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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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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또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백 건의 군사 분쟁(1) 등 현재 제국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공포는 국제 노동계급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우리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진정으로 국제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전 글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본의 좌파 대응이 "제국주의 전선(나토 또는 러시아) 중 어느 한쪽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같은 입장을 숨긴 가짜 평화주의"라고 비판했다.(2) 우리는 그러한 입장이 전쟁 없는 세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멀어지게 하는 데만 기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진영에서 표면적으로 국제주의적 입장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다. '혁명적 패전주의' 또는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국제맑스주의경향(IMT)(3), 사회주의노동자당(SWP)(4),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5), 진보노동당(PLP)(6) 등이 포함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 단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한쪽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인식한다. 여기까진 괜찮다. 이것은 침머발트 좌파와 10월혁명의 모든 혁명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척도이다.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그룹은 반(反)혁명 산물임에도 계속해서 그 유산을 고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다른 분쟁에 대한 같은 그룹의 반응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암담하다.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은 팔레스타인 투쟁 목표를 "외국의 이스라엘 점령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만 보고 있으며,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국주의 분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일반화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7) 한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하마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사회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친제국주의 붕괴로' 나아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8) 둘 다 우리가 "선택적 국제주의"(9)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어떤 분쟁이 제국주의이고 어떤 분쟁에서 자본주의 세력 편을 드는 것이 허용되는지를 취사선택하는 노골적인 사례다.

 

적어도 중동에 관해서는 국제맑스주의경향(IMT)이 좀 더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IMT는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사회주의 계획 부재"를 이유로 KKE를 비판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대중의 투쟁은 이 지역의 모든 반동적 자본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10) 그러나 IMT도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해 IMT는 차베스를 "진정한 국제주의자"이자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칭송했다.(11) 물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의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동맹국이었으며 이란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IMT가 제국주의 국가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러시아이고, IMT가 '전체주의'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그 이란 정권이다. 차베스가 '형제'인 푸틴과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에 아부했을 때 그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였을까?, 아니면 차베스가 국영 TV에서 앨런 우즈의 말을 인용한 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의 다른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진보노동당(PLP)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다. PLP는 자본주의를 종식하기 위한 민족해방 투쟁의 실패로 인해 이전의 입장을 재고하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세기 내내 반(反)식민지 투쟁은 정착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민족을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전략은 자본주의와 착취를 종식하는 데 실패했다. PLP는 이러한 많은 투쟁을 지켜보고 참여했지만, 이 전투에서 얻은 이익이 역전되는 것을 목격했다.”(12)

 

드물게 인정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것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과거와의 단절로 해석할 수는 없다. PLP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반(反)제국주의 축이 없다고 보지만, 소련(1950년대까지)과 중국(1970년대까지)은 여전히 이러한 축을 구성했다고 간주한다(중국코뮤니스트당에 따르면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문제 핵심은 국제주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주의를 돈, 국경, 계급, 국가가 없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하는 코뮤니즘과 동의어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소련(혁명 물결의 확산 실패로 탄생한 국가자본주의 체제)과 중국(애초에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이 기존 강대국의 제국주의 경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反)혁명의 유산

 

이러한 사례가 전부는 아니지만, 자본의 좌파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트로츠키주의자든, 스탈린주의자든, 마오주의자든 이 모든 그룹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전술적 편법을 받아들인다. 사회민주주의 정당 입당, 좌파 정부 참여 또는 지지, 소련이나 중국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믿음, 통일 전선 또는 인민 전선 옹호, 또는 단순히 민족해방에 대한 지지 등을 통해 '선택적 국제주의'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 다음 질문에 대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국'이든 '억압국'이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反)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해방 전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터키와 중국 같은 곳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력(국가 또는 비국가) 사이의 모든 갈등이 레닌 시대보다 훨씬 더 발전한 제국주의 체제에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의 표면상 국제주의 입장이 일시적인 정치적 편의주의이든(상황이 바뀌면 버려질), 진정으로 새로운 방향이든, 자본의 좌파 조직은 오래전에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들은 과거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결국 그들이 모집한 노동자와 자신을 자본주의 사각지대로 이끌 수 있는 공식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전쟁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이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은 다양한 경향의 진정한 국제주의자들과 함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13) 아래 다섯 가지 사항은 공동 활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자본주의, 제국주의 및 모든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 자본, '덜 악한' 국가, 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 국가, 임금 노동, 사유 재산, 화폐,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세계로 대체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 현재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이 노동계급에 가할 경제적, 정치적 공격에 맞서기 위해.

•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한 투쟁, 독립적인 파업 위원회, 대중 집회, 노동자 평의회의 결성을 위해.

•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고, 노동계급 단결과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위해.

 

장기간의 어려운 작업이지만, '선택적 국제주의'가 아닌 일관되고 명확한 국제주의 메시지를 이미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과 앞으로 벌어질 투쟁에 전파해야 한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4년 1월 22일

 

<주>

(1) https://geneva-academy.ch/galleries/today-s-armed-conflicts

(2)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3) https://socialistrevolution.org/no-war-but-the-class-war/

(4)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ukraine-year-one-of-a-terrifying-imperialist-war/

(5) https://inter.kke.gr/en/articles/No-to-imperialist-war-Greeces-involvement-must-stop/

(6) plp.org

(7) https://inter.kke.gr/en/articles/Short-answers-to-current-ideological-political-questions-concerning-the-Israeli-attack-and-massacre-against-the-Palestinian-people-in-the-Gaza-Strip/

(8)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free-palestine-why-we-say-by-any-means-necessary/

(9) 이탈리아의 동지들이 SI 코바스 기지노조 내에서 나온 팔레스타인 관련 성명을 비판할 때 사용한 용어를 빌려온 것이다.

(10) https://www.marxist.com/the-communist-party-of-greece-and-the-struggle-for-the-liberation-of-palestine-a-necessary-debate.htm

(11) https://www.marxist.com/a-tribute-to-hugo-chavez.htm

(12) plp.org

(13)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4/a-brief-critique-of-part-time-inter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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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소개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1923년 대부분(2월 3일~10월 26일)을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자신과 30여 명의 동료 피고인들의 변론을 준비하는 한편, 창립 2년밖에 안 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선언을 작성하고 전체 당원들이 토론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르디가의 체포 이후 당원에 대한 체포와 탄압이 잇따르면서1) 조직이 약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보르디가가 우려했던 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선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더 심각한 위기는 이탈리아 당의 ‘원칙적인 전체의 틀’과 그가 정중하게 ‘인터내셔널과 그 집행 조직의 다수파’라고 부르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즉 점점 더 반(反)혁명적인 소련의 외교 정책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성 정당들을 관료적인 '예스맨'으로 만들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권위적 입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보르디가는 1921년 1월 이탈리아당이 사회민주주의에서 이탈한 이후 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전술과 이탈리아당이 채택한 정치적 틀과 정책 사이에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당 내부에서 완전히 공개적인 토론을 요구했을 뿐이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a) 리보르노 분할이 너무 좌파에 치우쳤다는 모스크바의 원래 불만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다수파'와의 융합을 통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b)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인터내셔널 집행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했고 보르디가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즉,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과의 정치적 거래로 정책을 타협할 수 있는 기초가 아니라 집단적 노동자 행동을 위한)으로 이해하기로 한 '통일전선' 정책을 해석하는 방법. c) 이로부터 전쟁 직후 피우메(Fiume)를 점령했던 다눈치오(d'Annunzio)의 전(前)파시스트 부대를 모방한 반(反)파시스트 저항투사 인민군대(Arditi del Popolo)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d) 보르디가가 주로 초안을 작성하고 제2차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대회에서 다수결로 승인한 로마 테제를 코민테른 집행부가 단지 권고문으로 축소했다.2)

 

이러한 문제 중 그 어느 것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서 보르디가의 입지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았으며, 비록 인터내셔널의 나머지 이탈리아 대표들이 제4차 세계대회(1922년 11월/12월)에서 PSI와 원칙적으로 융합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음에도 그 자신이 당 지도부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아무도 그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1922년 10월, 투라티(Turati)의 개혁파가 국제코뮤니스트당 대회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원하던 정치적 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 정책은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Zinoviev)가 추진하였으며, 그는 이 정책을 통해 투라티 당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보르디가를 제외한 '융합'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가 하던 지도부 역할은 지난 6월 '이탈리아 문제'에 관한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 이후 러시아에 머물고 있던 그람시가 대신하게 되었다.

 

1923년 4월 이탈리아 사회당(PSI) 총회에서 그 정책을 부결시켰다.3) 어느 정도 상설화된 인터내셔널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서 통일전선을 준수하도록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책략에 대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정치적 탄력성에 유일하게 균열이 생긴 시기는 1921년 5월이었다. 이는 인민군대에 대한 「신질서」(L’Ordine Nuovo)에 실린 기사에서 그람시의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당 규약과 양립할 수 없다는 당의 결의문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4) 당시 인터내셔널은 부하린의 방식으로 개입했는데, 그 방식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불화를 더욱 부추겼다.5)

 

어쨌든 점점 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고 주로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지만, 국제적인 정치조직이 이탈리아당이 통일전선 정책을 계속해서 준수하지 않아도 용인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보르디가가 더 순응하지 않는다면 ...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손이 닿지 않는 러시아에서 치료 기간을 연장하고 코민테른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항상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 (현재 우리가 재판을 받는 보르디가의 문제로 점점 더 인식되고 있는 문제)를 고려할 수 있었다.

 

전체의 재판 과정은 긴 여정이었다. 보르디가와 그의 공동 피고인 31명은 국가 전복 음모 및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적어도 1924년 로마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만든 기록에 의하면 보르디가의 경우에는 장시간의 예비 심리가 있었다. 보르디가는 당이 지하 본부를 세우려던 프라티나(Frattina)의 한 아파트 블록 밖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3,000리라, 약 3,000파운드(1923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를 소지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3,000파운드가 크라신(Krasin)이라는 '러시아 담당자'에 의해 송금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외국 국가의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 즉 외국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곤혹스러워했다.

