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는 8만1천명 늘어 2021년 2월(20만1천명) 이후 3년2개월 만에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실업자는 지난해 11월 이후 6개월째 증가세다. 실업률은 3.0%로 1년 전보다 0.2%포인트 상승했다. 실업자 증가세에 대해 서운주 통계청 사회통계국장은 “2022~2023년 코로나 극복으로 실업자가 감소한 기저효과가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설명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4.05.18.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3년 연속 참석하면서도 대선 시기 약속했던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여야가 한 목소리로 이 문제에 힘을 모으겠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대통령의 기념사는 ‘경제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이 문제를 외면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오월의 정신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워냈지만,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시대적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며 “온 국민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오월의 정신을 이 시대에 올바르게 계승하고, 광주의 희생과 눈물에 진심으로 보답하는 길”고 밝혔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불러온 계층 갈등, 날로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가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며 “정치적 자유는 확장됐지만 경제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다”고 했다. 이어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켜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고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수준을 더 높이 끌어올려야 한다”며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나누고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하여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서민과 중산층 중심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번 5.18기념식 참석에서 대통령실이 강조하는 내용은 ‘3년 연속 기념식 참석’ 자체였다. 그 외에는 ‘경제성장’이라는 추상적인 키워드 외에 눈에 띄는 내용이 없었다. 5.18정신을 ‘경제성장’으로 연결시키는 논리였다.

윤 대통령이 5.18 관련 입장이 주목을 받았던 때는 대선 출마 선언 이후였다. 그는 2021년 7월 17일 제헌절에 5.18민주묘지와 민족민주열사묘지를 참배한 뒤 “5·18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을 피로써 지켜낸 헌법 수호 항거”라고 평가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삽입하는 데 찬성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당시 방문은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보수정당 대선 후보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5·18정신을 헌법에 넣는 것은 ‘개헌’이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동의해야 할 문제”라며 “이 때문에 제헌절에 5·18을 기리기 위해 광주를 찾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5.18기념식에 참석해 “앞으로 계속 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고 있지만, 정작 후보시절 공언했던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서는 기념식에서 공식화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해에는 기념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과 도전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5.18정신을 ‘색깔론’으로 연결시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2대 국회 앞두고 여야 ‘5.18 헌법 수록’ 한목소리
이번 윤 대통령의 기념사가 주목된 이유는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은 물론 국민의힘도 ‘5.18 헌법 전문 수록’ 입장을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18일 논평을 통해 “이제 더는 5·18민주화운동이 왜곡 당하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기 위해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나서야 한다”며 “22대 국회 임기 중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정부·여당이 전향적 자세로 논의에 응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표 역시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더 이상의 5·18 폄훼와 왜곡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며 “그래야 다시 이 땅에서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남겼다.
조국혁신당도 논평을 내 “여야 모두, 특히 윤석열 대통령과 야당의 모든 당대표들이 찬성한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이날 주목을 받은 건 국민의힘의 입장이었다. 국민의힘은 논평을 통해 “5·18 정신은 더 이상 특정 정치 세력의 상징이 아닌 온전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 돼야 한다”며 “여야간 초당적 협의를 기반으로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사실상 22대 국회에서 ‘5.18 헌법 전문 수록’을 반대하는 정당은 없는 상황인 셈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이번 기념식에서 구체적 실현방안이나 여야의 논의를 촉구하는 등을 언급해 이 문제를 ‘공식화’할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기대는 현장에서도 드러났다. 기념식 중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 소속 시의원 8명이 대통령 기념사 직전에 ‘518 헌법 전문 수록’이라는 문구를 한 글자 씩 담은 손피켓을 들어 시위를 하기도 했다. 피켓을 들고 있던 시의원들은 기념사가 끝나고 뒤를 돌아 참석한 시민들에게 인사했고, 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대통령은 비슷한 내용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행사가 끝난 뒤 윤 대통령이 행사장을 떠나기 전 오월단체장들의 요구에 ‘잘 챙겨보겠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헌논의 피하고 싶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한다는 것은 ‘개헌’을 뜻한다. 즉, 이 문제를 현실화하자고 하는 순간 ‘개헌 논의’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5.18 정신 헌법 수록’을 대통령이 처음 언급한 때는 2007년이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5.18정신’을 함께 언급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약하고 당선 이후 첫 5.18기념식에서 다시 약속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도 적극적으로 정치체제를 바꾸는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5.18 헌법 전문 수록’은 개헌 이슈와 함께 해 온 것이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다시 ‘개헌’에 대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1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2대 국회에 개헌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제7공화국 헌법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변경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조 대표는 ‘5.18 헌법 전문 수록’도 함께 주장했다.
결국 ‘5.18 헌법 전문 수록’을 대통령이 공식화하려면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개헌’에 대한 입장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정치체제 변화’를 담은 개헌에 찬성할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임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원포인트 개헌’을 추진할 수도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당원과 함께 민주당이 합니다' 호남 컨퍼런스에서 “이번에는 반드시 5·18 광주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는 원포인트 개헌을 함께 꼭 해내자”라고 밝혔다.
만약, 윤 대통령이 이 문제에 진심이라면 ‘원포인트 개헌’ 제안을 할 수도 있다. 실제 원포인트 개헌 주장은 계속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결국, 윤 대통령은 ‘5.18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커진 시점에 그에 대한 언급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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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5.18 당시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을 증인으로 채택했으나 이들은 출석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1980년 5월 광주 사건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 성명”이라는 서면 답변을 보내왔다.
서면 답변에 따르면 미국은 “10.26 박정희 암살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12.12 사건에 대해 사전 통보받지 않았고, 5.18 당시 광주에서 어떤 폭력 상황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12.12도 미국이 지원했고, 5.18 진압도 미국이 승인했다는 <소문>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언론에 조작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많은 진실이 밝혀졌다. 5.18 당시 미국이 모든 전개 과정을 알고 있었으며, 미 백악관에서까지 대책 회의를 진행했으며, 전두환 세력으로 하여금 군부를 앞세워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라는 ‘승인’이 내려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미국 관련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미국은 한국군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울 시각으로 12월 12일 초저녁, 전두환 보안사령부 및 일단의 한국군 장교들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서울 남부 중심지(용산)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으나 사망자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
1979년 12월 12일 당일 미 국무부가 백악관, 주한미대사관, 주한미군, 미 국방부 등을 수신처로 보낸 ‘한국에서 군부의 실력행사 발생’이라는 문서의 일부이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 일각에서 전두환 파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공군 및 해군의 일부 고위 멤버들이 1979년 12월 13일 육군의 권력장악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소장이 사임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 억제되지 않으면 그와 그의 파벌에 대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다 함. 이들은 전두환이 계속해서 최규하 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다면 해병대를 동원하여 그 파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말했다 함.”
1980년 1월 9일 미 국방정보국 정보요원이 작성한 ‘첩보’ 문건에 담긴 내용이다. 그런 미국이 전두환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음은 상식에 해당한다. 다음은 1980년 3월 12일 주한미대사관에서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일부이다.
