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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9
    책과 영화에 관한 간단 메모(2)
    hongsili
  2. 2009/12/14
    드디어 [알제리 전투](2)
    hongsili
  3. 2009/11/29
    [권력의 병리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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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11/01
    이면과 맥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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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10/25
    [꿈꾸는 책들의 도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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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10/05
    가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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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9/09/21
    사조삼부곡(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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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9/09/06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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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9/02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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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9/02
    달라도 너무 다른 (!) SF 두 권
    hongsili

전술과 실용에 대한 질문 [경계도시2]

 

주변의 너나할 것 없는 강추가 있었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불현듯 나서 보게 되었다.

 

홍현숙 감독의 다큐 [경계도시2]

 

 

작품을 보면, 나-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송교수의 부인만이 예외)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가 위협당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또다른 이들은 민주화 운동이 위기에 처할까봐 걱정한다. 생뚱맞게 박홍 총장 같은 이는 송두율 교수을 걱정해주며 그가  사도 바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축원하고, 심지어 기자라는 작자들마저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잘 돌파할 수 있을지 검찰의 '조언'을 김형태 변호사에게 일러주기마저 한다. 

 

또한 송교수의 잠재적 아군이었던 이들은 '전술'을 이야기했다.

이건 그저 전술일 뿐이다 (전략이 아니라) - 그저 사죄성명에 준법서약서 한장....,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걸 문제 삼으니 어쩌냐, 일단 비는 피해야지....

 

이러한 전술적 접근은 좋게 표현하면 유연성이고,  ('~주의'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리하자면) '실용주의', 혹은 약간 폄훼해서 '정치공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것아라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전근대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집단적 대의명분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양심이란 편의에 따라 잠깐 유보할 수 있는 생각의 한 단편일 뿐.... 

(송교수가 준수선언을 강요당했던 그 잘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이 좌와 우에 의해 그리도 손쉽게 재단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 놀랐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에서 드문 광경도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양심과 사상을 개떡같이 취급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멀리 국가보안법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일단' 반성문 쓰기, 종교 강요 같은 예는 수백가지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의 특징이자 위험성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억압을 가하는 측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조차도 내적 괴로움 없이 실용주의적인 혹은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변의 신심어린 조언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러한 선택을 충고한다. 그것도 진심어린 애정으로부터.....

 

파시스트 독일에서, 히틀러-나치스에 경례를 붙이고 싶지 않았던 한 저명 과학자는 집밖을 나설 때면 항상 양손에 무언가를 들었다고 한다.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파시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손짓만 따라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열렬하게 파시즘을 미워했어도 괜찮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 과학자는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되었기에, 수 년 동안을 외출 때마다 짐꺼리를 만들어야 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에 보면, 전향서를 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깟 전향서, 형식적으로 쓰고 마음 속으로만 전향 안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차마 할 수 없어서 수십년을 영어의 몸으로 지내버렸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들에 나또한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했었는지.....  나의 양심 혹은 다른 이의 정체성을 얼마나 손쉽게 '그 따위'로 만들었는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는

국가보안법 따위를 떠받드는 야만적 우파에 대한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뱀발

영화에 현재 건강보험공단 정형근 이사장이 몇 번 등장한다.

역시 그곳이 더 잘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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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에 관한 간단 메모

#1.

 

지붕뚫고 하이킥 마지막회라 하여, 일찌감치 귀가하여 기다린 결과...

약간의 패닉, 그리고 멍때림..?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그러하듯, 아픔 속에서 성장했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토록 부여잡고 싶었던 순간을 시간을 멈춰 잡아둘 수 있었으니

딱히 비극적 결말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으나

빵꾸똥구 해리의 그 천진한 울음만은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더랬다.....

 

시트콤을 가장한 이 정체불명 드라마의 장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2. 영화들에 대한 간단한 메모

 

* 의형제

 - 영화 드라마 통틀어 강동원이 출연한 작품 첨 보았음.

 - 너무 잘 생겨서 깜딱 놀랐음. 목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작업복을 입어도 그는 모델.... ㅡ.ㅡ

 - 이 이야기를 주먹도끼한테 했다가, 4천만이 아는 진실을 이제서야 알았냐며 욕만 진탕 먹음

 - 송강호는 뭐 이제 입신의 경지....

 -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에 안도감...왜 ??

