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라곤 없는 여름밤의 일기
날이 더워 통 음식 만들기를 못하고 있다. 주말에 야채카레 한 냄비 만들어 먹은 게 전부. 더위에 다들 얼굴이 까칠하다. 채식자들과 뭐 맛난 거라도 만들어 보신을 하고 싶어도 사무실에서건, 집에서건, 매일매일 해결해 갈 일이나 읽어 치우다시피 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읽어야지 하고 침대 맡에 쌓인 책이 드디어 열 권을 넘었는데... 오늘 아침에 또 몇 권을 주문해 오후에 사무실로 배달 받았다.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소유하려고 책을 사는 것은 아닌데, 사기 전에는 읽고 싶은데... 사서 일단 방에 들어오면... 늘 밀린 책들 사이에서 안 읽게 되는 게 문제인가. 그렇다고 해서 이 여름에 빨래나 청소를 등한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 열심히 치우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쾌적함을 누릴 수 있도록 이 공간을 돌보는 일이 나를 돌보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나를 돌볼 능력을 유지할 뿐 아니라 언제든 기분 좋게 가까운 이들과 함께할 만한 공간을 마련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친구들 불러서 맛있는 거 해먹은 게 언제더라?). 머리를 쓰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기 시작하면, 대충 사는 거 순식간이다. 아직도 무덥고 몸도 지치기는 하지만, 아침저녁의 열기는 예전만 못하다. 살갗을 태우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어제는 야근까지 하며 여러 통의 메일과 엽서를 썼는데, 아직도 보낼 데가 여러 곳 남았다. 소식 전하지 못해서, 보고 싶어서, 앞에 두고 말하기가 그래서, 기록을 남겨야 해서.... 어째 원고 보려고 출판사 다니는 게 아니라 편지 쓰러 다니는 듯싶다(뭐 편지 쓰기야 대학 내내 좋아하던 일이라 괴롭지는 않다만...). 하이데거 예술철학 원고를 보다가 블랑쇼 선집 역자 모임 약속을 잡다가 도시디자인 디자이너랑 전화를 하다가... 거 참 바쁘다. 눈으로, 머리로만 읽고 쓰다가는 또 다 휘발되고 까먹지 싶어서... 노트를 꺼내놓고 메모를 하기도 하고, 집에 와서도... 책 읽다 졸리니... 예전 현상학 노트 꺼내놓고 괜히 타이핑하고 있다. 전부터 하고 싶어하긴 했지만, 결국 할 수 있으려나? 책도 찾아서 번역도 해서 끼워 넣어야 하는데. K스승님도 작년에 노트 보시더니 좋아하시면서, 나중에 책 쓰신다며 복사해 가셨는데... 쓰시려나? 그때는 뭐가 뭔지 정말 몰랐는데.. 편집자의 눈으로 노트를 보니까, 선생님 강의 자체가 이미 꼼꼼한 각주로 채워진 책과 같구나. C사장님 말대로 울 선생님 진짜 천재인가 보다. 스승님한테 배운 대로 일상을 열심히 챙기다 보니... 기력이 부족한 이 제자는 자러 갑니다. 선생님... 전화 드린 대로... 좀 서늘해지면.. 개강하고 뵈어요. 그때까지 어케든 조금쯤은 더 똑똑해져서 찾아 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