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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소녀상 옆에서 24시간
절망했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현장 12시간]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①

16.01.31 21:02l최종 업데이트 16.01.31 21:02l

 

 

빠른 취재와 짧은 기사가 미덕인 이 시대 저널리즘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저는 천천히, 차근차근, 깊숙이 현장을 기록하려 합니다. 짧게는 12시간에서 길게는 24시간 현장을 지키려고 합니다. 제 글은 짧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쓴다면, 여러분은 이를 허투루 넘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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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새벽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 한뎃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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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새벽 1시 평화의 소녀상 옆. 거리에 은박 깔개를 깔고 그 위에 매트를 덮었다. 이제 전기장판을 찾을 차례다. 영하 6도의 날씨. 오전 9시부터 16시간을 꼬박 소녀상 옆에서 취재했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24시간 현장 취재고 뭐고, 어서 빨리 전기장판 위 침낭에 들어가고 싶었다. 곧 대학생들한테서 절망적인 얘기가 들려왔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눈에 불을 켜고 노숙 물품더미를 샅샅이 뒤졌더니, 전기장판이 나왔다. "어라, 전원 코드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다시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전기장판은 여학생들에게 양보하고 기자를 비롯한 남자들은 매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깔고 침낭을 폈다. 핫팩을 양쪽 양말 안으로 넣었다. 2개의 핫팩을 손에 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올겨울 가장 고단한 하루를 보낸 만큼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깼다. 몸이 덜덜 떨렸다. 침낭 밖에 얼굴을 빼꼼 내미니,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 소녀상 앞 일본대사관 터에서 중장비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 노력했다. 

자고 싶어도, 더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춥다고 느꼈을 때 일어났다. 새벽 6시 30분. 한 여고생이 '박근혜 정부는 경술국치 재현 말고 석고대죄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노숙을 하겠다며 불쑥 찾아온 학생이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뒤, 팻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후 일어난 대학생들은 출근길 시민을 상대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오전 9시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과 함께 한 지 24시간이 흘렀다. 돌아가는 길, 취재수첩을 살폈다.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기록 중 6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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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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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①] 스무 살을 경찰서에서 시작하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2길. 평화로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곳에 소녀상이 있다. 앉은키 130cm의 단발머리 소녀의 마음은 어지럽다. 그 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일본은 지난달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을 정해진 일로 보고 있다.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이라고 명시돼있다. 우리 정부가 소녀상 이전을 약속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소녀상 이전은 민간단체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정부 말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위안부 합의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소녀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들 덕분일 것이다. 위안부 합의 이후 첫 수요시위가 열린 지난달 30일부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학생들은 교대로 한뎃잠을 잔다. 오전 9시에 교대한다.

기자가 찾은 1월 27일 오전 9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게 분명한 기색의 학생들이 몸을 일으켰다.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친다. 곧 팔팔한 학생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오늘 함께 24시간을 보낸다"라고 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다. 청년단체 '청년하다'에서 활동하는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게 춥다고 엄살을 피우자, 전기장판 쪽에 앉으란다. 이양선(20)씨는 "저는 '히트택'을 입고 왔다"며 깔깔 웃었다. 오늘 처음 소녀상 지키기 노숙농성을 한다고 했다. 한껏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선배를 따라온 철없는 대학 새내기 아닐까. 양선씨는 지난달 31일 일본대사관 기습시위로 스무 살의 첫날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멋모르는 건 나였다.

- 무섭지 않았어요? 
"일본이 '미안, 이제 됐지?' 하는 식의 사과 방식은 잘못됐잖아요. 많이 화가 났어요.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간 게 아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고, 떳떳했어요."

경찰 조사는 배후 찾기에 바빴다. "누가 교육을 시켰나", "누가 주동자인가"라는 경찰의 물음에 양선씨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서에서 48시간을 보낸 뒤 나올 때, "태어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온 건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요.
"경찰서에서 나온 뒤 엄마랑 통화하는데, "두부 먹었어?"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서 걱정이 묻어났어요."

그 길로 고향 울산에 내려갔다. 엄마한테 "내 이익을 좇기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딸의 신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②] 배후를 찾다

1시간이 지나니, 다리가 저려왔다. 영하의 거리에서 전기장판의 힘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힘들지 않단다. 즐겁단다. 

쌍화탕 네 박스가 배달됐다. 쌍화탕뿐이랴. 따뜻한 커피는 셀 수 없었고, 햄버거·피자·치킨·김밥·토스트 등 각종 먹을거리가 배달됐다.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묻는 많은 시민들을 돌려보냈는데도, 농성장 한 편에 다 소화하지 못한 먹을거리가 쌓여갔다. 점심때는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와서, 학생들에게 따끈한 북어국밥을 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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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낮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날 점심은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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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대학생 이태우(27)씨가 시민들이 후원금을 마련해 제작한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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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생들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25일에 배달된 피자였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배달원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했더니 여중생이었다. 대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니, 이 여중생은 "페이스북으로 대학생들이 밤새 소녀상 옆에서 지키는 걸 보고 도움 될 일이 없을까 해서 간식을 보내드렸다"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비싼 피자라고 걱정을 하자, 이 학생은 "저도 처음 먹어본 피자였는데..."라며 쑥스러워했다. "용돈도 많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에, 이 학생은 "어떤 아주머니께서 후원금을 주셔서 피자를 샀다"라고 까르르 웃었다. 대학생들은 전화통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원회 상황실에서 일하는 이태우(27)씨는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소녀상 사진과 함께 '힘내서 소녀상을 꼭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누군가가 프린터로 뽑아 오려 만든 식권이었다. 태우씨의 말이다. 

"거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얼마 전 몇몇 시민들이 돈을 모아 식권을 만들어주셨어요. 주변 식당에 120만 원가량 내고 식권을 만든 거예요. 식권 한 장 내면 7000원짜리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힘이 납니다. 큰 감동입니다."

[기록③] 정권이 원하는 것

"왜 텐트 안쳐요?"

한 시민이 농성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가 여럿이었다. 소녀상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던 탓이다. 실제로는 소녀상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설치할 수 있다.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한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소녀상 주변엔 경찰버스가 포위하듯 지키고 서있다. 많은 경찰이 소녀상 주변을 감시했다. 경찰은 학생들의 방한 용품 반입을 막고 있다. 학생들은 당초 농성장에 침낭, 텐트, 천막을 들이려고 했다. 경찰은 불법 시위 용품이라며 막았다. 학생들의 항의에 침낭만 허용했다. 대학생 대책위 상황실장 정수연씨의 말이다. 

"우리 대학생들도 '춥고 힘든데 매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경찰도 천막, 텐트 등을 허용하면 농성이 장기화될 수 있으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그만두도록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돼요."

수연씨 추측이 맞다면, 경찰의 판단은 오판이다. 수연씨는 "이미 10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노숙농성을 했고, 2월에도 지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올라온다. 대학생들은 즐겁게 노숙농성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힘들어서 포기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힌다. 2월에는 소녀상 지키기를 넘어, 한일 합의 전면무효 활동을 펼쳐 나간다. 

*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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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인 핫팩에 한 '꼬마 손님'이 붙인 쪽지가 눈에 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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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아들 빈소에서 "건배", 군 지휘관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군 인권 18년의 기록④] 군인 장례비로 지원하는 영현비, 투명하게 집행해야

16.01.30 17:39l최종 업데이트 16.01.30 17:3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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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을 단체조문 하러 가는 군인들.(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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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계기는 2011년 12월, 육군 모 부대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군 헌병대는 김 일병의 유족에게 "평소 고인이 앓고 있던 우울증이 악화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자살'이라고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김 일병의 아버지는 반발했습니다. 군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매우 충격적인 글과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쓴 이는 숨진 아들과 함께 근무했던 전역병. 한 때 세상에 큰 화제가 되었던 그의 양심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역병은 김 일병이 사망하게 된 전후 과정에서 벌어진 부대내 비밀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김 일병의 죽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왜곡과 은폐, 조작. 김 일병의 죽음에 부대측의 잘못이 없었다는 군 헌병대 수사와 전혀 배치되는 폭로였습니다. 

이러한 전역병의 도움으로 김 일병의 아버지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사건의 경위를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익위는 진실을 밝혀냅니다. 알고 보니 김 일병은 입대한 후 선임병에게 폭언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또 자살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자살도 기도했으나 부대측이 이에 따른 적절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권익위는 더 놀라운 비밀을 알게됩니다. 부도덕한 군의 치부가 드러난 그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빼돌린 조의금으로 헌병대 격려금도 줘

김 일병의 아버지가 권익위에 진정한 내용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사망 원인 규명'과 또 하나는 '수상한 돈과 관련한 의혹'이었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김 일병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부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청구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서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서 중 김 일병의 아버지는 매우 뜻밖의 문장을 읽게 됩니다. 장례 과정에서 단 1원도 부대에서 받은 사실이 없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부대가 '조의금을 전달했다'며 쓴 보고서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줬다는 이 조의금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달라고 진정서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권익위에 따르면 김 일병의 장례가 진행되던 이틀째 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 일병의 장례를 지원한다며 김 일병이 속한 부대의 이아무개 상사가 빈소에 있었는데 이때 이 상사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상사가 유족의 돈인 조의금 부의함을 멋대로 연 후 그 안에 든 300만 원을 꺼내 가져간 것입니다. 

한편 이 상사는 이 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조의금을 더 꺼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후 추후 보고서에서는 이 돈을 "유족에게 전달했다"며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은 유족에게 전달된 적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권익위가 확인한 이 돈의 사용처였습니다. 이 상사는 이 돈 중 일부를 김 일병의 사건을 수사중인 헌병대와 기무반장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줬습니다. 이 상사는 왜 김 일병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던 헌병대에게 돈을 줬을까요? 더구나 죽은 김 일병의 조의금으로 왜 수사중인 자에게 돈을 준 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사는 이후 부대 대대장에게도 30만 원을, 그리고 대대와 여단 주임원사에게 80만 원을 격려금으로 줬다고 합니다. 죽은 사병의 조의금을 빼돌려 군 간부끼리 '격려금'이라며 나눠 쓴 황당한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국민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이 썩어도 이정도로 썩었나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관진 국방부장관 역시 대노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수사에 나서도록 군 검찰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사에 나선 군 검찰은 이후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표합니다.

