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리스크 한인 역사와 고려인문화센터-⑥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⑥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이상설 유허지를 뒤로 하고 이어 찾은 곳이 한인문화센터였다. 일명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으로서 고려인들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후손들의 공간이었다. 빛바랜 사진과 태극기를 비롯한 자료들이 지난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라면 과연 그에 걸 맞는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문화센터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한.러 수교 다지며 고려인문화센터 설립
러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우리가 흔히 연해주라 부르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주인 우스리스크에 소재한 고려인을 위한 문화센터다. 규모는 약 1천300여 평이다.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연방 고려인 이주 140주년위원회'를 만들고, 양국이 기념관 건립 협약서를 체결하면서 200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로서 140년 간 3차례에 걸친 한인 이주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려인들이 한.러 양국 간 우호협력의 매개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3차례에 걸친 한인 이주’라 함은 1860년 농가 13가구로 시작한 18만 고려인 수가 연해주 인구의 10% 쯤 되던 시기에 스탈린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사실과 1990년대 초 본래 살던 연해주로 약 4만 가량의 사람들이 재이주 한 사실을 말한다.
때는 구(舊)소련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돼 있던 중앙아시아의 각 나라들은 연방을 탈퇴하며 독립을 선언하는 추세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정세는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러시아어를 쓰는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겁내며 앞날을 걱정하게 된다. 소련이 해체되는 시기였기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뜻하지 않게 발생할지도 모르는 분쟁과 생활고의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당수의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의 귀환을 결정한다.
문화센터의 시설현황과 공간 구성
먼저 1층 이주역사관이다. 그곳엔 항일영웅들을 기리는 코너가 있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이 꼽은 항일투쟁 영웅 59인인데 이곳엔 안중근(1879∼1910년), 신채호(1880∼1936년), 이동휘(1873∼1935년), 이범진(1852∼1911년), 이상설(1871∼1917년), 박은식(1859∼1925년), 이동녕(1869∼1940년), 홍범도(1869∼1943년) 등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고려인문화센터에는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정보화코너가 있었다. 한국 방문객을 위한 간이숙소에 여러 개의 모임방까지. 특이점은 국제 NGO(비정부기구) 메디피스가 서울대치과병원과 경희대 한방의료원의 도움을 받아 치과와 한방과 등 외래병원을 개원한 사실이다. 2층엔 공연장을 겸한 체육관이 있어 크고 작은 행사가 수시로 열린다. 자연스럽게 고려인뿐 아니라 러시아인에 다른 소수민족들도 즐겨 찾는 소통과 친교의 장이 되고 있다.
현재, 전체 고려인수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우즈베키스탄 18만, 러시아 15만, 카자흐스탄 11만 등 주로 CIS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구 귀국하여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도 6만 5천 명 정도다.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4만여 명, 고려인 문화센터가 들어서있는 우스리스크에는 약 2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옛 우리의 발해역사
그렇다면 전부터 이곳으로 온 사람들은 아무런 맥락이나 정서적인 끈 하나 없이 무작정 이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연해주는 고조선에서 발해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결코 낯설지 않은 땅이었다.
한인들의 첫 마을은 지신허이고 대표적인 이주 지역은 바닷가 포시에트촌인데 1937년까지 지신허는 항일의 근거지였던 연추(안친혜)와 더불어 대규모마을이 형성된 곳이었다. 먼저 조선후기인 1860년에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농업이주를 시작한 이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소문과 필요성에 의해 집단을 이뤄 신한촌으로 발전했다. 이러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엔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큰 몫을 한다.
