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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07
    딱딱한 책들 + 헤이 웨잇(1)
    hongsili
  2. 2009/05/31
    불멸의 언어...
    hongsili
  3. 2009/05/07
    [신자유주의] - 탈취에 의한 축적(2)
    hongsili
  4. 2009/05/05
    책, 책, 책...(7)
    hongsili
  5. 2009/04/13
    영화 이야기(3)
    hongsili
  6. 2009/04/12
    텍스트와 컨텍스트 - 기형도(5)
    hongsili
  7. 2009/03/29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1)
    hongsili
  8. 2009/03/26
    베버와 루소(1)
    hongsili
  9. 2009/03/08
    몇 번의 봄(3)
    hongsili
  10. 2009/03/01
    2월의 책과 영화(4)
    hongsili

5월의 영화들...

괴롭다, 바쁘다 하면서도 그냥저냥 영화들은 봤던 5월... 물론, 놓친 영화들도 있고 여전히 봐야 할 목록에 올려놓은 것들도 있다... #1. J.J. 에이브람스 감독 [스타트렉 더 비기닝] 2009

오랜만에 본 SF 수작!!! 스토리도 참신 발랄에 말이 되고, 특수효과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SF 영화를 볼 때 가장 싫어하는, 특수효과가 줄거리를 말아먹는 경우, SF라는 이름을 팔아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끌고 가는 경우가 아니었음. 최근 각종 프리퀄들이 창궐(?)하고 있어, 나름 우려가 깊었는디, 아주 깔끔하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는 생각.... 아우, 스팍 박사는 어쩜 그리 매력덩어리? ㅎㅎㅎ 그리고 연로하신 그 분은 TV 시리즈에 나왔던 오리지널 그 분... 어쩐지 포스가.... [블레이드 러너] 이후 좀 잘나간다 하는 SF들은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는 거대서사물인 경우가 많았는디, 이 영화는 간만에 아주 훈훈... 무엇보다 기억나는 것은, 주먹도끼가 영화보면서 몰래 '벌칸'족의 손인사를 따라하던 장면....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따라하는 손짓을 보아버렸네 ㅎㅎㅎ #2. 맥지 감독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2009

내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애틋한 그리움에 보아줬건만 정말.... 어이구..... 영화본 시간보다 길게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음... 불쌍한 크리스쳔 베일... 당신도 낚인겨!!! 그나마 3편이 하도 후져서, 그거보다는 나았다는 것을 위로로 삼아야 할 지경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마 이 영화보고 홧병 나서 몸져 누웠을 것으로 짐작됨... 카일 리스로 등장한 얀톤 옐친은, 스타트렉에서 러시아 사투리 쓰는 귀여운 러시아 출신 조종사로 분했던 인물... SF 계의 신성? #3. 도리스 되리 감독 [사랑한 우에 남겨진 것들] 2008

[파니핑크]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소식에 선뜻 보게 된 영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사람과 사람이 맺는 진심어린 다양한 관계의 모습은 어디고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과 서구사회의 '신비로운' 동양 판타지 (특히 일본, 벚꽃으로 표상되는)가 눈에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영화 전체의 미덕을 가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관계맺기에 그토록 서툴렀던 '전형적인' 아자씨가, 사랑이 사라진 후에야 진실한 관계의 힘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그 관계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나를 돌아보고, 또 부모님을, 그 분들의 남은 생을 돌아본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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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책들 + 헤이 웨잇

읽고 아무렇게나 책상에 버려둔 책들 좀 치워볼 생각...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웅진씽크빅 2009

전반적 인상은....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책이었음. 어찌나 "인용"이 많은지, 정작 바우만 본인이 한 말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 ㅜ.ㅜ 왜 이양반을 오늘날의 '현자'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음. 현자?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 하나? 일단 박물학적 지식과 사례들을 쏟아놓는데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더 어렵게 느껴지고, 또 글쓰기 스타일이 나랑 잘 안 맞아 또 읽게 될 것 같지 않음... ㅡ.ㅡ 그래도 몇 가지 정리해보자면.... * '공포'란 '불확실성'이며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진정한 공포. 그래서 압도되어 꼼짝 못하기 마련이라는 지적에 일단 동의. * 보편주의적 이성보다는,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고 비판한 부분에서 고개 한번 끄덕! * 그리고 악의 평범성과 진부함에 대한 지적은 이미 여러 군데서 논의된 바 있어서 특별히 새로울 것 없었고,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는 극적인 표현이 그저 눈에 띔. * "공포의 사회적 배분", 인재와 자연재해의 구분 어려움, 관리불가능한 리스크 등에 대한 개념은 이미 울리히 벡이 주구장창 떠들었던 이야기라 역시 새로울 것 없음. * "자연적인 원천에서 분리된 잉여 실존적 공포를 밀어내기 위한 대체목표를 찾는다. 그리고 세세한 예방책을 내세우며 임시 표적을 상대한다. 가령 간접흡연, 식품에 포함된 지방...." 결국 다룰 수 있는 위험에만 집중하게 되고 본원적 공포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회피하게 된다는 지적에는 물론 동의... * 가장 공감했던 문장이라면 폴라토인비의 글을 인용한 부분 "진실은 빈곤과 탐욕이 정치적 선택의 결과지 경제적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WHO CSDH 보고서에서도 분명히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 "지식인들은 말이 육신이 되도록 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한번도 신뢰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부추겨 자신들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도록 했다. 행동할 수 있는 힘들 가진 누군가, 일단 시작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누군가를 대망했다."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딱... * 또다른 공감의 문장은, 역시 바우만 본인이 아닌 아도르노와 부르디외 할배의 것! "고통, 공포, 억압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사실은 실현할 수 없는 사상을 포기할 수 없게 한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 그래도, 이 유동하는 공포에 맞서기 위한 바우만의 의견...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책 읽는 내내, 다른 이의 연구를 곱씹어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체화시키기 때문에 굳이 참고문헌 인용을 길게 안 한다는 리영희 교수의 글을 떠올랐다. 이건 뭥미...


