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새와텃세

분류없음 2016/11/17 01:19

 

1.

 

주중에 일하는 새로운 일터에서 "텃새" 들이 부리는 "텃세" 를 겪고 있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엔 좀처럼 면역이 쉬이 들지 않는다. 일터에 따라 업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고용안정성 (job security) 이 낮거나 노동자 스스로 자기 직업과 업무에 관한 만족도가 낮을 때, 노동자에게 일에 관한 전망 (예를 들어 승진; promotion 의 전망) 이 보이지 않을 때 새로 들어온 동료들을 경계하거나 심지어 핍박하는 일이 일어난다. 물론 개개인의 인격이나 성장과정, 인성 등도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직장을 잡았을 때에는 학생으로 실습을 하고 실습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직원이 되었다. 이미 그 곳에서 일하던 비정규직들에게 나의 등장은 어느 정도 "위협" 은 되었지만 매니저라는 사람이 워낙에 연공서열 (seniority) 을 따지던 양반이라 꽃개는 그저 "비정규직" 풀 (pool) 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어리고 미숙한 동료에 불과했다. 외모 탓도 컸다. 얼척없이 어려보이는 탓에 그들 눈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리고 순진한 청년으로 보였던 것 같다. 나중에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깜짝 놀라는 그들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어쨌든, 그래서였는지 모두 친절하고 착실하게 가르쳐주었다. "서두르지 말라" 면서 하나둘 차근차근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핵심업무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것을 스스로 깨우치는 데 자그만치 2년이 넘게 걸렸다. "핵심업무" 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라 그들이 애써 가르쳐주지 않았다거나 일부러 감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같은 회사 내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두번째 직장을 잡았을 때에는 경계가 엄청 심했다. 더구나 나는 같은 회사 출신이었고 (internal hiring) 새로운 매니저는 경쟁구도를 만드는 것을 유독 즐겼다. 영구 정규직 직원들 (permanent full-timers) 까지 나서서 시비를 걸거나 빈정거릴 때에는 정말정말 조심해야겠구나 싶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같은 회사 내 다른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경력을 쌓은 나의 업무능력에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과 여러가지 방도를 통해 친해지면서 "나는 이 곳에서 풀타임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라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여러번 밝힌 후에야 모든 갈등이 가라앉았다.

 

 

2.

 

어제 새로운 직장에서 있었던 일. 근무가 시작되었고 정규직 직원이 오프를 신청하는 바람에 업무를 같이 하게 된 시프트 파트너 2명 모두 비정규직이다. 남아시아 출신 남성 한 명과 캐리비안 출신 여성 한 명. 둘 다 비정규직으로 그 곳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 이 말은 업무에 관한 한 눈을 감고도 일을 해낼 줄 안다는 소리. 동시에 정규직화, 승진 기회 등에서 누락당한 경험이 최소 한 번 이상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둘 다 비백인 이민자. 꽃개의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둘 중 출근시간에 늦어 한소리를 들은 남성직원은 아예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의 민망함 (frustration) 을 애먼 꽃개에게 투사한다. 꽃개는 새로 오픈하는 사이트로 곧 옮겨갈 예정이므로 포지션이 다소 어정쩡하지만 어쨌든 그들 눈에 꽃개는 "굴러온 돌" 이다. 예상한대로 꽃개의 업무 질문에 이 남성직원이 "### 트레이닝은 받았어?" 라며 신경질적으로 되묻는다. "###" 은 이 업무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아차, 그냥 멀찌감치 빠져있는 게 나을 뻔 했는데 괜시리 나서는 바람에 이 양반 심기를 건드렸구나. 더구나 꽃개는 비백인 이민자 아닌가. 얼척없이 어려보이는 외관상 불리함에 더해 이들이 싫어하는 중국인 (차이니즈) 으로 보일 가능성이 100퍼센트다.  

 

 

캐리비안 여성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분위기를 조성하며 텃세를 부리는 스타일이라면 남성 직원은 은근히 자신의 업무능력 (competancy) 을 과시하는 스타일이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런 데에서도 젠더적 차이가 드러난다. 이럴 땐 둘 간의 연대를 끊어내야 한다; 핵심업무는 손대지 않고 관찰만 한다, 이 둘이 보기에 주변업무인 것 같은 일은 열심히 한다, 여성 직원에게 심리적인 편안함, 친근함을 준다. 말로 하니 우습고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적인,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다. 결론은 -- 그냥 그들이 하던대로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내버려둔다".

 

 

3.

 

근무시간 내내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다스리고 집에 오는 길에, 집에 와서, 아침에 일어나서 찬찬히 리뷰를 해보니 어제 같이 일한 비정규직 두 명 모두 꽃개의 포지션 (새로운 사이트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에 이미 지원했다가 미끄러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꽃개의 등장은 이들에게 "불편함"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특히 업무능력에 시비를 건 남성직원에게 꽃개는 중국인 디렉터에서 연줄이 닿아 낙하산으로 입성한 "근본도 없는 중국인" 으로 고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개연성이 현저히 높다. 

 

 

상상력을 동원해 이 상황을 나름대로 합리화 (justifying) 해보자. 만약 한국에서 일하는데 어느날 누군지도 모르는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치고 들어와 나보다 높은 지위 혹은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자리에 덥석 앉는다면? 꽃개는 억울하고 화가 날 것이다. 바로 몇 주 전, 몇 번이나 지원했던 정규직 자리가 이제 갓 들어온 백인 남성, 그것도 회사 내의 다른 매니저의 아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 억울함과 절망감,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백인남성이 "매니저엄마" 라는 정치적 백업과 "백인" 이라는 차별적 우위를 등에 업고 그 자리에 입성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꽃개는 그런 백업도 인종적, 성적 차별에서 우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오로지 꽃개의 시선일 뿐이다. 그 곳에서 5년간 일했던 비정규직 직원에게 꽃개의 시선이나 관점은 하등 상관이 없다.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 다르고 각자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써 나는 중국인이 아니야, 나는 백그라운드를 등에 업고 정규직 포지션을 구한 아니야, 나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따위를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이 그들 눈에 보일수록 그들의 분노는 더 커질 뿐이다. 절대시간이 필요하고 꽃개는 꽃개 자리에서 묵묵히 보이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4.

 

짐승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은 그렇다치고 예전에 강아지와 함께 살 적에 다른 강아지들이 집에 방문하면 펄쩍펄쩍 뛰면서 예민하게 킁킁거리며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다. 꽃개와 살던 강아지는 나름대로 "인간화 (?)" 가 많이 된 절반은 인간에 가까운 강아지였는데도 다른 강아지들의 등장엔 매우 단호했다. 이른바 텃새였던 꽃개의 강아지가 부린 텃세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지랄" 을 반복하면서도 꽃개도, 꽃개의 강아지도 익숙해졌고 한참 뒤엔 다른 강아지가 와도 그닥 신경쓰지 않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 익숙해졌는가 싶었는데 못내 날뛰며 설치고 짖는 강아지를 보면서 이들의 세계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구나 깨닫고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때가 떠올랐다.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다.

 

 

2016/11/17 01:19 2016/11/1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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