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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의 또다른 책이다.
도서관에 신간구매로 신청하면 책 반입시 우선 예약자로 등록된다. 그리하야 '새책'을 읽는 영광을 누렸다. 지난 번 [사치열병[도 마찬가지 ㅋㅋ
요즘에 주로 생활사보다는 책이나 영화 감상글을 남겨두는 편인데,
한편으로는 평소에 하고픈 이야기들을 여한 없이 하기 때문에 딱히 블로그에까지 남길 글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로 할 말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말과 글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상에 뭐 굳이 ㅋㅋ
은인자중, 암중모색이 필요한 시기..... 라고 하면 좀 오바질이지만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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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돌베개, 2011 |
이 책은 선생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어찌 보면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만큼 예민하고 까칠한 글들...
만일 그의 글이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이런 것 때문이리라....
또 재일조선인, 민족, 국가, 화해 이야기냐?
그래도 우리 (?) 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한테 너무 가혹하게 비판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글쓴이가 서문에서 밝혔듯 상황은 그렇지 않다.
"나는 곧 만 60세를 맞이한다. 이전에는 60세가 되어서도 살아있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심지어 60세가 되어서도 이 책에서 하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젊었을 때 나는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머지않아 내 발언 따위는 쓸모 없어질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 "그래도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에요" 문제...
저자의 말대로 "구일본군 병사도 천황 히로이토도 개인적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
어릴 적에 임철우의 단편 [붉은 방]을 읽고 다소 충격받았었다.
고문형사의 그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모습에... 세상에, 그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화끈한 한화그룹 회장이나, 위장전입을 일삼는 고위공직자 나으리들도 다 알고 보면 자식사랑이 극진할 뿐인, 그저 평범하고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ㅡ.ㅡ
이 두 가지,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고, "알고보면 좋은" 사람들, 특히나 '나름' 진보적인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기묘한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제하는 현실 속에서 글쓴이는 자꾸만, 듣기싫어해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없는 것이다.
죄는 개인에게 귀속되지만 책임은 집단에게 귀속될 수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논거로부터 선생은 일본'국민' 일반의 소극적인 전쟁책임 회피, 혹은 쿨하게 전향적으로 털어버리고 싶은데 피해자들의 지나친 (!) 민족주의적 반일정서 때문에 문제 해결이 지체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또한 "설령 피해자에게 가해성이 침투해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운용한 자들의 가해책임을 상대화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면서 프리모 레비의 깊이 있는 성찰을 언급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전후세대이자 소위 국제주의자로서 (이런 말을 막 쓰다니 낯부끄러워라 ㅡ.ㅡ) '민족' '민족주의'라고 하면 일단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나이지만, 냉철한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과 동반된 선생의 민족적 지향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꼭 한/일 관계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 내에서 훨씬 많은 고민과 성찰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옮긴이는 서경식 교수를 통해서 널리 회자된 '디아스포라' 라는 용어가, 그 고민의 내용은 거세된 채, 해방의 '이미지'로서 낭만적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지적했다. 나 또한 '나라없는 사람'을 꿈꾸며 아인쉬타인의 (내가 이해도 못할) 상대성이론보다는 그의 자발적인 국적포기를 더욱 높이 사는 형편이지만, 그것이 외부의 강제, 역사라는 개인이 감당못한 소용돌이에 의해 강제되었을 때 감내해야 하는 신산한 삶에 대해서는 너무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크게 다를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지만, [난민과 국민사이]도 읽어봐야겠다...
* 뱀발1.
주말에 섬활에 다녀오면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는 중에,
문득... 음... 아우슈비츠에 직접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장 아메리도 있었고, 프리모 레비도 있었지 않나.....
참, 프리모레비에 관한 다큐영화도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
* 뱀발2.
서경식 선생한테 편지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당신의 책에 무척 공감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글 ㅋㅋ
그리고 일본인의 집단적 심리에 대한 질문도 겸사겸사....
이건 딱히 '일본인'이라는 특정 '국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집단적 행태/관계에 대한 궁금증.. ...
한국말도 이제 잘 하시는 것 같던데..... 흠.......
예전에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을 읽으니 재밌을 것 같았는데,
그냥 서평만 읽어도 될 뻔했쓰...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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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열병 - 과잉 시대의 돈과 행복 로버트 H. 프랭크 미지북스, 2011 |
거의 470페이지에 걸쳐 중언부언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여한없이 다 풀어놓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요약하자면
첫째, 부자들의 사치재 소비가 단순히 주체할수 없이 돈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돈자랑질에 불과하다면 문제가 없을텐데, 이는 결국 전체사회의 소비기준을 '쓸데없이' 상향이동시키고 그럼으로써 인간복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자원, 특히 공공서비스/프로그램들이 '돈이 없어' 축소되는 우스꽝스런 상황을 가져온다는 것
둘째, 안타깝게도 비싼 물건 산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으며, 아주 작은 능력의 차이나 우연에 의한 차이만으로도 엄청난 보상의 차이를 가져오는 승자독식 사회는 이러한 사치열병의 근원이자 또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는 것
셋째,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각자 현명한 선택을 한다는 고전주의 경제학의 기본가정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또한 개인의 현명한 선택 (사치재를 선택함으로써 남보다 두드러지고, 그로 인해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현명한 설택일 수도 있으니까) 이 반드시 사회전체에도 바람직한 결과를 미치는 것은 아님. 그렇기에 이 사치열병을 고치려면 개인적이 아닌 집단적 수단이 필요하고, 그것은 바로 세금...