 

“판사 :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러시아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보르디가 : 아니오. 그 정부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며, 이제 이 두 기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다른 국가에 상주할 수도 있습니다. 보기를 들어, 로마의 비아 프라티나(Via Frattina)에 있는 우리 본부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경찰이 없었다면 집행부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기존 인터내셔널은 브뤼셀, 제네바 등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3 인터내셔널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에는 가장 중요한 정당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이 포함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경외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부러워하는 정당입니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입니다. 자금 송금은 여러 국가의 동지들로 구성된 제3 인터내셔널 예산위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우연하게도 이 위원회의 의장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금액을 보내기로 한 사람은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에겐 모두 똑같았습니다.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정부 사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이 가입된 제3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코뮤니스트당입니다. 러시아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의 조직이 아니라 정부가 인터내셔널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적어도 인터내셔널이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가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종속되는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 러시아 정부와 여러 조직은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운동 문제에서 행동할 권한이 없으며, 오직 인터내셔널만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회와 지도 조직의 지시를 받는 러시아 정부의 정책은 인터내셔널에 의해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러시아 정부의 대외 대표에 불과한 크라신과 어떤 교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사하고 존중하는 나의 동지이지만, 우리와 러시아 국가의 다른 대외 대표 사이에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아무런 조직적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6)”

 

부르주아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국가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것을 얼마나 깊이 믿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그의 선언문은 '이탈리아 문제'뿐만 아니라 ‘우익으로의 일탈에 맞서 싸우는 인터내셔널 강령, 조직 및 전술적 문제’에 관한 공개 토론이 여전히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1923년에 일어난 사건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제3차 대회 이후 러시아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올바른' 결정,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러시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리한 결정이 나오게끔 관료적 변화를 강요해 왔다. 우리는 1922년 말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당과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대신해 단순히 교체된 것을 보았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러시아가 통제하는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총회 사이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전에 각 정당의 성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 현장에서 '선출'했다.7) 또한, 대회 사이에 보르디가가 선언문을 작성할 무렵이었던 1923년 중반부터 1년에 두 번씩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를 개최하는 패턴이 확립되었는데, 여기에는 선출직 위원도 포함되었다. 러시아에서 반(反)혁명이 일어나면서 '레닌의 당'의 근본적인 목표는 새로 출범한 소비에트 및 지금의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가의 고립을 깨기 위해 혁명적 봉기, 특히 1923년 불가리아 사태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독일 10월혁명을 기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열강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결과적으로 초래된 불규칙한 외교 정책은 언급할 수 없다. 코민테른 당원들의 충성심이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에 매우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지도력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법정에서 보르디가가 묘사한 러시아는 이보다 더 선명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이다.”

 

좌파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다수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지배하는 코민테른이 보르디가, 그리고 필요하다면 당 지도부 전체를 편들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러시아 정당의 정치적 방향과 미래 지도력을 둘러싼 내분이 심화하면서 이탈리아 문제는 이러한 책략에 얽히게 되었다. 보르디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확대집행위원회(ECCI)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그람시는 스코치마로(Scoccimarro), 타스카(Tasca), 테라치니(Terracini), 포르티차리(Fortichiari), 보타(Vota)와 함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에 대해 연설했다. 그 결과 우익의 소수파 대표들이 포함된 새로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혼합' 집행위원회가 임명되었고, 포르티차리는 이 위원회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이 새로운 집행부는 그동안 중앙위원회에 속해 있지 않았던 톨리아티, 스코치마로, 타스카, 보타, 겐나리(Gennari)(포티차리 대신)로 구성되었다. 8월, 감옥에 갇혀 있던 보르디가와 그리에코(Grieco)는 새로운 집행부의 소식을 듣고 물러났다.

 

이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당 내부와 외부에서 자기 선언문에 대해 최대한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놀랍게도 감옥에 갇혀 있어도 간단한 암호와 협조적인 교도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후자는 주로 톨리아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고, 톨리아티는 이탈리아의 다른 당원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을 포함한 코민테른, 그리고 보르디가는 잘 몰랐겠지만, 그람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지도부, 이탈리아 당을 위한 새로운 지도부, 즉 타스카로 대표되는 우파에 너무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보르디가와 구(舊)집행부보다는 '온건'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던 그람시였다.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약화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 그람시 자신의 표현대로 ‘파시즘의 승리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즉, PCd'I 전체)에게 있다’는 지노비예프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선언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면, 그는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방법, 즉, 보르디가와 달리 당의 어떤 권위 있는 자리에서도 물러날 이유가 없는 직책을 지키는 전쟁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편 보르디가는 분파 작업을 하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놓고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의 대표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23년 말,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최고 간부 회의(Praesidium)는 다시 한번 보르디가에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집행위 위원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보르디가는 어떤 경우에도 전 이탈리아 집행부 전체를 복직시켜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으며,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 무렵 보르디가는 ‘미끄러지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다. 그람시는 처음부터 보르디가의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톨리아티가 수정하여 제출했음에도 계속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보르디가가 석방될 무렵에는 다른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러시아를 모방하여 당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미 9월에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노동자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한 코민테른의 결정을 이탈리아 당 집행위원회에 알렸다. 이는 1924년 2월에 정식으로 창간하여 1926년 제3차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에 대항하는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캠페인의 수단이 되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에 열린 1924년 5월의 특이한 코모(Como) 대회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리옹에서 열린 연정을 위한 일종의 사전에 진행된 리허설에서 좌파(투표권이 없는 유일한 좌파 대표 보르디가), 중도( 톨리아티), 우파(타스카)를 대표하는 세 가지 논제가 발표되었다.

 

“총 65표 다음과 같이(중앙위원회 14표, 연방 및 지역 간부, 청년 연맹, 당 언론 및 선전 기관 대표 49표 중 41표가 보르디가 후보, 10표가 우파 후보에게 그리고 중도 후보가 11표를 얻었다) 투표가 이루어졌다. 두 명은 기권하였고 한 명의 표는 분실된 것으로 간주 되었다. 대회에서 선출된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보르디가, 포르티차리(Fortichiari), 레포시(Repossi), 그리에코(Grieco)는 사임했다 하여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에 불참한 세 명의 위원(겐나리, 라베라, 레오네티)이 중앙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개표에서 확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좌파 논리가 다수의 표를 얻었다.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는 45 대 8로 좌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8)”

 

위 그람시에 친화적인 저술가조차 인정했듯이, "당 전체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보르디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분명했다. 이는 그람시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시작된 것이었다."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할 일이 더 많았다. 인테사(Intesa) 위원회와 그람시에 대한 팸플릿을 참조하라.9) 여기서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한 보르디가의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은 1930년 무렵에 줄어들고 중단되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많이 가려져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번에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최소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위한 강력한 틀을 이미 갖추고 있다면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둘 이상의 국가에 기반을 두고, 개별적인 유대를 기반으로 성원 자격이 부여되므로 어느 한 부문의 통제를 받기 쉽지 않은 구조의 조직이다.

 

E. 레이너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소개에서 노트 NO. 1,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들의 재판, 1923, 5쪽:

움베르토 테라치니(Umberto Terracini)는 1923년 2월 13일에 제3 인터내셔널 집행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일주일 만에 경찰은 5,000명이 넘는 동지들을 체포했다. ... 당원의 1/4이 체포되고, 지부가 해산되었으며, 지도자 보르디가 동지를 빼앗겼고, 당원들이 죽음과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이미 당의 작업과 활동을 재개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행위원이 체포되었고(테라치니 외에 브루노 포르티차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배된 상태였다), 반란 선동, 탈영, 국가 권력 전복 음모 및 계급 증오 선동 등의 범죄 혐의로 로마 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재판은 1923년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렸으며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PCd'I및 코민테른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1925년 인테사 위원회의 강령, 1925년 팸플릿 소개를 참조하라.

3) 세라티는 추방된 후 수천 명의 성원과 함께 단일한 코뮤니스트 분파를 결성했고, 1924년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 합류했다. 그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6년 코뮤니스트당 비밀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1921년 7월 31일 「신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뮤니스트들은 인민군(Arditi del Popolo) 운동에 반대하는가?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켜 부르주아지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가 창출한 새로운 생산력의 조직과 발전을 감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창설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의 번역)

의심할 여지 없는 반(反)파시스트 동기를 가지고 있고(조직적으로는 원래의 파시스트 아르디티를 모방했지만) 아나키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공동 당원은커녕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파르마의 올트레토렌테(Oltretorrente)와 같은 노동계급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및 아르디티 성원들은 종종 무솔리니의 갱단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했다.

5) 그리에코의 답장에는 부하린이 "... 세컨다리가 이런 반(反)맑스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동안 코뮤니스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 직후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아나키스트이자 인민군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아르고 세컨다리(Argo Secondari)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6) 1923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Il Processo,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로마 1924) 79~82쪽에서 번역.

7) 이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정당 규모에 따라 확대집행위원회(ECCI) 대의원 수를 결정하도록 하여 러시아가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어쨌든 다른 모든 정당은 위원회에서 수적인 열세로 자문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러시아 당만이 다수였기 때문에 결정하는 투표를 할 수 있었다.

(8) Luciano Beolchi, Dal Partito di Bordiga al Partito di Gramsci, 248쪽

(9) 1925년 인테사 위원회와 오노라토 데이먼의 강령,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그람시」에 대해서는 모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소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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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문 (1923)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의 모든 동지에게

 

확실한 신념과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동지들에게 현재의 성명을 발표하여 코뮤니스트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은 전체 당원의 참여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효율성과 조직의 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다른 위기가 없었다면 당의 주요 기구가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불행하게도 첫 번째 위기의 결과를 더 악화하는 또 다른 위기, 즉 당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내부 위기가 개별 전술적 문제에서 이제는 원칙과 당의 정치적 틀 전체 위기로 확대되었다.

 

이 위기는 내부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당과 현재의 다수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및 집행 기관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히 지금의 위기는 절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동지들에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기본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 당의 사상과 행동 강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전체) 당 앞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당 활동이 마비되고 무력화될 수 있다. 공개적으로 당 회의를 개최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문서에서 그러한 작업의 시작을 제안하고자 한다.

 

리보르노 대회에서 우리 당이 설립되면서 만들어진 강령은 동지들이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이는 특히 전후 몇 년 동안 사회당의 본질적인 잘못에 대한 당 내부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리보르노 직후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당의 상황과 과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당의 이론은 러시아 혁명과 제3 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부각된 혁명적이고 맑스주의적인 기초 위에서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국제적 연계의 힘으로 구별되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 조직은 구(舊)당에 치명적이었던 전통적으로 피상적, 무질서, 개인 분파를 피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만 했다. 진지함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성찰하는 새로운 기준이 공동의 대의를 위한 모든 개별 성원의 무한한 헌신과 결합하였다. 따라서 우리 활동의 가장 큰 문제는 코뮤니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 전술이다.