#2.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 2005

하나의 완성된 책이라기보다, 주요 논문과 책의 챕터 모음. 역자의 소개에 의하면 방대한 폴라니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나 할까... 해미와 같이 읽고나서 했던 이야기는,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다' '사람들이 왜 폴라니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이 분, 이 얌전해보이는 외모에 평생 노동자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지지리 고생하며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고... 정말 놀랍다'... 우선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대에 그의 사상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시절 그토록 독창적이었던 그의 문제의식이 이제는 사회저변에 널리 확대되어 우리같은 무지랭이도 충분히 가질 법한 것이 되었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좋게 해석하자면 문제의식의 발전이고, 운동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자기 이익과 지도력'이라는 문제의식과, 마르크스 자신이 '유럽인'으로서 범했던 오류들에 대한 지적... 하지만, '노동, 토지, 화폐'의 상품화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는, 여전히 신선했다. 경제라는 요소가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는 아니라는, "인간을 움직이는 어떠한 동기도 그 자체로 경제적인 것은 없다'는 지적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근본적 토대'에 너무 집착하느라 노동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울고/웃고/즐기고/사랑하고/분노하고... 이런 복잡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놓쳐버렸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경제결정론'에 그동안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나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붕괴가 위태롭게 하는 두 가지의 자유.... "동료들을 착취할 자유, 공동체에 상응하는 봉사를 하지도 않은 채 턱없이 과다한 이익을 취할 자유, 기술 발명이 공공의 혜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을 자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은밀한 공작으로 공공에게 재난이 될 일을 일으키고 그 재난에서 이윤을 취할 자유는 자유시장과 함께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들이 판을 칠 수 있었던 시장경제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자유를 창출하기도 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단결의 자유, 직업을 선택할 자유 - 우리가 그 자체로 소중이 여기는 이류한 자유의 대부분은, 사악한 자유들을 만들어낸 책임이 있는 그 시장경제의 부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 되면,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 그렇다고 그 두꺼운 [거대한 변형]을 읽을 것 같지는 않음 ㅡ.ㅡ #3.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출판 2007

이 분... 역시 대가... 문장도 어찌 이리 감동적인감... 번역과 해설도 전작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처럼 매우매우 훌륭! 때가 때니만큼, 한국사회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없었음. 정치와 도덕 - "정치란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성직자와 달리 정치인들은 부패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하지만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 (폭력)'이라는 수단을 소유한 정치권력이 가져야 할 소명과 자질은 분명 성직자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나는 이보다 '통찰력'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것 같은디!!!)을 갖춘 자만이 진정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일백퍼센트 공감.... 그리고 이는 비단, 현재 물리적 폭력을 담지한 '집권 정치인'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치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설파한 부분에서는 우리 엠비님을 떠올렸다. 본인의 신념윤리가 절대 옳은데, 그걸 따라주지 않는 이 사탄같은 국민들은 원망하며 날을 지새우는 그 분.... ㅜ.ㅜ 하지만 무릇 정치가라면, 인간이 어리석고 비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도와 신념이 얼마나 고결하고 올바른가가 아니라 '(예견 가능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은 월매나 적절한가! 물론, 이분은 신념윤리마저 아니올시다 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건 그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으로서의 운동은 문제제기와 신념윤리에 투철한 반면, '책임윤리'에는 소흘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싶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이 글이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고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라며 이어간 부분은 슬프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신념정치가'라고 혁명에 도취된 사람들이 과연 그 때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의구심을 표하는 부분이 그토록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은 비단,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도모하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 같다... #4. 제이슨 [헤이, 웨잇...] 새만화책 2002

우울하고 상처난 마음에, 굵은 소금을 화악~ 뿌리면서 오랫동안 후벼파는 만화... hey, wait! 그 후 변해버린 모든 것....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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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언어...

