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또보자
분류없음 2015/09/30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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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 일요일 밤 근무 중에 언니 소셜미디어에 들어갔다. 한 사람이 부고를 남겨놨다. 믿을 수 없었다. 직장에선 한글도 쓸 수 없고 셀폰도 쓸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일까, 정말일 수도 있겠다.
2010년 한국에 들렀을 때 언니를 만났다. 나는 그 때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최소한 3년은 걸릴 일을 시작할 참이었기에 인사를 겸해 고향에 들렀을 때 가족들 반응은 매우 좋지 않았다. 어찌나 절박했는지 심지어 그들은 신발을 숨기기도 했다. 진력을 다해 회유했다. 알고 있다. 모두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나의 파트너는 나의 가족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거부했으니까. 파트너에게 미안했다. 가족에게 부정당한 뒤로 - 가족과 이런 일을 겪은 뒤로 심리적 공황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그 때 만난 사람이 언니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런저런 욕도 하고 그랬을텐데 그 때는 그냥 내 얘기를 들어줬고 건강하라고 했다. 헤어지는 길에 대낮에 홍대 길거리에서 엉엉 울었다. 갑자기 준비없이 인생의 어느 국면이 진지하게 변해버렸다. 울다가 웃다가 손을 흔들고 길을 건너서 돌아보니 거기에서 언니가 계속 울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일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출국 전 열이 40도까지 올랐다. 의사는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했는데 죽더라도 고향 땅에선 안 죽는다, 는 각오로 비행기에 올랐다. 열 몇 시간을 계속 물만 먹고 내리 잠만 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나라에 닿자마자 열이 내리고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그 뒤로 5년이 흘렀다. 사이사이 언니가 보내준 북어채로 국물을 만들어 수제비도 끓여먹고 언니가 보내준 책을 읽다가 펑펑 울기도 하다가 혈육들 생각이 나서 더 울다가 그랬다. 언니는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 심지어 나는 잘 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언니는 비혼으로 남아 있다. 기억이 다 조각조각나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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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사진을 참 잘 찍었다. 초창기에는 사람의 표정을 담는 언니의 사진을 좋아했다. 사진 잘 찍는 요령이 뭐요 했더니 그냥 막 닥치는대로 많이 찍어, 라고 했던 언니 때문에 뭐야 이 사람 했던 적도 있지만 초창기의 언니 사진이 담아냈던 상황 속의 사람들 표정을 보고 대리위안이랄까 뭐 그런 느낌을 종종 받았다. 아직도 기억하는 가장 좋은 사진은 간만에 집에 놀러간 언니가 언니 엄마를 찍은 연작. 무표정 엄마, 웃는 엄마, 뭐라고 말씀하시는 엄마 (아마도 그만 찍어, 였을 것 같다)... 그 사진은 나에게 찍사와 피찍사의 관계 (relationships), 그리고 그의 결과로서 사진이라는 게 뭔지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해줬다. 너 왜 나 이렇게 못 생기게 찍었어, 사진은 거짓말을 안 해. 사진을 두고 벌이는 이런 사소한 신경전도 관계의 연장이다. 며칠 전 길거리에서 파트너의 사진을 찍었는데 파트너가 너무너무 예쁘게 나왔다. (사실 언제나 예쁘게 나온다) 아, 너무 이뻐요 했더니 파트너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언니도 나처럼 예민한 구석이 잔뜩한 사람이라 아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냥 그런 사람, 잘 모르는 사람, 그리고 각각의 상황들 --- 피사체들에 어떤 감성을 투사하는지 그게 다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쳇말로 '젠 체'를 못하는 거다. 상업적 찍사로는 영 아니네, 했더니 그것도 상황에 다르지 피식, 응사했던 언니. 그러면서도 언니는 언니가 가끔 찍었던 상업적 사진, 혹은 감정을 담을 수 없었거나 담기지 않은 사진을 보여줄 땐 다소간에 어색해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도 그 나름대로 참 좋았다.