 

1921년 초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사회당의 결함으로 인해 우리와 같은 소수 정당이 혁명적 공세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타협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의 활동은 부르주아지의 공세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최대한의 저항을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투쟁력을 당의 기치, 즉 재건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진 당을 중심으로 최상의 상태로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구상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코뮤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즉 어떻게 하면 산업주의자들의 공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를 방어하는 단결을 최대한 보장하고, 동시에 이미 이탈리아 대중의 슬픈 경험이었던 모순된 지침으로 인한 안타까운 융합을 통해 대중이 겉으로 보이는 단결의 망상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는 반동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코뮤니스트가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를 여기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추종자를 가진 다른 정당의 행동 때문에 시도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코뮤니스트당에 모이는 경향이 증가함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명하게 코뮤니스트의 지도를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한 적이 없으며, 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당과 인터내셔널이 논의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대차대조표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위험은 "당의 전술이 잘못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초래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이 사라진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정당의 누구도 선의와 다른 자질을 부인하지 않는 한 개인의 활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 즉 전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 맑스주의 정당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이탈리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국제적 의미에 의해서만 더 중요해진 부분에 관한 판단이다. 이는 또한,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나온 후 당이 그 구성 기반을 검토하고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1년 간 이탈리아 정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 즉 코뮤니스트당이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고 오랜 원인에서 비롯된 사건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언급한 후, 우리가 리보르노에서 수립한 노선은 잠시만 따를 수 있었다는 점을 즉시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함을 동지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질문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전술에 대한 이탈리아 당의 입장은 인터내셔널의 입장과는 다르다.

·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전술’의 한계를 넘어 당 조직의 토대를 훼손하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인터내셔널은 전술에 관한 정책을 수정했고, 지금도 수정하는 과정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강령과 기본적인 조직 규범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점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이는 로마에서 열린 당 대회(1922년 3월) 토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당 대회에서 승인된 전술에 관한 논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요점은 당원들이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에서 이탈리아에 적용될 전술 문제의 차이점은 최근에 그리고 매우 느리게 나타났다. 제 3차 대회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표단은 인터내셔널의 전술에 이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당시와 그 이후까지 당의 구체적인 활동은 여전히 인정되고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통일전선'과 '노동자 정부'라는 슬로건에 직면 한 우리 당의 노선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인 초석의 사실에 근거하여 전술적 방법과 선전의 본질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기준을 근거로 수립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당과 그 지도부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만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혁명적 독재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노동조합 통일전선선'에 참여하고 기회주의의 그늘에 맞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내셔널은 때때로 구체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1922년 6월에는 당이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명'으로 규정할 정도로 비판했지만, 이후에 실제로 그것은 장관과 의회 참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과 파시즘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대신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 강령주의 정당과의 융합 문제로 인해 이견은 더욱 깊어졌고, 상당히 중요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당의 '계보'가 리보르노에서 당이 설립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았고, 당의 주요 목표인 다른 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유입은 다른 운동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우리의 정치적 틀에 편입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다른 정당과 대중적으로 융합하려는 어떤 생각에도 반대했다. 또는 우리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대신 그 안에서 지지자들을 일부 만들려는 시도(즉, 우리는 '침투'나 세포 건설에 반대했다), 즉, 오늘날 인터내셔널은 리보르노를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고 사회당의 다른 '일부 조직'을 대중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에 따르면,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기를 주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와 분리되었다. 우리가 보기에 최대 강령주의는 개량주의만큼이나 위험한 기회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전통과 주도 세력에 비춰볼 때 결코 혁명적이지 않고 무능과 관성 상태를 가장한 기만적인 말로 대중을 계속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터내셔널은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입지를 잃고 당원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최대 강령주의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바꾸고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를 (측근들의 비열한 지도자들에 의한) 패배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당의 청산으로 강화된 코뮤니스트당의 우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대 강령주의자가 조직을 혁명적 기반 위에 올려놓고 인터내셔널과의 유착을 충직하게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이것이 세라티 (일반적인 코뮤니스트 경향의 출현을 막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세라티 자신이 당에 의해 또는 오히려 최대 강령주의라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는 수십 명의 지도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을 보았지만, 후자는 그들이 잡혀 있는 그물을 찢어야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 코뮤니스트들이 융합을 막았다고 말한다 !!!

 

인터내셔널의 이러한 입장이 이탈리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통일전선으로 인하여 당의 전술적 작업이 방해받게 되어 그들이 우리 전술에 얽매여 있던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다른 당에 제공했다. 그들은 코뮤니스트들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 연합을 제안했다. 노동총동맹과 노동동맹 내부에서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모스크바가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의 고수를 권유한 덕분에 오랫동안 지속해 온 치명적인 실수를 이어가면서 개량주의 게임을 하고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속일 수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1922년 8월의 운동을 매우 다른 지반 위에서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1922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노동) 연맹 회의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다수파들은 의회 협력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는 대가로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행동도 협동도 안 된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공식만큼이나 해로운 것이었다. 분명히 세라티와 다른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오래된 혐오감 외에도 인터내셔널에 다시 가입하는 대가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조금씩 교환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합류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남아있도록 초대받은 제3 국제주의 분파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모호성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개량주의로부터 분열 이후 사라졌어야 할 최대 강령주의 정당은 인터내셔널과 반복되는 제안을 조롱하면서도 아무런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안일한 기회주의로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 노동자들의 관성적 경향을 악용하여 몇 가지 혁명적 문구를 통해 수동적이며 가식적인 충실함의 기치를 내걸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상황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최악의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 소진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세력이다.

 

그리고 비록 통합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더 심각한 이유로 당원 수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이 코뮤니스트당에 호감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특정 상황에서도 인터내셔널의 정책으로 인해 코뮤니스트당이 이점을 얻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8월 파업 이후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전히 사회주의 분열의 가능성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의 출현과 우리 당에 반대하는 반동적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우리 당은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모든 가능성과 모순되는 위화감이 커지고 있으며 활동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의회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더욱이 인터내셔널과의 차이로 인해 이른바 '소수파'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정통 코뮤니스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리보르노 이후 낡은 사회주의 방식에 다소 집착하고 (새로운) 서투른 작업과 책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고상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 아니라 난폭하고 때로는 조용한 험담으로 인터내셔널의 테제를 지지해 왔다.

 

이 모든 결과로 당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융합주의’접근 방식의 결과는 리보르노에서 발생하여 명예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년 넘게 투쟁해 온 당을 ‘청산’의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장 사악한 최대강령주의적 '중도주의'의 늪으로 다시 빠뜨릴 것이며,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이러한 시련의 과정에서 미래에 필요한 경험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경고음이 울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 문제에 대해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 인터내셔널의 방식은 어떠한 구호를 한 번에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더 넓은 범위에서 정의하는 표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융합과 연속적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대회에서 제시된 다양한 대안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보기를 들어, 1921년 이후에는 더는 융합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제3 인터내셔널 분파와의 관계조차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1922년 말에 이르러서야 이 분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이후 사건들을 통해 당이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고 고통스러운 협상과 개인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편법을 통해 도출된 미봉책이 아닌, 인터내셔널 내에서 폭넓고 진정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최소한 우리가 검토하기 위해 제안한 일반적인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3차 대회 이후 등장한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전술적 구호(제 4차 대회에서는 전술적 테제를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의 의미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강령과 원칙에 대한 변화의 위험, 1924년 강령과 규약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연기된 것에서 분명한 위험성을 수반한다. 동시에, 조직 규율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정당과 중앙과의 관계에서 불쾌한 내부 위기를 초래하는 무미건조하고 때때로 불연속적인 절차가 되었다.

 

이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인터내셔널 진영에서 위기의 전야를 맞이하고 있으며, 우리 이탈리아 당은 위기에 깊이 빠져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건은 중앙 기관이 수행하는 규율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모든 성원 앞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진지한 사항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더 자세히 밝힐 것을 약속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정 사항에 대한 동지들의 지지를 모으려고 한다.

 

•현재 상황에 보이는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당을 위한 투쟁 경험의 가치와 당의 강령적 및 전술적 초점에 대해 당 내에서 광범위한 토론과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

•인터내셔널의 강령, 조직 및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고, 우파의 수정에 맞서 싸우며, 무엇보다도 지침을 결정할 때 최대한의 분명함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토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동의 평가를 수행하여 당의 활동을 안내할 완전하고 분명한 계획이 작성되도록 한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성원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역량을 가장 합리적으로 투입하여 이전의 심각하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 이유와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당의 업무와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이 토론이 공동의 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인터내셔널 대다수의 의지에 따라 코뮤니스트 성원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당의 주요 조직이 그들이 적용하도록 요구되는 지침(즉, 이러한 지침은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고 적용해야 할 지침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는 동지들에 의해 작성되어야 한다)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의 주요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사항

 

이 문서를 받은 동지들이 복사하여 당원들에게 배포하고 이 글도 복사해 주었으면 한다.

 

동지들은 이 문서에 대한 동의 또는 반대 의견, 그리고 이 문서와 관련된 모든 통신을 이 사본을 준 동지를 통해 보내주시오. 답장은 같은 방식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 문서는 당 중앙위원회와 인터내셔널에 발송되었다.

 

해외에 전파하게 된다면 이는 또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번역을 해주시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발기인들

1923년 여름, 감옥에서 작성

 

「혁명적 전망」 22호

2023년 8월 14일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8-14/amadeo-bordiga-s-prison-manif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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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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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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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9월 28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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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창간호]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 코뮤니스트 사이 일련의 토론 부분을 담은 글이다. 특별히 이 글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내부 분파로 부르는 동지들이 제출한 문서에 대한 답변이다. 그 분파가 ICC에서 탈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글 끝에 실린 인용문은 그 내부 분파의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문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혁명들의 실패, 특히 러시아혁명의 실패라는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강령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당에 대한 모든 생각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볼셰비키(나중에 코뮤니스트)당이 자본주의 반(反)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1917년 지주, 자본가,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협력자들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전과 전복 과정에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료한 표현으로서 수행한 역할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사실이다. 당이 점차 계급의 기반을 대체한 러시아 내전(1918-21)에서 벌어진 일들은 당이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을 확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란으로 이끄는데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선진적이며, 명료한 부분이라는 전반적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게 만들었다. 당이 봉기를 이끌고 당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강령으로 계급에 되돌아간 인간의 대대적인 변혁만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의 작업일 수 있고 또한 말 그대로 사상의 생산의 주인(자본가계급)이 극복되는 시작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1-30쪽)에 게재된 ‘계급의식’에 대한 연재물에 실려 있다. 이는 수정되어 소책자로 재출간될 것이며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에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중에 있다.

