었고, 그 후로도 전쟁은 거의 모든 대륙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55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전쟁의 평균 지속 기간도 이전보다 약 1/3이 길어진 8~11년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올해 초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억 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1) 유엔은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는 11개의 위기를 지적했다.2) 미얀마, 아이티, 콩고민주공화국, 아프리카의 뿔, 사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시리아, 예멘, 남수단, 나이지리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중국, 인도, 대만 및 중국해와같이 더 심각한 다른 지역도 추가해야 한다. 이 중 여러 곳에서 국경 분쟁, 인종 청소, 공동체 간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경제 위기와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 시작되며,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1. 자본주의 위기

 

1960년대와 70년대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서 강력한 계급투쟁의 물결을 경험했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확산하면서 부르주아지의 운신 폭이 좁아지자, 모든 곳에서 경제와 산업의 합리화와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주의의 형태로 노동계급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임금이 아주 낮은 국가로 기업을 이전했다. 한동안 이 정책은 세계화 발전의 하나로 이윤율 하락에 맞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200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생산과 축적의 순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체제를 구하기 위해 중앙은행은 양적 완화를 통해 자본주의에 모르핀을 투여했다. 이 정책은 다시 한번 한계가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금융 거품을 걷어내야 했다. 처음에는 낮은 인플레이션율을 통해 부채 상환에 도움을 주려고 했으나 인플레이션 정책은 통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2022년 말부터 신용 긴축 정책이 시행되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체제에 산소를 공급하여 경제가 회복될 수 있게 해주던 제로 금리는 심각한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용 긴축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용 경색은 여러 국가(중국, 미국, 영국, 그리고 곧 프랑스)에서 파산과 부동산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3)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에 따라 경제, 사회, 환경, 건강까지 모든 영역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심화하는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은 새로운 축적의 순환이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50년 넘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다. 오직 전쟁만이 살아 있는 자본과 죽은 자본을 파괴함으로써 이 새로운 순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제 그 지점에 도달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이미 피할 수 없는 기후 위기와 생태파괴 등 다른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와 원자재 부족에 직면하여 일반화된 전쟁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2.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길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 뒤에는 역사적으로 에너지(가스, 석유)와 전략적 해상 항로를 공급해 온 중동 지역에서의 더 큰 전쟁이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중재로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이스라엘, 유럽 지역 사이의 상품 이동을 가속하기 위해 항구와 철도를 건설하고 개선하는 외교 협정체결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정은 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합하여 군사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이는 미국의 오랜 적(敵) 이란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레바논, 시리아 등)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하마스의 공격으로 합의가 좌절되고 무기한 연기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세계에서 권위와 영향력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잠시 물러났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끔찍한 보복은 중동을 불안정과 전쟁의 시대로 몰아넣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계속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다면 서안 지구에도 불이 붙고 헤즈볼라가 참전하고 이란이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지역 전체에 혼란이 확산하면 미국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실크로드가 이 지역을 통과하는 중국의 글로벌 야망에도 타격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간인 공격이 도를 넘자 UN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에서 공격 ‘완화’ 또는 ‘중단’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진정한 ‘평화’와는 관련이 없다. 러시아는 이미 20개월 전 우크라이나를 맹렬하게 공격했고, 1999년에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체첸에서 민간인 30만 명을 학살한 전력이 있는데도 이 전쟁에서는 휴전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더 큰 화염으로 위구르족을 말살하고 대만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동맹국들은 예멘 인구의 학살을 원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공세는 반대하고 있다. 터키는 쿠르드족을 몰살시키는 꿈을 꾸면서도 가자지구 공격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같은 주장과 방법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렇게 부르주아 국가 대부분은 전범이다. 크든 작든, 강하든 약하든, 호전적이든 온건하든, 그들 모두는 실제로 세계 무대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모두 노동계급을 총알받이로 여긴다.

