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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네트워커>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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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캐이원'들이여, <합의회의>에서 배우라
우연히 20년 전의 낡은 비망록을 뒤적이다가 어느 신문의 4컷 만화가 스크랩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 두 사람이 멱살잡이를 하면서 싸우고 있다, 2) 그 옆에서 두 신사가 드잡이를 하고 있다, 두 패가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3) 두 신사 왈, “고만 두세. 시정배와 같아서야 되나”, 4) 첫 장면에서 싸우던 두 사람, “고만 두세. ‘구캐이원’과 닮아서야 쓰나”, 하고서 사이좋게 술집에 들어간다. 영락없이 요즘의 국회 모습 그대로이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에 관한 기사들을 뒤늦게 간추려 읽으면서 불현듯 국회를 떠올린 것은 그 4컷 만화 옆에 나란히 끼여 있었던 당시의 신문기사 탓인 듯하다. 80년 5월 이후 대학에서 집회나 시위를 주도했다가 1,427명이 제적되었다는 기사, 내가 알기로도 지금 권력의 핵심이나 여의도의 선량들 상당수가 그 당시 제적생들이었는데, 국회는 다시금 파행중이라니,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을 이런데다 써도 되나. 어이, ‘구캐이원’ 나으리들, 놀지 말고 이리 와서 합의회의에나 참석해 보시오.
합의회의는 과학기술과 같이 주로 전문가의 판단에만 맡겨졌던 사회적 쟁점들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이다.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에서는 원자력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고 연령과 성, 직업, 거주지역 등이 서로 다른 평범한 16명의 시민들이 공개 모집으로 시민패널이 되었다. 이들은 정부(과기부, 산자부), 학계, 원자력산업계, 환경단체, 원전지역 주민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강의를 듣고, 관련 내용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중립적인 조정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3개월에 걸친 교육과 토론, 그리고 3박 4일의 합숙토론을 거쳐 합의된 시민패널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보고서의 결론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의 신규 건설을 중지하고 중장기적인 대안(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원자력발전과 전력산업 전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 시민들이 모여, 충분하고 균형 잡힌 정보들이 제공되는 가운데,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내린 결론이 정부의 기존 정책을 통렬히 꾸짖는 것이라니, 우리 ‘구캐이원’ 나으리들, 이쯤에서 깊이 반성해야겠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3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에 보통 시민 수준의 토론 한번 벌이지 못하고, 17년째 표류하고 있는 핵폐기물처리장 문제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지, 이번 합의회의를 보면서 좀 배울 일이다. 덴마크 등지에서는 의회에서 직접 합의회의를 주관하고, 의회와 정부가 합의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것도 알아 두길 바란다. 끝으로 한마디, 이 땅의 어떤 더러운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롭지 않는 당신네 ‘구캐이원’들은 건강한 시민패널로는 아예 자격상실이라는 것. 그래도 더 알고 싶으면 인터넷 검색창에 “합의회의” 또는 “전력정책합의회의”라고 써 보실 것.
(200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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