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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아가 태어난 첫날.
○ 2009년 3월 5일 목요일 08시 58분 탄생. 己丑年 二月 九日 辰時 生.
○ 3.18kg, 50cm.
○ 새벽에 일어나서 7시 조금 넘어 병원에 도착했다. 파란꼬리가 병원에서 지낼 준비물과 홍아를 위한 몇 가지 옷가지들. 그 시각에 벌써 말걸기의 엄니는 입원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고. 도착하자마자 맨먼저 수술, 홍아 처방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했다.
○ 8시가 되기 전에 수술실로 내려가 파란꼬리는 수술 준비를 했다. 밖에서 말걸기와 엄니는 홍아 키우는 얘기를 나누었다. 수술을 위한 마취 직전에 파란꼬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밝은 미소와 함께 설레임을 나눈 파란꼬리.
○ 얼마 후 간호사의 안내로 말걸기는 수술실에 입장했다. 입장 전에 수술 가운, 마스크, 모자를 착용했고 TV에서나 보던 손 세척을 하였다. 그때 수술실 안에서는 파란꼬리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마취가 덜 된 모양인지...
○ 수술실에 입장해서 누워 있는 파란꼬리의 오른편에 앉아 손을 잡았다. 의사, 간호사 셋이 파란꼬리의 불룩한 배 주위를 둘러섰고 파란꼬리 머리맡에는 마취과 의사가 서 있었다.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집도의인 병원 원장께서 잠시 기도를 하고...
○ 칼이 배를 가르는 순간 파란꼬리는 비명을 질렀다. 마취가 제 때 역할을 못한 것. 마취과 의사는 마취약을 조금씩 늘렸지만 파란꼬리는 계속 아프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손을 꼭 쥐었지만 계속...
○ 마취과 의사는 파란꼬리가 잠들게 했고, 결국 파란꼬리는 태어난 장소인 병원 수술실에서 홍아를 보지 못했다. 의사 옆구리 사이로 파란꼬리의 배가 살짝 보였고 절개된 배 단면도 조금 눈에 들어왔지만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진 못했다. 아파하는 파란꼬리 손을 주무르며 얼굴만 쳐다 보았다. 제발 아무일 없길.
○ 집도의는 아가를 꺼냈는데 홍아는 잠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눕힌 모양이다. 집도의는 홍아를 꺼낸 후에도 파란꼬리의 뱃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훑고 있었다. 태반 덩어리를 꺼냈다.
○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잠든 파란꼬리 곁을 떠나 홍아에게로 갔다. 간호사와 함께 홍아를,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로 옮겼다. 불편한지 운다. 머리를 바치니 울퉁불퉁한 홍아의 뒤통수가 느껴진다. 따뜻하다. 피부는 선홍빛이 도는 회색이었다. 온 몸에 노란색 물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양수인가? 양수 속에 있는, 홍아와 39주를 보낸 그 무엇이겠지.
○ 몸은 가늘고 길어 보였다. 홍아 머리맡에서 얼굴을 바라보니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다. 따뜻한 욕조 안에서 홍아는 울음 멈추었다. 기분이 좋은지 살짝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하고. 탯줄은 아직 30cm 정도 붙어 있었다. 배 쪽으로는 20cm 정도 길이에 굵고 속이 꽉찬 탯줄이 가위가 집힌 쪽으로는 속이 빈 채 하얬다. 간호사가 굵은 탯줄과 하얀 탯줄 경계를 또 하나의 가위로 집더니 그 사이를 자르라고 했다. 자연분만할 때는 아가의 아빠가 엄마 몸에 붙은 탯줄을 직접 자르게 하지만 제왕절개에서는 이렇게 '의식'으로 대신한단다. 가위 끝에 질긴 탯줄이 느껴졌다.