 

의식의 문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분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방법론적 정식화의 실질적 차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여기서 다시 서술하는데 논의를 한정하려고 한다.

 

 

첫째, 혁명, 혹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 수단, 투쟁의 형식, 전술, 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코뮤니스트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올바른 유물론적, 변증법적 해석으로부터 관념적, 기계적, 평의회적, 경제주의적 입장을 구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문제이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특정한 수준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고,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의 성숙으로 이끄는, 경제적 요구 투쟁의 발전을 통하여, 의식이 계급의 내부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또는 계급 외부로부터 의식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계급의 바깥에서 당이 만들어지고 혁명적 정치의식의 위로부터 주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이 계급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계급의 모든 요구를 종합하고 역사적 과업에 속하는 요구를 종합하는 것은 더 진전된 논의의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그 의식은 “외부에” 존재한다. 사회학적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든, 소부르주아든, 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지식인이든 간에, 당은 계급 안에서 태어난다. 당은 조그만 경제적 요구로부터 완전한 정치 강령에 이르게 하는 보다 보편적인 전략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투쟁의 요구를 스스로 만든다. 당의 정치 지식은 다양한 계급 경험의 역사적 종합의 결과이다. 그것은 승리의 원인을 맨 앞에 내세우듯이 패배의 원인으로부터도 배운다. 그것은 매일 계급투쟁의 뒤틀림과 반전으로부터 때로는 숨겨져 있거나 본능적이고 부문적인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는 충동 뒤에서 이끌어낸다. 당은 전 계급에게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통해 이 계급투쟁의 경험을 되돌려준다. 이처럼 그 관계는 계급과 그로부터 분리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더 앞서는 사려 깊은 부분 속에서, 계급 스스로 내부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이러한 앞선 부분은 아래로부터, 노동자로부터 충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부분으로서의 당이다.

 

이는 투쟁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이 일정 정도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오늘날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세계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당은 세계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 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 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되었고, 유혈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 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은 계급투쟁을 작동하게 할 수 있다. 그 조건들은 계급과 당 사이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무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쨌든 너무 늦은 것이다. 아주 한참. 당은 봉기 단계 전에 역사적 시기에 이미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은 계급 자체와의 관계를 작고, 사소하지만 효과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들, 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의지는 이른바 당에 의해 쥐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결과로 또 다른 정치적 패배로의 길을 닦을 것이다. 이는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소생을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당이 계급의 부분, 즉 계급투쟁의 일시적 도구가 아닌 영속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당이 계급과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줌으로써 계급과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패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당이 오로지 계급투쟁이 시작된 후에만 만들어지고 그 투쟁과 함께한다는 이론을 지닌다면 패배는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계급투쟁이 사라지거나 낮은 수준의 투쟁만이 있는 시기에 그늘과 같은 후퇴가 있더라도.

 

이는 당이 당 주위의 사회적 맥락과 독립적인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엄청난 반혁명 시기에 당과 계급을 통일하는 박약한 관계는 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의 적에 의해 패퇴되어 당은 말 그대로 지워져버린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적,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는데 더욱 진전된 요소들을 막아낼 수 없다. 당은 개입되거나, 생성하고 사라지는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다. 반대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은 계급투쟁의 리듬과 당의 개입 가능성의 정도를 규정한다. 그 수위가 어떠하든 계급투쟁을 위한 준거가 되려는 시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의 요구를 궁극적 요구로 만드는 것 외에 경제투쟁에서 당의 주요 임무는 투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이나 방어적인 경제 투쟁은 경제적, 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피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경제 투쟁은 요구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일으키고 정치적 적을 떠나지 않으면서 쇠퇴한다. 계급의식의 더 높은 수준에서 다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지식으로 어떠한 경제투쟁도, 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 변혁시키는 임무가 있는 혁명당의 개입이 없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당의 우선성은 당면 요구라는 자연스러운 영역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투쟁이 착취의 의식과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볼 때, 조직적 측면이나 정치적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투쟁을 유발시킨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투쟁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혁명적 습격으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정교화하는 전략적 준거의 틀로서 당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화가 가능하다.

 

“노동계급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을 하게 될 때, 그것은 객관적으로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정식화는 의식의 문제에 관한 당과 계급 사이의 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계급의 경제적 요구는 스스로 전술, 전략, 그리고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을 기계적으로 결정할 만큼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계급의 운동과 그 역사적 역할의 독립적 성숙에 위임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경제적 수준으로부터 정치적 수준으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적인 도약을 수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계급 전위, 곧 당이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이 다음의 정식화도 허약한 주장이다.

 

“경제적 요구투쟁은 계급과 그 투쟁의 역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표현, 다시 말해 일정한 발전의 수준에서 계급정당이 되는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계급의 경험을 종합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지배이데올로기의 혼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의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다.”

 

이 경우 당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계급에 맡겨지고 그래서 당은 계급 스스로의 정치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단계에서만 만들어진다. 당은 계급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우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 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 그러나 당은 전체로서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 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Bilan & Perspectives No. 6 (2005년 12월)

번역 ㅣ 오세철

 

<원문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3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2005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5-06-01/the-question-of-consciousness-a-basis-for-dis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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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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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8월 1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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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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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 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 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 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 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 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 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 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1천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 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 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 예외는 미국이었는데, 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 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 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 결국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 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 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월, 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 미국은 (뉴 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 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 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 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 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 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 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 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 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 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 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 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 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 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 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 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 전체 세계는, 특히 미국, 소련, 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 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 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 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 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 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 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 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 주요한 목표는, 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 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 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 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 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 진실로, 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GNP 대비 국방비 비율(%)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UK

USA

UK

USA

1913

3.0

/

13.5

10.5

1923

4.7

/

27.5

11.0

1933

3.8

/

30.0

16.5

1938

4.9

1.5

31.2

19.5

1948

7.4

8.0

37.0

24.0

1953

8.9

13.2

35.0

27.5

1958

6.4

10.1

31.5

29.0

1960

6.2

9.0

32.5

28.0

1965

5.8

7.5

34.0

28.5

1969

5.3

9.0

39.0

32.0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쪽.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역(逆)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 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 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 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 투자, 시장의 원천으로써, 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 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 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 무역 전쟁, 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 교육, 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 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 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제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 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 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 식민주의 -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정확하게도, 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反)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 반(反)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 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 이었던 반면, 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신-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 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제3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년, 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 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년, 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 인도는 110달러, 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년, 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 인도 2,256.6달러, 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 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은, 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은 자본이므로, 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즉, (원조는) 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 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천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 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 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 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 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 더욱이, 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 형성, 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 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월, 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 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 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 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 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 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 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 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년)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 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이것이 부패, 낮은 노동 생산성, 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 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 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 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 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중국 코뮤니스트당, 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 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 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 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 금융화, 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 이에 더해,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쪽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쪽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쪽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쪽.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쪽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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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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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정기 독자들은 소소한 사항을 추가하여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를 재발간해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 1974년 처음 발간된 이 글은 1975년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일부가 된 혁명적 전망 그룹의 기반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반세기 전 작성된 이 글의 핵심 전제는 세월의 시험을 견뎠고, 처음 두 부분에 대해 우리는 원본에 가벼운 수정만 가했다.

 

그러나, 3부에서 우리는 온갖 혼란과 변화의 지난 반세기에 진입했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원래 글에서 제기된 것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 사실, 이미 1976년 당시에도 도래하는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이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이 의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즉각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이미 결정했었다. 1970년대의 경제적 투쟁(우리들 사이에서는 ‘재정적 전투성’으로 칭한다)은 체제를 없애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급의식을 자동으로 출현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 체제가 더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그랬다. 우리는 위기의 원인에 관해 설명했고, 여전히 남아있지만,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만약 그 이후의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거나 우리가 다룬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지 않는다면, 그 설명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3부와 이 연작의 이후 부분은 처음 두 부분에 비해 더 많은 편집이 가해질 것이다. 이 3부는 원본이 작성된 시기, 전후 호황(붐)의 마지막에 끝난다. 이 시기는 노동계급이, 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자신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전 세계적 파업과 폭동으로 반응한 시점이다. 이는 CWO와 같은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의 탄생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와 같은 기존 조직의 재활성화로 이어졌다. 우리의 새로운 세대는, 우리를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유물론적 실재)을 설명하는 맑스의 분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가 1970년대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것은, 축적 순환의 마지막, 그리고 그 위기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한 체제의 반응이었다. 이 연작의 다음,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글을 요약할 것이고, 그 글은 이 축적 순환 -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 축적 순환의 핵심 문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의 필요성 등 - 의 끝에 대한, 이어지는 자본주의자들의 뒤틀림과 전환에 대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해야만 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쇠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인데, 이 쇠퇴가 자본주의의 빠르게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생산양식의 등장과 몰락에는 수 세기가 걸린다. 생산양식의 모순은 그것이 마침내 붕괴하기 전까지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때때로 명백하게 확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로 계급 규칙을 끝내지 않는다. 우리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Internationalist Communist) 23권에 썼듯이: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 동안 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밝힐 수 있지만,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코 내다보지 못한다. 대안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광기의 과정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쇠퇴한다고 기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종말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쇠퇴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국제주의적, 그리고 국제주의자 당의 지도를 받은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투쟁 과실이다.”1)

 