넷째.... 그리하여 그 답은 누진소비세... 소득이 아니라 소비에 세금을...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총소득에서 저축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에 세금을 매기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10억원 벌어서 사치하느라 8억원 쓴 사람과 저축하며 검소하게 생활하느라 2억원밖에 안 쓴 사람이 있다면 전자에게 엄청난 세금 부담이 돌아가도록 하면 된다는....
근데...
결국 저자의 주장은 인간본성에 반하는 강제적 규제나 압력이 아니라, 선순환할수 있는 인센티브 구조를 바꾸어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선택과 개인의 이득을 통일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건데...
이러한 논리 자체는 무척 공감하나 그렇다고 누진소비세로 몰빵하는게 정말 더 나은 것인지는 도대체 모르겠음. 저자는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영 납득이 안 됨.... ㅡ.ㅡ
사람들이 상대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여 돈을 더 벌기보다, 가족/공동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이자는 주장에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나, 과연 한국이나 미국의 그 많은 중하위계급 노동자들이 수천불짜리 바베큐 그릴이나 뽀대나는 신형차를 사려고 그리 일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음.
또한 환경세라는 인센티브 구조를 통해 자발적으로 기업들이 환경보호에 나서도록 만든 것을 좋은 사례로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공해의 총량이지 누가 오염물질을 쏟아내느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효용극대화라는 경제학의 특성에 비추어 매우 합당하나, 가치지향의 보건학 전공자 입장에서는 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그리고, 결국 저축을 빼고 총소비에 과세하는 것은, 저자의 다른 표현으로 '저축을 면세하는' 것인데, 중하위계층 미국인 가구의 실질 저축률이 제로인 것을 생각하면, 이걸 보고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 혈압을 상승시키는 처사.... 특히나 미국사회에서 저축이라는 게 한국같은 정기적금이 아니라 대개 뮤추얼 펀드를 비롯하여 금융 '투자'의 개념이 강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저축할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 다시 면세의 혜택이 과도하게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게 됨. 물론, 저소득가구야 소비를 다 합쳐봐야 얼마 안 되니까 누진소비세의 절대 규모가 작겠지만, 이게 과연 효율만이 아닌 사회적으로 공정한 조처인가에 대해서는 실증자료와 함께 더욱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임...
저자는 승자독식사회의 폐해를 이야기하지만, 극단적 소비자본주의로의 이행과 노동시장/세계경제의 양극화를 가져온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조차 없으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책없이 고수하는 시장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도 좌파는 규제를 선호한다고 비판한다. 도대체 미국 현실정치에 좌파가 얼마나 있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좌파가 독점권력을 탓하는 많은 병폐들은 독점의 문제가 아니라, 미숙련 노동자를 주로 고용하는 노동시장의 문제로 보인다... 미숙련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 이유는 시장권력을 가진 고용주들이 그들을 착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필사적으로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양반은 '착취'를 악덕 자본가들의 행태를 지칭하는 도덕적 비판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게 아닌가 싶다... 노동자들이 필사적으로 돈을 더 안 벌면 그렇게 아둥바둥 안해도 되는데.... 이런 거였어????
합리적인 리버럴이자 실용적 경제학자로서 미국사회에 던지는 제안의 진의는 참 아름다우나,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ㅡ.ㅡ
* 사족이지만, luxury good 을 사치품/사치재가 아니라 '명품'이라고 표현하는 괴이한 한국어 용법에 분통이 터지는데, 이 책은 '사치'라로 번역해주셔서 감사...ㅋㅋ
"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는 전업주부 열풍을 찬양하는 사회분위기와, 경제적 자립을 포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침묵하는 언론과 일부 사회평론가들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했다"는 저자의 머리말이 사실, 이 책의 모든 것을 웅변한다고 할 수 있다.
베타 프리단의 <The feminine mystique 여성의 신비>를 읽고 자란 중산층 엘리트 페미니스트인 저자에게 작금 미국의 상황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다. 실제로, 저자가 들고 있는 사례나 주장하는 바를 듣고 있으면, 이 책이 60-70년대에 쓰인게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다. 여자도 바깥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하고 있어야 하다니...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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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 비즈니스 정글보다 더 위험한 스위트홈에 대하여 레슬리 베네츠 웅진윙스, 2011 |
저자도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아직 젊은)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다. 대부분의 노동계급 여성들은 노동시장을 떠나 돌아갈 스위트 홈이란 있지도 않거니와, 노동시장이란 것이 자아성취나 안정적 기반마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 노동시장과 가정은 선택가능한 참/거짓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그리고 꼭 하층계급이 아니더라도, 일부 전문직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고용질과 노동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한국사회에서 나름 나쁘지 않은 (?) 정규직 일자리에서 일하는 나의 여자 친구들마저 (자신들은 죽지 못해 일하는데) "자아성취한다며 일하는 여자들이 제일 어이없다"고 울부짖는 마당이니 말이다... ㅡ.ㅡ 전업주부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전업주부는 뭐 집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하나???) 이야기가 완전히 농담만은 아니다.
이 책은 미국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의 전업주부 열풍을 심도깊게 설명하지 않는다 (못한다?). 다만, (후배) 여성들이 막연한 스위트홈에 대한 환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안타까운 일인지 사례를 통해 설명하며, 그러지 말라고 조언한다. 남편만 의지하고 살다가 이혼이나 사별한 뒤 다시 노동시장에 돌아가는 것이 (심지어 전문직/관리직에서조차) 얼마나 어려운지, 사회보장은 얼마나 취약한지, 자녀와 남편이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기껏해야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 말이다....