○ 파란꼬리와 홍아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 직전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몇 시에 태어났는지를 확인하는 대화를 들었다. 잠시 후에 홍아가 침대에 누운 채 나왔다. 신생아실로 옮겨져서 씻기기 전이었다. 홍아의 할머니와 말걸기는 울고 있는 홍아를 잠시 만났고 사진도 찍었다. 변화한 환경이 서러운가 보다. 간호사는 홍아를 달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나서는 울면서 폐가 확장된다 하여 한동안은 울게 둔다고 한다.
○ 홍아의 사진은 홍아가 태어난지 10여 분 만이었다. 홍아의 피부는 좀 더 분홍빛에 가까와졌다. 두 컷 찍었는데 이 사진을 공개하면 훗날 홍아가 말걸기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지도 모르겠다. 두고서 홍아에게 주자.
○ 얼마가 지났는지 수술은 끝난 모양이다. 파란꼬리는 회복실에 있다는데 별 얘기가 없다. 파란꼬리도 홍아도 건강하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회복실 간호사를 호출했더니 수술 후 출혈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므로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 꽤 기다렸더니 파란꼬리가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었다. 말걸기와 홍아의 할머니가 번갈아 가며 파란꼬리를 면회했다. 말걸기가 면회할 때 파란꼬리는 홍아를 처음 보았다. 이쁘다며 좋아라 한다. 근데 둘 다 닮지 않아 보여 누구를 닮았을까 우리는 궁금해 했다. 홍아에게 젖을 물렸더니 냉큼 빨아댄다. 아무것도 나올리 없으니 조금 후엔 포기했다.
○ 홍아의 할머니는 말걸기를 데리고 밥을 먹였고 말걸기는 큰일을 치른 흔적도 없이 잘도 먹었다. 입맛도 없었는데 밥이 뱃속으로 잘도 들어갔다. 홍아의 할머니는 세번째 손녀라서 그런지 크게 긴장도 하지 않으셨고 아가가 당신을 닮았다며 무척이나 좋아라 하신다.
○ 식사 후에 도로 수술실 앞으로 가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홍아의 할머니는 주로 홍아 키우는 문제를 얘기하셨다. 아이는 어떻게 길러야 한다 따위는 결코 아니다. 홍아의 할머니는 그런 걸로 아들래미와 며느리에게 간섭하시지는 않는다. 육아의 일을 홍아의 할머니가 상당히 부담하실 수 있으니 어찌어찌 하는 게 좋겠다는 것. 지금 키우고 있는 조카 사진도 일별해 주시면 아기가 어떻게 이뻐지는지도 핸드폰으로 보여주신다. 직접 키우는 조카에게 정이 많이 가듯 홍아에게도 정을 듬뿍 주시고 싶은 모양이다.
○ 병실이 정리되었다 하여 12경에 모두 병실로 올라갔다. 파란꼬리를 침사에 눕히는 간호사를 도와주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간호사가 무슨 처치를 하는 모양이다. 파란꼬리는 여전히 힘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웃는데 이쁘다.
○ 홍아의 할머니는 홍아의 사촌언니를 돌보러 다시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잠시 홍아를 만났다. 홍아는 졸린지 하품하면서 칭얼거린다. 자주 보러 올 건 아닌 모양이다. 병실에서 파란꼬리와 둘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말걸기는 왜 이리 피곤한지 파란꼬리의 다리도 몇 번 주무르지 못하고 한 시간 가량 파란꼬리 침대 옆 바닥에서 잠을 잤다.
○ 파란꼬리의 부모님께서 대전에서 올라오셨다. 3시 경 화정터미널에 가서 모시고 왔다. 파란꼬리와 홍아를 위한 선물도 한 가득 챙겨오셨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파란꼬리의 동생도 와 있었다. 세 분 모시고 신생아실로 가서 홍아를 잠깐 보았다. 잘 졸고 있었다. 이제 아가 피부색이다.