김 일병이 사망한 그해, 김 일병이 사망한 해당 부대에서 연말을 맞이하여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날 여단장을 비롯하여 부대의 주요 간부가 전원 참석했는데, 이날 구입한 삼겹살과 술 등을 빼돌려진 김 일병의 조의금 중 일부로 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 부대 간부가 다 같이 나눠쓰고 먹어버린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 검찰은 이들 부대 간부 중 3명을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피해 사례가 과연 김 일병만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저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을 상대로 확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유족에게 군이 장례 중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는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몰랐고, 유족도 몰랐던 또 다른 군의 '추악한 민낯'. 오랜 기간동안 관행적으로 벌어진 '군 영현비' 집행과 관련한 비리였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현비'로 불리는 이 돈은 한국 전쟁중인 1951년 9월 28일 첫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군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계급과 상관없이 유가족 접대비와 화장비, 장의비 등의 명목으로 영현비를 지급해 왔는데 2011년 12월까지는 이 금액이 총 2,674,000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액수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민원이 거듭되자 국방부는 2012년부터 300만 원 늘린 5,674,00원을 영현비로 지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꾼 규정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영현비 중 1,674,000원은 '유족 여비'로 반드시 유족 통장에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0만 원은 유족의 장례를 지원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은 김 일병의 '조의금' 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방부의 지침과 달리 영현비가 바르게 집행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유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1,674,000원의 '유족 여비'도 군 부대가 주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조의금 뿐만 아니라 '유족 여비마저' 빼돌린 것입니다.

만약 영현비가 정상 집행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부대측이 유족에게 영현비에 대해 설명한 후 '유족 여비'를 받을 통장 계좌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게 될 영현비 400만 원을 장례 기간중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유족과 협의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장례 비용이 초과되지 않도록 계획적 지출을 도와야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족들의 경험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넋이 빠진 상태로 영안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대측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이후 술과 고기, 음료와 떡 등 음식물을 빈소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처음, 부대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우가 죽었다고 부대가 장례는 치러주는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돈이 국방부가 주는 장례비였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지막 발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장례 비용을 전부 부대가 내는 줄 알고 뭘 사 오든 참견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부대 행정 보급관이 종지 한 장을 가져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장례 중 지출 비용이라며 유족에게 "지급받은 영현비보다 초과한 비용"이라며 그 돈을 유족에게 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구받은 초과 비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니, 최소 수 십 만 원에서 많게는 최대 80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기억은 발인날 경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장례 후 당연히 음식과 음료, 술, 과일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부대측은 유족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전부 자기들이 가져 갔다고 합니다. 남은 술과 음료는 반품도 가능할 텐데 왜 부대측이 그것을 일방적으로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과 비용은 유족에게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더구나 아들이 군에서 자살했다는데, 부고를 널리 알리는 유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대부분 가까운 친인척 20~30여 명 정도가 조문객의 전부인데 어떻게 국방부가 지급한 영현비 5,674,000원을 전부 다 장례 비용으로 썼다는 것일까요?

군인 장례비로 지급하는 '영현비'는 눈먼 돈?

도대체 그 많은 음식과 술, 음료, 떡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바로 장례기간 중 조문한 부대의 간부 등 군인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빈소로 매일같이 군인들이 조문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과 고기, 밥과 떡과 국, 과일, 음료수를 먹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모습이 유족에게는 마냥 고맙기만 했을까요?

더구나 부대측이 이러한 음식을 구입하다 보니 영현비로 지급된 총액 5,674,000원을 다 썼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어 믿을 수도 없다고 유족은 말합니다. 추후 권익위가 확인해 본 결과 영수증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으며 또 있다 해도 대부분이 간이 영수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허위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문제로 유족 중에서 부대측과 다퉜다는 사람은 또 없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그래서 아들을 화장하러 가는데 이런 문제로 싸울 기력이 없어 황당하지만 '그냥 부대측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는 것이 대부분의 유족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확인한 후 국회 김광진 의원실은 2014년 9월경,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세 가족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를 밝혀주고 또한 미지급된 유족 여비를 어디에 썼는지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 권익위는 지난 2012년 이래 육군에서만 모두 360건의 영현비가 집행되었는데, 그중 64명의 유족에게 군이 1,674,000원의 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대측은 이처럼 지급해야 할 유족 여비를 장례 비용으로 전부 다 써 버렸다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믿는 유족은 없었습니다.

권익위는 이후 육군본부에 미지급한 유족 여비를 전부 지급하도록 결정하는 한편 관련자와 해당 부대를 징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는 영현비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정비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뻔 했던' 영현비 비리 관행이 그나마 바로 잡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 

아들 죽은 빈소에서 진급 축하 건배 '참담'

그런데 이 영현비 문제를 조사하던 중 듣게 된 한 어머니의 사연은 정말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육군에서 복무중이던 아들을 잃은 이아무개 하사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어머니 역시 영현비와 관련한 설명을 부대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 중 어머니는 부대에 미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부대가 자기들 돈으로 음식과 술을 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너무 미안해서 "우리 돈으로 사 올테니 그만 사라"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돈이 유족에게 주는 돈까지 주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부대가 썼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어머니는 '우롱당한 기분'이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부대가 돈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쩔쩔매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머니 가슴에 남은 일은 장례 중 빈소에서 본 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아들이 죽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같은 부대 장교들이 조문 와서 빈소 한쪽에 앉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귀에 들리는 말이 있더라구요. 장교 중에 한명이 진급을 한 것 같아요. 그걸 축하한다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빈소에서 축하 건배를 하더라구요. 건배를. 제가 정말 그 장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거기서 건배를 하는게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이게 전우애냐"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들은 죽었는데 그 빼돌린 조의금으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그리고 유족에게 지급해야 할 여비도 주지 않은 채 그 돈으로 술과 떡과 고기로 회식을 하는, 그러다가 죽은 동료의 빈소에서 진급을 축하하는 건배를 외치는 모습에 어머니는 한이 맺힌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군은 바뀌어야 합니다. 예능 프로인 '진짜 사나이'에서 포장되는 전우애가 아니라 목숨을 잃은 전우와 그 유족에게 '정말 같이 울어주고 배려해 주는' 대한민국 군대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적어도 전우와 그 전우의 유족에게 이런 문제로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정말 비극입니다. 

만약 군 고위 관계자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 군을 매도하는 참 나쁜 기사"라며 불쾌해 하실까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런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 군,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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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의 총알받이 용병, JP가 말하지 않은 베트남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1/31 11:00
  • 수정일
    2016/01/31 11: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김종필에게 묻는다 ]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란다? 명분도 실리도 없었던 비참한 전쟁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1월 31일 일요일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이 기사는 스토리펀딩에서 후원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펀딩으로 이동]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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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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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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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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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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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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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나라’, 이토록 불행한 나라의 우리들

[김원 발뉴스] “세월호에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김원 문화평론가  |  balnews21@gmail.com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 싶다면 ‘피해자’가 돼 보면 된다. 대부분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순간 당사자는 바로 알게 된다. 대한민국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확인 받는 순간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이 없어진다. 입도 목소리도 없이 재갈이 물린 채로, 피해자가 직접 피해사실과 사건 경위를 밝혀내고 증명하고 심지어 주변을 ‘설득’해야 한다. 이 높고 험한 철벽 앞에 좌절하지 않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은 불가능해 보인다. 눈물과 신음소리만으로 뭘 어찌해볼 수 있겠는가.

   
 

반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혐의’가 돌아오려면 웬만해서는 아주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정황은 잊히고 증거는 점차 사라지기도 한다. 가해자가 ‘조직’일 경우 책임자가 누구인지조차 웬만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럿일수록 밝혀지지 않고, 강자일수록 숨겨진다. 때로는 ‘피해자’가 너무 극성스럽게 억울함을 호소한다면서, 여론이 악화되다 못해 주변이 가해자를 편들어 주기도 한다. 두둔하고 동조까지 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시끄럽다고.

피해자는 뼛속까지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피해자는 굉장히 빨리 ‘국민’에서 제외된다. ‘국민’에서 제외되는 방식은 이미 오랜 인습과 관례는 물론이고 분단 체제 이용은 필수이며 아주 광범위하고도 다채롭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입이 없다. 들어줄 타인들의 귀도 없다. ‘피해자’는 제일 먼저 사건 현장으로부터 배제된다. 목소리를 빼앗긴 데 이어, 눈도 가려진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그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때부터 발이 묶인다. 이후로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소식조차 제한적인 것만 제공된다. 피해자가 외치는 ‘진실’은, 풍문으로도 떠돌지 않고 묻힌다.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온다. 손도 묶인다. 피켓 하나도 들기 힘들어진다. 만약 들게 된다면, 그 하나의 피켓을 묻어버릴 산더미 같은 대응 공세에 압사될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해자는 머지않아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 이 사회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으로 사건 자체를 묻어버리고 싶어 한다.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된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들은 미수습자 9명 포함 262명이다. 현재 추정으로는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희생자 대부분이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유가족’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참사의 사고 경위는 무슨 이유인지 처음부터 오리무중이었고, 공식 직함을 가진 ‘관계당국’의 모든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시간만 끌었다.

그렇다. 그 아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점차 ‘피해자’가 되어갔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지나친 언론 공세에, 만에 하나라도 반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유가족은 뭔가 ‘대우 받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는 그저 피해자가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당국의 매뉴얼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쪽에 가까웠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더 잃을 것은 없다’며 맞섰던 “세상 물정 모르던” 부모들은, 그 슬픔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지독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2014년 4월16일 이후부터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했던 이 참사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피해자들보다 가혹하게 이 새끼 잃은 부모들을 몰아세웠다. 영화 <나쁜 나라>는 그 탄압처럼 무자비했던 1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았다. 세월호 시민 참사기록위원회 작업의 일환으로 정일건, 이수정 감독이 공동 연출을, 김진열 감독이 책임 연출을 맡았다. 영화를 보기 전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막힘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탄식조차 그냥 삼켜야 했다. 이것은 지난 1년 9개월이 넘도록 우리가 매일 보아온 상황.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은 없지 않은가. 그저 1년 9개월을 두 시간으로 압축했을 뿐이다.

하나의 일관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관계자’로 오신 높으신 분들의 모두 한결같고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모두 짠 듯이 표정도 안색도 없었다. 누구도 말다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임에도 전혀 언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분절되고 엉켜버린 말들조차, 그나마도 그날의 ‘대표’만 입을 뗄 뿐이었다. 나머지는 입조차 열지 않았다. 실은 ‘공직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침묵의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친 유가족들의 푸념과 항의가 터지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잘못’에만 지적이 오갔다. 그게 다였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 드물게 얻어낸 ‘성과’에 가까웠다.