따라서 쇠퇴는 자본주의가 독점, 제국주의, 그리고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의 시대, 그러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이, 비록 모습은 다를 라도 기본적인 채찍으로 남아 축적 순환의 물질적인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약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쇠퇴는 전에 없는 거대한 위협을 제기한다. 지배계급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복합위기’(polycrisis), 경제적 스태그네이션, 팬데믹, 제국주의 전쟁, 환경 오염과 세계적 온난화 등의 모든 위협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닌 인류 자체의 잠재적 미래를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 우리는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묘사한, ‘투쟁’(contending)의 승리,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승리 또는 우리 모두의 몰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혁명적 소수도, 광범위한 노동계급도 무엇이 벌어질지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 집단적, 정치적 양쪽으로 모두 조직화를 시작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이 연작은 그 노력에 공헌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생산양식임을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윤율 하락이, 그것이 자본주의 상승기든 쇠퇴기든 그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추동력임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단정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 심지어 축적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고, 생산력이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쇠퇴하는 사회적 체제이고 그것은 1914년쯤부터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먼저, 우리가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작 시기를 ‘1914년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 생산양식은 어느 날 하룻밤 만에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만들어 내고, 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그 역사적 책무를 모두 수행한 것이 1914년 이전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점 자본과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 축적 순환상의 경제적 위기만으로는 축적 과정을 다시 활성화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자본의 중앙집중화는 이미 선행되었고, 이제는 몰락할 것이라고는 주변부의, 너무 소규모, 생산성이 낮은 자본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로써 자본의 평가절하만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연구의 이전 부분에서, 일단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버리면, 이윤율 하락의 역(逆) 경향이 헛된 것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 종국에는 세계전쟁으로 나아갈 뿐인지를 보았다. 세계 자본의 등장은 자유방임주의 또는 고전학파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 축적은 오직 각 지역 경제(national economy)에서의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자본의 개입과 국가의 시민 사회의 점진적 흡수 – 전 세계적인 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의 존재 - 라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다. 국가 소유(자산)의 증가와 생산수단 통제의 증가, 경제를 통제하려는 재정 정책을 제외하고서도, 이는 불모 생산(waste production. 즉, 세계 자본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에 기여할 수 없는 생산)의 자극을 포함하는데, 무기 생산이 불모 생산의 가장 명시적인 표현이다. 고전적인 경쟁이 이제 제국주의 강국 사이의 영속적인 경쟁 상황에 포함되면서, 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그 자신이 세계 경제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종종 무기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자본 축적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동반했는데, 이 위기는 오직 전쟁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데, 전쟁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재건(reconstrucion)기의 전주가 된다.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는 위기-전쟁-재건 순환의 역사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자본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작동했고, 제국주의 강대국들2)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후 선진국가의 제국주의 사이 경쟁의 책략 속에서 단순히 졸병 역할을 했던 중진국(less advanced states)의 상대적인 지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른바 ‘개발도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독립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국제적,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존재는 세계혁명과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코뮤니스트 제도의 물질적 가능성의 존재를 의미했다. 1917-21년 세계혁명의 물결은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이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가능성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임을, 그리고 사회가 야만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제도가 필연적임을 증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도중, 그리고 이후의 국가 주도 경제화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 가운데, 1870년쯤부터 계속, 선진국에서 총 국민 소득에 비례하여 국가 지출이 증가한 것을 보았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 지출의 가장 거대한 단일 항목은 국방비지만, 교육 및 공공사업(높은 기술적 구성이 요구되는 가스, 상수도 등의 서비스) 또한 중요한 항목이었다. 1909년, 영국 정부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결성하고, 정부의 통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구의 이전 부분3)에서 지적한 ‘도금의 시대’(Gilded Age) 독점 경향이 독점 가격을 통해 새로운 자본의 발전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과정을 왜곡할 것이라 위협하는 일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조직된 노동의 저항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운동’(Granger Movement)의 농민들은 반(反)-독점당을 설립하고, 1890년 첫 번째 독과점 금지법, 셔먼 조례(Sherman Act)를 통과시켰다. 맥킨레이(McKinlay) 대통령 정권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 아래, 그 법은 대개 이용되지 않았다. 그가 암살된 이후, 후임자인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열정적인 지지자, 테오도르 루스벨트 시기가 되어서야 JP 모건과 록펠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그 법을 적용했다. ‘경쟁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은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시장마저도 규제되고 나아가 국가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는’4) 과정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루스벨트는 실제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부 계약이 국가 계획과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는 지점에서 산업들과 관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 – industrial – Congressional – complex)의 씨앗은 뿌려졌고, 그 무렵, 전후 붐 시기, 산업의 지도자들은 정부 서비스에 막힘없이 드나들었다.5)

 

1914년, 전쟁의 발발은 전쟁 목적 생산에 대한 다소간의 직접적 통제권을 중앙 정부가 갖고 있던 선두 자본주의 강국들 모두의 내부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의 진행이 가속했다. 1916년 이후, 독일 제국에서는 라테나우(Rathenau)의 경제 통제가 너무 강력하여, “국가 사회주의”로 회자하였으며, 그를 도와 군수품 부서(Ministry of Munitions)를 운영하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의 모든 수단’이 총체적으로 그들의 마음대로였다”6)

 

이 국가 개입의 특정 측면들은 다수 전후에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유지되었고, 국가 자본주의는 모든 자본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경제의 국가 주도화 경향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조정한, 민족 국가 내부에서의 생산 필요성의 결과 – 비록 그 필요가 경향을 가속하고 강화했지만, - 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초래한 만성적 잉여가치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 있다. 산업의 침체기(불변자본을 더 증가시키기에는 너무 낮은 잉여가치)를 맞아, 경제 붕괴를 피하고자 국가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기능이었던 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재분배함으로써 평균 이윤율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집중 과정에서 더 큰 잉여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기업들 사이에서 나눠지고, 이는 시장이 그 자신의 몇몇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시장 메커니즘이 자본의 확장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를 멈춰버리면, 이윤율의 평균을 형성하는 문제는 복잡해진다. 개별 산업의 개별적 이윤율에도 불구하고, 모든 필수적인 산업의 동시적인 이윤율의 존재를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평균은, ... 잉여가치를 ‘통합(pooling)’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적 수요의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회적 생산의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의 지체(stagnation)는 그것이 문제가 있는 수요로 표현되는데, 잉여가치의 사회적 ‘통합’에 참여하는 자본 주체(entities)를 증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잉여가치의 통제는 자본주의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 되고, 이윤의 분배는 정부의 관심사가 된다.”7)

 

이런 이유로, 은행, 금융 등에 대한 국가 통제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29년 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정보 보조금, 많은 기간 산업의 노골적인 국유화가 이뤄졌다. 따라서, 보기를 들면,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거의 모든 해운 회사, 민간 항공 회사, 부채를 지불할 수 없는 은행과 국유화된 철도회사에 자금을 빌려주었다. 영국 정부는:

 

“... 철도의 통합을 달성(1921), 전력 공급의 부분적 국유화(1926), 정부가 지원하는 철강(1932) 독점, 그리고 국가적 석탄 카르텔(1936)을 만들어 집중화를 이루었다...”8)

 

나치의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반대해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제 통제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본주의자들은 “통산·산업의 영지”(Estate of Trade and Industry)로, 노동자들은 노동 전선(Labour Front)으로 조직화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1938년 2월, 괴링(Goering)은 ‘4년 계획’(Four Year Plan)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독재를 실시했다.

 

“이 소개된 방법들은 ... 경제에 대한 특정 나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마지못해 채택된 계획이며, 1930년대 현재 많은 국가에서 ‘케인즈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에 일부 기반을 두고 있다.”9)

 

이탈리아에서는 1933년, 파시스트 정부가 산업재건기관(the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 IRI)을 세웠다:

 

“... 정부의 경제 자립 정책과 재무장 정책을 돕기 위한 영속적인 산업 지주 회사로서, 민간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산업과 서비스에서만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그 활동에 한계를 두었다.”10)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두, 경제적 회복은 무기 생산과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그런데도 1929년에서 1938년 사이, 두 나라의 총 사회적 생산은 감소했다.11) 우리는 아래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 이 메커니즘에 어떻게 축적을 ‘돕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국가 주도 경제화(산업의 국가 소유라는 의미에서)는, 한 편에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지원하고, 경제 지원을 돕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적 영역의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킨다. 왜냐하면, 주로 사적 영역의 잉여가치를 지휘함으로써, 국가가 이 기업들의 자금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국가자본주의화 된 경제(이른바 ‘코뮤니스트’ 국가)에서 작동하는, 높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2 영역에 속하게 될 것)과 낮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1영역에 속하게 될 것) 사이에서 이윤율을 국가가 평등화하려는 시도에서, 똑같은 과정이 발생하는데,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금을 이전시키는 것이 여기서는 더 쉽다. 왜냐하면, 국가가 하나의 거대 기업가로 행동하면서, 총 국가 자본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 이는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 비용의 증가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을 심화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적 관리법’, ‘노동절약’ 기구, 성과급 시스템의 도입 등의 수단을 통해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에 속도가 붙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이윤을 내는 산업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윤율을 상쇄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하락은 실질임금이 세기 초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국가 경제에서 임금의 비율이 1932년 64%(이것마저도 1928년 수준에서 심각하게 떨어진 것)에서 1938년 57%로 떨어졌다.’12)

 

그런데도, 상대적,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확대되던 실업 증가에 기여했고, 중앙 정부는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입하여 국유화, 사회 보장 제도, 그리고 공공사업을 심화했다. 미국 F.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러한 정부 개입 가운데 가장 거창한 것이었다. 뉴딜 정책의 수단들은 그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의 실제 ‘마중물’이 된 적이 없고, 그저 대공황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체제를 단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1937년쯤에 이르러서는 국가 지출 단독으로는 이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명백했다. 그 대신, 경제위기 시기 고조된 제국주의 긴장이 관세 장벽 강화에 따라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ur”)과 ‘경제자립 정책’을 불러오거나, 또는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가 국가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러한 긴장 아래의 재무장은 군수 산업의 이윤율은 높였을는지도 모르나, 1939년과 1941년 제국주의 전쟁의 전면전에 추동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축적의 새로운 출발, 그리고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기의 신호가 될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단일 국가에서 고립되어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다른 종을 낳았다. 세계혁명의 전망이 미래로 멀어지자,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되었다. 레닌은 너무도 솔직하게 이것이 ‘국가 자본주의로’의 후퇴라 했으나, 그는 항상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에서의 서유럽 방식 국가자본주의(이후 ‘혼합경제’로 불림)를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맹비난해 왔는데, 이들조차 생산력의 완전한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아님(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을 알 수 없었다. 1920년대 계속된 소련 내 논쟁은 자본 축적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NEP를 지속하는 옹호자로서 부하린이 등장하는 동안(그리고 농민에 대한 양보로 농업을 성장시키면서), 그의 이전 좌익 코뮤니스트 동료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산업화를 더욱 가속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좌익 반대파 가운데 이 ‘초-산업화 지지자들’(super-industrialisers)은 스탈린이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패배했는데, 1928년 스탈린이 그들의 정책을 훔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이후 이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동의 시작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사실은 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의 시작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의 굴레 아래 있으면서, 그들의 이전 제국주의 주인들의 자본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축적할 방법을 찾던 국가에 이 초-산업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Five Year Plan)의 동기는 러시아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 계획에 잉여가치를 제공할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들의 공격 – 스탈린은, 1928년에도 그들이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 에 저항할 수 있는 군수 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나치가 조금 이후에 말할 것처럼, 그것은 ‘버터가 아니라 총’(guns not butter)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동안, 월가의 충격 이후 대규모 실업이 서유럽 경제를 황폐화했을 때, 5개년 계획은 완전히 계획된 명령 경제(소련에서는 ‘사회주의’로,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코뮤니즘’으로 잘못 불렸다)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 이르는 기간 두 주요한 열강 사이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고조됨에 따라, 이것은 전쟁 직후의 파업 물결, 주택 점유와 나란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서 복지와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에 일정 역할을 했다.

