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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과 조미예비회담, 어떻게 성사될까?

[개벽예감287]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예비회담, 어떻게 성사될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2/19 [11: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남북관계가 아니라 조미관계에서 결정된다

2. 트럼프의 이상한 침묵, 문재인-펜스 회담

3.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착오와 헛된 꿈

4. 백악관의 대조선정책은 어떻게 바뀌었나?

5. 불변의 전략 추진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1. 남북관계가 아니라 조미관계에서 결정된다

 

불꽃이 타올랐다. 이 강산을 화해의 열기로 녹이며 평화의 빛을 안겨주는 불꽃, 북측 고위급 대표단의 역사적인 방문이 지펴올린 소중한 불꽃이다. 이 불꽃은 민족의 통일열풍을 활화산처럼 불러일으키며 남북정상회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아직은 이렇게 문학적 수사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지만, 장엄한 통일시대의 개막은 꿈결 같은 상상이 아니라 70년 통일국가건설운동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 민족은 가슴 벅찬 격변기를 맞이한 것이다. 

 

바로 그 격변기에 두 가지 역사적인 대사변이 일정에 올라있다. 70년 동안 고통과 치욕을 강요해온 분단체제 한 복판에 붕괴의 파열구를 뚫어놓을 역사적인 대사변은 남북정상회담과 조미담판이다. (회담 또는 협상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적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회담 또는 협상이므로 담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남북정상회담과 조미담판이 열릴 것이라는 정세전망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하려는 것이 이 글을 집필한 목적이다. 

 

서술의 출발점은, 우리 민족에게 감동과 흥분을 안겨주고, 전 세계적으로 놀라움과 찬탄을 불러일으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남특사파견이다. 2018년 2월 1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명을 받고 분단선을 넘어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특사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다.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특사의 대화내용을 읽어보면, 친서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받들어 이른 시일 안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명을 받고 분단선을 넘어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특사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이다. 김여정 특사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했는데, 친서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받들어 이른 시일 안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전달과 북측 고위급 대표단의 남측 방문은 민족의 통일열풍을 활화산처럼 불러일으키며 남북정상회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해지자, 남측에서는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와 관련하여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방해하고 반대해온 미국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가로막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다.   

그런 우려 속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가 또는 불발되는가 하는 문제는 남북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미관계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백악관이 반대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비극적 현실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얽혀있는 한미동맹의 은폐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백악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묵인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의 반대에 가로막혀 평양을 방문하지 못하게 될 것이 확실한데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를 평양에 초청하였을까? 그런 것은 아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백악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반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를 평양에 초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백악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반대하지 못하는 여건을 만들어놓고 그를 평양에 초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2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특사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양초청을 받고,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나가자”고 화답하였는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여건을 만들어놓고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나가자”고 응답하였다.  

 

그렇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여건을 만들어놓은 것일까? 조선이 미국 본토 전역을 핵타격사정권 안으로 끌어넣은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그 여건이다.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한 것이 어째서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성사시킬 여건으로 되는 것일까?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였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조미담판밖에 없는데, 백악관이 조선과 담판하려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반대할 수 없고, 묵인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백악관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는데도, 조선이 백악관과 담판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백악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묵인하는 조건에서만 조미담판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다면, 남북정상회담이나 조미담판은 거론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과 조미담판이 성사될 전망이 열린 것이다.  

 

 

2. 트럼프의 이상한 침묵, 문재인-펜스 회담

 

백악관이 조선과 담판하려는 의사를 가졌는가 또는 갖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으로 부각된다. 조선과 담판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틀어쥐고 있으므로, 그가 그 중대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의 현직 고위관리들 또는 전직 고위관리들,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전문가들이 언론매체에서 조미관계에 관한 이러저러한 발언을 늘어놓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최종결정권을 가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관심의 초점을 집중시켜야 백악관이 조선과 담판하려는 의사를 가졌는지 또는 갖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백악관 측근들이 제발 좀 그만두라고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위터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늘어놓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여정 특사의 남측 방문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였다. 김여정 특사의 남측 방문으로 전 세계가 깜짝 놀라며 술렁이었는데, 트위터 수다쟁이로 소문난 트럼프 대통령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당시에 전개된 정황을 들여다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침묵할 수 없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김여정 특사의 남측 방문에 관한 내부논의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 논의의 끝자락에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린 것도 분명하다.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었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섣부른 소리를 꺼내놓지 못한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여정 특사를 남측에 파견한 것과 관련하여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내린 중요한 결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결정이 무엇인지를 외부에 알려준 사람은 놀랍게도 마익 펜스(Michael R. Pence) 부통령이다. 

얼마 전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펜스 부통령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는 미국 선수단을 이끌고 남측에 들어가서 남북관계개선을 방해하고 북측을 심히 자극하는 망언과 망동을 저지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 망언과 망동에 시선을 빼앗기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여정 특사의 남측 방문과 관련하여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8년 2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펜스 미국 부통령을 접견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이다. 그 회담에서 펜스 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관계개선을 추진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미국 선수단을 이끌고 남측에 들어가서 남북관계개선을 방해하고 북측을 심히 자극하는 망언과 망동을 저지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펜스 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하면서는 남북관계개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중대한 결정을 용케 알아낸 재주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미국의 외교정책 및 국가안보문제에 관한 글을 <워싱턴포스트>에 자주 발표하는 유명언론인 조쉬 로긴(Josh Rogin)이다. 그는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11일부에 실린 자신의 글 ‘미국은 북조선과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에서 펜스 부통령에게서 들은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특별기 안에서 펜스 부통령과 조쉬 로긴이 단독대담을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펜스 부통령은 2018년 2월 8일 자신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할 때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관계개선을 계속 추진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견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조쉬 로긴은 관여(engagement)라는 미국식 용어를 썼지만, 그것은 남북관계개선이라는 우리식 용어와 같은 뜻이다. 

 

남북관계개선을 가로막는 망언과 망동을 저지르며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었던 펜스 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회담에서는 남북관계개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펜스 부통령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펜스 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남북관계개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그의 개인견해를 밝힌 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김여정 특사의 남측 방문을 논의한 끝에 내린 결정을 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쉬 로긴은 위에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펜스 부통령이 방한체류 중에 트럼프 대통령과 “매일 협의하였다”고 썼는데, 이것은 남북관계개선을 추진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펜스 부통령의 회담발언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정책변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발언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런 사실을 살펴보면,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을 묵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악관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보다, 청와대가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마땅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추진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3.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착오와 헛된 꿈

 

2018년 2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 취재기자실을 들렀을 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인가 하는 어느 외신기자의 질문을 받고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 우리 속담으로 하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답변하였다. 이 즉석답변은 그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이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친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이른 시일 안에 개최하자고 제의하였는데, 그 제의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다. 

 

2018년 2월 15일 남측 여론조사기관이 발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남측 국민들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국민의 뜻을 받들어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문재인 대통령은 이상하게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왜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에 대해 그처럼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것일까? 이 의문에 답을 얻으려면, 아래에 서술한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17일 평창동계올림픽 취재기자실에 들렀을 때, 취재진에게 “지금 이뤄지고 있는 남북대화가 미국과 북한 간의 비핵화 대화로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발언에서 남북관계 개선문제와 조미회담 개최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조미회담이 성사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조미회담이 성사될 조짐이 보이지 않으므로, 남북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백악관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싶다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인 것이다. 그런 생각에 따르면,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개선시킬 남북정상회담은 조미회담이 성사된 이후에 개최될 수 있으며, 만일 조미회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개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거론하기 전에 백악관의 눈치부터 살펴야 하는 민망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8년 2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기자단쎈터를 방문하였을 때 외신기자와 담화하는 장면이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인가를 물은 외신기자의 질문을 받고,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답변하였다. 이 답변은 그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금은 조미회담이 성사될 조짐이 보이지 않으므로, 남북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백악관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싶다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인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과거경험이 있다. 2000년 3월 8일 미국 뉴욕에서 조미고위급회담 추진문제를 협의하는 조미예비회담이 진행되었고,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문제를 협의하는 남북특사회담이 진행되었다. 조미예비회담과 남북특사회담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 경험은 조미관계개선과 남북관계개선이 동시에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과거경험에 비춰보면, 조미회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할 수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그 양자가 동시에 추진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착오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 판단착오를 버리고, 백악관의 눈치를 너무 살피지 말고, 이른 시일 안에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통일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표현보다 그에게 통일의지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이라는 말을 입 밖에 일절 꺼내지 않는 것만 봐도, 그에게 통일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관심하는 문제는 통일문제가 아니라 평화문제다. 그의 소원은 조선과 미국이 비핵화 협상을 시작하여 한반도에 평화가 실현되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2월 17일 평창동계올림픽 취재기자실에 들렀을 때, 취재진에게 “지금 이뤄지고 있는 남북대화가 미국과 북한 간의 비핵화 대화로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개선되어도, 더 나아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도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게 아니라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가 소원하는 한반도의 평화는 평화적인 분단체제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평화적인 분단체제는 언제가도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꿈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건설되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분단체제 아래서는 평화체제가 절대로 구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평화가 실현되지 않는 근본원인은 분단체제가 유지되는데 있다.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평화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므로, 한반도 평화체제는 오직 자주통일국가가 건설될 때만 구축될 수 있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교체되면, 평화적인 분단체제가 세워지는 게 아니라 자주적인 통일국가가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적인 분단체제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조선과 미국의 비핵화 협상이나 평화로운 분단체제를 소원하는 헛된 꿈을 버리고, 민족의 통일염원을 받들어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는 지상과업에 관심과 노력을 돌려야 할 것이다. 

 

 

4. 백악관의 대조선정책은 어떻게 바뀌었나?

 

우리 민족 전체가 기대하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조미예비회담이 열려야 하는데, 조미예비회담이 열릴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사실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조선정책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11일부에 실린 조쉬 로긴의 기사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특별기 안에서 조쉬 로긴이 펜스 부통령에게 조선이 제재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조선이 제재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조미회담이 열린다는 뜻이므로, 그 질문은 백악관이 조선과 회담하기 위해 조선에게 무슨 조건을 요구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질문을 받은 펜스 부통령의 답변이 참으로 ‘걸작’이었다. 그는 “나는 모른다. 그것이 회담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답변하였다. 

조선과 회담하기 위해 백악관이 조선에게 요구할 조건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펜스 부통령의 답변은 무슨 뜻인가? 백악관이 조선에게 요구할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조선과 회담해야 한다는 그의 답변은 또 무슨 뜻인가?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2월 8일 오산미공군기지에 특별기편으로 도착한 마익 펜스 미국 부통령과 그 부인이 임성남 외무차관의 영접을 받으며 주한미공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장면이다. 펜스 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 미국 선수단을 이끌고 남측에 들어가서 남북관계개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북측을 심히 자극하는 망언과 망동을 계속 자행하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남측 체류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특별기 안에서 미국 언론인과 마주 앉아 단독대담을 진행하면서 백악관이 조선에게 조건 없는 예비회담을 제의할 것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것은 그의 개인견해가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정책변화를 말해주는 발언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단적으로 말하면, 펜스 부통령의 답변은 조선에게 이른바 조건 없는 예비회담(preliminary talks without precondition)을 제의하려는 백악관의 속내를 반영한 것이다. 백악관이 조선에게 조건 없는 예비회담을 제의한다는 말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조선정책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쉬 로긴은 위에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기사의 첫 문장에서 “지난 주간 남한에서 미국과 북조선 사이에 서로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막 뒤에서는 워싱턴과 평양이 조건 없이 직접 대화를 시작할 새로운 외교의 개막을 향한 실제적인 진전(real progress)이 이루어졌다”고 썼던 것이다. 또한 미국의 <블룸벅 뉴스>도 위에 인용한 조쉬 로긴의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대해 보도하면서, 백악관이 조선과 회담하려는 “정책변동(policy shift)”을 보여주었다고 논평하였던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백악관은 한심한 헛발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조선이 비핵화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야 조선과 회담할 수 있다느니, 비핵화를 논의하는 회담이 아니라면 조선과 회담할 필요가 없다느니, 조선을 비핵화하기 위한 ‘최대압박공세’가 효과를 보고 있다느니, 조선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대화를 제의해오면 응해주겠다느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줄곧 헛발질만 하다가, 조미핵대결에서 패하고 나서 정신을 좀 차렸는지, 이제야 조건 없는 예비회담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였으므로, 백악관이 대조선정책을 그렇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18년 2월 13일 헤더 노어트(Heather A. Nauert)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국무부 출입기자들에게 “우리가 (조선과) 논의하고 싶은 의제를 정하기 위해, 그 의제는 비핵화가 될 것인데, 우리는 무엇을 논의할 것인지에 관한 예비대화(preliminary chat)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도 역시 조건 없는 예비회담에 대해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예비회담이란 본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진행되는 법이다. 백악관이 그처럼 본회담과 예비회담을 구분하여 순차적으로 추진하려는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 것은 자칫 결렬되기 쉬운 조미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의사표명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발언에서 노어트 대변인은 앞으로 조미예비회담이 성사되는 경우 조선의 비핵화 문제가 회담의제로 정해질 것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중얼대는 횡설수설이다. 조선은 비핵화 문제를 의제로 삼으려는 회담은 무조건 거부하겠다고 이미 여러 차례 언명하였으며, 백악관도 조미회담에서 자기들이 비핵화라는 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회담이 즉각 결렬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펜스 부통령과 노어트 대변인은 조미예비회담에 대해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각각 언급하였으나, 백악관이 조미예비회담을 언제쯤 조선에게 공식적으로 제의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조미예비회담을 개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백악관이 시간을 질질 끌만한 처지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백악관이 조미핵대결에서 패하여 최악의 곤경에 빠졌으니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릿저널> 2018년 2월 8일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이란을 압박하고 있다고 떠들어대면서도, 막 뒤에서는 이란에게 세 차례나 협상을 제의하였는데, 이란은 미국의 협상제의를 모조리 거부하였다고 한다. 핵무기를 갖지 못한 이란에게도 그런 수모를 당하며 협상을 애걸해야 하는 미국이 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에게 협상을 애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런 사실은, 최악의 곤경에 빠졌으면서도 제국의 체면과 위신을 유지해보려고 거드름을 피우며 최대압박공세니 뭐니 하는 허장성세에 매달리는 백악관의 정치연극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면, 백악관이 조선에게 예비회담을 제의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백악관이 조선에게 예비회담을 제의하더라도, 조선이 그 제의를 받아줄지 아니면 이전처럼 또 다시 외면해버릴지 예견하기는 힘들다. 조미예비회담 개최문제는 백악관이 성의 있는 태도로 예비회담을 제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진정성 문제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5. 불변의 전략 추진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과 미국이 예비회담을 거쳐 본회담(담판)으로 나아가는 씨나리오는 이미 18년 전에 실현된 바 있다. 2000년 3월 8일부터 15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조미차관급회담이 진행되었고, 7월 28일에는 타이 방콕에서 조미외무장관회담이 진행되었다. 백남순 당시 조선 외무상과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그 회담에 참석하였다. 조미외무장관회담의 결정에 따라 2000년 9월 27일부터 10월 2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조미차관급회담이 진행되었으며, 2000년 10월 9일부터 12일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명을 받은 조명록 특사가 백악관을 방문하였다. 

