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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반고호 Vincent w. Van Gogh(1853~1891)
"외롭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지 않은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조용필 오빠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중의 일부이다.
외로운 영혼의 대표 아이콘 빈센트 반 고호.
고호만큼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도 드물다. 비슷한 부류인 쉴레도 있지만..
고호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 자신이었던 것.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1889
: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호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 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또 한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나 바그너나 베를리오즈의 마음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호 자신은 말하고 있다. 그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피해 망상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http://www.youth.co.kr/rs/rs030021.htm에서 퍼온 글)
귀를 자른 후 그린 자화상.
귀가 잘린 사연은 고호의 인간적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누군가 라디오에서 이 그림에 대한 전후사정을 들은 이가 한말이다.
" 고호, 한 성격했네요..흐흠.."
고호의 친구 고갱.
후기인상파의 기수 고갱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타이티에서 선녀 같은 원주민여성들과
생활하며 그림에 전념하였던 근현대 예술가중 피카소를 제외하고는 드물게 팔자좋았던? 화가인 것 같다. 그가 타이티섬에 기거하기전 고호와의 짧은 동거생활은 고호의 작품세계와 정신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였다.
어느 날, 고호의 자화상을 본 고갱의 한마디.
“양쪽의 귀모양이 다르군”
이 한마디의 직설적 평가는 불안정했던 고호의 멀쩡한 귀를 단박에 잘라버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고호의 정신병적 발작은 고갱과의 관계로 인해 좀더 심해졌다하니..뭐..
戱畵的(희화적) 自畵像(자화상)
: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 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의
지도자상으로 부각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原始林)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http://www.youth.co.kr/rs/rs030021.htm에서 퍼온 글)
왠지 고갱이 밉다.
이성적 설명이 약간 불가한 감성적 접근이다. 그러니 이유는 묻지 마시라~
그림속에는 작가의 세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고호의 그림은 애처로움이 베어들어 인간적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의 외골수적이며 비사회적 성격은 그만의 세계안에서 존재함이고,
불안한 심연은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강한 에너지의 원천이었으리라.
그러나 고갱의 그림은 긍정적 세계의 화려함과 단순함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타이티의 원시적 색감과 평면적인 인물표현은 자신감에 넘쳐 보이고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평안한 생활방식이 느껴진다.
고갱이 아름다운 타이티여성들과 원시적이며 황홀한 노년을 보낼 당시
고호는 외로운 정신병원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죽음을 맞이 하였을 것이다.
난 고갱보다 고호의 그림이 더 좋다.
♡ 이 글은 쭌모님의 [거부할 수 없는 나이주의?]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나이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사회는 나이에 대한 규정된 관념이 지배한다. 유교에 근간을 둔 나이든 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긍정적 형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적인 만남내에서 관계규정을 수직화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만남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만남의 기본처럼 형식화되어 있다.
몇 학번인지요?
고향이 어디냐?
전공이?
어디 사시죠?
이름이..?
결혼하셨죠?
하시는 일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준거들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이해하는 준거틀이 가끔은 상대방을 오해하는 관념틀로 규정되어 버리기도 한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이 소통방식은 서로에 대한 이해준거틀로 인식되지만 가끔은 뒷맛이 찝찔해지기도 한다. 이유는 이러하다. 관념화된 개념은 무의식중에 상대방을 규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해의 최소단위가 때로는 관념으로 변질되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은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몇학번이냐는 대학생이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접근하는 질문인데 이 질문은 대학내의 문화에서 익숙한 질문이지만 다양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질문으로는 실수가 될 수도 있는 접근방식이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가 내재해 있다.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문화의 차이에서 근거하기도 하는 문제이다. 또한 나이의 많고 적음을 통해 관계를 규정하는데 이는 나이 많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한국사회내에서는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서열화로 관계를 규정함을 암시하는 기준이 되는 위험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관념적이라거나 정체된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몸서리쳐지게 싫어하는 경향이 내게는 있다. 그건 직업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틀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끊임없이 틀거리를 넓히고 깨어 버리는 사고의 열림이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자로서의 자세인 것 때문이다.
이런 내게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나이”에 대한 사고이다.
나이에 맞는 사고나 행동, 나이에 맞는 사회적 위치, 나이에 맞는 선택 사항들..
“나이에 맞는 것”이라는 합의된(관념화 된) 틀과 “그게 뭔데”라는 것의 의심, 즉
나이먹음은 가끔 심리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반면 두려움 또한 포함한다.
내게 두려움의 연유는 간단하다. 40살이 되면 나이에 맞는 얼굴을 갖고 싶은 욕망, 나 스스로 만들어 둔 미래의 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한 줄타기.
나이에 맞는 사회화된 관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뀌어야 한다.
일정나이가 되면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사회적성공을 이루어야 하고, 일정정도의 안정된 자산을 지니는 등등의 일반적 사회관념이 존재한다.
내가 가진 욕망과 사회화된 관념은 끊임없이 줄타기를 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는 나의 욕망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사회안에서 이루어진 보여지는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행복해야 한다"에 촛첨을 맞추어 사고하려 한다.
삶의 질을 이루는 구체적 요소들은 무엇일까.
남들이 얘기하는 삶의 질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행복의 조건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잡을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욕망들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지금도 그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불안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핵심은 “나이주의”이다.
내가 그리는 모습의 역할모델을 해준 이가 주변인중에, 사회가 내게 보여준 적이 없다.
그건 서글픈일이다.
내가 만들어가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야 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과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다.
누군가 만들어둔 길은 적어도 안전함을 보장한다. 위험수위가 낮아짐을 얘기한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지루하다. 내게 맞는지 영원한 Question이다.
내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나만의 길을 통해 깨지고 터지는 위험과의 투쟁이 기다릴 지언정 누군가 나의 뒤에서 안전함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지 있을까? 혹시라도 혼자만의 길이 될지언정 스스로 만들어둔 길에 대한 소중함과 성취감을 느낀다면 아마도 행복할 것 같다.
나이주의에 대한 극복. 그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다양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나이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학번이 몇 이세요?”라는 질문 대신에 “좋아하는 게 뭐예요?”라는 질문부터 한번 던져봄이 어떨까? 나부터 말이다. 나 스스로 반성중이다.
내 안에도 관념을 거부하는 인자와 익숙해진 습관화된 형식이 오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팔을 벌려 높이 꼿꼿하게 기지개를 켠다.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함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하루다.
