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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또는 재택근무

월요일 아침 회의에 빠진 건 처음인가 보다.

습관이 된 듯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가 거리에 비오는 것 내다보다가

내가 휴가 중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하고서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전화가 줄을 이었다.

딱히 휴가라고 세상에 방송을 한 것도 아니니까

업무상 전화가 평소처럼 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지.

휴가라던데 하며 먼저 아는체 하는 동지가 아니라면

그냥 전화받고 다시 전화하고 그러기를 하루 종일 반복했다.

 

토요일에 강릉에 올 때 아내가 그랬지.

아예 전화기는 집에 두고 자기 전화기 줄테니까

급한 용무는 그것으로 보는 게 휴가답게 보내지 않겠냐고.

내가 즉각 반발했다.

이 판에 휴가가는 것도 미안하고 불편한데

전화기마저 꺼놓고 사라지면 어떡하냐?

그래, 전화를 갖고 온 것은 잘한 일인듯 싶다.

삐삐와 휴대전화에 매달린 일상이 벌써 12년째이니까

그것을 끊고 살면 도리어 금단현상에 시달릴지도 몰라.^^

 

아이들은 날이 흐리니까 바다보다는 워터피아에 가자고 했다.

바닷물 맛은 어제 봤다 이거지-

미적미적하다가 점심때나 되어서 두패로 갈라서 출발했는데

강릉에서 속초가는 길이 장난아니게 막힌다.

속초에 가면 꼭 들리는 냉면집이 있는데 

아이들이 냉면을 싫어해서 그냥 지나쳐 워터피아로 갔다가

만원사례라고 퇴장손님이 있을 때 입장손님을 받는다고 해서

속초로 되돌아 나오지는 못하고 두부와 황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5시가 지나서 다시 워터피아로 갔지.

어른들로 짜여진 다른 한패는

설악동에 가서 가벼운 등산을 하고 계곡에서 노닌다는데

아이들 우르르 저녁시간표로 끊어서 들여보내고

나와 아내는 그냥 속초로 나와서 해수찜질방에서 여유를 부렸다.

왜? 너무 비싸기도 하고 붐비는 실내가 답답도 해서...

 

꼭 속초 냉면이 먹고 싶었다.

아내랑 찜질방을 서둘러 나와서 이조면옥으로 갔더니 9시.

육수가 떨어져서 더 이상 못판다네, 쩝...

그 옆집 한양면옥에 갔더니 오늘 주문은 그만 받는다네, 쩝...쩝...

오기가 발동하여

더 맛있는 냉면집을 찾아서 속초시내를 뒤진다.

이조면옥/한양면옥(한영인가?) 말고는 딱히 아는데도 없는 처지라서

그냥 옛날에 실향민들이 모여 살았다는 곳을 어림잡아 헤매는데

도중에 몇군데 냉면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여러 차례,

(분위기 보면 그래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눈치 챔)

포기하고 나오려다 어둠 속에서 먼발치에 허름한 간판을 하나 발견,

다시 불법유턴을 해서 꼬불꼬불 밤길을 되돌아 갔다.

 

단천식당, 3대째 함흥냉면 전문점이란다.

나이드신 할머니 두 분이 주방을 지키는 것 하며

꼬질꼬질하고 허름한 손님방들 하며

낡고 작고 노란 양은 주전자하며

분위기가 딱 요기다 싶어서 들어가는데

아, 여기도 오늘 영업은 끝이란다.

두말않고 돌아서 나오는데

아내가 무어라 주고받더니 다시 들어오란다.

 

흐유, 이렇게 해서 간신히

가자미회냉면 두 그릇을 받아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찾은데다가 배도 고팠고 냉면이 간절했으니까

얼마나 맛있겠나. 양념 흔적조차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지롱-

아이들과 약속한 시간만 아니었으면

아바이순대나 오징어순대도 맛 품평을 좀 하고 나올 걸 싶었다.

 

10시에 나오기로 한 아이들과는

10시 반이 지나서 만날 수 있었다.

강릉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상쾌하게 뚫려 있었고,

힐끗힐끗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밤바다의 까만 빛이 마음에 와 닿더라.

강물은 흘러갑니다아아 제3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왜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

혼자서 흥얼거리며 강릉으로 왔다.

 

장모와 처형이 준비한 감자전에 맥주 한잔 마시고

딱 1시간만 피씨방에 있겠다고 하고 이러고 있다.

 

참, 강릉 오는 길에 진보넷 이모모 대표의 전화를 받았는데

불쑥 다른 사람을 바꾸어 주었다.

그래, 니 성우가~? 경상도 진한 억양에 나는 어, 돌쇠 아이가? 했더니

돌쇠라는 친구가 아니라 임모라는 선배였다.

20년전쯤에는 열심히 함께 술마셨던, 그러나 만난지 너무 오래된 선배가

친한 친구 이대표(난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를 초대해서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내 얘기가 나왔다는 거-

이따금 겪는 일이고, 그래서 세상 좁다고 하는 거지만, 그 형의 목소리를

얼마만인지 다시 듣게 된 것은 휴가보다 기분좋은 일이다.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사느냐

이 친구 저 동기 소식은 알고 있느냐,

운전하면서 열심히 떠들었더니 아내가 옆에서 따끔하게 한마디

-통화 계속 할거면 차 세워욧.

 

8월에

이대표와 그 형과 한잔 하기로 했다.

역시 사람 만날 일정표를 다시 정리해야겠다.

공식적인 휴가 첫날의 알맹이없는 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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