 

*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면

 - 지난 설 연휴에 조카들이랑 볼게 없어서 그냥 별 기대없이 갔다가 쓰러지면서 본 영화

 - 은근 촌철살인의 풍자와 기괴한(!!!) 상상력은 딱 우리들 취향

 -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목없는 젤리곰의 공격을 추억하며, 꿈틀이를 사서 나눠먹음 ㅋㅋ

 

* 밀크

 - 숀펜의 '압도'에 그저 할 말 잃음

 - 이런 영화가 그리고 있는 미국사회의 모습을 보노라면, 또라이라고 욕하기도 어려움.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구... ㅡ.ㅡ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팀버튼 감독님!!!  못 생긴 여자는 여왕도 못해요?

 - 손모가지 치켜들고 진상 떠는 백색 여왕이 더 악당 같아요!!!

 - 왜 이렇게 평범해진거예요? 실망이예요!!!!!!!!

 

 

#3. 책....

 

시간이 없어서 우선 제목만 적어두고 to be continued....

 

 * 삼성을 생각한다

 * 청부과학

 *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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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알제리 전투]

소문은 무성했으나 볼 기회는 없었던 영화 [알제리 전투] (1966년 작)를 보았다.

개봉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명불허전이라....

칠레전투가 완전 다큐라면, 이 영화는 다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큐가 전하는 것 이상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었다. 어쩜 다큐가 아니기 때문에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연출'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이라면 으례 그렇듯,

이 영화는 결코 계몽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긴장과 갈등, 그리고 관객들의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상황들이 툭툭, 때로는 미묘하게 제시된다. 

 

#.

테러리즘을 다루는 태도도 그랬다. 가시적인 테러와 좀처럼 가시적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실질적 효과는 더 엄청난 구조적 폭력의 문제 중 무엇에 비판의 무게를 두어야 할까? 후자의 극복을 위해 전자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예전(?) 같으면, 일고의 여지도 없이 후자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며 전자를 (상대적으로) 옹호했었을 게다. 그런데, 이제는 도저히 못 그러겠다. 입장은 지지하지만, 내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소리다. 대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이제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예전에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ㅡ.ㅡ  하지만 대의명분이랍시고 후배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던 몇몇 일들을 지금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하다.....) 조지오웰처럼, 결국 어느 순간에는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영화에서 진정한 모범군인으로 등장하는 마띠유 대령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대사는 IMDB 에서 퍼옴)

"We aren't madmen or sadists, gentlemen. Those who call us Fascists today, forget the contribution that many of us made to the Resistance. Those who call us Nazis, don't know that among us there are survivors of Dachau and Buchenwald. We are soldiers and our only duty is to win."

"Should we remain in Algeria? If you answer "yes," then you must accept all the necessary consequences.:

 

알제리의 식민모국은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범을 세웠고, 나치스에 그 어느 나라보다 격렬하게 저항했고, 현재에도 막장 미국에 비하면 나름 똘레랑스를 갖추고 있다고 인정받는 그런 나라...

하지만 인도차이나, 알제리까지, 무려 60년대까지도 식민지를 유지했던 대표적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을 나는 종종 잊는다. 

알제리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엄청난 차별과 억압을 자행했던 130년의 역사는, 프랑스의 소수 제국주의자나 꼴통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령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슬픈 현실인 것이다. 내부로부터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혹은 묵인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국주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건 자본의 폭력적 속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제 시대에 부역하던 이들은 정말로 해방이 올 줄을 꿈에도 몰랐단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하면서 의아해했는데, 30년 이상 식민통치가 지속된다면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서 불과 1년 사이에 사람들이 속내를 드러내거나 혹은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니, 그 때에는 어땠겠구나 하는 짐작도 새록새록....

120년이라는 식민통치를 겪으면서도 소진되지 않고 남아있는 독립의 열망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으로 해석해야 할까?

 

영화에 보면, FLN 지도부가 다 소탕(?)되고 난 2년 후, 다시금 들불처럼 민중봉기가 끓어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들 국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국기라기보다는 넝마에 가까운 천쪼가리들.... 걸치고 있는 옷들도 그닥.... 그걸 보고 있자니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조선의 독립운동은 얼마나 더 추레하고 볼품없었을 것인가 저절로 연상이 되었더랬다.

 

#.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을 읽고 복잡다단한 생각과 의문들이 들었었는데 정리를 못하고 넘어간 적이 있다. 차분하게 앉아 좀 정리를 해봐야겠다. 그가 책을 썼을 때 불과 서른 여섯.... 결국 독립은 보지 못했다.....