 

당시 조선과 미국은 예비회담에서 무엇을 합의하였던가? 2000년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된 조미공동코뮈니께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는 문장이 들어있다. 

2000년 당시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조선은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미사일발사 유예조치를 백악관에 통보하였고, 그런 유예조치에 상응하여 백악관은 대조선관계개선을 추진하기로 공약하였다. 

조선이 미사일발사 유예조치를 발표하고, 그에 상응하여 백악관이 대조선관계개선을 공약하였던 2000년 10월 12일에서 11일이 지난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접견을 받았는데, 바로 여기까지가 조미예비회담 진행과정이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00년 10월 2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 있는 백화원 국빈관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을 접견하고 베푼 만찬에서 축배를 드는 장면이다. 미국 뉴욕에서 조미차관급회담이 진행되었던 2000년 3월 8일부터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10월 25일까지 약 7개월 동안 조선과 미국은 예비회담을 진행하였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올해 조미예비회담이 다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은 2000년 진행기간보다 짧아질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미본회담(조미담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12월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당시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을 진행하려는 것이었으나, 워싱턴의 반대파가 그의 평양방문을 가로막는 바람에 조미정상회담은 불발되었다. 만일 빌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하여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더라면, 조선은 미사일발사를 유예하는 게 아니라 중지하고, 그에 상응하여 백악관은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하였을 것이다. 

 

위에 서술한 2000년 조미회담경험을 살펴보면, 오늘 조미예비회담과 조미본회담이 열리는 경우, 어떤 합의가 도출될 수 있는지 예견할 수 있다.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고, 백악관은 대조선제재조치를 최대로 확대해놓은 조건에서 조미예비회담이 성사되면,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시험발사와 핵시험을 유예한다는 것을 백악관에 통보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상응하여 백악관은 대조선제재조치를 전면적으로 해제하고 대조선관계개선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미예비회담 합의에 기초하여 조미본회담이 성사되면,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시험발사와 핵시험을 중지하는 포괄적 핵동결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되고, 그에 상응하여 백악관은 주한미국군 완전철수를 공약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바로 조미담판 씨나리오다. 

 

18년 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뒤에 미국과 담판하려고 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전략 및 대미전략을 계승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른 시일 안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미국과 담판하여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대를 이어 계승된,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불변의 전략이다. 올해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신년사에 그 불변의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사진 6> 

 

▲ <사진 6> 2018년 2월 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측 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북측 고위급 대표단 성원들로부터 보고를 듣고, 남북관계개선 추진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8년 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뒤에 미국과 담판하려고 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전략 및 대미전략을 계승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미국과 담판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대를 이어 계승된 불변의 전략이다. 올해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신년사에 그 불변의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8년 2월 13일 댄 코우츠(Daniel R. Coats) 미국 국가정보국장과 마익 팜페오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연방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조선이 핵무력을 보유한 목적이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 Jr.) 미국 태평양사령관도 2018년 2월 14일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확보하려는 목적(국가핵무력을 완성한 목적이라고 해야 옳다)은 체제를 수호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전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이제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이 청문회에서 공히 인정한 것처럼, 조선은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국가목표를 추구하고 있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목적도 한반도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미국과 담판하여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려는 목적도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대를 이어 계승된,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불변의 목적이다.

 

누구나 예감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예비회담이 성사되면, 정세변화는 급진전될 것이다. 남북해외 각계각층, 각당각파가 민족통일대축전에 총결집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고 조국통일의지를 고조시킬 것이며, 남과 북이 당국과 민간을 가릴 것 없이 각 부문에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70년 동안 지속되어오는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은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통일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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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부와 달성군이 낙동강서 벌이는 황당한 탐방로 공사

100억 예산 투입해 천혜의 자연자원 망쳐... "하천 순찰·산책로" 주장

18.02.19 10:23l최종 업데이트 18.02.19 10:23l

 

천혜의 자연자원이 망가지고 국민혈세가 탕진되는 공사의 대표적인 예가 4대강사업이었다. 4대강사업으로 국토의 혈맥과도 같은 4대강이 인공의 수로로 전락하고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갔으며 천문학적인 국민혈세마저 날아가버렸다.

4대강사업은 국민적 공분을 산 대표적인 환경파괴 사업으로 지금 감사원의 집중 감사를 받고 있으며, 4대강을 재자연화하라는 국민적 요구에 의해서 그 첫 조치로서 4대강 수문개방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형국에 또다시 낙동강에서 4대강사업식 하천공사가 대구 달성군과 국토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어 또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인공시설물에 대한 국토부의 옹색한 해명

바로 국토부(대구지방국토관리청)과 대구 달성군이 낙동강변 천혜의 자연자원인 화원유원지 화원동산 하식애 앞으로 '국가하천 유지관리용 낙동강변 다목적도로건설사업'이란 명목으로 탐방로 조성사업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달성군이 화원동산 하식애 앞 낙동강 안쪽으로 강철 파일을 박아 탐방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  대구 달성군이 화원동산 하식애 앞 낙동강 안쪽으로 강철 파일을 박아 탐방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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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을 통해 대구에서 원시적 자연식생이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하식애의 생태와 경관을 망치고 있다. 더구나 생태적으로 뿐 아니라 경관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업에 100억원이라는 거액의 국민혈세(대구지방국토청 30억원, 대구 달성군 70억원을 투입하는 매칭 사업)까지 투입되고 있다.  

특히 국가하천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국토부가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수십억원의 예산까지 투입했다. 국토부가 이 사업을 허용하면서 내세운 목적은 '순찰'. 그러나 이 설명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 사업의 진짜 목적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국토부 산하 대구지방국토청 담당자는 "하천 순찰용"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화원동산 전경. 강변으로 강철파일을 박은 흔적들이 보인다. 그 라인으로 탐방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식애의 생태계와 경관을 망치는 공사가 아닐 수 없다.
▲  화원동산 전경. 강변으로 강철파일을 박은 흔적들이 보인다. 그 라인으로 탐방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식애의 생태계와 경관을 망치는 공사가 아닐 수 없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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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은 화원동산의 하식애 부분 즉 절벽 구간으로 길이 없는 곳이다. 낙동강과 하식애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자 물길이 들이치는 수충부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이런 곳에 없는 길을 만들어내면서 '유지관리'라는 명분까지 붙여 고작 이유를 단 것이 순찰용이란 해명이다. 원래 길이 없어 사람도 다니지 못하던 곳에 순찰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홍수방어라는 하천관리 기본도 어긴 국토부

더구나 이곳은 수충부로서 홍수 등의 큰물이 지면 거센 물길이 부딪혀 어떠한 구조물도 견디지 못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 탐방로 공사를 허용하고 예산까지 투입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홍수방어라는 기본적인 하천관리 매뉴얼과도 배치되는 일이다.

 지도만 보더라도 탐방로 공사 현장이 얼마나 엉터리 공사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사업을 허가하고 예산까지 보탠 국토부는 어느 나라 국토부인가? 4대강사업으로 국토파괴부란 비아냥을 듣고 있는 국토부가 국토하천 관리에서 손을 떼야 하는 이유다.
▲  지도만 보더라도 탐방로 공사 현장이 얼마나 엉터리 공사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사업을 허가하고 예산까지 보탠 국토부는 어느 나라 국토부인가? 4대강사업으로 국토파괴부란 비아냥을 듣고 있는 국토부가 국토하천 관리에서 손을 떼야 하는 이유다.
ⓒ 다음지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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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인제대 토목공학과 박재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크게 우려했다.

 

"정말 위험하다. 이런 시설물은 홍수 나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곳에 어떻게 탐방로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 또한 탐방로의 미래에 낙제점을 주었다.

"강물의 흐름상 그 탐방로 안전하지 못하다. 집중호우시 낙동강의 불어난 강물이 탐방로를 치고, 휩쓸려온 덤불들이 저 탐방로 교각에 엉키면서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지난 2002년 8월 말 태풍 루사가 침공한 화원동산의 모습. 탐방로가 예정된 구간이 강한 강물에 휩쓸리고 있다.
▲  지난 2002년 8월 말 태풍 루사가 침공한 화원동산의 모습. 탐방로가 예정된 구간이 강한 강물에 휩쓸리고 있다.
ⓒ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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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부가 도대체 국가하천을 관리할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국가하천을 관리할 것이면 국토부는 국가하천 관리에서 손을 떼는 것이 옳다. 가뜩이나 국토부는 4대강사업을 강행한 주무부서로서 국민들로부터 '국토파괴부'란 비아냥까지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사업 후 똑같은 행보를 보인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천혜의 자연자원을 망치고 있는 대구 달성군

이 문제투성이 사업에 있어 대구 달성군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화원동산 하식애는 천혜의 자연자원으로 대구 달성군이 '개발'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식물사회학자 김종원 계명대 생물학과 교수는 하원동산 하식애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화원동산 하식애는 대구에서 원시적 자연식생이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곳으로, 대구광역권에서 가장 자연성이 높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희귀 야생식물자원 보존 창고로 모감주나무, 쉬나무, 팽나무, 참느릅나무, 참산부추 등 인공으로 식재하지 않는 잠재자연식생 자원의 보고다. 특히 모감주나무군락이 유명한데 산림청은 모감주나무를 취약종으로 분류 지정보호 대상 115호로 보호하고 있다."
 

 화원동산의 모감주나무군락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  화원동산의 모감주나무군락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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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동산의 모감주나무에 앉아 쉬고 있는 개똥지빠귀의 모습. 화원동산과 그 인근에는 텃새와 철새를 비롯한 다양한 새들이 찾아온다.
▲  화원동산의 모감주나무에 앉아 쉬고 있는 개똥지빠귀의 모습. 화원동산과 그 인근에는 텃새와 철새를 비롯한 다양한 새들이 찾아온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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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곳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서 야생동물의 중요한 은신처이기도 하다. 김종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하식애의 생태적 기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곳은 달성습지를 오가는 야생동물의 피난처나 휴식처로 기능을 하는 중요한 거점이다. 조류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서식처이다. 특히 지형적 특성상 이동철새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거점이 아닐 수 없다."

공사를 즉시 중단하고, 책임자 처벌해야

뿐만 아니다. 이곳은 경관적으로도 중요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은 예로부터 '배성10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곳이다. 오죽하면 신라 경덕왕이 이곳의 풍광에 빠져 이 일대를 '화원'이라는 칭했을까. 석양이 질 무렵 이곳의 경관은 낙동강의 그 어떤 곳의 낙조보다 아름답다.     
 

 철새 파일이 박힌 낙동강변에 천둥오리와 흰뺨검둥오리와 물닭 같은 다양한 철새들이 놀고 있다. 이곳에 탐방로가 놓이고 사람이 드나들면 이들은 더이상 이곳을 찾을 수가 없다.
▲  철새 파일이 박힌 낙동강변에 천둥오리와 흰뺨검둥오리와 물닭 같은 다양한 철새들이 놀고 있다. 이곳에 탐방로가 놓이고 사람이 드나들면 이들은 더이상 이곳을 찾을 수가 없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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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로 조성 현장 위로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 이처럼 달성습지에는 다양한 철새들과 텃새들이 살고 있다.
▲  탐방로 조성 현장 위로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 이처럼 달성습지에는 다양한 철새들과 텃새들이 살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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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태적 경관적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곳에 강물 위로 쇠말뚝까지 박아서 흉측한 인공의 구조물을 만든다는 것은 이곳의 생태와 경관을 깡그리 망치는 행위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 사업을 전해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게다가 "이런 기막힌 사업에 국민혈세 100억원까지 투입해서 공사를 벌인다는 것은 심각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우려와 주장은 국토부와 달성군이 지금 즉시 이 사업을 중단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천연 자연자원을 보호할 것인가, 4대강사업식 하천공사를 강행해 비난을 자초할 것인가? 국토부와 대구 달성군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이다.

한편, 대구 달성군은 이 사업의 목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주민 편의를 위한 산책로 및 자전거도로 조성 그리고 친수공간을 활용한 인간과 환경, 문화의 조화 및 녹색성장"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4대강사업은 우리 국토에 참으로 몹쓸 짓을 한 대표적인 사업입니다. 천문학적인 국민혈세까지 탕진을 했지요.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4대강사업식 하천공사가 끊임없이 복제된다는 것입니다. 국토부와 대구 달성군이 함께 벌이는 낙동강변 탐방로 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국민혈세만 탕진하면서 천혜의 자연자원을 망치고 말 이 사업은 반드시 철회되어야 합니다. 이 기사는 <평화뉴스>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낙동강#탐방로 공사#대구 달성군#화원동산#국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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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사 파견이후 북한의 다음 행보는?

<연재> 정창현의 ‘색다른 북한이야기’ (13)
정창현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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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9  06: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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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대표단의 일원에서 특사로 지위 변경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특사 자격으로 10일 청와대를 방문,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지속적인 노력과 북측의 호응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 북한의 ‘김여정 특사’ 카드는 파격적이었고, 단번에 정세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과거와 달리 공식 특사 파견을 통해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 주목된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북측 고위대표단으로 온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2월 10일 청와대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공식 특사’로 지위가 변경됐다. 2005년 남북공동행사의 당국대표단으로 간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정부의 특사’로 지위가 변경돼 회담한 것과 유사한 형태다.

김여정 특사는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구두로 문재인 대통령 평양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이른 시일 안에 만날 용의가 있다”며 “편한 시간에 북한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나가자”고 사실상 정상회담 수락의사를 밝히고,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간에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미국과의 대화에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북측이 북미대화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이번 고위급 만남을 통해 남과 북은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 전반에 대해 폭넓은 논의를 진행했고, 한반도 평화와 화해의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을 활성화하자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무엇보다도 남과 북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개막식 참석, 면담, 오찬, 만찬, 공동응원, 공연 관람 등을 통해 소통과 신뢰를 쌓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무엇보다도 북한을 움직이는 노동당의 조직과 선전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는 김여정 제1부부장이 특사로 내려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박성철 제1부수상, 허담 대남담당 비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 등 과거 남북관계에서 북측의 ‘밀사’, ‘특사’로 내려왔던 간부들과는 비중이 전혀 다르다. 단순히 김여정 제1부부장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친동생이라는 특별한 관계 때문이 아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2016년 5월 노동당 7차대회에서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당 중앙위원에 선출됐고, 지난해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하면서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겸직해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과 선전분야를 총괄하는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남쪽을 방문함으로써 남북관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과거 1970년대 후계자로 임명된 김정일 비서가 당, 군, 남북관계 순으로 후계체계 마련에 나섰던 것을 연상케 한다.

김일성시대 때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가 노동당 조직부장에 기용되고, 김정일시대 때 매제인 장성택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기용된 경우 외에는 당의 조직과 선전분야에 인척이 등용된 사례가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도 국제부와 경공업부에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만큼 김정은 위원장이 김여정 제1부부장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증거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남북관계까지 영역을 넓힌 것은 상당히 의외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책임이 따른다. 그만큼 북한이 향후 안정적인 남북대화나 교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내부 강경입장의 목소리가 쉽게 나올 수 없게 됐다.

김정은 위원장 후속 조치 지시

   
▲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2일 고위급대표단을 만나 방남 결과를 보고받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실무적 대책을 지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으로서는 김여정 특사 파견이 갑작스럽게 결정됐기 때문에 특사 파견 배경과 성과를 총화(결산)하는 내부회의를 열고, 향후 대화 방향과 교류안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귀환한 고위대표단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금후 북남관계 개선 발전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해당 부문에서 이를 위한 실무적 대책들을 세울 데 대한 강령적인 지시”를 했다고 한다.