근본을 알 수 있는 몇 가지의 번뇌와, 또 그 근본을 알기 어려운 번뇌로 건기의 사하라 사막마냥 피폐해진 나를 위로해준다며 츄파춥스가 '법구경'을 선물해주었다. 책 앞머리에 쓰인 한 구절에... 잠시 숙연해졌다. -------------------------------- 참회하나이다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하나이다. --------------------------------- 입속의 검은 잎들이 넘실대는 이 세상에서 나 스스로의 언어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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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 탈취에 의한 축적

#.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 한울 2008

0. 개념의 인플레 현상 덕분에,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정색하고 물어보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정리된 모범답안? [Commanding Height]와 쌍을 이루어 읽는다면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칠레, 영국,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둘러싼 이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라니!!! 예전에 [commanding height]를 보면서, 이건 아니잖아... 라고 땅을 치면서도 막상 나의 목소리로 정확하게 비판할 수 없었던 것들을 콕콕 찝어주니 앗싸... 1. 해미와 함께 이 책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디, 둘다 뜨끔했던 것은 '우리'의 리버럴한 성향에 대한 하비의 통렬한 지적... "사회정의의 추구는 사회적 연대와 더불어, 사회적 평등이나 환경정의를 위한 좀더 일반적인 투쟁과정에서 개인적 욕구, 필요, 욕망을 유예할 수 있는 자발성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욕구와 필요, 욕망을 유예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지만, 소위 리버럴좌파 (혹자는 날나리 좌파라고...)들의 건전한 의도와는 달리 '자유지상주의적' 태도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적극적으로 포섭당하고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ㅡ.ㅡ 2. 저자는 그냥 자유 일반이 아니라 '어떤' 자유인가라는 질문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시민권/자유권 중심의 인권 개념을 비판한 것도 좋은디, 사회권에 대한 관심이 이미 진보진영 내에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은 아직 잘 모르시는 건지... 혼자 너무 답답해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 3. 결국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탈취에 의한 축적',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계급권력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로 요약될 수 있으며,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전지구적 피라미드 혹은 돌려막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결코 약속한 대로의 성장을 가져오지도 못했고, 다시금 또다른 위기를 노정시키고 있다. 4. 밀턴 프리드만의 [capitalism and freedom] 을 읽으면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상적인 최소 국가의 가능성을 하비는 쎄게 비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실제'라는 별도의 챕터로.... 전반적으로, 이 책은 수식 현란한 본격적 경제학 서적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철학 혹은 역사서도 아니면서, 딱 내 수준의 궁금증을 가진 이들에게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폭넓은 이슈들을 잘 개괄해주는 '개론'이라고 보면 되겠다. 국가에 대한 논의도 그래서 이해하기 쉬웠다. 5. 남한사회에 대한 평가는 다소 혼란스럽다. 신자유주의적 의제가 다소 완화되어 적용된 것으로 평가하는데, 여기에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발전주의적 전략과 노동계급의 저항(?)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했다. 어찌 보면 장하준 교수의 국가/재벌 주도 경제발전 옹호와 맞닿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노동운동의 조직력을 감안할 때 그 힘이 과도하게 평가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 해외의 좌파들은 한국의 노동, 사회운동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혹은 인색하게 한국의 운동을 평가하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에 비해 과도하게 포장되어 알려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6. 예언 혹은 예측 신자유주의가 내적 위기로부터 도출된 대안들 - 이를테면 신보수주의, 질서와 도덕의 강조, 국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와 '법'의 전면화 -을 읽고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보자면, '아, 이거 딱이잖아, 쪽집게네' 하는 생각이 들수밖에 없다. 그니까, 어쩌면 현재 한국사회의 퇴행은 우연한 돌발이라기보다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이라는 말씀... IMF 구제금융 이후에 [세계화의 덫]을 읽고 '아니,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이 외환 위기가 올 것을 다 알고 있었구나. 이럴수가!' 했었는데, 이 책도 그런 측면에서 마찬가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적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강조해마지않던 '시민적 자유'의 공공연한 퇴조를 지적하는 글을 보고 있자니, 이거 원... 7. 대안 진단과 분석과정은 장구했지만, 예상대로,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대안을 주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그 대답이야 독자들, 그리고 역시 운동의 몫이 아닐까 싶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거세다 했어도 그 양상은 국가, 그리고 내부의 계급구조, 투쟁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발전도, 위기도 불균등하더라는... 그래서 영국, 미국, 멕시코, 한국, 스웨덴에서 공통점도 있지만 중대한 차이점도 존재할 수 있었다. 결국은 저항과 운동... 그로부터 또다른 '동의의 구축'! * 포스팅 내용과는 관계없는 사족이긴 한데... 맨날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쓰니까, 제가 요즘 몹시 한가하거나 행복에 겨운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으신듯해요... 아.니.랍.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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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책...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먹듯 마음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 했거늘... #1.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멸종] 오멜라스 2009