♡ 이 글은 달군님의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
기표와 기의의 기호학적 접근부터 해보자.
기표는 기의를 드러내지만 기표의 다양한 표현방식(코드)에 의해 기의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이미지하나, 텍스트 한 문장(기표)에는 여러가지 상징과 이데올로기(기의)를 함의할 수 있다. 단순한 이미지하나, 텍스트 문장하나일 수도 있지만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고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한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을 공고히 할 수도,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무기가 될 수도, 지배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킬 수 있는 표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장의 포스터로 얘기들이 무성하다.
포스터 하나가지고 왜 난리들을 치냐라고 언뜻 예민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꺼라 생각도 된다. 하지만 포스터안의 담긴 이데올로기를 생각해보면 단지 카피하나, 이미지하나, 포스터한장의 문제가 아님을 인지할 수 있다.
일단 포스터를 언뜻보았을 떄 오..감각 많이 좋아졌네..직설적 표현과 강성한 투쟁방법이 노조의 일반화된 접근법이었다면 이번 포스터는 접근방식에 여러가지 고민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노조, 사회단체의 그러저러한 포스터들을 비교해 보았을 때 돈좀 들인, 기획이 보이는 포스터임을 순간 감지가능했다. 감각이 돈들인만큼 보일까에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 여튼..
포스터를 조금 들여다 보면 이렇다.
회색빛 서울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등진 남녀. 회색빛은 여러가지를 상징한다. 어두운 비정규직의 불안한 미래, 보이지 않는 뿌연 그들만의 사회 등 현재를 드러내는 다양한 해석이 되어질 수 있다. 이를 배경으로 앉은 남녀와 그 중심에 텍스트를 박아 넣은 절묘한 디자인(배치, 레이아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내 이 이미지는 논란의 여지를 충분히 내재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남녀의 관계설정이라 할 수 있는 행위,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텍스트. 남성중심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에 입각한 편향적 관점이라는 것과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지 않은 표현방식이라는 것에 슬슬 화가 치밀게 됨을 느낀다.
예를 들면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남성의 일방적 팔걸이자세라든지,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카피글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은 비혼자, 장애인, 동성애자, 여성에 대한 관점은 온갖데 없고 가부장남성의 시각임으로 분석가능해진다. 사실, 의도한바가 보이지 않는게 아니고 디자인감각이 뒤떨어지지도 않은데 왜 따지고 드냐라고 하면 생뚱맞은 평이 되어질 수도 있겠으나 이미지와 텍스트가 가진 기표가 의도한 바를 드러내는 기의가 편향적이다라면 기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드러나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최근 본 인권영화제 포스터는 대표적으로 잘만들어진 창작물이라 생각된다.
지구모양의 둥근형태안에 다양한 인간들이 여러가지 형태와 칼라로 자리잡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인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나 영화가 보이지는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아래 텍스트로 인권영화제임을 보조해준다. 아동이 슥슥 그린 듯한 친근한 이미지가 인권영화제를 인간적으로 와닿게 해서 그래서 더 따뜻한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권영화제 포스터로는 잘만들어진 창작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주저함이 없다.
잼나는건 전체의 형태이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연결해서 보면 "열쇠구멍"의 형태를 띄는데 인권영화를 보려면 이 공간으로 들어와보라고 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인권을 여는 열쇠, 해법을 제시하겠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신기하다. 포스터는 인권영화제를 드러내는 얼굴중의 하나이므로 이 포스터를 통해 이번 인권영화제의 정체성을 살짝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민주노동당 비정규직법안저지 포스터는 기획의 미숙함이 보여진다.
비정규직과 관련한 여러가지 계층별 상황시리즈로 기획되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
포스터의 영향력을 다양한 계층의 민중에게 다가가려면 면밀하고 치밀해야한다. 비정규직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임을 감안할 때 좀더 신중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다양함을 내포하지 못하는 다수의 주장은 소수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것이 포스터 한 장에도 담길 수 있다는 것.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
기획의 미숙함 탓이리라 믿고 싶다.
역으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거다.
그러므로 포스터에 딴지를? 걸만한 똑같은 상황이 재발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에 재뿌리는 상황을 다시 경험하지 않길 바란다. 제발...
모택동의 혁명이 한편의 서사시였다고 평가하는 꿈꾸는 젊은 청춘들..
씨네21에서 퍼온 이미지들.
원제 Sex, Politics, Cinema
노장감독의 청춘영화라.
나이먹음은 곧 현실과의 타협이 꿈꾸기 보다 조금 더 쉽고, 가슴으로 들끓기 보다는 지혜로 무장한 이성으로 세상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베룰로루치감독은 아직도 꿈꾸기와 현실인식에서 저울질하고, 대마초에 혼미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자유로운 청춘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1968년의 프랑스 남매와 미국청년.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폭력에 대해 비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부모님의 안전한 가옥과 돈으로 금기의 영역을 모호하게 줄다리기 하는 이란성 쌍둥이 매튜와 이사벨.
대학생이라는 특수신분덕분에 베트남전을 운좋게 피할 수 있었던 미국인 테오.
세명의 현실도피적 특수동거상황은 몇일간 이어진다. 영화와 현실에 대한 경계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해보인다. 그들에게 현실은 게임이고 영화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토피아는 부모님의 용돈과 함께 바닥난다. 해결방안은 부모에게 전화한통이면 이상무. 풋! 그걸 보면서 중얼거린다. “쳇! 꿈은 돈으로 유지되는 거였군”
순간, 그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비판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들추려면 부모의 혜택으로부터 자신을 먼저 해방시키라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재니스 조플린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훌륭한 영화음악으로 쓰인다. 젊음의 자유정신과 비판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신나는 음악이었다. 재니스라니! 베루톨루치 아저씨 멋쩌요~
잼난 장면.