학식 높은 주부들이 정성껏 가꾸어놓은 스위트 홈이란 게 보기만큼 스위트하지도 않거니와, 자본주의 정글에서 경제적 자립없는 개인의 삶이란 너무도 위험하고 취약하다는 것이다. 육아/가사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지만, 그래도 그 시기는 길어야 10년이니 어떻게든 버텨보라는 건데, 글쎄,어떻게???? ㅡ.ㅡ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궁금증'을 해결하는 단서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직장에 다니는데도, 그녀들은 왜 일을 포기하는 걸까요"와 비슷한 궁금증이다..
지금 하고 있는 알바 마감에 쫓겨서 길게 쓸 수는 없다만,
전업주부 찬양열풍과 회귀현상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중국이 최근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그 이면에는 전업주부를 감당할 수 있는 (일부계층의) 소득수준의 상승 (즉, 소득 양극화)과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시장적 교육체계와 강고한 학벌주의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단 두 사람이 벌지 않아도 될만큼의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물적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시장에 내맡겨진 교육체계에서 '자녀관리자'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에, 전업주부(와 그 가족들)에게는 노동시장 직접 참여보다 자녀에 대한 투자가 가져오는 편익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중국, 한국의 공통점이라면 승자독식의 치열한 경쟁구조와 자녀 혼자 헤쳐나갈 수 없는 복잡한 교육시장에서의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오늘을 일단 여기까지......
책 반납기한이 닥쳐서 일단 체크만 해놓구, 조만간 몇 가지 고민의 지점들을 정리해봐야겠다.
요즘은 알바 때문에 완전히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ㅜ.ㅜ
#1.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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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푸른숲, 2010 |
많이 팔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서평등으로 상당히 많이 알려진 책이다.
도서관에도 입고 이래 항상 대출 중이라 이제서야 빌릴 수 있게 된 만큼 아주 인기가 없지는 않은 듯...
짧은 소개글들로 미루어, 이 책이 [88만원 세대]보다 한층 진전된 논의를 담은 세대론이라고 짐작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부제대로 "20대와 함께 쓴", 즉 20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20대들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서 저자도, 20대들도, 또 '성장'을 바라보는 관점도 성장한, 그런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려운 일거리는 조금도 하지 않으려는 세상의 개망나니, 정치적 무뇌아들로 싸잡아 비난하던 시대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양, 이제는 주류건 비주류건 청춘이란 아파야 제맛이라며 그들의 성장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듯 이야기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ㅡ.ㅡ 갑자기 오늘날 가장 연민해야 할 대상이 마치 20대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런가???
그 와중에 엄기호 선생의 글은, 누구의 인식론적 특권도 내세우지 않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또 '싸잡아묶지' 않으면서 이해를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특별해보인다.
" '요즘 학생들은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말로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도 삭제하는가...."
" 이렇게 부모의 철저한 관리를 받으면서 '행복'하게 성장이 지체 '당할'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러게나 말이다. 30대, 40대, 50대, 60대, 그 어느 세대도 단일한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없는데 비해, 왜 20대들은 한꺼번에 철없는 대학생, 아니면 정반대로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는 불쌍한 세대로 한꺼번에 뭉뚱그려져야 하는가? 멋있는 '탈주'를 감행할 수 있는 바깥이 있는 20대도 있고, 착취당할 권리마저 빼앗긴 20대도 있는데 말이다.... 고려대의 김예슬씨처럼 희망없는 학교를 떠나는 이들도 있고, 중앙대의 노영수 씨처럼 학교에 남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학교폭력을 다룬 장에서, '학교 폭력이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학생들과의 논의를 진척시켜가면서, 학생들이 불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낙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대안적 교육이든, 민주주의적 교육이든, 교육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승해야 할 것, 혹은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라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공감할만하다.
저자가 학생들과 함께 한 '9학점같은 3학점 교양수업'에서 얻은 교훈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그 언어가 도달하는 곳까지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학생들의 사유방식이 반인권적이라고 비판하고 인권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드러내주고 그런 사유방식의 종착지를 같이 유추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 학생이 말한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 나는 이것이 수업이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 (깨달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이건, 제도권이든 비제도권이든,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리라....
#2. 허먼 멜빌 등 [필경사 바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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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허먼 멜빌 외 창비(창작과비평사), 2010 |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시리즈 중 미국 편...
미국 근현대 단편문학의 '엑기스'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한결같이, 형식면에서 독창적이고 다루고 있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이렇게 선진적일 수가 없다...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한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 실험'이기도 하다는 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미 읽어본 익숙한 이야기도 있지만, 아닌 것들이 다수인데... 읽고 있으면 당대의 생활상, 사회상, 그리고 사람들의 고민들, 앞으로 다가올 (다가왔을) 시대의 모습들이 머리속에 와글와글....
1. 너새니얼 호손 - 젊은 굿맨 브라운
2. 애드거 앨런 포우 - 검은 고양이
3. 허먼 멜빌 - 필경사 바틀비
4. 마크 트웨인 -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5. 헨리 제임스 - 진품
6. 샬롯 퍼킨스 길먼 - 누런 벽지
7. 찰스 W. 체스넛 - 그랜디썬의 위장
8. 스티븐 크레인 - 소형 보트
9. 셔우드 앤더슨 - 달걀
10. F. 스콜 피츠제럴드 - 겨울 꿈
어느 하나 빠지지가 않아!!!!!
