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시각뒤집기_최정화

무궁화(super flower) / 2000 / 4x4x5m / ventilator, greared motor, water proof cloth

 

형식적 새로움은 현대에 더 이상 없다?
이러한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패러디, 패쉬디시라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현대미술은 “참여”로 인한 불확정성에 근간을 둔 미디어아트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디어아트의 매체는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무한반복이다.
디지털은 특정한 대상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이다. 현대에는 예술가의 대한 개념정의가 없고, 한계가 없다. 누구나 디카나 폰카 그리고 다양한 툴을 통해 대상을 변형하고 조작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보여주고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연스럽게 즐긴다.
다양한 이들의 소통과 참여를 끌어내는데 현대미술의 진정한 재미가 있는것이고 재미와 접근성의 편의는 곧 창조의 토대이다.


미술평론가 진중권은 “기술적 상상력”이라 정의한다.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없어지고 상상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면서 꿈이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Seed / 1996 / Installation view(서울) / FRP

 

 

미디어아트가 판을 치는 미술계에 통속과 키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

 


최정화

뒤집기의 명수.

 


present of centry(site view) / 2000 / 3.3x3.3x13.2m / FRP, Iron truss

 

 

미술이 미술관에 있지 않고 난지도에, 종로바닥에, 잔디밭에 있다?

 

버려지고 내쳐진 사물도 그의 눈에 띄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번두번 뒤집어 버리는 것. 그것이 남과 다른 그의 재능이다.


“내 작품은 베끼기다. 현대의 미술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새롭게 발견하는 자”

 

거침없이 얘기하는 작가.
새로움의 재발견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작가.

그의 시각은 단연 새롭다.
 


Plastic Paradise / 1997 /installation view(paris) / plastic

 

 

글:최정화


풍요로움, 풍부함, 입으로만 맛보는게 아니지 五感도 모잘라
맛을 瞬間冷凍 시킨다면
맛 좀 봅시다.
풍경, 자연, 명소 ,계절, ...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아름다움
환상특급
달콤한 향기
농도, 밀도로 이야기된다.
生活에 뿌리를 둔 예술
맛 좀 볼래? 멋있게 말하면 ‘맛을 체험시키기’
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
니 맛, 내 맛? 진짜 맛은 내맘대로 섞어서 만드는 거야.
눈으로 보는 맛
맛도 media이다. MASS MEDIA? communication?
맛있는 생활
맛있게 먹기보다, 맛있게 느끼기가 더 중요하다.
맛의 색은?
그 가벼운 투명함속에는 화려한 우주가 있지!
입맛대로 놀라구 그래
예술은 남의꺼, 맛은 내꺼
세계는 하나, 맛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Super Flower / 1995 / 3.5x1.5x5mx
water proof cloth, oil pressure quipment
compressor, sensor

 

 

무겁기보다 가볍게, 고상하기보다는 촌스럽게, 예의를 지키기보다는 장난을 치듯 접근하는 그의 작품들은 촌스럽다고 멀리한 알록달록한 색깔의 탱화나 오래된 딱딱한 가짜과자들을 쌓아두며 천연덕 스럽게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난지도의 쓰레기더미를 보여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열광하며, 비닐로 만든 거대한 꽃을 바람에 흩날리게 만들고, 고속도로 아무때나 등장하는 가짜 마네킹경찰을 미술관 중심에 배치하고, 금탑을 만들어 진짜 국보인양 관객들을 속이며 자본주의를 다시 들여다 보게한다.

 


Funny Game / 1997 / 1x0.8x2.3mx11ea/ FRP

 

 

자신감과 새로움은 그의 무기이자 근원으로 보인다.

남들은 지나칠 종로의 가게안에서 이것저것 발견하며 잼나하는 작가가 내겐 너무나

행복한 작가로 보였다.


키치라는 미술장르를 한국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오며 전통적이지만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주변미술을 중심으로 자리이동시킨 것은 그의 새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시각의 독특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전시에서 한국적 양식의 독특함을 뽐내는 그의 새로운 시각을 즐겨 보시라.

 


Globalism / 1998 / 0.5x1x0.3m / cloths

 

 

>>사족

대학시절 그의 세미나를 들으며 막힘없이 자신있게 내뱉는 말 또한 유창하게 잘하는 “잘난 작가”임을 난 엄청 부러워했다.

작가가 자신의 세계에 대해 술술술 풀어 놓을때 얼마나 멋진지..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을 보았다면 그의 미술(Art Director)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것이다.

 

 

<어머니 Mother>

공간에 따라 의미와 느낌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약간의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주제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인데..

보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궁금한 작품이기도 해서 소개해 본다.


