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날

분류없음 2015/10/08 12:28

 

점심 무렵. 한국인 마을에 있는 미용실, 단골 미용실에 예약전화를 했다. 전화를 안받는다. 일단 나가기로 했다. 지하철역 부근에 있는 올가닉 샵에 들러 비누를 사고 나오는 길에 이발해주는 선생님을 만났다. 스타벅스에 커피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시부터 하는데요. 괜찮아요,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한 시에 들를께요. 한국어 책을 구비한 도서관에 들러 책장을 둘러봤다.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이 들어왔다. 지난해 봄부터 기다리던 책이다.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첫째 단편을 다 읽고 둘째로 넘어가려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친다. 이런 곳에서 말없이 내 몸을 만질 사람은 적어도 내 상식엔 없다. 뭐라고 대답할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사람 냄새를 맡았는데 일단... 음 나쁘지 않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용사 선생님이 도서관까지 오셨다. 한 시경에 예약한 손님이 있는 걸 깜빡했어요. 먼저 해드리려고요. 여기까지 오시다니. 하루키 책을 체크아웃하고 발빠른 선생님을 허둥지둥 따라갔다. 

 

 

이 도시에 온 뒤로 같은 미용실에 들르고 있다. 중간에 문을 닫았을 때 (주일엔 쉰다) 다른 미용실에 갔었는데 결과가 안 좋아 많이 오래두고 후회했다. 바리깡도 샀었는데 두어 번인가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그냥 머리카락을 길렀다가 나중에 몽창 잘랐다. 장발을 관리하는 데엔 영 재주가 없고 아버지 쪽 유전자 때문에 머리카락이 자라면 곱슬곱슬 제 멋대로다. 처음엔 사장님이 이발해주셨다가 나중엔 어떤 오빠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만나는 언니 선생님이 이발해주신다. 두어 달,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들르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잘라주신다. 편하다.

 

 

나에겐 미용실-미용사를 바꾸는 것에 관한 두려움이 있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머리손질을 하는 줄 알겠지만 그냥 단순한 커트인데도 이 두려움이 가시질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 앞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한 달에 한 번 잘랐다. 대학에 가서는 학교구내 미용실에서 시작했다가 그 미용실이 없어지자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미용실을 거의 3년 동안 다녔다. 그 미용실 언니가 말도 없이 폐업을 했을 때 마치 나라 잃은 백성처럼 좌절했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실연당했냐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또 학교 앞에 있는 미용실을 어찌어찌해서 다녔고 그럭저럭 미용사 언니들을 사귀는 솜씨가 느는가 싶다가 그놈의 두려움이 또 도져서 고생하다가 또 어쩌다가 그렇게 사는가 싶을 찰나에 고향 땅을 떠났다. 

 

 

이발을 잘 마치고 한국 음식을 조금 사고 오래전부터 눈여겨보았던 떡국을 먹기 위해 아주 작은 한국 식당에 들렀다. 나보다 먼저 와서 두리번거리던 라티노 한 분이 바싹 내 곁에 붙어앉았다. 김치볶음밥을 시켜서 먹던 그 분이 이 근처에 한국인 학교가 있냐고, 몇 학년이냐고 물어서 영어를 못하는 척하고 이어폰을 다시 꽂은 채 혼자 떡국을 마저 먹었다. 벽면을 마주보는 일렬 횡대의 식당 좌석에 앉아 떡국을 먹으며 하루키 책을 읽자니 마치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다. 국물이 다소 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소주나 사케가 있으면 딱 알맞겠구나 그런 불가능한 바람을 품어봤다. 계산하는데 사장님이 왜 이렇게 갈수록 말라가요, 하셔서 그냥 끙, 하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하루키의 책을 읽고 이발을 하고 그로서리 쇼핑도 하고 떡국도 먹고 그렇게 보낸 그렇고 그런 - 평화로운 날이었다.

 

2015/10/08 12:28 2015/10/08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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