이 시리즈의 다른 나라 편들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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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불평등 -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조너선 코졸 문예출판사, 2010 |
이책이 쓰여진것은 1990년대 초반, 그래서 어쩌면 20년 전,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 30년이 그러했듯, 이후 20년 동안 근본적 특성이 변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미국에 살던 2000년대 중반 즈음, 뉴욕타임즈에 실린 공교육 현장 기사들은 내눈을 의심케 만들었더랬다.
운동장이 없어서 복도에서 체육수업을 한다니, 재정이 파탄나서 스쿨버스 운영을 중단해버렸다니...
이런 류의 기사들이 참 믿기 어려웠었다.
썩어도 준치라고...그래도 세계 최고 부자 미국인데, 정말 이정도까지???
이와 달리, 주변의 한국 방문연구교수나 포스닥/대학원생들은 미국의 공립학교가 얼마나 훌륭한지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한국에서와 달리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른다고....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둘러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게 아니라, 이 책 안에 있다... ㅜ.ㅜ
예전에 한 세미나에서 누군가 미국사회의 공공의료체계가 부족함을 지적하며, 왜 학교는 공공이 존재하는데 보건의료는 그러지 못할이유가 있냐고 발표하니까, 플로어에서 미국에는 공교육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비유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던게 생각난다... ㅡ.ㅡ
사실, 두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권으로서 같이 가는게 보통이니, 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미국 공교육, 그것도 공교육 일반이 아니라, 가난한, 특히 인종적으로 분리된 지역에서의 공교육 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과서가 모자라고, 냉난방이 안 되는 교실은 불쌍한 축에 끼기도 어려워보인다. 불이 났던, 천장이 없는 건물에서, 때로는 화장실과 탈의실 공간에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해야하고, 교사 급여를 줄 수가 없어서 수업을 단축하고, 학교 안에 물이 새서 강이 흐르는 광경은 도대체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주식거래에서의 정보전달 능력이 세계최고라는 뉴욕 시에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가난한 아이의 행방을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다는 교장의 뻔뻔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아연실색이다...
물론, 당연히, 모든 학교가 이런 건 아니다.
중산층, 백인들, 그리고 선택받은 소수의 아시아계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는 우리가 영화, 드라마에서 흔히 보고, 또 주변의 미국유학자들에게서 이야기 듣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립학교의 재원이 기본적으로 지역 재산세에서 조달되고, 교육구 사이에 재원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데다, 지역 간 인종/계급 분리가 무지무지 극심하며 인종통합교육에 대한 (암묵적) 반대가 그 핵심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지역은 유해산업이 밀집해있거나 경제가 낙후하고, 재산 가치가 낮기 때문에 재산세 납부가 적은데다 (심지어 세율은 가난한 지역이 더 높다!!!),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기업들은 아예 독자적인 타운을 구성해서 스스로를 통치하며 세금을 회피한다. 주정부에서 내놓는 교육구 공립학교 통계연보는 부동산 시장에서 으뜸가는 근거자료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주거지와 좋은 학교, 넉넉한 학교재정의 선순환구조가, 또다른 누군가에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무너져가는 학교, 파탄난 학교 재정의 악순환 구조가 고착화되는 아주 좋은 근거자료이리라...
중산층 학부모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1960년대 후반 인종분리 철폐를 위해 남부로 가는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이들!!!) 들이 자원의 재분배나 통합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어이 없지만, "어쩌면 이들이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들은 가난한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최선의 것을 얻기 바라는 것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사우스브롱크스의 아이들에게는 마찬가지다."
중산층 지역 명문 공립학교 학생들의 경쟁은 '건강에 해로울 만큼' 지나치다며 "뉴욕의 아이들 (가난한 도심지역 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디을 대다수는 너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라는 중산층 학부모의 토로에 대해 코졸은 이야기한다. "불공정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런 진술들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불행과, 불공정이 일으키는 불필요한 비참함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이로써 부자들은 불편함과 파멸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그리고 교육관료들은 교육비가 늘어난다고 환경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며, 돈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교육재정을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이야기에는 펄쩍 뛴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조차 "돈이 교육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경고했다. '돈을 숭배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물론, 돈이 다는 아니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너네 가진 것 좀 내놓으면 안 되겠니?.
이러한 와중에 '마그넷 시스템'이라는 선발제 공립학교는 대안적 체계로 환영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중산층,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백인의 자녀들이다. "이 시스템이 겉으로는 학생의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능력은 계층과 인종에 밀접하게 연관된 조건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일부에서는 이 시스템을 '적자가 생존하는 법'이라며 옹호하지만, 사실 적자생존이라기보다 적자의 아이의 생존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뉴저지 주의 빈곤지역 학부모들이 주 정부를 상대로 교육구간 재정 불평등을 문제삼아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왜 뉴저지의 가난한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부유한 교외 지역의 아이들과 똑같은 기초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7년이라는 세월과 607페이지에 걸친 문서가 소요되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신하면서 기적을 일구어내는 교사들이 있다. 하지만, ".. 자칫하면 이러한 교사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열악한 조건에서도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이 점점 늘어나고, 이따금 이런 논조의 책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격려성 연설과 장밋빛 자기계발서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지만, "희망은 청바지처럼 쉽게 판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해방은 이런 식으로 대중 최면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책에서 인용된 존 쿤스는 "사실, 인위적으로 이권을 부여받은 자손이 한 세대의 최적자 (the fittest)를 순환적으로 대체하는 현재의 상황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 크게 위협하는 것은 없다" 고 경고했다. 평등과 자유는 반드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가슴시리게 다가온 것은 이 부분이다.