 

 

#.

사족이라면, 엔리오 모리꼬네가 영화음악을 맡았다는데, 정말 딱! 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FLN 지도부로 등장하는 배우는 실제로 주도적 활동가였고, 나중에 정부 각료가 되었다고....ㅡ.ㅡ

 

참, 주인공인 알리가 교도소에서 혁명운동에 눈을 뜨고 출소하여 첫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글을 몰라.... ㅜ.ㅜ 그래서 지령을 전달하러 온 꼬마가 지령을 읽어준다. 나 원... 글도 모르고 어떻게 혁명운동을 한다는겨... 순간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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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병리학]

Paul Farmer < Pathologies of power - health, human right, and the new war on the poor> California University Press 2005 (김주연, 리병도 옮김. [권력의 병리학] 후마니타스 2009)

 

 

 

올해 번역서가 출간되기는 했지만, 미국에 머물던 당시 사놓았던 책이 있어서 그걸 읽었다.

한글판도 있는데 굳이 영문판 읽는다고, 잘난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 비싼 돈 주고 산 책을 냅두고 또 새책을 사란 말이냐... ㅡ.ㅡ

 

약간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외면하거나 혹은 냉소해버릴 수 없는 엄청난 경험과 슬픈 진실,  그리고 저자의 감성적/이성적 분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천상 임상의사인 그의 직접 서비스 제공 (이걸 pragmatic solidarity 라고 칭했다)  고집 원칙이 가끔 아쉬움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건 사실 당연한거다. 앞에서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원칙이나 법개정이니, 근본적 대책이 어떻고 하는 건 한가하게 비춰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이 함께 이루어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의 강점은,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구호/원조활동이 그리는  '따뜻한 마음'과 '불쌍한 사람들' 이면의 구조적 폭력 (structural violence)과 권력의 병리학 (pathologies of power)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른손으로는 자선 활동을, 왼손으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은 매섭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 간 한비야 씨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참여를 통해 국제 구호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  비록 시간과 공간,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Haiti와 Chiapas 의 가난한 이들, 러시아 구금 시설의 청년 수감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모두 같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조금 아쉬운 점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자체의 착취적 성격에 대해서는 그닥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국제 금융기구의 활동이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어떠한 동력에서 비롯되었는지에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음.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이 그건 아니잖아?)

 

파머는 국제사회 혹은 학계, 인권운동의 통상적 접근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원조가 어떻게 독재정권 (Haiti와 Chiapas 에서)의 권력을 영속화시키고 민중들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인권의 협소한 법률적 해석과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치중한 인권운동이 어떻게 실질적인 사회권 침해로 이어졌는지, 비용효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거부된 결핵 프로그램 때문에 어떻게 러시아 구금시설의 청년들이 약제 내성 결핵으로 죽어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연구자들 혹은 국제사회, 관료들의 이중적 잣대와 위선을 맹 비난하신다 (사실, 미국에 있을 때 이 분 본 적 있는데, 엄청 까칠해보임 ㅜ.ㅜ 훌륭하신데, 같이 일하기는 무서울 것 같음.......내공이나 경험이나....그 무시무시한 포스....) 

특히 '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피억압 민중과 가해자들의 주장, 그 어디 사이엔가 진실이 있는 것처럼 호도해버리는 가장된 당파성, Haiti 의 가난한 민중들이나 Russia 구금 시설의 수감인들이 결핵 내성을 갖게 된 것은 미신에 쉽게 빠져 근대적 의학치료를 거부하거나 생활태도가 불량하여 약을 잘 안 먹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선진국 연구자들의 편견, 비용효과 분석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의 목숨값이 다르게 계산되기 때문에 최선의 치료가 후진국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1차 약제를 계속 퍼붓는 비효율적인(!) 원조활동을 하는 국제기구와 '전문가들'.... 또한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의학윤리' 분야가 의학 신기술의 적용과 개별 진료행위에는 그토록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도 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값싼 약제조차 복용하지 못해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모르쇠하는 것, 축제나 기이한 문화체험에만 초점을 둔 인류학 연구들에 대해서도 막 야단을 치신다... (ㅡ.ㅡ)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인종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에 천착하는 '문화적 상대주의'나 '정체성의 정치학 (identity politics)'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쪽 문화의 고유한 전통이니 우리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거다. 또한 대개 인종, 젠더, 종교/문화 등에 근거한 정체성의 기저에 도도하게 흐르는 사회경제적 힘을 고려하지 않는 '인정 투쟁'은 충분치 않다는 거다.