Mother / 1998 / Installation view / FRP

 


Mother / 1998 / Installation view / FRP

 

 

 

 

 




백지숙 (미술비평)

  
 관습을 희화하는 게임  정리하건대 최정화는 80년대 말까지 이어졌던 사회 비판적 미술의 흐름과는 아무런 '조직적'인 연관이 없었고, 다만 미술 제도의 진행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전향적인 단서를 남겼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뒤샹의 제도론, 그리고 워홀의 팩토리 등에 순한국산 재료들을 버무려서 최정화식 '부대찌게'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지금도 '가슴'과 '살'이라는 이종의 사업체를 통해서 계속 공급되고 있는 바이다(나중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여기서 한국산 재료란 한국의 미술사적인 선배들이라기보다는 남대문시장· 파고다극장· 영등포카바레· 김포가구공장· 미아리· 청계천· 난지도 등 산포되어 있는 지리적 역사에 관한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른바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또는 비즈니스와 예술을 가로지른다는 그의 활동 방식은 작가적 전략으로서 차질을 빚기도 했다. 비즈니스는 생각만큼 돈이 안됐고, 따라서 원하는 만큼 순수미술의 상상력을 펼치게 도와주진 못했던 것이다. 또 언더그라운드에서 문화의 숙주를 만들어 낸다는 슬로건은 우리 문화의 특수성 때문이기는 해도 곧잘 상품의 위세에 굴복하기도 했다. 물론 이와 상관없이 최정화는 외국 뮤지엄이나 국제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작품이 즐겨 전시되게 된 현재의 상황을 내심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궁금해한다. ―“왜 갑자기 내 작품이 여기저기서 인기를 끌게 되었지?”  그런 맥락에서 최정화의 작품 <퍼니 게임>은 의외다. 98년 초 국제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진짜' 경찰 모형들을 세워 놓고 이런 제목을 붙였는데, 알다시피 이들은 도로변에 과속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세워 놓는 눈속임용 마네킹이다.  


탈옥수 신창원에게 권총을 빼앗기는 무능력한 경관, 불법 영업의 대가로 각종 상납을 받는 비리 경관 또는 성실한 민중의 지팡이로서 표창 받는 모범 경관들과 전혀 다르게 이 경찰관들은 큰 키에 뚱뚱해 보일 정도로 두툼한 체격과 잘 생긴 얼굴을 한껏 자랑할 뿐이다. 미술관 안에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이 '가짜' 경찰들이 미술 제도를 운영하는 '진짜' 경찰력을 시뮬레이트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착종된 한국의 컨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나이브한 이야기다. 켄터키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의 도상적 효과나 DP점이나 여행사 앞에 서 있는 등신대 모형 사진의 인덱스적 연상조차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우리의 이 경찰관들은 내가 보기에 오히려 완전한 허구적―말 그대로 텅 빈―상징물이다. 그것은 한국 관료제의 실상, 짜증날 정도로 비경제적인 관행과 거의 가족적 수준의 비논리적 담론, 그리고 끝없는 전시 행정과 필사의 경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이 총체적 부실 상태를 아주 완벽하게 지워 버린다.  늠름한 경찰관들은 이런 복잡한 사태를 '입 싹 씻어' 버린 채, 마치 어느 날 엉뚱하게 솟아난 관립 문화예술회관 건축물처럼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자신의 백치미를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퍼니 게임>은 정작 미술관 언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별 환영을 못 받았지만, '진짜' 무지한 경찰들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이 작품 때문에 작가는 서울시 경찰청에 가서 각서를 쓰고, 그 밖에 몇 가지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도 내 게임과 제도 밖 게임을 명쾌히 가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삶의 지형은 최정화가 인테리어한 '올로올로'나 '오존'·'살' 등에서 다른 각도로 시각화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호마이카, 원시적 벽화와 철망, 녹슨 철판과 알전구, 인조 모피와 샹들리에가 만나는 그 곳은 의식의 봉건성과 홀로코스트적 미래의 결합 또는 뉴욕의 뒷골목과 가리봉동의 안방의 교차를 혼성 모조하고 있다. 이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장교용 모자, 장난감 총, 군용 운동화, 상패용 동상 등 권력 지시적인 오브제들을 늘어놓고 명찰형 제목들을 붙여 놓은 <슬기로운 생활과 필수 영양소>에서 막상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도 그렇다고 비판적 미술의 문맥도 명확하게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나열된 사진 이미지들을 보며 연상의 순열 법칙을 찾아내려는 관객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경찰관-최정화를 감지할 뿐이다. 물론 이 때의 최정화는 경찰관 복장을 하고 놀이하는 소년처럼 흥미진진하고 꼭 그만큼 심각하다. 그리하여 그는 경찰의 지휘도 같은 작품을 지구상의 여러 장소들로 공수시킨 후, 그 이동 거리에서 생겨나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짐짓 놀란다. 10미터의 주대(柱臺) 위에 서 있는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가 호주의 쇼핑몰에서는 화려하고 날렵한 금박의 천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면, 상파울로 비엔날레 전시장에서는 이 여신상의 전모가 드러났다. 둔하고 퉁명스럽고 천박한 이 여신의 자태가, 3층 높이 전시된 미술사의 걸작품 자코메티 조각의 시야를 방해한다고 해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때도 여전히 이 '유니폼 애호증'에 걸린 최정화는 불온하게 낄낄 웃고 있었을 것이다. 이동 거리의 조합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면 이런 사태도 생겨난다. 호주 멜버른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로댕의 <발자크> 조각과 최정화의 <퍼니 게임>, 최정화의 <앙코르…>와 헨리무어의 <어머니>가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된다. 직접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최정화의 또 다른 작품 <어머니>를 배경으로 깔 경우 이 작품들이 만들어 내는 나선의 내러티브는 한번 더 꼬이게 될 것이다. 확실히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엔 비정치성의 정치력, 다른 말로 하면 게임의 정치라 할 만한 유희적 태도가 좀더 끈질긴 생명력을 보장한다. 흥행성과 대중적 인기를 보장하는 작가 최정화의 작품 세계는 그의 활동 범위만큼이나 다양하다. 미술관과 화랑, 부띠끄와 주점· 거리· 영화에서 우리는 그의 사진· 디자인· 설치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재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물건들을 버무려 기발하고 신선한 미술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시각적 토템에 가깝다.  최정화라는 화사하고도 달짝지근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몇 년을 사이에 두고 화급하게 바뀐 문화부의 명칭을 떠올리게 된다.  


