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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09
    입 속의 검은 잎(3)
    hongsili

기형도에 의한 [빈집]과 기형도를 위한 빈집

나는돌 님 덕분에 시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시 보아도.... 내가 이 시를 접했던 것은 김현의 평론집에서. 물론 김현 사후의 일.. 세상을 떠난 시인과, 그의 죽음을 슬퍼한 평론가의 또다른 죽음 뒤에 그렇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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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기형도의 '빈집'을 위하여

 

그는 사랑을 잃었네
사랑을 잃고 봉분 하나를 그는 얻었다 하네
익명의 소문들이 그의 생애를 지우는 동안
슬픔이 창궐한 전등불 아래서
사람들은 경악의 얼굴로 술을 마셨네
아름다운 기억들이 술잔에 가득 넘쳤네
시린 별빛 아래서 이별을 고하는 동안
어떤 편안한 잠이 그의 곁에 와 누웠네
아무도 그의 사랑 찾아주지 못했네

그가 잃은 사랑 눈 먼 자의 슬픔으로 떠돌 때
사람들은 새끼처럼 꼬여 칼잠을 자고
꿈속 어느 갈피 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네
그가 찍은 삶의 구두점이
동행 없는 모습으로 텅 빈 거리를 헤매고
안개가 그의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네
아무도 그를 잡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그의 사랑이 되어주지 못했네

 

-전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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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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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민지네에 갔더니, **님이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을 올려놓았다.

미국에 오면서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고심했다. 무게를 줄여야 하니까 ^^

전공과 관련없는 책은 다섯 권을 가져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형도 시집.

시인의 여행 산문집도 가져올까 하다가 (생일 선물로 받은 아주 낡은 책), 그냥 시집만 들고 왔다. 밀린 빨래하고, 논문 revision 하나 해서 서울로 날리고.... 잠깐 시집을 펼쳤다.

 

 입 속의 검은 잎

 

                                                             기 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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