 

전후 호황(The Post-War Boom)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전시 통제가 완화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갈수록 확실해졌다. GNP 대비 국가 지출 비율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표를 보라). 소련에서는 1946년 제4차 5개년 계획 개시가 선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모네’(Monnet) 계획을 채택하고, 르노, 석탄, 가스, 전기, 프랑스 은행, 대규모 시중 은행, 에어 프랑스, 그리고 최대 규모의 보험 회사들을 국유화했다. 영국이 국유화한 대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우리가 이전에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가 정부의 국방 관련 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동안, 전후 재건기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회복은 미국의 마샬 원조(Marshall Aid)에 의해 시작되었고, 전쟁 이전 국가 통제를 이용해 유지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IRI(위의 내용을 보라)가 거대한 규모로 성장, 국가 철강의 60%를 생산했으며, 알파 로메오(Alfa Romeo)사를 소유, 20만 명의 공학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업을 통제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는 자본 축적을 강제하도록 국가 기관과 통화, 재정 체계를 다른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13)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은 아마도 서유럽의 민간 산업에서조차, 공공 영역이 이제 보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용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의 공공 영역 종업원 표를 보라). 정부의 직접 통제는 주로 기간 산업들에서 이뤄졌는데, 이 산업은 자본의 갱신과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이윤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국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윤율의 동등화 경향이 무너지는, 역사적 위기의 지표이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국유화를 향하는 경향들이 처음에 더욱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국가가 통제하는 UCS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그리고 국민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형태의 국가 주도 경제화의 심화, 그리고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당장의 선박제조 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 영국은 이러한 방식의 보편적 발전을 이끌었다.

 

               공공 영역 종업원의 숫자 – 노동력 대비 비율(%)

국가

총 일반

정부 부문

공기업

총 공공 영역

영국

11.9

10.1

22.0

캐나다

9.9

2.0

12.0

미국

16.7

0.04

16.7

베네수엘라

12.4

1.2

13.6

칠레

10.1

N.A.

10.2

아르헨티나

11.5

3.5

14.9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인 인플레이션

 

경제 부문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를 동반하는 국가 지출의 많은 부분은 사실 비(非)생산적 부문이다 – 그것은, 자본 축적을 심화시키지 않는 지출이라는 것이다. 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전체 제3의 영역(사회적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 지출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도, 비생산적 지출의 증가는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전체 경제 수준에서 보았을 때 총가격은 총가치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총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비용이 잉여가치의 ‘못’(pool)에 있는 배수관을 상징하고, 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임은 명확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연관된 가치 생산의 양적 증가 없는 화폐 공급 확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 가격의 상승은, 대량의 통화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상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화폐 공급의 확장으로 인한 자신의 실제 가치를 재정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통화의 가치 하락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관된 가치 생산의 증가 없는 화폐 공급 증가의 결과는 부르주아 고전 경제학 이론의 용어로, MV = PT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M은 화폐의 양, V는 순환 속도, P는 가격, T는 산출물이다. 명백히, M의 증가는 그에 동등한 T의 증가 없이는 P(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비생산적 지출은 그렇게 방정식에 삽입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요한 요인은, 새로운 가치(또는 고전 경제학 용어로 ‘산출물’)의 생산 증가보다 빠른 화폐 공급의 확장이다. 따라서, 비생산적 자본이 어떻든 관계없이, 화폐 공급의 확장 없이는 인플레이션도 없다. 그러나, 실업이라는 매우 큰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전후 시기 국가는 화폐 공급의 확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하고, 실질 구매력을 약화하는 간접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직접적인 공격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정부 수입의 중요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가 책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 전체를 공급할 수는 없다. 적자 재정(다시 말해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30년대 초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모든 ‘혼합’ 경제 국가들의 공통 특징이었다.

 

국가가 화폐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 경제가 금속(주화) 교환 기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국가 경제에서의 화폐 공급은 국가 경계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제 금(괘) 또는 은(괘)의 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발행된 지폐는 법적으로 주화로 교환될 수 있었고, 지폐 발행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주화로, 일정 법적 고정 비율로 교환해 줘야 하는 의무에 의해 제한되었다. 따라서 화폐의 공급은 각 국가 내의 은행이 보유한 금은괴 보유량에 의해 제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적대국이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엄청난 재정 비용을 감당하면서 국제 금본위제의 포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1918년에 이르렀을 때, 독일의 지폐 발행 증가는 1914년 수치의 5배였고, 영국은 전 이전 수치의 4.5배, 프랑스는 1914년 합계의 거의 4배였다. 이러한 화폐의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폐기물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이었고, 이는 새로운 자본의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은 독일에서 245%, 영국에서 23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53% 급증했다.14) 여러 국가에서의 금본위제 폐지를 동반한 화폐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는 평가절하된 국가의 상품들의 단기적 경쟁력을 향상했으나,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낮아졌다. 그러한 효과는 오직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데, 경쟁하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그들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1936년쯤에는 이전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 ‘황금 연합’(gold bloc)의 국가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자신의 화폐를 평가절하했다.

 

1930년대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과 꼭 마찬가지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앙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화폐 공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정부 지출의 최대규모 증가는 무기 생산의 대규모 증가 때문이었는데, 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는 국가가 기존의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공공사업의 건설에 개입하도록 했다.

 

                         국가별 총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국가

총 국가 지출

(각 국가 통화 기준. 현재가치 000,000은 생략)

공공 부채

(국가 수입에 대한 비율)

1928 or 1929

1937 or 1938

1929

1937 or 1938

프랑스

44,248

68,971

114

171

이탈리아

20,519

34,100

N.A.

N.A.

영국

782

1,134

174

163

독일

8,187

N.A.

12

25*

벨기에

12,299

13,546

77

85

* 미공개 기명 어음의 양에 대한 정보 원천: 클라우 & 콜(Clough and Cole), “유럽의 경제 역사”(Economic History of Europe), 819쪽

대개 적자 재정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폐기물 생산의 큰 증가는 오직 인플레이션을 확대하고 공공 부채를 증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고, 이는 위의 표로 증명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은 다시 국채나 재무부 단기 채권을 담보로 한 은행으로부터의 중앙 정부 대출로 충당되었고, 결국 화폐 공급을 확대했다. 아래의 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폐 순환의 증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전쟁 자금을 위한 화폐 공급의 엄청난 증가는 가격을 고정하는 수단들이 무용해지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과 그 직후, 모든 적대국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도입된 정책들은 다시 한번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폐 순환의 증가

                     (1939년 7월 ~ 1944년 12월)

국가

시기

증가 비율(%)

독일

1944년 12월

435

벨기에

1944년 8월

339

프랑스

1944년 12월

369

이탈리아

1944년 12월

1,034

미국

1944년 12월

259

영국

1944년 12월

160

캐나다

1944년 12월

318

 

출처: 클라우 & 콜 “유럽의 경제 역사”, 847쪽

 

서유럽에서의 케인즈주의 조치의 도입은 다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이 강제적으로 도입한 정책들의 다소 의식적인 확장으로 보였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투자를 촉진하는 이윤율을 조작함으로써, 그리고 불황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적자 재정과 공공사업으로 피할 수 있고, 결과적인 국가 부채의 증가는 ‘호황’기에 상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제 일어난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서의 국가 부채의 영속적인 증가였고, 인플레이션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임이 증명되었다. 보기를 들어,

 

“서유럽의 물가는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66% 증가했다. 이것은 매년 5% 증가한 결과인데, 이 비율은 국채 수익(세전)과 거의 같은 정도이다.”15)

 

케인즈주의 이론에 따르면, 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국가 경제의 건전하지 못한 특징보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며, 왜냐하면 이것은 사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하고, 세계 시장에서 수출물의 경쟁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초에 인플레이션의 존재 이유를 기억한다면(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증가보다 화폐 공급의 확대가 빠른 것), 인플레이션은, 만약 화폐 공급의 팽창 비율이 계속 가치 생산의 비율을 계속해서 앞지른다면, ‘점진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가임이 명백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이것은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칭한 “30년간의 영광스러운 세월”이라는 장기 호황의 끝을 가져온 세계적 규모의 “경기 후퇴”의 진행과 함께 197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계속)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8일

 

 

<주>

 

1) 쇠퇴의 개념 구체화 참고

 

 

 

2) 보기를 들어, 미국 경제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photo_2019-01-09_13-27-57.jpg

 

3)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참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4)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 변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팀 우(Tim Wu)의 '거대함의 저주 - 새로운 황금시대의 반독점'을 참조

 

5)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입성한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 찰스 윌슨이다.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막대한 지분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 사이에 이해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인들은 이를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축약했다. 결국, 윌슨은 자신의 주식을 팔아 이를 확인받았다.

 

6)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쟁 기억 1권, 147쪽

 

7) 폴 매틱(Mattick), 맑스와 케인즈, 115-6쪽

 

8) E. 홉스봄(Hobsbawm), 산업과 제국, 242쪽

 

9) D. 차일즈(Childs), 1918년 이후 독일, 59쪽

 

10) E. 탄넨바움(Tannenbaum), 이탈리아의 파시즘, 112쪽

 

11)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유럽 경제사, 764쪽

 

12) ‘제국주의 본국의 분석에 관하여: 서독의 사례’,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 회보, 1974년 봄, 6쪽. 동유럽과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유용한 설명이다.

 

13) 위의 책, 19쪽

 

14)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op.cit. 734쪽에서 발췌한 수치이다.