프랑스에서 첨으로 사귄 친구의 식사초대. 어색한 프랑스 가족과 마주한 식탁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다. 약간의 지루함을 잊기위해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딴짓하다. 친구아버지에게 딱걸린 미국청년. 유명한 시인인 아버지는 화내기보다는 왜 그랬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유도한다. 여기서부터 지포라이터 철학이 탄생한다. 사소한 행동은 사고의 연상으로 인해 지포라이터 철학으로 전이되어 설명되고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모두 할말을 읽고 감탄을 내뿜는다. 잼나는건 그들의 반응인데..부모앞에서 10대의 자식들이 식탁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것도 신기할 일인데 ‘지포라이터’ 하나로 ‘사물의 동일성’을 끄집어내는 미국청년의 잼난 생각을 듣고도 미친놈 취급하지 않고 그의 특별하고 남다른 시선에 대해 감탄할 수 있는 프랑스가족의 문화적 감수성에 감동. 저건 난데...만약 내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저런 얘길하면..엉뚱하다고 머리를 절래절래했을터인데..쩝..
거울 속에 비친 청춘의 자화상들. 셋은 하나처럼...그러나 각자 다른 사랑을..
쇼킹한 장면,
영화관에서 남녀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걸 보게되다니 내눈을 몹시 의심했었음.
어! 안개가 떠야할 상황인데 너무 또렷하니까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 그 동안 안개상황에 넘 익숙해했던 내가 오히려 민망한..
'폭력으로 해결되는 건 없다'라는 테오는 시위에서 행동을 멈추고..
마지막 장면.
나체로 뒹굴며 자유롭던 그들. 부모세대에게 대한 예의인지, 사회적금기에 대한 윤리적 회개인지 모를 모호한 자살을 택했다 엉뚱하게 뛰어든 시위대의 돌에 잠을 깬 셋은 갑자기 프랑스학생시위대에 합류하는걸로 끝맺음하는데 베루톨루치는 세상을 바꾸려면 꿈꾸지만 말고 현실로 돌아와 화염병을 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익숙하게 봐오던 시위장면을 영화속 추억의 장면처럼 구경하다니...잼난 현실이었다.
두 가지 주제.
첫째, 프랑스
60,70년대 프랑스는 현실의 프랑스 도심의 뒷골목일 터인데 어둠으로 정체된 오래되고 낡은 무덤같은 느낌. 그랬다. 왜 그랬는진 좀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둘째, 쌍둥이
한몸에서 분리된 두개의 육체와 하나의 영혼이라는 설정. 영화속 쌍둥이는 절대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것같다. 그들에겐 서로가 있을테니까...
다른 성격이나 다르지 않은 묘한 일체감을 주는 육체와 영혼.
가끔 궁금하다.
>>사족
매튜를 연기하는 마이클 피트가 지미 핸드릭스의 "Hey Joe"를 직접 노래를 부른 뮤직비디오를 한번 감상해 보시라. 현재 이 친구는 구스 반 산트감독의 영화<라스트 데이즈 Last Days>
구스 반 산트의 <파인딩 포레스트>에서는 금발의 연약한 범생역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저그런 헐리웃의 꽃미남 배우로 보였었는데..뮤직비디오에서의 광기를 내뿜는 재능에서는 약간 오버해서 리버 피닉스를 연상케할 정도로 기대해 볼만한 배우가 아닐까 생각.
♡ 이 글은 해미님의 <여자, 정혜> 극복 또는 치유되는 상처? 에 관련된 글입니다.
<여자, 정혜> 포스터_씨네21에서 이미지퍼옴
이번주에 보지 못하면 못볼 것같다는 불안감때문에(극장에서 간판을 내리는..)냅따 예맬했다. 결과는 흐믓함과 미소먹음으로 끝맺었다. 행복했다. 잘 만든 영화를 보는 감상자의 행복감을 영화감독이 줄 수 있다는 건 직업의 장점같다.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막바지 한 관객이 이런 환호를 던졌다고 하는군.
“You did a great job!”)
꾸물거리다 늦어져 헐레벅떡 뛰어든 영화관안 스크린에는 벌써 그림들이 흐르고 있다.
여자의 외로운 일상
홈쇼핑으로 시간을 떼우고 밤마다 혼자서 현관문을 잠그고 이방저방 불을 끄는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주말마다 간단하게 맥주한잔 하는 닭집에서의 동료들과의 자리도 별 대화가 없다.
어찌나 외로워 보이는지..누구나의 일상이지만 누구나 매일매일 그렇게 따분한 일상만 존재하진 않는다. 왜냐. 외로움을 이기기위해 갖은 노력들을 하니까 말이다. 친구를 만나 맛난 음식과 알콜로 수다떨고, 이성(동성)친구를 만나 유명하다는 영화한편 떄리고, 하물며 사이버상의 친구들을 만드는 블질도 있지 않은가? ^^
그런데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고 그 담을 허물려하지 않고 더 굳건하게 닫아버린다. 왜일까?
그녀의 유일한 통로는 엄마였다. 신혼여행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짐싸고 집으로 돌아온 딸을 엄마는 다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그치는 고모에게 “자기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라고 따뜻하게 대변한다. 그런 유일한 정신의 해방구인 엄마의 부재는 그녀를 더 외롭게 하는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도 말못한 과거가 있다니..그녀는 왜 그랬을까?
상처는 치유가능할까?
아무일없었다는 듯이 결혼식을 올리긴 했으나 신혼여행 첫날 밤 남편에 의해 그녀가 원하지 않은 섹스를 강요당한다. 결혼식까지 올린 신혼여행지에서의 합법적인 남편과의 섹스는 또다른 강간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한마디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물리적 강압으로 밀어붙이는 남자의 행위는 그래도 합법적인 거겠지? 남자는 질문한다. 첫경험은 어땠냐고? 자연스러운 질문같아 보이고 그녀 또한 아무내색없이 답한다. "그냥 아팠어" 오히려 내숭떠는 순진녀의 대답같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의 상처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있는 대사이다) 그래서 새벽같이 호텔을 뒤로 한체 혼자떠나는 그녀의 행위는 언뜻 논리적이지도 이해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왠지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해보인다. 왜일까?
해미님이 벌써 밝혔듯이 마지막 남자작가에 의해 “정혜”라고 불리우는 그녀는,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의 막이 약간은 무표정한 얼굴뒤로 길고 밝게 펼쳐지면서 긍정적인 상징으로 끝맺음을 한다.
해피해 보이는 결말이 불온해 보이는건 감독의 막연한 이상주의적 사고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눌하지만 순진하고 착실해보이는 남자작가가 그녀에게 평범함의 행복을, 아픈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게 남성감독의 결론이니말이다. 쳇!