세상에 이런 불행한 참사도 또 없겠지만, 이런 잔인한 탄압도 또 없을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만나려야 만날 수도 없고, 어마어마한 경찰병력만이 유가족들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전시 상황이 따로 없었다. 슬픔이라니. 그 또한 너무나 고와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다. 매일 밤 부모들이 지쳐 쓰러지듯 몸을 뉘어야 했던 찬 바닥과 폭우 속의 노숙,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이 되어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토록 불행한 나라. ‘나쁜 나라’이기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나라 같은 저기는 어디인가. 피해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매뉴얼’을 바로잡는 것조차, 피해자들이 그 입도 손도 발도 묶인 몸으로 맨바닥을 기어가며 해내야 하는 일인 것인가.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생명 자체가 존중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나와 내 가족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가. 그 믿음과 희망을 지키는 방법은,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우는 도리뿐이라고 유가족들은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연대하지 않는 이상, 안전 사회는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말이다.

영화 <나쁜 나라>를 보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 곁에서 잠시나마 그 여름과 가을 겨울을 함께 해봤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될 것이다.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음이, 그나마 지금 우리에게는 위안이고 구원이라 믿고 싶다. 저 심연에 갇힌 세월호로부터 반드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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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부고] 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기 위해 북녘 송환도 포기한 통일투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1/30 [10: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영쇠 선생의 영정     © 전주 수요촛불 채주병@sanha9008

 

▲ 인정많은 마음씨, 투절한 애국심, 강직한 새사회 건설 의지로 평생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안탑깝게 영면에 든 고 유영쇠 선생의 생전 모습 

 

▲ 유영쇠 장기수 선생

 

해방 후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0여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유영쇠 선생이 1월29일(금) 새벽 6시 12분 영면에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원광대병원101호에 마련되어 있으며 발인은 내일 31일 일요일입니다.

 

30일 토요일 6시에 원광대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진행합니다.

 

유영쇠 선생이 얼마나 인정이 많고 투철한 진보적 미래 개척 의지를 지녔는지, 통일을 얼마나 절절히 염원하였으며 그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는 약력과 이재봉 교수의 '내가 본 유영쇠 선생'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재봉 교수의 글에 담긴 유영쇠 선생님의 투철한 애국심, 남녘의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북녘 송환도 미룬 유영쇠 선생의 불굴의 통일의지가 가슴을 울립니다.

 

 

유영쇠 선생님 약력

 

1928년          • 10월 30일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
1937년          • 가정형편 곤란으로 학교 진학 못하고 지역 야학에서 공부
1942년          • 금산 광산 등 임금노동자 생활
1945년          • 성인교육강습소 수학
1945~1947년    • 야학당 개설 및 운영, 동네 대소사 주관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신망 받음.
1947년          • 이리중 입학
1948년          • 형편곤란으로 김제중앙중 편입. 김제 누님 댁에서 숙식.
1949년          • 김제농고 1년 입학
1950년          • 김제농고 재학중 의용군 1기 자원 입대, 귀향 후 복학.
                   동료 7명과 같이 정읍 산외면으로 입산, 소대 교양사업 책임자 활동
1950년~51년3월 • 유격대 지원, 정찰대 활동
1951년 9월      • 금구 오봉리 박씨 의사 안내 후 복귀 중 1차 선 단절과 이후 선 복귀
1952년 3월      • 상목굴 자폭(군당위원장 박봉수 등 사망), 2차 선 단절
1952년 4월      • 2차 선 단절. (군사작전위주의 지대 개편. 유격대는 소부대 분산활동)
1952년 7월      • 2차 선 복귀 후, 현지지도책 임명
1954년 4월      • 김제군당 위원장 “온동수” 동지와 함께 황산에서 체포
1954년 4월 이후 • 온동수 군당 위원장 총살형, 유영쇠 선생 무기징역형 수감
1954~1983년    • 고법에서 무기형 최종확정, 감옥생활, 감옥투쟁. 
1983년 2월      • 장기수 복역 중 출옥 
1983~2013년    • 출옥이후 노숙인 시설인 익산 자선원 거주 및 업무 지원.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범민련남측본부, 전주평통사 등 단체활동 참여
                   평화통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현장투쟁에 지속 참여
2003년          • 이라크 파병 반대 국회앞 집회 참여
2004년          • 국가보안법 폐지 1000인 국회 앞 단식 농성 참여
2005년          • 쌀협상 비준안 반대 여의도 농민대회 참여
2006년          •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0년          • 제주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1년          • 한미 FTA 비준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3년          • 전립선암으로 원광대 병원에 입원하시는 길에 4.19 희생자 추도식 참여 
2014~2016년    • 지병으로 익산 원광효도마을 실버의 집(요양원) 거주
2016년          • 1월29일 새벽 6시12분 지병으로 향년 89세 사망

 

 

내가 본 유영쇠 선생 

                                                           이재봉 (원광대 사회과학대학장, 남이랑북이랑 대표)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법대 학생이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장기수 어르신을 알게 됐는데 그 분께서 내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어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듣고 있던 북한 관련 수업에 관해 소개했더니 호기심을 표하시더란다. 매 학기 두 강좌를 개설하는데도 수강 신청 기간 첫날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던 강좌인데다 일반인 청강생들도 더러 있을 때라, 누구든지 기꺼이 환영하겠다고 답했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비쩍 마른 70대 노인이 맨 앞에 앉아 내 말 한 마디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해가며 청강했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직접 물었다. 계속 들어도 되냐고. 한 달 쯤 지나 종강하게 되자, 학기 중간 이후부터 수강했으니 다음 학기 첫 수업부터 출석하고 싶다고 했다.

 

새 학기 개강부터 종강까지 16주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지각, 조퇴, 결석하지 않고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 모임이 열려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다음날 수업이 있으면 심야 버스나 기차를 타고 꼭 익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침 9시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유영쇠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연을 들어보니 1950년대 초 고향인 김제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4년 붙잡혀 1983년까지 29년간 감옥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어 부랑인 수용시설인 이리자선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기막히게 기구한 신세였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무슨 모임을 가져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내가 이끌던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라 택시는커녕 버스도 맘껏 타지 못한 채 고물 자전거에 올라 여기저기 강연이나 모임에 참석하며 회비도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가진 게 적어 많이 내지 못한다고 안타깝고 미안해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날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05년 무렵 장기수들을 북녘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은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북쪽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향인 남쪽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북쪽에도 피붙이는 없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오셨는데, 북녘으로 가시면 우선 몸이 편하시겠죠. 당국에서 집도 마련해주고 원하면 결혼도 주선해준다니까요. 그러나 맘은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젊었을 때 목숨 내걸고 싸우며 추구했고, 감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전향을 거부하며 추구해 오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북녘 체제에서 찾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배반감까지 맛보시지 않겠어요?”

 

“교수님, 나는 내 육신이나 마음이 편하고 편하지 않고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어야 통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북녘 인민들이야 모두 통일을 바라지 않겠어요?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도자가 통일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테고요. 그러나 여기 남쪽에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잖아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통일을 원하도록 이끄셔야죠. 거기서는 통일운동 하실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선생이 더욱 존경스러워졌다. 남쪽을 택할지 북쪽을 택할지 갈림길에서, 난 맨 먼저 몸과 맘의 안락함을 떠올렸지만, 70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온 노 혁명가는 육신의 고통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평화와 통일에 몸 바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2013년 설날 아침 아내와 모처럼 선생의 거처 이리자선원을 찾았다. 거의 매월 수천 명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내 글에 가끔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터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듯했다. 몸내가 역겨울 정도로 풍겼어도 80 중반의 노인이라 그러려니 했다.

 

2014년 3월 말 아침 선생이 전화를 해왔는데 받으니 말이 없었다. 두어 번 반복됐다. 오후엔 내가 몇 차례 전화했지만 선생이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00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4월 초 아내와 찾아간 요양병원에서 먼저 간호사를 만나 선생의 병세를 물어보니, 2013년 9월 입원했는데 치매와 전립선암 등 무려 14가지 병을 지니고 있단다. 병상에 누워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생과 말과 글을 섞어 겨우 대화를 나눴다. 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해 유골을 평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유언이었다. 생전엔 남쪽에서 통일을 위해 헌신하라고 권했던 터라, 사후엔 북녘에서 사회주의 이상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는 게 좋을 듯해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선생을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얘기지만, 당신의 생질이 있는데 그의 외할머니인 선생의 어머니 옆에 묻혀야 한다고 반대한단다. 유골을 둘로 나눠 어머니와 동지들 옆에 절반씩 묻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병원 체제를 개선해 달라고 했다. 환자를 먼저 배려하는 게 아니라 병원 운영의 편의를 앞세운다면서. 선생의 안전을 위해 가끔 몸을 병상에 묶는 간호사들을 탓하는 것 같아 병원을 바꿔 주겠다고 하자,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도 운영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혼자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며, 정신적으로는 오락가락하는 중증 환자지만, 역시 혁명가다운 발상이었다.

 

4월 중순, 지금까지 선생을 보살펴온 평화운동가들과 협의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어우러져 있는 원광효도마을로 옮겼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틈틈이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십 수 년 전 <북한 사회의 이해>를 수강하며 선생을 소개했던 법대 졸업생이 경상도에서 달려오니 선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바로 어제였다. 의 (義)로 맺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행복한 모습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기를 염원한다.-201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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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1인 시위 : 그녀는 왜 광장에 섰나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국에 살던 시절, 길에서 그 흔한 '복이 참 많으시네요' 한마디 들어본 적 없지만 ('기운이 독특하시네요' 같은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딴지에서 '프랑스 특파원'이라는 직책 아닌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음이 참 기쁘다. 그래서 내게 지면을 허락한 딴지 측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딴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프랑스 시각으로 2016년 1월 26일 저녁, 파리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1인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다. 네덜란드에 있는 백남기 씨의 둘째 딸이 진행하는 1인 시위에 지지와 연대를 보여 주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고. 지난 1월 1일 '희망나비' 단체의 위안부 문제의 진정성 있는 대처를 촉구하는 집회에 대한 제보 이후 두 번째. 부르면 가야지. 나를 불러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게다가 한국으로부터 9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외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고, 또한 메아리가 되려면 언론이라는 존재는 필수적이다. 딴지의 프랑스 특파원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혼잣말을 지껄이며 트로카데로 광장에 도착했다.