‘해당 부문’이 어느 부서인지, 실무적 대책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향후 남북 당국회담, 민간교류, 남북공동행사에 대비해 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당 부문에 외무성이 포함돼 있는지 주목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고위급대표단이 내려왔을 때 “여러 계기에 비핵화에 진전이 없는 한 남북관계의 본격적인 회복은 어렵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평양 초청을 받고 ‘여건 조성’을 언급했다.

따라서 북한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간 조기 대화가 필요하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할 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이를 맡고 있는 외무성이 어떤 실무 대책을 내놓을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북한은 우선 문재인 정부가 제안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군사당국회담 등 당국간 회담을 준비하면서 남쪽에서 거론되는 대북특사가 가져올 제안에 대비하는 한편,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민간교류와 남북공동행사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직접 거론하고 서울시가 관심을 보여 온 경평축구를 비롯해 6.15와 8.15를 계기로 남북공동행사를 여는 문제가 가시화 될 것이다. 10.4선언에서 합의됐지만 성사되지 못한 남북 의원 교류차원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측 의원대표단이 서울에 오는 것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미국과의 ‘조기 대화’에 나설 가능성도 커졌다. 한국과 미국에서 거론되는 ‘탐색적 대화’가 북한에도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표면적으로 ‘미국과의 대화를 구걸하지 않겠다’라고 했지만 미국과의 ‘탐색적 대화’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피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미국은 연일 북한을 상대로 대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도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후 돌아가는 길에 “만약 대화의 기회가 있다면 그들(북한)에게 미국의 확고한 (비핵화) 정책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변화된 입장을 보였고,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북한과) 예비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탐색적 대화의 문을 열어뒀다.

특히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7일(현지시간)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 예고 동영상에서 ”(북한이) 내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를 귀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의 초청이 있을 경우 북한에 억류돼 있는 미국 시민 3명의 석방을 전제로 방북할 의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제재 완화 속에서 대화’를 원하는 북한, ‘최대한의 압박 속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미국 사이에서 어떻게 접점이 마련될 지가 관건이다. 물론 북미간의 ‘탐색적 대화’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남과 북 모두의 노력과 북측의 전향적 태도, 미국의 정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몇 달간 ‘탐색적 대화’의 조건을 두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직접 정상외교에 나설까?

   
▲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방한 기간 동안 축하객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빈축을 샀지만 돌아가는 기내에서 전향적 발언을 내놓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이 미국과의 ‘탐색적 대화’의 조건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기보다 ‘김여정 특사’ 파견과 같은 파격적인 카드를 내놓아 미국의 압박에 정면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가 아닌 외교공세다. 과거의 사례를 볼 때 이번의 외교공세는 외무성 차원의 소극적 대응이 아닌 파격적인 정상외교로 나타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성동격서(聲東擊西)식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회의적인 시각이 많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이미 2014년 하반기에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외교’에 관한 구상을 세운 바 있다. 2014년 10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용해 비서, 김양건 비서 등 ‘3인방’을 파견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 실패한 후 김양건 비서가 사망하고, 내부 ‘강경파’의 목소리 커지면서 이 구상은 유보됐다.

그러나 지금은 정세가 또 변했다. ‘김여정 특사’ 파견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김여정 특사’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었다면 이제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를 돌파하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나설 차례가 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북한과의 관계, 북한의 인식을 볼 때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외교에 나선다면 첫 번째는 북러 정상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으로서는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가장 좋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도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후로 북미대화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평양에 초청하는 카드를 것으로 예상되며, 이것이 성사되면 바로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중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를 북한은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북한이 언제, 어느 계기를 통해 비핵화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느냐는 것이다. 북한은 2016년 7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의 5가지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성명에서 북한은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며, 김 위원장의 영도를 따르는 노동당, 군대, 인민의 의지”라고 강조하면서 미국과 한국 정부에 비핵화를 위해 5개항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북한의 요구사항은 남한 내 미국의 핵무기 모두 공개, 남한 내 모든 핵무기 및 기지 철폐와 검증, 미국의 핵 타격수단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않는다는 보장, 북한에 대한 핵 위협이나 핵 불사용 확약, 핵 사용권을 가진 미군 철수 선포 등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와 미국은 북한의 이 제안을 흘려보냈지만 지금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북한 담당관을 지낸 미국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 스탠퍼드대 연구원은 북한 당국의 공식 성명에서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2013년 국방위원회 성명 이후 처음이라며 한국에 배치한 미국 핵무기의 투명한 공개, 미군의 핵타격수단을 다시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약속, 핵사용권을 쥔 미군의 철수 선포 등 북한의 요구들은 경험에 비춰보면 필요조건이 아니라 대화를 시작해보자는 공개적인 제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북한은 당시 성명 마지막 부분에 “이러한 안전담보가 실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역시 그에 부합되는 조치들을 취하게 될 것이며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에서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는 이 성명에 대해 주한미군의 철수만 부각해 “존재하지도 않는 핵 위협을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거나 주한미군 철수 등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 훼손을 시도하는 등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라며 즉각 거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북한이 ‘핵 무력의 완성’을 선포한 시점에서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며, 김 위원장의 영도를 따르는 노동당, 군대, 인민의 의지”라는 선언 자체가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북한이 ‘조선반도의 비핵화’ 협상 의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우려하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5개항 조건’이라고 것도 대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사안들이다. 정세가 변화되기는 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외교’에 나선다면 ‘정부 성명’에서 밝힌 ‘비핵화’를 다시 언급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비핵화 다자대화의 선순환 구조 형성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미국과의 긴밀한 의견 조율을 통해 틸러슨 국무장관의 방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북 특사 파견을 통해 북한의 전향적 입장을 이끌어내는 한편 다양한 민간교류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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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랑 헬멧에 새겨진 ‘노란리본’ 비난한 MBC 김세의 기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2/19 10:56
  • 수정일
    2018/02/19 10: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정치적 표현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김 기자 본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셈
 
임병도 | 2018-02-19 08:59: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MBC 김세의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아랑 선수의 헬멧에 새겨진 노란리본이 올림픽 헌장을 위반하며,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함이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 ⓒ페이스북 화면 캡처

 

MBC 김세의 기자가 쇼트트랙 김아랑 선수의 헬멧에 부착된 ‘노란 리본’을 비난했습니다. 지난 18일 김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아랑 선수에게 묻고 싶다’라며 ‘세월호 침몰에 대한 추모인가, 박근혜 정부의 책임도 함께 묻기 위함인가’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극우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를 옹호하는 김세의 기자는 2007년에도 프로야구 이대호 선수의 글러브에 부착된 ‘노란리본’을 가리켜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며 ‘스포츠 현장에서 정치적 표현은 바람직한가’라는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MBC 김세의 기자가 운동선수들의 ‘노란 리본’을 문제 삼는 모습은 박근혜씨를 옹호하는 극우 친박단체의 주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정치적 표현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김 기자 본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김세의 기자는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림픽 헌장 50조에 따르면 그 어떤 정치적, 종교적 선전도 금지가 있네요’라며 ‘판단은 여러분들께서 해달라’는 글도 올렸습니다.

김 기자가 판단해달라고 했으니, 올림픽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벌어졌던 검은 장갑 퍼포먼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육상 200m 시상식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 선수와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육상 남자 200m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 선수는 금메달을 존 카를로스 선수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시상식에서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자 갑자기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번쩍 들었습니다.

두 선수의 행동은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경례 방식이자 미국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거나 같은 버스를 타지 못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했습니다.

시상식에서 스미스가 착용한 검은 장갑은 ‘우리는 흑인이다’라는 표현이었고, 검은색 양말은 ‘흑인의 가난’을 상징했습니다. 스미스가 손에 든 상자에 담긴 올리브 나무 묘목은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은메달리스트였던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도 미국 선수들의 인종 차별 항의에 동참하기 위해 “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 배지를 가슴에 달았습니다.

원래 검은 장갑은 스미스와 카를로스 모두 착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카를로스가 장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고 피터 노먼 선수가 ‘나눠서 끼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검은 장갑’은 세 선수의 마음과 아이디어가 합쳐진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명과 차별을 당했지만, 영원히 기억되는 선수들’

올림픽 시상식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인종 차별에 항의했던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다음날 올림픽 숙소에서 쫓겨났습니다. 두 선수는 미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의 비난과 토마토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로 미국육상연맹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피터 노먼이 사망한 10월 9일을 피터 노먼의 날로 기리자는 포스터 ⓒ구글이미지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도 인종차별 항의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육상계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특히 피터 노먼은 호주 신기록 보유자임에도 올림픽 출전에서 제외되는 차별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2006년 피터 노먼이 사망하자,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장례식에 참석해 관을 들었습니다. 2012년 호주 의회는 뒤늦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미국육상연맹은 피터 노먼이 죽은 10월 9일을 ‘피터 노먼 데이, 인권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피터 노먼은 지금도 ‘위대한 은메달리스트’,’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2등’으로 불리며 기억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애’

 

▲좌측부터 에딘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 1936년 베를린올림픽 제시 오언스, 손기정 선수 ⓒ구글이미지

 

올림픽과 정치의 연관성을 알기 위해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등장했던 세 명의 인물을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가장 먼저 에딘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입니다. 브런디지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퍼포먼스를 벌인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를 추방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브런디지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나치식 경례’를 했던 친나치 인사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0m, 200m, 400m계주, 멀리뛰기 종목에서 우승하여 4관왕을 달성한 선수는 제시 오언스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레이스’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우리도 잘 아는 손기정 선수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에서 사인할 때는 꼭 한국이름을 썼으며, 옆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습니다.

MBC 김세의 기자가 올림픽 헌장 50조를 운운하며 김아랑 선수의 노란리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히틀러에 협력해 놓고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오염돼선 안 된다”고 했던 에딘버리 브런디지가 떠오릅니다.

올림픽의 본질은 ‘인류애’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을 비난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스포츠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며 인류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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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상>
2018.02.18 13:38:05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이 완성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서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국방비를 일거에 4배 가까이 증액했고 군사 물자 생산도 7배로 늘렸다. 서독과 일본 등 과거 적국의 재무장을 단행했다. 

미국이 대대적 재무장에 나선 것은, 그것만이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면 압도적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청사진이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그러나 전시도 아닌 평시에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기적과도 같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 주도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시발점으로 간주한 미국 지도층은 국민들에게 전면적 재무장을 설득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재무장을 통해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을 미국의 경제권에 통합했으며,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을 봉쇄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진압했다.  

이후 미국은 영구 전쟁 국가로 변모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수백여 곳에 미군 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걸프전쟁 등을 수행했으며 아직도 중동지역에서 18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는 핵무기를 비롯해 폭격기와 미사일 등 전쟁물자 생산이 계속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는 전쟁경제로 전환됐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국가적 면모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전후 목표 구상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했고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부터 전후 목표를 구상하고 있었다. 정부가 아닌 재계 주도에 의해서였다.

2차 대전 발발 열하루만인 9월 12일, 미 재계의 두뇌집단(Brain Trust)으로 불리는 외교협회(CFR)가 국무부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들에 관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공동연구는 12월 6일 록펠러재단이 첫해 연구비 4만 5000달러 지원을 약속하면서 1940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연구'에는 주로 CFR 소속의 학자, 지식인, 언론인, 관료 등 100여 명이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45년까지 6년간 362차례 회의에서 682개 정책문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최고위 관리들에게 보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대통령 2부를 비롯해 모두 25부만 작성됐을 정도로 고도의 비밀 속에 진행됐다. 록펠러재단은 6년간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의 핵심 목표는 처음부터 미국 경제의 세계적 확장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과잉 농산물과 공산품, 그리고 과잉 자본이 진출할 해외 시장을 원했다. 수요 부족, 즉 시장의 결핍이 대공황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잉 상품과 자본을 받아들일 해외 시장을 확보해야 미국의 자유와 안보,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 등의 배타적 폐쇄적 경제권을 해체해야만 했다. 배타적 경제권으로 인한 세계 시장의 분열은 곧 2차 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연구'의 처방은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었다. 즉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세계 어디로든 진출할 수 있는 국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1899년 미국의 중국 시장을 목표로 발표한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을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모든 국가들이 공평하게 상품과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진다면 단연 미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이미 1차 대전 이후부터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농산물 생산국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세계 공산품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란 곧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을 의미했다.  

세계 패권 수립의 어려움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도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각자도생을 모색했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간 갈등의 결과라는 점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려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일례로 해방 후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바람직한 사회 체제로 꼽았다. 또한 역대 헌법 중 제헌 헌법이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규정하는 등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 것도 전쟁 직후의 세계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 프로젝트는 세 단계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다자주의적 무역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수립된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5년 세계무역기구 WTO로 개칭)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들 국제기구를 통해 자유무역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른 나라들은 자유무역을 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에는 미국 상품을 수입할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다. 국제제도만으로는 자유무역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마셜 플랜 

다음으로는 서유럽에 대한 대대적 경제원조였다. 유럽 재건 계획(ERP : European Recovery Program)이 그것이다.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이 하버드대 졸업 연설에서 제창했다는 이유로 마셜 플랜으로도 불린다. 1948년부터 51년까지 4년간 130억 달러를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해 자본주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상 실패했다. 우선 국내의 반대가 극심했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물론 국민들도 퍼주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당초 290억 달러로 책정됐던 원조 액수가 1949년 말 130억 달러로 반토막 난 것도 국내 반발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4년간의 경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달러 갭(달러 부족)이 해소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미국의 수출은 134억 달러로 대부분 서유럽에 수출됐는데, (마셜 플랜이 끝난 이후인) 1952년 유럽의 달러 보유액은 고작 2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상품을 사들일 달러가 부족한 서유럽의 선택은 자명했다. 계획경제, 배급경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시행하거나 소련 및 동구권과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을 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자본주의 경제, 미국 세력권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달러가 없는 서유럽은 친소련, 또는 적어도 중립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으로서는 결단코 막아야 할 사태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인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하고 이들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영국은 1949년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로 경제가 휘청거렸다. 또한 프랑스는 서독의 경제부흥에 한사코 반대했다. 숙적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1949년까지 서유럽의 통합 및 경제 부흥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당초 미국은 마셜 플랜을 제창하면서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해서도 경제 부흥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1947년 7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동구권 위성국가들에게도 미국의 지원을 받지 말도록 지시했다. 미국의 자금 지원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미소 간 대결은 첨예해진다.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세 번째 시도가 바로 대대적 재무장에 의한 세계 경제 재편이었다. NSC-68이 바로 그것이다. 