 

(참, 본문에 보면, 임상 의사들이 개별 환자 보는데만 매몰되어서 보건의료 체계나 사회적 건강, 공중보건의 문제는 역학자들에게 미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그것도 오해다. 대부분의 역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

 

그래서, 결국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적인 방향으로 연구의 의제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But remember that none of the victims of these events or processes are asking us to conduct research").

또한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해방신학에서 이야기하는 'preferential otpion for the poor'의 원칙을 수용하고, 건강권을 인권 문제의 중심에 혹은 유용한 잣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실제로, 건강을 매개로 접근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크고 또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당장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이를 토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기에 유리하다.

그리고, 사회권 보장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연대활동에서 국가나 관료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좋은 뜻이 항상 좋게만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더구나 인권 유린이 일어나는 경우 대부분 국가가 가해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나...........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알리는 것은 배운 자들이 가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지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싶다. 

관찰과 분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참여 없이는 진정한 관찰과 분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과대학이나 보건학 분야의 학생과 연구자들.... 그리고 국제연대 혹은 심지어 '봉사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의 경험과, 그 엄청난 경험을 이렇듯 정제된 언어로 정리해낼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지구촌에 몇 명 없을 듯....

 

* 인용된 Edurardo Galeano 와 Paulo Freiri의 글은 기억해둘만하다.

"   The technocrats claim the privilege of irresponsibility: "We're neutral", they say.  "

"  True generosity consists precisely in fighting to destroy the causes which nourish false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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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과 맥락

살다보면,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에이~ 그까이꺼' 하면서 폄훼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다.

 

마르크스의 적자임을 강조하며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데 공을 들이는 좌파 훈고학계에서 어쩌면 가장 입에 담지 못할 단어는 '사민주의'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훈고학적 지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같은 변방의 서생조차  '그까이꺼 사민주의'는 (반동보다 더 질이 나쁜) 변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으니.... 

 

박근갑의 저서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민주의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09) 을 읽으면서, 과연 이 당시 독일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의 전략/전술이 정말 최선의,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논의를 떠나, 어떠한 고민에서 이런 행보를 걷게 되었는지 (물론 완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역사적 맥락과 내적 동력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사민주의란 근본적 변혁을 가로막는 개량주의', '조합주의, 도대체 왜 저런 비효율적 제도를?' 이 정도의 단순화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이 책은, 1848-1914년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 독일의 복지국가 프로젝트가 태동하고 자리를 잡던 그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복지정치'를 둘러싸고 사민주의 세력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갔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 책 한권을 통해 그 복잡했던 시기를 다 이해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람 이름 외우는 데 천부적 무능력을 타고난 나에게, 역사책은 역시.... ㅡ.ㅡ 비스마르크, 라살, 로만, 베른슈타인, 그리고 엥겔스 (!) 말고는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헷갈려 죽는 줄 알았음.... ㅎㅎ

 

어쨌든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사회보장과 (아직 스스로 정의조차 하지 못하는) '공공적' 서비스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의 문제의식과 딜레마가 오늘날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ㅡ.ㅡ

 

문제의식과 더 공부해봐야 할 것들...

 

* '사회보장'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보장 혹은 서비스의 내용을 보자면 사실 비스마르크가 생각했던 '독일 제국의 복지'와 좌파가 꿈꾸는 복지에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좌파 - 당시 사민주의 초기 운동은 비스마르크의 안과 이어진 수정안들에도 격렬히 반대했었다. 이는 '의미론' 투쟁이라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의 지점이다.

이를테면, 선거전날이 되면 보수우익 정당이나 비교적 급진적인 진보정당이나 사회복지 관련 정책에 그닥 차이가 없어진다. 보수적 온정주의 - 포퓰리즘 - 경제개발의 토대 (인적 투자) -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 사회권 보장 등 목적과 철학적 배경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과연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 가진 본질적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 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

독일은 왜 북구유럽 같이 조세에 기반한 국가건강보장제도를 취하지 않고, 사회보험 방식의, 그것도 비효율적으로 찢어져있는 '조합주의적' 방식을 택한 것일까? 기존 조합들의 소위 '조합주의적' 활동 지향 때문?