 

한국은 요즘 정말 살인적으로 춥다는데, 프랑스는 그 정도는 아니다. 대신 날씨가 참 우중충하다. 게다가 파리 테러의 여파로 관광객들도 확연히 줄었다. 파리 샹젤리제 근처, 온갖 명품 부티크가 모여 있는 8구의 몽테뉴 가(Avenue de Montaigne)에서 일하는 친구는 요새 워낙 손님이 없어서 이번 달에는 보너스가 거의 없을 지경이라며 울상을 짓는다. 트로카데로는 파리 인권 선언으로도 유명하지만 에펠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에 파리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들르는 코스. 2016년 1월 27일 오후 2시 47분경 도착한 트로카데로 광장. 그마저도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이 반 정도는 줄어든 듯, 우중충한 날씨까지 겹쳐 더욱 황량해 보이는 광장 구석에 두 명의 아시아인 여성이 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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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서 내 정체를 밝히기 전 도촬. 예고한 1인 시위를 10여 분 앞둔 시각, 이들은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듯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의 표정에 어딘가 모를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는 듯 하여, 도촬을 아니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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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에서 나왔다고 인사를 했다. 포즈를 취해 달라니 플래카드 뒤로 숨어 주는 이 센스, 훌륭하다. 이번 1인 시위를 기획한 이는 현재 파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박미리내 씨. 지난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 씨의 차녀 백민주화 씨가 네덜란드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동참했다고.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현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따뜻하고 진지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은 결국에는 그 사람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모두 그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다. 혼자일 수 없다. 가끔씩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리고 2016년 1월 27일 오후,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의 한 구석에 온 몸으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외침에는 그 어떤 물리적 요소도 없었지만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있었고, 결국 파리에서 일어나는 집회에 항상 관찰자로만 참여했던 나 역시, 오늘만큼은 적극적으로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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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당신이 한국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① 집회 참가 시 경찰이 직사로 쏘는 물대포에 맞음 

② 응급 상황으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중이라도 경찰의 물대포는 계속 따라옴 

③ 당신의 생명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집회 참가만으로도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함 

④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짐 

⑤ 경찰과 정부는 사과하지 않음 

 

이라고 적혀 있다. 어쩐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나 발생할 것만 같은 이 일들이 바로 우리나라, 한국에서 2015년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은 지금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도 참으로 비현실적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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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는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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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카데로 광장은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을 마주하고 있어 언제나 강풍이 분다. 게다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사방이 훤히 뚫린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손이 얼 때까지 바람에 날아갈까 꼭 쥐고 있는 플래카드 아래에는 백남기 농민 이슈 말고도 세월호 문제, 국정화 교과서 문제가 함께 쓰여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참 문제들이 많기도 하다.

 

구호도, 노래도, 서명 운동도 없는 시위인지라 많은 이들이 장시간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이 전하는 메세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오늘 시위의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한국 관광객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 정도랄까. 어쩐지 어색하지만 용기를 낸 듯,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두 사람에게 와서 환히 웃으며 "힘내세요!"하고 멋쩍게 웃으며 갈 길을 재촉한 커플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가는 척 하며 한국어로 된 메세지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한국인 가족도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같은 질문을 각기 다른 두 사람에게 받았다. 두 사람 모두 가족 단위로 파리에 여행을 온 이들인 듯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의 이슈를 접하는 것이 신기한 듯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쓰여진 플래카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던진 질문,"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한 사람은 곧이어 "백남기 씨가 누구예요?"라고 물어 보고는, (내 느낌상으로는 뭐하러 쓰잘데기 없이 프랑스에서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시위를 하는 일행들을 훑어 보고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아내와 함께 에펠탑 사진을 찍으러 트로카데로 광장에 들른 듯한 중년 남성은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1차 민중 총궐기, 그러니까 지난 11월 14일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 날의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말을 붙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 역시 농민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노라 이야기했다. 농촌의 많은 주민들이 여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며 한탄도 했다. 백남기 씨의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지지 역시 잊지 않았다. 백남기 씨의 일이 그저 남 일이 아닌 것이다. 잠시나마 한국을 떠나 잊고 싶었던 고국의 온갖 사회문제들은 결국 프랑스에서까지 그를 따라와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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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길' 소속의 김준식 씨는 결국 아내의 재촉에 트로카데로까지 와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는 일행과 가이드에게로 돌아갔다. 에펠탑 사진보다 집회를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과의 사진을 선택한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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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진행한 집회는 두 명으로 시작하여 네 명으로 끝을 맺었다. 그 사이 꽤나 진지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베트남에서 온 한 박사과정 학생은 한국의 박근혜 정부를 독재라 보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고, 우리는 꼭 폭력이 수반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이 독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다시 "박정희는 독재자인 것이 확실하지만 박근혜까지 독재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독재 정치의 사전적 의미가 '민주적인 절차를 부정하고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임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음은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이슈들이 정신이 없을 만큼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적지 않은 것들이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묻히고 잊혀져 간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방어 기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분명 있다. 우리 사회의 가치를 위협하는 그 모든 이슈들이 제대로 해결되지도 못한 채 잊혀져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알량한 딴지 특파원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계속 그 자리에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이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버티며 서 있을 것이다.

 

 

 

 

아까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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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근 “특조위 활동기한 선체조사 완료할 때까지 보장해야”

세월호 인양 7월로 늦어진다?…“애초에 6월 인양 가능성 거의 없었다”유경근 “특조위 활동기한 선체조사 완료할 때까지 보장해야”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 <사진제공=뉴시스>

세월호 인양 완료 시점이 애초 계획했던 올해 6월에서 7월 말께로 한 달 늦어질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연합뉴스> 등은 우리 정부와 선체 인양계약을 맺은 중국 상하이샐비지가 작년 8월부터 수중작업을 벌인 결과 현장여건이 복잡해 모든 단계의 작업 일수가 늘었기 때문이라며 이 같이 전했다.

그러나 세월호 특조위 권영빈 진상규명소위원회 위원장은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올 7월로 인양이 늦춰졌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처음부터, 그리고 인양 작업 진척도를 보더라도 올 4월이나 6월 인양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년 8월부터 3달 정도 인양작업을 수행한 상하이 샐비지가 그 시점에도 실제 세월호 인양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올 7월 말에는 실제로 세월호가 인양되느냐”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권 위원장은 “작년 8월에 상하이 샐비지를 인양업체로 선정했을 때, 인양 시기가 올 가을에서 올 7월로 당겨졌다”는 보도와 관련 “여기에도 트릭이 숨어있다”며 “해수부와 상하이 샐비지 사이에 인양작업 계약기간은 올 12월 말까지로, 상하이 샐비지는 올 연말까지만 인양하면 계약 위반이 아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그는 ‘go발뉴스’에 “상하이 샐비지와 해수부가 안정적으로 인양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국민에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인양 시기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도 페이스북을 통해 “7월말에 인양을 완료한다면 특별조사위원회 활동기한은 최소 2017년 1월 말 또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강조,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전제로 했을 때 최소 6개월의 미수습자 수습 및 선체조사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유 위원장은 “정부가 협조하지 않으면 (인양에)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면서 “분명한 것은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기한은 선체조사를 완료할 때까지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특조위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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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왜 트럼프를 좋아할까?

 
[주간 프레시안 뷰] 미 대외정책이 낳은 괴물 정치인, 트럼프
 
| 2016.01.29 17:51:43

 

미국인이 미국 내에서 1년간 테러 공격에 의해 사망할 확률은 350만 분의 1이라고 합니다. 0.00003%의 확률입니다. 로토 당첨만큼이나 확률이 낮다는 얘기죠.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케이토연구소 존 뮬러 연구원의 분석 결과입니다.

반면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51%가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이 테러 희생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 수치에 근거한 객관적 테러 위험 확률(0.00003%)에 비해 무려 170만 배나 높은 수치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객관적, 통계적, 현실적 테러 위험보다 170만 배 높은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Here’s the Thing About Terrorism Obama Won’t Tell You)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정부가 해외에서 저지른 파괴적 대외정책의 실상을 미국 국민이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와는 반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비판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는 "미국 국민이 알고 있는 미 대외 정책과 미국 정부의 실제 정책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역사상 최대의 프로파간다의 승리"라고 지적합니다.  

미국 정부는 실제로는 금융기관과 군산복합체, 대기업 등 상층부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해 중동, 우크라이나 등 세계 도처에서 파괴적 군사 개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세계의 자유와 민주, 인권과 정의를 위해 대외정책을 펼친다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해 온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미 대외정책의 궁극적 역풍(Blowback), 트럼프 

한편 필리핀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최근 미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에 대해 미국의 대외정책이 불러온 최대의 '역풍(Blowback)'이라고 말합니다.  

'역풍(Blowback)'이란 말은 1980년대 일본 경제 기적의 비결을 파헤친 보수적 경제학자였다가 탈냉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변모한 고 차머스 존슨 교수가 처음 대중에 소개한 말입니다. 당초 '역풍(Blowback)'은 중앙정보국(CIA)이 벌인 비밀공작의 여파로 CIA 요원 또는 미국인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사태를 지칭하는, CIA만의 은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차머스 존슨이 <역풍(Blowback): 미 제국의 비용과 결과>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 지 1년여 후, 9.11사태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존슨의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아프간전쟁 이후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벌여온 군사 개입이 9.11테러라는 비극을 초래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죠. 

하지만 9.11이후에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앞에 말한 것처럼) 미 국민의 근거 없는 안보 불안은 커져만 갔고, 이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막말 정치인이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벨로 교수는 트럼프가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한 것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미 대외정책 사상 가장 위험한 '역풍(Blowback)'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무슬림 및 멕시코인들에 대한 증오 부추기기입니다. 무슬림이 미국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법 입국한 멕시코인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M&M(Muslim & Mexican) 전략'으로 불립니다.

그는 3600킬로미터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보안장벽을 세우고 불법 입국한 멕시코인과 가족들을 추방할 것을 주장합니다. 또한 무슬림의 미국 이민 및 입국 전면 중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12월 2일 샌 버나디노에서 무슬림 부부에 의한 총격으로 미국인 14명이 사망한 이후 트럼프의 주장은 보수적 백인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이민을 제한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무고한 무슬림과 멕시코인들을 미국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지목하는 것은 무책임한 선동정치라고 벨로 교수는 비판합니다. 무슬림과 멕시코인은 미국에 대한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의한 피해자라는 것이 진실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벨로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이라크에서의 역풍 

2003년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테러를 없애기는커녕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거대한 테러 세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후세인 정권은 이슬람 테러 세력과는 앙숙이었던 데다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에서 소수파인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시아-수니파 간의 내전이 격화돼 시리아, 예멘으로 번졌으며 수니-시아파의 종주국인 사우디와 이란이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특히 이라크 수니파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와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지도에 의해 2014년 6월 이후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쳐 인구 600만 명을 통치하는 이슬람국가(IS)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 테러로 13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잔혹한 테러극을 펼쳤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2월 2일 샌버나디노 테러는 IS 지도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닌 자생적 테러라는 점입니다. 즉 IS의 선전에 따라 지구촌 어디에서든 자생적 이슬람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세계적인 이슬람 테러의 단초가 됐다는 얘깁니다.