“지배 구조 내에서 특히 우려되는 현상은 전두환이 가지고 있는 권력임. 그는 정부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
12.12로 군부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기다리는 ‘때’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2차 쿠데타를 의미한다. 이미 미국은 3월부터 전두환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의 5월, 전두환이 군사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7일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이다.
“위 2개 여단(제13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의 총병력은 약 2,500명이며, 학생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고 있음. 또한 미군은 포항 주둔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과 부산 지역에 필요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음.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함. 아직 이러한 요청은 없으나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임.”
그리고 잘 알려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미국 정부의 주요 결정자들이 모여 “최소한의 무력으로 광주 질서 회복”을 결정한다.

▲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한국관련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미국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보았다
미 국방정보국은 5월 22일 광주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20여명의 젊은이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자신들을 돕지 않으면 폭력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함. 폭도들은 모두 칼이나 쇠파이프로 무장하였고, 아주 흥분한 상태였음. 화순탄광에서 탈취한 TNT와 수류탄이 송정 고속도로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광주로 옮겨지고 있음.”
5월 23일 보고에서도 “현재 상황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과 유사함.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강경하게 현재 상황을 진압해야 함”이라고 적었다.
미국이 광주 시민을 폭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미국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 보여왔던 패턴이다. 제주 도민의 3.10 총파업을 빨갱이의 소행으로 몰았던 것처럼,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야 군부에 의한 강경 진압에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무부에서 작성한 5월 25일자 한국 상황보고는 “광주에서 인민재판부가 설치되어 몇몇 처형이 있었으며, 학생 시위는 혁명 정부 설치를 주장하는 미상 무장 과격세력에 의해 전반적으로 대체되었음”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6월 6일 보고.
“1개 대대 규모의 무장 반란군이 광주 인근 산악지대로 도주했고, 전라남도 지역에서 약 2,000명이 무기를 확보하고 무인지대로 들어갔고, 2,000명이 전두환 군부세력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일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학생 시위대는 어느 순간부터 폭도로 묘사되기 시작했고, 폭도는 어느 순간 게릴라 무장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또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항상 미국과 독재 세력에 의해 폭도, 무장 세력,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매도되었다.
5.18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인권 대통령’ 지미 카터였다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 면전에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가능한 많이 석방”할 것을 요구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지미 카터는 ‘인권 대통령’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1979년 6월 지미 카터가 박정희에게 긴급조치 9호 철회와 양심수 석방을 요구한 대화록.
퇴임 후에도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을 해왔으며, 1994년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문제 해결을 위한 극적 타결을 이뤄낸 인물이기도 하다.
백악관 상황실에서 광주 시민에 대해 무력 진압을 ‘승인’하는 정책 결정이 내려졌던 1980년 5월 22일, 당시 미국 대통령 역시 지미 카터였다.
당시 재선을 노리고 있던 카터는 이란에서 발생한 미 대사관 인질 사건, 뒤이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이 발생하면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국의 정치적 혼란은 카터가 직면한 정치적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의 ‘정치 안정화’를 추구했다. ‘정치 안정화’는 곧 광주에서의 조속한 ‘질서 회복’이었다.
지미 카터 미국 정부는 ‘광주 질서 회복’을 통한 ‘정치 안정화’를 위해 전두환에게 군부대 동원을 ‘승인’했다. 그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회의 시간은 75분. 1980년 5월 광주 시민의 운명은 백악관에서 단 75분 만에 결정된 것이다.
당시 한국 상황을 관리하던 비상대책팀의 이름은 “체로키”였다. 건국 시절 자신들이 학살했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의 인권을 위해 박정희와 설전을 벌였던 ‘인권 대통령’ 지미 카터는 11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광주 학살의 칼자루를 전두환 군부에게 쥐어주었다.
지미 카터가 추구한 ‘인권 외교’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어느 대통령도 우리 국민의 인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가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이 기획한 것이라면, 그와 정확하게 똑같이 전두환의 5.18 광주 학살은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에 의해 ‘승인’된 것이었다.
장창준 객원기자92jcj@hanmail.net
조정훈, 공수처장 후보자에게 “공수처 위해 일하면 안 된다”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자가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2024.05.17. ⓒ뉴시스
‘채 상병 특검’에 관한 국회 논의를 “존중한다”는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자의 답변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인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이 발끈했다.
김 의원은 17일 열린 공수처장 인사청문회에서 오 후보자의 답변에 “고발내용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그 말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뭘, 특검 입법 존중한다는 그 말을. (왜 하나?) 고발사건이나 충실히 수사하라”라고 꾸짖듯 말했다.
오 후보자는 이날 여러 차례 ‘채 상병 특검’에 관한 국회의 논의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특히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순서에서,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반복하여 행사하며 국회의 입법을 가로막는 행위를 언급하며 “국회의 권능은 매우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듣고 싶은 답변이 나오지 않자, 김 위원장이 직접 끼어들어 “공수처장, 작년 9월 5일 민주당에서 공수처에 고발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뒤에 이거 관련한 특검법이 발의됐다. 그걸 알고 답변해야 할 거 아닌가”라며 이같이 나무란 것이다.

오 후보자에게서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모순되는 질문과 다소 기이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먼저,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국회에서 공수처) 인력도 안 늘려주고, 수사범위도 협소하고, 수사권과 기소권도 불일치하면, 솔직히 어떤 공수처장이 와도 (수사) 못할 것”이라며 “3년 뒤 (임기가 끝나) 소임을 밝힐 때 ‘이럴 바에는 없애자’ 이런 양심선언을 할 의사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하지만 오 후보자는 조 의원이 바라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오 후보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 관련해서도 업무를 착실히 하겠다. 염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고 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조 의원은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런 결론을 내릴 양심과 용기가 있나”라고 재차 물었고, 이번에도 오 후보자는 “공수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하겠다”면서 답변을 이어가려고 했다. 당황한 조 의원은 답변을 자르며 “공수처를 위해 일하면 안 된다”라고 강요했다. 조 의원은 “3년 해봤는데 공수처는 태어나면 안 될 조직이었다고 결론 내주는 게, 우리 사회 엘리트이자 법률적으로 해박한 경험을 가진 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오 후보는 “저는 공수처가 권력기관 견제와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를 위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조직이 되도록 만들어가겠다”라고 밝혔다.

공수처 무용론·폐지론에 관한 조 의원의 질의에서 의미 있는 답변이 나오지 않자,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은 정반대의 논리로 특검이 불필요하다는 답변을 유도했다.
장 의원은 “(일반론적으로) 필요하면 대통령에 대한 소환조사와 대통령실에 대한 압수수색도 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공수처에서 진행하는 다른 사건에 비해 (이 사건은) 수사 속도가 늦지도 않고, 충분히 수사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왜 특검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도 오 후보자는 국민의힘이 원하는 답변을 꺼내지 않았다.
오 후보자는 “특검에 관한 입법부 논의는 존중하고, 장기적으로는 공수처가 수사권과 기소권이 일치되어서 꼭 채 해병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런 특검 수요가 있을 때 공수처에 수사를 맡길 수 있는 있었으면 하는 게 제 소신”이라고 답했다.
