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냉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2008/10/23 00:25 생활감상문

아버지와 음력 생일이 같은 막냉이의 양력 생일은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시월 초가 중간고사라며 스스로 생일 잔치를 반납했다. 엄마와 음력 생일이 같은 내 생일은 얼마 전이었지만, 여고 동창생의 자식 결혼식에 가신다며 부산에 가시는 바람에 막냉이와 합동으로 하려던 생일 가족모임은 연기되었다. 세 자매끼리만이라도 하려던 막냉이 생일파티는 지난 주 오클라샘과 저녁 약속이 있던 관계로 또 미뤄졌고, 두 번인가 주말에 엄마가 따로 밥을 사주신다며 나오라 하셨지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식구들이 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통 기운을 못 차려서(불가피한 사정으로 금요일 저녁에 사내 강의가 시작된 이후 체력과 집중력 소모가 상당해서 요즘 애인이나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는 동료들을 제외하곤 다들 주말에 방콕 신세다) 딱히 부모님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식욕이 없노라면서.

 

그렇게 해서... 내 생일 파티는 그냥저냥 넘어가고, 지난 주에야 겨우 인터넷으로 골라서 주문한 스니커즈 한 켤레도 전해 줄 겸(본디는 지난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가려 했지만, 제인 오스틴 원작 영화 세 편을 내리 보고, 자고, 요리하느라 계속 집에 있었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었다.

 

부모님 댁에 가면, 가자마자 저녁 먹고 주말 드라마(가 다행히 재미가 있으면) 보고 독서실에서 12시를 넘겨야 집에 오는 막냉이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농고 축산학 담당에서 인문고 윤리 담당으로, 또 현장 교사에서 교육관리직으로 승진하는 일련의 과정이 진행될수록 아버지와 소통할 만한 대화 주제는 점점 더 줄어들어 가고...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으면 그만. 나의 의사표현 방식은 점점 집에 가는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이라... 가끔 가면 좀 화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겨우 안도하는 정도.

 

막냉이가 미국(어학 연수)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에 대한 아버지의 모든 관심은 입시와 관련된 것으로만 조정되었다. 애 좀 풀어 키우라고 뭐라 좀 할라치면... "너도 네 자식 낳아서 똑같이 당해 봐라"라는 (아버지 생각보다 훨씬 심한 타격을 입히는) 말로 대화 종결. 누구라도 좀 숨통을 틔여주는 게 좋을 듯해서... 그녀에게 놀자, 놀아라, 놀면서 해라, 놀아야 잘 된다...라고 해도... 신설 학교/목동 학원가라는 패러다임 안에 사는 아이는 "그거야 언니 얘기고"라며 초조해한다. 그러니 좀처럼 만나기가 어려울 수밖에.

 

길다면 긴... 오로지 입시생으로만 정체성이 형성되는 고등학교 3년의 기간 중에 절반이 지났다. 아버지는 주말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신다. 환갑에 다시 입시생 부모가 되어야 하는 엄마는 자꾸 입시생 지킴이 역할에서 이탈하고 싶어하신다(엄마 친구분들은 다 그럴 나이다. 특히나 엄마는 아직 직장도 다니시니까). 주말에 와서 애 식사 좀 챙겨주라며... 갑자기 전화를 하시면 나는 잘 가지 않는다. 엄마를 생각하면 안 된 일이지만, 급작스런 호출에 자연스레 응하게 되지는 않는다. 늘 엄마에게 마음 약한(또한 가족 안에서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Y양이 다녀오곤 내게 투덜거림을 던질 뿐이다.  

 

그래서 간만에 막냉이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한다니, 조금쯤 설레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중간고사 때 수학 답안지 밀려써서, 큰 일이라고, 당장 대학이라도 떨어진 양 호들갑스럽게 전화하시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털어 버리셔야 애도 털고 마음 잡죠"라고 드라이하게 답한게 불과 어제다.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연락에 사무실에서 선물이랑 챙겨서 나오다가... (평소 책 좀 읽으라고 무작정 안기면 부담스러워하는지라 조심조심했지만) 이번에야말로 <공부의 달인>이 필요한 때다 싶어서 한 권 들고 나왔다. 식당 가는 동안 시험지 밀린 것.. 못 들은 척하고 아무 소리 안 했더니...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중간고사 때 수학 답안지 밀려 칠해서 네 문제 더 틀렸다고... 최진실도 죽고, 사람들도 따라 죽고, 자기네 학교에서도 왕따 당한 아이랑 성적 고민하던 아이가 두 명이나 자살하고 해서 자기도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는 소리에 한편으론 철렁하고, 한편으론 잘 넘겼구나 싶어 기특했다.

