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오후 1시 10분
노무현의 영결식 뒤에 이어진 노제 행렬 가운데에서.
노무현의 장례 행사에 다녀왔다. 사실 누군가 이번 주의 노무현 현상을 파시즘 운운할 때 성질이 좀 났다. 애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음껏 애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남은 한이 없게 해야 차분해진 다음에 죽은 사람 때문에 수면에 가라앉을 이슈도 챙길 수 있는데.... 너무들 조급해하고, 화를 내고, 심지어 "저 세상에 가서는 미안해하라"고? 이래서 좌와 우는 통한단 소리가 나오는 거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 뿐 아니라 산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 우아한 말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그에 대한 평가든, 이후에 대한 구상이든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 봐야 몇 달도 아니고 불과 일주일인데. 상황의 전개를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근심할 수도 있었건만. [그런 가운데 장례란 엄숙히 치뤄져야 한다는 구식 생각을 고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생각이란 걸 할 만한 시간이라는 것. 예(禮)란 마음에 격을 갖추어 표현하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와 상대와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는 껍질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이 일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동안 이래저래 떠드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그 사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나 내 감정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통이란 미묘한 것이라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예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질이 난 것조차 내 마음일 뿐이므로, 아무에게도 별 소리 안 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다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노무현을 좋아하고, 미안해할 일이 있었던가 놀라울 뿐이었다. 일요일에 덕수궁 분향소에 다녀온 이후 나도 일하기에 바빴고, 몸도 좀 아팠다(아마 그것이 내 나름의 충격표현법이었을 수도). 유년 시절 놀이친구와 다름 없이 허물없던 막내 삼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님과 함께 우리 자매를 키워 주신 큰이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치매와 노환 끝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우는 법을 몰랐던 내가 어떤 정치가가 비극적으로 죽었다고 울 리도 없었다. 기사들을 찾아 읽고, 블로그들을 돌아다니고, 필자들(주로 철학자들)과 통화할 때 "시국이 흉흉하여~" 정도의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상당히 쿨하고 이성적인 양반들인데도 큰 충격을 감추지 못했고, 중대한 상황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위로하면서 원고 일정을 추스리고, 미팅 일정을 잡고 할 일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장례에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광장이 다시 열릴 수 있을까? 나도 물론 근심했고 궁금했다. 광장과 함께 우리가 말을 열 수 있을까? 아니, 말과 함께 광장을 열 수 있을까? 극단적인 거부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숨죽여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분위기일까? 영결식을 서울에서 하기로 했다고 발표가 난 이후로 신경이 조금씩 더 쓰였다. 난 노무현을 사랑한 적도 없고, 미안할 것도 없다. 그를 신뢰한 적도 없고, 실망한 적은 여러 번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욕한 적도 별로 없다. 그래도 장례식은 가고 싶었다. 이런 게 촛불 중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뭐랄까, 역사적 순간.... 그렇게 부르기는 닭살스러워도(내가 무슨 자식이 있어 훗날의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역사 의식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적어도 내 삶에서 유일무이한 순간이고, 그냥 흘려보내는 건 꽤 오랫동안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기엔, 자기 감정이 뭔지 너무들 오래 생각하고, 분향소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가고 싶은지 아닌지, 그건 그 순간의 어떤 맥락에 의해 평가하고, 논리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역사 위에서 갈지, 말지 몸으로 즉각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그 더위에 아스팔트에서 몇 시간 보낸 댓가로 파김치가 된 여파가 이틀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 직장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데미지가 꽤 크다). 2월에 엄마 수술 때문에 연차를 써서, 딱히 뽑아 쓸 연차도 없고 해서... 휴가를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그 시간에 담담하게 일을 하고, 주말에 어찌 되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게 된 건, 목요일 밤에 걸려온 오클라샘의 전화. 선생님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하시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밤중의 전화는 정말 뜻밖이었다. "너 혹시 내일 영결식 갈 거니? 나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너라면 갈 거 같아서 전화를 해봤다." "아아~ 선생님,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일이 많아서..." 선생님은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새벽부터라도 가시겠다고 했다. "M선배가 갈지도 모르는데.... 음... 제가 물어봐 드릴까요?" "그, 그럴래?" 선생님은 내년이 환갑이시다. M선배는 이제 40대 중반. 나름 정이 있는 사제지간이긴 하지만 이런 데를 같이 간 적은 없는 상당히 뻘쭘할 조합. M선배 늘 그렇듯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혹시나 전화해 본 H언니는 닷새 동안 너무 울어서, 장례식 가면 더 울까 봐 못 가겠단다. 아아... 어쩐다. 사람은 많을 테고, 날은 덥고, 선생님 혼자 가시게 하긴 걱정되고, 난 또 이런 식으로 '갈 것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다는 데서 아, 이것도 내가 살아온 데 대한 평가인가 하는 생각에... 결국 주간님께 전화를 걸어 출근했다 점심에 다녀오는 것으로 외출 허락을 받았다.