1949년까지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부활이라는 미국의 프로젝트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였다. 특히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소련과 중국, 유라시아의 두 공산 대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공산화의 유령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을 비밀리에 단행했다. 며칠 후 미국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9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핵실험을 공식 확인했다. 이로부터 열흘이 채 되지 않은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특히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핵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핵을 내세워 소련의 이해관계와 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으며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제 소련도 핵무기를 가진 만큼 더 이상 미국의 일방주의는 통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의 공산화도 문제였다. 당초 미국은 중국을 영국, 소련과 함께 전후 세계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상정했다. 이른바 '세계의 네 경찰관(four policeman)'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장졔스를 참석시킨 것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그랬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련 진영에 합류했으니 미국으로선 큰 타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의 안보와 행로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엘리트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훨씬 더 높게 봤다. 일본의 산업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숙련 노동자와 산업 능력을 가진 일본이 소련에 넘어간다면 공산권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될 터였다. 반면 미국에겐 뼈아픈 손실이 된다.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일본이 미국 진영에 남는다 해도 공산 중국이 버티는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대만,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를 통해 원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수입의 17%, 수출의 27%가 대중국 교역이었다.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고 중국 공산화로 중국 시장을 빼앗긴 일본 자본주의의 활로는 오직 동남아뿐이었다. 만일 일본이 동남아지역과 경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메울 길이 없었다. 그 경우 일본이 살 길은 공산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동남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문제는 동남아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뜨거웠다는 점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영국 식민지 말라야와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등에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독립을 선포했으며 1950년 초 중국과 소련은 이를 승인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라야에서는 중국계 시민들이 독립투쟁에 대거 참여했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방치할 경우 중국 혁명의 여파가 동남아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공산 아시아의 외딴 섬이 될 것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공산권과의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NSC-68 

미국으로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우선 1950년 1월 수소탄 개발에 착수했다. 과학계 자문위원들의 일치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데 따른 자신감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자신의 세계 전략을 마음 놓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핵 독점 덕택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이제 보다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고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부와 국방부에 소련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칠 영향과 이에 대한 대응 방침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단장 폴 니츠를 의장으로 한 연구 그룹은 4월 7일 NSC-68을 작성해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다. 
 

▲ NSC-68 보고서 ⓒTruman Library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한 목표와 계획에 관한 국무 및 국방 장관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소련이 세계 정복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소련은 이전의 패권 추구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전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의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됐으며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 정책은 공허한 허풍이 될 뿐"이라고 밝혔다.

이제까지 소련과의 냉전이 정치외교적 대결이었다면 앞으로는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니츠는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강조했다. 

"우리가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고 제공권을 장악했을 때, 오직 그때에만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억지할 수 있다"

미국이 말하는 억지 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즉 소련이 미국 정복을 위해 핵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핵전력에 대한 니츠의 믿음은 거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의 고비마다 강경한 군사 대응을 주도했던 그는 1979년 소련과의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력의 최고 단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낮은 단계의 모든 군사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전쟁, 베를린봉쇄,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전략핵무기의 우세 덕택에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니츠는 핵전력은 물론이고 재래식 전력의 대대적 증강을 촉구했다. 서유럽에 대한 미 지상군 파병도 요구했다. 미국의 재무장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군사지원과 경제원조, 공산진영에 대한 비밀공작과 심리전 등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모든 수준의 군사력에서 소련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세계 정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자체 방위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잘 무장돼 있고 "고도의 준비 태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 능력은 서유럽 침공, 노르만디 상륙과 같은 서방측의 반격을 저지하고 영국 공습, 그리고 중동 진출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군사력이 남아돌아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 돌리기 용 침공"을 할 수 있으며 이미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소련은 1950년 당시 미국 핵 공격을 위한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소련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개발한 것은 50년대 중반이었고 1957년 이후에야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1950년 중반 소련 보유 원자탄은 5개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은 299개를 갖고 있었다. 원자탄 탑재 폭격기는 264대나 됐으며 미국 본토는 물론 알래스카, 캐나다, 아조레스, 영국, 아이슬란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오키나와 등에 발진 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츠가 소련의 군사적 의도와 능력을 극도로 과장한 것은 NSC-68의 처방, 즉 미국 및 동맹국의 대대적 재무장을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니츠는 소련이 의도적으로 핵 공격을 가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에 따른 외교적 주도권 와해를 우려했다. 미국 당국자들을 당혹케 한 문제의 근원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에 따른 힘의 공백을 소련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서의 자급자족 경제와 계획 경제의 증가, 공산당의 성장, 그리고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을 두려워했다. 

달러 갭, 유사회경제적 혼란에 따른 유럽 통합의 부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 베트남 호치민의 압도적 인기 등 제3세계의 탈식민화 열풍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 불리한 상황들이 쌓여가면서 소련이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했다. 핵능력을 확보한 소련이 보다 대담한 외교 공세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대담해진 소련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게 니츠의 판단이었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니츠의 목표였다. 군사적 우위야말로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고 냉전을 수행할 다양한 옵션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니츠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소련 주위를 봉쇄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택의 자유는 소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비의 대대적 증액이 필요했다. 니츠는 내심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을 예상했으나 재무장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재정 적자를 극도로 꺼려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미국의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 니츠의 계산대로라면 400~500억 달러로 대폭 예산을 늘려야 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NSC-68이 제시한 재무장을 원칙적으로 승인하면서도 필요 재원을 산출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5월 초, '다음해 국방 예산은 기존보다 적어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니츠 등이 기대했던 국방 예산의 대대적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NSC-68의 실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니츠는 6월 7일 휴가를 떠났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군복 입은 케인즈', 미국을 만들다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하>

 

2018.02.19 09:54:43
 

 

 

 

딘 애치슨, 폴 니츠 등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을 원하는 세력에게 북한의 남침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NSC-68이 주장한 소련 군사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 음모가 현실화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음모가 드러난 이상 미국은 대응에 나서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전면적 재무장이 그것이다.  

사실 북한의 남침은 미국 지도자들의 '자유 세계' 수호 의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미국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중립주의를 부추기게 될 터였다. 서유럽과 일본은 소련, 중국과의 화해를 추구할 것이다. 반면 전면적 재무장과 함께 북한을 격퇴한다면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확실히 묶어둘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측근에게 한반도는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3년 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 맞서 싸운다면, 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그리스 좌파 세력의 민족해방 투쟁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트루먼은 "남한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면 소련은 아시아 각국을 차례차례 먹어치울 것...나아가 아시아의 적화를 방치한다면 중동지역이 무너질 것이며 그 다음은 유럽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한반도는 중요했다. 남한의 공산화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핵 개발과 중국 공산화로 고무된 소련이 그 힘을 팽창하려 하고 있으며 남한이 그 출발점이었다. 소련의 팽창은 주변부에서부터 막아야 했다. 남한이 무너지면 동남아가 무너지고, 주변부가 붕괴되면 서유럽, 일본 등 핵심 산업 지역도 미국 세력권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이 보기에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가 아니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게 해놓고 보다 중요한 지역, 예컨대 이란 등 중동지역 또는 서독이나 서유럽을 공격할 것으로 의심했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에 대한 군사원조를 증액했다.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서둘렀고 서독의 재무장을 결정했다. 서유럽에 미 4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미국의 동맹국들은 경제 재건보다 군사력 증강을 우선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련의 또다른 공격에 대한 대비였다. 소련으로 하여금 서유럽에 대해 한반도에서와 같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였다. 스탈린의 승인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극력 몸을 사렸다.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의 무력 봉기를 억제했고 그리스 좌파의 독립투쟁도 아예 외면했다. 그리스를 영국 세력권으로 인정한 처칠과의 밀약을 준수한 것이다. 

그랬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고, 마지못한 승인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이 이길 것으로 보았고 이에 따라 공산당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산당 승리 이후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어색한 사과를 해야 했다.  

다음으로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조선인 병사 2만 5000명이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노련한 전투원인 이들과 함께 남한을 공격할 경우 남한 인민들도 함께 봉기해 한 달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된 것도 스탈린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마지막으로 1950년 1월 '남한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 선언도 스탈린의 모험을 가능케 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 또는 미국 개입 전에 한반도 통일이 완수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애치슨 선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방위선이었다.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과 대만)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치슨은 만일 한반도에 대한 국지적 도발이 감행된다면 유엔의 집단 안보를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을 동원해 남한 방어에 나섰다. 미국의 개입에 스탈린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된 데 대해 겁을 먹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을 무서워했다. 코를 석자나 늘어뜨렸다. 그는 미국에 대해 문자 그대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NSC-68이 되살아났다. 급속한 재무장에 따른 재정 적자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서방진영 전체의 전면적 군사력 증강에 나서야 한다는 게 미국 지도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7월 19일 트루먼은 의회 연설을 통해 군사비 100억 달러의 증액을 요청했다. 우방국 원조 40억 달러, 핵무기 개발 예산 2억 6000만 달러도 요구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전쟁이 1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방비 규모는 기존의 4배로 늘려야 하며 1954년까지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9월 30일 NSC-68/2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결정한 것이다. 당초 북한의 남침에 대한 유엔 결의는 '국경의 원상회복'이었다. 즉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부터 미 국무부는 미국 주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구상했고 결국 9월 11일 북진을 결정한다.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국은 남한군을 앞세워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이는 미국의 대소련 전략이 봉쇄(containment)에서 반격(rollback)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미국에 치명적 타격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도의 통일은 중국, 소련이 감내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특히 건국한 지 1년밖에 안 된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넘어 중국까지 침공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5일 마오쩌둥은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10월 25일 남한군에 대한 첫 공세로 미국에 경고를 보냈으나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1월 28일 후방에 은신해 있던 중국군이 대대적 공세를 펼치면서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내몰았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중국과의 직접 군사 대결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당시까지 패배를 몰랐던 미군이, 삼류 농민군으로 깔봤던 중국군에 밀려 치욕적 후퇴를 해야 했다. 봉쇄에서 반격으로의 정책 전환이 파탄 난 것이다.

당황한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우리가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며 원자탄을 사용할 뜻을 밝혔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1일 미국을 급거 방문한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이를 극력 만류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최우선 관심 사항은 자신들의 방위였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소련이 침공할 경우 서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낭비였고 유럽을 지켜야 했다. 영국은 또한 미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결국 핵 사용은 일단 유예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2월 14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을 요청했다.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 완성 시기를 기존의 1954년에서 1952년 7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미국의 모든 경제력을 군사물자 생산에 쏟아 붓고 미군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도 대폭 증액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이 NSC-68/4로 작성됐고 이는 미국 재무장의 기본 계획이 됐다. 이날 열린 NSC 회의에서 애치슨 국무 장관은 전면적 재무장의 시급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12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나라,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협에 빠져 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며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5개월 전 북한만 비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이어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면서 이러한 "현존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기존 250만에서 350만으로 늘려야 하며,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유럽 동맹국들과 미국의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트루먼(오른쪽) 대통령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왼쪽)가 1950년 12월 4일 백악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뒤쪽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이 서 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1951년 1월 8일 연두교서를 통해서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련에 무너지면 핵심적 원자재의 산지들을 잃게 될 것인데 그중에는 원자탄의 원료인 우라늄도 포함돼 있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우리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세계 전략 추진을 위해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을 재무장해야 한다는 게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이었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트루먼 행정부의 목표가 아니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전면적 재무장이 목표였다. 한반도에서 처음 시도했던 반격 정책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봉쇄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한편 자유세계의 재무장에 의해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힘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향후 외교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 현지 사령관 맥아더가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1951년 1월 중순 맥아더는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에 20~30개의 원폭을 투하하며 중국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를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승리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으로의 확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승리보다는 향후 소련과의 세계적 대결에서 주도권을 보장할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결국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한다. 전쟁 도중에 최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의 승리냐, 자유진영의 재무장이냐 하는 문제는 전쟁 중 지휘관을 해임해야 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점이었다.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트루먼 행정부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인데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다니. 게다가 한반도가 아닌 유럽에 미군 병력을 파견하는 등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나토) 구축에 열을 올리다니.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12월 20일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나토 최고사령관에 임명했고 아이젠하워는 다음 해 1월 5일 유럽으로 떠났다)  

공화당 의회는 분노했고 대중들은 실망했다. 공화당은 중국 공산당과의 전면전을 통해서라도 중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는 개선장군처럼 미국에 돌아왔고 의회에서는 맥아더 해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NSC-68이 극비 문서였기 때문이다(NSC-68이 기밀 해제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애치슨 국무, 마셜 국방 장관과 브래들리 합참 의장 등 고위 관리들은 청문회에서 '중국으로의 확전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전면전을 치를 군사적 준비가 안 돼 있다. 따라서 조속히 전력을 증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유럽의 군사력 증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의회와 대중을 설득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세계 패권은 비로소 완성됐다. 그것은 대대적 군사비 투입에 의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 가능해졌다. 1950년 회계연도의 미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였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53년 회계연도의 국방 예산은 총 1556억 달러였다. 4배 늘어난 것이다.  

수소탄이 개발됐고 원자탄도 대폭 늘어났다. 미국의 원자탄은 1950년 299개에서 1955년 2422개로 늘어났다. 소련은 5개에서 200개로 늘었다. 1950년 6월에서 1953년 1월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은 7배로 늘어났다. 3개월 마다 8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가 생산됐다. 1950년 6월 21개 편대였던 전략폭격기는 1952년 6월 37개 편대로 증강됐다. 해외 100여 곳에 미군 폭격기의 발진기지가 건설됐고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동맹국에 대한 지원은 경제원조에서 군사원조로 바뀌었으며 액수는 2배로 늘었다. 경제원조에 대해서는 퍼주기라며 반발했던 의회와 국민들도 군사원조에는 찍소리 없이 수긍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부적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다.

애치슨은 1951년 1월 10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소련이 없다 해도, 공산주의가 없다 해도 전쟁으로 망가진 자유세계의 일부를 유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즉 미국의 군비 증강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자유세계의 결속과 경제 부흥을 위한 편법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 나아가 소련의 핵 보유와 중국 공산화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세력권에 묶어놓은 것과 함께 이들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경제 재건의 마중물이었다.  

1949년부터 침체에 빠졌던 미국 경제도(1948년 하반기 192였던 제조업 생산지수는 1949년 4월 179로 하락했고 실업자 수도 22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 수요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미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총과 버터', 즉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미국은 군사국가, 전쟁경제로 변모했다. 사실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뉴딜 정책 덕택이 아니었다. 2차 대전에 따른 막대한 전쟁 수요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2차 대전에 2950억 달러(현재 가치 약 3조 900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지출했으며 이중 17%인 501억 달러(현재 가치 6670억 달러)는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동맹국에 대한 식량, 석유, 무기 대여에 사용됐다. 렌드리스(Lend-Lease, 무기대여법)가 그것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전쟁 수요가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의 경제 부흥에, 베트남전쟁이 한국의 경제 재건에 기여한 바를 상기해 보라. 세계의 전쟁 물자를 거의 혼자 만들어낸 미국이 2차 대전의 전쟁 수요로 얻은 혜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 엄청난 군사 수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을 때 미국 경제는 과연 순항할 수 있었을까. 1945년 1140만이었던 미군 병력이 1947년에는 160만으로, 1945년 890억 달러였던 국방 예산이 1947년에는 190억 달러로 대폭 축소됐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 1000만개를 창출해야 하는 반면 (군사) 수요는 700억 달러 줄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는 침체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초 NSC-68을 구상했던 미국의 정책당국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 수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으로 세계의 주도권과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이는 끊임없는 군비 증강과 전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사실 1950년의 재무장은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을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6년 가까이 미국의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였다. 1951년에서 53년까지 3년간 국방 예산은 약 1556억 달러였다. 전쟁 기간과 거의 같은 규모의 군사비를 지출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비 지출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즉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실제 전쟁을 하거나 아니며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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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풍력, 떠다니는 발전소가 대안이다

육근형 2018. 02. 08
조회수 3390 추천수 1
 
구조물 물에 띄우고 케이블로 바닥 고정
경관 침해와 어업피해 막고 입지 제한 적어
 
Untrakdrover _1280px-Agucadoura_WindFloat_Prototype-1.jpg»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전면적인 부상형 해상풍력발전소. 포르투갈 아구카두라 해안 5km 지점에 설치됐으며 2MW 용량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2030년이 되면 우리가 쓰는 전기의 20%를 재생에너지가 공급하게 된다. 지난 연말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놓은 ‘재생에너지 2030 이행계획’의 목표치이다.1) 계획에서 정부는 2016년 기준으로 7% 수준인 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을 2030년까지 현재의 3배인 20%로 늘리겠다고 한다. 설비용량으로는 5배 가까운 수준이다. 현재의 재생에너지의 발전량 비중을 달성하는 데 15년이나 걸린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그 3배나 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림> 재생에너지 발전량 확대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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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산업통상자원부, 2017,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그에 비하면 유럽 국가들의 최근 재생에너지 성장률은 놀라운 수준이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이 2010년 16.7%에서 2016년에는 29.3%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영국은 같은 기간 6.8%에서 24.7%로 네 배 가까이 급증했다. 원전이 많은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비중이 크게 늘진 않았지만, 이미 전체 발전량의 17.3%와 15.9%(2016년 기준)를 차지한다. 적어도 7% 수준인 우리보다 배 이상 높다.
 
