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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론은 기본적으로 한자라는 전통에 대한 타자화를 골자로 하는데, 그 역사적 배경은 일본에 의한 식민화와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독립'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매개로한 현대화를 따르기 위해 내부의 '사대'적 전통을 제거하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주의자들의 친일성이 언어의 측면에도 드러나 있는 것이다. 친일적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 속에 외국어 표기법이 한글전용론에 근거하여 제정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한글전용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현실적인 주장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주변 한자문화권의 고유명사의 번역 표기법에 은근 슬쩍 적용되면서 대중과 지식인(번역자) 사이의 위계를 심화시키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이해에 혼란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일본어와 중국어를 아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겠으나 번역, 나아가 지식 자체가 대중과 위계적 관계를 만들기 보다는 대중의 지식 증가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러한 번역행태는 개선되어야 하겠다. 일본어 번역의 경우 우리가 기존에 일본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적었기 때문에 대중적 층위에서 그다지 저항이 없었고, 따라서 지식인들 중심의 일본어 고유명사 번역 방식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중국어의 경우 상황이 많이 다르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래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논쟁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한글전용을 배후로 하는 원음주의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위력으로 인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도가 조선/한국과 같은 과거의 제국과 새로운 제국 사이에 낀 국가에서 강하게 출현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학문의 근원적 식민성의 징후를 본다.
어제 쏘아 올려졌다는 중국의 우주선이 '선저우'로 표기되고 있다. '神舟'를 '선저우'로 번역하여 표기하는 것은 분명 잘못 번역한 것이며 의미의 전달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번역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선저우라고 번역하고 '神舟'를 병기하는 것은 언중에게 외국어를 배우라는 요구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신주(神舟)'라고 표기되어야 옳다. 아울러 한글 속의 한자어는 반드시 한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자와의 연관성이 제거될 수는 없다. 지속적인 조어 과정 중에 기존의 한글과 한자의 연관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게 우리의 언어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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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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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많이 참고가 되었습니다. 반성도 많이 하게 되네요. 한편으론 그간 이른바 '번역논쟁'이라 할 만한 것이 주로 영어나 유럽어 ... 특히 철학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또 주목받는 현상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 이런 논쟁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뭔가 번역은 해당 언어에 정통한 사람만이 손대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했던 것인데(저는 개인적으로 짧은 언어실력을 핑계로 '걍 뜻이 통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만), 그것도 강한 식민성이 배태된 학계-출판계 중심 사고방식 때문일지 모르겠네요. '선저우-신주'와 같은 문제제기가 훨 중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어와 일본어는 한국에서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중국어는 한자로 되어 있지만 영어나 불어 같이 다가오는 느낌이랄까.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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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통하면 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너무 원어의 맥락에 충실하려고 하다보니 논쟁도 지나치게 전문화되는 것 같구요. 저도 이것이 일정하게 식민성과 연관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겠지만, 그 욕망이 강해질 수록 늘 학문은 그들의 입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지요. 곧 식민성은 더욱 강화됩니다.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이 적지 않게 소개되었음에도 조선과 한국의 식민성의 문제가 갖는 종별성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많이 느낍니다.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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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제국주의의 식민에 동조하는 '친일'에 종속된 측면이 중요한 듯 하다. 이는 철저히 외부로부터 이식된 담론이며, 내재적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전형적 엘리트 중심의 식민주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은 본래 이러한 민중적 주체성과 내재성을 강화하는 동기로 만들어졌는데, '한글전용론'은 이와 정반대로 내재성의 파괴를 지향하는 맥락에서 제기되었다는 역설이 있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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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의 경우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따로 살펴보아야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흔적과 새로운 시스템 사이의 갈등은 문득 문득 나타난다. 지난 봄 일본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닥쳤을 때 과거의 지진을 언급하며 '관동(關東) 대지진'을 '칸토 대지진'으로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을 보며 적어도 나는 매우 낯설었다. 물론 이 낯설음은 중국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 우리의 '한글전용'과 유사한 어떤 것이 성공하지 않는 이상,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 여전히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임은 분명하다. 이는 물론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번역자/지식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번역자/지식인이 번역을 방기하는 사이에 외국어로서의 일본어와 중국어를 알지 못하는 언중은 지속적으로 한글전용/원음주의적으로 표기된 한글과 그 원어인 한자를 결합시키는 일종의 외국어 학습을 강요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의 궁극적인 효과는 불보듯 뻔하다. 학문의 식민성의 문제는 어쩌면 대중과 지식인의 위계 공고화를 전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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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서적의 번역의 경우에 전근대의 사상이나 역사를 다루는 경우 기존의 한자어로 인명과 지명을 번역하고 근현대에 걸쳐있는 부분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현대와 당대의 사상과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는 경우 원음주의 표기를 하되 전근대에 대해서는 원음주의 표기 또는 한자음표기로 나뉘어지는 것이 근래의 대체적인 중국어 인명과 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방식인 듯 하다.기본적으로 원음주의 표기는 전근대와 근현대의 역사적 전환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방식이다. 근대로의 전환이 단절적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보다 역사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밝혀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모종의 탈식민주의적 방법일텐데, 외부에서 주어진 기존의 방법과 그에 의해 형성된 지식과 재구성된 식민적 역사로는 우리 역사의 전환을 이해하기 보다는 왜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음주의적 표기법은 바로 이렇게 우리 역사의 전환에 대한 지적 작업의 내용과 방법의 식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