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분류없음 2024/10/04 12:12

"산다는 것은"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유툽에 있다. 참 좋은 세상. 처음 몇 개의 클립을 시작할 때마다 지겹게 반복하던 커머셜 광고도 점차 사라지다가는 결국에는 영 나오지 않아 보기에 더욱 좋았다. 1993년 서울방송 (SBS) 에서 방영했고 김수현 극본, 곽영범 연출작이다. 원미경, 남성훈, 유호정, 이재룡, 김혜선, 박순천 등 김수현 작가께서 좋아하는 분들이 모두 등장하신다. 아, 윤여정 선생님도 출연하신다. 중간에 빠진 클립이 몇 개 있는 것 같기도 하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 거북할 정도는 아니다.  

 

열 일곱 살에 어린 동생 셋 (맹상훈, 김혜선, 유호정) 과 함께 세상에 내던져진 원표 (원미경) 가 큰아버지, 큰어머니 (김영옥) 댁에 들어가 사촌 언니 (이효춘) 의 갖은 행패와 텃새, 고생을 겪으며 성장하여 결국 그럭저럭 먹고살만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식모살이로 들어간 집에서 모시게 된 사장님 (전양자) 의 도움과 격려로 야간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장님의 남동생이던 오빠 (남성훈) 를 흠모하며 어른이 되었다. 공부를 하여 성공하길 바라던 남동생, 정표 (맹상훈) 는 성질 탓으로 중학교를 마쳤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거칠게 성장했지만 누나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걸핏하면 아내 (박순천) 를 구박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가장 애틋하게 사랑한다. 둘째딸이자 셋째인 숙표 (김혜선) 는 가난과 결핍이 싫어 스스로 꿈꿔온 세상에서 고고한 학처럼 살고 싶었으나 결국 음악과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간호대학에 진학, 간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병원에 온 국회의원 5선 (남일우) 집안의 아들 우진 (이재룡) 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우진 집안의 반대와 시어머니 (한영숙) 의 핍박으로 이혼을 결심하기에 이르나 결국 둘은 화해한다. 막내 딸 은표 (유호정) 는 수학교육을 전공한 대졸자이지만 몸이 약해 - 특히 콩팥 (신장) 이 좋지 않아 -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살림을 돕거나 근근이 과외벌이나 잔심부름을 한다. 그녀 곁을 6년이나 맴돌며 구애한 풍개 (박형준) 는 결국 은표와 결혼하고 은표의 시집 어른인 풍개의 엄마 (윤여정), 아빠 (김세윤) 는 은표의 성장과정을 다 이해하며 사랑으로 그녀를 아끼고 감싼다. 

 

이 사남매의 인생역정의 주변에 큰어머니 (김영옥) 댁 식구들인 사촌오빠 부부 (이호영, 김해숙), 사촌언니와 그녀의 딸이 등장해 다양한 양념을 더한다. 사업을 망해 미국으로 도피한 사촌 언니의 남편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내인 성표 (이효춘) 와 전화통화는 하는데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원표는얼핏 성공한 듯 보인다. 변두리이지만 서울에서 기사식당을 운영하며 그 옆에는 남동생 정표가 사장으로 있는 밧데리 가게도 있다. 주로 차량 밧데리를 취급한다. 원표를 존경하며 따르는 식당 아저씨, 주방장 (이계인), 식당 아주머니들도 너댓 분 계시다. 그만하면 성공한 듯하다. 어느 정도 자리잡은 기사식당을 동생 정표와 사촌언니 성표에게 맡기고 분점을 준비 중이던 어느 날 밤, 전기누전으로 기사식당이 홀랑 타버린다. 보험은 들어놓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아니 이 시절에 보험은 사치였을 것이다.) 재마저 남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뒤 망연자실할 시간도 없다. 오똑 다시 일어난 원표는 "홍가네 냉면집"를 서울 시내 대로변에 차려내고 함께 일하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함께 묵묵히 살아 나아간다.

 

비록 월세를 내는 남의 건물이지만 기사식당을 일구어 사장이 된 원표 (원미경) 의 극 중 나이는 서른 다섯 살 (35세) 이다. 문제어른으로 여전히 성질을 못 참는 정표 (맹상훈) 는 삼십 대 초반, 도도한 서울깍쟁이 간호사 숙표 (김혜선) 는 이십 대 중후반. 기껏해야 스물 여덟이나 됐을까. 막내 은표 (유호정) 는 대학을 막 졸업한 것으로 나오니 잘해야 스물 넷이다. 지금 시대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다들 너무 어리다. 하지만 대단하게 인생을 일궜고 잘해냈고 잘 살고 있다. 김수현 선생님께서 극본을 쓰셨고 드라마를 제작하던 팔십년 대 (혹은 구십년 대 초반) 배경으로 본다면 서른 다섯 살의 나이로 대가를 일구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진 않았겠다 싶다. 하기사, 그 당시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직장을 구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졸업과 동시에 선생님으로 발령받아 스물 셋 나이에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일이 별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아득한,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듯 아득하고 막연한 일들이다. 그런 감흥을 주는 드라마였다. 잘 봤다.

 

덧. 

- 사람들은 대부분 "표" 로 끝나는 돌림자를 쓰는 홍 씨 집안 사람들이다.  

- 은표 역의 유호정과 은표 언니 숙표 (김혜선) 를 사랑하는 우진 역의 이재룡이 같은 화면에 나오지만 서로 처제-형부 노릇을 하는 걸 보니 제법 웃겼다. 

- 우진 엄마 역의 한영숙 선생님은 벌써 돌아가셨다 (2006년 별세). 꽃개가 어릴 적에 즐겨보던 만화영화의 성우, 그리고 "아, 아아, 아으아, 아아" 로만 노래를 하던 드라마 "여인천하" 에서 열연하셨던 엄상궁.

- 윤여정 선생님의 젊은 시절 모습이 아주 잘 나온다. 김수현 작가도 곽영범 피디도 윤여정 배우를 참 좋아했구나, 라는 게 느껴졌다. 

- 씹던껌, 김해숙 선생님의 매우 젊은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 무엇보다 주인공 원표 역할로 "산다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시는 원미경 선생님의 한창 시절 연기를 볼 수 있다. 꽃개는 원미경 선생님을 잘 몰랐는데 몇 년 전엔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를 잘 보았으며 특히 "산다는 것은" 이 드라마를 보고난 뒤 그녀의 작품을 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석우와 함께 나온 드라마 "아줌마" (2000) 가 유툽에 있다면 정주행할 의사가 있다.

- 서울사투리가 매우매우 많이많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쩐지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고 또 사실적이면서도 꿈결같은 그런 기분? 꽃개의 엄마께선 당신의 오빠인 꽃개의 외삼촌을 부르실 때 "어:빠" 비슷하게 발음하셨다. "오"도 아니고 "어"도 아닌 그 중간으로 약간 영어 발음의 장모음 슈와 shwa /ə:/ 발음이라고나 할까. 성표 (이효춘) 와 원표 (원미경) 가 "오빠"를 부를 때 정말이지 꽃개의 엄마께서 외삼촌을 부르시던 때와 똑같은 발음이 들려 깜짝 놀라면서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먼 곳에서 서울사투리를 정확하게 듣게 될 줄이야!

 

2024/10/04 12:12 2024/10/0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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