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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한 봉다리]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말걸기["여자는 재미로 사랑을 하지 않아요."] 에 관련된 글.

아래의 글은 야스피스가 월간 <금비>에 쓴 원고이다.

수다 중 '문'이 '말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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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한 봉다리]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영화를 보면서 그가 생각났다. 몇해 전 ‘성적 소수자’를 취재할 무렵 ‘르포’를 맡았던 나는 종로의 게이 커뮤니티 지도를 인터넷에서 찾아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공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성 동성애자 인권단체 ‘친구사이’의 도움을 얻어 처음으로 소개 받은 게이가 그였다.
종로3가 뒷골목의 한 게이 카페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는 “기사에 이름이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을 분명히 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일류대 경영학 박사였던 그는 뜻밖에도 유부남이었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게이임을 알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히 들어간 동성애 사이트에서 동성애자들과 채팅을 하면서 그는 불현듯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자각했다. 그날 이후 아내와의 관계는 틀어졌고 우연히 그가 들어갔던 사이트를 보게 된 아내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난 참 불행한 인생”이라며 한탄을 했지만 사귀고 있는 애인을 소개하면서는 행복한 웃음을 보였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번에 <금비>와 함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본 주인공은 민주노동당 서대문구위원회 소속 당원인 강00, 조00, 문00 등 세 명이었다. 동성애자가 한 명 정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30대 중반인 이들 셋은 모두 이성애자다. 아니다. 셋은 모두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단정은 섣부르고 구분은 무의미하다. 단지 이들 중 한 명은 이성과 결혼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이성과 열애중이며, 또 다른 한 명은 현재 연애중은 아니지만 “자아를 잠식 당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할 따름이다.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남성성이 짙은 카우보이들의 세계를 다룬 슬픈 ‘러브스토리’이다. 도저히 동양인이 만든 영화라고 보기 힘든 ‘아이스 스톰’과 ‘센스 앤드 센서빌러티’로 미국인들을 놀라게 만든 이안 감독은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와호장룡’을 만들어내더니 이번 영화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의 감독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에 빠져보자.
 
20세 청년인 에니스 델 마와 잭 트위스트는 1963년 여름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방목일을 하게 된다(오해를 피하자면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닌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와이오밍주는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에도 ‘브로크백 마운틴’이란 산은 없다. 캐나다에서 찍은 이 영화 때문에 와이오밍주 관광청 전화통만 불이 나고 있다는 후문이다.).
 
여름 한 철을 같이 보내던 도중에 이들은 짧은 사랑을 나누게 되고 가슴 속으로만 타들어가는 이별을 했다. 약혼녀였던 알마와 결혼해 딸 둘을 낳은 에니스는 여전히 가난한 품팔이 인생을 살았다. 잭도 농기계상의 딸 로린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장인의 사업을 도우며 살았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잭이 에니스에게 엽서를 보내 이 둘은 운명적인 해후를 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한 그들은 매년 한 두 번씩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나면서 사랑을 나눈다. 에니스의 아내 알마는 남편이 친구라던 잭과 처음 재회하면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둘은 이혼을 했다. 에니스는 잠시 캐시와 사귀지만 결코 관계를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한편 ‘자기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 남편’을 둔 로린은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할 뿐이다. 더 이상 영화 줄거리를 얘기했다간 스포일러로 찍힐 것 같아서 영화 얘기는 여기까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지만 엔딩곡 두 곡이 끝날 때까지 극장의 불은 켜지지 않았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두 노래를 듣고 나서 우리는 말없이 극장문을 나섰다. 늦은 밤 힘겹게 찾아 간 맥주집에서 나눈 이야기는 이렇다.

 

 

- 강 : 남자가 보기에 여자들이 웃길 것 같아. 캐시가 에니스한테 “여자는 재미로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남자도 그럴 것 같아. “나도 그런데….” 이혼한 다음에도 추수감사절 날 초대해서 칠면조 먹이고, 옛날 얘기 꺼내고 말이야.

 

- 문 : 알마가 불쌍해.

 

- 강 : 연애의 대상만 다를 뿐이지 연애의 코드를 잘 따라간 영화야. 기다리는 사랑은 너무 슬퍼. 애인한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웃음)

 

- 조 : 산에 들어갔을 때 둘이 사랑에 빠지기 전에 뭔가 복선이 안 깔려있었던 것 같아. 너무 충동적이었던 거 아냐?