당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오후에 예전된 회의 문건 만들고, 급하게 처리할 일 놓친 거 없나 확인하고, 진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해놓을 일 체크하고, 10시 갓 넘어 서둘러 사무실에서 나와 약속장소인 광화문으로 향했다. 시청역에서 약속장소인 광화문사거리까지 걸어가는 좁은 길엔 경찰과 사람들로 넘쳐 10분 거리를 걸어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막 영결식이 시작되던 참이었다. 선생님과 아침 무렵에 마음을 바꿔 나온 H언니와 나무그늘 밑 사람들 사이에 털퍼덕 주저 앉아 동아일보 전광판으로 영결식 장면을 지켜봤다.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들, 유모차 끌고 온 새댁, 구성은 분명 다양했다. 문제의 이명박 움찔 장면에선 거리에서도 사람들의 야유가 폭발적이어서, 나조차도 움찔했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여기까지 나올 사람들 정도면 벌써 많이도 울었을 텐데...... 한명숙의 조사 때 또 한참을 울더라. (사람들 우는 데 혼자 안 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딱히 뻘줌할 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시청이 아니라 광화문에 자리를 잡으신 건, 운구 행렬을 바로 뒤따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결식이 끝나고 행렬이 광화문 사거리까지 천천히 나오는 데 15분 이상 걸렸다. 미리 노란 종이비행기를 접어 놓은 사람들은 운구차가 지나는 순간 정확하게 던지려고 조바심을 냈다. 드디어 나타난 망자의 사진과 영구차.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들 소리를 쳤다. 이런 경우 이 사람들에게 망자는 죽은 자요, 아직 죽지 않은 자이다. 죽었다는 팩트와 이 사람과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라는 팩트가 병렬해서 작동한다.
노제 행렬 속에서 뒤늦게 M선배가 합류하고, 스승과 제자 네 사람이 정말 살면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조우한 느낌. 만나자 마자 M선배는 화를 낸다. 전에는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원한을 샀으니 이 죄를 어떻게 할 거냐고. 이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악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이젠. 노제가 시작되고, 노란 풍선이 날리고, 울고,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몇 번씩 반복되고, 워낙 기질이 뜨거운 H언니는 그렇다 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오클라샘과 M선배마저 운다.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들 모여, 이렇게나 슬퍼할 만 한 이유.... 정말 노무현이 가지고 있었나? 뒤늦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난 "국민의 이름으로 노무현 대통령님을 보내드리려" 오지 않았어요 하는 반항심과 함께. 월드컵 기간에 굳이 파란색 티셔츠를 찾아 입었던 것처럼, 나는 그냥 나라는 개인으로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장례식에 오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장례식에서 무슨 구호 외치듯이, 모두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쳐야 할까? 그보단 <상록수>나 <아침 이슬>을 따라 부르는 게 나았다. 노래 속의 인물들은 홀로 제 갈 길 가고 있으니까. 노무현은 노무현의 길을 간 것이고, 나 또한 내 갈 길을 가는 와중에 그의 장례식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그곳에 가는 것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의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애도는 좋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평화적으로, 제대로 말도 못할 거면, 뭐하러 서울까지 와서 장례를 치르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으로 죽지도, 민간인으로 죽지도 못한 그 어정쩡한 상태는 장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뭐 하나 내 입맛에 맞는 게 없으니 나 역시 [그토록 피하려고 애썼지만] 입만 나불거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기를 잘했다. 노무현 열풍이라는 파시즘적 현상에 대한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TV나 인터넷으로 느껴지는 광대한 스펙터클이 파시즘을 만들 것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나는 나 자신이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겠다. 스펙터클의 일부인 채 그 조성(composition)을 바꾸겠다. 그것이 내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국민이라는 호명에 응하지 않은 채, 그 엄청난 인파의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은 채, 나와 죽은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고, 그 현상을 눈으로 보고, 겪었다. 다녀오면서 확실히 생각이 더 많이 정리되었다.
23일 밤, 노무현이 죽었다고, 다시 한 번 촛불이 일어난다면, 그건 정말 웃기지 않냐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라 했을 때, M언니는 대답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현실이고, 정치의식이라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위에서 보자고. 그렇다. 어떤 당위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인지 알기 위해서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필요했다.
블랑쇼가 말한 대로 정치가 통치가 아니라 소통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가는 존재, 유일무이한 존재, 하나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노무현의 죽음에,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인식에, 나는 그 사람이 애도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가슴속에 노무현이 영원히 살아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저승에 가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자기 몫을 했고, 더 내놓을 패가 없을 때 승부를 접었다. 결국 각자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 나 역시 나의 현실 인식 위에서 앞으로의 내 정치를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뭐 두서없지만, 그냥 쿨~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잘 가요,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