시간이동, 바이러스, 공룡 멸종, 외계생명체... 소위 SF의 핫 아이템들이 모두 들어있는 소설이다. 공룡멸종의 놀라운 비밀(?)을 주제로 담고 있다. 예전에 재미나게 보았던 일본만화책 [괴수대백과 사전]이 고질라의 존재불가능성을 논증했던 것과 같은 논리를 가져왔다 ㅎㅎㅎ 원저의 제목 [End of an Era]를 잘 살렸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딱히 중요한 대목은 아니었으나 기억해둘만한 문장이라면, 13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이야기했다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2.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청미래 2002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남녀간의 사랑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다른 이의 미덕보다는 악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라, 차라리 서로를 잘 모르는 게 관계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물론, 오랜 기간에 걸쳐 삶을 공유한 후에 배신과 상처가 아닌, 믿음을 얻었다면야 모를까... 이전에 읽었던 보통의 책들에 비해, 좀 공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보통이 이 책을 썼을 때 약관 20대였다. 그 나이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통찰력이기는 하다.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차분하게 관찰하기 어려운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말이다. 허나, 그닥 추천할만큼 좋은 작품이 아닌것만은 분명.... #3.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행복의 지도] 웅진 지식하우스 2008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매일 우울하고 불행한 소식만을 전하던 기자가, 행복의 비밀을 찾아나선 엉뚱한 여행담... 이 썰렁하고 해학적인 글들 곳곳에는 저자가 발견한(?) 행복비법들이 숨겨져 있다. 저자는, 이토록 불행으로 가득찬 것같은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기자와 철학자 탓으로 돌렸다. 특히 철학자 ㅎㅎㅎ "... 그러나 진정한 악당은 바로 철학자다. 유럽 출신의 음침한 백인 남자들. 그들은 온통 검은 옷을 차려입고,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고,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카페에서 혼자 놀며 우주를 생각하다가 '짠!'하고 결론을 내린다. 우주는 불행한 곳이라고. 우주가 불행한 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외롭고 음침하고 피부색이 창백한 백인 남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8세기 하이델베르크의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에 먼훗날 세상에 태어나 불루밍턴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철학개론 수업을 들어야하는 녀석을 괴롭힐 요량으로 길고 산만한 독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하지,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심지어 불행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적어도 불행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행복을 진심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 행복도 마찬가지다. 유전적 요인이니 공동체적 유대감이니 상대적 소득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빼버리면, 행복도 선택이 된다. 쉬운 선택도 아니고 항상바람직한 선택도 아니지만 선택인 건 맞다. 잔혹한 기후와 철저한 고립 앞에서 아이슬란드인들은 절망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사는 삶을 쉽사리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가 돌아본 나라들에서 얻은 교훈들은 기존의 행복 (happiness), 주관적 안녕 (subjective well-being), 삶의 만족도 (life satisfaction) 에 관한 계량적 연구에서 얻은 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관용, 신뢰 (가족같은 배타적 혈연 뿐 아니라 얼굴 모르는 이웃들과의 연대감, 타인의 삶에 대한 공동 책임감), 관계와 초월, 실패의 인정 (이건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정신줄 놓기 (이건 좀 아니야!), 우울과 염세를 인정하고 즐기기 쯤? 허나, 그렇게 모두들 아는 것 같아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진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저자의 껄렁한(^^) 해석을 읽다보면, 내가 요즘 진행중인 계량적 분석이 얼마나 제한적일수밖에 없는지..... ㅡ.ㅡ 아참,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단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다음 생에 부탄의 개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 ㅎㅎㅎㅎㅎ 오늘 어린이날! 주먹도끼는 삼계탕을, 노가다 장은 맛난 커피를 사주었다. 행복했다 ㅎㅎ 그리고 츄파춥스는 '웃는 빵'을 선물로 주었다. 빵은 행복해보였다... 씨익 웃고 있다... 나도 행복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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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중간중간 극장에서, 혹은 DVD 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단상 #1. 스티븐 달드리 감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영화라서, 풍부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라서 좋았다. [타이타닉]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예쁜 배우인줄 알았던 케이트윈슬렛은 해가 거듭될수록 진짜 배우임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한나 슈미트에게서 그토록 복잡한 이성과 감정의 딜레마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있는동안 [뉘렌베르크 트라이얼]을 보았더랬다. 그 때도 집단 속의 개인,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 이런 것들에 대해 열띤 토론과 고민들이 오고갔었다 (대화가 영어로 오갔다는 나름 어려운 점이 있었다 ㅜ.ㅜ). 이 영화를 보고나서도 함께 본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선/악에 대해 분명한 혹은 단호한 판단을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움... 홀로코스트의 '성실한' 공무원(반인륜적 범죄마저도 성심성의껏 집행한!)이었던 그녀가 20년 동안 수감 생활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읽기'라고 답할 때는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20년만에 얼굴을 맞대자마자 과거를 생각해본적 있냐는 마이클의 질문은, 꼭 저 순간에 저걸 물어봐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녀의 자살이 온전히 사적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영화평을 보니 원작에서 그녀는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회고록 등을 읽었단다. 죽음의 의미는 한결 복잡해진다 ㅡ.ㅡ 진지한 영화 속에서 한 가지 옥의 티라면... 독일어 교재라면서 왜 책들이 다 영어로 쓰여 있는지... ㅜ.ㅜ