문체부를 거쳐 문광부로, 그러니까 팔팔 올림픽이 거국적인 대사로 떠오르자 체육을 붙였다가 그 '여진'이 가시자 관광을 슬쩍 끼워 넣게 된 그 경로를 기억하게 한다. 기실 최정화가 만들어 내는 작품과 작업의 방법론에는 일찍부터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있던 건설적 체육주의와 일종의 관광주의라 할 만한 특정한 태도가 외삽(interpolate)되어 있다.  되돌아보면 국민보건체조와 교련·민방위 훈련으로 이어지는 신체의 훈육은 그 '공정'상 저 끝에서 한국 모더니즘의 성실하고도 미욱한 붓 자국과 맞닿아 있다. 또 미래를 위해 반납한 현재의 시간관 속에서 미술이란 것은 보는 과정을 즐긴다기보다는 남에게 혹은 미래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물증으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한발 양보해 말하자면, 미술품은 즐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관광적 운명―흔히 보는 신혼여행 사진의 경우처럼―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 경우 미술 작품은 과거의 고난을 막는 주술이자 미래의 풍요를 향한 물신(fetish)으로써 기능한다.  변두리의 낯선 아름다움 최정화는 그 자신 놀랄 만한 체육 정신으로 주변의 사물들을 끊임없이 포획하고, 또 그것들이 놓여 있을 만한 사회적 ‘포인트’들을 두루 섭렵하는 작가다. 말할 것도 없이 작품은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치장해서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미술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관제적 노동의 성실성을 '빨리감기-패스트 포워드' 하기를 즐긴다. 또는 과시의 물신성과 전시의 주술성을 '되감기-리와인드'한다. 다소간 악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대량생산된 싸구려 물건들을 과감히 방치하거나 '흘러간' 각종 향수(鄕愁)용 오브제들을 잡다하게 뒤섞는다. 대체로 이것들은 70년대의 국정교과서나 80년대의 삐라 혹은 90년대의 서커스 포스터 등에서 감지되는 감수성과 관통하는, 다시 말해 시간상으로나 공간적으로 변두리라 할 만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주변적 오브제들을 반복해서 빨리 감거나 되감기함으로써 사태를 희화화하거나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최정화의 강점은 아마도 그 과정에서 낯선 아름다움이랄까, 생경한 위엄이랄까, 그런 것까지를 노출시키는 특유의 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망 좋은 방>도 그렇지만, 특히 <아이큐 점프―나의 아름다운 20세기>의 빨간 색 플라스틱 바구니들, 그것들과 겹쳐 쌓은 금박 트로피들의 모뉴멘트적 골격은 우리 몸 깊숙이 침투해 있는 문화적 관성들을 마치 피막이 벗겨진 전선처럼 그대로 드러낸다. 그 적나라한 기념비에 우리는 낮은 한숨을 쉬며 굴복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최정화의 작품들이나 그의 작가적 태도가 사회정치적인 독법을 외연(外延)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활동 이력만 간단히 살펴봐도 이는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88년도까지 계속되던 '체(體)' 시리즈로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경력은 예외로 치도록 하자. 그 뒤론 갑자기 인테리어 디자이너·그래픽 디자이너·아트 디렉터 등을 겸직하면서 '최정화 브랜드'를 유행시켰고, 한동안 술집이나 길거리, 폐가 등 그간 배제되었던 전시 공간에서 소규모 이벤트와 릴레이 전시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각종 국제 미술 무대에 한국의 대표 선수로, 그리고 국내외 뮤지엄이나 상업 화랑에 단골 작가로 선발되는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