 

‘평화’를 위한 부르주아 국가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목소리는 그들의 해결책, 즉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두 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믿게 만든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하마스, 파타는 이 국가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고 있다.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 국가도 노동자를 착취하고, 대중을 억압하고, 전쟁에 나설 것이다. 지구상에는 이미 195개의 ‘독립 및 자치’ 국가가 존재하며, 이들은 모두 합쳐서 연간 2,000억 달러 이상을 ’국방‘에 지출한다. 그리고 이 예산은 내년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터키-쿠르드족, 중국- 대만, 세르비아-코소보/알바니아 간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주요 제국주의 열강은 군사 전략과 경제 자원을 위한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하기 위해 작은 국가들을 택하고 있다. 그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원자재는 분쟁의 핵심인데, 원자재(밀, 희토류 등)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세계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패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자재가 풍부한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을 통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원자재 확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해양과 극지방 근처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연이은 군사 쿠데타는 '후원자'에 의해 부를 착취당하는 최약소 국가들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사헬(Sahel)의 거의 전 지역이 군사 정권의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장려로 반(反)에코와스(ECOWAS) 블록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바그너 그룹을 통해 이 지역에 군사적 거점을 구축한 러시아는 최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 최빈국 6개국에 5만 톤의 무상 곡물과 230억 달러 규모의 부채 탕감을 약속하며 아프리카를 견인하려는 공세를 크게 강화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니제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고, 니제르의 우라늄 광산은 프랑스 원자력 발전소에 우라늄의 20%를 공급하기 때문에 서방이 싸움 없이 지역 재편을 허용할 것 같지는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 강대국 간의 동맹을 재건하고 러시아, 중국, 이란 등 '제재 대상국'의 반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수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러시아보다 중국을 더 많이 공격했다. 아직 제국주의 블록의 재건은 윤곽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주요 구성 요소를 볼 수 있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오커스(AUKUS)를 출범시켰다.4) 중국을 둘러싼 다른 블록은 아직 확실하게 통합되지 않았으며, 현재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공고히 하고,5) 서방 블록에 맞서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려고 한다. 브릭스(BRICs) 그룹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도록 성장했다. 이로써 브릭스 회원국은 5개국에서 11개국으로 늘어난다. 중국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모두 자국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일한 공통점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와는 별개의 또 다른 국제 질서를 제안하려는 야망이다.

 

또 다른 징후는 무역 전쟁이 계속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IMF에 따르면 2022년에 3,000개의 새로운 무역 및 관세 장벽이 세워졌으며(2019년의 3배), 이는 전 세계 GDP의 7% 감소를 의미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 기술을 약화하는 전략을 체계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여름 미국은 2024년까지 미국 투자자들이 AI, 양자 컴퓨팅, 심지어 반도체 등 특정 분야의 주요 부문에 중국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공포했다. 프랑스는 중국 전기 자동차의 유럽 시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EU를 압박하고 있다.

 