안정된 직장에 혼자사는 그녀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보여지기 보다는 외롭고 슬픈 여성으로 보여지고 여성으로서의 “평범한 삶”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한가족을 이루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역설로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남자를 저녁에 초대한 다음 장을 보고 상을 차리는 그녀는 더없이 활기차다. 남자를 위해 뭔가를 해야만 여자로서의 행복감을 느끼며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수도 있다는 그런 논리. 게다가 점심시간에까지 집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행위는 모성본능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대상인 고양이 때문이다. 여성이 애완동물을 키우는데는 주체하지 못하는 모성본능때문이라는 것. 그런가 과연? 흐흠...
용서와 처벌.
해미님의 진단처럼 가해자를 벌했어야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이었다는데 동의.
인간적 용서와 가해자 남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은 다르다는 측면에서 어찌보면 남성감독의 이상적 결론이었다는 생각이다. 남성에 의해 받은 상처는 남성에 의해 치유가능하다?
제목에 왜 "여자"라는 단어가 삽입되어 있는 걸까?
"속삭여본다. 이젠 행복해질꺼라고.."
또 다시 던져보는 질문.
강간당한 여자의 상처로 얼룩진 삶은 과연 이성의 사랑으로 치유 가능할까?
탁월한 심리묘사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은 가끔 혼란스럽다. 구분조차 어려울 때도 존재한다.
현실과 과거에 대한 영상이 동일하여 갑자기 끼어드는 과거의 회상이 현재 일어나는 일인지 그녀의 회상인지 모호하다. 시간을 드러내는 모호한 방식은 그녀의 섬세한 심리, 그녀의 현재의 심경들로 그녀를 이해하는 근거들이 된다. 혼자 드러누운 소파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모녀의 일상적 대화, 우체국상사 때문에 들른 병원이 갑자기 들리는 저쪽 고모의 울음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장소로 변하는...동일한 공간과 다른 시간이 그녀를 이해하는 절묘한 단서로 쓰여지고 현실에 갑자기 끼어든 강간장면은 그래서 느닷없고, 그래서 그녀가 지닌 심리묘사로서 적절한 방식인 것이다.
유난히 그녀의 뒷모습, 화면한쪽을 꽉채우고 뒷부분은 여백의 공간으로 처리해버리는 화면처리 방식은 여운과 아쉬움을 표현하는데 적절했다. 감독의 미적감각이 엿보이는 상징적 화면들이었고 초기 핸드핼드촬영기법은 다큐멘터리같은 현실성을 드러내주는 촬영기법으로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여진다.
김지수라는 배우
김지수라는 배우는 청순가련한 분위기여서 그냥 싫었다. 옆구리를 살짝만 찔러도 슬픈 눈망울을 하며 울어버릴 것 같은 바람만 살짝 불어도 가녀린 몸은 바로 넘어가버릴 것 같은. 그래서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여 여성은 무조건 강한 남성의 그늘아래 머물러야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싫다.(해미님의 말투를 약간 차용해봄~)
김지수의 갸날픈 표정과 몸매, 깍듯한 목소리와 행동에서 우러나는 여성스러움이 일상적인 캐릭터인 우체국직원 정혜로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면서 순간 김지수가 아닌 이은주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잡스런 생각이 초중반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녀가 주는 외유내강의 여성캐릭터는 성공적이었다는 생각.
남성감독의 의도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지닌체 무감각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야리야리한 몸매는 건조한 일상을 드러내는데 김지수의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내려진 결론이다.
아쉬움이라면 가장 극적인 장면이어야 할 화장실 울음은 뭔가 2% 부족하다는 거. 악다구니 같은 처절함이 보이지 않는데..원래 속으로 쌓고 쌓는 내면연기가 더 어려운데 그건 아니고..억누르고 쌓인 감정의 저 밑바닥 크트머리를 울음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하는 장면인데..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슬픔은 아쉬움이 보였다. 억눌리고 덧난 자신의 상처를 날카로운 금속의 칼에 스스로 베임으로 인해 폭발하는 아픔을 드러내는데 굵게 떨어지는 눈물로만 표현되어진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주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오랜만에 좋은 한국영화 한 편을 본 난 오늘 마무리가 깔끔하다^^
조카와의 대화
전화기 저편 엄마는 대뜸 유성이(언니부부의 작품)떄문에 골치아프시다고 늘어놓으신다.
이제겨우 돌지난지 2개월된 녀석이 어찌나 터프한지 여기저기 올라가고
넘어지고 던지고? 아우성이란다.
조카둘을 거뜬히 키우신 "애키우기 배테랑"인 엄마입장에서는 이 녀석이 여간내기가
아닌 것같아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본바로는 그녀석이 대성할 놈으로 보였다.
일단 눈빛이 애기스럽지? 않고 강한 카리스마를 용가리처럼 내 뿜는다.
머리도 좋아서 어리버리한 이모인 나를 지꼴리는대로 요리조리 요리해 버렸다.ㅋㅋ
이제겨우 걸음마 뗀 애기가 머리가 좋다니? 아니다.
공부도 안하고 대학간 울언니,고등학생시절 학내에서 거의 올톱 IQ를 자랑하는?
두뇌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았음이 틀림엄따.^^;;
유성! 화이링! 이모는 널 믿는다!(몰?)
엄마에 이어 유빈(7살)과의 대화중.
"유빈아~ 이모 안보고시포? 기차타고 서울와라!"
"(무심한 말투로)혼자는 못가!"
"(애절하게)그럼 날라오면 안돼?"
"(이모가 한심하다는 듯이)하하..누가 날개가 있다구! (이어 이모바보아냐? 이럴기세다)"
"(재빠르게)난 있는데 넌 없니?"
"(잠시 생각하더니)어깨에 두르는 망토라면 모르겠네..."
"(올타쿠나 딱 걸렸어)망토는 사면되지?"
"우리집 근처에는 파는데가 없을걸?"
"....ㅜ_ㅜ"
넘 웃기다! 난 이 녀석들땜에? 사는거이 같다~
언니는 날 넘 한심스럽게 생각한다^^;;
나이살이나 먹은 동생이 조카들하고 키득대는 거슬...ㅋㅋㅋ...
무조건 다이어트 돌입
지음이라는 멋진 친구가 낼 두번째? 결혼한다.
한 여성과 두번의 결혼식이다^^(사연에 대한 문의는 진보네 정책국으로..ㅠ_ㅠ)
2년전 결혼식을 위해 마련해두었던 봄정장을 오랜만에 꺼내 입어보았다.