하지만, 보험조합이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기에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정치학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된 노동자 자치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공공병원 확충에 대한 고민 속에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모범적인 공공병원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회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년 전 독일 노동자들의 고민에 비추어본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각종 사회보장 제도/프로그램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누가'라는 부분에 상대적으로 소흘한게 아닐까? 한편으로 국가의 계급적 속성을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만이 이를 보장하고 운영할 수있는 유일하고 효율적인 주체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한국의 건강보험 통합논쟁에서도 형평성과 효율에 대한 담론은 활발했지만, 민주주의와 참여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가물가물 기억이... ㅡ.ㅡ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남???)  이름은 비슷한 통합/조합 논쟁이지만 당시 독일에서의 논쟁과는 초점 자체가 다른....

 한국사회에서, 각종 국가제도, 혹은 위원회에 공익위원이나 노동계 대표 몇 명 포함시키느냐를 넘어서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뭔가 새로운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듯 싶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결코 순차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최장집 교수의 이야기는 여기에 닿아있다. (공공복지 논의와는 또 별도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문제까지!)

 

* 상호부조, 연대의 원리와 책임성

노동자 계급 내부의 연대, 노동자 개인들 사이의 상호부조라는 원칙과 참여민주주의/자치행정의 운영방식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를 위해 국가와 자본의 기여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사실, 문제의 발생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특히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은, 기업이 부담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이 우려했던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독립성의 훼손.... 말하자면, 물질적인 실리보다는 '원칙' 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성수동 노동자건강센터의 건립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어차피 공적 기금을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러한 지원을 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고민하는 대상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한 조직이 목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센터는 제도로부터 독립된 자치기구를 지향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지난 3년간 고민의 나름 결론.... 과연 적절한 것이여???

 

* 프레임의 인정? 전술과 전략?

독일의 노동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복지국가 전망과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한 것은 결국 체제 혹은 지배집단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현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급진적 변혁 전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을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물론 역사적 경험을 보자면야 전자를 위해 죽기살기 싸워야 후자라도 얻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사후 평론이고, 막상 해당 시기에 어디까지를 전략적, 전술적 목표로 두고 싸워야 할지 판단하기란 참 쉽지 않다. 무조건 최대치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아서 깎아주며 싸우다간 그나마도 못 얻기 십상이고.....  물론 팔짱끼고 서서 관전평만 한다면야 가급적 급진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뽀대가 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무언가 구체적인 답을, 더구나 작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판단을 하기가 참참참 어렵다... ㅜ.ㅜ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들이 갈팡질팡 했던 것도 참 공감이 되더라니... ㅡ.ㅡ

 

* 사족이지만, 그 시기 독일에서 의회주의와 제도화 전술을 두고 벌어졌던 좌파 진영의 논쟁이 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재현되었던 것은, 생각해보면 참 뜬금없다. 지금은 제목조차 가물가물한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들먹이며, 합법정당과 개량주의 운동을 비판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들을 하고 계실까???

  

* 역시 사족인데,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도 고마운 마음... 나도 이런저런 번역 작업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지식 수입과 중개 노릇은 이제 슬슬 접어야겠다는 반성을 부쩍 하고 있다. 학문적 지평의 확대에서 번역 작업의 소중함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로서,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본인의 학문적 성과물을 성찰하고 정리해내지 못하는 미숙함에 대한 자기반성....

 

 

독일 사민주의 이야기하다, 엉뚱한 길로....

저자가 특강 같은 거 한 번 해주심 참 좋을 거 같은디.. 질문할 것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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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정말 기나긴 2박 3일이었다.

대전-보령-춘천-서울-화성-대전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멍 ~~      +.+

 

빨래 돌아갈 동안 맥주 한 잔 하며, 책상위에 쌓여있는 책들이나 치워볼까 했는데 기력이 딸려서 원....

책들을 옮기던 중 책읽는 부흐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꿈꾸는 책들의 도시] 들녘 2005

 

 

 

어쩜 이렇게 깜찍하고 발랄한 소설이 있는지...

책을 둘러싼 레전드급 스펙타클의 진지 버전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면,

이 책은 아기자기 버전의 한 극단....

 

부모님 병세 때문에 병원에 드나들고 정신이 피폐해진 그 시기에,

잠시나마 현실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책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맛깔나게 그려지지만,

그래도, 책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부흐링들의 귀엽고 기괴한 모습은 단연 최고...