#2.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그랜 토리노]

영화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어찌보면 미국판 [워낭소리]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조금 더 '냉정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어쩜 미국이라는 문화적 거리 때문에 내가 좀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감정은 정말 특별할 것이다. 그랜 토리노로 상징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 집안 가득한 공구 꾸러미, 크지는 않지만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화단과 집안 구석구석, 맥주와 총... 그리고 전쟁영웅... 눈엣가시 같은 다종다양한(!) 이민자들, 부모의 재산만 탐내는 자식들 (거기다 자동차는 일제!), 장례식장에서 휴대전화질에 빠진 개념상실 손주들이라니... 못마땅한 꼴을 마주할 때마다 눈쌀을 찌푸리며 그르렁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참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그만의 모습이다. 느끼한 서부의 총잡이가 저리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그의 나레이션과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 '그랜 토리노'는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희망없는 송가처럼 들렸다. #3. 미셸 공드리 감독 [이터널 선샤인] 2004년

은근 호화캐스팅... 짐캐리에 케이트 윈슬렛... 거기에 커스틴 던스트와 엘리야 우드가 조연으로... 참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그러면서도 작은 애틋함들이 살아있는 괜찮은 SF 로맨스 영화였다. 이별 후에 그리움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웠는데도,다시금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더구나 상대방은 기억이 온전한 상태에서)이건 좀 많이 비극이다. 영화의 주제는, 결국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고 사랑에 빠질 사람은 다시 빠지고야 만다는 숙명론??? 무너지는 기억들 (무너지는 건물로 형상화된) 속에서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짐캐리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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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와 컨텍스트 - 기형도

기형도 시인의 20주기가 되었노라고, 백수 (!) 친구를 꼬드겨 책 선물을 받았다. 완전히 자발적인(!!!) 선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ㅎㅎㅎ # 박해현, 성석제, 이광호 엮음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 지성사 2009

사실, 나는 기형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 줄 몰랐었다. 그의 인기가 이렇게 드높은 줄 안 것은 최근 몇 년... 몇몇이서만 은밀하게 몰두하는 그런 아티스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돌이었어... 이런 약간의 배신감도 없지않아 들었더랬다 ㅎㅎ 심지어 얼마 전에 들렀던 대학가 앞 서점, 내 앞에 선 대학생이 계산대에 올려놓은 책은 [기형도 전집]이었다. 저 또래의 학생들과 20년이 넘은 시들이 어떤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붙잡고 물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 세대로서의 공감 책 앞부분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시인들의 대담이 실려있다.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고, 무엇에 공명했으며, 자신들의 삶에서 혹은 시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세대론에 그닥 공감하는 편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또 비슷한 것에 감흥했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좀 애틋하게 느껴졌다. 시인의 죽음이 가져온 신비화와 극적 효과를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 - 내가 괜히 유행에 편승하는게 아닌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시들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외부를 향한 의심!!! - 들에는 참으로 공감이 갔다. 우리는 이미 '요절하기에도 늦은 나이'라는 한 시인의 날카로운 지적과 '지금 죽으면 그냥 사망'이라는 시시껄렁한 농담마저도 ㅎㅎ 한편으로, 요절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망 시점의 나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 지금은 어느 나이에 죽어도 요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은 참... 80년대 학번들이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낮에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밤이면 그들이 허용해준 동시상영관에서 에로영화를 즐기는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학교에서는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를 읽고 (또 대자보에 베껴쓰고), 밤이면 기형도의 시를 홀로 읽으며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는 증언...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과 한편으로 (기이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이 지닌 윤리적 감수성이 머무는 지점에 바로 기형도 시인이 위치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어쨌든,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분리될 수 없고, 그것이 부당한 혹은 과도한 아우라를 낳던 그렇지 않던 간에,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시, 또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시를 분리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 같다.