코졸은 한 중산층 명문공립학교의 학생토론을 참관한다. 이들은 앨리스워커를 비롯하여 미국의 인종철폐와 사회정의에 대한 훌륭한 저자들의 저작을 모두 탐독했고, 학교재정의 불평등과 인종통합에 대해 아주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제출할 줄 안다. "일정 부분 이들의 능숙함과 총명함은 비현실감에서 나온 듯하다. 불공정 문제는 인간애나 양심의 문제라기보다 기하학적 문제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조금만 더 도전적인 질문을 받으면 '본심'이 튀어나온다. "...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공정한 일이 아니겠냐고 그 학생에게 묻는다. "그래봐야 저한테 무슨 보탬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1968년에는 가장 부유한 교외 지역 학교에서조차 이런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해본다. 급우들은 위장하지 않은 사리사욕을 더내는 이런 발언에 술렁였을 것이다. 1990년 라이에서 그 학생은 아무런 째 없이 이런 말을 할 수있다. 나는 이 흥미로은 학생이 그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데 감탄한다."
코졸이 20여년 전 미국에서 느껴던 이런 감정을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연대의 부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 그리고 '염치'의 상실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이 먼 남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친미관료들과 학자들에 의해 미국식 교육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되는 것 - 이를테면 입학사정관 제도나 AP 프로그램 - 은 불평등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진실로 우려할 만하다.
예전에 한 방송국이 주관하는 고등학생 영어토론 대회 중계를 잠시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주 유창하고, 논리정연하게 국제원조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식민지배의 역사와 사회정의를 이야기했지만,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물론, 그 학생들에게 진심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코졸이 느꼈던 것처럼, 그것이 인간애와 양심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가끔씩 학생 리포트 혹은 토론수업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기적 발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올 때면, 나는 아무리 본심이 이렇더라도 제발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만은 말았으면 하고 바랬었다.
연대는 차마 바라지도 않지만,
연민과 염치....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일까?
이들도 역시 '개념'들과 함께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일까?
ㅜ.ㅜ
너무 황당하고 웃기기는 한데, 차마 웃을 수 없는.... 이런 걸 블랙코미디라고 해야 하나?
차라리 '진짜' 코미디였으면 맘편하게 배꼽잡았을텐데...
#1. 코앤 형제 <시리어스 맨> (2009)
주제는 어쩌면 "세상의 복판에서 온몸으로 시련을 맞다" ?
도대체 근원을 알 수 없게 꼬여만가는 삶 -
하지만 그동안의 '정상적인' '중산층 지식인'의 삶이라는 게,
실제로는 아주 얄팍하고 위태로운 질서 위에 굴러갔던 것...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송두리채 흔들릴 수 있었다는게 나만큼이나 주인공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여...
그 꼬여버린 상황에 명료한 대답이나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오늘의 진리...
슬프지만 진실....
#2. 김재환 <트루맛 쇼> (2011)
이 영화 진짜 엄청나게 웃긴데...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네... ㅜ.ㅜ
엄청나게 비장한 결기로 '고발'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시종일관 웃으며, 쿨하게, 깔끔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모자이크 없어서 너무 좋아...
연예인들부터 우리 김재철 사장님, 그리고 불만제로/소비자 고발에 등장했던 '맛집' 설렁탕 집 방문하여 친히 사진도 남겨주신 그 분까지.... (알고보면 그 분도 피해자 ㅋㅋ)
정말, 쉽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움이 적지않을텐데,
집요하게 문제에 천착하며 이를 알려낸 PD 들 팟팅이요!!!
#3. 찰스 퍼거슨 <Inside Job> (2010)
아, 정말 보고 있노라면 울화, 쓴웃음, 어이상실 - 복합감정 3종셋트가 마구 분출...
정말 해결책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전문가 그룹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금융패밀리의 결속은 너무도 단단하고, 그에 비해 비판자의 목소리는 너무도 미미했다.
영화 보는 내내, 이게 그냥 영화 속 이야기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기업자문 활동으로 엄청난 돈을 챙긴 후 대학으로 돌아온 경제학자의 인터뷰 배경으로,
"Beyond greed and fear" 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사실, 화이트칼라 사기꾼들의 탐욕과 두려움이 일반인만큼만 되었어도 사건이 이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4.
맥락은 다르지만, 즐거움을 준 영화 한 편
정말, 중요한 주인공들 다 날려버리고 (자비에 교수 산산조각, 진 사망, 미스틱과 로그 보통인간 회귀)
매그니토를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 할배로 만들어버리면서 시리즈를 개차반으로 망가뜨렸던 3편의 후유증이 겨우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킥 애스의 감독 매튜 본이 시기적절하게 (!!!) 시리즈를 다시 부활시켜주었다네....
타자성과 정체성에 대한 초기의 문제의식... 근본도 없는 냉전적 갈등....
어린 엑스맨들의 풋풋한 우정과 치기...