(일욜까지 나와야하는 작업은 뒤로한체 별 수선을 다 떤다...쩝..)
그런데...
그런데...
안/
맞/
는/
다/
치마옆선으로 삐죽 팅겨나오는 살들...앞 단추쪽은 가지런히 닫혀있어야하는데
입을 벌리듯..자꾸 벌어지는구나..
내 살아 생전에 이런일 자주 겪지 못한고로...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난감무쌍.
아래위 맞춰진 정장대신 아래위 맞추진 못하더래도 정장을 대신할 최근에 구입해
잘 입고 있는 얌전한옷으로 대체해서 입기로 결정.
에고고...
밤에 약간씩 먹어준 사과, 빵, 김밥, 딸기, 오렌지, 새우깡...이것들이 주범이다.
심야금식 다이어트와 더불어 갈님처럼 운동중독에 빠져보고싶다. 빠져야만 한다..
요~이~땅!
>>사족
포스트의 제목을 <오늘하루>에서 <오늘의 사건사고>로 고쳤다가 깜짝 놀라
다시 수정했다. 이윤 블로그를 돌다 똑같은 제목의 글이 오늘자로 올라와 있었기 때문.
이럴수가...
제목이 넘 평이했던건가..그래도 동일한 날 동일제목을 다는건...흐흐...
무궁화(super flower) / 2000 / 4x4x5m / ventilator, greared motor, water proof cloth
형식적 새로움은 현대에 더 이상 없다?
이러한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패러디, 패쉬디시라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현대미술은 “참여”로 인한 불확정성에 근간을 둔 미디어아트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디어아트의 매체는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무한반복이다.
디지털은 특정한 대상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이다. 현대에는 예술가의 대한 개념정의가 없고, 한계가 없다. 누구나 디카나 폰카 그리고 다양한 툴을 통해 대상을 변형하고 조작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보여주고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연스럽게 즐긴다.
다양한 이들의 소통과 참여를 끌어내는데 현대미술의 진정한 재미가 있는것이고 재미와 접근성의 편의는 곧 창조의 토대이다.
미술평론가 진중권은 “기술적 상상력”이라 정의한다.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없어지고 상상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면서 꿈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Seed / 1996 / Installation view(서울) / FRP
미디어아트가 판을 치는 미술계에 통속과 키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
최정화
present of centry(site view) / 2000 / 3.3x3.3x13.2m / FRP, Iron truss
미술이 미술관에 있지 않고 난지도에, 종로바닥에, 잔디밭에 있다?
버려지고 내쳐진 사물도 그의 눈에 띄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번두번 뒤집어 버리는 것. 그것이 남과 다른 그의 재능이다.
“내 작품은 베끼기다. 현대의 미술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새롭게 발견하는 자”
거침없이 얘기하는 작가.
새로움의 재발견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작가.
그의 시각은 단연 새롭다.
맛
글:최정화
풍요로움, 풍부함, 입으로만 맛보는게 아니지 五感도 모잘라
맛을 瞬間冷凍 시킨다면
맛 좀 봅시다.
풍경, 자연, 명소 ,계절, ...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아름다움
환상특급
달콤한 향기
농도, 밀도로 이야기된다.
生活에 뿌리를 둔 예술
맛 좀 볼래? 멋있게 말하면 ‘맛을 체험시키기’
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
니 맛, 내 맛? 진짜 맛은 내맘대로 섞어서 만드는 거야.
눈으로 보는 맛
맛도 media이다. MASS MEDIA? communication?
맛있는 생활
맛있게 먹기보다, 맛있게 느끼기가 더 중요하다.
맛의 색은?
그 가벼운 투명함속에는 화려한 우주가 있지!
입맛대로 놀라구 그래
예술은 남의꺼, 맛은 내꺼
세계는 하나, 맛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Super Flower / 1995 / 3.5x1.5x5mx
water proof cloth, oil pressure quipment
compressor, sensor
무겁기보다 가볍게, 고상하기보다는 촌스럽게, 예의를 지키기보다는 장난을 치듯 접근하는 그의 작품들은 촌스럽다고 멀리한 알록달록한 색깔의 탱화나 오래된 딱딱한 가짜과자들을 쌓아두며 천연덕 스럽게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난지도의 쓰레기더미를 보여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열광하며, 비닐로 만든 거대한 꽃을 바람에 흩날리게 만들고, 고속도로 아무때나 등장하는 가짜 마네킹경찰을 미술관 중심에 배치하고, 금탑을 만들어 진짜 국보인양 관객들을 속이며 자본주의를 다시 들여다 보게한다.
자신감과 새로움은 그의 무기이자 근원으로 보인다.
남들은 지나칠 종로의 가게안에서 이것저것 발견하며 잼나하는 작가가 내겐 너무나
행복한 작가로 보였다.
키치라는 미술장르를 한국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오며 전통적이지만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주변미술을 중심으로 자리이동시킨 것은 그의 새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시각의 독특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전시에서 한국적 양식의 독특함을 뽐내는 그의 새로운 시각을 즐겨 보시라.
>>사족
대학시절 그의 세미나를 들으며 막힘없이 자신있게 내뱉는 말 또한 유창하게 잘하는 “잘난 작가”임을 난 엄청 부러워했다.
작가가 자신의 세계에 대해 술술술 풀어 놓을때 얼마나 멋진지..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을 보았다면 그의 미술(Art Director)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것이다.
<어머니 Mother>
공간에 따라 의미와 느낌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약간의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주제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인데..
보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궁금한 작품이기도 해서 소개해 본다.