# 시인과 시 기형도의 시는 (몹시도) 어두워보인다. 혹자는 그의 시가 죽음을 예감했다고 사후 논평을 하기도 했고, 누구는 또 그 어두움의 기원을 찾으려 애쓰기도 했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 하지만 그의 절친했던 동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은 그렇게 멜랑콜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가 어둡다고 시인이 어두운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 시가 글쓴이와는 아주 무관한 그저 허구의 말장난 인것도 분명 아니리라. 50대 아저씨가 10대 소녀의 아바타로 위장하고 사이버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와 시인의 관계는 약간, 서로 독립적인 것 같다. 이미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다 살아버린 듯 치기어린(?) 단정어를 구사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감정의 과잉이나 작렬하는 자기애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상의 유쾌함과 꼼꼼한 성정 탓이 아닌가 싶다. 예의 그 껄렁한 문장으로 그려진 성석제의 회고는 우리가 대학시절 친구를 추억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 저녁이 되면 시장 안의 술집으로 가곤 했다. 기형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보니 알코올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술꾼 정도의 주정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재간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다." ㅎㅎㅎ # 자기 통제와 죽음 기형도는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여행의 기록] 앞부분에 보면 그의 누이가, 동생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그의 글을 세상에 내보여도 되는 것인지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의 유고시집과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더랬다. 어쩜 이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을 세상에 알려준 누이와 친구들에게 독자로서의 고마움과, 자기통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살짝의 원망... 이 양가감정은 뭐다냐...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느날 준비되지 못한 죽음을 맞는다면 과연 나의 생을 온전히 '파악'하고 정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확신컨데, 전모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ㅎㅎㅎ 특별히 사생활(?)이 복잡하고 비밀이 많은 건 아닌데??? 혹시 다중인격??? 그래서, 통장번호나 연루된 인간관계 종류와 특성, 명단 같은 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둬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갑자기 포스팅이 삼천포로 흐르고 있다.ㅡ.ㅡ #. 김훈의 글 그에 대한 송가 중 애절하기로는 전연욱의 [안개]가 으뜸인 것 같고, 산문으로는 김훈의 것이 아마도... "...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 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 최면 식의 쌈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시인이 살아있었더라면 향년 50세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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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책 읽고 메모 남기는 것도 일이다. 기록 없이 기억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몇 글자라도 끄적끄적... #1. 매일노동뉴스 편집국 [현장을 가다] 2008

우연히 채널을 마주치면 입이 쩍 벌어지는 달인의 솜씨에 잠시 정신줄을 놓다가도, 정말 저래도 되나 싶어 항상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노동안전보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 황당한 프로그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나마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는 미디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사상생을 노래하는 공익광고나 산재예방 광고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직장인'(노동자 말고!)들은 쿨한 캐주얼 웨어 혹은 맵시나는 정장을 입고 사무실 책상앞에서 일한다. 사실은 일도 잘 안하고 연애질에 권모술수, 집안 싸움만 하는게 보통이긴 하지만 ㅡ.ㅡ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가다]는 그래서 참 소중한 기록물이다. 조롱하지도, 비탄하지도, 저주하지도 말고, 그저 이해하라는 스피노자 할배의 말씀처럼, 노동의 현장을 '연대의 마음으로' 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조/건설, 금융/서비스, 공공부문의 3부로 이루어진 글들에서,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자부심, (생활의 달인에 등장할법한) 현란한 재주와 기술들, 자신이 몸담는 일터에 대한 사랑,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믿음 들을 읽을 수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노동 (그 노동없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생산품과 서비스를 앞에 두고도, 나는 너무 자주, 그들의 존재를 잊는다),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나서야 하는 험난한 출근길, 점증해가는 고용불안과 팍팍해지는 노동의 댓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빠져있을리 없다. 현상들을 종합하고 추상을 통해 일반화를 시키는 것이 연구자의 장기이자 소명이라고 하지만, 이런 생생한 일상들을 누군가 대신 그려주지 않는다면 그런 '연구'가 가능이나 할까? 고마운 책이다. 책에 등장했던 모든 분들, 취재하느라 고생한 분들... 모두에게 연대의 마음을!!!


#2. 고종석 [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마음산책 2009

하드커버에다 표지가 너무 대놓고 '어루만지다'를 표현하고 있어 살까말까 잠시 고민했었다. 그래도 고종석의 말/글 책들은 그닥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또 질렀다. 거듭 확인하는 사실이지만, 이 분의 감수성은, 통상적인 그 세대 한국 아저씨의 것은 분명 아니다 ㅎㅎㅎ 사랑이라는 모티브와 관련된 단어들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놓았는데, 저자가 앞에서 분명히 밝히듯 이건 연애지침서나 사랑학교과서가 아니라 말글 에세이다. 그래도 주제와 관련된 저자의 평소 지론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단어들은 입술, 혀놀림(?), 미끈하다(?)처럼 성애와 좀더 관련시켜 설명한 것들도 있고, 딸내미, 누이처럼 또다른 종류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것들도 있고... 참 다양했다. 소개된 많은 어휘들 중 가장 마음을 끄는 아름다운 한국어라면, 역시 제목에 언급한 '어루만지다' 아닐까 싶다. 그것이 누군가의 볼이던, 혹은 마음이던, 그 어루만진다는 구체적/추상적 행위를 그 어떤 다른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허거덕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ㅎㅎㅎ 주변사람들이 나보구 성격이 고래심줄 혹은 쇠심줄(영어로는 nerve of steel!!!) 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날 이모양이구나... 큰 깨달음이었다!!! 또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원래 으뜸 존재)과 사랑하는 대상 (버금 존재)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된다는 점에서 "...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라고 썼다. 예전에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정신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고 했었다 (마치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 먹듯이!)... 고로, 고종석과 강유원의 주장을 합쳐보자면, 정신이 병든 자는 참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이다. 병원에만 가는게 아니라 무려 사랑도 하고 책도 읽는다 ㅎㅎㅎ (옆에서 사자는 풀 뜯어먹고!) #3.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모티브북 2008