한편, 공수처장 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 29일 판사 출신 오동운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 변호사를 제2대 공수처장 후보로 선정했다. 당초 여권 측 후보추천위원들은 공수처장 후보자로 ‘윤심’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선호했으나 김 부위원장은 추천 후보가 되지 못했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오동운·이명순 중 판사 출신 오 변호사를 공수처장 최종 후보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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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칼럼] 아직도 계속되는 이 '모욕감'들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5.18. 05:03:06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검찰이 내놓은 논리다. 당시 이 논리를 내세웠던 검찰에 따르면 내란 미수는 처벌할 수 있지만 내란이 기수(행위 완료)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윤석 검사(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이 법리를 설명하며 이성계가 쿠데타로 이씨 조선을 세웠는데, 조선이 이성계의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검사들은 그런 족속들이다. 이 발언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되자 검사들은 새로운 논리인 '사정변경의 원칙'을 내걸고 수사에 돌입한다. 법률 행위의 기초가 된 사정이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을 받게 되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뒤집게 됐다는 말이다.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이란 김영삼 정권의 등장이 되겠다.
'모욕감'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에 온 국민은 집단적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게 검찰은 '전두환 신군부'를 위한 '완벽한 형법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국가가 국민이 모여 이뤄진 것이란 사실은 망각했다. '성공한 쿠데타'라는 집단 기억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 검찰 집단이 간과한 건 국민들이 겪을 모욕감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김오랑 소령이나 정선엽 병장 같은, 신군부의 군사 반란에 저항한 '제복 입은 영웅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반란의 '증거'를 남겼고, 역사는 일부나마 바로 세워질 수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서울 마포구 웨스트브릿지 라이브홀에서 음악인, 연극인, 역사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열린 '오픈콘서트-기억록'을 16일 저녁에 찾았다. '사랑 많은 세상'이라는 단체가 주관해 '기억'을 주제로 한 이 콘서트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키워드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의 하나회에 맞서다 전사한 고(故) 김오랑 소령(후에 중령으로 추서)을 선정했다. 작곡가 윤일상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박학기, 김장훈, 이정렬, 손병희, 배우 이기영, 이원종 등이 참여해 제각각의 재능을 녹여 김오랑을 기렸다.
최근 영화 <서울의봄>에서 많은 이들이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극중 이름은 오진호)의 마지막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잊혀져 가던 김오랑을 불러낸 건 1000만 영화였지만, 매해 5월이 되면 제각각의 기억을 더듬어 온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기억은 개인적이지만 또한 집단적인 것이다. 콘서트장을 꽉 메운 사람들과 함께 앉아 하나의 기억을 위해 집단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기억의 원동력은 저마다 다를 터다. 내가 김오랑을 떠올리며 내내 떨치지 못한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김오랑은 같은 관사에 사는 '절친' 박종규 중령에 의해 교전 중 전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김오랑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마치 "죽은 강아지(김오랑의 조카 김영진의 말)" 마냥 묻어버렸다. 국가를 지키려 한 군인을 암매장해버린 것은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남겼고, 아직도 그 모욕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김오랑의 모친은 홧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의 부인은 눈이 먼 채로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을 뛰어다니다 실족사했다. 온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했는데, 대한민국 군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김오랑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 좋다. 이 모욕감은 기억의 집단화를 자극한다.
군사 반란은 전두환이 주도했지만, 그걸 완료해 '성공한 쿠데타'로 만든 사람은 노태우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위기에 빠지자 국가 안보의 대의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전방을 지키던 9사단을 출동시켜 서울 광화문을 점령했다. 김오랑과 같은 군인들의 죽음을 기어이 '개죽음'으로 만들어 모욕감을 줬다. 노태우는 2021년 죽었는데 그가 속죄 했는지 안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나라는 그를 국가장으로 예우했다. 내란죄로 처벌받은 사람도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얘기다. 노태우에 대한 예우는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윤석열 정부라고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석비서관이 노태우 정권의 언론인 회칼 테러를 기자들 앞에서 농담이랍시고 내뱉어 또 다른 모욕감을 주고 떠났다.
그 노태우의 딸 노소영 씨 측은 최근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산 분할을 요구하면서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경 비자금 300억원을 사돈인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건넨 뒤 어음을 담보로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기여해 일궈낸 '부'가 '노태우 비자금'에 근거하고 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그 모습에 국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순수한 '탐욕'은 얼굴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사 반란의 후손들이 군인 김오랑을 모욕하고 있고, 그 모욕감은 1979년 12월과 1980년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단단하게 벼려지고 있다.
총선에 패배한 집권 세력은 "방향은 옳았지만, 국민이 체감하기에 부족했다"고 강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모두 발언을 통해 지난 2년의 국정 추진 상황을 보고한다면서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을 넓혔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렇게 잘 하고 있다. 국민들은 왜 몰라주고 있나'라는 식이다. 국가를 잘 운영한다고 (실제 잘 운영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해서 선거를 이길 순 없다. 정치란 국가를 이루는 '유권자'들의 복합적인 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존감'을 건드리는 순간 모욕을 느낀다.
그런 모욕감들이 이번 총선을 윤석열 대통령의 심판으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죽은지 80년만에, 그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철거당할 상황에 처했다. 집단 기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런 인식들이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스스로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착각한 자들은 타인에게 '모욕'을 주면서도 그것이 '모욕'인지 모른다. 해병대 채상병 사건 외압 의혹이 특히 그렇다. 채상병 사망 진상 규명을 위해 초동 조사를 맡은 해병대 박정훈 대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한 후에 갑자기 '항명 수괴죄(후에 항명죄)'로 입건됐다. 그가 조사해 국방부장관 결재를 거친 서류에 적혀 있던 채상병 사망의 책임자 리스트는 '윗선'의 개입으로 갑자기 쪼그라들었고, 채상병 죽음에 책임을 느껴야 할 '별'들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급급하다.
부당한 지시에 항의했다가 졸지에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혀 재판을 받고 있는 군인 박정훈의 모습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게 대체 뭐겠나? 군인 김오랑을 야산에 묻어버리고, '성공한 쿠데타'를 위해 '불의'에 저항한 그의 행동을 역사에서 지우려 한 것들과 같은 모욕감을 주는 일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면서 '집단 기억'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모욕 주지 않는 사회는 우리가 품격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다. 거듭 말하지만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 된다. 박정훈 대령에게 국가가 행하고 있는 일들이 그걸 지켜보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는 걸 깨지 못하는 한 윤석열 정부에는 희망이 없다.
아직도 명예회복이 요원한 김오랑 소령을 5월에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그는 군의 본보기같은 인물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김오랑의 명예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모욕감'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전라남도경찰국 안병하 도경국장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24.05.17 20:30ㅣ최종 업데이트 24.05.17 21:59
▲ 전남지방경찰청이 세운 안병하 치안감 흉상 ⓒ 연합뉴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실정법 준수가 큰 의미가 없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실정법을 뛰어넘는 저항권 행사가 용인될 수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전두환과 신군부를 향해 총을 들고 무장한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볼 만한 상황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른바 준법투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병하 도경국장이 이끄는 전라남도경찰국에 의해 전개됐다. 신군부의 영향을 받는 내무부 치안국은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지시를 거듭거듭 내렸다. 하지만 전남도경은 총을 내려놓고 시민 안전에 역점을 뒀다. 전남도경은 이런 식의 비협조를 통해 결과적으로 전두환에 맞서는 형국을 만들었다.
