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쟁이 혹은 산만함 그 자체
지난 주 오클라 샘과 M선배와 함께한 스페인 레스토랑에 갔다가... 공통 화제인 요리 이야기가 한참 나왔다. 일은 '할 때 열심히 하자'주의이고, 삶의 질은 확실한 먹을거리를 제대로 즐기고, 여유롭게 잘 노는 데서 나온다는 데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세 사람인지라... 스승과 제자, 또 10년 아래의 제자 뭐 이런 나이를 초월하여... 삶의 질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한참 수다 떨던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M선배가 요리를 배우고 싶다 해서... 나도 다니고 싶다고... 같이 배워서 시연회 한번 하자고... 뭐 그래서 오클라 샘 댁의 드넓은 주방까지 빌리기로 하고.... 아예 내년 스승의 날에는 선배가 톱세프를 하고, 내가 보조하면서... 한 상 근사하게 차려보자...로 얘기가 전파되었다.
그래서... 오늘밤엔 불현듯... 선배와 다닐 만한 요리학원(저렴하고, 가깝고, 동서양 요리를 망라하는 싱글 전문 요리반)를 알아보기 시작....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난 너무 욕심이 많다. 불과 2주 전까지 살기 힘들어 낑낑거리더니... 흠~~ 또 하나도 제대로 못할 거면서 이것저것 딴데로 눈이 돌아가는군.
철학아카데미 정회원(월 1만 원 내면 봄, 여름, 가을, 겨울학기마다 한 강좌를 무료로 듣게 된다)도 가입한 데(이건 약간 할까 말까... 뭐 이러던 상태에서 약간 분위기에 떠밀린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뭐 가끔 듣고 싶은 강의가 있는데 약간 귀찮아하던 거고... 어차피 연락 없이 잠수 타기로 악명 높은 S선생에게 눈도장 찍을 겸 겨울학기는 들을 생각이었으니... 이 참에...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다.... 지난 주부터 요가도 주 3회(월, 수 밤+토욜 아침)나 등록했지, 다음달부턴 중단했던 영어회화도 회사 앞 학원으로 옮겨서 아침마다 다닐 계획이지... 겨울엔 지리산 간다고 걷기 트레이닝도 해야 한다고 결심중이지, 이런 데다가 요리학원까지? 이 와중에 11월 말까지 책 두 권, 내년 초엔 블랑쇼 선집도 출범시킨다(이미 원고도 두 가지나 들어왔다)고 벼르고 있지...
에이, 또 이러다가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고... 어쩌려고 그러냐고... 세상에 대충 만들어야 하는 책은 한 권도 없지만, 지금 진행하는 책들은 모두 유달리~ 신경이 쓰이는 책들(생전 처음 저서 내는 양반, 원채 눈이 높은 양반, 블랑쇼 선집의 첫 두 권)인지라... 딴짓하지 말고 편집에만 집중하자고... 여름휴가에서 돌아올 때부터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왔는데.... 중간에 아프고, 여행 다녀오고, 병원 다니고... 겨우겨우 살 만하니까... 이렇게 또 산만해지는가?
그러게 어학 공부는 20대에 쫌 열심히 하지, 실컷 놀러다니다... 암기력은 제로에 건망증만 날로 심해지지... 기껏 등록금 내고 철학과 다녔으나 아는 건 별로 없고, 그나마도 학교 졸업한 몇 년 사이 다 까먹은 데다... 운동도 어려서부터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그나마 안전한 요가나 (그것도 목소리 맘에 드는 선생님이랑 한다고 일곱 정거장이나 버스 타고 가서) 배우러 다니는 거고... 세상에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뭐 일케 없냐고T T....
그러니 뭐 산 입에 거미줄 칠까 봐 출판사에 취직한 것도 아니고, 내 나름으로 사명감(정말?, 뭐 어쨌든 초심은 그랬음)을 가지고 선택한 직업인데... 쫌 훈늉해질 때까지 집중해서 하자고... 암만 열심히 주문을 외워도... 나란 인간은 또 이 모냥인 것이다. 무언가 하나를 열심히 하려면.... 자꾸 딴짓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히 원고를 읽을 때는 (어려울 때도 있지만) 중간중간 뭔 말인지 확실히 알겠다 하는 부분에선 감동도 있고, 동료들과 나누는 일에 대한 고민과 감각에서도 늘 조금씩은 변화를 느끼고, 분명히 그러기는 하는데... 그래도 그걸로 다 충족이 안 되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아무 거나 듣기만 하면 다 머리에 쏙쏙 들어가는 듯 오해받던 천재소녀(뭐 그런 시기심 섞인 별명에 상처받던 때도 있었다... 그거지;;) 시절도 이미 다 지났고 뭐라도 하나 배우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거 참, 어째 나의 에너지는 늘 이렇게 옆으로만 확장되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지.
여하간... 뭐가 더 중요한지 쫌 고민해 보고... 두 가지쯤은 미뤄야겠다. 살림도 해야 하고, 중간중간 분명 또 병원도 다녀야 하고, 아프다고 통 못 챙긴 친구들도 만나기는 해야 하고... 9월 이후 부모님께 계속 까칠하게 굴고 있는데... 약간 반성도 해야 하고... ~해야 하고... ~해야 하고.. ~해야 하고... "내키지 않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기"로도 했고... 체력은 약한 데다가... 어쨌든 "책은 잘 만들고 싶으니까". 쩝쩝. 몸이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았을 터인데T T... 에잇, 그래도 뭐, 요가 다시 시작했으니까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