마지막에 이들이 등장하던 장면에서는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다. ㅡ.ㅡ

 

책을 읽으며, 부흐링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나만은 아닐 듯...

 

뫼르스의 다른 책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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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 (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부르디외가 편저한 [세계의 비참]  첫머리에 쓰인 스피노자의 말이다.

 

최근에 읽은 몇 편의 글들은 이 문구를 '자동재생' 시킨다. 

 

  • 최규석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길찾기 2009년 (신판)
  • 최규석 리얼 궁상만화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년
  •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가난한 휴머니즘] 이후 2007

 

       

 

절절하지만 선정적이지 않게,

궁상맞지만 마냥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게, 그리고

"물질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유한" 따위의 목가적 낭만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러한 빈곤과 고통이 '대상자'가 아닌 자신의 사적 경험의 일부일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서늘하게 묘사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최규석은 참 잘 해내는 작가인 것 같다. 

옛날 (?) 생각이 참 많이 났더랬다.......... '가난의 효용' 같은 장은 정말 그랬다.

 

전임 Haiti 대통령이자 신부인 아리스티드의 글은 대상이 분명하다. 선진국, 잘 사는 시민들, 그나마 정신줄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예상 독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편지글 모음은, 글을 모르고, 혹은 편지지를 살 돈이 없거나, 우표를 살 돈이 없는 이웃들 대신해서 그가 '세계시민'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가 그들 사회에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식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한지....

 

그의 논지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면 민주주의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맥락은 이해하지만, 이와 동일한 논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전용되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큰 맥락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기우랄까.... 먹고 사니즘에의 경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져온 폐해를 생각해본다면, 조심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   

 

 
(* 이제 겨우 '비참한 상태'에서 '존엄한 가난'으로 옮겨가는 중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에서, 아마도 존엄한 가난은 decent poverty 혹은 poverty with dignity 중 하나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이 때 decent 의 의미는 존엄하다 보다는 acceptable or adequate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가난하지만 인간의 품위를 지킨다는 뜻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맥락이라기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그나마 견딜만한 가난으로 이행했다는 뜻이기에....) 

 

지난 3주간 한겨레 21 에 임인택 기자가 연재한 '노동 OTL' 시리즈는 고전적이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장'침투'의 기록이다 (그림은 최규석이 그린 표지삽화). 

 

최규석의 삽화 폴라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  (2004) 을 떠올리게 하는 기획이다.

 

   이 땅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서는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기에 경도된 것 같아 다소 안타까웠으나 (사실, 그럼 안 되나? ) 연결기사들과 이어지는 시리즈는 훨씬 풍부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제도권 학계에서 이제 이런 프로젝트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빈 자리를 채워주니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과, 다른 한편의 자괴감이랄까....

 

성수동에서 의사나 전문가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현장 - 특히 극적 효과가 뛰어난 제화 사업장을 방문하고는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J 와 나는 사실 좀 고민이다. 아직도 이렇게 비참한 (?) 작업환경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은 좋은데,

어쩌면 우리가 그 상황을 전유 혹은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좀더 비참한, 좀더 불쌍한,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원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과연 다르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돌아보면,

스스로 가난했기에 누구보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분이 노점상 출신이라 없는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이다.  

여전히, 학문으로서 빈곤과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연민과 연대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야는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통찰력, 그리고 에너지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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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삼부곡

최근 2-3주간, 

임박한 과제들을 미친 듯이 해치우느라 정신줄을 거의 놓은 폐허상태로 지냈다.

쓰나미처럼 압도해오는 그 일들의 물결이란..... ㅡ.ㅡ

 

웬지 이번 주만 어떻게 버텨내면 (!!!) 담주부터 전혀 다른 새 세상이 열릴 것 같은 이 기이한 망상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

 

이 와중에 오며가며, 잠들기 전... [사조삼부곡]의 마지막인 [의천도룡기] 8권을 다 읽었다. 

글씨가 커진 건지, 편집이 달라진 건지, 아님 번역 자체가 바뀐건지, 예전에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고려원 문고판은 각각 6권이었던 것 같은데, 판형이 커졌음에도 각 8권씩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는 없으나, 역시 '흐름'의 맛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의천도룡기] 마지막 부분에서야 밝혀지는 의천검과 도룡도의 비밀, 도화도 (내 고향도 아닌디 이름만 보고도 웬지 향수가 울컥?), 신조협과 소용녀의 딸, 구음진경, 심지어 구음백골조(!)까지 ....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주는 감흥이 꽤나 쏠쏠했다.