 

가끔 호사스런 접대 자리나 회식에 참석하는 직장인인 내게는 별로였지만, 오늘 꼭 먹고 싶다는 캘리포니아 롤도 사주고, 나름 신경 써서 고른 신발도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었다. 책을 건네주면서... 공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구들이 모두 말리는데, 이과를 선택한 녀석. 환갑을 넘기신 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가는 부모님들과 입시생 모드로 살면서,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뭔가 진보적인 이야기(그래봐야 한겨레 창간이나 촛불집회 정도의 주제)가 재미있다는 말들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워낙 집안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금기인지라(엄마와 Y양은 정치 문제로 아버지와 내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을 동네 시끄러운 일로나 생각하지만) 막냉이에게 뭐가 옳으니 그르니라는 말은 나도 별반 꺼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자기 공부의 주제를 스스로 찾고 싶어하는 그녀가 확실히... 짓눌려 있던 내 십대 때보다는 성숙한 듯해서... 나도 편안하니... 네 서사를 찾으라는 (식의) 얘기와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에 눌리지 말라는(나는 지난 몇 년 사이에서야 아버지의 학벌 컴플렉스가 아직 치유되지 못했음을 인지했다) 얘기를 했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이미 5년 전에 맏이로서의 권리/책임을 자의든, 타의든 포기한 셈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어떤 순간에 그것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맏이여서가 아니라... 지금처럼... 몇 년 이르게 태어나 몇 년 더 부모님과 한국 사회를 겪어서 조금쯤 덤덤해진 부분들이 있고,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약간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고... 그게 내가 막냉이와 맺고 있는 느슨한 관계다.

 

물론 아직도 필요하면 그녀에게 가족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주로 나쁜 말버릇이 나타난다던지, 청소 안 하는 것이나, 타인에게 배려 없는 행동을 할 때)이 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하는 순간은 생기지 않는다. 나도 굳이 그럴 생각은 없고. 그래도 뭐 하나... 한번도 안 해준 일을 해주고 싶어서... 밥 먹는 동안 [오늘 도착한] <백석 시집>에서 두 편을 읽어 주었다. 내 기분에 취해 한 일이지만, 다행히 그녀는 즐거워해 주었다. 이 아이가 참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나도 오늘 조금쯤 더 자랐고. 우리의 관계도 그러하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백석, <여성> 3권 5호, 193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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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25 2008/10/2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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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루  2008/10/23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언니들이 그리워지네요. 저도 막냉이...(남동생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걔는 막동이라 불렀어요. 저는 막냉이, 그애는 막동이... ^^)
  2. 강이  2008/10/23 1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그런 구분법도 가능하군요. 저희 막냉이는... 가끔 이니셜로 등장하는 제 주변인물들처럼, 블로그 안에서 제가 막내동생을 적은 방법이고요... 실제로는 실명을 제외하고도, 동새앵~, 자기, 미난, 구리, 동동, 쑝쑝, 아인 등 숟한 별명으로 부른답니다.^ ^;; 저한테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지요.
  3. 하루  2008/10/2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친하신가봐요. 저는 자매들중에서 그렇게 친한 사람은 없어요...아마 모두들 저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듯해요. 김치와 옷과 청소와....뭐 기타등등...
  4. 강이  2008/10/24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ㅎ 주로 저의 짝사랑이지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저희 막냉이는 친구도 많아서 언니들한테 연연하지 않는답니다.^ ^ 떠받들어 키웠더니 요리나 일상적인 정리 등 할 줄 하는 건 별로 없고, 게다가 편식쟁이에다, 부모님은 공부만 하라고 손 하나 까딱 안 하게 내버려 두시고...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해보게 할까 고민 중이어요.^ ^;;
  5. 하루  2008/10/26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얘기가 아닌 듯. 저희 이사하고 남편은 다른 일로 바빠서 제가 일주일동안 집안 정리 하고있었거든요. 큰언니, 둘째언니가 다니러와서 2~3시간만에 싹~ 다 정리를 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했는데....

    그런데 남편이 언니들보고 "처형, 너무 고맙습니다~" 하니까 우리 언니들이 "아니예요. 저희가 못 가르쳐서 저희가 죄송해요.."하는 거 있죠. ㅠ.ㅠ
  6. 강이  2008/10/26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니들이 참 잘해 주시네요. 좋으시겠어요. 전 식구들에게도 뭔가를 대신 해준다던지 하는 일은 얄짤 없습니다.^ ^;; 스스로 하거나 안 하거나... 원하는 대로입니다만.... 다행히 저희 막냉이는 어학연수 기간에 미국인 가정에 머물면서 약간의 자활심이 생겨서... 자신이 배워야 한다는 자각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스물여섯이나 되어서야 한 생각을 말이지요. 어쨌든 저도 부모님이 떠받들어 키운 망아지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