1980년 5월 19일, 안병하 국장은 경찰의 총기와 실탄을 광주 시내 제31보병사단(충정부대)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5·18 이튿날에 광주 경찰을 비무장으로 전환시킨 이 소산 조치에 관해 당시의 현지 경찰관 일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5·18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이 쓴 <안병하 평전>은 그런 평가들을 소개한다.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 최아무개(전남도경 상황실)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 안아무개(광주경찰서 수사과)
일선 경찰의 말에서도 느껴지듯이, 전남도경이 계엄사령부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면 1980년 5·18은 '시민군 대 계엄군'이 아니라 '시민군 대 군·경'의 대결이 됐을 것이다. 5·18이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데 전남도경이 일조한 셈이다.
물론 전남도경도 당시 국가권력의 죄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가 작년 12월 26일 펴낸 보고서인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한 연행, 구금, 조사과정 등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건>은 "5·18 기간 중 체포된 사람들은 제31사단, 상무대, 공군 헌병대, 광주교도소, 지역 경찰서/파출소 등으로 연행·구금"됐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전남도경의 지휘를 받는 광주 경찰에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5·18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안병하 국장을 비롯한 전남도경의 발포 거부는 그런 한계점과 더불어 인식될 필요가 있다. 신군부의 인권 탄압에 동조한 측면과, 신군부의 강경진압 요구를 거부하고 총을 들지 않은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병하의 판단
▲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 ⓒ 김종성
1928년 7월 3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안병하는 도쿄의 중학교와 서울의 광신상고에서 공부한 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이듬해 5월 23일 소위로 임관한 그는 22세 때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춘천전투와 음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러고 나서 5·16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11월에 육군 중령으로 군을 나와 경찰의 길을 걸었다.
지난 9일 경기도 하남YMCA교회에서 인터뷰한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는 "부친은 처음에 경찰 발령을 받고 치안국에 있다가 곧바로 부산중구경찰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특채 형식으로 총경 계급장을 달고 첫 발을 내디딘 34세의 안병하는 그 뒤 승승장구했다. 간첩 검거와 대간첩작전에서 성과를 거둬 내무부장관 표창과 중앙정보부장 표창도 받았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치안국 과장, 강원도경국장, 경기도경국장을 거친 그는 51세 때인 1979년 2월에 전남도경국장에 취임했다. 마지막 임지가 될 광주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쓰러지고, 12월에 전두환이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했다. 이는 안병하의 경찰 내 위상을 높이는 원인이 됐다. 그는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와 막역한 사이였다. 노태우와는 밤중에 만나 술도 마실 정도로 각별했다고 안호재 대표는 말했다.
안 대표는 1980년 전반기 상황과 관련해 "항간에 이야기 돌기로는 부친이 공직자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다 그런 소문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탁하러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랬어요"라고 한 뒤 아버지가 전두환과 가까워진 계기를 설명했다. 아버지가 경찰 지위를 활용해 전두환의 인맥 관리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 안 대표의 말이다.
"전두환이 정치군인이잖아요. 정치군인을 하려면 옛날에는 경찰 없이는 안 됐거든요. 누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연락이 오면 (부친이 만나게 해주고). 특히 사업가들."
안병하는 대간첩작전뿐 아니라 시위 진압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안병하 평전>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 진압도 남 못지않게 잘한다며 유능한 경찰로 평가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신군부 실세인 전두환·노태우와도 친밀했다. 그랬기 때문에 1980년 5월 19일부터 안병하가 보여준 모습은 전두환·노태우에게는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안병하는 5월 18일 새벽부터 치안본부의 강경진압 지시를 받았다. 평전에 따르면, 손달용 치안본부장은 그와의 통화에서 "계엄당국의 시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안병하의 판단은 이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압 강도를 더 높이면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합세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안 국장은 어떻게든 시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서 시위대가 제풀에 지쳐 가라앉도록 하는 게 서로 피해를 줄이면서 사태를 수습하는 현명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안병하를 움직인 배경
▲ 경기경찰국장 시절 안병하 치안감(왼쪽) ⓒ 안호재
안병하는 시위 진압에 능한 경찰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시민에게 총을 들면 사태가 악화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일선 경찰관들에게서 총기를 거둬들였다. 평전에 따르면, 전남도경이 작성한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 상황'이란 문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광주권 2개 경찰서 무기·실탄 및 비밀문건 소산 완료(5.19. 22:00)."
이 조치는 신군부를 경악시켰다. 시위가 들끓는 광주에서 무기를 치워버린 이 사건을 신군부는 황당해 했다. 그런 신군부의 반응을 1980년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작성한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 사건'이란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전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치안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 무기를 폭도들로부터 피탈을 방지하겠다는 소극적인 발상하에 치안본부장에 건의한 후 경찰 2개 서(署) 및 4개 기동대의 무기 약 1300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소개시킴으로써 5.21. '진도개 둘'이 발령되고 5.22. 자위권이 발동되었음에도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하였고."
광주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한 안병하의 조치에 대해 '친한 후배' 전두환은 한심하다는 어투로 혹평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전두환은 광주 상황이 확산된 것은 안병하 국장 때문이라며 이렇게 서술했다.
"광주사태 초기에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데 시위진압을 지휘해야 할 전남경찰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며 경찰국 청사를 떠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연락두절 상태가 된 것이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가 치안본부장뿐 아니라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김종환 내무부장관 등의 압력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압력하에서도 안병하가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소신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4월 7일 자 <경향신문>에 보도됐듯이, 안병하는 일선 경찰관들과의 소통에 신경을 쓰는 상관이었다. 그래서 경찰 직원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라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군부 핵심부가 자신과 절친하다는 점도 자신감의 요인이 됐을 수 있다.
그에 더해, 안호재 대표는 참전 군인인 아버지가 전쟁 경험이 없는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 앞에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경찰이라면 마땅히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소신에 더해, 그런 소신을 관철시킬 만한 자원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 1980년 5월의 안병하를 움직인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전남도경이 총을 들었다면
▲ 2018년 10월 22일 전남지방경찰청은 5·18 당시 순직 경찰관 4명의 부조상을 청사 입구에 세우고 '5·18 순직경찰관 부조상 제막·추념식'을 열었다. 사진은 함평경찰서 소속 정충길 경사와 이세홍·박기웅·강정웅 경장의 부조상과 안병하 치안감 흉상(왼쪽)의 모습. ⓒ 연합뉴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뒤인 5월 25일, 안병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의 강경진압 요구에 대해 "경찰이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발포를 거부했다. 다음날 그는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8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6월 2일 의원면직 형식으로 경찰복을 벗은 그는 6월 13일 귀가한 뒤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8일간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8년간이나 이어졌고, 국회 광주청문회 출석 요구를 받은 상태에서 1988년 10월 10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에서 쫓겨난 뒤에 안병하는 유럽과 미국의 병원들을 다녔다.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 국립경찰병원, 국립의료원에서도 치료를 받았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은 이유를 육체적 요인보다는 정신적 요인에서 더 많이 찾았다. 후배 군인들에게 고문과 수모를 당한 것이 훨씬 더 큰 상처가 됐다고 말한다. 안병하는 고문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안병하가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자신이 참전 군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 자부심이 후배 군인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안병하는 사후 5년 뒤인 1993년에 5·18 피해자로 인정됐다. 2017년에는 '제1호 경찰영웅'으로 선정되고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특진됐다. 2019년에는 전남경찰청에 안병하공원이 개장됐다.