 

#.

세 작품의 남 주인공 곽정 - 신조협 (양과) - 장무기 중 가장 선호하는 이를 뽑으라면 단연 신조협!

장무기의 어린 시절, 임박한 죽음을 잊지 않으며 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모습에 감흥했으나, 커가면서 웬지 자뻑....  순박하고 뚝심 있기로야 곽정을 따라올자 없으며, 어쨌든 장무기도 어린 나이에 겸양과 통찰력을 겸비한 진정한 고수가 된 것은 틀림없으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과 함께 정서적 몰입 면에서는 신조협이 단연 최고! (그 다음은 동사 황약사! 이분 매우 쿨하면서 낭만적이심 ㅎㅎ)

 

#.

삼부곡에 또한 수많은 여성 고수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황용 - 소용녀 - 조민/주지약/아리/아소 등...

이 중 최고라면 단연 황용....  진짜 멋진 언니.... 그리고 소용녀도 차갑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 이에 비해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행태는 진정 어이상실.... 아미파의 장문인 (주지약), 몽골 왕국의 소군주 (조민 - 민민테무르), 페르시아 명교 총단의 교주 (아소) 라는 엄청난 지위의 여인들이 장무기에게 보이는 모습은 정말 안습..... 제정신인가 싶더라니....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눈감아주려해도 오히려 이전 두 작품에서 보였던 여성 무인들에 비해서도 완전 퇴행....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 없는, 하지만 사랑에 눈먼 그녀들로  인해 남자들이 어찌나 위험에 처하는지.... ㅡ.ㅡ

 

#.

절대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결코 무공을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닦아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거기다 외공이나 내공 한 가지만 쌓아도 안 되고 두 가지 모두 고르게 익혀야 하며, 기왕이면 명문정파와 사도외문의 스승들을 골고루 모시고 두루두루 배워야 하고, 정상적으로는 절대고수의 내공을 연성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함 ㅎㅎ 우연히 비급을 얻는 것은 빠지면 아쉬운, 정해진 코스랄까?

이를테면 곽정이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야왕 일등대사, 북개 홍칠공 같은 초고수는 물론 전진칠자니, 주백통 같은 당대의 고수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대개 자신의 절기를 한평생 수련했던 대 비해, 이들을 스승삼아 오만가지 무공을 다 배워 복합 응용했기 때문....

이러한 상황은 신조협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에 '신조'의 가르침까지 받았으니 뭐...

장무기도, 무당파의 태극권, 명교의 건곤대나이 심법에, 공동파의 칠상권, 심지어 구양진경까지 익혔으니.....  약관의 나이에 소림사에서 거의 백년을 수련한 도사들보다 실력이 한 수 위인 것은 바로 이런 연원... 따라서,한 우물만 파다가는 절대 업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ㅎㅎ

 

 

#.

아마도 시리즈 비디오물 중에서는 이 셋 중 의천도룡도가 제일 인기 있는 듯 싶다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개인적 취향으로 평가해보자면 1부 > 2부 > 3부의 순서....

그래도, 3부에서 금모사왕 사손이 금강경을 읊조리며 번뇌의 강을 건너는 모습은 나름 감동이었다.

끝이 없는 업보의 인과를 벗어나는 길은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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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 중단편 모음집에 실린 8편은 각기 열 배 분량의 해석과 논쟁이 가능한 텍스트!!! 

 

 

짧은 독후감 혹은 코멘트를 남긴다는 것이 웬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기이한 죄책감을 남기는 이 중단편들에 대해 일단(!) 몇 가지 메모를 우선 남겨둔다.

 

1. 바빌론의 탑

바빌론의 우주관에 충실하면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plausible)'  생활의 이야기.

움베르토 에코 [전날의 섬]과 완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가져와 그에 충실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는 일견 유사.

 

2. 이해

높디높은 정신세계. 예측을 몇 단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니게 된 자들 사이에 벌어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추격담이기도 하고, 인간정신의 고도화에 따른 인식과 인지의 변화에 대한 연상극이기도 함

 

3. 영으로 나누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가 된 느낌이었어..."