<그림> 주요 국가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 2010년 vs.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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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산업통상자원부, 2017,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2030년 태양광과 풍력이 원전 약 30여 기를 대신 
 
정부는 늘어나는 재생에너지의 대부분을 태양광과 풍력에서 얻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재생에너지의 58%를 폐기물이 공급했다. 열병합발전소에서 폐기물을 태워 전력을 생산하고 난방용수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2030년에는 폐기물의 비중이 6%로 줄어들고, 태양광(57%)과 풍력(28%)이 85%를 차지하게 된다. 설비용량으로 보면 태양광이 36.5GW(기가 와트, 1기가와트는 10억W), 풍력이 17.7GW 수준이다. 최근 원전 한 기가 1.4GW의 용량임을 고려하면, 태양광과 풍력이 약 30여기의 원전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길을 잃은 풍력, 바다로, 바다로
 
04783732_P_0.JPG» 백두대간 한가운데인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 대관령삼양목장의 풍력발전기. 육상풍력발전은 산림생태계 파괴 문제를 안고 있다. 대관령/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더욱 안전하고 환경에도 해가 덜한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등 의미 있는 사회적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양광이나 풍력 역시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고, 시설 입지 자체를 지역민이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특히 풍력발전은 저주파 소음이나 경관 훼손이 문제가 되었다. 풍력터빈이 바람이 풍부한 산 능선을 따라 건설되면서 백두대간과 같은 핵심 생태축이 훼손된다는 것도 큰 문제다. 풍력발전에 대한 지역의 민원이나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응해 온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이를 두고 “산으로 간 풍력발전이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2) 
 
지난 연말에 발표된 ‘재생에너지 2030 계획’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대부분의 풍력발전을 해상에서 이룩할 전망이다. 해상풍력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약 14GW(2016년 기준)에 달하는데, 불과 5년 전인 2011년에 4GW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거침없는 성장세이다.3) 유럽이 전 세계 해상풍력 발전설비용량의 88%인 12.6GW를 차지한다. 영국이 5.1GW, 독일이 4.1GW, 덴마크 1.3GW, 네덜란드 1.1GW로 4개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처음 발전을 시작한 탐라 해상풍력 30MW(3MW, 10기)가 있고, 미국은 블록 섬(Block island)의 30MW급 (6MW, 5기) 풍력단지가 유일하다. 
 
<그림> 전 세계 해상풍력발전 시설용량 누적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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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GWEC, 2017, Global Wind 2016 Report, p.61.
 
해상풍력발전, 대형터빈 개발, 대단지 확대, 해안에서 먼바다로 이동
 
DanishWindTurbines.jpg»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의 해상풍력발전 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우리가 해상풍력으로 눈을 돌리기에 앞서 해상풍력 중심지인 유럽에서는 어떤 일이 논의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내 해상풍력을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개별 풍력발전기(터빈)의 용량이 커지고 있다. 풍력터빈은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2MW 용량의 터빈이 사용됐다. 2016년에는 평균 4.8MW 수준까지 커졌고, 8MW 용량의 터빈에서 전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그 용량이 두 배까지 늘어난다는 전망4)도 있다. 
 
<그림> 풍력 터빈기 평균 용량(위)와 크기(아래)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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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위) WindEurope(2017), p.27, (아래) http://www.telegraph.co.uk/business/2017/05/16/worlds-largest-wind-turbines-may-double-size-2024/ (검색일: 2017.1.25.)
 
둘째, 풍력단지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6년에는 단지 평균 크기가 46.3MW였으나, 2016년에 건설된 해상풍력단지는 379.5MW까지 늘었다. 혼시 원 계획(Hornsea One Project)처럼 개별단지의 총 용량이 1.2GW에 달하는 것도 등장한다. 현재 계획된 것까지 포함하면 풍력단지의 규모는 평균 1GW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마지막으로 풍력터빈이 갈수록 더 깊고, 먼바다에 설치되고 있다. 2000년대만 해도 풍력터빈은 수심 20m 이내, 해안에서 20㎞ 이내에 설치되었다. 2010년 이후 수심 20m, 해안에서 20㎞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는데, 2015년 이후에는 수심도 깊어졌지만 해안에서 약 40㎞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5)
 
<그림> 해상풍력터빈의 설치 수심과 해안에서의 거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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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 Ventus supplied by Adwen in the North Sea-1.jpg» 북해에 설치된 대규모 풍력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상풍력에 대한 여론의 지지, 그러나 경관 침해에 대한 우려 갈수록 커져
 
최근 해상풍력 단지가 더 깊고, 더 먼 바다로 이동하는 것은 왜 그럴까? 연안에서 더 가깝고 얕은 수심에 설치하면 건설비용이 줄어드는 데도 말이다. 유럽에서는 경관 침해가 풍력단지의 입지 선정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유럽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해상풍력단지인 뉘스테드(Nysted)와 혼스레브(Horns Rev.) 풍력단지에서 풍력터빈이 경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지역민의 태도를 비교한 연구를 보면6), 기본적으로 해상풍력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이 응답자의 80%에 달한다. 그런데 이와 함께 해상풍력단지의 경관 침해 문제를 줄이기 위해 외해로 풍력단지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응답자의 50% 이상이다. 풍력단지를 외해로 이동하는 데에 대한 지불의사액을 물어본 결과, 우리 돈으로 12만원에서 22만원까지 지불의사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7) 해상풍력은 필요하지만 해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다. 
 
풍력발전에 기술력을 갖춘 미국의 경우 의외로 해상풍력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유럽처럼 국가가 풍력에 보조금을 제공하지도 않을뿐더러, 해운이나 어업과의 이해관계 충돌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도 경관 침해에 대한 우려가 크다. 2011년 뉴욕주 18㎞ 떨어진 앞바다에 지정한 풍력에너지구역에서의 사업도 여의치가 않게 되면서, 작년에는 다시 30㎞ 이상 떨어진 먼바다에 풍력단지를 설치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8) 9)
 
해상풍력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유럽이나 기술력이 있는 미국의 사례를 보면 풍력발전단지는 어업이나 경관 침해와 같은 이해관계자와의 협의 문제로 난항을 겪거나 적어도 그 대안으로 점점 더 먼 바다로 이동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에서 불과 1㎞ 내외에 설치되는 국내 해상풍력단지
 
05853479_P_0.JPG» 탐라 해상풍력 단지의 모습. 해안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허호준 기자
 
반면 국내에서 설치된 해상풍력발전은 해외 사례에 비춰볼 때 초기 단계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유일한 해상풍력인 탐라 해상풍력단지는 해안에서 불과 1㎞ 이내에 위치하고, 가까운 곳은 해안에서 500m 거리에 있다. 이 정도면 경관 침해는 사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수준이다. 3MW 용량의 터빈이 날개 높이까지 합하면 약 100m 정도이니 해안에서 보는 풍력기의 거리와 높이의 비는 약 5:1 정도다. 이는 55인치 티브이(122㎝ × 68㎝)를 3.4m 떨어져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더욱이 풍력단지의 폭이 1㎞가 넘으니 가로세로 비율은 티브이보다 넓다.
 
탐라 해상풍력발전 단지의 인근 주민들이 경관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처음에는 바다 위 풍력단지가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고, 실제 환경영향평가서에도 풍력기가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최근 인근의 다른 곳에 해상풍력단지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경관에 대한 우려는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다. 탐라 풍력단지에서 직선거리로 20㎞ 남쪽에 계획된 대정 해상풍력단지는 경관 침해의 우려와 지역주민의 반발 등으로 도의회 심의가 두 차례나 보류되었다. 심의 보류의 사유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에도 지구 지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부유식 해상풍력발전기,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라
 
Lars Christopher_1280px-Hywind-1.jpg» 하이윈드 해상 풍력발전단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제주도의 탐라나 대정 풍력단지 모두 해안에서 2㎞만 벗어나도 수심이 40m 이상 급격히 깊어진다.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수심이 낮은 서남해안이라 하더라도 풍력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암반까지 파이프를 박아 넣어야 한다. 수면에서 높이 100m 이상 되는 큰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기반 시설 작업에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기둥 설치 방식보다 저렴한 부유식 풍력발전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 해저 수십 미터에 기둥을 박는 대규모 공사가 아니라 해저에 고정 케이블만 걸어 두는 부유식 풍력발전은 이미 작년 스코틀랜드 해상에 설치되었다.10)
 
부유식 풍력발전기는 수심이 깊은 곳에도 설치할 수 있다. 아직은 해저에 고정하는 케이블이 필요하지만 기술 개발에 따라 완전 부유식 역시 개발될 전망이다. 우리나라처럼 연안해역에서 어업이 활발하고, 바다로 몇 킬로미터만 나가면 수심이 수십 미터 이상 깊어지는 조건에서는 기둥을 박고 어선의 출입을 통제하는 풍력발전 방식이 쉽지 않다. 특히 경관 침해 문제 역시 유럽이나 미국처럼 갈수록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좀 더 먼 바다에서 풍부한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부유식 풍력발전기의 도입이 입지 확보의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다. 
 
744px-Floating_loose_mooring_catenary_plain.svg.png» 부유식 해상 풍력발전기 개념도. 발전기 몸체는 물에 떠있고 해저 케이블로 고정돼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상풍력발전 확대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과 협의 절차 확보 필수
 
정부의 계획처럼 해상에서 풍력발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문제와 의사결정과정에서 드러난 문제 모두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풍력터빈의 대부분을 외국 회사에서 수입하고 있고, 대안이 될 수 있는 부유식 해상풍력에 대한 기술도 일천하다. 외국 기술로 덩치만 키워봤자 경제성은 물론 해외 진출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해상풍력에서 기술 개발의 필요성과 방향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바다를 이용하는 여러 이해관계자와의 협의 과정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부의 2030 계획에서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서남해안이나 제주의 풍력단지 개발 과정에서 지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했는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나오고 있다. 다양한 대안을 실질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정하면 정말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합리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이해관계자들이 제시하는 문제 역시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보고, 영향 여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미국만 해도 뉴욕주의 해상풍력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20건의 분야별 연구를 진행했다.11)
 
정부의 재생에너지 2030 계획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목표 이상으로 꾸준하고 치밀한 이행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정부는 4대강 사업을 하던 정부와는 다르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육근형/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연구위원

1) 산업통상자원부,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안, 2017.12.20

2) “풍력발전은 왜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하나” http://kfem.or.kr/?p=150771 (검색일: 2018.1.15.)

3) GWEC, 2017, Global Wind 2016 Report, p.61.

4) http://www.telegraph.co.uk/business/2017/05/16/worlds-largest-wind-turbines-may-double-size-2024/

5) http://windmonitor.iwes.fraunhofer.de/windmonitor_en/4_Offshore/2_technik/2_Kuestenentfernung_und_Wassertiefe/

6) Landenburg J., 2009, Visual impact assessment of offshore wind farms and prior experience, Applied Energy 86, p.380-387. 

7) Danish Energy Authority, 2006, Offshore Wind Farms and the Environment–Danish Experience from Horns Rev and Nysted, p. 39.

8) https://www.workboat.com/news/offshore/feds-outline-new-york-offshore-wind-energy-zone/

9) https://www.nyserda.ny.gov/All-Programs/Programs/Offshore-Wind/New-York-Offshore-Wind-Master-Plan/Area-for-Consideration

10) 노르웨이 회사인 스타토일(Statoil)사가 주도하는 ‘하이윈드(Hywind)’ 프로젝트 

11) https://www.nyserda.ny.gov/All-Programs/Programs/Offshore-Wind/New-York-Offshore-Wind-Master-Plan/Studies-and-Surv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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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에도 공사장 찾아가 나 좀 써달라는 아버지

50년 막노동은 왜 '경력'이 될 수 없을까

18.02.18 11:41l최종 업데이트 18.02.18 11:41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의 아버지는 평생 막일을 하며 살았다.

그것은 직업도 아니었고, 경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돈도 되지 못했다. 그저 노동이었다.
회사에서는 10년 20년 시간이 지나면 호봉이 오르고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오르지만, 50년을 넘게 공사장에서 일한 아버지는 오를 직급도 호봉도 없었다. 50년 전도 지금도 그저 일당을 받고 막일을 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아버지는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떴고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쓰러져 잠들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8시에 잠이 들었다. 일요일, 공휴일에 쉬는 것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려 공사를 할 수 없는 날에 '어쩔 수 없이' 쉬었다. 아버지에게 휴일은 하늘만이 점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래도 공사장에 나가 오늘은 공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집으로 왔다. 그러니까 월화수목금토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 4시에 공사장을 향했다.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탕을 치고 집에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오는 날과 똑같이 지쳐있었다. 자신이 하루 노동을 하지 못해 벌 수 없었던 일당 8만 원의 무게는,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지칠 무게와 맞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했고 온몸을 써서 일 했으며 당연히 일찍 지쳤다. 노동, 밥, 잠으로 이어지는 그 단순했던 반복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 순환 속에서 자식 세 명이 자라났고 아내인 한 여자가 늙었다. 반복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이제 노동 할 곳이 없다   
 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습니다).
▲  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자료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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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노동조차 주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환갑을 지나 이제 일흔이다. 이제 남은 건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는 공사장과 몸에 밴 부지런한 습관들. 

아버지는 이제 노동을 할 곳이 없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다. 평생을 노동만 하며 살아온 아버지에게는 노동 이외의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 습관들은 일이 없는 지금도 새벽 4시에 눈을 뜨게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야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한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조차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루 종일 집안 대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아버지의 몸은 가만히 있으면 쉬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평생 노동을 습관처럼 한 탓이다. 

밥은 아주 빨리 씹지도 않고 단시간에 삼켜야 하며 몸은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무거운 것들을 등에 지어야 하며, 팔과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그곳이 공사판이 아닌 집안일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찰나의 순간들을 견디기 어렵다. 

