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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모처럼 토요일, 일요일 연속으로 쉬었고,

금요일, 토요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점심을 먹고, 후배 만나 상담을 받고,

4시가 다 돼서 가방을 챙겨서 헤이리로 떠났다.

그런데, 성연이가 굳이 함께 가자고 한다.

 

난 밤 헤이리를 보고싶었다.

 

난 사실 저녁때부터 밤까지 헤이리를 걸어볼 요량이었다.

성연이가 따라 온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성연이 보고 따라 오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내 욕망을 접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화역까지는 후배가 태워줬고, 우리는 거기서 200번 버스를 탔다.

차가 대화역을 벗어나자 논들이 나타났다.

'성연아. 저 논 좀 봐. 벌써 벼가 익었나봐~.'

'어디 어디~. 정말 논이 노랗다!'

 

헤이리로 가는 200번 버스는 많이 많이 돌아서 간다.

그래도 출판단지부터 성동 IC까지는 자유로로 휑하니 달린다.

비가 오고 난 뒤끝이라 그런지 시야가 맑다.

통일 전망대 너머로 북녘 땅이 깨끗이 보인다.

 

93MUSEUM 안에 있는 구삼재

 

우리는 헤이리 입구 4거리에서 내렸다.

버스는 여기서도 불과 한 정류장 거리에 있는 헤이리마을에 가기까지 10 정류장도 더 돌아서 오기 때문이었다.

 

성연이의 인내심은 길지 않다.

최대한 관심을 끌 얘기와 대상을 잡아도

한 군데를 온전히 보기도 쉽지 않다.

 

어디에 갈까?

성연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 망서리는데, 인문미술관 93MUSEUM 보였다.

'성연아. 우리 여기 들어갈까?'

성연이는 조금 망설이더니 그래도 아빠를 배려하려고 결심했는지 경쾌하게 '좋아~' 한다.

나도 좋다!

 

구삼재 앞에 놓인 섬돌/ 멋있다.

 

물론 들어가지 마자 성연이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하긴 시계를 모자이크처럼 붙여 만든 인물상 말고는 내가 봐도 성연이의 관심을 끌만한 작품은 없었다.

내가 혼자 와서 봤다면 찬찬이 볼만한 꺼리가 많았지만, 나도 성연이가 내게 한 만큼은 성연이에게 배려해기로 결심했다.

 

헤이리 집들은 하나 하나가 독특하다.

건축을 잘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공간과 공간이 분리된 듯 하면서도 이어지고, 다름이 같음으로 이어지는 게 지루하지 않다.

구삼뮤지움도 그렇다.

더욱이 이곳에는 서울에서 옮겨온 한옥인 구삼재까지도 전혀 낮설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1956년  대통령선거 포스터/ 정말 못살겠다 갈아업자!!

 

성연이도 이런 공간이 좋은가 보다. 그리고 아빠가 이런 공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해 배려하는 것도 같았다. 덕분에 건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구삼뮤지움을 나와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궁리해봤다.

그러다 북하우스 아티누스에 들렸다. 어린이 Libro가 있어 성연이가 조금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列寧(레닌) 선생과 馬克思(맑스) 선생이 반갑다. ㅎ/ 93뮤지움에 전시된 중국 화가의 작품이다.

 

물론 서점은 성연이의 기대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성연이에게 서점은 만화 메이플스토리 최신호를 파는 곳이면 족하지만, 이곳의 책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아이에게 슬로푸드 밥상을 차려준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제 다른 곳은 갈 수도 없다.

다른 곳을 들르면 성연이와 나 사이의 우호관계는 금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 없이 먼길을 돌아와야 하는 귀로가 온통 지옥길이 될 것이 뻔하다.

아쉽고, 비겁하지만 꼬리를 내리자.

 

'딸기가 좋아'에서 운영하는 '집에 안갈래'/ 나도 밤까지 안 가고 싶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벤치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모습도 예뻤다.

배차 텀이 매우 긴 200번 버스가 그래도 바로 왔다.

운전기사가 우리에게 '어 또 탔네?' 하고 인사한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헤이리로 올 때 운전한 그 아줌마다.

반갑다.

 

ps : 9월 8일부터 9월 30일까지 축제를 한다.

사람들은 붐비겠지만, 행사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출판단지 입구에 꽃밭을 넓게 만들어 놓았더라.

커다란 밭 가득 코스모스를 심어놨고, 해바라기를 심어놨다.

이곳도 걸을만 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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