세상의 근간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근본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더구나 자신이 추구해왔던 그것의 바탕이 틀렸음을 스스로 확인해버린 수학자의 이야기. 존재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지만, 옆사람은 똑같은 방식으로 감정이입할 수 없음.  인식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관계의 문제로 끝난달까???

 

4. 네 인생의 이야기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법,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섬세한 소묘!!!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미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의 구조는, 어쩌면 공간적 절단면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바빌론의 탑'과 달리 시간적 뫼비우스 띠의 모습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토록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은 오랜만이여!!!

 

5. 일흔 두 글자

너의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된다는게 반드시 시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

짧은 글 안에 무궁무진한 논란거리가 자리해있다.

전성설이라는 당대의 과학관, 우생학과 사회공학,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분리 (어쩌면 이 글에서의 '이름'은 오늘날의 '소프트웨어'쯤?)... 어느 하나 시덥잖게 취급할 수 없는 묵직한 주제들

 

6. 인류과학의 진화

이건 좀 슬프다....메타인류가 거둔 과학적 성취를 그저 번역해서 전달할 뿐인 인류 학술잡지의 모습이, 오늘날의 한국 학계 상황에 겹쳐보이는 것은 나의 오바?

 

7. 지옥은 신의 부재

마지막 문장이 정말 인상적이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인공 닐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ㅎㅎㅎ

 

8.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

와우.... 이토록 깜찍하고 심오한 소설이라니!!!

여러 명의 작중 화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칼리스의 의무 착용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는 백만가지는 될 법하다!!!  차별, 인식, 온정주의, 자율성, 아름다움의 정의 등등등...

 

이 작품들이 그동안 받은 상의 종류를 늘어놓으면 두 줄이 넘는데,

뭐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완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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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hongsili님의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에 관련된 글.

 

그의 책을 꾸준히 내던 이레 출판사에서 신작이 출간되었다.

 

 

친절하게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손글씨 서문으로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이런 것이다.

"... 배나 항구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유조선이나 제지공장, 나아가서 어떤 분야든 노동하는 세계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근거없는 편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의 근원이 되기도 하면서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 대한 세상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경시에 대해 그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달까....

 

언제나 그렇듯이 미묘한 순간, 놓치기 쉬운 의미들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이리저리 생각의 타래들을 엮어가는 그의 글솜씨는 실망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만큼, 아쉬움도 적지 않다.

이 아쉬움의 근원은 어쩌면 이 글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 되는 노동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고,

'노동과 일'이라면 비정규직, 고용불안이라는 단어가 자동연상되는 이 상황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철학적 성찰과 문장의 아름다움은 훨씬 덜하지만현장의 생생함과 애환 (그야말로 슬픔과 기쁨)이 절절이 묻어나는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간다]가 '더 좋은' 책처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사람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일과 노동, 그로부터 일어난 기쁨과 슬픔을 다룬다기보다

한단계 추상화된 인간 노동의 결과물, 혹은 노동의 구조나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고 봐야할 듯...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풍부하고 좀더 깊은 이면을 고민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상황의 구체성과이 결핍되었다는 것은 단점.....  

 

이미 미학적 성취마저 이뤄버린 송전탑, 궤도를 정확하게 찾아들어가는 인공위성, 복잡하기 그지 없는 항공산업과 회계일...  여기에는 기술 자체 (과학), 인간의 이성적 성취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과학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와이와이 인디언이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유사 신화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또 과학기술을 찬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 회로판에는 존중심을 느끼고 빙하에는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러스킨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알랭 드 보통은 막 견학을 마친 과자공장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진지했던)에서 선물로 받은 과자봉지를 뜯으며 생각한다..."이 사회는 우리의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요구와 관계가 없는 산업, 수단의 진지함과 목적의 하찮음 사이의 괴리를 피하기 어려운 산업, 그 결과 컴퓨터 터미널 앞과 창고 안에서 우리를 의미 상실의 위기로 몰아넣기 십상인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전작 [불안]에서처럼, 보통은 직업상담소에서 강조하는 자기효능감과 능력주의에 대해 상당히 괴로워한다.  "... 나는 시먼스의 회사를 나오면서,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여,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일 때문에 피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현실적 처방도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설 때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해결책은 와인이다. 사무실 문명은 커피와 알콜 덕분에 가능한 가파른 이륙과 착륙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예리하다 예리해.... 우리는 매일 가파른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어쩐지...ㅋㅋ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과연 나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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