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헌법을 제정하라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10/15 04:05요즘 들어 저는 피자매연대의 활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대안달거리대 판매, 식약청의 면생리대 단속 문제, 소책자 발행, 설문조사 실시, 후원회원 모집 등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피자매연대는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어 사용하자'는 상당히 선명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월경, 우리가 관리한다'는 구호로 내세우기에 아주 적절한 것이었죠.
일회용 생리대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모르던 한국의 상황에서 피자매연대가 대안월경용품을 널리 알리고, 나아가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어 사용하자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2003년 8월 31일 5회 월경페스티벌에서였죠.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첫 활동을 시작한 이래 취해온 피자매연대의 이런 전략은 매우 적절했고,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새로 짜나가자는 운동이었고요, 주류를 지향하는 운동이 아니라 소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대를 맺어나가는 운동이었죠.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자립적 삶을 추구하자는 탈자본 운동이면서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바꿔나가자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매력이었어요.
또한 그런 주장이 단순한 구호에서 머무르지 않고, 바늘을 들고 아주 구체적인 물질인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죠.
그래서 바늘은 단순히 바느질 도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간디의 물레'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각자 약간씩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제게는 전기로 돌아가는 재봉틀 대신 손바느질을 고집하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었고요.
재봉틀로 순식간에 만들어낸 것이 면생리대라면 바느질로 일일히 만든 것을 특별히 '대안달거리대'라고 부르며 일반 면생리대와 다르다고 말할 때 제게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에요.
바늘을 들어야 우리가 자본에 종속된 삶에서 자립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피자매연대는 여성단체냐, 환경단체냐 물어볼 때도 저는 그냥 '대안운동단체입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해버렸지만 듣는 사람이 혹시 더 듣고 싶어할 경우에는 이런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끊임 없이 상품을 소비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상품의 소비자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만족하도록 갖은 기제를 동원한다는 것이 제 믿음이고요.
바늘을 든다는 것은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러 있던, 그래서 획일적인 상품 소비에 길들여져 있던, 한편으로는 환경을 죽이고,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몸에 화학물질을 쏟아부으면서 그 지독한 '독'이 온몸에 고루 퍼져도 무감각해져 있던 우리들 자신들이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겠다는 첫발걸음을 의미한다고 보았기에 저는 대안달거리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그토록 열심히 사람들이 바늘을 들도록 장려했나 봅니다.
이제 2년이 지난 지금 피자매연대는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에 왔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대안달거리대 또는 면생리대의 존재에 대해 많이들 들어보았고, 희미하게나마 그것이 자신의 몸과 환경에 좋다는 인식을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대안달거리대 만들기 공개워크샵을 진행하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워크샵을 개최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사람들과 널리 공유하고, 대안달거리대를 전시, 홍보, 판매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기조는 좀더 진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안월경용품이 있다' 또는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어 사용하자'는 이미 익숙해져버린 것 같아요.
우리의 미래 활동방향을 담아내면서 지금까지의 활동들까지도 포괄해서 설명할 수 있는 우리의 보다 진보한 새로운 주장이나 핵심적인 구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그것을 '월경권'에서 찾고 있습니다.
2003년 11월 15일 백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투쟁에 후원금을 모아 지원하기 위해 피자매연대가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요.
그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들은 계속 대안달거리대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우여곡절이 많이 있었지만 지원과 지지가 필요한 많은 운동들에게 피자매연대는 꾸준히 연대해왔고요, 앞으로도 이 연대는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피자매연대 활동가들이 지적해왔고, 또 고민해왔던 것처럼 대안달거리대의 판매와 보급은 우리 피자매 활동의 조그만 한 부분이 되어야지 너무 판매 중심으로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활동가 느림은 피자매연대의 잔고에 돈이 별로 없어야 피자매연대가 후원인 제도를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돈이 계속 있으니까 피자매가 후원인 모을 생각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심각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 느림의 분석이에요.