벨훅스의 책은 처음 읽어보았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책을 썼는지 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책 전체가 마치 서론처럼 느껴졌다. 뭔가 본론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안 나오는 ㅡ.ㅡ 일단, 저자가 생각하는 '계급'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베버나 마르크스 류의 개념적 정의를 해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계급에 대해 논한 책에서 정작 본인이 생각하는 계급이 무엇인지 말해주지를 않으니, 상당히 애매하더라는... 사회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호한 상태와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재산? 학벌? 집안? 가난??? 어쩌면 사회의 위계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흑인)공동체주의가 살아있던, 그리고 가난하지만 현명했던 부모님 세대의 그 시대에 대한 저자의 목가적 향수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루소도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우째야한단 말입니까.... 이런 종류의 책도 쓰고 교육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게 첫걸음이기는 할텐데, 어째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말씀만 들어있어서 뭔가 2% 부족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달까..... ㅡ.ㅡ 한편,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출신으로서,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세계에 편입한 저자가 마주쳤던 곤혹스러운 현실, 그리고 그렇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 있는 (어쩌면 축복받은) 조건들에 대한 기술에는 일백퍼센트 공감했다. 이런 신분상승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피에르 부르디외나 벨훅스같이 뛰어난 성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해봤어? 안해봤음 말을 마세요' 하면서 자수성가 제일주의로 주변에 상당한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ㅡ.ㅡ (그 대상이 온 국민 전체가 되버리면 정말 괴롭다!) 그나저나 원제가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인데 왜 한국어판 제목은 저 모양인지? #4. 벨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경계넘기를 가르치기] 모틔브북 2008

위의 책을 읽는 중에,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서 읽었다. 전자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던져주었는데, 딱히 답은 잘 모르겠다. 베버의 지론과는 상충하는 이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스타일이 바람직해보이기는 하면서도, 나보고 하라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ㅡ.ㅡ; 아마도 학교를 다니면서 하도 싸이코같은 인간들을 많이보고, 도덕적 감화는 고사하고 다른 거 안 바라니 선생이면 전공과목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라... 이런 결론으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 앞서의 책보다 저자의 유연하고 민감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태도 - 가부장/백인중심주의의 잔영을 비판하면서도 페다고지 이론 자체의 전복적 성격과 선생의 상호존중하는 태도를 존경하며 적극 수용하는 모습 - 몇몇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남겨둔다. ".. 나는 자아실현과 거리가 먼 대학은, 책에 쓰인 지식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부적격인 이들에게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면서 교사 자신은 비난받기를 거부한다면 역량 강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론'이나 '페메니즘' 같은 특정한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론화를 실천하거나 페미니스트 부쟁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지닌 실천가는 아니다. 용어 만들기라는 특권적 행동을 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의사소통방식을 이용할 권리를 얻으며, 자신들의 연구와 행동을 설명하고 정의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많은 환경에서 지식인들이 퇴출되고, 이론이 종적을 감추며,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해왔다. 침묵은 공범자가 되는 행위이며, 침묵은 우리가 이론 없이 혁명적인 흑인 해방과 페미니스트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영속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 예를 들면, '흑인성'의 이론을 구축한 몇몇 엘리트 학자들은 그 흑인성을, 선택된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 인종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이용하여 흑인 경험 영역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론 구축 과정에 민주적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한다 - 흑인 해방 투쟁을 위협한다. 우리 중 일부도 반주지주의를 조장하고 모든 이론은 가치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들에 호응하여 흑인 해방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위협한다. 이들 두 집단은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강화하거나,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조장함으로써 비판 의식을 길러주는 해방 교육의 힘을 부인하며, 그결과로 우리를 집단적ㅇ그로 착취하고 억압하도록 강화하는 환경을 영속시킨다." "정체성 정치학은 억압되거나 착취당하는 집단이 벌이는 지배 구조를 비판하는 관점, 즉 투쟁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를 갖고자 하는 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진보적인 교수 대부분은 어떻게 계급 편견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을 갖고 자신의 교육 과정을 개혁하는 경우보다는, 마음 편하게 기존의 연구 자료에 담긴 계급 편견에 도전하려고 애쓴다..." "학교는 낙원이 아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다. 교실은 가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가능성의 장애서 우리는 자유를 얻으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동료에게 우리가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겪는 현실에 맞서게 해줄 개방된 사고와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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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와 루소