멕시코에서의 역풍 1: CIA 커넥션 

1980년 이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의 마약 유입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배후에는 CIA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내내 레이건 정부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미 의회의 금지명령(볼랜드 수정법)에 의해 미 정부의 공식 지원은 불가능했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콘트라 지원을 위해 두 가지 우회로를 뚫었습니다. 

하나는 이란-콘트라 거래입니다. 당시 미국의 적성국이었던 이란에 은밀히 무기를 팔고 그 대금 일부를 콘트라 반군에 전달한 것입니다. 레이건 정부 말기, 이 거래가 드러나면서 레이건은 탄핵 위기에까지 몰립니다.  

다른 하나는 멕시코에 대규모 마약 생산 및 대미 유통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 대금의 일부를 콘트라에 보내는 조건이었죠. 그 배후가 바로 CIA였습니다. 니카라과의 자주적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미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좀먹는 코카인 등 마약의 미국 유입을 눈감아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까지 미미했던 멕시코의 마약산업은 1980년대 이후 급성장합니다. 지난 해 여름 극적 탈옥 이후 배우 숀 펜과 인터뷰했다가 체포된 멕시코의 마약왕 '엘 차포' 구스만은 사실상 CIA가 키워낸 것입니다. 멕시코의 저명한 탐사전문기자 아나벨 에르난데스가 쓴 <마약 왕국: 멕시코 마약왕과 배후의 대부들>이란 책에 그 실상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의 역풍 2: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1980년대 초 외채 위기 이후 멕시코 경제는 미국의 본격적 경제 침략을 당합니다. 일례로 20세기 초 멕시코혁명에 의해 확립된 농지의 공동소유제도가 미국 자본의 침탈에 의해 점차 사유화되고 농민들은 농토에서 쫓겨났습니다.  

특히 1993년 발효된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협정으로 멕시코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됩니다. 2003년 카네기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협정 이후 10년간 130만 명의 멕시코 농민이 농지(와 직업)를 잃었습니다.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은 값싼 미국산 농산품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생계 수단을 잃은 멕시코인들에겐 그냥 앉아서 죽느냐, 북으로('엘 노르테': 미국으로) 가느냐의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벨로 교수에 따르면 2006년 현재 멕시코 인구의 약 10%가 미국에 산다고 합니다. 멕시코 노동 가능 인구의 15%가 미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멕시코인 7명 중 1명으로 미국으로 불법 유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NAFTA가 멕시코 농업을 파괴한 결과입니다. 멕시코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미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대자본이 멕시코인의 삶의 기반을 파괴했기에 멕시코인은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서민들은 멕시코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꼴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미국의 대다수 시민들이 자국 대외정책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서민들은 모두 미국 대자본의 피해자들입니다. 멕시코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만 미국인 대다수는 잘 모릅니다. 
 

▲ 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



이것이 바로 '트럼프 열풍'의 비밀입니다. 벨로 교수가 '미 대외정책의 궁극적 역풍'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농촌의 백인 등 미국의 대다수 서민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곤경의 원인이 미국 대자본 및 이와 결탁한 미국 정부의 대외 정책 때문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 대외정책의 피해자인 무슬림, 멕시코인 등 외국인을 가해자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벨로 교수는 현재 미국의 대선 후보 중 오직 버니 샌더스만이 미국 내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인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 국내 민주주의의 위기와 잘못된 대외정책의 실상과 원인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The Ultimate Blowback from U.S. Foreign Policy? Donald Trump.)

오는 2월 1일 아이오와 당원대회, 9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시작으로 2016년 미국 대선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공화당에서는 트럼프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가 피 말리는 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힐러리는 리비아와 우크라이나 등에서 침략적 대외정책을 주도한 장본인입니다. 힐러리가 이긴다면 미국의 앞날은 별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샌더스가 이긴다면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미국의 진로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샌더스에 대해서는 박영철 전 원광대 교수의 <프레시안> 기사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기사 : 2월 1일, 어쩌면 미국이 빨갛게 물든다 )
(☞관련 기사 : "취업난·정치불신…미국 젊은 층 샌더스로 움직인다")

한편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트럼프가 후보가 될 경우 '본선은 필패'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십시오.

(☞관련 기사 : 공화당 지도부, 트럼프 버리고 블룸버그 택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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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조국통일 최후승리가 겨레 부른다”

 
범민련 남북 해외 공동 결의문 채택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1/29 [11: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정섭 기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제16차 공동의장단이 회의를 개최하여 3자연대를 강화하여 나갈 것과 반전평화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6.15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남과 북 해외 범민련 회장단은 지난 28일 공공 회장단 회의를 열어 공동결의문을 채택, 발표하였다.

 

범민련 제16차 공동의장단회의는 지난 28일 13시(서울시), 서울, 평양, 도쿄에서 열렸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번 회의 의제는 <조국통일3대원칙과 남북공동선언들의 기치 밑에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한 2016년 범민련의 활동방향에 대하여>로 열렸으며, 안건으로 <남북해외 공동기조보고>와 <공동결의문>을 합의 채택하였다고 밝혔다.

 

범민련은 지난해에 조국통일 70년 운동사에 새겨진 범민련의 자랑찬 25년을 돌이켜보고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성취하기 위한 간고하고도 피어린 투쟁의 나날을 회고했다.

 

범민련은 “결성이후 지난 25년간 통일애국의 더운 피와 고귀한 생을 바치며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하여왔다.”며 “범민련의 조국통일운동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의 채택과 그 이행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상기했다.

 

범민련은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민족의 대단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적 역할을 하여왔다.”면서 “조국통일은 외세에 의하여 갈라진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고 해내외 온 민족의 대단합을 실현하는 문제로 조국통일운동은 필연적으로 남북해외의 3자연대운동을 요구하게 된다.”며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 단체는 “범민련의 생명력은 남북해외의 3자연대운동에 있으며 범민련의 위력은 해내외 각계각층과의 굳건한 연대단합을 실현하는데 있다.”며 “범민련이 높이든 남북해외 3자연대운동은 오늘날 조국통일운동의 기본방식으로,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전 민족적 흐름으로 되였으며 민족의 대단결을 추동하는 힘 있는 원동력으로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단체는 “범민련은 이 땅에서 전쟁을 막고 나라의 평화와 겨레의 안녕을 수호하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투쟁하였다.”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 6.15시대를 전진시켜나가기 위한 투쟁은 곧 이를 가로막으려는 내외호전세력의 악랄한 동족대결과 전쟁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전했다.

 

또한 “오늘 범민련은 남에서 유신독재가 되살아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합법적인 모든 활동이 이적으로, 종북으로 매도되어 국가보안법의 희생물이 되고 공안탄압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는 엄혹한 정세 속에 처해있다.”고 남한 당국의 탄압을 고발했다.

 

이어 “현 시기 조국통일운동에서 범민련의 지위와 역할을 보다 높여나가기 위한 중요한 요구는 우리 겨레에게 불굴의 신념과 통일애국의 의지를 더해주며 민족통일대행진의 앞장에서 휘날려온 범민련의 기발을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더욱 힘차게 나부끼게 하는 것”이라며 “범민련은 언제나 겨레의 자주통일대행진의 선두에서, 반전평화운동의 한가운데서,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대오 속에 범민련의 기발이 함께 서있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커다란 장애가 가로놓여있다.”면서 “동족대결의 역풍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외세는 민족의 화해와 남북관계개선을 가로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통일은 겨레의 한결같은 지향이고 염원이며 조국통일의 최후승리가 우리 겨레를 부르고 있다.”고 신념에찬 목소리를 높였다

 

범민련 남북 해외 회장단이 채택한 공동 결의문 전문을 게재한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제16차 공동의장단회의 공동결의문

 

새해 2016년은 우리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70여년간 핵위협을 가해오며 자주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과의 대결전에서 장엄한 쾌승을 안아올 위대한 승리의 해이다.

 

장장 70여년동안 지속되고 있는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의 역사를 끝장내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시대를 열어나가자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강렬한 지향이다.

 

이러한 때에 북의 수소탄시험은 이 땅에서 미국이 일으킬 핵전쟁의 참화를 막기 위한 애국, 애족, 애민의 결단이며 삼천리강토와 온 민족의 운명을 지켜주고 우리 민족의 천만년미래를 굳건히 담보해주는 역사적 장거로서 새해의 통일진군길에 나선 온 겨레에게 커다란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존엄과 지위가 최상의 경지에 올라서고 필승의 기상과 위용이 만방에 과시되어 해내외의 온 겨레가 승리의 신심과 낙관에 넘쳐 조국통일을 위한 새해의 진군길에 힘차게 떨쳐나선 격동적인 시기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제16차 공동의장단회의를 진행하였다.

 

우리는 올해에 <내외반통일세력의 도전을 짓부시고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열어나가자!>는 구호를 높이 들고 조국통일운동에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는 역사적인 해로 빛내어나갈 뜨거운 통일애국의 의지를 안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범민련은 민족내부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자주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앞장에서 노력해 나갈 것이다.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관계개선도, 자주통일도 이룩할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은 전쟁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범민련은 외세의 노골적인 간섭과 전횡, 교활한 민족이간책동을 단호히 배격하며 해내외 온 겨레를 외세반대, 민족자주를 위한 투쟁에로 총궐기시켜나갈 것이다.

 

반통일세력의 사대매국행위를 저지시키며 외세에 민족의 운명을 내맡기고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는 매국배족행위를 철저히 배격해 나갈 것이다.

 

일본과의 굴욕적인 ‘합의’로 성노예 범죄를 덮어버리는 것과 같은 추악한 매국역적행위를 단죄규탄하는 투쟁에 온 겨레를 불러일으켜 나갈 것이다.

 

2. 범민련은 외세와의 합동군사연습을 비롯한 온갖 대결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려나갈 것이다.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해마다 벌려놓고 있는 합동군사연습은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키고 핵전쟁의 위험을 몰아오는 주된 화근이다.

