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귀례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에 관련된 글.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할머니 초상을 치렀다. (아주 먼 훗날이 되길 바라지만, 어찌나 눈물이 없는지 부모님 초상 때도 안 울까 봐 사실 걱정이다.). 요새 읽고 있던 블랑쇼 소개서에서 마침 죽음에 관한 항목을 읽고 있었는데.... 할머니 살아생전 자주 찾아뵙질 않아서인지, 어쩌면 할머니 자체가 이미 내게 상실된 존재라 입관 절차를 지켜보면서도 "왜 다른 사람들 다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날까" 그런 생각만 했다. 늘 염려하듯이, 난 너무나 머리가 발달한 인간이라 그런걸까? 분하고 서러울 때는 울 줄 아는데, 슬퍼서는 못 우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래서. "울면 바보"라고 키우셔서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여하간... 살아생전 효도는커녕 손녀스러운 적은 한번도 없는 내가 나서기엔 교만스러운 생각이지만, 이번 참에 (사실 잘 모르지만) 할머니 전(傳)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역사를 문자로 남기는 게 울 줄도 모르는 손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릴 적부터 들은 온갖 단편들을 한번 모아놓는다. 사실 할머니한테 들은 건 거의 없다.
조금씩 쓰다가 할머니 49제 때 외가에 가서 이야기도 조금 더 듣고, 글을 적으려 했는데... 49제 날이 토요일인 줄 알았는데 금요일이어서... 미리 회사에 말을 해두지 못한 탓에.... 못 갔다. 그런 채로 또 한 달 넘은 시간이 지나다... 오늘 불면의 밤에 포스팅한다. 할머니 평안하셔요.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故人 박귀례는 1922년에 태어났다. 개띠다. 제부도 근방의 남양만에 살던 부모는 땅 한 평 없이 가난했다. 염전에서 일하던 부모는 부지런했다. 딸이 여섯이나 본 다음에야 아들을 낳았다. 아들 아래 또 딸을 하나 두었다. 그리 많은 자식을 두었으면서도 염전에서 소금땀 흘려 번 돈으로 조금씩 땅을 샀다. 식민지 시대에 어찌 땅을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농사 지어 일곱 자식을 밥을 먹일 만큼 땅은 불어났단다.
넷째 딸이던 귀례는 스무 살이 채 못 되어 경성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하던 제법 유복한 집안이었다. 그녀의 큰딸이 기억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을지로 부근에서 이층집에 살았다. 남편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시누이도 곧 시집을 갔다. 귀례는 1941년부터 1949년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았다. 딸이 셋이었고, 넷째가 아들, 다섯째는 또 딸이었다. 큰딸은 꽤 똑똑했다. 해방 전에 배운 일본어를 40대까지 기억할 정도였다.
전쟁이 났다. 남편은 무슨 병인지 배에 물이 가득 찼다. 거동을 못하는 남편을 방에 눕혀두고, 인쇄소며 집 문서를 남편의 친구인 공장장과 함께 집 마당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셋째와 넷째를 잃었다. 피난 갔다 돌아오니 남편은 역시 세상을 떠났고, 집 마당에 묻어둔 집문서는 공장장이 파서 내다 팔은 뒤였다.
30대 초반의 청상, 중학생이 된 딸 둘, 그리고 또 어린 딸.... 아들이 없어서인지, 그 시절 흔치 않게도 재혼을 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터인지라 그랬겠지. 친정에서 권했는지, 시집에서 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친정 근처인 화성에 사는 홀아비와 재혼을 했다. 이미 중학교에 들어간 연년생 딸 둘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막 소학교에 들어가야 할 막내만 데리고 화성으로 갔다. 중학생이던 큰딸은 시집 가는 엄마를 배웅하는 버스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재혼은 해도 좋다. 호적만은 옮기지 마라. 생활환경조사서에 보호자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바락바락 따졌다고 한다. 그런 딸을 두고 재혼한 그녀는 평생 큰딸을 어려워했고, 이혼 후 여러 가지로 부침을 겪던 큰딸이 요양원에서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감히 어찌 죽었냐고 묻지도 못했다. 명절에 찾아간 막내딸 소생의 손녀에게 자식들 몰래 한두 마디 물어본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난했던 새 남편은 장남이었다. 전처 소생의 딸 하나, 아들 하나에, 결혼한 시동생 외에도 아직 10대인 시동생이 있었고, 서울에서 데려간 막내딸.... 재혼에서 그녀는 아들 셋을 낳았다. 살기는 어려웠다. 땅 한 평 없었다. 산에서 냉이를 캐다가 장날이면 수원에 내다 팔았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데리고 살던 막내딸은 중학생이 되자, 마을 근방에서 국민학생을 가르치는 입주 과외교사로, 고등학생이 되어선 귀례의 막내 여동생(귀례의 초혼 못지 않게 부유한 집안에, 그것도 성격 좋고, 책임은 그다지 없는 막내아들에게 시집 가서 딸 셋에 아들 둘을 두었다) 집에 사촌 동생들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간다.