무엇보다 [어바웃 어 보이] 에서 많은 이를 사로잡았던 꼬마 니콜라스 홀트의 의젓한 모습...
그리고, 맥어보이와 파스빈더.... 오호... 결코 패트릭 슈튜어트와 이언 맥컬런에 뒤지지 않아.......
이 정도 했는데, 다음 편 또 망쳐버리면 진짜 화낼껴...
크리스토퍼 놀란이 했듯.. 이제 본편을 보여주오, 매튜 본!!
읽은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되돌아볼 시간이 없어서 책상위에 한참이나 굴러다녔다.
원제는 [Crazy Like Us: Globalization of American Psyche]
여기에서 US 는 우리들일수도 있고 United States (of America)일수도 있다.
한국어 부제처럼 그들이 맥도날드 뿐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는, 즉 미국적 심리의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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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에단 와터스 아카이브, 2011 |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생물학적이지만 사회적이고,
심지어 생물학적인 부분조차도 역시 '수용가능한 ' 혹은 '치료가 필요한' 심지어 '사회가 부담가능한' 이라는 잣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볼 때, 섭식장애,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전 지구적 유행 앞에서 사실은 심각한 의심을 했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환원론을, 다른 한편으로 의료화 (medicalization) 을 경계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이런 문제들을 그동안 숙고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서양의학/과학기술 트레이닝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서인것같다.
저자가 서문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는 말에 심하게 공감한다.
#.1.
홍콩의 거식증 인식과 사회적 유행의 진화과정에 대한 고찰은 self-fulfilling prophecy로 작동하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의 사회화 과정을 잘 드러낸다.
"... 그래서 문화적 틀이 없을 때는 소수의 환자들이 진기한 행동을 보였지만, 거식증이나 하지마비 같은 새로운 히스테리성 증상이 널리 채택되면 '그로 인해' 그 장상이나 장애가 공식적으로 '발견'되고 문화적인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 서양식 진단을 수입함으로써 환자들과 의사들이 그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경험자체를 변화시켰다...."
".. 우리의 서양식 성인 개념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급자족에 높은 가치를 두고, 그에 따라 서양 청소년의 질풍노도는 대부분 독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실랑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많은 전통문화에서, 특히 아시아에서 개인의 독립은 성년의 목표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홍콩의 거식증은 발견되었다기보다 차라리 인위적으로 퍼뜨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한국은 어떨까?
#2.
스리랑카의 쓰나미 재해 이후, PTSD 라는 2차 쓰나미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자 달려간 미국의 수많은 심리전문가와 상담사들의 활동에 대한 묘사는 resilience 혹은 회복력이라는 현지인들의 고유한 속성에 대한 무지, 문화인류학적으로 깊이있는 상호소통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통역요원조차 갖추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지역에 '짐을 풀은' 공급자 마인드 혹은 계몽주의적 (어쩌면 폭력적인) 시각을 전형적으로 잘 드러낸다. "... 이렇게 볼 때 누구보다도 취약한 사람은 폭력과 빈곤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는 사회와 문화권에서 온 서양상담사들이었다"라는 표현은 이 상황이 갖는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암암리에 현지의 견해들과 관습들이 열등하다는 파괴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 저자들의 현장 경험으로 볼 때 이 메시지는 식민주의를 통해 이식된 열등감을 강화시키고, 그들 자신의 긍정적인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다른 의료인류학자의 이야기도 경청할만하다. "세계적으로 재난의 대부분은 서양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지역으로 가서 그들의 반응을 병으로 취급한다. 우리는 '당신들은 이 상황에서 생존하는 법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들의 문화적 서사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것을 부과한다. 이는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끔찍한 예다."
#3.
정신의학자/심리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타파해고자 노력했던 이들은 정신질환이 다른 신체질환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특정한 유전적 기질, 화학적 불균형, 뇌질환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인슐린이 작동 안하면 당뇨병이 생기는 것처럼, 뇌의 특정화학물질이 제대로 작동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길 뿐이다. 그러니 색안경을 쓰고 이들을 쳐다보지 말아라....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설명이 오히려 일반인들로 하여금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를 멀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은 '그럼 어째야 하나'는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나도 그래왔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면서, 편견과 심리적 장벽 때문에 정신과 진료를 꺼려하는 이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서비스 받기를 독려했던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랑에 빠지거나, 질투에 사로잡히거나, 아이와 놀면서 기쁨을 느끼거나, 종교적 희열을 경험할 때 우리는 친구들에게 그경험을 뇌 화학물질들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합류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질환자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낙인을 줄이려 할 때마다 뇌 화학작용 이야기는 계속 이용될 것이다. 환자 개인의 지각을 축소하고, 그 지각이 '그저 화학작용'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치욕스러울 수 있을까?"
#4.
"일본의 높은 자살률은 우울증 치료가 부족함을 가리키는 증거라는 것, 서양의 SSRI들은 과학적으로 진보했다고 입증된 치료제라는 것, 1차진료의사들은 정신질환 진단을 도와주는 간단한 3분 검사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우울증의 기준틀에 맞지 않는 환자라도 아픈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 일본인들은 업무 및 산업화와 관련된 사회적 스트레스를 SSRI로 치료해야 할 우울증의 조짐으로 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는 GSK가 일본에 SSRI를 출시하기에 앞서 진행한 전문가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들이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제약회사의 메가마케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짐작은 했지만) 정말 마음 편치 않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효과적이라고 확신하는 것같았고, 어느 누구라도 그것들의 가치를 의심하면 당황했다.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의약산업은 자신의 마케팅 활동과 윤리적인 목표를 잘 연결시킨다. 그 결과 질병을 '기회'로 여기는 이윤추구 계획과, 인류의 건강이 그 (화학물질들의) 균형에 달려있다는 윤리적 관점이 신랑과 신부처럼 결합한다. 이 때문에 대단히 공격적인 마케팅 담당자들이라도 자신이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게 된다."
