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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이 간첩조작한 어부들에 극형 선고한 판사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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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최병규 편

공안사건 많이 다루지도 않은 평범한 판사

긴급조치 위반 13건, 납북어부 3건만 다뤄

"최병규가 제대로 판결했다면 이근안은 없어"

조작 간첩 안장영에 1심 판사로 사형을 선고

2013년과 이듬해 세 사람 모두 재심에서 무죄

긴급조치 사건 14명 중 1명만 빼고 실형 선고

뚜렷한 신념 없이 잘못된 시스템 순응한 경우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최병규(崔秉奎, 1932~2009) 항목에서 가장 충격적인 구절은 이것이었다.

"최병규는 이력이 화려한 판사도 아니었고 공안사건을 많이 다룬 편도 아니었다."

평범한 판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판사가,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납북됐다가 함께 돌아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사형과 무기징역, 징역 15년으로 보냈다. 정규용에 이어 이근안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희생자였던 안장영, 안희천, 김흥수 모두가 최병규의 1심 법정을 거쳐갔다. 책은 정확히 이렇게 적었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납북어부들이 차례차례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최병규(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32년 서울 출생, 지방대 출신의 성실한 법관

최병규는 1932년 7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청구대학교(현 영남대)를 졸업하고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동기로는 정해창, 김종건(1935~2012), 김석수, 이한동, 이창우(1934~ ) 등이 있는데 이들 중 다수가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1962년 대구지법 경주지원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해 대전, 서울가정법원, 서울고법을 거치며 평범한 경력을 쌓았다.

세계사 속의 동류, '평범한 집행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악의 평범성"이 다시 떠오른다. 화려한 야망도, 특별한 신념도 없이, 그저 위에서 내려온 사건을 처리하는 평범한 관료. 그 평범함이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최병규의 14건 긴급조치 판결과 3건의 간첩조작 사건 판결이 증명한다. 책은 이를 명확히 짚는다.

"윤영철이나 최병규가 제대로 된 법관이었다면 이근안이라는 한국현대사의 괴물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Getty Images)

1977년, 곶감 빼먹기, 그리고 사형 선고의 이례성

최병규의 반헌법 행위 정점은 1977년 서울지법 인천지원 부장판사 시절이다.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납북됐다가 함께 귀환한 안장영, 안희천, 그리고 같은 시기 같은 방식으로 조작된 김흥수까지, 세 사람의 1심을 모두 최병규가 맡았다.

안장영은 1962년, 1964년, 1965년 세 차례나 납북됐다가 영세 귀환어부 관용방침에 따라 모두 훈방됐던 인물이다. 그러나 1976년 같은 배 동료였던 오형근이 간첩으로 조작되면서, 그 진술을 단서로 안장영도 다시 끌려갔다. 고춧가루를 물에 타 코·입·눈에 붓고, 무릎을 밟고, 펜치로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이 자행됐다. 1977년 11월 18일, 최병규는 이 탄원서를 무시하고 안장영에게 사형을, 부인 최정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납북어부 조작간첩 사건에서 1심 사형선고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혐의들까지 '상상적 경합범'으로 묶어 극형을 정당화했다. 2심에서는 박우동(1934~ ) 재판부가 면소사유를 직권으로 지적하며 징역 15년으로 감형했다. 2014년 재심에서 안장영·최정순 부부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안장영은 이미 1992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안희천은 안장영 내사과정에서 함께 적발됐다. 1977년 12월 30일, 최병규는 검사가 무기징역을 구형한 안희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무죄가 확정된 것은 2013년 11월, 사건발생 36년 만이었다. 책은 이렇게 적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기소해 안희천과 가족의 인생을 처참하게 파괴한 1심 검사 김성남과 판사 최병규는 안희천 가족에게 사죄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귀환 어부들이 50년의 기다림 끝에 12일 오후 춘천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춘천지법 형사1부는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던 납북귀환 어부 32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23.5.12 연합뉴스

김흥수는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 납북됐다가 귀환한 인천 덕적도 출신 어부였다. 1977년 8월 연행돼 2개월 불법구금 끝에 간첩으로 조작됐다. 김흥수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재판받을 때 판사랑 검사를 보면서 기가 막혔어요. 있지도 않은 일을 말하면서 나보고 했다고 하고… 사형을 구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해요."

최병규는 검사의 사형 구형을 받아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흥수는 광주교도소에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함께 수감된 시국사건 학생의 "여기서 죽으면 진짜 간첩이 됩니다"라는 말에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2014년 10월, 27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는 여객선에서의 김흥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덕적도를 헤매고 걸었던 그는 여객선의 객실에서 지쳐 누웠다. 그는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다니고 싶어한다. (변상철 오마이뉴스 2017.12.25.)

14건의 긴급조치, 단 한 건의 집행유예, 나머지는 모두 실형

최병규는 대전지법, 인천지원, 서울형사지법을 거치며 총 14건의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의 1심 재판장을 맡았다. 애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긴급조치 때문에 말도 못하고 산다"고 쓴 충남대생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나머지 13건은 모두 실형이었다. 유신헌법 철폐를 외친 대학생들에게 징역 1년에서 4년까지,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판한 시민들에게도 실형이 선고됐다.

 

최병규(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판사의 책무를 저버리다, 승진도 못한 채 옷을 벗었다

흥미로운 것은 최병규가 이 모든 충성에도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지 못한 채 법복을 벗었다는 사실이다. 1979년 3월, 의원면직으로 조용히 퇴직했다. 충성의 대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셈이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맥락은, 거대한 비극이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관료적 무관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경고다. 최병규는 화려한 야심도, 강한 신념도 없이, 그저 위에서 내려온 자료를 그대로 로봇처럼 받아 적었다. 그러나 그 무관심이 세 가족의 인생을 파괴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최병규를 떠올렸다. 화려하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신념이 없는 사람도, 시스템 안에서는 누구든 비극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가장 무서운 교훈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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