그들의 삶은 한반도의 농경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자료사진을 보면 혼례모습에서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일생을 묘사한 평생도와 농사일을 묘사한 경작도로도 고려인들이 당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해주 항일운동의 실재
이범진은 이위종의 아버지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일본의 소환명령을 거부한 채 대한제국의 황제 특사로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소명을 다한 사람이었다.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해주 항일의병 조직결성에 고군분투했으나 일제의 조선 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스스로 목을 맨다. 자결로서 일제에 항거한 그의 유해는 우즈벤스크 묘지 제8구열에 안장돼 있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했다. 1910년에 의병부대인 13도의군을 조직하고 13도의군의 유인석과 이범윤과 이상설 등은 ‘합병조약무표’ 선언을 위한 ‘성명회’를 조직했다. 이 선언서에는 총 9,624명이 서명을 하여 독립의지를 선포했다.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해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등을 조직하여 학교 설립과 교원양성과 신문발행을 해나가며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언론분야에서의 활약은 활발했다. 민족과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인 언론의 시초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였고, 다음으로 시베리아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이 자금을 댄 <권업신문>의 등장이다. 권업신문은 105인 사건과 의병운동 등 항일 이슈를 전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인 <선봉>도 1923년에 창간하여 <고려일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는 신문이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독립운동에 놀란 일제는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연해주를 공격하여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킨다.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하여 인명살상과 마을 파괴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신한촌에서 죽은 숫자만 300여명이다. 이때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도 살해된다. 우스리스크 자택에서 잡혀가 재판도 없이 총살당한다. 우스리스크에는 당시의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추방
일본에 의한 연해주 4월참변 이후는 또 어땠는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한인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태운다. 열차 안은 굶주림과 공포로 점철된 지옥이었다. 그들의 최종 종착역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쉬토베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남부였는데 동포들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40일 동안이나 짐칸에 갇혀 지냈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 30년간 권좌를 유지한다.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인간백정으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었다. 스탈린 시절에 죽은 러시아인들은 2차 대전을 포함해서 2천4백만에서 2천7백만으로 추산된다. 이중 군인전사자만 800만인데 대부분이 젊은 청년들이다.
스탈린은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세워지는 것을 본다. 본래 중국 땅이었던 연해주에 대한 영토 반환 분쟁이 일 것이라 예단한다. 이에 대비하려는 계획으로 연해주에 살고 있던 황인종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로서 시베리아와 연해주와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한다. 그 기저에는 ‘일민족일국가(一民族一國家)주의’가 한 몫을 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런 정책 때문에 타 민족들은 배척과 탄압으로 죽어갔다.
그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배움의 기회도 없었다, 국가기관 취업과 사회진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7000명 이어 4800 명 매년 목숨을 잃는다. 학대와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질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일했다. 살기 위해 노동에 몰입하며 농토를 개간하고 그 땅에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룬다. 3년 만에 자립기반을 일구고 소비에트 농업 생산의 주요 축이 된다.
아리랑과 고려인이라는 명칭
아리랑은 한인들의 가치이면서 삶이요 역사였다. 애잔하고도 잔잔한 그 가락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 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19세기 말 러시아 이주와 함께 러시아에 전해졌고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일대로 전파되었다. 전파 경로는 지난 150년간에 걸친 고려인의 가슴시린 삶의 역사와 괘를 같이했다. 슬픔과 고난의 여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슬프지만 힘이 되는 치유의 가락이었다. 명절 때 부르고 친구들과 함께 나무하러가면서 부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리랑을 불렀다.
고려인이라는 명칭의 유래다. 원래 고려인은 중국의 동포들과 같이 조선인이라고 했지만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 결정하였다. 때는 서울올림픽 전후이며, 1988년 6월 전 소(蘇)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부터다. 이후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소련 이주 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아리랑 소리가 들려왔다. 체육관에서는 한국에서 온 ‘대구대학교 연해주 고려인문화센터 해외봉사단’ 학생들이 현지 학생들과 어울리고 있는 모습이 었다. 친교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어린이들과는 기념사진을 찍고 대구대 하계봉사단원들과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국에서 찾아온 일행을 배웅해줬다.
고려인, 고려족, 까레이스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잃은 민족과 같다’고 한다. 조선인, 고려인, 한국인, 까레이스키들은 먼 훗날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뿌리 앞에서 마음은 늘 이심전심일거라 생각한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