#5.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에이즈라는 실체는 존재하지않는다. 서구 강대국의 음모일 뿐이다"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조하는 것은 성찰과 회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섭식장애 전문가로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한 교수는 그의 연구가 "그가 뿌리뽑기를 원하는 바로 그 질병을 잠재적으로 전파해왔다고 걱정한 적은 없냐"는 질문에 침울한 긍정의 답변을 보낸다.
어떤 정신질환, 혹은 '질환'이라 명명되지 않은 어떤 심리적 고통을 인식하고 도움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 - 근대 서구사회라는 매우 구체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생물학이자 사회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틀에 맞추어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려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특히 편견을 줄이기 위해 정신질환은 온전히 생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 누구나 앓을 수 있는 가벼운 질환으로 '만연'시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최근에 SERI에서 스트레스 산업의 시장규모가 수 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비관인지 낙관인지 모를 보고서를 내놓았고,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GDP 올라가서 누구는 참 좋겠다...
날로 스트레스가 커지는게 우리사회라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 만일 인구집단 내에 심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비현실적인 사회적 요구라면 왜 개인이 알약을 복용해야 하는가?..."
좀 있다 대구 출장가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모닝포스트....
#1. < 사막별 여행자 >
법정 스님의 추천 도서 목록에서 발견한 책이다
![]() |
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 문학의숲, 2007 |
이 책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게,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쫌 맘 불편한 구석도 있다.
일단 모티브 자체는 아름답고 놀랍다.
사막의 원주민 투와그레 부족 소년이 우연히 서구 관광객과 마주치는데
그들은 무려 '어린왕자'를 흘리고 떠난다.
그것을 읽게 된 소년은 완전 깜놀.....!!!
소년은, 이제, 사막에 어린 왕자가 혼자 남겨졌던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있었다고 이야기해주러 프랑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소위 '물질문명'을 체험하면서,
투와그레 부족의 영혼충만한 삶에 비추어 도시인들에게 살아가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전한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소년의 경험담이 작가의 실제 인생사라는 점이다.
나이 (가 성숙의 기준은 아니지만)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하고 깊이 있는 성찰이 담긴 잠언 같은 이 글들은, 수많은 차도남 차도녀들의 삶을 뒤흔들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엇을 것이다.
이를테면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투아레그인들은 다르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잃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것이다."
"문명국가들에서는 자기 존재의 유일함이 지니는 가치 안에서 비상하는 열망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이상'이라 부른다"
"도망치는 삶은 여행하지 못한다"
"여행이란 많은 타인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에게서 자신으로 떠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불편했던 건 이런 거다.
mother nature 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목가적 유토피아를 되뇌이는 모습? 도시는 이러저러한데 비해, 사막과 자연은 이러저러하게 다르고, 또 문명인의 삶은 이렇게 각박한데, 원주민/투와그레족의 삶은 이렇게 풍성해.... 도시인들은 왜 이렇게 살지 못할까, 왜 이렇게 삶을 바라보지 못할까....
이건 뭐,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니? 생각을 좀 바꿔봐.... "하는 계몽의 또다른 버전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더구나 저자가 체험하지 못했던, 계급적대, 민족/국가 혹은 봉건주의/가부장주의의 폭력성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대인들의 '뿌리없는' 삶을 비판하는 대목은 안타깝기마저 하다. 가족, 출신배경, 민족/국가를 떠나 독립된 한 주체로서 '개인'을 인정받는 것이 많은 사회들에서, 특히 여성들과 낮은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서 어떤 의미였는지 저자는 알고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의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한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가족이다. 가족은 우리의 반석이다..."
"... 우리의 힘은 우리가 태어난 곳과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조상을 존경하고 찬미하기에 우리 자신을 믿는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고독한 삶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 사람들이 더이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란 끔찍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수천의 사람들이 프랑스의 최저임금보다도 적은 돈을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이 책이 각박한 도시인들의 삶에 한줄기 바람같은 위안과 휴식을 주었다면,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할 것 같다.
하지만, 역사적/사회적 맥락 없는 '아름다운' 잠언으로는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미덕은... wandering spirit 을 다시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ㅡ.ㅡ
#2. <꾸뻬 씨의 행복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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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오래된미래, 2004 |
예전에 읽었던 에릭 와이너 <행복의 지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서 좀더 가벼운, 그리고 심지어 '소설'이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자신을 모사한 주인공을 내세워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나선 여행담...
귀엽고 (?) 가벼운 문장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을 거리를 던져준다. (구태의연한 클리세들이 없다고는 말 못함... ㅡ.ㅡ)
주인공이 소소한, 때로는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매 순간 기록한 행복의 조건 스무나믄 가지들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데, 인간의 행복세계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생활인으로서 가장 와닿는 것은 이런 거다...
행복한가 라고 다른 사람한테 질문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 질문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지적 말이다.... 이런 시덥잖은 (?) 질문에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빛들을 많이 보았더랬다.....
그리고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라는 것...