저는 이 생각에 원론적으로는 동의를 합니다만 대안달거리대의 판매를 줄이고 후원인 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은 급격하게 보다는 천천히 진행되어야 하고, 특히 피자매연대의 활동이 활동가 중심으로 보다 더 탄탄히 자리잡을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아직은 전면적으로 후원인 제도로 바꿔나가기에는 피자매연대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느림 역시 당장 후원인 중심으로 피자매 운영을 해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식약청이 면생리대 업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을 때 몇몇 여성단체와 환경단체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고, 의견을 공유하기 위한 모임을 몇 차례 가졌습니다.
아시겠지만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여성은 이중, 삼중으로 억압되어 있고, 그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단지 하나의 입장 만으로는 매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피자매연대는 '월경은 질병이 아니므로 국가의 관리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그런 주장만 가지고는 무한경쟁과 이윤추구의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는 회사와 학교에서 이제는 맘대로 생리휴가도 가지 못하고 직장상사나 선생의 눈치를 봐야 하는 여성의 고달픈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피자매연대가 월경에 관한 대안을 내오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생리휴가/생리휴강/생리결석의 문제 역시 우리가 절대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되는 문제이겠죠.
그래서 이것을 월경권이라는 보편적이고 고유한 인권의 하나로 바라보고, 예를 들어 '월경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을 우리의 기본적인 주장으로 삼아서 활동을 펴나가면 어떨까 합니다.
식약청이 면생리대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하고, 단속을 하는 것도 우리는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월경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있고요, 기업이나 학교에서 생리휴가/휴강/결석을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월경권이 널리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월경권이 인권의 하나로 사회적으로 널리 인식되는 것을 우리 피자매연대의 보다 강화되고 진화된 활동 목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야 예를 들면 직장에서 여성들에게 한꺼번에 여성들이 동시에 생리휴가를 가면 안되니까 너는 월요일에 생리휴가로 쉬고, 너는 화요일에, 너는 수요일에 쉬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도 피자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일회용 생리대는 여성의 월경권을 가장 크게 박탈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지목하고 지속적으로 일회용 생리대 반대 운동과 대안달거리대 사용 운동을 펴나갈 수 있습니다.
월경권이란 예를 들면 검은 비닐 봉지에 일회용 생리대를 담아주는, 월경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에 적절한 담론이 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다양한 월경권이 존중되고 인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회용 생리대들은 이것을 깨끗하고 편리하게 처리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월경권을 억압한다고 생각합니다.
월경권을 여성의 고유한 권리이자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인권으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평등/불평등과 관련해 여성들에게 떼를 쓰거나 공격을 일삼는 남성들에게 적절히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피자매연대의 활동 목표를 기지를 발휘하여 '월경권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것' 정도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구 상에서 처음으로 월경권을 헌법으로 명시한 나라가 이 땅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상상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일본의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들 하는데, 한국의 헌법을 월경헌법으로 부른다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물론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헌법이 없는 사회를 원하지만요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어서 유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의 우익들이 그나마 있는 평화헌법을 고쳐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낼려고 하는 것처럼 월경헌법으로 이르는 길은 험난하다못해 히말라야 고산을 맨발로 등반하는 것처럼 난관과 난관의 연속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하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우리의 주장을 피자매연대의 소책자에 담아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월경권 운동이 널리 퍼지면 자연스럽게 피자매 활동가들도 늘어나고, 활동이 강화되어 후원인들도 늘어나게 되겠지요.
이것이 제가 구상하고 있는 피자매연대의 몇 년 후의 모습입니다.
물론 복잡하고 많은 주제들을 월경권 하나로 모두 해결해낼 수 있다고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월경권이 널리 보장된다고 해서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문제, 자본주의 극복의 문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짜나가는 문제 등이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 맘 속에 북극성처럼 빛나는 별들을 하나씩 담아두고, 그 별이 비추는 길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나아간다고 할 때 월경권이야말로 그 별의 이름으로 아주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상 한번쯤 사람들과 모여서 해봄직한 깊은 이야기였는데요, 풀어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으면서 실제로 이렇게 긴 글로 쓰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