전두환은 안병하 때문에 광주 상황이 악화됐다고 핑계를 댔다. 경찰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계엄군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고 둘러댔다. 전남도경이 총을 들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지는 확단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안병하가 총을 치우지 않았다면 전남도경이 국민들을 상대로 무기를 드는 역사의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점이다.
검찰 '학살 인사'의 설계자는 윤 대통령... 위기 피하려다 감당 못할 사태 올 수도
24.05.17 07:09ㅣ최종 업데이트 24.05.1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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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 생중계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 9일 오전 열렸다. 서울 용산역 로비에 마련된 텔레비젼을 통해 기자회견이 생중계 방송되고 있다. ⓒ 이정민
김건희 여사 수사 지휘부 전격 교체의 설계자가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여러 정황으로 분명해지고 있다. 검찰총장의 이례적 침묵 항변이 이번 인사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검찰 '인사 학살'의 단초는 올해 초 검찰총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의 김 여사 조사 요청으로 짐작된다. 특검에서 난도질을 당하느니 미리 면죄부를 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을 텐데, 윤 대통령은 이마저도 "너희가 감히"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느닷없는 민정수석 부활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의문이 풀린다. '민심 청취'는 구실이었을뿐 실은 검찰 지휘부를 숙청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셈이다. 윤 대통령이 직접 칼을 들 수는 없으니 대신해서 손에 피묻힐 대리자가 필요했을 터다. 민정수석에 검찰총장보다 아홉 기수나 높은 선배를 택한 것도 검찰 조직 전체에 '찍소리 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윤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그림을 그린 뒤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의아한 건 이런 위험한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무모함이다. 그 사이 '거사'를 중단해야할 많은 일이 있었다. 총선에서 궤멸적 참패를 당했고,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보수층마저 등을 돌렸다. 김 여사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치솟았다. 하지만 모든 신호가 불리하게 나타나는 데도 윤 대통령은 짜놓은 작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배우자를 법의 심판대에 올리지 않겠다는 일념에서일 것이다. 그것은 홍준표가 말한 '상남자'의 도리가 아니라 '누가 감히 내 아내를 건드리느냐'는 제왕적 오만함의 발로다.
윤 대통령의 무참한 검찰 인사로 김 여사 수사는 더 볼 것도 없게 됐다. 불신임을 당한 검찰총장이 "인사는 인사고 수사는 수사"라고 해봤자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권력의 풍향계를 누구보다 잘 감지하는 이들이 검찰 아닌가. "사건의 실체와 경중에 맞는 올바른 판단 나오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신임 중앙지검장의 발언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김 여사 수사팀에게 그 말은 빠르게 무혐의로 결론내라는 지시로 들릴 것이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대하는 윤 대통령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VIP 격노설'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것처럼 해석됐지만 실은 그 안에 속내가 담겨있다. 윤 대통령은 경찰 수사에서 사단장의 무혐의가 밝혀지면 대통령실 외압 의혹도 자연히 해소될 거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해병대 수사단의 과실치사 적용이 틀렸으니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외압 의혹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다.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의 전제로 수사 결과를 제시한 건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이다. 어떻게든 경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특검법을 거부해 시간을 끌어보자는 심산이다. 믿는 것은 공수처의 부실한 수사력이고, 경찰의 '충성심'이다. 윤 대통령의 동문서답식 답변에는 경찰에 대한 수사가이드 라인이 숨어 있는 셈이다.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두고, 고교 후배 장관과 경찰청장을 '이태원 참사' 책임에도 꿋꿋하게 남겨둔 이유가 뭐겠는가.
윤 대통령이 한사코 자신과 배우자를 향한 수사를 막는 근저에는 사법적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게다. 본인이 특검의 수사 선상에 오르고,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허울로 남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힌 당사자이니 그 두려움은 더욱 클 것이다. 김 여사도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고, 재판정에 출석할 지 모르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윤 대통령 부부의 두려움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잘못한 게 있으면 응당 책임을 지고, 그렇지 않으면 조사받고 해소하면 될 일이다. 그 당연한 것을 거스를 경우, 후에 감당못할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시중에는 윤 대통령을 향해 '윤똑똑이'라는 비아냥이 돈다. 자기만 혼자 잘나고 영악한 체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데, 윤달의 윤(閏)에 윤 대통령의 성씨인 윤(尹)을 붙인 것이다. 지금 윤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면 딱 그꼴이다.
이충재 (h871682) 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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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윤석열의 '노동약자보호법'에 도사린 이데올로기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 | 기사입력 2024.05.17. 08:58:14
영국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거대한 타락(the Great Degeneration)>이란 책에서 '법의 지배'(the rule of law)가 '법기술자의 지배'(the rule of lawyers)로 타락한 현실을 개탄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새로 법률을 만들어 '과도한 규제'와 '부패한 제도'를 양산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에서 '법의 지배'가 '법기술자의 지배'로 타락한 대표적 영역이 노동 문제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산업안전보건법, 고용(실업)보험법, 산업재해보험법, 남녀고용평등법, 근로자참여증진법 등 무수한 노동법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노사법치 이데올로기의 일환인 '노동약자보호법'
법기술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노동법 조항을 개정하고, 그 해석을 보완하며, 나아가 적용을 확대하려는 사회적 대화와 정치적 논의를 조직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이런 저런 논리를 만들어 현행 법제도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우기면서 자꾸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 노동법 체계를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논리의 통합성을 사회적 통합성보다 중시하는 이들의 논리에서 핵심은 노동시장 상층에 적용하는 법률을 노동시장 하층에 적용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시장 하층을 위한 법률을 따로 만들어 법제도에서 상층과 하층을 분리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노동시장이 분단되어 있다면서 노동법도 분단시키자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분단과 양극화를 빌미로 제도적으로 '노동법의 분단과 양극화'를 노리는 것이다.
서울대 법대 졸업 이후 평생을 법기술자로 살아온 이력에 걸맞게 윤석열 대통령이 '노동법 분단과 양극화'의 선두에 섰다. 윤 대통령은 지난 14일 민생토론회에서 "거대 노조에서 소외돼 있는 미조직 비정규 근로자"를 위해 '노동약자보호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스물다섯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박수치고 있다. 이날 토론회는 '고맙습니다, 함께 보듬는 노동현장'을 주제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노동시장 양극화' 빌미로 '노동법 양극화' 추진
대통령은 '노동약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의 토론회 발언에 따르자면 "노동시장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노동약자의 대척점에 "이념으로 무장한 기득권 노조 카르텔"을 내세웠다.