Mother / 1998 / Installation view / FRP
백지숙 (미술비평)
관습을 희화하는 게임 정리하건대 최정화는 80년대 말까지 이어졌던 사회 비판적 미술의 흐름과는 아무런 '조직적'인 연관이 없었고, 다만 미술 제도의 진행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전향적인 단서를 남겼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뒤샹의 제도론, 그리고 워홀의 팩토리 등에 순한국산 재료들을 버무려서 최정화식 '부대찌게'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지금도 '가슴'과 '살'이라는 이종의 사업체를 통해서 계속 공급되고 있는 바이다(나중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여기서 한국산 재료란 한국의 미술사적인 선배들이라기보다는 남대문시장· 파고다극장· 영등포카바레· 김포가구공장· 미아리· 청계천· 난지도 등 산포되어 있는 지리적 역사에 관한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른바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또는 비즈니스와 예술을 가로지른다는 그의 활동 방식은 작가적 전략으로서 차질을 빚기도 했다. 비즈니스는 생각만큼 돈이 안됐고, 따라서 원하는 만큼 순수미술의 상상력을 펼치게 도와주진 못했던 것이다. 또 언더그라운드에서 문화의 숙주를 만들어 낸다는 슬로건은 우리 문화의 특수성 때문이기는 해도 곧잘 상품의 위세에 굴복하기도 했다. 물론 이와 상관없이 최정화는 외국 뮤지엄이나 국제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작품이 즐겨 전시되게 된 현재의 상황을 내심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궁금해한다. ―“왜 갑자기 내 작품이 여기저기서 인기를 끌게 되었지?” 그런 맥락에서 최정화의 작품 <퍼니 게임>은 의외다. 98년 초 국제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진짜' 경찰 모형들을 세워 놓고 이런 제목을 붙였는데, 알다시피 이들은 도로변에 과속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세워 놓는 눈속임용 마네킹이다.
탈옥수 신창원에게 권총을 빼앗기는 무능력한 경관, 불법 영업의 대가로 각종 상납을 받는 비리 경관 또는 성실한 민중의 지팡이로서 표창 받는 모범 경관들과 전혀 다르게 이 경찰관들은 큰 키에 뚱뚱해 보일 정도로 두툼한 체격과 잘 생긴 얼굴을 한껏 자랑할 뿐이다. 미술관 안에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이 '가짜' 경찰들이 미술 제도를 운영하는 '진짜' 경찰력을 시뮬레이트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착종된 한국의 컨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나이브한 이야기다. 켄터키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의 도상적 효과나 DP점이나 여행사 앞에 서 있는 등신대 모형 사진의 인덱스적 연상조차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우리의 이 경찰관들은 내가 보기에 오히려 완전한 허구적―말 그대로 텅 빈―상징물이다. 그것은 한국 관료제의 실상, 짜증날 정도로 비경제적인 관행과 거의 가족적 수준의 비논리적 담론, 그리고 끝없는 전시 행정과 필사의 경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이 총체적 부실 상태를 아주 완벽하게 지워 버린다. 늠름한 경찰관들은 이런 복잡한 사태를 '입 싹 씻어' 버린 채, 마치 어느 날 엉뚱하게 솟아난 관립 문화예술회관 건축물처럼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자신의 백치미를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퍼니 게임>은 정작 미술관 언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별 환영을 못 받았지만, '진짜' 무지한 경찰들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이 작품 때문에 작가는 서울시 경찰청에 가서 각서를 쓰고, 그 밖에 몇 가지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도 내 게임과 제도 밖 게임을 명쾌히 가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삶의 지형은 최정화가 인테리어한 '올로올로'나 '오존'·'살' 등에서 다른 각도로 시각화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호마이카, 원시적 벽화와 철망, 녹슨 철판과 알전구, 인조 모피와 샹들리에가 만나는 그 곳은 의식의 봉건성과 홀로코스트적 미래의 결합 또는 뉴욕의 뒷골목과 가리봉동의 안방의 교차를 혼성 모조하고 있다. 이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장교용 모자, 장난감 총, 군용 운동화, 상패용 동상 등 권력 지시적인 오브제들을 늘어놓고 명찰형 제목들을 붙여 놓은 <슬기로운 생활과 필수 영양소>에서 막상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도 그렇다고 비판적 미술의 문맥도 명확하게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나열된 사진 이미지들을 보며 연상의 순열 법칙을 찾아내려는 관객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경찰관-최정화를 감지할 뿐이다. 물론 이 때의 최정화는 경찰관 복장을 하고 놀이하는 소년처럼 흥미진진하고 꼭 그만큼 심각하다. 그리하여 그는 경찰의 지휘도 같은 작품을 지구상의 여러 장소들로 공수시킨 후, 그 이동 거리에서 생겨나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짐짓 놀란다. 10미터의 주대(柱臺) 위에 서 있는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가 호주의 쇼핑몰에서는 화려하고 날렵한 금박의 천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면, 상파울로 비엔날레 전시장에서는 이 여신상의 전모가 드러났다. 둔하고 퉁명스럽고 천박한 이 여신의 자태가, 3층 높이 전시된 미술사의 걸작품 자코메티 조각의 시야를 방해한다고 해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때도 여전히 이 '유니폼 애호증'에 걸린 최정화는 불온하게 낄낄 웃고 있었을 것이다. 이동 거리의 조합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면 이런 사태도 생겨난다. 호주 멜버른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로댕의 <발자크> 조각과 최정화의 <퍼니 게임>, 최정화의 <앙코르…>와 헨리무어의 <어머니>가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된다. 직접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최정화의 또 다른 작품 <어머니>를 배경으로 깔 경우 이 작품들이 만들어 내는 나선의 내러티브는 한번 더 꼬이게 될 것이다. 확실히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엔 비정치성의 정치력, 다른 말로 하면 게임의 정치라 할 만한 유희적 태도가 좀더 끈질긴 생명력을 보장한다. 흥행성과 대중적 인기를 보장하는 작가 최정화의 작품 세계는 그의 활동 범위만큼이나 다양하다. 미술관과 화랑, 부띠끄와 주점· 거리· 영화에서 우리는 그의 사진· 디자인· 설치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재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물건들을 버무려 기발하고 신선한 미술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시각적 토템에 가깝다. 최정화라는 화사하고도 달짝지근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몇 년을 사이에 두고 화급하게 바뀐 문화부의 명칭을 떠올리게 된다.
