➀ ‘김대중을 지킨 18년 맹장’, 김종선 수행비서

-어디서나 ‘자넨 내 생명을 지켜주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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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토막잠, 판소리와 서태지, 드라이브, 아이스크림!’ 무거운 것 말고 “김대중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드 퀴즈를 내듯이 기자가 물었다. 이에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의 경호실 부장 김종선 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위의 대답을 내놨다.

김종선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18년간 수행하고 지킨 동교동의 맹장이다.’ 그러나 18년이란 숫자는 김종선이 DJ와 함께 보낸 기간을 단순 계량한 수치에 불과하다. 김종선의 가슴 속에 DJ는 영원한 나의 ‘어르신, 대통령님, 민족의 큰 지도자’와 같은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틈만 나면 동작동 국립 현충원의 DJ 묘역에 나가 옛 동지들과 함께 대중 선생에 대한 추모의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밖에도 DJ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장감 넘치고 진심을 다하는 시간을 보낸다.

예를 들어 ‘길 위에 김대중’과 같은 영화며, 작년 1월에는 ‘화해·통합·평화’ 정신을 기치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일산 킨택스에서 열렸다. 역시 얼마 전인 작년 11월 11일에도 여의도 국회박물관 회의실에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간된 <김대중과 함께한 길 위에 100인, ‘동지’>에 글쓴이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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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대중 선생이 미국에서 귀국 한지 한 달 닷새 만의 일이었다. 그가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간 날은 살갗을 파고드는 꽃샘추위가 오랜만에 뚝 그친 85년 3월 13일이었다. 김종선은 밝은 햇살이 포근하게 등을 감싸주는 가운데 동교동의 벨을 눌렀고 DJ를 첫 대면하게 된다. 종선은 그 자리에서 선하게 웃고 있는 모습과 초면인 자신을 오랜 식솔처럼 편하게 대해주는 대중 선생의 다정함에 마음을 열게 된다. 김종선은 그 시작을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표시하였고, 이후 파란만장한 18년의 여정을 DJ와 함께 펼쳐나가게 된다. 이는 당시 제11대 국회의원(구로 을)인 김병오 의원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어느 날 김병오 의원은 자신의 충직한 비서 김종선을 부른다. “자넨 이제부터 나보다는 더 큰일을 하실 분을 모셔주면 좋겠네! 김대중 선생님이 비서를 구하신다는구먼, 그래서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라며 DJ를 모셔줄 것을 부탁한다. 이어 “선생님은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시라네. 사고로 위장한 자동차 테러까지 당하셨네. 그분을 모시게 되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 내 마음 알겠지?”

김대중의 귀국에는 곡절이 많았다. 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아닌가. 하지만 사형수에서 무기형으로 감형 받은데 이어 20년 형으로 감형되더니 돌연 신병 치료 차 석방되어 미국의 워싱턴으로 떠났던 그가 돌연 2년 2개월 만에 귀국을 강행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DJ의 귀국은 국내외 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DJ의 귀국을 전두환 군사정부에서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서는 신변이 걱정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김대중의 귀국으로 인해서 정권에 타격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였고, 후자는 그분에게 테러와 총격과 같은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까 봐서였다. 그 얼마 전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퀴노’ 상원 의원이 미국에서 귀국하다가 필리핀의 마닐라 공항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피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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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사정은 필리핀 보다 더 한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18년 독재에 이어 광주학살과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직을 꿰찬 전두환 신군부정권은 탄생부터가 정당성을 결여하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때문에 민주화의 상징인 대중 선생이 귀국하는 순간부터 정권의 안위가 걱정되는 판이니 DJ의 귀국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귀국길에 올랐다. 에드워드 케네디 민주당 상원 의원 등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대중 선생의 호위를 자처하여 인간 방패가 돼주는 가운데서다.

이 같은 시기에 김종선은 김대중 선생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필시 운명이야!’ 종선은 DJ를 모시는 것이 내심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붙어 있는 껌 딱지만 한 작은 불안까지는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들 김대중 선생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 두고 보라지. ‘눈물로 씨 뿌린 자 웃음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도 있잖아“ 하며 간단치 않은 여러 감정을 애써 누르며 새삼스럽게 각오를 다지곤 했다.

 

DJ를 수행하면서 처음 겪은 어려움은 무엇인가

“시청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추협 공동의장인 선생이 회의 차 무교동에 있는 사무실로 가시는 길에 시청 앞을 지날 때였어요. 경찰들이 선생의 차를 완전히 포위하여 꼼짝도 못 하게 에워쌌습니다.” 경찰은 이때 DJ가 탄 차를 견인하려 했다. 더구나 사람이 타고 있는데 통째로 말이다. “당사자인 선생님은 그런 일에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저 역시 처음 당하는 일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누군가 조금만 길을 터주면 신나게 달려서 선생이 원하시는 장소에 내려드릴 수가 있을 것 같은데 김종선은 안타깝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일이 전개됐나요?

“그때 동승하고 있던 비서 중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민추협 사무실에 미리 와 있던 동지들에게 연락을 하고, 수행차를 뒤따르던 동지들 또한 차에서 내려 선생이 타고 있던 차를 에워싸고 길바닥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교통은 순식간에 엉망이 됐지요. 어쩔 수 없었던지 결국 견인을 포기하더군요. 하지만 계속되는 경찰의 통제로 차는 동교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DJ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로 총 55회의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가 6.29선언으로 완전히 해금 당하기 2개월 동안에 받은 핍박은 더욱 길고 힘든 것이었다. 무려 78일간이나 자택에 갇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으로 DJ에게 가해지던 온갖 족쇄가 풀린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 전원과 광주 민주항쟁 관련자 15명을 포함하여 모두 2300여 명이 사면 복권되기에 이른다. 김종선은 그제야 위대한 정치인의 면모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정치인이란 때로는 목숨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주저 없이 정면 돌파를 시도해야 함을, 담대한 결기를 보여줘야 함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함을, 그러고서야 비로소 위대한 정치인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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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3 16:40 2025/01/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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