공사장에서 이고 지었던 벽돌과 장비 대신 집안의 장롱과 냉장고를 등에 지고 옮겨내 쌓여있는 먼지들을 치운다. 넓지도 않은 18평 집안을 활보하며 그렇게 청소를 하고 가구들을 옮긴다. 

평생 공사판으로 출근했던 아버지는 이제 불러주는 곳이 없어 집을 공사판으로 만들어 노동을 한다. 참으로 지독한 습관적인 노동들. 그 50년의 노동이 만들어 낸 참혹한 습관들을 일흔인 아버지의 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런데도 하루가 길다. 갈 곳이 없고, 할 노동이 없다.

며칠 전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도 답답해서 집 앞에 단독주택 짓는데 가서 말했다. 나 좀 써달라고. 대뜸 몇 살이냐 물어보더라. 일흔이요 하니까 안 쓴다고 일흔은 안 쓴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하드라. 에라이! 하고 집에 왔다. 내가 그랬다."

'나 좀 써달라고' 그 한마디가 맴돌아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자료사진).
▲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자료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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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좀 써달라고' 그 한마디가 자꾸만 맴돌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50년 경력자인데 막일의 50년 경력은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겼다.

나는 아버지의 나이가 일흔이라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다. 평생을 노동했고 노동밖에 할 수 없는 아버지가 더 이상 그 노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비통할 뿐이다. 

못난 딸은 늙은 아버지가 더 이상은 그 노동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싶다가도, 이런 순간들을 마주 할 때면 무슨 노동이라도 하길 바라는 구차한 마음이 든다. 그 노동의 목적과 결과물인 딸은 이제 아버지에게 멋진 옷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술도 사드릴 수 있지만 노동을 하게 해 드릴 순 없는 노릇이다.

앙상한 아비의 팔과 다리가,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이, 냄새 나는 몸뚱이와 거친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귀가 그저 다 슬플 뿐이다. 마치 그것들이 아버지의 평생 노동의 결과인 것 같아서.

평생 반복했던 아버지의 노동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닐 진데, 그래서 일흔이 된 지금 그 누가, 무엇이, 나의 아버지의 평생 노동을 보상해 줄까?

아버지의 노동으로 나는 맛있는 걸 먹었고, 예쁜 옷을 입었고, 공부를 했고, 여행도 갔고, 술도 마셨고, 부끄럽게도 아버지의 그 노동을 원망하기도 했다. 참 못난 딸이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이 갓난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한 여자가 숙녀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노동을 했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무얼 보상 받았을까. 

아버지에게 노동은 평생을 지독히도 따라다녔던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아빠가 많이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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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안 했다" 간첩 조작 수사관, 뻔뻔함 언제까지?

재일 동포 간첩 사건 가담한 전직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 씨 재판
2018.02.17 12:15:34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여든 노인의 입에서는 끝끝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삿대질 속에서 그는 유유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간첩 조작 사건 찍어낸 베테랑 수사관 

노인의 이름은 고병천. 1939년생. 보안사령부 수사관 출신. '방첩대' 시절부터 시작해 줄곧 한 길만 파기를 38년. 보안사에서 그는 '베테랑'으로 불렸다. 다름 아닌 간첩 조작의 베테랑. 다른 부서에 비할 데 없이 '실적'이 좋았던 학원반 내에서도 고 씨의 솜씨는 단연 으뜸이었다. 30~40년 전, 숱한 청년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간첩으로 탄생했다.

당시 '가짜 간첩' 제1 목표물은 재일 교포 청년들이었다. 북한에 대한 경계가 철저한 한국 내에서는 일반 사람이 남파 공작원을 접촉할 기회라는 게 극히 드물었다. 그에 비해 재일 교포의 경우 그가 접촉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사람을 손쉽게 대남공작원으로 꾸며낼 수 있었다. 게다가 영사증명서 조작도 비교적 용이했다.  
 

▲보안사가 이종수 씨의 친척 '조신부'에 대해 오사카 영사관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 영사증명서. 실제 조신부의 직장은 조총련계 인물이 경영하는 나카야마(中山)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음에도 이 서류에는 버젓이 ‘나카야마 관광 주식회사에 근무한 바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종수

이런 이점을 교묘히 이용해 고 씨가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 재일 교포 유학생 이종수 씨 사건이었다. 

데모로 붙잡힌 친구에 대해 물어본다던 그들은 친구가 아닌 이 씨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북한에 다녀왔느냐", "북한에 다녀온 사람과 친하게 지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그는 "아니다", "없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그는 먼 친척인 '조신부' 이름을 댔다. 잘못한 게 없으니 사실대로 얘기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대답이 조작극의 단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뒤 수사관들은 조 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사장이 있는 '나카야마(中山)' 회사에 다닌다며 "조신부가 너를 대남공작원으로 포섭한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조 씨가 다니는 회사명은 '나카야마'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갖은 고문이었다.

고문받은 기억을 떠올리자면 한숨부터 나온다. 뺨 맞기, 물 고문, 전기 고문, 다리 사이에 몽둥이 끼우고 밟기, 통닭구이. 영화 <변호인>에 나온 그대로다. 수사관들이 얼굴에 주전자로 물을 붓고 "북한 갔다 왔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물 붓기를 4~5차례 반복한다. 그러다 기절하면 수사관들이 허위 진술서에 지장을 찍는다. 정신이 들면 수사관이 읊는 대로 자신이 북한에 갔다 왔다는 '소설'을 달달 외웠다. 영장 한 번 본 적 없이 그렇게 39일간 불법 구금됐다. (<프레시안> "30년 걸려 벗은 간첩 누명, 유우성은 운 좋다" 인터뷰 중)

고 씨로부터 고문을 받은 뒤 '가짜 간첩'으로 복역하는 대신 간첩 포섭 작업 등을 위해 강제로 보안사에서 근무했던 이도 있다. 책 <보안사>(김병진 지음, 이매진 펴냄)를 쓴 재일 교포 김병진 씨다. 김 씨는 감금이 끝날 때까지 봤던 인물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존재'로 고 씨를 꼽으며 책에 그와 관련된 일화와 어록을 전했다. 

몇십 분 지나자 몸집이 작고 나이는 사십 대 후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덕룡을 거느린 채 들어왔다. 그 사람이 앉자 이덕룡은 다른 의자를 끌어다가 그 사람 옆에 조수처럼 앉았다.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고 나이에 견줘 동안이었다. 고병천 육군 준위였다. 
 

▲<보안사>(김병진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정보기관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고병천은 마치 강의라도 하듯이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이곳은 경찰서하고 다른 곳이다. 정치범을 잡는 곳이다. 다시 말해 사상범을 상대하는 곳이란 말이다. 북한을 위해 일하는 놈들을 잡는 곳이라는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37쪽)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49쪽)

대꾸하자마자 이덕룡은 틈을 주지 않고 안경을 낚아채더니 뺨을 후려갈겼다. 고병천, 김국련이 차례로 나를 구타했다.(53쪽)

'VIP실' 한쪽 구속에 있던 수동식 군용 발전기에서 코일 두 줄을 풀어 내 집게손가락에 감으려 했다. 몸부림쳤다. 처음에는 겨우 벗겼지만 손목을 더 세게 붙들어서 코일을 벗길 수 없었다. 옆에서 고병천이 드럼통에 담아놓은 물을 계속 내 몸에 끼얹었다. 물에 빠졌을 때처럼 숨이 막혔다.(57쪽) 

"설사 일본에 있어도 김일성과 김일성을 지지하는 자를 철두철미하게 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다."(60쪽) 

(김 씨를 풀어줄 때) "미친개에 물렸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라"(78쪽)

사과는커녕 "고문한 적 없다" 발뺌 

고 씨의 어긋난 애국심은 평범했던 청년들의 삶을 손쓸 수 없이 망가뜨렸다. 청춘을 감옥에 다 바쳤고, 고문 후유증으로 몸 이곳저곳이 고장이 났다. 간첩 멍에로 직장생활, 가정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사이, 고 씨는 1995년까지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에서 일하다 명예롭게 퇴직했다. 이후 2004년까지는 수사과 연구관으로 지냈다.

시간이 흘러 고 씨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기회가 찾아왔다. 1984년 자신에게서 고문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됐던 또 다른 피해자 윤정헌 씨 재심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지났어도 법정에 선 고 씨는 여전했다. 

"증인은 피고인 윤정헌에게 구타나 협박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없지요."
"예. 없습니다." 
"그리고 윤정헌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하거나 유도한 사실이 없지요."
"예. 없습니다." 
"당시 간첩사건 수사에 있어서 피의자들을 인간적으로 설득하는 데 주력하였지요."
"예. 스스로 얘기하도록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는 '고문한 적이 없다'며 기만적인 행태를 보였다. 결국 윤 씨는 고 씨를 모해위증죄로 고소했다.  

사과를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검찰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사건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공소시효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19일 모해위증죄가 아닌 단순 위증죄로 고 씨를 기소했다. 지난 1월 22일 간신히 첫 재판이 잡혔지만, 이번엔 고 씨 측이 기일 변경을 했다. 고 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온 윤 씨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드디어 첫 재판이 열렸다. 지팡이를 짚고서 나타난 고 씨의 모습은 머리가 하얗게 센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고 씨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 변호인은 고 씨와 대화할 때 입을 귀 가까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변호인은 "지금까지는 공소사실을 부인했고 인정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지만 세월도 많이 흘렀고 역사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그 태도를 유지하지 않겠다, 예전처럼 부인해서 재판이 길어진다거나 피해자들에게 상처가 더 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문한 적이 없다'던 입장을 바꾸겠다는 얘기였다. 다만 정확한 입장에 대해선 "차후에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12일 위증 혐의로 재판을 받은 고병천 씨(가운데)와 조작 간첩 피해자 최양준 씨(오른쪽). ⓒ프레시안(서어리)


이날 윤 씨 대신 재판을 지켜본 조작 간첩 피해자 최양준 씨는 분개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당신 때문에 멀쩡한 사람들이 불구가 되고 인생이 망가졌는데 그래도 할 말이 없습니까?" 수십 번을 따져 물었지만 고 씨는 말이 없었다. 기자들도 법원을 나서는 고 씨에게 질문했다. 기자가 계속 따라붙자 귀찮은 듯 마침내 고 씨가 대꾸했다. 

"다음에 법정에 와서 얘길 들어요." 

결국, 사과는 없었다. 

다음 기일은 다음 달 15일이다. 30년 넘게 '미안하다' 말 한마디 없던 그가 한 달 뒤엔 제대로 사과할 수 있을까. 고 씨가 지금이라도 과오를 뉘우치고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기를, 피해자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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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다” “좋다! 좋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2/18 11:57
  • 수정일
    2018/02/18 11:57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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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응원단 취주악단, 평창에서 춤 선보여
평창=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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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7  23: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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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은 17일 오후 3시 40분경 강원도 평창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 마련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평창특별전’을 관람한 뒤 공연을 펼쳤다. 북측 응원단이 처음으로 춤을 선보였다. [사진-조천현]

“우리는 하나다”, “좋다! 좋지”

남측 시민들이 외치자 북측 응원단은 춤으로 화답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해 방남한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이 네 번째 공연을 펼쳤다.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은 17일 오후 3시 40분경 강원도 평창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 마련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평창특별전’을 관람한 뒤 공연을 펼쳤다. [영상보기]

약 80여 명의 취주악단은 빨간색 상의와 모자, 하얀색 바지를 입고 손에 악기를 들고 등장했다. 악기를 다루지 않은 응원단은 빨간색 체육복을 입고 손에는 단일기(한반도기)를 들었다.

공연단이 상지대관령고 잔디 운동장에 들어서자, 시민들은 단일기를 흔들며 “반갑습니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북측 응원단은 단연 평창 올림픽의 스타였던 것.

취주악단은 언제나 그렇듯 첫 곡인 ‘반갑습니다’를 연주했다. 그리고 시민들도 곡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던 한 시민은 굵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의 연주 모습. [사진-조천현]
   
▲ 북측 응원단 취주악단 공연 뒤로 시민들은 "우리는 하나다"를 외쳤다. [사진-조천현]

이어 ‘아리랑’, ‘옹해야’ 등 민요가 연주됐고, ‘내 나라 제일좋아’ 등 북측 노래가 연주됐다. 취주악단이 곡을 연주하자, 응원단은 일제히 나와 흥겹게 춤을 선보였다. 응원단이 취주악단 곡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

북측 응원단은 북측에서 주요 행사마다 열리는 ‘야회’ 그대로 춤을 췄으며, 시민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남측 시민들이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가운데, 북측 응원단은 춤을 추며 “좋다! 좋지”라고 말해, “우리는 하나가 좋다”라는 메아리로 운동장을 울렸다.

북측 응원단을 환영하기 위해 온 명진 스님은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녹여주는 역할을 한다. 군사적 대립 관계를 녹여주는 북한 응원단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문화예술이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냐”며 “남북관계가 대립해서 험했던 기간이 끝나고, 정말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 미워하지 말고 같이 합쳐서 통일된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북측 응원단이 춤추는 모습. [사진-조천현]
   
▲ 북측 응원단이 단일기를 흔들며 춤을 췄다. 그리고 "좋다! 좋지"를 외쳤다. [사진-조천현]

응원단의 공연을 본 한 시민은 “지난 보수정권이 얼마나 망가트렸느냐. 남북관계를 파탄시킨 죄가 크지 않느냐”며 “응원단의 모습이 얼마나 좋으냐. 이런 기회가 계속 있었으면 지금 이런 경색 분위기까지 왔겠느냐. 이번 기회를 살려서 정말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도 “인생에 남을 만한 공연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며 “응원단의 모습을 보니 통일이 코앞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통일이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30여 분의 공연이 끝나자 시민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손을 흔들며 “우리는 하나다”라고 거듭 외쳤다. 다른 시민들은 “앵콜”, “좋다”, “한 번 더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이에 북측 응원단과 취주악단은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화답했다.

북측 응원단의 이번 공연은 네 번째다. 지난 9일 북측 선수단 입촌식, 13일 강릉 오죽헌, 15일 강릉아트센터 옆 ‘라이브 사이트’ 등에서 공연을 했다.

한편, 북측 응원단과 기자단은 이날 저녁 강릉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 취주악단의 연주 모습. [사진-조천현]
   
▲ 응원단은 흥겹게 단일기를 흔들며 춤을 췄다. [사진-조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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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이란 무엇이고 북핵폐기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우방이란 무엇이고 북핵폐기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8/02/18 [11: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미국 워싱턴에 수소폭탄 예상 피해 범위  

미국은 북과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정설교 화백

 

 

▲  대한민국은 미국의 봉이다

   출처- 한겨레 © 정설교 화백

 

 

▲  한국은 관세철폐

미국은 관셰 대폭인상

한국은 미국의 봉이다.  

출처- 매일경제 © 정설교 화백

 

미국이 북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원한다면 북한에게 핵 폐기라는 미국의 일방적인 목표를 말하지 말아야 된다. 미국이 북과 대화를 하려는 의도는 북한에게 핵무기가 있으며 ICBM으로 미국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북한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에게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이 없다면 미국은 북한을 3류 국가로 분류하고 대화는커녕 이 지구상에서 무시해도 좋은 나라로 어쩌면 이라크, 리비아와 같은 침략과 소멸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독점이 소련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지만 미국은 핵이 없던 영국, 프랑스를 친구국가가 아니라 열등한 2등 국가로 보았고 중국은 3등 국가로 분류했다.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며 미국의 친구 나라가 된 것은 바로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 때문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된다. 북한이 미국에게 굴복하여 핵무기를 폐기하는 순간 북한은 국제사회에 주목을 받을 수도 없지만 즉시 북미대화가 중단되고 북미 사이에는 불평등조약에 의한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과 명령만 있을 것이다.