 

15) 매틱 op.cit. 147쪽에서 인용. J. O. 코포크(Coppock), 유럽의 필요와 자원에서 인용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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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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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가 지난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많은 활동가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2006년 한국에서 개최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여했고, 코뮤니스트좌파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공개강연회(자본주의, 좌익공산주의와 계급투쟁)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의 한국 영사관 앞에서 “한국 노동투사 (사노련) 탄압 중단과 국가보안법 철폐”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국제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2012년 이후에는 한국의 코뮤니스트좌파와 의미 있는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그의 관심사와 소통 범위는 너무 넓어서 이른바 ‘자본의 좌파’나 맑스주의에서 이탈한 이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우리는 그의 활동과 저술을 계속 주시하고 참고해 왔다.

 

우리는 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국제주의자 전망」의 추모글과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작성한 글을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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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로렌 골드너 동지가 4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투쟁가의 상실이며 그의 죽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렌의 정치 인생은 60년대 버클리 대학 재학 중 연좌 농성과 반전 폭동으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은 급진주의에 빠져 마오주의, 스탈린주의, 신좌파에 대한 비판을 찾아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 한동안 그는 독립 사회주의자 클럽에 가입했는데, 이 클럽은 나중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IS)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로렌은 버클리와 ISC를 떠나 초좌파의 전통에 매료되어 정기적으로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그는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Socialisme o Barbarie),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international), 「불변성」(Invariance) , 장 바로(Jean Barrot), 「프롤레타리아」(Le Prolétaire) 및 망명 중인 이탈리아 좌파의 다른 요소들과 친숙해졌다. 로렌의 정치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고, 그가 받아들여야 할 국제주의적 지향과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한 앙리 시몽(Henri Simon)과 만남이었다.

 

1970년대에 로렌은 뉴욕에 정착했다. 뉴욕에서 그는 아르바이트하며 좌파 서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맑스를 읽으며, 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선언하며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 중요한 저서인 「미국 노동계급의 재구성」을 출간했다.

 

80년대에 로렌은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하버드에서 사서로 일하게 된다. 그는 코뮤니스트좌파에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며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로렌은 많은 정치 서클에서 활동했지만, 어떤 조직과도 연계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시류에 반하는 글쓰기"를 선호했다. 그는 종파를 초월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나중에 온라인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했다. 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수년간 운영한 '멜트다운(Meltdown)' 목록과 같은 여러 온라인 토론 목록을 만들었다.

 

로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주기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90년대에는 아시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장 투쟁을 따라 인도, 중국, 일본, 한국을 여행하며 경제 위기와 의제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았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노동계급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집필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렌은 반란자 노트(Insurgent Notes) 창립에 참여했고, 노동계급 운동을 추적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며 맑스 읽기 그룹을 이끌고 중국어를 배웠다. 2017년 로렌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로렌은 많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 뛰어난 언어학자였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성과 겸손함을 겸비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누구에게나 항상 질문이 많았다.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헌신으로 그는 전투적으로 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터키로 여행했고,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서 살았으며, 스페인 남부에서 로마 공동체와 함께 살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보르디가를 영어권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로렌은 가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친구이자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며,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계혁명,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 오만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열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국제주의자 전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가 그리울 것이다.

 

국제주의자 전망(IP)

2024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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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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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양쪽의 끔찍한 이미지는 시청자가 입장을 정하게 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전쟁을 하는 양쪽 진영의 전쟁 선전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ㆍ축제 참석자, 가자지구 로켓포의 희생자, 납치된 사람들이 키부침(kibbutzim)에서 학살당한 사진.

ㆍ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병원, 구급차, 학교, 주택가에 있는 희생자 사진

 

이러한 사진을 보고서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은 공격자나 방어자에 의한 역습으로 대체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반격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 부여는 가족 및 부족 관계로 조직된 농경 사회에서 행해졌던 복수의 도덕성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익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명분으로 이러한 복수의 도덕성에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현재 전쟁에서 양쪽 진영이 모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양쪽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팔레스타인이 침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반복해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약 2,000년 동안 '홀로코스트'. 무법자로 살아왔다." 전쟁의 명분은 민족주의의 독설로 쓰인 한 민족의 역사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 '식민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보다 더 나쁘다고 얘기하는 '집단 학살' 이야기도 등장한다. 학살의 규모를 측정하여 이후의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며 슬픔은 저마다 고유하다. 파편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폭격으로 온 가족이 사망한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두 경우 모두 전쟁 선전으로 복수심에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국민’과 ‘조국’을 내세워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수에 의존하는, 자신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실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도덕의 영역, 즉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민족주의 세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 형태에 기반을 둔 도덕의 영역에 속해 있다. 우리는 100년 넘게 전 지구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진보 없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 관계를 강요해 온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 반대로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주의 블록으로 뭉쳐 직간접적으로(대리인을 통해) 서로 싸우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민족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더욱 압박하고 억압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으로 계급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단이다. 노동계급의 도덕성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다. 현재 중동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석에 대한 글은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참조하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0/26/the-working-class-and-the-war-israel-palestine/)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함정은 본질적으로 양측의 민족주의 복수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 지속할수록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데, 이는 시민의 자유와도 비슷하다.

 

아랍어권 또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때로는 몇 세대 전에) 차별을 통해 민족 정서를 갖게 된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덧붙이자면, 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을 시오니스트가 되게 한 바로 그 기제이다. 그 결과 여러 유럽연합 국가와 미국, 캐나다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일부의 사람들이 침략자로 낙인찍힌 승리한 당사자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부와 관계없이 패배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주요 피해자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뉴욕 중앙역 복도에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된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독특한 구호를 내걸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많은 시위대가 체포되었고, 이는 미국 시민 자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이어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농성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는데, 현지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주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전국적인 기후에 대한 시위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 유럽연합, 미국, 카타르? 등의 국가가 어떻게든 폭력을 멈출 것이라는 희망뿐이다. '평화'는 여전히 너무 먼 곳에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적 휴전', '전투 휴전', '정전' 등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를 향한 전쟁의 단계에 불과한 일련의 계급 질서에 불과하다. 정부 지도자들과 의회 정당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위선적인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공교롭게도 미국이 제국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하나 또는 다른 '단계적 완화'와 '중재'를 찬성한다고 말한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미국과 네타냐후 진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EU 내 충성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TV 대담 테이블의 모든 가짜 토론과 ‘소셜’미디어의 모든 선동은 대중에게 두 전쟁 정당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망치질한다. 이는 미래의 전쟁, 나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의도된 행동도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항만노조의 전쟁 물자 적재 거부는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중인 이스라엘 측을 겨냥한 행동이다. 우크라이나 탈영병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탈영병 등도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기 수송 방해와 탈영병에 대한 지원은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 모두를 대상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항만노조의 활동은 종종 후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동'에 반영되는 '의식'의 의미는 '식민지배자' 이스라엘과 '제국주의'(미국)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이란, 중국, 러시아)에 대한 지지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반전 선전과 행동은 모든 교전 국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초강대국의 제국주의 목표를 폭로하는 데 명백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는 전선 양쪽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향해 연대해야 하며, 세계 자본의 모든 분파의 공격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발전의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국제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이 친팔레스타인과 친이스라엘로 나뉘는 잘못된 분열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혁명적 소수가 주장하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대리인) 전쟁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적 지배, 더 많은 착취를 강요하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전쟁의 한쪽을 지지하는 위의 '전쟁 반대 투쟁'은 전쟁 양측이 모두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봉사하고 있으며, 둘 다 반(反)프롤레타리아적 이며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응은 자본의 모든 분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은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계급 관계를 바탕으로 노동계급 투쟁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와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계급투쟁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 현실에 기초해 보면 다양한 부르주아적 '해결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장 '급진적' 해결책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는 모든 유대인을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두 국가' 해법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해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상호 증오뿐만 아니라 억압과 착취 세력을 보존하는 각 국가의 분할 및 정복 정책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계속 지배하는 한, 지금의 전쟁에 이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주요 쟁점은 계급투쟁이다. 편의상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모든 국가와 전선 양쪽에서 자본과 국가가 의료 및 기타 서비스를 삭감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면서 착취를 강화하는 등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는 가자지구, 헤즈볼라, 이란, 중국과 러시아에서 장악한 지역,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주변 서방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에 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는 기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그럴 수 없다'이다. 노동자들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패배로 이어질지라도, 즉 혁명적 패전주의로 이어질지라도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포기하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지하 공장과 이스라엘의 지상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채 상호 폭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

 

ㆍ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여성, 이스라엘의 예비군, 뉴욕의 유대인(센트럴역 농성)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진압하고, 모든 생산 방해 행위를 처벌하며, 탈영병을 군대로 압송해야 한다.

ㆍ그리고 이란의 철강 노동자들은 '그들' 정권이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1)

ㆍ그리고 전쟁 경제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는 서방 무기 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레도 코르보(FC)

2023년 11월 17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기사를 기반으로 함)

 

<주>

1)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이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야톨라 정권과 러시아는 중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블록 일부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하마스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레바논(헤즈볼라),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란의 좌파 부르주아의 지하 저항 단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정권과 같은...중동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인민'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항상 미국 편에 서는 우파 부르주아 계열의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아야톨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르주아들이 정권 전복의 전주곡으로 여겼던 차도르 시위(중산층이 주도) 당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중산층 시위의 구호를 따르지 않자 이기적이고 비겁하다거나 ‘경제주의자’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이제 이란의 노동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정권이나 우파 또는 좌파 부르주아 저항 세력과 달리, 노동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진행될 수도 있는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전쟁에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없다. 노동자들은 계급 이익을 옹호하고 이란의 모든 부르주아 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란 국가에 대한 공세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1/17/traps-in-understanding-the-war-in-the-middle-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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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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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 중 하나가 무방비 상태의 밀폐된 도시 지역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다.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요구와 분노가 확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좌파는 전쟁을 멈추기보다 하마스 편에 서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이 대의를 위해 행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기를 원한다. 과연 그럴까?

 

하마스 옹호자들은 하마스 군대는 식민지 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토착 자유 투사이며, 식민지 전쟁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분쟁은 필연적으로 양측 모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잔인한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투쟁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 투사'들의 몫이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백인이고 식민지를 보유했던 국가에 살고 있다면 더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 국가의 과거 또는 현재 행동에 대한 수치심은 ‘반(反)식민지’ 투쟁의 전술과 목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저항 세력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른 쪽의 옹호자인 시온주의자들도 똑같은 논리를 사용한다. 과거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나크바(Naqba)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잔인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가하는 잔혹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분 관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나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나는 1976년 좌파 친구들과 함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Pol Pot’s Khmer Rouge)를 비판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유럽에 사는 백인이기 때문에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던 토론이 생각난다. 그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즈는 자유의 투사였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 지지를 의미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에 대해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물론, 크메르루즈는 대부분 자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하마스도 마찬가지다.