문체부를 거쳐 문광부로, 그러니까 팔팔 올림픽이 거국적인 대사로 떠오르자 체육을 붙였다가 그 '여진'이 가시자 관광을 슬쩍 끼워 넣게 된 그 경로를 기억하게 한다. 기실 최정화가 만들어 내는 작품과 작업의 방법론에는 일찍부터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있던 건설적 체육주의와 일종의 관광주의라 할 만한 특정한 태도가 외삽(interpolate)되어 있다. 되돌아보면 국민보건체조와 교련·민방위 훈련으로 이어지는 신체의 훈육은 그 '공정'상 저 끝에서 한국 모더니즘의 성실하고도 미욱한 붓 자국과 맞닿아 있다. 또 미래를 위해 반납한 현재의 시간관 속에서 미술이란 것은 보는 과정을 즐긴다기보다는 남에게 혹은 미래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물증으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한발 양보해 말하자면, 미술품은 즐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관광적 운명―흔히 보는 신혼여행 사진의 경우처럼―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 경우 미술 작품은 과거의 고난을 막는 주술이자 미래의 풍요를 향한 물신(fetish)으로써 기능한다. 변두리의 낯선 아름다움 최정화는 그 자신 놀랄 만한 체육 정신으로 주변의 사물들을 끊임없이 포획하고, 또 그것들이 놓여 있을 만한 사회적 ‘포인트’들을 두루 섭렵하는 작가다. 말할 것도 없이 작품은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치장해서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미술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관제적 노동의 성실성을 '빨리감기-패스트 포워드' 하기를 즐긴다. 또는 과시의 물신성과 전시의 주술성을 '되감기-리와인드'한다. 다소간 악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대량생산된 싸구려 물건들을 과감히 방치하거나 '흘러간' 각종 향수(鄕愁)용 오브제들을 잡다하게 뒤섞는다. 대체로 이것들은 70년대의 국정교과서나 80년대의 삐라 혹은 90년대의 서커스 포스터 등에서 감지되는 감수성과 관통하는, 다시 말해 시간상으로나 공간적으로 변두리라 할 만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주변적 오브제들을 반복해서 빨리 감거나 되감기함으로써 사태를 희화화하거나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최정화의 강점은 아마도 그 과정에서 낯선 아름다움이랄까, 생경한 위엄이랄까, 그런 것까지를 노출시키는 특유의 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망 좋은 방>도 그렇지만, 특히 <아이큐 점프―나의 아름다운 20세기>의 빨간 색 플라스틱 바구니들, 그것들과 겹쳐 쌓은 금박 트로피들의 모뉴멘트적 골격은 우리 몸 깊숙이 침투해 있는 문화적 관성들을 마치 피막이 벗겨진 전선처럼 그대로 드러낸다. 그 적나라한 기념비에 우리는 낮은 한숨을 쉬며 굴복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최정화의 작품들이나 그의 작가적 태도가 사회정치적인 독법을 외연(外延)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활동 이력만 간단히 살펴봐도 이는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88년도까지 계속되던 '체(體)' 시리즈로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경력은 예외로 치도록 하자. 그 뒤론 갑자기 인테리어 디자이너·그래픽 디자이너·아트 디렉터 등을 겸직하면서 '최정화 브랜드'를 유행시켰고, 한동안 술집이나 길거리, 폐가 등 그간 배제되었던 전시 공간에서 소규모 이벤트와 릴레이 전시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각종 국제 미술 무대에 한국의 대표 선수로, 그리고 국내외 뮤지엄이나 상업 화랑에 단골 작가로 선발되는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예술은 유토피아를 구체화할 수 없으나 그것을 예감한다.
음악은 시간을 압축하고 그림은 공간을 압축한다.
이렇게 예술은 합리성을 통한 고정된 규정을 수정하고 그것을 상대화함으로써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예술의 사회성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은 예술가의 근원적 에너지이다.
핸드폰 칼라링은 항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작년 내가 이뻐하는? 동료가 내 칼라링을 듣더니
"차장님 칼라링 넘 슬퍼요 딴걸로 바꾸세요."
그 당시 나의 칼라링은 김윤아의 "야상곡(夜相曲)"이었다.
그 녀석에게 내 심경을 들킨 것같은? 기분이 들면서 바로 바꾸어 버렸다.
칼라링과 나의 그 당시 심경과 관련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는 모르겠다이다.
아니다이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이다.
왜냐면 감성적 음악듣기에 심취하는 나로서는 음악적 선택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취향이란 자신의 심리적 상황과도 연관이 없음을
내가 어떻게 부인하랴.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을때 전후 논리적 설명이 불가할때도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우니 이 얼마나 모호한 난감인가. ^^
칼라링을 바꾼 역사는 주로 나를 아는 이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딱한번 사회적, 공적 업무영역내에서 위치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이유도
있긴했지만...상황은 이랬다.
모바일사업부이사님이 핸폰으로 내게 연락한 일이었다.
"강과장이 진짜로 원하는게 모야?"
다짜고짜? 이러시는데..그건 그 당시 칼라링이 신해철의 "니까 진짜로 원하는게 모야"
였기에 자연스레 대사가 그렇게 이어진 것이었고 순간 난 칼라링하나로 나 자신이
규정지어질 수 있음에 약간 당혹해하며 바로 칼라링을 변경해 버렸다.
이사님은 가벼운 농담으로 나의 취향을 잼있어하는 사건이었을 뿐이지만
회사내 위치가 중간간부였던 내겐 신해철을 좋아하는 음악적 취향이 왠지
중후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형으로 내비쳐질까봐 약간 조바심을 냈던거 갔다.
오버인거지...ㅎㅎ
그 이후 칼라링 변경은 친구의 만류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삼동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와의 인연은 오래되었고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중에 하나이다.
이 친구가 전화에서 하는말
"칼라링 바꿔! 넘 음울해!"
"모냐? 난 아닌데?"
겉으로는 별 문제엄따는 척해놓고는 약간의 심리적 갈등을 겪고는 바로 바꾸었다.
귀가 얇은 건가 나를 의심하면서..그런데 내 고집이 어디 누군가가 하라고 한데서 하는
성격이던가?
아니 칼라링은 그랬다. 왜일지를 고민해 보았지만 그건 여러가지 사유가 꼬리를 문다.
그런데...
최근 또 비슷한 일이 업무차 통화하던 중 발생.
서로를 안지가 거진 10년이 되어가는 친구인 H군이 위의 칼라링을 바꾼 상황과
비슷한 이유로 나의 칼라링에 딴지를 걸었다.
애써 설득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들리냐? 그 음악 쿨한 가수 누구누구다. 슬프게 들리지 않는데...
답은 그랬어도 지금 또 난 흔들리고 있다.
참고로 지금 칼라링은 이현우의 "멈추지 말아요"이다.
이걸 바꿔 말어?
음악에는 문제가 없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것 같은뎅...