 

세계 3위 핵보유국인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폐기하고 러시아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기고 침략을 당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지켜주겠다던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도 없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국제사회는 힘에 의하여 움직이고 정의는 바로 그 나라의 <국방력>이다.

 

미국과 우방이라며 한국은 미국을 친구나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한미관계의 발자취를 보면 미국과 한국은 *주종관계다. 그 하나가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은 경제주권을 상실하고 일방적으로 미국에게 끌려다니며 불평등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더욱 불평등하게 <재협상>을 하고 있지만 이를 국민들에게는 비밀로 한다.

 

관세철폐 한미자유무역협정에서 한국은 관세를 철폐하여 미국의 이익에만 충실하지만 미국은 자의적으로 한국에 20%가 넘는 고율관세를 부과한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국에 방위비분담을 늘리고 있으며 GM사는 한국에 1조 달러를 투자 '3조'의 막대한 이익금을 미국으로 가져갔지만 한국의 산업은행에 5000억 추가 투자를 요구한다. 미국의 일방적인 압력에도 한국은 미국에게 할 말이 없으니이를 어찌 미국이 친구 나라<우방>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가계부채는 늘어가는 추세로 미국이 금리인상을 들고 나와 한국의 경제는 말 그대로 죽을 쑤고 있으며 노동자, 농민은 죽지 못해 살고 있고 실업자들은 가정이 파탄 나 사경을 헤맨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한국의 맹목적인 친미사대는 늘 민심을 역행하지만 주권<힘>이 없는 한국은 민심을 외면하고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한국은 중산층이 무너져 내리고 1%의 삼성재벌을 비롯한 몇 부정부패의 재벌만 제외하고 우리들 모두가 빈자의 대열에 들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날 한국경제를 대국적으로 파악하여 우리에게는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 필요하다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한국과 미국은 비로서 친구나라가 되는 것이다. 북한도 북핵폐기를 하는 그 순간에 미국과 친구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바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6자회담 9.19 성명을 비롯한 미국과의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어 미국의 본성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만약 무조건적인 북핵폐기에 응한다면 미국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북에서 주장하는 강성대국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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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년간 보르네오서 오랑우탄 10만마리 사라져

조홍섭 2018. 02. 17
조회수 121 추천수 1
 
열대림 벌채와 팜유 농장, 사냥 때문 개체수 절반 줄어
남은 집단 절반이 100마리 이하, 35년 뒤 또 5만 줄 것
 
u1.jpg» 보르네오 숲의 오랑우탄 모습. 벌채와 사냥으로 급박한 멸종 위험에 놓여 있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의 하나인 오랑우탄이 1999∼2015년 서식지인 보르네오에서 10만마리 이상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전체 개체수의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35년 사이 현 개체수의 절반가량인 4만5000마리가 추가로 죽을 것으로 예측됐다. 
 
오랑우탄 감소의 주원인은 산림 벌채와 팜유 농장과 제지용 플랜테이션 등 숲 파괴와 사냥과 밀렵으로 나타났다. 팜유는 과자, 라면, 화장품 등에 널리 쓰여, 우리나라도 이런 감소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u2.jpg» 팜유 농장을 만들면서 조각난 열대 우림. 숲이 얿는 곳에서 오랑우탄은 살 수가 없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등 세계 38개 연구소는 1999년부터 16년 동안 보르네오에서 오랑우탄의 둥지를 확인하는 한편 원격탐사로 숲의 변화를 측정하고 모델링을 통해 오랑우탄 개체수 변화를 예측했다. 이들은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 16일 치에 실린 논문을 통해 이런 결과를 보고하면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자연자원 활용이 보르네오 오랑우탄의 극적인 감소를 불러왔다”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1234㎢ 면적의 현지 조사에서 오랑우탄의 잠자리 수를 통해 서식밀도를 추정했다. 그 결과 모두 3만6555개의 잠자리를 확인했는데, 연구 기간 동안 ㎞당 22.5개가 관찰되던 것이 10.1개로 줄었다. 연구자들은 맨눈으로 확인된 변화를 바탕으로 모두 14만8500마리의 오랑우탄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했다.
 
사라진 오랑우탄 가운데 9%에 해당하는 1만4000마리는 산림 벌채, 산업적인 팜유와 펄프용 플랜테이션 때문으로 연구자들을 분석했다. 오랑우탄은 숲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숲이 사라진 곳에서 밀도가 가장 심하게 줄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선택적 벌목과 사냥이 벌어지는 원시림 내부라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u3.jpg» 새끼를 데리고 있는 오랑우탄 암컷. 서식지 파괴 못지않게 밀렵과 사냥이 주요 감소요인으로 밝혀졌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주 저자인 마리아 보익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 연구자는 “걱정스러운 것은 가장 많은 수의 오랑우탄이 사라진 것은 남아있는 숲에서였다. 이것은 사냥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이 학술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예를 들어, 연구자들이 오랑우탄의 서식밀도가 가장 높은 칼리만탄 지역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연평균 2256마리가 사냥 또는 사람과의 충돌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랑우탄의 미래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것은 남아있는 64개 고립 집단 가운데 38개만 개체수가 100마리를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의 개체수를 갖추지 못한 오랑우탄 집단은 장기적으로 근친교배와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능력 부족으로 멸종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자들은 장차 35년 동안 현재의 오랑우탄 개체수 가운데 4만5300마리가 추가로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는 숲 면적의 감소만 고려한 것이어서 감소추세는 이보다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u4.jpg» 보르네오 섬의 오랑우탄 서식밀도 변화. 감소 추세는 205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측됐다. 마리아 보익트 외(2018)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오랑우탄의 생존을 위해서는 벌목과 팜유 회사 등과의 파트너십과 대중의 인식을 높일 교육이 시급하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연구에 참여한 세르저 비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생물학자는 “오랑우탄은 유연해서 플랜테이션, 벌채된 숲, 조각난 숲에서도 어느 정도 살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죽이지 않을 때만 그렇다”며 “숲을 보전하는 것에 나아가 대중의 인식과 교육, 규제 강화, 사람들이 왜 오랑우탄을 죽이는지에 관한 연구 등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u5.jpg» 팜유 농장과 벌목으로 조각나는 보르네오 열대림. 만일 사냥을 막을 수 있다면 오랑우탄은 이런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마르크 안크레나스 제공.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팜유 생산국으로 오랑우탄 서식지가 대규모 팜유 농장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팜유는 가공식품과 화장품 등의 원료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과 유럽 등에 수출되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팜유 농장 개간과 밀렵 등에 의해 보르네오 오랑우탄의 개체수가 급감하자 2016년 이 종을 멸종이 가장 임박한 ‘위급 종’으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Voigt et al., Global Demand for Natural Resources Eliminated More Than 100,000 Bornean Orangutans, Current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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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이스라엘이 또 공격하면 놀랄 만한 반격 단행

시리아, 이스라엘이 또 공격하면 놀랄 만한 반격 단행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2/17 [01: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리아의 대공미사일에 격추된 이스라엘 F-16전투기 잔해  

 

1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는 13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이 또 시리아를 공습하면 놀랄 만한 반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이만 수산 시리아 외무차관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시리아를 공격하면 언제든 더 많은 놀라움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그들은 시리아가 수년간 전쟁에 노출된 탓에 공격에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는 기자회견 내용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이 보도했다. 

 

이스라엘군 주장에 따르면 지난 10일 시리아에서 자국 영토로 날려보낸 이란의 정찰드론을 요격하고 그 드론 발진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시리아 영공에 들어갔다가 대공포를 얻어맞고 격추되었다. 

시리아는 이에 대해 드론으로 이스라엘 영공을 침범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고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을 향해 방공체계를 가동하여 최소한 한 대 이상의 F-16전투기를 대공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사실은 확인해주었다. 중동과 유럽의 언론들은 그 과정에 1명의 이스라엘 조종사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리가 들린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F-16 자국 전투기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즉각 시리아의 4곳의 12개 목표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시리아인 6명을 죽였다고 밝혔는데 시리아에서는 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경고를 내놓은 상태이다. 

 

▲ 2015년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가는 이란의 s-300급 지대공미사일, 북의 기술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미사일이 시리아 등에 실전배치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자주시보

 

그에 대해 13일 시리아 외무차관이 그런 공격을 가해올 경우 놀랄만한 반격을 가하겠다고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뭔가 이스라엘에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 수 없다.

 

주목할 점은 이런 시리아의 초강경 대응 방침 천명 이후 이스라엘이 매우 조용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란과 시리아에서 이스라엘로 날려보낸 드론을 요격했다고 하면서도 그 잔해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 최고속도 마하 2.05의  F-16전투기 

 

본지에서는 F-16전투기가 격추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함부로 시리아를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주력 전투기로 이용하고 있는 위력적인 F-16전투기를 한 대 이상 떨어뜨릴 수 있는 무기는 성능이 좋은 대공미사일뿐이다. F-16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투기이며 지속적으로 성능을 개량하여 지금도 생산 판매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 전투기로 쉽게 음속을 넘나들며 대공포 사거리 밖에서 스마트 폭탄으로 목표물을 1미터 오차 안에 초정밀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공미사일을 가지고 있다면 이스라엘의 공중우세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 레바논 헤즈볼라 지하 미사일 격납고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탄도미사일이 종류별로 차량에 탑재되어 보관되고 있다. 헤즈볼라는 최근 이 미사일을 시리아로 가지고 가 알누스라, IS 등 반군들 기지를 타격하는데 사용한 바 있다. 예멘 후티 반군도 이런 식으로 미사일을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 헤즈볼라가 이 정도면 이 미사일을 기술을 개발하여 이란 등에 제공한 북은 어떻게 준비해두고 있을 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자주시보

 

▲ ss-21토치카 미사일을 발사하는 헤즈볼라, 나토명 스캐럽(스크래브)이라는 단거리 탄도 미사일로 한 발에 축구장 몇 배 면적이 초토화되는 위력적인 미사일이다. 고체연료라 신속한 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요격도 쉽지 않다. 사진은 그 미사일을 지금 시리아의 정부군을 돕는 헤즈볼가 발사하는 모습이다. 레바논의 반미 민병조직 헤즈볼라는 여느 정규군 못지 않은 것 같다.     ©자주시보

 

시리아가 성능좋은 대공미사일을 수없이 보유하고 있다면 이스라엘은 공중폭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로켓탄과 미사일을 주고 받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시리아에는 요격회피능력이 탁월한 여러종류의 탄도미사일을 계열별로 수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시리아를 돕는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보유한 탄도미사일만 해도 이스라엘 대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이제 미사일이 발전한 현대전에서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평화공존만이 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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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주필 비리 유죄’ … 조선일보는 ‘침묵 또 침묵’

한겨레만 지면 통해 “조선일보의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검찰, 집행유예 선고에 항소장 제출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02월 16일 금요일

 

수천만 원대 금품을 받고, 기사 청탁 대가로 골프 접대 등 재산상 이익을 지속적으로 취했던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선일보는 침묵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지난 13일 배임수재죄 및 변호사법 위반을 이유로 송 전 주필에게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47만 원을 선고했다.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재판부는 송 전 주필이 2014년부터 2015년까지 박수환 전 뉴스커뮤니케이션즈 대표(뉴스컴·60·구속기소)로부터 기사 청탁을 대가로 골프 접대 등 재산상 이익을 취했고,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을 청와대에 청탁·알선하고 자신의 처조카를 대우조선에 부당하게 입사시켰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다.

 

비록 실형은 피했지만 유력 언론사 최고위 간부가 기사 청탁을 받고 재산상 이득을 취해 징역형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리며 “우리 언론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지적했다. 언론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송 전 주필에 대한 징역형 선고 소식은 신문과 방송 등에선 다뤄지지 않고 있다. 신문 언론 가운데 한겨레만 14·15일치 지면에서 다뤘을 뿐이다.

 

한겨레는 15일자 사설(“‘송희영 전 주필 유죄’가 언론계에 울리는 경종”)에서 “유력 언론사의 최고위 간부가 기사 청탁을 받고 금품을 챙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며 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송 전 주필의 인사 청탁에 대해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저버린 행위이자 주필이라는 지위를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한 사례”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언론계 전체가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사회적 공기라는 언론 역할에서 벗어난 적은 없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6년 9월2일자 조선일보 사보. 송희영 전 주필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 2016년 9월2일자 조선일보 사보. 송희영 전 주필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반면, 조선일보는 조용하다. 관련 보도 하나 없을 뿐더러 내부에서도 특별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이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2016년 9월2일자 사보에 “그동안 불거진 의혹에 대해서는 당국에서 엄정하게 수사해주길 바란다”며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조선일보의 취재, 보도, 평론, 편집 등 업무의 공정성, 청렴성, 객관성 등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도 밝혔는데 1심 판단이 나온 만큼 조선일보 차원의 입장이 필요해 보인다. 의혹 제기 직후 송 전 주필은 조선일보를 퇴사했지만 그는 조선일보 영향력’을 활용해 재직 시절 자기 사익을 부정하게 취했다.  

 

한편, 선고 직후인 지난 14일 검찰은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송 전 주필도 13일 미디어오늘에 “항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 ‘언론 비리 종합세트’ 송희영, 청와대 수석도 ‘오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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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선생 시절, 한글학회 회칙 너무도 민주적”

 박용규, 한글학회 회칙 개정 요구 1인시위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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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6  19: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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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이 한글회관 앞에서 지난 5일부터 '한글학회 회칙 개정안 공개토론회 개최'를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현배 선생이 바로 우리 학회를 1940~60년대 계속 지켜왔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한글학회가 있는 서울 새문안로 한글회관 앞에서 지난 5일부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은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려면 한글학회 회칙 내용이 너무도 비민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고쳐야만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첫째, 정회원이 임원 선출권을 가졌다. 지금은 없다. 두 번째로 정회원이 정기총회에서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 세 번째는 한글학회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대단히 확대시켰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보급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한글학회 정회원이 됐다.” 지금 회칙에는 국어학 논문을 발표한 사람만 정회원이 될 수 있다.

한글학회도 문제점을 인식, ‘한글학회 회칙개정위원회’를 구성해 지난해 12월 7일 회칙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어 올해 1월 23일 ‘한글학회 개혁위원회’가 구성돼 회칙개정위의 ‘한글학회 회칙개정안’ 3월 총회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관성의 벽은 두터웠다. “이사회에서 낸 부대의견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개혁위원회) 회칙개정안 반대 부대의견”이고, “개혁위원회 세 사람이 2월 1일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을 면담”했지만 요지부동임을 확인한 것이다.

추석을 앞둔 14일 오전 10시 한글학회 앞에서 1인시위 중인 박용규 한글학회 개혁위원장은 “이렇게 회원 간에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는 것이 요구사항이라며, 3월 24일 정기총회 때까지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인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언제든지 공개토론회를 열어서 충분하게 의견을 나눠서, 거기서 회원 상호간에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최종안을 도출해 내서 3월 24일에는 전회원이 정기총회 때 최종 확정된 한글학회 회칙개정안을 상정해서 박수치면서 통과시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는 것.