물론 이것이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예하지 않는 삶의 중요성, 수많은 순간에서 trade-off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이 역시, 읽고 나니 길떠남을 부추겼다.
슬슬... 준비를 해볼 시간이 된 것일까? 흠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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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2008 |
#1.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서 자운선생이 오랜만에 마주친 성찬을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차가 막혀서 늦었다고 말하지 마라!
바빠서 연락 못했다고 말하지 마라!
요즘엔 차 안 막히는 날이 없고 바쁘지 않은 날이 없는데 그건 핑게가 아니야 "
맞아....ㅡ.ㅡ
#2.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
![]() |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황소자리, 2004 |
류비셰프처럼 사는게 정말 좋은 건지는 모르겠당...
시간을 굳이 '정복'하는 것이 행복의 요건인거 같지는 않은데,
또다른 한편으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스스로를 위한 변명으로 쓰이는 거 같아, 가끔씩 '시간'의 존재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학자,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학자는 학자로서 아무런 가망도 없습니다. "
헉.......................ㅡ.ㅡ
최근에 본 영화 두 편, 외양은 엄청나게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존의 전형성을 전복하는데다,
바탕에 '소통과 교감'의 중요성을 강조한게 아닐까 싶다.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
#1. <황당한 외계인 폴> 2011년 (그렉 모폴라 감독)
근자에 본 영화들 중에 가장 발랄하고 웃겼던 작품
세 주인공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그리고 폴 역의 세스 로건)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단다.
외계인 폴은, 한편으로 우리 통념이랑 너무 똑같아서 ('기존' 외계인과 똑같은 외모, 그리고 여타의 영화에서처럼 영어를 쓴다는 ㅋㅋ) 미지와의 조우를 기다리던 자에게 한없는 실망과 허탈함을 안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통념이랑 너무 달라서 (너무 터프하고 외설적이야 ㅋㅋ) 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든다.
그동안 인구에 회자되던 모든 외계인 괴담들을 총망라했고 (이를테면 항문에 probe를 집어넣는다, 앨비스 프레슬리 살아있다 등등) 또 SF 를 둘러싼 독특한 팬덤을 아주 재간있게 비틀어놓은지라 (코믹콘에서 수여되는 상이 Hugo와 쌍벽을 이루는 Nebular award 가 아니라 Nebulon award, X-file 의 멀더캐릭터나 스필버그 ET 컨셉은 모두 폴이 조언해준 것이었어!!!) SF 를 좋아하는 자라면 정말 즐거워하며 볼 수 있는 영화...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하는 우리 시고니 위버 왕언니... ㅋㅋㅋ
정부는 요원을 통해 폴을 추적하고,
우연하게 이들과 동행이 된 애꾸눈 처녀 때문에
복음주의 광신도 아버지가 이들을 추적하고,
정규직 요원자리를 차지하고픈 꼬붕 요원들이 다시 또 이들을 추적하고...
엄청 정신없는 추적극과 대소동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긍정하는 따뜻한 마음..... 이라고 하면 내가 오바쟁이?
#2. <파수꾼> 2011년 (윤성현 감독)
영화 보는 내내, 전형성에 길들여진 나의 무의식적 통념과 배반이 이어졌다.
이건 나만이 아니라 같이 본 도끼도 호소한 증상이다.
첨에는 누가 죽은 줄 몰랐다,
다음에는 괴롭힘을 당하던 희준이가 죽은 줄 알았다,
그리고는 기태 아버지가 아이들을 쫓아다니면서 무언가 어두운 음모가 밝혀질 줄 알았다.
아이들의 어정쩡한 말투에서 분명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했다.
기태가 다른 친구들로부터 '복수' 의 징벌을 당한거라고 믿었었다.
동윤이와 기태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순간에도
동윤이의 여친 세정이에게 기태 일당이 무슨 대단한 해꼬지라도 한 줄 알았다.
심지어 집단성폭행이라도 한게 아닌가 의심했다.
동윤과 기태가 밤을 지새우며 수다를 떨 때도,
'나도 한 잔 줘' 하는 대사에 당연히 술을 줄 것으로 알았다.
물병을 보고도 믿지 못해, 저것들이 물병에 술을 따랐나 했다.
애들이 쌈박질 하는 장면에서도 체인이나 주머니칼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근데 그냥 치고받고 싸우기만 했다.
나보다 한술 더뜬 도끼는 이 남자아이들이 서로 사귀는 줄 알았단다... ㅡ.ㅡ
그래서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한 아이가 세상을 뜨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들의 파국은 그저 사소한 오해와 미숙한 대화, 상처받은 여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우리는 영화적인 '드라마'와 '스펙타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들은 차마 영화적 갈등의 요소가 될 거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떠오른 한 마디는 "애들은 애들이다" ....
내가 너무 때묻은 존재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니... ㅡ.ㅡ
겉모습은 마초에 야생마 같았지만
아이들의 속마음은 너무 여렸고,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알지 못했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도 모호할 뿐더러
살아남은 아이들이 기태 아버지를 만나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은
'저런 영악한 놈들!'이 아니라 정말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 선생이나 부모는 그저 주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이게 현실에서도 사실이리라.
파수꾼 한명 없는 비정한 안개 속 세계에 던져진 아이들.....
서로라도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짜임새가 빼어났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기태 역을 맡은 배우는 박해일 동생인 줄 알았음)
감독과 배우들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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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맛쇼 보러 가야겟네요.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