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없네
역사가 없네
정철훈
도시는 얼마나 불온한가
도시는 얼마나 우울한가
도시는 음란한 꿈이요, 음란한 교환가치여서
낡은 시민아파트가 매일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 사이 초등학교 교정은
뜨거운 모래알 위로 꾸벅꾸벅 졸고
길은 온통 아스팔트에 덮여
죽음을 죽음보다 무겁게 누르네
우리는 도시에서 성장하지 않고
다만 이사 몇번을 갔을 뿐
일곱 평에서 열여덟 평으로
스물세 평에서 서른두 평으로
너덧 번의 이사가 나이처럼, 나이의 성장처럼
우리 생활의 전부였으니
몇번의 전출과 전입, 몇번의 이직과 전직
몇번의 사랑과 이별이 우리 삶의 전부였으니
하! 역사가 없네
부유하는 것은 역사가 아닌데
달리지 않는 철마는 철마가 아닌데
우리는 몇번이나 역사가 아니어야 하나
하! 유구한 흐름이 없네
눈빛이 없네, 고뇌가 없네
뼈와 살이 녹는 내통이 없네
이사와 이전과 이주와 전이의 역사에는
생활이 없네, 생명이 없네, 거주가 없네
유랑하는 삶은 가벼운 발걸음만큼
스쳐가는 일상은 가벼운 보행만큼 역사가 아닌데
거리에도, 방안에도, 농짝에도, 책상에도
도청에도, 민원실에도, 우리들의 심장에도
하! 역사가 없네, 눈물이 없네
이제 어린 두 발을 감쌌던
배내옷에서부터 역사는 다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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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에 미니홈피에 베껴둔 시인데...
어디서 어떻게 읽고 옮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철훈 시인이라면 누군지 조금 알고 있다.
K일보의 문학전문기자인 그는 얼마 전 두번째 소설을 펴낸 소설가이기도 하다.
편집자들이 인정할 만한 서평을 쓰는(책 내용을 정말 이해했다는 뜻이다)
몇 안 되는 출판 담당 기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시를 제대로 찾아서 읽어본 적은 없다.
다만... 서울의 주민이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내게도 이사의 경험이 내 삶에서 생각지도 않을 만큼 많은 부분을 결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이삼 년 전부터 해온 터라... 다시 옮겨 적는다.
(아니, 어쩌면 이 시는 잊었지만, 시의 내용을 가지고 마치 내 생각인 양 계속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한 살 때, 일곱 살 때, 열세 살 때, 열여덟 살 때, 스물두 살 때, 스물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이사를 다녔고... 스물여덟에 독립하고 2년 후에 또 한 번 이사했다.
총 아홉 번의 이사... 게다가 끝난 것도 아니다. 결국 두자릿수가 되겠지.
유목민으로 태어난 적도 없는데 뿌리가 없는 인간인 나는...
정주할 공간은 둘째 치고, 정주할 관계들조차 변변치 못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Y군과 M군 같은 관계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또 늘 그런 관계들을 꿈꾸고, 매달리고, 상처받기도 했나 보다.
나보다 딱 1년만 먼저 죽으라던... 그런 약속은 왜 했을까.
평생 보자는 그런 말들에 왜 그리 설렜을까.
왜 그저 그 순간 함께 있는 즐거움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
꼭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그 관계들을 망쳐야 했을까.
가깝던 것들은 멀어지고, 먼 것들은 아주 천천히 내 곁에 왔다가는 급속히 사라진다. 혜성처럼.
최근에 내 스스로 과거에 무덤덤해진 것을 느끼면서...
(아팠더라도) 그래도 과거인데... 생각하고 보관했던 물건들, 일기장 등을...
방도 좁은데 없애 버릴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기엔 아직 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럼에도 다시 펼쳐 보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읽어보면 재미있겠지만... 더 이상 내 삶을 움직이지는 못하니까.
그건 지금 내 삶의 양태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삶의 형식이 그러한 시대 탓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것들이 내 역사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부유하는 나는 눈물이 없는 겔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울 준비가 되어 있기는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