한글학회의 전신은 조선어학회는 일제시기에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간(1936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년) 등을 완수했고, 1942년 16만 어휘를 수록한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 발간하려다 일제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최후의 발악은 1942년(임오년) 만주에서 국교(國敎)인 대종교 지도부를 체포한 ‘임오 교변(敎變)’과 국내에서 국어(國語)단체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나타났다. 안희제 등 대종교 지도부 10명이 순교하고 윤세복 등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조선어학회 이윤재, 한징이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등이 해방후 감옥에서 풀려났다.

박용규 연구위원은 “분단이 72년인데 분단이 안 된 게 있다”며 “우리 남북의 겨레들이 똑같은 말과 글을 쓰고 있어서 말글은 분단이 안 됐다”고 짚고 “말글 연구를 더 힘차게 하고 남북이 서로 교류협력하고 화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평소의 소신을 펼쳤다.

또한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을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라든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국어운동 단체에서 활발하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말글, 언어도 사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고 인권”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14일 오전 10시 한글학회 앞 1인시위 중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

   
▲ 한글회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 박용규 교수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다. 한글학회 연구위원이기도 하다.

□ 언제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고, 언제까지 할 작정인가?

■ 지난 2월 5일부터 시작했다. 오는 3월 24일 한글학회 정기총회 전까지는 계속할 예정이다. 1인시위 시간대는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다.

□ 1인시위는 혼자서 하나 여러 명이 돌아가며 하나?

■ 아직까지는 혼자하고 있다. 내가 한글학회 개혁위원회 운영위원장이다.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려면 한글학회 회칙 내용이 너무도 비민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고쳐야만 한다.

□ 한글학회 개혁위원회는 언제 어떤 취지로 발족했나?

■ 지난 1월 23일 개혁위원회가 발족됐다. 개혁위원회가 등장한 배경은 한글학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현행 회칙을 가지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에 이미 한글학회 회칙개정위원회가 출범이 돼서 12월 7일 개정안을 만들어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개혁위원회가 출범했다.

□ 그러면 회칙 개정안은 3월 정기총회에서 통과되나?

■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 하게 된다. 그런데 회칙 개정안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견이 지금 갈리고 있다. 그래서 개혁위원회 세 사람이 2월 1일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을 면담했다.

우리가 회칙개정안 원안을 그대로 상정해주고, 다른 이사들의 의견은 첨부돼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렇게 회원 간에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회칙개정안 공개토론회를 열어달라”고 건의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2월 2일에 답변이 왔다. 권재일 회장은 공개토론회를 거부했다.

우리 학회가 학술단체고 또 우리 학회는 1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하에 강당도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공개토론회를 열어서 충분하게 의견을 나눠서, 거기서 회원 상호간에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최종안을 도출해 내서 3월 24일에는 전회원이 정기총회 때 최종 확정된 한글학회 회칙개정안을 상정해서 박수치면서 통과시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서 나는 공개토론회를 주장했고, 또 당연히 학회는 학술단체이기 때문에 열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글학회의 현재 11명의 이사는 전부 대학의 현직교수들, 제 말로 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이 이런 토론회를 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조선어학회는 3가지의 큰 업적을 남겼다”

   
▲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1935년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한글학회’ 하면 일제시대인 1942년 임오년 조선어학회 탄압사건이 떠오르는데, 그 역사적 맥을 잇고 있다고 봐도 되나?

■ 그렇다. 한글학회는 1949년에 전신인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만 바뀌었다. 한글학회 역사를 간단히 말하면, 1908년에 주시경 선생이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이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발족했다. 이 조선어연구회의 이름이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명이 됐다.

조선어학회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조선어학회가 왜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결국은 처벌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됐느냐? 그것은 바로 일제가 우리 민족을 영구히 말살하기 위해서 우리 말글 말살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선어학회가 대항을 했다.

조선어학회는 3가지의 큰 업적을 남겼다. 첫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33년에 제정했다. 두 번째는 1936년에 표준말을 사정해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표준말 사정’이란 표준말을 뽑아서 제정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투리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또 하나의 큰 업적은 나라 없는 시절, 1940년에 외래어 표기법도 통일안을 냈다.

더 중요한 것은 1942년에는 16만 어휘를 뜻풀이하는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했다. 세종대왕께서 우리 민족의 문자 한글을 만들었고, 그 이후에 우리 민족이 우리말을 쓰면서 어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말 사전은 없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해냈다. 이 사전이 발간되려 하자 일제는 굉장히 당혹했다.

조선어학회의 3가지 업적과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을 막아야겠다. 그래서 일제가 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게 된 배경은 조선어학회가 단순한 국어운동 단체가 아니고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이를 간파해서 탄압한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이 옥사를 했고 간사장이었던 이극로 선생은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함흥형무소에서 45년 8월 17일 들것에 실려서 풀려났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 박용규 연구위원은 현행 한글학회 회칙을 ‘비민주의 극치’라고 비판하고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숭고한 역사를 가졌는데, 정작 지금에 와서 한글학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니 안타깝다.

■ 최현배 선생이 바로 우리 학회를 1940~60년대 계속 지켜왔다. 최현배 선생 시절에는 한글학회 회칙이 너무도 민주적이었다. 첫째, 정회원이 임원 선출권을 가졌다. 지금은 없다. 두 번째로 정회원이 정기총회에서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 세 번째는 한글학회 정회원이 되는 자격을 대단히 확대시켰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보급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한글학회 정회원이 됐다.

그런데 2006년에 이 한글학회 회칙이 개악이 됐다. 국어학 논문을 발표한 사람만 정회원이 되게 축소를 시켰다. 그리고 2011년에는 가장 비민주적인 조항이 들어갔다. 한글학회 회칙개정 발의는 이사회만 할 수 있다고 정했다. 이사와 평의원, 정회원이 똑같이 회비를 내는데 왜 이사회만 회칙개정 발의권을 가질 수 있느냐. 이건 대단히 비민주적이다.

그래서 이번 회칙 개정안에 20명 이상의 정회원이면 언제든지 회칙개정을 발의할 수 있도록 했고, 또 임원 선출권도 정회원이 갖도록 했다. 예를 들면 현재 있는 평의원들을 이름을 운영위원으로 바꾸었는데, 정회원이 운영위원을 선출할 수 있고, 회장 부회장도 정기총회에서 정회원이 선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회원 자격도 원래대로 최현배 시대 회칙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회에서 낸 부대의견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회칙개정안 반대 부대의견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찬반의견이 갈릴 때는 학회이기 때문에 토론회를 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유일하게도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 2004년부터 남북이 합의해 시작된 <겨레말 큰사전> 공동편찬 사업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실상 중단됐다. [자료사진 -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회]

□ 남북 간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해오다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안다. 우리말과 글을 중심으로 한 남북교류나 협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 우리 민족이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이미 노무현 정권에서 진행됐다. 그것이 바로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이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사업이 결국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의해서 대단히 위축됐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올해가 민족이 분단된 지 72년이 된다. 우리는 광복 72주년이라고 하는데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분단 72년이다. 분단이 72년인데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45년은 국토가 분단되고, 48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돼 국가가 분단됐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53년 이후에는 민족이 분단됐다. 그런데 유일하게도 분단이 안 된 게 있다. 그것은 우리 남북의 겨레들이 똑같은 말과 글을 쓰고 있어서 말글은 분단이 안 됐다. 그래서 말글 연구를 더 힘차게 하고 남북이 서로 교류협력하고 화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나는 평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 중국 연변자치주 연길 시내 간판들. 한글을 위에, 중국어 간자체를 아래에 적는 방식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우리사회가 서구화되면서 한글 사용이 많이 왜곡되거나 위축돼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의 풍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 그렇다. 과거에는 한자, 한자말이 우리말을 대단히 괴롭혔다. 그런데 20세기말, 21세기에 들어와서 한자는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우리말보다는 영어가 범람하고 있다. 길거리 간판, 방송 용어를 보라. 전부 영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영어와 영문에 의해서 우리말과 한글은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만 들어보겠다. 지금 아나운서들이 ‘씽크홀(sinkhole)’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내가 그래서 어느 글에 이것은 ‘땅꺼짐 현상’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영어가 범람해서는 자주국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을 우리 민족학회인 한글학회라든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국어운동 단체에서 활발하게 대처해야 한다.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연변에 있는 어느 교수에게 연변의 길거리 간판을 문의하자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왔다. 연변의 간판은 제일 윗부분이 한글로 씌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중국어로 씌여 있다. 한자 간자체다. 조선족자치주이기 때문에 자치주에서 어문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 연변이 오히려 더 잘하고 있구나’ 놀랐다.

우리도 길거리 간판은 사기업체까지도 반드시 한글로 쓰도록 해야 한다. 사기업체도 전부 우리 한반도 내에서 기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문으로 그냥 ‘POSCO’만 쓰면 안 되고 ‘포항제철’ 이렇게 쓰고 그 다음에 영문으로 ‘POSCO’라고 쓰면 된다. 이건 최소한의 요구다.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아무런 표기가 없다. 예를 들면 그냥 기호로만 남자표시, 여자표시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MAN’ ‘WOMAN’으로 돼 있다. 이래서는 안 되고 그냥 ‘남자’ ‘여자’, 서비스 차원에서 ‘MAN’ ‘WOMAN’ 이렇게 밑으로 표기해줘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말글, 언어도 사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고 인권이라고 볼 수 있다.

​(수정,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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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시아계 노벨상 작가, 공통점은 '이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모옌의 <열세 걸음>

18.02.16 20:20l최종 업데이트 18.02.16 20:20l

 

2017년도 노벨 문학상은 전년의 파격(밥 딜런 수상)을 깨고 다시 일반적인 '작가'에게로 돌아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인물로, 어린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 쭉 그곳에서 살아가며 작품 활동을 전개해 온 일본계 영국인이다.

그의 작품은 살아온 공간에 맞추어 자연스레 영어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가 순수한 일본 혈통이라는 점과 작품 내에 일본과 관련된 내용들이 종종 배어있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은 일본 본토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는 1994년 오예 겐자부로가 문학상을 거머쥔 뒤 13년 만에 나온 일본계 문학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0년대 들어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두 번째 아시아계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수상자는 2012년 수상의 영광을 거머쥔 중국인 소설가 모옌이다. 모옌은 '관모예'라는 본명을 가진 중국의 원로 작가로서, 이미 중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중국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미디어화 되고 국제적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나온 아시아계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이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같은 아시아계이지만 국적은 물론이고 삶의 경로와 작품 세계, 문체까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대표작의 비교를 통해 두 작가 각각의 특징과 더불어 아시아 문학의 현황에 대해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쟁 세대의 '반성'을 촉구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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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에 수상의 영광을 안겨다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의 고전'을 출판한다는 목적 아래에 간행되고 있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세트의 일환으로 근래에 새로 간행된 바 있다.

이 책의 원본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89년 초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출판 첫 해에 부커상을 수상하였고, 4년 뒤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까지 했을 만큼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주목은 상당했다.

그러나 현대의, 그것도 한국의 독자가 읽기에 <남아 있는 나날>의 내용은 그 명성에 비해 시시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은 자극적인 소재나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도리어 그 정반대의 길, 담담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서술자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 역시 초반부에는 빠르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영국의 한 고급 저택에서 살아온 노년의 '집사'가 들려주는 '품위'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따위의 논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책 읽기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면 낯선 소재와 지리한 전개로 지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드러나며 <남아 있는 나날>이 주목받은 이유를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이 평생 존경하며 섬겨온 주인이, 자신의 삶의 자부심의 주축이 되어온 바로 그 인물이 실은 한낱 무능하게 이용된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이 서서히 깨닫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식의 과정이 이 작품의 소재이다.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서 30년대 영국의 역사 속 어두운 면을 끌어내고, 동시에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노년의 주인공)에서라도 그것을 바로 인식하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새롭게 바뀐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나날>을 감성적인 필체로 그려낸 역사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확실하게 동일한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이 작품은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했던 화가의 반성적 회고담을 다룬다. 이처럼 그의 글들은 늘 섬세하고 은은하나,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 어느 작가의 것보다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모옌, 환상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꼬집다 
 

 모옌 <열세 걸음>
▲  모옌 <열세 걸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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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옌의 경우는 어떨까. <열세 걸음>을 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사실 이시구로보다 모옌의 작품은 국내에 훨씬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문학동네,2009), <풀 먹는 가족>(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열세 걸음>을 비롯한 이들 작품은 모두 동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환상적 형식이다. 앞서 말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술 방식이 여러 작가들에게서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옌의 서술 방식은 보다 파격적이다. '중국의 마르케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중국의 민담과 설화를 끌어다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러하듯,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옌 역시 환상적 이야기들을 현실 곳곳에 삽입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열세 걸음>에서 독자들은 초반부에 서술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은 채 서로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서술되기 때문이다. 서술자의 지위 역시 비전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기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마찬가지로 모옌 역시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보여준다. <열세 걸음>의 경우, 70~80년대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던 여러가지 모순적인 상황들과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작품의 후반부, 주인공인 물리 교사 장즈추가 죽은 상황에서 그를 추모하는 학교 연설이 이루어진다. 이때 교장은 선생의 죽음을 계기삼아 더욱 공부에 매진할 것만을 강조한다. 얼마나 '개인'이 지니는 가치가 사라진 사회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교장이 선창했다. "대학 합격!" 
"대-학-합-격!" 
교장이 선창했다. "대입 실패는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지나온 역사 속 잘못된 유산들을 꼬집는다면, 모옌은 지금 '당장'의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아시아계 작가들의 위상과 미래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노벨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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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아시아계 인물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인으로서 문학상을 받은 인물은 앞의 두 사람과 더불어 총 네 명 뿐이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유럽-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의 논란이 있는 '터키' 소속의 오르한 파묵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본인의 국적을 버리면서 조국을 강하게 성토하며 귀화, 서구권에 편입된 반체제 중국인 작가 '가오싱젠'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실국적이 영국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아시아 작가들의 국제무대에서의 주목도는 여전히 전통 서구권 뿐 아니라 남미 및 동유럽계 문학에 비해서도 저조한 편인 셈이다. 이미 아시아가 국제무대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찮아진 지 오래인 상황에서, 이러한 문화적 약세는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문학 역시 중일 양국의 문학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훨씬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두 노벨상 작가를 비교해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 보편적 감성을 그려내는지가 해당 작가 및 문단의 역량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모옌의 서술 방식은 매우 상이하고 소재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문제 - 2차 세계대전의 정신적 극복, 전체주의(또는 공산주의) 사회의 내재적 모순 - 를 뛰어난 표현력으로 소설화 해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설이나 시가 아시아권에서 정착한 지는 서구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의 선진 국가들조차도 이미 국제무대의 주류인 서구권에서는 한 세대 전 지나간 이데올로기 문학이나 민족 문학에 불과 최근까지도 강하게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국제적 보편성이나 뛰어난 표현력 등이 확보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수록 이러한 장애 요소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다양한 세계 문학들이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부디 멀지 않은 시일에 새로운 아시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새롭게 탄생해 아시아 문학의 더욱 발전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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