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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함과 서운함, 아쉬움이 좀 교차하는 듯 하다. 조건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 능력의 문제다. 그래도 결국 나는 내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주어진 내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역전문가들의 경우 타자에 대한 균형적 인식이라는 일반적 접근이 요구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상당히 허구적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주체적 측면에 '비주체적 불구성'의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인데, '균형'에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좌/우'의 인식 경향을 막론하고, 그 근거와 기준을 외부에서 적절히 수입할 수 밖에 없다. 중국에 대한 '좌익'적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중국 민중의 운동이나 저항에 대한 인식 또한 그 '순진성'에도 불구하고 외재적 인식의 포퓰리즘적인 배합을 넘어서기는 어려워진다. 이를 인정하면 '중국'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진다. 이것이 걱정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누구의 걱정인가. 중국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왜 어떻게 말하도록 하는가?
작금 남한 현실에서 직접적인 '국제주의' 연대의 추동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는 국제주의라는 것이 과거 20세기 초반과 같이 역사지리적 '정세'하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현재는 권역적 차원에서 여러 차원의 단절이 쉽게 극복되기 어렵고 이를 위한 주체의 형성이 매우 저급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그러한 연대를 실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문제의 해결에 그것이 종속되어야 하는데, 자기 문제의 인식이 운동적 차원에서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세가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낮은 차원에서라도 국제주의적 연대를 제기하는 것은 적어도 이론작업의 차원에서는 관념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참함을 회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비참함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참함에 대한 동정이나 그것의 극복에 대한 모종의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오히려 인식 조건의 결여 자체에 대한 이론책임의 알리바이처럼 구사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식 윤리의 입장에서 이는 '운동 추수주의'의 한 전형이다. 이는 국내의 운동과의 관계에서 지식인의 관계맺음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된다.
내가 보기에 이론의 '현장성'을 복원하자는 한 동학의 강조는 바로 이론의 '현장'과 대중의 '현장'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마치 대중의 현장을 자신의 현장으로 착각하면서 초래되는 이론의 '현장성' 부재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사실상 '이론의 현장종속성'의 표현이자 '이론의 탈실천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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