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한인유적지와 ‘라즈들노예’역-④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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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연해주는 참 묘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넓으나 넓은 땅을 가진 그곳, 알고 보면 우리에겐 희망인 동시에 회한의 땅이기도 한 곳이다, 1860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58년 전 일이다. 조선 농민 13가구가 처음 진출한 이래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한 한일합방 즈음에는 교민수가 6,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들은 이내 신한촌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곧 일본군의 겁박 밑에 놓이게 되고 나중엔 강제이주로 인해 참혹한 수난을 겪게 된다. 1920년 4월 4일과 5일 일본군이 연해주를 점령하여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하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마을을 파괴하였다. 신한촌에서 죽은 한인의 숫자만 무려 300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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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스탈린에 의해서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날벼락 같은 변고가 닥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건설했던 신한촌의 고려인들은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유랑의 길을 걸어야 했다.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첩자로 몰았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일본군들을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구실에 붙들려 6천㎞나 떨어진 곳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통한의 ‘라즈들노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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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도착 이튿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이른 조반을 호텔식으로 해결하고 우스리스크로 향했다.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쯤 달려 갈 첫 번째 방문지는 이별의 ‘라즈들노예’ 역이었고, 다음이 이상설 유허지, 이어 발길이 닿은 곳이 고려인문화센터와 항일애국지사 최재형 선생 생가 방문이었다.

라즈들노예 역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소개(疏開)되던 역이었다. 17만이나 되는 고려인들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도 이용됐겠으나 라즈들노예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9,288㎞ 떨어진 곳에 있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프스키역을 똑같이 모방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 처음부터 실용적인 목적보다 외관에 신경을 쓴 궁전처럼 지은 곳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1891년에 이 역의 주춧돌을 놓은 이는 후에 니콜라이 2세가 된 차레비치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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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들노예역’이 지금껏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것은 외형을 멋있게 지은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철도사업이란 당시로서는 최첨단 국책사업이었을 것이다. 작지만 제대로 남아 우리 민족의 지난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이별의 현장은 “이제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약소민족의 한과 쓰라린 이별의 단말마를 외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탈린의 탄압에 지식인들은 반항했고, 그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다. 김만겸, 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김 아파나시, 남만춘, 박 니카포르 알렉산드로비치(박민영), 박진순, 오하묵, 이봉수, 조명희, 최성학, 한명세 같은 이름 있는 지식인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 대책 없는 민초들은 소리 없이 “중앙아시아로 떠나라!”는 명령에 따라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수송됐다. 때마침 라즈들노예역을 지나는 화물열차들이 육중한 몸체를 흔들며 지나가는 것을 보며 폰카에 그 장면을 담아본다.

 

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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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와 라즈들노예를 떠난 고려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922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한 후 한인독립군들은 무장해제를 당한다. 그리고 한인들을 집단농장에 배치하여, 공산체제로 편입시켰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인들은 농업의 집단화를 시도하는데 1924년 라즈돌리노예역 부근 우두고우촌에 솔밭관 유격대 출신들은 농업협동조합 공산을 창설하여 시대의 변화에 순응한다. 

한편, 항일운동가들은 만주지역으로 이동을 서두른다. 그러나 스탈린은 고려인들의 중국 출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풍천설지에서 얼어 죽은 귀신이 되도록 방치하는데 그치지 않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낙인찍어 예의 그 악명 높은 1937년 10월부터 11월까지 17만 명 이상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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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묘역이 카자흐스탄에 있게 된 이유는 이 같은 맥락이다. 봉오동전투와 창산리전투를 비롯하여 37회의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던 여천 홍범도 장군이다. 여천은 국내에서의 항쟁에 한계를 느끼고 근거지 건설에 기반 한 지속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낀다.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유다. 뿐만 아니라 1923년 연해주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1927년엔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까지 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의 움막생활이었다. 장군은 1938년 크질오르다로 이주한다. 여기서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항일 구국운동의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장군은 병원 경비, 극장 수위로 근무하며 말년을 추스르다가 1943년 벗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장군이 치른 이승에서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독립 2년 전인 10월25일 눈을 감았다.

보자. 듣자. 기억하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조국 독립이라는 소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던 장군의 유언을, 그때 이곳을 지났을 17만 고려인들의 피눈물을 기억하며 ‘라즈들노예’역의 절규라 하자. 절절한 한이 되어 우박이 쏟아지듯이 그들의 한 맺힌 피울음이 나그네의 귓전을 때린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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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23:21 2018/09/2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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