시간이 지나 노랗게 은행잎이 물든 가로수 - 정수라의 노랫가사대로 "가로수 잎들이 계절을 말해주는 거리" - 하늘, 나무 따위의 피사체 그대로 볼라치면 관계를 가늠하는 데 한참 걸리는 사진들이 늘었다. 언니와 물리적으로 소통하는 일이 줄었으니 뭐라 말하기엔 조심스러웠지만 아, 언니가 뭔가 끈 같은 걸 놓았나보다, 서로 서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보자, 언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혼자 궁상스럽지만 그런 추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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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글도 담백하게 잘 썼다. 비문을 잡아내는 안목도 탁월했는데 나는 컨텐츠에 집중했던 반면 언니는 문장 자체에 많이 집중하는 편이었다. 글 전체를 다듬어야 한다면 글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를 글 그 자체의 재료로 대하는 자세가 아무래도 나완 틀렸던 거다. 서로 훈련받은, 자라온 배경이 다른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눈과 마음이 편안한 글쓰기를 언니는 선호했던 것 같다. 평범한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가장 어렵다. 이런 면에서 언니는 운동권끼리 쓰는 자족적인 현학적인 글쓰기 같은 것은 멀리하는 편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언니가 그런 글들을 싫어하거나 좋아했다기보다 그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있고 등등의 그런 경계를 스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무엇보다 언니는 언니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썼다. 감성과 느낌이 묵직하지도 않으면서 글고랑 사이에 뚝뚝 있는 그런 글 말이다. 자신을 글에 억지로 드러내거나 허세와 허영이 묻어나는 일이 없는 담백함, 그게 언니가 쓰는 글의 장점이었다. 맑은 생태지리탕 같은 맛이라고 할까. 마지막으로 받았던 손편지에는 생략이 많았다. 언니가 뭔가를 상당히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아무래도 물리적 거리 탓인지 그리웠다. 꽃개의 마음 속 그리움. 꽃개가 마지막으로 전한 카드에도 그런 생략과 절제가 많았는데 카드를 부치고 우체국에서 돌아나오며 후회를 했다. 맥락없이 주절거렸네. 아, 씨, 괜히 그랬나. 그런데 이제 올해에는 그런 크리스마스 카드마저도 부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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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길. 일터에서 나오자마자 부고를 전한 어떤 이에게 메세징을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컨택하는 일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얼마 뒤 제3자를 통해 연락처를 받았는데 뜨아 했다. 어 이건 어떻게 된 거지. 나의 깨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그 편린들을 짜맞추어야 했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구나. 그 사이에 정신을 수습하고 같은 대륙에 사는 한 친구, 그 친구를 통해 한국에 있는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오버나이트 근무를 하면 날짜개념이 엉키는데다가 한국 로컬 시간으로 계산해야 하니 언니의 발인이 언제인지 그걸 따지고 있는 내가 참 한심했다. 하루 종일 멍 때리며 웃다가 울다가 오락가락 하다가 밤이 되어 간신히 진정을 하고 파트너와 이렇게저렇게 디브리핑을 하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든다. 파트너와 함께 찍은 사진에 언니가 둘이 닮았다, 고 했던 일이 떠올라 더 눈물이 났다. 6월에 한국에 들를 수 있을 것 같아 연락을 했는데 그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미처 전하지 못했다. 단디하고 건강하라는 말, 그게 언니가 남긴 마지막 메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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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가 이슬이를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뜬금없는 꽃개의 말에 파트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다.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하늘나라에 있고 이슬이도 무지개다리를 건너갔으니까 둘 다 하늘나라에서 만났을 거 아니에요. 외할머니는 강아지를 집 안에서 키우는 건 싫어하셨지만 그래도 거기에선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그냥 마당에 두셔도 상관없고, 그래도 밤엔 실내로 들이셨으면 좋겠다, 이슬이는 당연히 외할머니를 좋아할 거예요.
이슬이는 아마도 언니를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외할머니도 언니를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언니가 이슬이와 외할머니에게 내 안부를 간단하게나마 전해줬으면 싶고 그 곳에서 고통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진도 많이 찍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나눈 마지막 대화처럼 다시 만날 때까지 단디하고 있어야겠다.
언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