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라는 것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또는 인격적 가치나 품격. 사회생활에서 각자의 지위나 위치에 따라 마땅히 지녀야 할 품성과 교양의 정도를 말한다.
어느 대선의 TV 토론회에서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했던 판사 출신의 보수정당 후보는 재야 시민운동 진영의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에게 "과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던 입장과 지금의 입장이 다른데, 말을 바꾼 것 아니냐"라고 물었다.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는 당시의 생각과 지금은 달라진 생각을 설명하면서 젊은 초선 시절의 미숙함을 너무 엄히 꾸짖지 말아 달라고 했다. 보수정당 후보는 껄껄 웃었다.
이 대화 안에는 색깔 공세에 이어 예나 지금이나 한국 정치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한미동맹과 통일관에 대한 공박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는 지지 기반에 다소 실망을 줄 수 있어도 과거와 지금의 입장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했고, 보수정당 후보는 여전히 휴전 중인 나라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한 안보 정책에서 보수정당이 여전히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얼굴을 붉히고 대화 상대의 말을 끊고, 인격을 모욕하고 당장 확인이 되지 않는 거짓 정보로 상대를 공격하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어른스럽고 품위 있는 말로 서로를 공격했고 자기를 방어했으며, 국민은 그 대화에서 각자의 정책적 지향과 오류, 한계를 모두 엿볼 수 있었다. '품위'라는 것이 어울리는 대화였다.
'책임'이라는 것도 아직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이라던 대선후보가 농민대회에 연설하러 갔던 날,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은 달걀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대선후보는 "개방을 최대한 막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질 수 없는 장담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뉴스는 대선후보에게 달걀을 던진 농민을 탓하기 바빴지만 정작 대선후보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달걀이라도 맞아야 화가 좀 누그러들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 그리고 정치하는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가치'라는 것이 살아있는 시절도 이제는 꿈같지만 있었다. 선거에서 이긴 적보다 진 적이 더 많았으면서 결국엔 대통령이 되었던 어떤 정치인은 선거에 대해 "원칙 있는 승리가 첫째요, 다음은 원칙이 있는 패배, 최악은 원칙도 없는 패배"라고 말했다. 정치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일 뿐, 무엇이 될 것인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무엇을 위해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선거이지, 선거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할 수는 없다는 것.
품위와 책임과 가치. 작금의 정치에서 가장 멀리 있는 말은 이런 것들일까. 이제 이런 말들이 아련할 지경이다.
묻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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