한편 남중국해에서는 분쟁이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5년 동안 미국과 중국 정부는 대만 문제에 대해 점점 더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양국은 본토의 침공에 대비해 대규모 훈련과 전쟁게임을 실시했다. 나토가 즉각적인 살상 책임을 현지인에게 떠넘길 수 있었던 우크라이나와 달리, 대만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이 처음부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 결과 전 세계적인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위기와 이윤 추구 경쟁으로 인해 제국주의 대립과 전 세계적인 분쟁이 확대되는 것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징후 중의 하나이다. 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볼 뿐인데도, 자본주의는 매일 전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전쟁이 순수한 광기나 어리석은 정치인, 군부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즉 자본 가치의 대규모 평가 절하와 파괴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수십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에서 중요한 걸음을 내디딘 시기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적대적인 국가들이 자국 자본의 특정 이익을 지키기 위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 체제가 유지되는 한, 지배계급 사이의 게임에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3. 전쟁과 노동계급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 부르주아지는 위험을 관리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무기와 탄약을 다시 개발해야 한다.6)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면서 전쟁을 향한 길로 계속 나아간다. 이를 위해 소부르주아와 중산층을 프롤레타리아화하면서 공격한다. 자본은 이들 계층이 누렸던 '이윤'을 빼앗아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로 고용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축적된 돈을 다시 한번 빼낼 수 있다. 이렇게 부르주아지는 전쟁경제 강화를 위해 노동계급을 더 폭력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공격한다. 이미 우크라이나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반격과 생활비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노동자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반발하는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대응은 전쟁보다는 경제 상황(임금 미지급)에 대한 반발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세 번째 방사능 영향 구역을 폐지하고 체르노빌 참사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보장(특히 우대 연금, 학교 어린이 무료 급식 및 기타 수당)을 폐지하려고 한다. 지난 7월 4일, 주민들은 지토미르(Zhytomyr) 지역의 오브루흐(Ovruch)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우라늄 광석을 추출하는 키로보그라드(Kirovograd) 지역의 노보코스티얀티니브스카( Novokostyantynivska)광산에서도 파업이 발생했다. 이 광산은 유럽에서 가장 큰 우라늄 채굴 센터이다. 7월 17일부터 광산 노동자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 광산에는 약 650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 중 200명이 군대에 동원되어 있다. 7월 15일에는 여러 공립병원의 의료진이 크리비리(Kryvyi Rih) 시의회에서 ‘우리의 임금!’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최전선에서는 6월 25일, 바흐무트에서 31 돌격 여단의 두 대대가 전투를 거부했다. 형법 336조에 따른 동원 회피에 대한 유죄 판결 건수는 연초보다는 덜하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탈주자 수는 20만 명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에서도 비슷하다. 작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거부 한 약 300명의 러시아 징집병이 루한스크(Luhansk)주 자이체보(Zaitsevo)의 지하실에 구금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위협을 받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돼지’라고 불렸으며, 화장실에 갈 수도 씻을 수 없었으며,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5월 17일에는 울리야노프스크(Ulyanovsk)에 있는 UAZ 자동차 공장에서 수십 명의 노동자가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는 정보가 유출되었다. 가장 격렬한 대립은 5월 24일, 최전선 근처에서 벌어졌다. 전직 수감자 39명이 리시찬스크(이른바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에 있는 '스톰Z' 훈련 캠프에서 탈옥했다. 로스토프(Rostov) 지역의 법 집행 기관은 탈주자들에 대한 설명이 담긴 수배 통지를 받았다. 5월 27일에는 도네츠크(Donetsk) 지역의 솔레다르(Soledar) 인근 러시아 군부대에서 7명의 무장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참모총장의 3월 22일 자, 작전 요약에 따르면 해병대 155여단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약 220명의 군인이 전쟁 작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임금 미지급으로 인한 파업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두 나라에서는 탈영뿐 아니라 임금을 둘러싼 더 많은 사회적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반대뿐 아니라 전쟁 경제 강화로 인한 긴축과 제한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방향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과 전쟁이 격화될수록 노동계급은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전환’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계급투쟁의 전망

 

지난 50년 동안 노동자 투쟁이 쇠퇴한 이후, 노동계급의 힘은 약화하고 분열되고 전투력을 잃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아직은 노동조합의 틀과 부르주아지의 통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불만은 그러한 투쟁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불만이 커지는 만큼 투쟁의 잠재력도 증대된다.

 

1년 전 영국에서 ‘분노의 여름’이라는 투쟁이 일어났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제, 그만!’을 외치며 30년 이상의 침체와 체념을 딛고 다시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 외침은 국경을 넘어 들려왔다.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오세아니아에서도 분노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중국, 한국, 호주에서도 여름부터 파업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작년 가을, 고용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개혁안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 교통, 교육, 보건 부문을 하나로 모아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에서는 임금 문제를 둘러싼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스페인에서도 사립 교육 부문 파업, 공교육 부문 파업, 바스크 공공 부문 전체 파업, 연금 수급자들의 시위 등 분노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에 직면하여 스페인 언론은 ‘또 다른 뜨거운 가을’을 예상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임금 인상을 위한 파업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봄 철도 노동자와 공항 직원들이 직장을 떠났다. 도이치반(Deutsche Bahn)에서는 무기한 파업이 계획되었고, 그 결과 월 410유로의 급여 인상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국도 공장에서의 시위와 파업이 증가하고 있다. 2023년 1분기 동안 2022년 마지막 분기보다 10배, 2022년 전체 기간보다 2배 많은 108건의 시위운동이 있었다.7) 이러한 시위는 주로 전자제품, 의류, 장난감, 자동차 등 수출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시리아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의 격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생계비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남부 지역에서 대규모로 재개되었다. 7월에는 케냐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미국 노동자들이 투쟁의 물결을 확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파업의 물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모든 파업을 통해 미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민간 부문 노동자들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에서는 지금까지 주로 공공 부문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는데, 민간 기업 노동자들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착취 조건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미래는 모든 부문에서 함께 단결하여 싸우는 전투력에 달려 있다.