○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파란꼬리를 옆에 뉘어 놓고 대전에서 싸온 음식을 먹었다. 또 잘도 먹힌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파란꼬리의 엄니께서 싸오신 물건을 자동차에 싣고 혼자 집으로 왔다. 그런데 가방을 병원에 두고 와서 열쇠가 없었다. 다시 병원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 이것저것 할 것도 많지만 제대로 한 것 없시 몇 시간 퍼져 있었다. 홍아 첫날밤 파란꼬리와 함께 있게되지 않은 건 조금 미안하다. 아침에 밥을 해서 병실로 가져가야 한다. 파란꼬리의 부모님께서 드실 식사. 예상치 못한 몇 가지 물건도 챙겨야 한다. 여전히 몸은 힘들다. 파란꼬리 만큼은 아니겠지만 괴롭다.
○ 홍아보다는 파란꼬리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파란꼬리가 더 많이 생각난다. 홍아도 생각나는 데 실감이 나질 않는다. 꿈 꿨나 싶다. 집은 조용하고 파란꼬리도 없는 걸 보아 꿈은 아닌 듯한다.
※ 2009년 3월 24일. 잘못된 기억이 있어 고쳤다. 기억은 여럿이서 기억해야 한다.
내일이면 홍아를 만난다.
파란꼬리는 홍아를 39주 동안 배 속에 넣고 있었으니 많이 친숙해져 있을 터인데 말걸기는 그렇지 못하다. 뻘쭘하고 쑥스러운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다. 홍아에게 자극이 될까봐 조심한답시고 자주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다. 그래도 파란꼬리와 수다는 무척 떨었으니, 손길의 감촉은 몰라도 말걸기의 목소리는 알아 듣겠지.
임신을 노력했던 시절까지 합한다면 불안과 초조의 시간은 2년이다. 임신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입양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차에 어렵게 어렵게 임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처음 홍아가 생겼을 때는 주수에 비해 크기가 너무 작아서 유산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다. 수주 동안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지냈더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홍아가 파란꼬리의 뱃속에서 커갈수록 홍아의 존재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홍아도 한 생명인데 스스로 성장하려는 본능이 있지 않겠는가. 인간도 그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안전한 임신 상태를 대물림했을 터이다. 임신 개월수가 늘어나니 파란꼬리도 기운을 차렸고 우리는 슬쩍슬쩍 잘도 놀았다.
어느 시점을 지나자 임신의 불안은 파란꼬리와 홍아의 의학적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파란꼬리의 배가 티나게 불룩 솟기 전에는 지나치는 사람들이 임신 사실을 알 턱이 없으니 길을 걸어도 불안했다. 서비스 정신이 제로에 가까운 일산의 버스들을 타고 다닐 때는 난폭 운전 때문에 언제나 긴장을 했다. 태어날 생명은 뱃속에서 나름 알아서 잘 크니 스스로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위협은 언제나 문명에 있다.
올해가 시작할 때 쯤, 홍아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버릇대로 머릿속으로만 말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2월이 되어서야 계획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고 그것도 느지막이 수행했다. 결국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홍아를 맞이하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홍아에게 방을 하나 주어야 하니 그 방에 있었던 파란꼬리와 말걸기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꺼내 다른 방들로 옮겨야 했고 그 방들의 물건들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연쇄 작업을 해야 했다. 집이 40평 정도라면야 대충 구겨 넣으면 되겠지만 20평 대 아파트니 쓰지 않는 물건들은 버려야 했다. 옷이라고는 거의 사 입지 않고 얻어 입는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리어카 하나 분량의 옷을 버렸다. 물론 재활용품으로.
말걸기는30여 년의 과거의 족적들을 아주 약간만 남겨두고 죄다 버렸다. 옷이야 얻어 온 것이니 별 거 아니지만 과거를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진 못하다. 아주 잠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족적을 남기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파란꼬리는 대학시절의 10분의 1만 하고 살라고 한다.