 

범민련은 나라의 평화와 남북관계개선, 조국통일을 바라는 해내외의 온 겨레를 전쟁반대, 평화수호를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이 땅에서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을 적극 벌려나갈 것이다.

 

군사적 충돌을 불러오는 험악한 비방중상과 심리모략방송을 저지시키고, 동족을 반대하는 온갖 모략과 도발책동에 단호히 대처해나갈 것이다.

 

3. 범민련은 민족공동의 합의들을 귀중히 여기고 그에 기초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관계개선을 적극 추동해나갈 것이다.

 

조국통일3대원칙과 6.15공동선언, 10.4선언은 민족의 총의가 집대성되어있으며 이미 실천을 통하여 그 정당성이 뚜렷이 확증된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이며 자주통일의 이정표이다.
범민련은 민족공동의 합의들을 조국통일의 대강으로 튼튼히 틀어쥐고 민족의 대단합과 통일운동을 과감히 전개해나갈 것이다.

 

겨레의 가슴마다에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깊이 심어주고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모든 활동을 재개하고 더욱 활성화시켜나갈 것이다.

 

범민련은 남북합의들을 존중하고 이행해나가려는 해내외의 모든 정당, 단체, 인사들과 굳게 손잡고 왕래와 접촉, 협상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함께 열어나갈 것이다.

 

특히, 역사적인 6.15공동선언발표 16돌, 10.4선언발표 9돌을 맞으며 해내외의 각계층과 함께 전민족적인 통일회합들과 행사들을 성대히 개최하여 남북선언이행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갈 것이다.

 

민족공동의 합의들을 부정하고 그 이행에 장애를 조성하는 온갖 책동들과 ‘체제대결’과 ‘제도통일’을 추구하는데 대해 단호히 반격해나갈 것이다.

 

4. 범민련은 조국통일운동을 ‘이적’과 ‘종북’으로 몰아 불법시하는 반통일 반민주적 공안탄압에 맞서 단호히 투쟁해나갈 것이다.

 

그 어떤 정권도 외세에 의해 분단된 나라와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려는 정당한 통일운동을 가로 막아 나설 권한이나 자격은 없다.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공안탄압은 정권유지와 수구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반역사적인 폭거 그 자체이다.

 

공안탄압을 휘두르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바란다는 것은 외세를 끌어들여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해 보겠다는 것과 똑같은 망상이며 궤변이다.

 

우리는 각계 통일애국세력과 힘을 합쳐 반통일세력의 죄악과 반민족적 폭거를 폭로하고, 그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통일의 정당성과 시급성을 널리 알려나갈 것이다.

 

5. 범민련 조직을 더욱 넓게 튼튼히 강화해나갈 것이다.

 

민족문제, 통일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은 <우리민족끼리>의 대단합에 있다. 범민련은 조국통일의 그 날까지 3자연대의 깃발을 억세게 틀어쥐고 민족자주통일운동을 힘차게 벌여 나갈 것이다.

 

범민련의 주체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범민련 조직을 대중 속에 산 조직으로 튼튼히 뿌리내리며 언제나 겨레의 자주통일대행진의 선두에서, 반전평화운동의 한가운데서,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대오 속에 범민련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이다.

 

자주애국과 애족애민의 정신은 그 어떤 역경도 이겨 나갈 수 있는 필승의 신념이다.
범민련의 정신을 높이 들고 민족대단결을 강화확대해 나가자.

 

조국통일은 겨레의 한결같은 지향이고 염원이며 조국통일의 최후승리가 우리 겨레를 부르고 있다.

 

역사적인 조국통일3대원칙과 6.15공동선언, 10.4선언을 자주통일의 표대로 높이 들고 나아가는 범민련 운동은 언제나 정당하며 온 겨레를 자주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할 것이다.

 

모두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뜨거운 애국의 열정과 의지를 남김없이 분출시켜 민족사에 전환적인 국면을 안아올 희망찬 올해에 기어이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힘차게 열어나가자!


2015년 1월 28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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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문 녹취록 제보자 “YTN 간부에게 사내 자료 쇼핑백 뭉치로 받았다”

[단독] 백종문 녹취록 제보자 “YTN 간부에게 사내 자료 쇼핑백 뭉치로 받았다”

소훈영 전 폴리뷰 기자 폭로 “노조 비방 자료 받아 기사 작성” 배석규 체제 인사들 조준희 사장 비방 정황도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6년 01월 29일 금요일

극우 성향의 매체와 MBC 경영진의 수상쩍은 거래가 녹취록을 통해 폭로된 가운데, 제보자인 소훈영 전 폴리뷰 기자가 특정 YTN 간부들로부터 노조를 비방하는 자료를 받는 등 사내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밝혔다.

MBC 경영진이 2014년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과 소훈영 전 기자를 만나면서 이른바 ‘파이프라인’을 자처하며 고급 정보를 주겠다고 밝혀 논란이 된 가운데, YTN에서 극우 매체로 사내 정보를 흘리는 일이 확인된 것이다.

소 전 기자는 29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김백 YTN 상무와 류희림 YTN 플러스 대표를 만났다”며 “2012년 류 대표는 쇼핑백 하나만큼 노조(언론노조 YTN지부)에 대한 정보를 줬다. YTN 빌딩에 가서 내가 직접 받아왔다”고 했다.

그는 “내가 쓴 기사 중 노조 관련한 것들이 있는데 챙겨준 자료에서 나온 것”이라며 “김 상무는 한 번 봤고 류 대표는 많이 만났다. 김 상무가 지시를 하면 류 대표가 나오는 식”이라고 폭로했다.

 

▲ 류희림 YTN 플러스 대표. 과거 기자 시절의 모습. (사진=YTN)

 

2012년부터 폴리뷰에서 활동한 소 전 기자는 YTN을 옹호하고 노조를 비난하는 기사를 써 왔다. 폴리뷰‧미디어워치‧뉴스파인더 등 극우 매체들은 지난해 3월 취임한 조준희 YTN 사장이 친노조 성향이라며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사내에서 조 사장을 불편해하는 ‘배석규 체제’ 인사들이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김 상무와 류 대표는 대표적인 배석규 체제 인사로 분류된다.

언론노조 YTN지부 역시 28일 성명을 통해 “기자가 4명뿐이고 월급도 못 주는 인터넷 매체(폴리뷰)가 어떤 경로로 YTN 내부 정보를 입수했는지 의아스러웠는데 ‘백종문 녹취록’을 통해 궁금증이 풀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YTN지부는 “MBC처럼 YTN에서도 내부 누군가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을까”라며 “기밀이 아닌 한 사내 소식을 외부에 제공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정보가 악의적으로 왜곡돼 특정 인터넷 매체에서만 줄기차게 보도되는 것은 ‘검은 커넥션’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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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 YTN 상무. (사진=김도연 기자)

 

김백 상무는 이날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박 국장과 소 전 기자와의 만남을 시인했다. 김 상무는 만난 적 있느냐는 질문에 “거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어 김 상무는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정도 만났던 것 같다”고 했다가 질문이 계속되자 “만나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김 상무는 “소훈영씨라는 사람은 잘 기억이 안 난다”면서도 “과거 노사 분규가 심할 때 취재 차 한 번 정도 만난 적 있는 것 같다. 자꾸 유도 심문하지 말라”고만 했다. 

류희림 대표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2012년 KBS‧MBC‧YTN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갔을 때 소 기자가 요청해서 김 상무와 만난 적이 있다”며 “노조가 과거 이러한 활동했다는 자료 및 성명을 회사가 낸 자료와 담아 서류 봉투에 넣어주고, 회사에서 나오는 수첩과 함께 쇼핑백에 넣어서 전달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류 대표는 “2012년 남대문사옥에서 2~3번 본 것이 전부”라며 “통화 몇 차례하고는 소 기자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극우 성향의 매체 기자들과 통화를 자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정보 주고 그런 것은 없었다”며 “YTN 플러스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전화가 와도 ‘잘 모른다. 나한테 제발 묻지 마라’고 한다”고 했다. 

(류희림 대표 발언 추가. 1월29일 오후 11시30분.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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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매체 편집장 "어버이연합, 2만원 받아 활동"

최민희 의원 공개 녹취록... 박한명 "잘 모르고 함부로 말했다"

16.01.29 16:52l최종 업데이트 16.01.29 17:1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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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연합 "한일협상 적극 환영" 어버이연합, 탈북단체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6일 오후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한일협상 타결 환영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범기를 칼로 찢고 아베 총리와 전범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를 몽둥이로 때리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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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집회·시위를 열어 온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하 어버이연합)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금품을 지급하며 활동을 조직해왔다는 얘기가 나왔다. 파다한 풍문이었지만, 보수단체 사정에 밝은 보수 인터넷신문의 편집국장이 "그게 어버이연합의 실체"라며 한 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2012년 MBC가 관련 증거도 없이 소송에서 질 것을 알면서도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를 해고했다는 내용이 나와 언론계에 파문을 일으킨 녹취록에 이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공개한 2014년 4월과 11월 백종문 MBC 미래전략본부장과 박한명 당시 폴리뷰 편집국장(현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 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등이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대화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다음은 박 편집국장이 보수단체들의 재원조달 상황을 설명하면서 어버이연합을 언급한 2014년 4월 1일 녹취록 일부분이다. 

박한명 : "사실은 이쪽에 돈 나오는 구멍들이 제가 다 압니다. 돈 나오는 구멍들을. 어~, 많지 않습니다. 돈 나오는 구멍이 많지 않습니다. 뭐 다 아마 선배님들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거기에서 차비를 받죠. 차비를 받으면 1000명이면 1000명, 2000명이든 2000명 해서 머리에 수당들을 받았어요. 그걸 받으시고 가는 겁니다. 거기에 가서 도시락도 받아 오시고, 그게 우리가 말하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의 실체들입니다.

한 동석자 : "음, 어버이연합?"

박한명 : "예. 그러니까 우리 6·70대, 거의 6·70대 노인분들이 사실 보수쪽에서 여가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2만원씩 받으면서 나와서 요구르트랑 빵이랑 김밥이랑 사발면, 이런 것 받아 가면서 그 노인들이 모이시는 공간이 어버이연합이라는 공간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소문이 나다 보니까 '아, 여기 가면 이렇구나. 또 여기서 얼마나 또 많이 생긴다' 해가지고 모여서 가장 큰 단체 어버이연합.  이 자체가 보수의 앞날에 미래가 암울한 겁니다.  왜냐면 보수의 최고단체가 어디냐 그러면 뭐 옛날처럼 뉴라이트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이다, 뉴라이트 어디다, 이런식이 됐으면 저희도 좋은데, 지금은 보수 최고의 단체가 어디냐 그러면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다, 평균연령이 65세 이상이시거든요."