윤 대통령의 '노동약자보호법' 구상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산업안전보건법, 고용(실업)보험법, 산업재해보험법, 남녀고용평등법, 근로자참여증진법, 건강보험법, 국민연금법 등 기존 노동법과 사회법의 적용을 이른바 '노동약자'에게 확대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노동약자보호법'의 배후에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보편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노동시장 상층과 하층으로 영구히 분리하려는 음모가 자리잡고 있다. 이를 통해 '노동시장 분단체제'를 완성하고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노동법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적용을 거부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들이 진심으로 노동약자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법의 지배' 원리의 출발점인 '법 앞의 평등'을 추구하면 된다. 다시 말해 "기득권 노조 카르텔"에 속한 노동시장 상층 노동자들이 누리는 법률적 권리와 이익의 법제도적 적용을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에게도 차별 없이 확대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노동법과 사회법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적용에는 관심이 없다. 노동법과 사회법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적용이 노동시장 상층과 하층을 점진적으로 통합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과 연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기술자 가운데 한 명인 윤 대통령은 노동법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적용을 모색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를 위한 법제도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본심은 노동자를 일류와 이류로 분열시키겠다는 것이다.
노동문제에 대한 '법률가의 지배'
국제노동기구(ILO)는 2019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발표한 선언문에서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노동시장과 사회복지 제도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각국 정부가 근로시간과 안전보건 등 노동기준을 통일적으로 적용하고 노동기본권을 노동시장 하층까지 보편적으로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1776년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한 사회가 부패 단계에 이르면 지배 엘리트들이 정치와 경제에서 '지대 추구'(rent-seeking)에 몰두한다고 썼다. 2014년 니얼 퍼거슨은 <거대한 타락>에서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엘리트의 지대 추구가 '법의 지배'를 대체한 '법률가의 지배'라는 형태로 이뤄진다고 썼다.
그리고 2024년 윤 대통령은 '노동약자보호법'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법과 사회법의 적용 대상을 차별적으로 분단시킴으로써 한국의 노동 문제를 '법률가의 지배' 하에 두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본질적으로 그의 '노동약자보호법' 제안은 한국 지배 엘리트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분할통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다.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을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원숭이로 보는 권모술수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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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지난달 취업자 수가 26만1천명 늘어났다. 10만명대로 꺼진 취업자 수가 한달 만에 20만명대로 반등했지만, 60대 이상 취업자 수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 컸다.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4월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달 15살 이상 취업자는 2869만3천명으로 1년 전보다 26만1천명 증가했다. 올해 1~2월 30만명대를 유지했던 취업자 수 증가폭은 3월 17만3천명으로 급감했다가, 3개월 만에 증가세로 돌아서며 20만명대를 회복했다.
연령별로 보면 청년층(15∼29살) 취업자가 8만9천명 감소했고, 40대 취업자도 9만명 줄었다. 30대는 13만2천명, 50대는 1만6천명, 60살 이상은 29만2천명 각각 증가했다. 고용시장의 ‘허리’로 불리는 40대 취업자 수는 줄고, 60살 이상 취업자수가 늘어나는 현상이 지속되는 모양새다.
산업별로는 수출 호조 및 반도체 경기 회복의 영향으로 제조업 취업자가 10만명 늘었다. 2022년 11월 10만1천명 이후로 1년5개월 만의 가장 큰 증가 폭이다.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9만3천명), 정보통신업(6만8천명)도 취업자가 늘었다.
사업지원 및 임대서비스업 분야는 6만6천명 줄었고, 교육 서비스업과 도매 및 소매업도 각각 4만9천명, 3만9천명씩 취업자 수가 감소했다. 15살 이상 고용률은 63.0%로 1년 전보다 0.3%포인트 상승했다. 1982년 7월 월간 통계 작성 이후 4월 기준으로 가장 높다.
실업자는 8만1천명 늘어 2021년 2월(20만1천명) 이후 3년2개월 만에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실업자는 지난해 11월 이후 6개월째 증가세다. 실업률은 3.0%로 1년 전보다 0.2%포인트 상승했다. 실업자 증가세에 대해 서운주 통계청 사회통계국장은 “2022~2023년 코로나 극복으로 실업자가 감소한 기저효과가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설명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아침신문 솎아보기] 명심 추미애 꺾였다...국회의장 ‘이변’ 우원식에 신문들이 쏟아낸 주문은
법원, 의료계 ‘증원정지’ 신청 기각…한겨레 “필요한 곳에 의사 늘릴 방안 구체적으로”
기자명김예리 기자
입력 2024.05.17 07:44
수정 2024.05.17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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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김건희 여사가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의 부인과 함께한 모습.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자취를 감춘 지 5개월 만인 어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한 중인 캄보디아 훈 마넷 총리 내외와의 오찬에서다. 17일 신문들이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공식 오찬에 참석한 모습을 사진으로 전했다. 한겨레는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를 공식 사과한 지 일주일, ‘김건희 방탄’ 논란을 부른 검찰 고위급 인사를 한 지 사흘 만”이라고 했다.
지난 13일 검찰의 김 여사 수사 지휘라인이 갑자기 교체돼 ‘김건희 방탄 인사’라는 시비가 불거졌다. 박성재 법무장관은 16일 “(검찰 인사시기를 늦춰달라 했던 이원석 검찰총장 의견을) 다 받아들여야 인사를 할 수 있느냐”고 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이 총장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해 신속한 수사를 지시한 후 갑작스럽게 인사가 단행되다 보니 대통령실이 이 총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경찰은 모친의 통장 잔고 증명서 위조 공모 혐의로 고발된 김건희 여사에게 16일 무혐의 처분했다고 보도했다. 시민단체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사세행)은 지난해 7월 김 여사가 모친 최은순씨의 잔고 증명서 위조를 공모했을 것이라 보고 용산경찰서에 김 여사를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신문들에 따르면 서울 용산경찰서는 이 사건을 각하 처분했다.
한겨레는 “최은순씨는 2013년 경기도 성남시 땅 매입 과정에서 4차례에 걸쳐 약 349억원이 저축은행에 예치된 것처럼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혐의로 징역 1년을 확정받고 복역하다 지난 14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사세행이 “최씨는 징역 1년의 형량을 다 채우지도 않고 가석방됐다. 법 앞에 평등이 철저히 무너진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통탄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일부 신문은 사설을 내고 김 여사를 둘러싸고 불거진 의혹 해소를 요구하는 사설을 냈다. 세계일보는 “김 여사의 등장 자체가 뉴스가 되는 비정상적 상황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 수사만이 김 여사를 둘러싼 각종 논란을 해소하는 해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여사 수사 지휘부를 ‘검찰총장 패싱 물갈이’한 데에 “인사 시기나 내용으로 볼 때 대통령실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17일 세계일보 사설
동아일보는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 ‘첫목회’가 “(정부여당의) 공정과 상식의 붕괴를 지적”하면서도 김 여사 관련해서는 말을 아낀 점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이들의 반성문엔 ‘주어’가 생략됐다”며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을 지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 “김 여사 관련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지휘부 교체 인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용산의 눈치를 보며 할 말을 삼킨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김 여사가 공개 활동하려면 공적 감시·관리 장치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며 제2부속실 설치와 특별감찰관 임명을 꼽았다. 그 중 제2부속실은 국회 추천 없이 윤 대통령이 설치하면 된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김 여사는 명품백 수수 이전에도 리투아니아 방문 당시 명품 매장 방문, 봉하마을 코바나컨텐츠 직원 동행 등 처신이 도마에 올랐다. 잠행 기간에는 국무총리 인선을 두고 비선 논란도 불거졌다”며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김 여사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후 제2부속실 설치를 ‘검토 중’이라고 했으나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라고 했다.