 

이러한 투쟁들은 세계 노동계급의 불만이 높아지고 전투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현재의 계급투쟁은 연대는 확실히 커졌지만, 투쟁이 서로 분리되어 진행되는 큰 약점도 드러냈다. 파업이 동시에 일어나고, 때로는 거리에 함께 모여 있을 수도 있지만, 노동자들은 실제로 함께 싸우고 있지 않다. 노동자들은 단결하지 않았고, 하나의 투쟁에서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조직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생활수준 하락에 맞선 투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노동조합 주도의 투쟁과 노동자 스스로 조직하고 통제하는 투쟁은 극명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의 물결은 이를 잘 보여준다. '빅3' 자동차 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파업은 '지정된' 세 개의 공장으로 제한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하고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노동조합이었다. 이 세 공장을 ‘지정’한 것은 미국의 주요 노조 중 하나인 전미자동차노조(UAW)였다. 의도적으로 파업을 노조 인력의 10%로 제한하면서, 파업에 대한 열망을 ‘강력한 단결과 대규모로!’라는 거짓 외침으로 잠재우려고 한 것은 UAW이다. 맥 트럭(볼보 트럭) 노동자들이 투쟁에서 '빅3'에 합류하려고 했을 때, 파업 종료를 위한 합의서에 서둘러 서명한 것도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대응을 흩트리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수백만 명이 거리에 모이는 시위에서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이 함께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행렬을 나누어 기업별로 행진하게 만들어, 노동자들이 어떤 모임이나 토론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이지리아의 양대 노조는 정부가 공무원 급여 인상과 최저 임금의 소폭 인상, 경유 인하, 가스 버스 구매를 통해 이미 비싼 대중교통을 더 저렴하게 만들 것이라고 발표한 후, 예정되었던 무기한 총파업을 취소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급격한 인플레이션(25%)과 이를 억제하기 위한 정부 조치로 노동자들을 급격하게 빈곤하게 만들고, 급여에서 대량 소득을 회사, 특히 석유 산업의 이윤으로 이전하는 긴장된 상황을 정부에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호주, 나이지리아, 한국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이러한 조직적인 분열을 막고 진정으로 단결하려면, 노동조합의 지침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산하고, 노동자 스스로 투쟁을 통제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일부는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몇 달 전 프랑스에서 열린 시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경제라는 명목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을 거부하는 구호가 나왔다. "전쟁에 쓸 돈도, 무기에 쓸 돈도, 임금에 쓸 돈도, 연금에 쓸 돈도 없다." 그리스에서는 9월 21일 노동 개혁에 반대하는 행동의 날, 시위대가 이번 공격과 올여름 그리스를 황폐화한 '자연적' 재난을 연계했다. 그들은 아직 소수이지만, 생활수준 하락에 맞서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광범위한 성찰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투쟁이 확산한다면 전쟁과 야만으로 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노동계급의 세계가 충돌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줄 것이다.

 

나오며

 

세계 경제 위기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과 빈곤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지구를 황폐화하고 기후 재앙을 일으킬 것이며, 모든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첨예화되는 제국주의 대립과 이윤 추구 경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에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생활수준을 강요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매일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러시아와 서구의 가증스러운 죽음의 도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제 더 큰 학살의 대재앙이 중동으로 번졌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가자 지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하층계급은 이스라엘과 다른 국가, 국제기구에서 보내는 부스러기, 이른바 ‘인도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적대 진영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이 지역은 끊임없는 내전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양측 지배계급이 행사하는 폭력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일상적인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극한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세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은 먼 목표처럼 보인다.