 

- 강 : 원래 충동적인 거야. 사는 얘기 나누고 서로 의지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 조 : 굉장히 충동적이었어. 운명적 만남이라면 뭔가 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좀 당황스럽더라구.

 

- 문 : 그러니까 사랑이지. 운명적 사랑? 어떻게 사랑이 운명적일 수가 있어? 게이가 둘 있다고 해서 연애를 한 게 아니야. 한 순간에 필이 꽂힌 거지.

 

- 조 : 잭은 충동적으로 시도했어. 에니스는 처음에 놀라고 당황하다가 순식간에….

 

- 강 : 이해하고 못하고 문제가 아니라 영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 조 : 에니스가 어렸을 적에 마을에 있던 게이가 잔인하게 살해된 거를 봤잖아. 그런 공포 때문에 에니스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지.

 

- 문 : 그러고 보내니까 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만약 가정을 꾸리지 않고 연애를 했다면 헤어졌을 거야.

 

- 강 : 근데 남자들끼리지만 둘 사이에 사회적 관계가 설정되지 않아? 한 명은 식사 준비하고 천막을 지키고, 다른 한 명은 밖에서 양떼를 몰고 말이야.

 

- 조 : 둘한테 성역할의 구분이 있었어. 중간에 서로 역할을 바꾸는데 성역할에 따라 바라보는 시야도 달라지지.

 

- 문 : 잭이 여성적이야.

 

- 강 : 감정이 풍부하게 나오잖아. 에니스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고 에니스가 난감해 하며 돌려보내니까 울면서 가잖아. 그나저나 배경이 너무 예뻐.

 

- 조 : 사랑에 빠지려면 그런 데 있어야 하나.(웃음) 에니스가 잭의 제안을 거절했던 거는 어떤 것 때문일까.

 

- 강 : 뭔가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잖아. 성장배경에도 나오고 부모가 일찍 죽고 어렸을 때 형과 누나가 결혼해서 떠나고….

 

- 문 : 그렇게 가족한테 버림을 당하니까 자기는 가족을 못 버리는 거지.

 

- 강 : 확신도 없을 거고. 외로움에 너무 익숙해져서 딸이 같이 살자고 해도 못 산다고 하잖아.

 

- 조 : 둘한테 직접적인 억압을 없었던 거잖아.

 

- 강 : 심리적 억압이었지. 근데 이게 숙명적인 사랑일까.

 

- 문 : 숙명이나 운명? 그런 건 다 환상이야. 당사자에겐 어쩔 수 없는 거야. 솟구쳐 나오는 감정….

 

- 강 : 나도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영화에서는 ‘사슬’이라고 나오지. 어쩔 수 없는 그런 거.

 

- 조 : 오지게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엮이는 거지.

 

- 강 : 결혼식장에 가면 각 커플마다 정말 험난 파도를 넘고 그런 우여곡절이 있어. 근데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나면 일상의 감정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 하지만 잭과 에니스는 그게 아니니까 더 애틋하게 되는 거야.

 

- 문 : 너무 슬프잖아.

 

- 일동 : 그래.

 

- 문 : 잭이 에니스한테 같이 살자고 했던 거랑 (이성애자인) 내가 어떤 여자한테 같이 살자고 하는 거와는 달라. 잭이 죽고 나서야 에니스는 맹세한 거지. 잭이 자기 셔츠 안에 에니스의 셔츠를 담아놓았던 것처럼 평생 자기 셔츠 안에 잭의 셔츠를 품고 살 것을 말이야.

 

 

다시 드는 생각. 동성애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이성애자들이 차마 느끼지 못하는 사무치는 감정에 복받쳤을 것 같다. 아니, 게이들의 사랑이 현실과 달리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진 것을 보고 허탈해 할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슬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취재원이었던 그가 다시 떠올랐고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엔딩 곡 “The Maker Makes”의 음률이 생생했다.


“이 사슬을 끊고 네게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조물주는 또 다른 사슬을 만드네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너를 향한 사랑의 눈금을 더 높이 그으며
너를 잊지 않으려 애쓰네
하지만 조물주는 사랑의 벽을 높이네
슬픈 운명의 사랑이여
오 주여, 저는 압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이 제게 어떠한 행복을 주었는지
만족하고 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