초혼에서 남은 딸 셋과 재혼에서 얻은 아들 셋은 좀 서먹했다. 엄마 없이 서울에서 큰 딸아이들은 제 힘(과외 선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거나 문턱을 밟기라도 했다. 화성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아들들은 잘생기고, 기운도 좋았지만 모친과 어딘가 불화했다. 그 시절에 재가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은 큰아들을 괴롭혔다. 큰아들은 그 콤플렉스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서야 벗어났다. 운동을 잘하던 둘째 아들은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고, 운동으로 대학 입학 자격도 얻었지만, 등록금을 대줄 사람이 없었다. 이름만 누나지,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도 넘고 함께 산 적도 없는 큰누이나 결혼 직후 캐나다로 이민을 간 작은누이에게는 말도 못 꺼내고... 그나마 유년을 함께 보낸 막내누이에게 말이나 해볼까 하고 서울로 쫓아 올라왔다. 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앞날이 불안했다. 둘째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사료회사 영업부장이던 남편이 급성 간염으로 쓰러져 회사를 그만두고 살 길이 막막하던 참이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뒀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을 의붓동생에게 차마 하지는 못했다. 그 사연 역시 어머니 초상을 치르고서야.... 30년 전에 대학을 가고 싶었다는 말에... 조카가 그때 울 아버지 사경을 헤매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직장이 없을 때였어요.. 라고 말해 줄 때까지... 동생은 몰랐다.
환갑을 앞두고 재혼한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 급작스러운 죽음에 놀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시댁 친척들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의부의 사망 소식을 서울의 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세살배기 셋째 딸의 둘째딸(어린 Y양)을 잠시 맡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장례가 끝난 후에야 큰아들 편에 아이는 서울로 보내졌다. 캐나다로 이민 갔던 둘째 딸이 강도를 만나 피해망상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남편과 별거하고 서울의 큰딸 집(셋째 사위가 급성 간염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갓 구입한 집을 세 주고 박봉의 교사로 전업하는 바람에 이미 셋째 딸이 친정살이를 하고 있던)으로 돌아온 것은 그 2~3년 뒤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세 딸은 2년여를 함께 살게 되었다.
유달리 똑똑하던 첫딸은 불임을 이유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당하며 별거중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듯싶던 셋째 딸네 가족이 남편의 직장 근처로 이사해 나가자 너무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던 직장에서 유리 천장에 부딪히고, 동생네 대신 들어온 세입자는 속썩히고, 정신병을 가진 동생과 단 둘이 살던 큰딸마저 결벽증에 피해망상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 뒤로 20년 넘도록 고인은 딸을 열 번이나 만났을까. 정신병원과 셋째 딸네 집을 번갈아 가며 살던 큰딸은 끝내 요양원에서 어머니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둘과 자식 셋을 앞세우고도, 그녀는 씩씩했다. 장날이면 산에서 나물 캐다 판 돈을 모아 땅을 샀고, 화성 지역이 개발권에 들어서자 70대에 아파트로 이사했다. 멀리 사는 딸들, 어머니와 뭔가 어색했던 아들들 대신 스물한 살 나이에 시집와 사우디아라비아로 3년 간 건설노동자로 일하러 간 남편보다 시어머니에게 유난히 살갑던 큰며느리와 정붙이고 살았다. 큰아들 내외에게서 본 유일한 손자는 할머니를 유독 따랐다. 스포츠맨 정신으로 사교성 좋은 둘째 아들은 대기업 계열 화학공장에서 10년 넘게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새침한 미인형인 둘째 며느리는 딸을 셋 낳았다. 둘째 내외는 아이 셋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빴다. 고인을 모시는 일은 고스란히 큰아들 내외의 몫이었다. 등치 좋던 셋째 아들은 40대가 되도록 자리를 잡지 못하고 주먹으로 먹고 산다거나 남의 돈을 대신 받아준다거나... 하는 소문만 도는 사이, 이혼을 했고, 계속 여자가 바뀌었다.
자식들에게만 연연했다면 그녀의 삶은 한 많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칼 같은 성격에 거침없는 입담으로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파트 노인정을 주름잡았다. 전실 자식이 있는 집에 재혼해서 들어온 큰며느리 자리... 결코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었을 텐데도... 나이 어린 동서들은 그녀를 따랐고, 그녀의 초상을 치르면서도 "우리 형님은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어."라고 기억했다.
8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력은 쇠했고, 노환성 치매가 왔다. 아들며느리 모두 직장 생활을 했고 노인정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임에도 낮에는 혼자 보내는 생활이었다. 2년 이상의 병수발에 아들내외는 힘들어했다. 함께 모시자고 나서는 형제는 없었다. 다들 자기 살기가 바쁘고 힘들었다. 사망 일주일 전 고인은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들을 모두 알아보고, 곡기를 끊었다. 하루 물 한 모금이 섭식의 전부였음에도, 엄청난 양의 대소변을 보면서 순식간에 말라갔다. 내부의 생명력을 스스로 배출하듯이. 그리고 철야 근무로 외박하다가 사흘 만에 하나뿐인 손자가 새벽 2시에 들어온 날, 그녀는 30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박귀례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어요) 할머니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