 

상황이 암울할수록 원칙이 없는 정치세력은 행동에 대한 의지가 더욱 절실해지고, 일종의 정치적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 한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압박에 흔들린다. 그러한 압박이 심해지면 지금의 투쟁으로 즉시 실현할 수 없고, 대중의식과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하지만, 노동계급이 방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마저 완전히 포기하게 만든다. 1914년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는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자본의 좌파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공격에 맞서 싸우는 것과 제국주의 전쟁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연결하지 못했다. 그들 대다수는 압박이 심해지자, 전쟁 참전을 찬성해 결국 제국주의 진영의 편에 서게 되었다. 훗날 ‘침머발트 좌파’로 불리는 소수만이 노동계급 전체의 국제적 이익을 위해 국제주의 원칙을 방어하면서 남아 있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구호는 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 기간에 볼셰비키의 구호가 되었고, 결국 노동계급에 반향을 일으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전투 군대의 봉기, 그리고 중심 국가의 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국제적인 계급투쟁뿐이다. 평화주의는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거부해 노동계급이 스스로 투쟁하는 것을 교란하고 무장 해제시킨다. 역사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가 단순한 평화주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봉기는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을 끝나게 했다. 혁명과 내전의 위협으로 인해 유럽의 열강들은 마침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학살을 멈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는 살아남았고, 그로부터 겨우 한 세대 후, 노동계급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 속에서 다시 한번 수천만 명이 학살당했다. 노동계급은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을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정치적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는 국제주의 원칙은 모든 곳, 모든 상황에서 노동계급 국제연대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대재앙의 상황에서 더욱 절박한 국면이 다가온다 해도 대대적인 계급투쟁이 즉시 일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노동계급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기에 세계의 노동자들은 착취와 전쟁에 맞선 운동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긴축과 착취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의 계급전쟁이다. 노동계급은 항상 군사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쟁의 희생자이다. 노동계급은 제국주의 전쟁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생활수준 하락에 맞선 투쟁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연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 인류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중단했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이다. 아직은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방어적이고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투쟁의 물결이 세계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계급 고유의 투쟁으로 진전되고 있다. 이제 세계 노동계급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감을 되찾고, 오랜 기간 잃어버린 계급 정체성을 회복해 반격에 나설 가능성을 열고 있다. 세계의 노동계급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 연대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반대와 생활수준에 대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은 자본주의 착취 기반에 대한 타격의 시작이 될 것이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멈추자!

 

2023년 11월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ㅣ이형로

 

 

<주>

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10210180653078

2) https://unric.org/fr/onze-crises-et-conflits-qui-perdurent-le-monde-en-2023/

3)

https://www.lemonde.fr/en/economy/article/2023/08/29/world-economy-shows-signs-of-slowdown_6114400_19.html

4) https://www.bbc.com/korean/news-58542440

5)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86380.html

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08225&ref=D

7)

https://clb.org.hk/en/content/surge-manufacturing-protests-china-deserves-international-at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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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 6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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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 6호

 


□ 권두언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 오세철 

 

□ 특집: 전쟁과 제국주의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와 계급투쟁 전망  / 이형로
제국주의 간 패권경쟁과 "다극 세계질서": 스탈린주의 당들의 다극 제국주의 옹호론 비판  / 홍수천 

 

□ 번역
노동자 통제  / 김종원 
러시아혁명 이후 30년  / 정 인

 

□ 이미지에 담긴 작은 역사(4)
일본식민주의와 군사문화의 장면들(1): 예비병정과 남자교련  / 최규진 

 

□ 사실연 지상강좌
노동자를 위한 정치학(6)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배성인 
과학으로 읽는 자본론(6) 자본주의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이유 장기이윤율저하법칙  / 김진업
노동자를 위한 회계(6) 자본가의 몫은 어떻게 증가하는가  / 한형성 

 

"이른바 사회주의 붕괴 이후 30여 년 동안의 역사에 우리가 얻은 교훈은 남한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증폭된 모순과 격화되는 계급투쟁을 노동자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미래를 전망하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연구와 실천이 절실하다. 우리가 보았던 세상과 그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폐절시키고 자유로운 인간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사회건설이라는 혁명적 맑스주의자의 전망과 역사적 과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아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심각하게 경험한 팬데믹, 기후 위기, 일반화된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등이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주고 있다."  (권두언 중에서)

 

발행 : 사회실천연구소
가격 : 15,000원

 

구입문의 :  sopractice@daum.net
전 화 : 070-4178-1073
팩 스 : 02-749-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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