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은짧아
분류없음 2016/10/27 10:09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그렇듯이 마음을 가라앉게 하지만 이번 건은 뭔가 가라앉고 무겁고 참담함을 넘어 허탈하고 허망하다. 한 민간인이 대통령 머리 꼭대기에 앉아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1급 기밀사항을 열람하는 것을 넘어 국가정책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다만 왜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정부 인사들,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것을 공식화하지 못했을까. 왜 그 개입을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까. 정치는 기술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상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타협해서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빵점이다. 낯설지 않은 일이다. 밤사이 피튀기며 토론해 정해놓은 어떤 룰이 술자리 한 번 거치고 누군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로 여반장하는 일을 제법 목격했다. 혹은 그런 자리에 있었다. 아니, 쉬는 시간에 나눠피는 담배로도 그 손바닥 뒤집은 일은 흔히 일어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동네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었던 것 같다.
소싯적에 러시아혁명사 공부해 본 사람들은 다 알만한 단어 "미르". 80년대 학생-노동운동 출신들이 낳은 자식들 가운데 이 이름을 쓰는 아이들이 (에고, 지금은 다 성장했겠구나) 왕왕 있을 것이다. "미르" 는 원래 러시아어로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고 제정 러시아, 그러니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후로 존재했던 촌락공동체를 통칭한다. 토지를 함께 쓰고 식량을 함께 마련하던 이른바 생활 공동체였다. "미르" 는 "공산당선언" 이 러시아어로 출판될 때 서문에도 등장할만큼 당대의 급진적 이론가, 혁명가들에게 미래의 영감을 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었다고 전한다. 미-소 냉전과 탈냉전의 상징으로 남은 거대한 우주정거장의 이름도 "미르" 였다. 이랬던 미르가 2016년 오늘날, 한국을 뒤흔든 하나의 단어로 새롭게 떠오른 이유는 뭘까. 추측하는 사람들은 "K-스포츠재단" 의 첫 자음인 "ㄱ/ㅋ"을 "미르재단" 의 "미르"에 이어붙이면 "미륵" 이 된다고 한다. 최태민 목사께서 생전에 본인을 일컬어 "미륵" 이라고 했다는데 가히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국가다운 발상이다.
대통령 각하의 측근이 공식적인 루트로 등장하지 못하고 또는 이상야리꾸리한 재단을 세워 기업의 삥을 뜯은 것은 대통령과 그들의 측근들이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5년은 너무 짧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예 정상적인 방법 내지 합법적인 방법을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2016년 대한민국의 헌법과 현행법률 안에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전근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2016년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던 그런 뭉텅이들. 혹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집어든 게 현재의 게이트를 덮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꽃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에겐 (혹은 박대통령에게 사술을 부린 집단에겐) 5년이 너무 짧았다.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