그래도 흔들리고 있네...바꿀까 말까? ;;;;
반항하는 심정으로(누군한테?) 김윤아의 "글루미 선데이"로 바꿔버릴까 부다..셋~~
>>사족
아니면..나를 살짝알고 있는 블로거들의 추천음악이나 받아버릴까요?
시간되시는 분은 추천해시와요~
멈추지 말아요 당신뜻대로
사랑을 하세요 진실한 마음을
후회를 말아요 지난날 추억을
노래를 불러요 추억의 노래를
희미한 불빛속에 온세상이 잠들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추억의 종소리
멈추지 말아요 강물이 흐르듯
사랑을 하세요 고독한 마음을
후회를 말아요 슬픈 이별을
노래를 불러요 이별의 노래를
희미한 불빛속에 온세상이 잠들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추억의 종소리
외로운 내 맘에 슬픔이 찾아오면
두눈에는 눈물만이 이슬처럼 흐르네
음악을 링크해드리고 싶었지만 어디에고 로그인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고
그 이상은 능력의 한계~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문구가 인상적이다.
" 엉망진창인 당신의 마음에 죄를 짓지 말아요
당신의 꿈, 사랑, 신념 당신의 뜻대로..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들
부숴버려요 "
이름
권유성.
1년3개월쬐금 넘음(정확히 모르겠으나 작년 가을에 돌잔치했었음^^;;)
언니와 형부의 흔적이 거의 엄따.
내가 보기엔 그들의 얼굴에서 이 얼굴이 나온건 초절정울트라캡송 X-파일감이다.
첫째인 유빈조카때는 내게 받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아직도 형부는
나만보면 유빈에게 세뇌를 시킨다.
"유빈아~ 저 이모를 절대로 잊지마라!"
난 그냥 유빈이가 쬐금 아니다?라고 평을 해주었을 뿐인데...부부에겐 잊지못할
상처였던 것이다.
울엄마왈~ 아이의 얼굴가지고 절대로 부모에게 뭐라 얘기하면 안된다는 옥석같은
말씀이 있으셨지만..유빈이는 엄청 구여운 녀석인뎅..얼굴이 무에 대수라공..ㅋㅋ
여하간...
그들 부부의 예술작품.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그들 후세대에 엄쓸꺼라고 본다.ㅋㅋㅋ
(원본이 어데있는지..쩝..바탕화면으로 깔린 이미지를 포로샵 프로그램이 엄써서
그림판으로 이미지캡쳐해서 크기 줄이고 별짓을 해도
선명도 조절, 색감조절, 암것도 안된고로 요정도의 화질밖에.....
설 올라가면 멋지게 고쳐보리~)
더 이뿌네~
하품하는 것도 이뿌네~ 침을 많이 흘려서 카우보이로 변신~
나 이뽀요? 이모? 끄덕끄덕(백만번+1)~~
돌잔치에서~ 저 아스라한 표정~
뭔가를 요구할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어서 맘약한 이모. 그냥 다 들어주고 싶은뎅..
외할머니, 아빠엄마는 매몰차게 안되는건 안된다고 하더라.
내가 왠만한건 다들어주다 보니 외할머니, 아빠엄마가 안된다고 해둔 것들을 내가
깨부셔버렸다. 안들어주니 엥~하고 그냥 그자리에 드러누워버리는데 어쩌랴?
맘약해서 그냥 들어주었는데...버릇나빠진다고 야단만 들을 분위기였었다..ㅠ_ㅠ;;
사실 알고봤더니 외할머니, 아빠엄마에겐 그런 행동이 안먹히니 잘 안써먹더군.
어리버리한 이모에게만 써먹는 아주 영리한 녀석. 머리가 비상해서 놀랐따^^;;
유빈형과 함께~ 눈 감았으요~ 어찌나 웃긴지~~ㅋㅋㅋ
이번엔 유빈이가 눈을 감고~ 미초~ㅋㅋ
유빈이가 사촌형과 함께~ 유빈이가 사진찍을때마다 잘하는 포즈~ 태꿘!
유성 돌잔치에서 할아버지와 사촌형들과 함께~ 유빈은 또 저 포즈당~ㅋㅋ 왼쪽에서 세번째는 강태산~ 오빠의 작품이지~ 자~알 생겼다~
유빈과 태산~ 여자애는 언니친구의 딸~ 유빈이 가장좋아하는 포즈는 여전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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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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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갱보다 미갱의 블로그가 더 좋아요..:P부가 정보
riv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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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님~ 무슨 그런~~ 고호의 그림과 비교되다니..이런 영광이^^부가 정보
kuf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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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가 서른이 다 되어 화가로 발을 딛었지요. 제 나이 서른에 그 전기를 읽고 용기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 고호가 사용했던 물감(테레빈유?) 중독으로 인한 정신병이었단 설이 있습니다. 유기용제가 정신병을 일으키기도 하거든요^^;;;부가 정보
riv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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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님 정말 놀라운 사실이네요? 페인팅에서 테레핀유사용은 기본이거든요. 흐흠..과친구들의 비정상적 행동이? 이제서야 쬐금씩 이해된다면...오바겠죠^^;;
그런데 그건 여전히 놀라운 사실이네요. 흐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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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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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고갱 왠지 미워요.-"- 그치만 고흐는 고갱을 좋아했을거에요.(뭐래..-_-;)부가 정보
riv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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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ㅋㅋㅋ 글치? 나만 그런게 아닐꺼라 생각은 했어.그런데 고호는 왜 원사이드러브만 했을까? 친구도 그렇고, 이성에게도..고호는 바보야...바보.
제목을 <바보고호>로 달까하기도 했거덩..
바보여서 더 정이 가는건지..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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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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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고호 좋아요. 암스테르담을 좋아하는 이유도 고호의 미술관이 있어서고..^^;; 고호의 자화상을 오르세에서 볼 때였는데 한참 서 있다 울었어요. ㅜㅜ 저 감성 풍부하죠? 저도 그럴때가 있었다우~~부가 정보
riv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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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 넘 부러비~~나두 직접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파~아~~울고시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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뎡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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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갱>_< 제가 좀 강렬한 걸 좋아해서(/-_-)/~♡제 친구 중에 고호같은 애 있어요. 고갱같은 애는 없어서 더 좋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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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v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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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야님은 고갱이 더 좋구나~ 그렇구나~그런데 강렬한걸로는 고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붓터치가 더 강렬해 보이지 않으셈?
고호같은 친구가 주변에 있다니...보고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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