▲17일 경향신문 3면 사진기사.
의대증원 이대로… “정부 졸속 정책, 국민 피해 키워”
서울고등법원이 의대 증원추진을 멈춰달라는 의대 교수와 전공의, 의대생 등의 신청을 각하·기각했다. 대입 수시모집 요강을 이달 안에 확정하도록 한 일정을 고려하면 27년 만의 증원이 사실상 확정된 것이다.
서울고법 행정7부는 “집행을 정지하는 것은 의대 증원을 통한 의료개혁이라는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며 이들의 항고를 각하·기각 결정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법원 결정에 대국민 담화에서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고, 의료계는 즉시 재항고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일보는 “재판부가 의대 증원을 ‘공공복리’라고 인정한 만큼 투쟁 명분은 사라지게 됐다”고 했다. 재판부는 전공의와 의대교수의 신청에는 각하 결정했지만, 의대생에 대해서는 “회복이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한 긴급한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원고 적격을 인정했다. 그러나 의대생이 일부 손해를 입더라도 의료개혁이란 공익 목적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우리나라는 의료의 질은 우수하나 필요한 곳에 의사의 적절한 수급이 이뤄지지 않아 필수·지역의료가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있다”고도 밝혔다. 의료계가 ‘2000명’이라는 증원 규모가 “주술적 영역”이라고 밝힌 데에는 그 규모 자체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한 건 아니지만 집행정지 이유가 될 순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가 밝힌 필수·지역의료 복원을 위한 길은 험난해 보인다. 지역 필수의료 분야 의료진을 늘리려면 공공병원을 늘리고 늘린 의사를 지역과 공공의료기관에 배치해야 하는데, 정부의 의료정책은 이를 보장하지 않는 탓이다. 공공의료 시민단체들은 광주와 울산 등에서 기존 공공병원 설립 계획도 무산시키면서, 의사가 늘어도 수도권 비급여 진료에 몰려 ‘돈벌이 의료시장’이 더 과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해왔다.
9개 아침신문이 모두 관련 사설을 냈다. 대다수가 법원 결정을 계기로 의료계가 현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국민일보는 사설 제목에 “의대 증원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동아일보는 “항고심 심리 과정에서는 의대 증원이 졸속 추진된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법원도 ‘일부 미비하거나 부적절한 상황이 엿보인다’고 지적했다”며 “정부가 주먹구구 식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국민 피해를 키웠다”고 했다.
한겨레는 “의대증원만으로 부족한 곳에 의사를 늘릴 수 있느냐는 의구심은 의료계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필요한 곳에 의사를 늘릴 방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증원은 의료개혁 논의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그동안 뒷전으로 밀린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방안에 대해 지금부터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17일 경향신문
우원식 의장 당선…한겨레 “경선 과정, 민주당 뼈아픈 성찰 해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6일 당선인 총회에서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 과반 1당 민주당 투표 결과로 다음달 5일 새 국회 첫 본회의에서 우 후보의 의장 당선은 사실상 결정됐다.
신문들은 우 후보 당선을 놓고 ‘예상을 뒤엎은 결과’ 또는 ‘이변’, ‘명심 뒤집기’ 결과라고 표현했다. 경선은 당초 ‘대여 강경파’ 추미애 당선인이 친명계 후보로 정리되면서 대세가 정해진 것처럼 보였으나 이와 다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 의원은 후보 수락인사에서 “중립은 몰가치가 아니다. (22대 국회는) 앞의 국회와는 완전히 다른 국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당원들의 ‘탈중립’ 요구를 일정 부분 의식한 것으로, 과거처럼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 주요 법안 처리가 지연되는 사태를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경향신문은 “특정 정당 독주에만 힘을 보탤 때는 민심이 최소한의 균형을 잃고 오만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란 말이 나오던 경선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우 후보로 결론 난 것도 이런 주문”이라고 했다. “우 후보가 당내 ‘을지로위원회’를 이끈 민생 전문가인 점은 기대를 걸게 한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난맥이 심하다 해도 민심은 어느 일방 독주를 용인하지 않는다”며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당내에서부터 언제 또 역풍이 닥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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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민주당은 ‘명심’ 논란을 빚은 이번 경선 과정을 뼈아프게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경선 후보들을 접촉해 구도를 정리하고, ‘당심이 곧 명심이고, 명심이 곧 민심’(추 당선자)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것은 민주당이 과연 민주정당인지 의심케” 한다“고 했다. 이어 우 의원이 “‘현장형’ 정치인으로 꼽힌다”며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은 물론 민생 현안 해결을 위해 설득과 중재의 정치력을 적극 발휘하길 기대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예상과 다른 선택이 나온 것은 한 사람을 황제로 모시는 ‘1인 당’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라며 “이 대표가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다. 이어 “우 의원도 사실상 친명 중진 역할을 해왔다”며 “책임에 대해 새로 생각하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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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리 기자구독

지역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대학생 가객. 노동야학 교사로 무장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군.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노동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린 청년 연출가. 손남승(66)의 찬란했던 20대를 대표하는 이력들이다. 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도청을 빠져나온 지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은둔자로 남아 있다. 그는 왜 세상과, 5·18과 단절하며 살고 있을까? 몇해 전 손남승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달 초 그의 근황을 다시 들었다. 지인을 통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나 같은 놈한테 앞에 나서 말할 자격이나 있겠느냐”며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가요제서 대상 받은 대학생 가객
“며칠 전에 통화허는디, 그럽디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도저히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다고.”
그와 접촉한 선배 김홍곤(67)이 15일 전해준 말이다. 김홍곤은 젊은 시절 지인들 가운데 손남승이 거의 유일하게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다. “얼마 전 김민기 선생 다큐 보셨지요? 김 선생 얘기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나서지 않겠다’는 남승이 말이 꼭 ‘오월의 뒷것으로 살겠다’는 뜻으로 들리데요.”
두 사람은 광주 ‘백제야학’에서 처음 만났다. 손남승의 광주일고 동기인 박용성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 김홍곤과 박용성은 전남대 국어교육과 입학 동기였다. 백제야학은 1980년 2월 강학(교사) 8명이 만든 노동야학이다. 손남승, 김홍곤, 최문수 등 대학생들은 60여명의 학생들과 광주 방림신협 지하실에서 공부했다. 백제야학 교장이던 김홍곤은 “근현대사, 한문, 근로기준법 위주로 가르쳤고, 음악은 구전가요나 민중가요를 함께 불렀다”고 했다. 학생들은 무등양말, 호남전기, 태광산업, 일신방직 등에 다니던 10대, 20대 노동자들이었다.