어버이연합이 집회·시위 참석 대가로 금품을 나눠줬다는 풍문은 있으나 실제 살포현장이나 자금흐름의 실체가 포착된 적은 없다. 하지만 보수단체의 사정을 잘 안다고 자부한 보수인터넷신문의 편집국장이 그같은 실태를 인정한 것이다. 

특히 박 편집국장이 "돈 나오는 구멍이 많지 않습니다. 뭐 다 아마 선배님들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거기'에서 '차비'를 받죠"라고 한 부분은 어버이연합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금품을 나눠줄뿐 아니라 이 금품을 어버이연합에 제공하는 어떤 주체가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거기'가 어디인지에 대한 정보는 녹취록에 나와있지 않다.

"내가 말실수 한 것, 사석 대화 보도하고 있는 언론사에 법적대응"

이같은 녹취록 내용에 대해 박한명 현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는 29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내가 어버이연합과 관련해 한 얘기는 말실수를 했거나 오버를 해서 말한 것"이라며 "내가 그런 걸 잘 알 수가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했다. 사실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녹음이 이뤄질 당시 말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이어 "좌파매체들이 사석에서 사적인 내용으로 말실수를 한 내용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데 만약 내가 17대 1로 싸워서 이겼다고 말했다면 내가 깡패가 되는 것이냐"며 "관련해서 보도를 내고 있는 언론사에 대해선 법적대응 하겠다는 입장을 <미디어워치> 기사를 통해 이미 밝혔다"고 말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집회·시위 참가자들에 금품을 지급해왔는지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29일 오후 어버이연합 측에 전화통화를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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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건 김정은 아닌 박근혜 대통령 폭주로 안보시스템 무너져"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1/29 12:16
  • 수정일
    2016/01/29 12:1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뷰]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기획단장

16.01.29 08:57l최종 업데이트 16.01.29 08:57l

 

 

핵도발을 한 것은 북한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후속과정에서 남한까지도 6자회담국들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드(THAAD, 종말단계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검토 발언과 5자회담 제안 등에 대해 즉각즉각 반박하고 있다. 사드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험악한 표현까지 나왔다. 러시아도 5자회담안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2014년에 1억불 수준이던 북한과의 교역량을 10억불로 올리겠다고 어깃장을 놨다. 미국은 표현은 부드럽지만  박근혜 대통령과는 달리 현재의 6자회담틀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위안부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한국이 합의를 했는데, 오히려 아베 일본 총리가 우리 정부에게 합의를 이행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기획단장은 4차 핵실험 이후 동북아 정세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고립되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박 대통령이 폭주하면서 현 정부의 안보위기 관리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대북 확성기방송 재개 결정과 5자회담 추진 제안이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해,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전하면서 "박 대통령이 관련 부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폭주하다가 외교 참사를 초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체 인터뷰 내용은 남북관계전문 팟캐스트 <한통속>으로 들을 수 있다.

☞ 팟빵에서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듣기
☞ 아이튠즈에서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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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대 단장.(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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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27일 만난 김 단장과의 문답 요약.

- 우선 이번 북한의 4차 핵실험을 둘러싼 정부의 전체적인 대응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6일 4차 핵실험이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한국국방연구원과 국군화생방사령부 등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계속 굴착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이 갱도가 크고 깊다는 점에서 북한 제4차 핵실험 뿐아니라 제5차, 제6차 핵실험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또 북한이 핵실험 시기만 노리고 있으며, 수소폭탄, 핵융합실험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는 이미 다 나와 있었다.

그런데도 핵실험 이틀 전인 4일날 국방부 기자실에 온 한민구 국방장관은 기자들의 질문에 '핵실험 정황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답했고, 연구기관들 전망에 대해서는 '이전 보도들을 종합해서 짜깁기 한 수준 아니냐'고 했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단순히 북한 핵실험을 몰랐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핵실험을 안 한다고 거꾸로 판단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안보라는 게 뭔가, 1%의 가능성도 무시하지 않고 주시하는 건데, 단호하게 '정황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핵실험 안 한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김정은 체제가 연착륙해야 하고, 8.25합의한 것도 그렇고, (김정은의 ) 지난 해 당창건 70주년 기념사에도, 올해 신년사에도 핵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핵실험을 안 한다고 믿은 것이다.  

우리 위기관리 부처들이 북한에 대해 오만하고, 자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미국과 중국도 몰랐다고 변명하기 바쁘다. 이런 정부는 다음에 정보관리에 또 실패한다."

"정부, 핵실험 안 할거라 믿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 있다"

- 정보 판단의 문제에 앞서, 우리의 대북 정보 수집 수준은 어떤 상태라고 보나.
"우리 군의 대북정보수집의 주력은 감청 등을 통해 신호정보를 입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탐지범위는 주로 평양~원산 이남에 국한돼 있고, 그것도 망원경으로 쭉 훑는 방식 아니라 빨대로 특정지역만 보는 형식이다. 이런 정보공백을 미국이 메워줬다. 대북정부의 80%를 미국에 의존해왔다. 미국은 북한 전역에 걸친 다양하고 종합적인 영상정보를 제공해왔다. 그런데 2008년부터 미 국방정보국(DIA) 산하 주한미군 정보여단(501정보여단)에  파견돼 있던 350~400여 명의 정보분석관이 50여 명만 남기고 중동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되니 정보가 들어와도 분석할 사람이 없는 거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과 2010년에 우리 합참의장이 미국 합참의장에게 조속한 대처를 촉구했는데, 미국 측은 답변이 없었다. 미군은 한국군에 제공하는 신호정보 시스템도 끊었다. 그런데도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당시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은 "북한 핵실험은 최소 한 달 정도 전에 징후를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는 거다.

대북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국방정보본부 상황을 보면 더 한심하다. 작년에 국방장관이 청와대 경호실의 준장을 국방정보본부의 부장(소장 직급)으로 가라고 인사명령을 했다.  청와대에 계속 있겠다고 안 갔다. 장관의 인사명령을 장군이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그 자리가 공석이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3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을 "동북아 안보지형을 바꾸고 북핵문제의 성격을 바꾸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했다. 그런데 국방부는 핵실험 다음날인 7일 "수소폭탄이 아니고, 수소폭탄 전단계인 증폭핵분열탄 실험이라고 해도 사실상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결이 다른 얘기를 했다.
"대통령이 북핵문제의 성격을 바꾸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하려면 그 근거를 밝혔어야 한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실험이라든지, 핵능력이 굉장히 진전된 것이라든지 말이다. 그런데 앞서 국방부 발표를 보면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는 국방부 분석이 맞다고 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해버리니까 국정원 국방부 등 관련 기관들이 한동안 이번 핵실험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하고 다른 얘기를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국방부가 관련 전문가 워크숍을 한 게 핵실험을 한 지 13일 지나서였다. 결론은 '심각한 사태'라고 나왔다. 진짜 심각한 것인지 아닌지가 대통령 말 한마디로 결정되고, 전문가들도 여기에 맞춰서 자신의 지식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렇게 정치화된 것이다. 지금 정부는 정확하게 4차 핵실험 국면의 성격을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심각하다는 말 외에 심각한 근거는 없는 상황인 거다."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 장관들 바보 만들고 대통령 결단만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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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란 노래 '백세시대' 포함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 군 당국이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 해 '8.25 합의' 이후 5개월간 중단했던 대북확성기 방송을 지난 8일 정오에 전면재개 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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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2일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을 뺀 5자회담' 제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이것도 그렇고  앞서 7일날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도  다 대통령 결정 하나로 다 이뤄진 것이다. 국방부와 통일부는 신중론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도 장관들이 국회에서 유엔 대북제재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종합적인 정책 속에서 확성기보다 더 한 것도 할 수 있는 건데, 이것부터 해버렸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날 오후 3시에 청와대 NSC(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이미 장관들에게 '방송 재개하기로 했다. 대통령 뜻이다'라고 통보가 갔다. 그래서 한 장관이 집무실에서 새파랗게 질려서 몹시 굳은 얼굴로 NSC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고 한다. 바로 몇 시간 전에 국회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답변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방부와 통일부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먼저 결정하고 요식행위로 NSC회의를 소집한 거다. 국방부와 통일부 장관을 바보로 만들어버리고, 대통령의 결단만 칭송하고 있다. 

- 그렇게 보면 5자회담 제안 이후 양상도 비슷한 것 같다.
"원래 6자회담 무용론은 한국 정부 입장이 아니다. 몇 시간 뒤에 중국 외교부가 바로 반박하니까, 청와대 대변인과 외교부가 '6자회담 무용론이 아니라 '6자회담 틀 내 5자회담'이라고 말을 바꿔버렸다. 하루도 못 갔다. 이것도 박 대통령이 외교부 의견도 안 들어보고 혼자 폭주하다가 또 외교참사를 맞은 거다. 

그럼 누가 대통령에게 확성기 방송 재개나 5자회담을 써 줬을까. 제가 듣기로는 청와대 안보실 내 공식조직이 아니다. 작년 11월 경으로 추정되는데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이 사의표명을 했더라. 8.25합의로 위상이 한참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정확한 사의표명 원인은 확인하지 못했는데, 내 추정으로는 그도 대통령과 소통이 안 되는 거다.  결국 문고리 권력 등 보이지 않는 손이 외교안보까지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게 4차 핵실험 이후 박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웃음거리가 된 이유들이라고 본다."

"박 대통령, 사전조율 없이 막 던져... 대중 관계 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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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대 단장.(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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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의 5자회담 제안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불과 6시간 만에 일축해 버리는 장면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지금 중국 외교부 대변인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환구시보 같은 관영매체는 사드 배치 문제, 북한제재 문제 등에 대해 즉각즉각 박 대통령을 콕 집어서 비판하고 있다. 그렇게 중국이 중요하면 특사라도 보내서 물밑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그 다음에 조치를 내놔야 하는데, 그런 작업도 안하고 막 제안을 던지면서 중국과의 외교를 망쳐버렸다.

오바마 대통령도 12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한 신년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한마디도 안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주된 관심사는 남중국해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에 한마디도 못한다.