홍아 덕에 이번 기회에 사료들도 버렸다. 싸구려 사료일지는 몰라도 누군가는 기록, 보관해야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말걸기 책임은 아니니 그냥 내다 버렸다. 기록 관리가 중요하다고 6년을 떠들어 봐야 콧방귀도 뀌지 않는 운동권 조직들의 임무를 말걸기가 부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에 컴퓨터 업그레이드 하면서 실수로 수 GB의 자료들을 날렸는데 말걸기 돈 들여서 복구할 책임을 못 느껴서 그냥 생깠더랬다.
이제 새 역사는 홍아와 함께 시작할 모양이다. 어쨌거나 과거는 상당히 털어버렸으니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운명이 도래했나 보다. 홍아를 만난다니 설렘도 있지만 생활이 아주 달라질 터라 두려움과 불만도 있다. 어찌 되었든 내일은 정신없이 지날 것이고 차차 새로운 생활에 익숙지자.
내일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밥 먹고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경칩이네.
지난 일요일에 파란꼬리와 함께 슈아네를 방문했다. 미루가 입고 쓰던 옷과 물건을 슈아가 준다고 해서 냉큼 챙기러 갔던 것이다.
미루가 딸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해서 딸기와 함께 찹쌀떡도 한 팩 사가지고 갔다. 미루는 딸기를 빠르게 먹어치웠다. 미루와 함께 작은 밥상에 둘러 앉아 있던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눈치껏 딸기를 먹어야 했다.
미루는 딸기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남감이 있는 데로 갔다. 눈이 내린 곳(하얀 이불이 덮힌 거실)에서 놀다가, 찹쌀떡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서는 슬쩍 한 마디 던지고 저리로 가버렸다.
"너희들 뭐 먹냐?"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재미 있던지 슈아와 파란꼬리, 말걸기는 한참이나 웃었다.
두 가지가 궁금해졌는데 하나는 미루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알게 되었을까였고, 또 하나는 저토록 '버르장머리 없는 말'에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있는지였다.
첫번째는 슈아가 설명해 주었는데 놀이방에 가서 저런 얘기를 들었을 거란다.
두번째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얘기는 이랬다. 아마 미루보다 몇 살 많은 다른 아이에게 저렇게 얘기했다가는 그 아이에게 혼났을 거라고. 확실히 미루가 사는 세계와 어른이 사는 세계가 다르니 매번 서열을 따지지는 않게 된다고.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슈아네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슈아는 시종일관 미루의 요구를 아주 친절하게 들어주었다. 말걸기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못하겠는 그 '시시콜콜한' 요구를 따뜻하게 받아주다니 놀라웠다. 슈아는 "후과에 비하면 이게 낫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슈아는 미루의 요구를 수동적으로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미루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면서 미루가 마음 상하지 않게 잘 보살피고 있었다. "너희들 뭐 먹냐?" 따위의 말은 손님 입장에서는 재미 있는 표현이었지만, 만약 홍아가 미루만큼 컸을 때 놀어온 슈아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말걸기는 슈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길 것 같다(사실은 홍아에게 예절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건 말걸기 탓이라 여겨 부끄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 때문에 홍아에게 "어른에게는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슈아에게 배운 건 자신의 감정이나 걱정을 아이에게 떠넘기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약 한 달 후면 태어날 홍아를 위해서 어찌어찌 해야겠다는 생각은 많지만 직접 홍아를 대할 때는 어찌할 지 궁금하다.
'홍아'가 누구냐면 '홍시아가'이다. 파란꼬리의 엄니께서 어느날 탐스럽게 열린 홍시를 따다가 파란꼬리에게 주셨단다. 물론 꿈 이야기이다. 파란꼬리나 말걸기나 아가가 생길 때 꿈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파란꼬리 엄니께서 태몽을 꾸신 걸로 여기기로 하였다. 결국 파란꼬리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는 아가는 홍시 꿈과 깊은 인연이 있으니, 태명이 '홍시아가'를 줄여 '홍아'가 되었다.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홍아를 만나기 전 무거운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무식한 데다가 그 무식을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밟아버리는 데에 가차없이 이용했다. 무식의 신발을 신고 몰상식한 발차기를 날리는 인간들은 사실, 말걸기 주변의 '멀쩡한 인간들'이었다. 진보적이거나, 자유로운 이념을 지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들 말이다.
