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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人生님의 [번역과 관련한 가설적 연구 주제 하나.] 에 관련된 글.
http://ideas0419.com/457
文解率이 OECD국가 중 최하위라는 조사분석 결과가 나왔던 모양이다. 유사한 이야기를 건너서 들어왔던 터이고, 게다가 현대화된 어문체계의 한계와 모순을 번역 윤리의 맥락에서 고민해왔던 나의 문제의식에 부합되는 분석 자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블로그에서 제시한 현상에 대한 진단과 대안은 이른바 '우리말' 사랑으로 귀결되는 바, 역사적 분석과 현실적 대안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현재 우리의 어문체계는 언중들이 글자를 읽을 줄만 알 지, 글자로 구성된 단어, 그리고 단어로 구성된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애국심'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는 '소통불가능'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성'의 역사적이고 외재적 관철에 의한 것이다. 소통불가능한 어문체제의 효과는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이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단순히 영어와 외래어에 대한 미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우리말'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 부재이다. 이른바 '외래어'의 남용은 사실 '우리말 사랑'과 정확히 같은 논리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말은 곧 '한자'를 배제한 한글전용의 논리 하의 '우리말'이다. 한자를 체계적으로 배제한 '한글전용'으로는 '번역'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없이 많은 음역어를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는 사람만 아는' 말이 되어 버린다. 바로 세대간, 계층/계급간에 소통불가능 상황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외국어 발음의 전사轉寫만을 보고도 그 원음을 알거나 적어도 유추할 수 있는 '지식' 계급을 말한다.
사회적 위기의 근원에 나는 이와 같은 소통가능성의 전제가 되는 언어 문화체계의 단절과 부재가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잡리잡고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서 '한글전용'이라는 식민주의적 현대성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던 조선의 지식계급의 탈민중성과 탈역사성이 원인遠因이 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사상'의 단절과 부재 상황에도 이와 같은 장기간의 과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답은 국한문혼용을 복원하는 길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중국어 고유명사 번역'과 관련된 가상적 '원음주의'의 폐해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北京이라고 쓰고 '북경'이라고 읽으면 그만이다. 그 외국어 발음의 한국어 轉寫전사인 '베이징'을 알고 있어서 그걸 아는 척 하고 싶으면 그렇게 읽어도 된다.
참고로 이 문제는 일본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일본어에서 이것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문제가 된 이유는 당연히 식민지배와 관련되어 있다. 식민지배의 연속선상에서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언중과 소통불가능한 일본어 번역체제 때문이다. 탈식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으니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온 것은 당연한 것이고, 중국과 다시 만나면서 같은 방식이 다시 적용된 것도 예견된 사태였다.
조선 유가의 개창과 초기의 개혁의 과정에서 출현한 '한글'이 대표하는 조선적 현대성의 의의를 정확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라도 국한문혼용을 통해 소통가능한 어문체제를 복원해야하지, 더이상 식민주의적 자폐증에 기인한 '한글사랑'이나 '위대한 한글'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종의 한글창제의 의의는 '읽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민중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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