지난해 10월 1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핵문제를 최고의 시급성을 갖고 다룬다'는 합의가 나왔다. 이 정부는 한미 동맹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이뤄낸 정상회담이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석 달 뒤 오바마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4차 핵실험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온 외교를 보면, 자신이 전 세계 지도자들의 사랑을 받는 백설공주인 것처럼, 그래서 자기가 얘기만 하면 왕자님들이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왜 이런가. 이런 판에 난데없이 아베 일본 총리가 나서서, 미국의 아시의 패권의 일부를 위임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것도 우리가 견제를 못하고 있다. 

왜 한국이 오늘날 이렇게 됐나. 지금 고립되는 건 김정은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다.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 대통령이 내치에서 별 성과가 없음에도 외교안보쪽 점수로 40%이상의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참 놀라운 일이다. 이름깨나 있는 전문가들과 언론이 실상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 관계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이 정치논리에 오염돼있다. 

자신이 정책에 실패했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책임자들, 엘리트들이 먼저 혼란이 빠지는 것을 엘리트패닉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게 우리 외교안보의 가장 큰 문제점 같다. 지금 박 대통령을 보면, 초조하고 뭐에 쫓기고 강박관념에 빠져서 부처 장관들, 수석, 안보실장 다 제치고 독주하고 있다. 이거는 패닉상태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확성기 재개나 5자회담 같은 설익은 대책들을 남발하는 거다. 중병걸린 환자가 조급한 마음에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어 보지 않나.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병은 안 낫고 더 깊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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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머지않아 조미대결전 승리로 막 내릴 것”

 
“파산에 처한 미국의 대 조선 전략” 강조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1/29 [05: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이 “정의는 공화국에 있으며 시간도 공화국의 편”이라며 “머지않아 조미대결전은 공화국의 최후승리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대외 매체인 주간신문 ‘조선신보’는 지난 26일자 ‘파산에 처한 대조선전략’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국의 대조선 전략은 실패 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조선신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핵을 휘두르며 유일초대국으로 행세하면서 불공평한 세계질서를 강요해왔다면서 ”미국은 첨단전쟁무기개발과 해외거점들에 대한 핵전략무기들의 집중배치로 전쟁책동에 발악적으로 매달리면서 세계도처에서 다른 나라들에 대한 군사적간섭과 압박을 더욱 노골적으로 감행해 나섰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북침 핵전쟁 위협을 가해 왔다면서 “미국의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가증되는 침략위협으로 하여 조선반도는 세계최대의 열점지역, 핵전쟁발원지로 되었다.”고 강조했다.

 

매체는 미국이 대북 제재와 봉쇄를 하면서도 미국 자신은 첨단전쟁무기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면서 “공화국(조선)의 주요대상들을 선제타격하기 위한 보다 정밀화되고 소형화된 정밀유도핵무기개발에 날뛰던 미국은 지난해 가을에는 네바다 사막에서 정밀유도핵폭탄의 시험까지 감행하였다.”고 지적했다.

 

기사는 이에 대해 지난 11일자 뉴욕 타임스의 “신형핵무기는 미국 최초의 정밀유도핵폭탄으로서… 북조선과 같은 나라들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입버릇처럼 외워대는 ‘핵없는 세계’란 한 갖 빈말 뿐이라는 것은 이것으로 더욱 여지없이 드러났다.”며 “미국이 공화국이 제기한 평화제안들은 거부하면서 핵무기를 동원하여 대조선 압살공세에 더욱 혈안이 되고 있는 조건에서 공화국이 자기의 억제력을 최대한 강화한 것은 너무도 정정당당한 자위적조치이다. 그것은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라고 핵 보유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이어 “조선의 자위의 핵 억제력 위에 강력한 수소탄까지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불법 무도한 핵 강권이 더는 통할 수 없게 되었다.”면서 “지난 1월 6일 공화국에서 울린 수소폭탄의 장엄한 뇌성은 우리 민족과 인류를 우롱하고 세계를 제패하려던 미국에 강타를 안겼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국의 어느 한 안보전문가는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이 57개 나라의 정부를 전복했거나 전복을 시도하였는데 그중 핵보유국은 하나도 없었다고 밝혔다. 핵을 쥔 상대는 누구도 마음대로 다치지 못하는 국제사회의 관례를 다시금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핵 보유가 억제력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세기를 이어오며 대조선적대시압살정책을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악착하게 달려들었으나 이제는 공화국을 일방적으로 핵위협하던 시대도 영원히 지나갔다.”면서 “핵은 미국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수소탄을 쥔 강대한 상대 앞에 미국의 ‘기다리는 전략’, 적대시압살정책도 풍지박산나게 되었다. 이런 미국을 하내비로 믿고 종미에 매달리는 세력도 수치스러운 파산을 면할 수 없다.”고 미국과 남측을 겨냥했다.

 

조선신보는 끝으로 “정의는 공화국에 있으며 시간도 공화국의 편이다. 머지않아 조미대결전은 공화국의 최후승리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조선 측의 이러한 강경한 입장 표명은 전쟝과 대결의 방법이 아닌 평화와 대화로 한반도 문제를 풀고 조-미 관계 정상화에 나설 것을 강력 촉구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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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통장에서 매월 40만 원씩 찾아가세요

녹색당 ‘기본소득은 시혜가 아닌 국민의 권리’
 
임병도 | 2016-01-29 09:00:4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녹색당의 기본소득 샘플 통장

 

여러분에게 매달 40만 원씩 입금되는 통장이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40만 원씩 매달 들어온다면 취업준비생은 이 돈으로 구직활동 기간을 버틸 수 있을 것이고, 부모들은 아이들 학원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도 40만 원씩 입금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예술가는 최소한의 생존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이어나갈 수 있고, 폐지를 줍거나 첫차를 타고 500원씩 받으러 가는 어르신들도 조금 여유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국민에게 매달 40만 원씩 입금되는 것을 쉽게 말해 ‘기본소득’이라고 합니다. 기본소득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노동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정부가 일정액의 현금을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시민배당’으로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권리인 셈입니다.


‘알래스카주, 주민들에게 매년 영구기금 배당’

어떻게 국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현금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그렇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1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영구기금 배당’을 하고 있습니다.

 

 

2015년 10월, 미국 영주권을 갖고 1년 이상 알래스카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연령, 성별, 임금 소득과 관계없이 2,072달러를 받았습니다. 2014년에는 1,884달러를 2008년에는 2,069달러와 1,200달러의 일시 보상금을 포함 총 3.269달러를 받았습니다.

알래스카주가 주민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은 석유채굴 때문입니다. 알래스카주는 1976년 주 헌법을 개정해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모든 천연자원에 대한 수익 25%를 적립하는 알래스카 영구기금 (APF)을 조성했고, 주민들은 매년 영구기금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배당받습니다.

 

 

알래스카 한인 블로거는 ‘미국의 부유한 가구 20%의 평균 소득은 2002년 이전 10년간 26% 증가했지만, 가난한 가구의 20%는 평균소득이 불과 12%밖에 증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알래스카의 부유한 가구의 평균소득은 7% 증가한 반면, 가난한 가구는 28%나 평균소득이 증가했다.’ 면서 알래스카의 영구기금 배당이 경제적 평등이라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밝혔습니다.

영구기금 배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생존할 수 있는 도구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기부 등을 통해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배당금이 나오는 시기의 알래스카주는 소비가 늘어나 경제 활성화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알래스카주는 영구기금 배당을 통해 미국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주에서 2번째로 평등한 주가 됐습니다. 캐나다와 독일, 브라질 등에서도 기본소득 등을 추진하거나 법안을 만드는 등의 시도가 있습니다. 스위스는 2016년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입니다.


‘기본소득, 재원은 어떻게 만드나?’

기본소득은 녹색당이 내세우는 공약이자 정책입니다. 경제 불황에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사람이 많고, 심각한 양극사회가 벌어지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알래스카처럼 국민에게 배당을 주거나 매달 40만씩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시행하자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알래스카처럼 석유 자원이 있느냐, 그 많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기본소득을 실시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조세부담률 (조세+사회보장기여금)이 OECD 평균 34.1%에 미치지 못하는 24.3%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처럼 조세부담률을 높인다면 1인당 40만 원이 아니라 매월 60만 원까지도 지급이 가능합니다.

지금도 서민과 직장인들은 없는 살림에 세금을 내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세금을 더 내라고 한다면 모든 국민이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의 세금을 무조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동산 임대소득, 이자, 배당소득, 주식 등과 같은 불로소득에 대한 철저한 과세와 고소득자의 소득세 및 법인세 강화 등을 통한 조세 정의를 먼저 실천하면 됩니다.

 

 

녹색당은 기본소득 재원을 두 단계로 나눠서 진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우선 1단계로 청년과 노인, 장애인, 농어민에게 먼저 지급합니다. 이 재원은 불로소득 과세와 예산 낭비, 기초연금 예산 통합으로 조성된 105조 원으로 시행하게 됩니다. 1단계 지급대상인 21,384,905명(2017년 추계인구)에게 월 40만 원을 지급할 수 있는 충분한 재원입니다.

2단계는 소득세 및 생태세 등 보편증세로 조성된 195조 원과 낭비된 예산을 근절하고 세출개혁 등으로 만든 30조 원, 기초연금등의 예산통합으로 만들어지는 12조 원을 합친 237조 원으로 전국민에게 매월 40만 원씩 지급하게 됩니다.

조세정의와 예산 낭비, 미비한 복지정책의 효율적인 통합으로 기본소득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 제도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과 기득권 세력, 정치 권력자들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시혜가 아닌 국민의 권리’

녹색당의 기본소득 제도를 ‘무조건 퍼주면 안 된다’. ‘어떻게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은 무엇입니까? 헌법에는 나이, 성별, 신체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50%에 달하는 노인빈곤율 못지않게 22.4%에 달하는 체감 청년실업률도 사회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배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왜 내가 돈을 버는데 내 돈으로 다른 사람의 소득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업이나 개인이 버는 소득에도 사회공동체의 몫이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개인이 버는 소득의 90%는 그 사회공동체가 가진 공통의 자산 덕분이라고 말했다.따라서 법인이나 개인의 소득도 세금의 형태로 일정 몫을 거둬들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배분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위원장, 숨통이 트인다 중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40만 원씩 드립니다(녹색당)’

이건희 회장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지만,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배당됩니다. (2014년 1,758억) 그가 보유한 주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베풀어주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이 가진 권리입니다.

법과 세금은 무엇이고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회의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기본소득이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불평등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방안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매월 40만원씩 통장에 들어오는 돈, 국민이 스스로 찾아가는 날이 꼭 와야 할 것입니다.

녹색당의 기본소득 카드뉴스 보러가기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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