이들의 무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통계가 하나 있다. 대한민국 불임부부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가임 연령 부부의 일곱 쌍 중 한 쌍, 그러니까 14%가 불임부부이다. 주변의 노령 부부를 제외하고, 알고 지내는 7쌍의 부부 중 하나는 불임이다. 엄청난 수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잠시 시간을 내어 세어 보길 희망한다.
1년 간 남녀가 피임 없이 성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지 않으면 불임을 의심해야 한다. 1년 내에 자연임신이 될 확율은 85%인데, 아이를 갖겠다고 계획한 후 1년이 지나도록 임신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불임부부일 확률이 아주 높다.
불임의 원인은 제각각이고 그 원인에 따라서 임신을 시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약물투여, 호르몬 주사, 각종 수술,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등 별게 다 있다. 운이 좋다면 호르몬 몇 방으로 임신에 성공할 수 있다. 운이 좀 있는 편이라도 수술까지는 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 아주 약간의 운만 있다면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해야 할 것이고 돈도 '억' 깨져야 할 것이다. 운이 없다면 아기는 포기해야 한다. 이게 불임부부의 운명이다.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시간과 돈을 들인 것 치고는 운이 좀 있는 편에 속하지만 지금의 담당 산부인과 의사는 '홍아'를 두고 '기적'이라 한다.
결혼했다고 해서 아기를 꼭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반면에 아기를 꼭 갖고 싶어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몰상식한 무식이들은 지난 수 년 간 말걸기에게 "아기는?"을 외쳐댔다.
불임부부이건 아니건 간에 남의 가족사에 간섭하는 꼬라지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기가 이미 있어서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아기를 가질 거냐 안 가질 거냐를 따져 묻는 게 '인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었다. 그게 왜 인사가 될 수 있을까? 그저 인사로 그치면 그나마 화는 덜 치민다. "아기는?" 다음에는 "애는 있어야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아." 따위는 뭐냐. 그딴 질문 좀 하지 말라고 하니 이런 대답도 돌아온다. "아기 낳을라고 결혼한 거 아냐? 아기 생각 없으면 결혼은 왜 해?"
더우기, 주변의 일곱 쌍 중 하나가 불임부부인데 눈치도 없이 "아기는?"을 나불대는 인간들 꼬라지 하고는. 무식해서 무례하다 해야 하나. 14%면 대충 퉁쳐서 장애인 비율이고 동성애자 비율이다. 진보 따위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외치는 인간들이 아무데서나 주변사람을 대할 때 당연히 비장애인이거나 헤테로일 것이라 여긴다면 혼날 텐데 왜 부부라면 임신은 죄다 정상적으로 할 것이라 여기냔 말이다.
아기를 낳아 기르고 싶은데 아기가 생기지 않으니 1년은 조마조마했고 그 후 1년은 피가 말랐다. 지난 해부터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병원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황사기의 파트너였던 미즈메디까지 가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노력과 비용의 마지노선이 거의 정해졌고 그 마지노선에 미치면 입양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아기는?"!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싶지 않을까?
그이들 중에 가족계획 자체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불임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대답하기 힘든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짜증만 나지 않을 뿐.
사람들은 참 생각이 없다. 말걸기는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인이 겪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실은 이해할 생각 없다. 또한 성소수자들의 감성도 관심 없다. 다만, 비장애인이나 헤테로가 '정상' 또는 '기준', '보편'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혹은 여기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향한다. 마찬가지로 불임이 아닌 사람들에게 불임부부의 피마름을 이해하라고 할 생각은 당시에도 없었고 여전히 없다. 하지만 임신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에 마구 욕을 퍼붓고 싶었다. 썅! 무식하고 무례한 것들이 지랄하넷!
이런 빡 도는 상황에서 스트레스에 취약한 말걸기가 성기능을 제대로 작동시켰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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