바쁘더라도 저녁나절 30분은 좀 차분히 앉아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나름 잘 지켜나갔던 3월이었다. #1.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2006

크나큰 가르침을 얻기는 커녕, 현재의 업을 접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폭풍같은 회의감이 밀려왔던 책이다. 학문, 혹은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소명도 없이 어쩌다보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또 딱히 다른 것을 잘 하는게 없어서 어영부영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번역하신 분도 괴로워하신 걸 보니, 나만의 고민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내적 조건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학자가 된다는 것의 금권적 기반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다소 놀라웠다. 또 요행이 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장탄식,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라는 지적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의 한숨을 ㅡ.ㅡ 외적 조건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 조건 - 열정과 소명의식이다. "..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결국 나보구 공부 그만두라는 소리다 ㅜ.ㅜ *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버리지도 않습니다....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계속됩니다." 베버는 오늘날 특허와 지적 재산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과학계의 비밀주의와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지주의화와 합리화, 즉 현실세계의 탈주술화가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 원래 계몽주의자?) *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베버는 강단과 정치의 분리, 가치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 교수와 지도자의 엄밀한 분리를 극도로 강조한다. (미국과는 달리) 권력관계가 두드러진 (독일의)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나도 학부의 정규수업시간에는 팩트 이외에 사회적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은 좀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요즘같은 세상에 선생이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기나 할까? 선생의 영향력을 오히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주류집단의 지속적인 이념세례 속에서 한마디 정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가 강의실에서 보여준 태도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원칙에서 베버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의 교수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이 강단을 저급한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종합하고 전달하는 것 또한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가 보수적 온정주의가 되든 급진적 공동체주의가 되든 학생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작 어려운 것은, 더이상 성찰과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강의실에 어떻게 진정성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 학교, 교육제도, 선생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보내왔던 지난 시절의 개인적 경험들로 핑게삼아, 좋은 학자,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지난 수년을 보냈다는 게 좀 한심스럽다. 다른 거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어릴 적에, 돈 벌어서 만화가게 차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 ㅜ.ㅜ)


# 2.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해미와의 첫 책모임 이후 도대체 '사회' '공공'이 무엇이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옛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펴낸 "사회국가'를 살펴보았다가 잔뜩 실망하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둘 다 루소 할배의 팬이 되었다. 이 분 엄청 발랄하셔!!! 이 텍스트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가 얼마나 미워했을지 이해가 충분히 된다.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겨우 탈주술화/계몽의 가치가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기술과 학문의 발전이 불평등과 패악의 원인이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계몽주의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ㅎㅎㅎ (현실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그의 발상이 목가적 낭만주의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불평등이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사회와 정신'이 낳은 인위적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추악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이라 일컬어지는지 잘 말해준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앞서간 (!) 사상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논문의 헌사에서 제네바공화국 의원들에게 "... 그들 (시민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권리에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자진해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게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언급,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사랑과 정념의 기원에 대한 나름 냉철한(?) 추론 또한 흥미진진 ㅎㅎㅎ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는 두개의 원리로 자기애와 더불어 '연민'을 꼽고, 이를 확장하여 동물이 불필요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않을 권리가 있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더욱 충격... 연민이라... 루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쩌면 연민이 사라져가는 사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이것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읽은지 오래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이렇게 재치있는 말투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이라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 한편으로 한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임무를 완수했다는 자부심 이외에, 얼마나 이 내용과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 그냥 지식이라고 하자 ㅡ.ㅡ)가 쌓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참, 이 책이나 베버의 책 모두 보기 드물게 번역글이 아주 매끄럽고, 참고문헌과 해제도 충실하다. 문고판이라 부담도 없으니 주변인들께 널리널리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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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봄

이 나에게 남아 있을까? 유독 짧은 봄과 가을의 입구에 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다시는 못만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찰나를 즐겨보려하지만, 이들은 비정하게도 눈깜짝할새 지나가버리곤 한다. 기차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더랬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흩날리는 매화, 아님 벚꽃바람을 맞고 싶구나~~~ 음.... 책은 어떤게 좋을까??? [노동과 독점자본] [신자유주의] 이건 아닌디??? (책꽂이를 돌아봐도 마땅한 책이 눈에 안 띄는구나. 광물성 인간의 책장이란...) 우쨌든 오늘, 파란 하늘, 따스하고 나른하면서도 아직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남아있던 이런 날이면 역시나 파블로프의 개 마냥, 어김없이 떠오르는 글 한편.... -------------------------------- 그 리 움 (박노해)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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