백제야학은 검정고시 야학으로 출발해 얼마 안 가 노동야학으로 전환했다. 강학들이 들려준 사연은 처연하다. 1978년 사직공원 근처 승공회관에서 검정고시 야학을 하던 손남승·박용성 등은 1979년 산수동오거리로 자리를 옮겨 ‘사랑의 학교’라는 야학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 아이스크림 공장에 다니던 학생 하나가 포장용 프레스에 손가락 세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회사는 합의금으로 손가락 한개에 3만원씩 9만원을 제시했다.
검정고시 야학을 노동운동 야학으로
소식을 전해 들은 강학들은 분노했다. 박용성의 분노가 특히 컸다. 그는 회사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를 수집해 유인물을 만들어 뿌릴 준비를 마친 뒤 사장을 찾아가 담판했다. 결국 300만원을 받아냈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 현실은 그대로였다. 허망하고 괴로웠다. 격론 끝에 노동운동에 방점을 둔 ‘노동야학’으로 바꾸기로 했다. 김홍곤의 고등학교 은사 임기석 방림신협 이사장의 도움으로 전남대병원오거리의 신협 건물 지하실에 터를 잡았다.
1980년 봄 5·18이 터졌다. 백제야학이 문 연 지 석달 만이었다.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강학인 손남승과 김홍곤, 학생 김순옥과 이정례가 5월19일 백제야학 지하실에 모였다. ‘광주시민이여, 궐기하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했고, 다섯차례에 걸쳐 배포했다. 같은 시기 광주의 또 다른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광주 상황을 시민들과 공유하려고 유인물을 제작해 시내 곳곳에 뿌렸다.
손남승과 김홍곤은 5월21일 오후 전남대병원오거리에서 유인물을 나눠 주다가 총격을 받았다. 김홍곤은 “(도청 집단발포 후) 화순 방향으로 퇴각하던 계엄군이 탱크에서 기관총을 쐈다. 가드레일 철판에 맞아 튄 총탄 파편이 근처 상점의 셔터에 박혔다”고 회고했다. 두려웠다. 두 사람은 김홍곤의 집으로 도망쳐 다락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 도청 앞 집단발포로 많은 시위 군중이 희생되자 분노한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하던 때였다.
“파리코뮌도 실패…도청 남으면 죽는다”
손남승은 “(시민군 본부인) 도청으로 가겠다”고 했다. 김홍곤이 “나는 무섭다. 노동자 혁명정부인 파리코뮌도 실패하지 않았냐. 결국엔 진압되고 죽을 테니 가면 안 된다”고 말렸다. 당시 손남승에겐 미래를 약속한 여성이 있었다. 손남승은 “사랑도 소중하지만 내겐 혁명이 더 중요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남대병원오거리에서 헤어졌다. 김홍곤은 그길로 광주를 걸어서 빠져나와 화순을 거쳐 고흥으로 몸을 피했다. 살고 싶었다.
손남승은 도청 1층의 상황실에서 일했다. 백제야학을 하며 알게 된 노동운동가 출신 이양현(74)을 그곳에서 만났다. 이양현은 학생투쟁위원회 기획위원이었다. ‘최후의 날’인 5월27일이 왔다. 그날 새벽, 손남승이 다급한 목소리로 “계엄군이 유동삼거리까지 왔다. 자는 사람들 다 깨워야 한다”고 이양현에게 말했다. 비상이 걸렸고, 새벽 3시를 조금 넘겨 무장한 시민군들이 도청 전면과 후면에 배치됐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손남승은 도청 담장과 도지사 공관의 철책을 연달아 넘은 뒤, 재래식 야외 화장실 안으로 숨었다. “똥물에 몸뚱이를 담그고 콧구멍만 내놓고 있었다고 그래요.” 김홍곤이 전한 손남승의 당시 상황이다. 아침이 밝자 손남승은 도지사 공관의 가사도우미에게 집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타고 온 짐자전거에 ‘똥범벅’으로 올라타 집으로 도망쳤다.
살아남은 손남승은 백제야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80년 12월 학생들과 함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무대에 올렸다. 손남승은 1979년에 열린 제2회 전일방송가요제(VOC대학가요제)에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박현희와 함께 ‘전남대 중창단’이란 이름으로 나가 대상을 받을 만큼 음악 실력이 출중했다. “멋쟁이였제. 얼굴은 이국적으로 잘생겼고, 기타 솜씨도 대단했어요. 그뿐이여? 글도 진짜 끝내주게 잘 썼어요.”
‘혁명 철학’ 익히려고 떠난 독일 유학
‘공장의 불빛’이 노동자들 참여로 무대에 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김홍곤은 기억한다. “남승이 주도로 강학들이 연출하고 학생들 전원이 배역을 맡아 출연했어요.” 당시 공연장엔 백제야학을 후원했던 최연석 목사의 주선으로 김민기와 임진택 등 서울의 문화운동권 사람들도 왔다. 김홍곤은 “공연 내내 눈시울을 붉히던 김민기 선배가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만들었지만, 노동자의 현실이 이렇게 슬프고도 생생하게 드러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백제야학은 1981년 ‘미리내 야학’으로 이름을 바꾼 뒤 장소를 옮겨 1984년까지 운영됐다.
손남승은 그 후 군에 갔다 제대한 뒤 백제야학 강학 출신인 여성과 결혼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손남승은 1989년 독일 유학을 떠났다. 김홍곤에겐 “혁명을 위해 헤겔과 마르크스를 더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1994년 김홍곤이 한국에 잠시 들어온 손남승을 만났을 때 “그날 새벽 도청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자괴감에 여전히 시달린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손남승은 끝내 학위를 받지 못한 채 1990년대 후반 귀국했다.
광주로 돌아온 손남승은 김홍곤의 말처럼 ‘5·18의 뒷것’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시작된 5·18유공자 보상 신청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김홍곤은 그에게 정부가 지난해 말까지 받았던 8차 유공자 보상 신청을 권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신청하라”고 몇번을 설득했으나, 손남승은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홍곤은 “결벽증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격 조건에 조금 미달해도 유공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나서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고 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으나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은 하고 있다”는 짤막한 답변만 들었다.
여전히 5월을 아파하는 백제야학 사람들
4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해 5월을 아파하는 백제야학 사람은 또 있다. 박용성은 5·18 직전 전남대 총학생회 교육부장으로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수배가 떨어져 여수로 도피했고 가족들의 설득으로 그해 6월 자수했다. 하지만 구타와 고문으로 척추에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는 실어 증세를 보여 기소 중지로 풀려났다. 박용성은 전남 여수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전교조 지부 결성을 주도한 일로 해직교사가 됐다. 몇해 전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고 박관현에 관해 인터뷰한 뒤 석달을 앓았다는 그는 이번 한겨레가 요청한 인터뷰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전남 지역 사립학교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공단에서 용접공으로 6~7년을 보낸 김홍곤은 요즘 식당을 운영한다.

백제야학은 5·18 이후에도 ‘뒷것’ 역할을 담당했다. 백제야학이 들었던 노동자 교육운동의 깃발은 와이(Y)야학, 한얼야학, 무등야학이 이어받았다. 김홍곤은 “야원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강학들과 학생 20여명이 지금도 모임을 한다”며 “손남승이 세상 밖으로 나와 남은 생을 옛 동지들과 함께 보낼 수 있게 설득하고 또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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