 

국제주의자 전망(IP)이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주장했듯이, 하마스는 10월 7일의 행동이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사망과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마스의 권력욕 때문에 수천 명의 동료가 희생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가?

 

하마스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와 같은 '자유의 투사'가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누구로부터의 해방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주민들이 이슬람주의 하마스 국가에 살면 자유로워질까?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할까?

 

목표와 방법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반대파를 투옥하고 고문하고, 민간인을 살해하고, 어린이와 노인을 인질로 잡는 등 하마스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시민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하마스의 목표를 보여준다. 지난여름 가자지구에서는 많은 사회적 시위가 있었다. 물, 전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하마스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전년도(특히, 2019년 3월)에 비해 시위를 덜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0월 7일의 대규모 하마스 공격은 그 더운 여름에 이어 발생했다.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 행동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팔레스타인 전문가 에밀리오 미나시안(Emilio Minassian)은 팔레스타인의 무력함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이중적 분노의 논리를 낳는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보다 더 나쁘거나 더 잔인하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비슷한 논리로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각자의 방법이 다른 만큼 전술과 전략도 다르다. 이는 비대칭적인 분쟁이다. 따라서 그들의 잔인함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한 쪽은 참수를 하고 다른 한 쪽은 융단폭격을 한다. 둘 다 공포를 심는 것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다. 우리 시대에는 공포가 정치적 무기로 점점 더 보편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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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어디에도 ‘인민’ 이 주인인 나라는 없다. 모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주인에게 속해 있다. 인구 대다수를 굶주림과 권력의 부재에서 해방시킨 민족 '해방' 투쟁의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투쟁은 자본주의 주체 사이의 투쟁이었으며 좌파는 항상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

 

가자지구 응징을 집단으로 반대하는 것이 하마스 지지라고 믿는 좌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북베트남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지지라고 믿었다. 그 전쟁에서 200만 명이 사망했다. 베트남은 ‘승리’했다. 이제 베트남은 자신을 ‘해방’ 시킨 국가의 후발 상업 및 군사 파트너가 된 경찰국가가 되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이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에서 중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저귀를 차고 일한다. 이제 베트남 사람들은 하노이에서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펩시를 마실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긴 하다.

 

민족 '해방'의 목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멀리 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체제가 더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민지 멍에에서 해방된 대부분 국가에서 대다수 사람이 매우 불행하게 사는 것은 민족 ‘해방’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방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투쟁이 사실상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르주아 투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특히 현시대에 민족투쟁은 걸림돌이 된다. 인종 차별이 내재한 식민지 체제가 철폐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종식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한계를 봐야 한다. 이 나라는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실업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 파업 참가자들을 기관총으로 쓰러뜨리고,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터너와 베이컨

 

하마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거론하는 또 다른 예는 터너(Turner)봉기다. 냇 터너(Nat Turner)는 1831년 버지니아에서 유혈 봉기를 주도한 노예였다. 그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백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가족 전체가 학살당했다. 이 학살은 10월 7일 하마스 학살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 압제자에게 대항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렇게 되면 터너와 하마스는 자신의 의지도, 주체성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벽이 테니스공을 반사하듯 받은 폭력을 반사하는 자동화 장치에 불과하다. 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인종이나 민족 전쟁으로 전개되지 않는 억압에 맞선 봉기의 사례도 있다. 미국의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76~1677년에 일어난 베이컨 봉기다. 이 영화에서 가난한 백인과 흑인 노예들은 버지니아의 식민 정부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들은 당시 수도였던 제임스타운을 점령했다. 영국에서 원정군이 도착한 후에야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흑인 노예와 백인 프롤레타리아는 이해관계가 같았다. 도덕적 측면을 제쳐두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부분으로 베이컨 봉기를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베이컨과 함께 싸운 노예들은 터너를 따르는 노예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투쟁 방법, 즉 피부색이나 종교보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계급에 기반을 둔 동맹을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식민지 권력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베이컨의 봉기는 식민지 권력에 공황상태를 초래했다. 힘없는 백인과 흑인이 다시 힘을 합쳐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제의 인종적 특성을 강화하고 백인과 흑인 간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인종 분리주의(apartheid) 제도인 버지니아 노예법이 도입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동계급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었고, 오늘날 미국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도 이러한 인종을 넘어서는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지원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터너처럼 최대한 많은 유대인을 살해해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 베이컨 봉기 이후 권력자들이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던 것처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권력을 장악한 시오니스트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프롤레타리아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반(反)식민지 전쟁인가?

 

이스라엘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 대부분이 쫓겨난 땅에 대부분 유럽의 백인들이 정착하면서 탄생한 국가이다. 각기 다른 해의 지도를 나란히 놓고 살펴보면 두 나라의 성장과 ‘원주민’의 영토가 축소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주민 추방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최근의 강경 우파 네타냐후 정부 하의 서안 지구에서 가속화되었으며, 현재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정착민들과 함께 광신적인 군대처럼 과도하게 추진되고 있다. 미국이 인디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 국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호구역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는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이미 영토를 확보한 국가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그들을 분리해서 국가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구역으로 밀어 넣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은 비슷할 수 있지만, 식민지 전쟁은 아니다. 하지만, 미나시안(Minassian)이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유럽 식민주의와 이데올로기적 유사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인종적 기준에 따라 노동자를 '동물화'하여 문명 세계와 문명 이전 세계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유럽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이 논리에 따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즉 이 지역에서 인간 집단을 구분하는 위계를 상기시키기 위해 다른 정치적 목적 없이 폭탄에 의해 매몰되고 있다. 개가 물면 무리를 향해 총을 쏘게 된다." 그는 "문명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유동적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이스라엘-유대인 시민권이 있었고 스스로 활동하고 있다. 아랍계 유대인(미즈라히)이나 에티오피아계(팔라샤)는 오랫동안 울타리의 반대편에 있었으며 다른 원주민을 달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원주민을 보조하는 군대였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은 토착 사회 상류층 관료들이 이끄는 토착민과 국가를 통제하고 국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미나시안은 두 나라 사이의 투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분쟁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도시들은 빈곤한 변두리 지역으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화폐, 이스라엘 제품, 이스라엘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전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서안지구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이스라엘과 식민지에서 일한다. 그들은 종종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미나시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서안지구의 한 난민 캠프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저녁 내내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수도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인종분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건설 발주자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 점령지에서 노동자 모집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감독관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세파르드(Sephardic) 유대인 등 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주 프롤레타리아들도 있다. 태국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미등록 이민자로서 실제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 그룹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각 그룹은 생산 관계에서 고유한 지위와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이스라엘은 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한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고 고도로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1983년 주식 시장 폭락, 1984년 445%의 인플레이션, 기록적인 국제수지 적자 등 급격한 성장세가 주춤했었다. 그 후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 산업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전보다 훨씬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실업률이 치솟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첨단기술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다른 선두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용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나시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제를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가두어 두고 현지 하청업체에 관리권을 넘기는 분리 정책이었다.

 

"이 거대한 울타리, 민족-종교적으로 유용한 프롤레타리아와 잉여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이 작업은 평화 과정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실제로는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외부화되는 과정이었다"라고 미나시안은 말한다. 따라서 식민지 분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토착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의 중심지 특유의 비율로 잉여 프롤레타리아 인구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스라엘에서 노동 계약을 맺은 모든 노동자 외에 팔레스타인이 관할하는 폐쇄된 대규모 교외 지역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거의 5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텔아비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갇혀 매일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가자지구는 서안지구의 도시나 난민 캠프보다 이스라엘 경제의 쓰레기통과도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의 청년 실업률은 70%를 넘어섰다(현재 침공 전). 이러한 남아도는 노동자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돈은 하부 조직인 하마스와 이른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분배되며, 이들은 주로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다른 준군사조직을 제압하는 등 다른 국가 기능도 수행한다. 하부조직들은 환멸을 느낀 팔레스타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실추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항하여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우리는 하마스의 전략에 대한 해석을 찾아야 한다. 하마스는 스스로 "불명예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이것은 해방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역 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내부 역학 관계는 이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미국과 그 도전자들 간의 지정학적 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대부분의 유럽 식민지 체제가 종식되면서 탈식민지화의 물결과 함께 이루어졌다. 둘 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 권력이 이동하면서 발생한 결과이다. 강력한 무기를 갖춘 미국 군대를 보유한 군사화된 백인 식민지는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석유 자원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미국에 이스라엘의 중요성도 커졌다.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틀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는 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사이 분쟁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인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항하는 강력한 친미 동맹을 형성하려는 미국의 정책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란은 미국이 IDF를 지원하듯이 하마스(보다 온건한 정치세력은 카타르가 자금을 지원함)의 군부를 지원하고 있다. 전쟁에 사용된 돈과 무기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조달되었다. 사상자만 지역 사람들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의 부재와 그 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한 바 있다. 구조적 위기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군비 지출과 군사 분쟁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우크라이나, 아프리카, 카라바그, 그리고 현재 가자에서 얼어붙은 전선이 녹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분쟁이 아니라 기존 분쟁이 갑자기 고조되는 상황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더 많은 화약고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 중 쓸모없는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가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서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부분에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중심지역 축적 블록의 일부인 민주적이고 문명화된 국가가 전면전에 상응하는 군사적 수단으로 남아도는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는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죽음은 "다가올 자본주의 위기의 끔찍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전쟁의 역할이 커지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군인과 '자유의 투사'를 존경하고, 대량 학살에 박수치거나 눈감고, 조국을 위한 죽음과 파괴를 정상으로 여기며, 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패자가 되는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법을 배우는 시대이다.

 

해방은 전쟁과 공격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부색이나 신앙과 관계없이 함께하는 노동자의 공동 이익에 대한 연대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실현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진정한 해방을 방해한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 민족-종교적 또는 인종적 이유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팔레스타인은 강에서 바다까지 해방될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은 전쟁을 멈추라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멈추는 것, 지금 가장 먼저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당장 휴전하라! 이제 인질들을 석방하라! 이제 가자 지구 봉쇄를 해제하라! 서안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당장 멈추어라! 반(反)유대주의도, 이슬람 혐오도 반대한다! 고통도, 유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반(反)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연대를 구축하자!

 

샌더(Sanderr)

2023년 11월 15일

국제주의자 전망(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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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warmongers-left-and-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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