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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박해의 세월 살다간 이들에 대한 '예의'

[인터뷰] 간토 조선인학살 진실찾는 재일 영화감독 오충공의 40년

  • 기자명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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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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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10.2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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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을 겪으며 맞이한 올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도 하릴없이 저물어간다.

대지진의 혼란속에 국가(일본 정부)가 개입해 자행한 전대미문의 조선인 집단학살(genocide, 제노사이드), 그 진상을 밝히려는 추도의 정은 더해가지만 진실을 덮으려는 탐욕과 위선의 힘은 100년이 지나도록 위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가리려 할수록 불가항력의 힘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오충공(呉充功, 68세) 감독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마음도 바쁘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올해가 끝나기 전에 새로 개봉할 영화를 마무리하고 유족회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 그는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8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최초의 영상작품인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한 28살의 청년은 환갑을 훌쩍 넘어 일흔을 앞둔 지금까지 40년 인생을 한결같이 그 진실을 밝히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의 불가항력은 무엇일까?

지난 16일 저녁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오충공 감독은 깊은 존경심을 담아 '두번째 아버지'라고 부르는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님을 이야기했다.

재작년 6월 12일 강덕상 선생이 별세할 때까지 끝까지 병상을 지킨 그는 "돌아가시기 2년 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다"고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올해를 넘기지 않고 개봉하려고 하는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을 새로 시작했다. 이번 방한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다.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하면서 한계에 부딪혔을 때 만난 강덕상 선생의 가르침과 '엄격한 진심'을 그렇게 평생 가슴에 새겼다. 그런 그에게 강 선생은 한번씩 "내가 너한테 반했다"며 잊지못할 깊은 정을 주었다.

또 하나의 잊지못할 인연은 1923년 9월 1일부터 조선인학살이 자행됐다는 결정적 증언을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해 준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가해자인 일본인과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고,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그의 마음속에 각인된 '강덕상'과 '조인승'은 일제의 만행과 억울하게 학살당한 재일 조선인을 잊지 않도록 하는 선명한 좌표이고 그 모든 것의 구체적인 표상인 듯 하다.

강 선생은 그에게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쓴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하다"라고 대꾸라도 할라치면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고 질책하던 엄한 스승이었다.

그렇더라도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40년을 살아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그를 이토록 '아주 드문 사람'으로 만든 건 사랑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 그들의 아버지·어머니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까? 뼛속깊이 사무친 차별을 넘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말로는 다하지 못할 엄숙하고 준엄한, 자신도 일부가 되어버린 그런 세월.

그의 평온한 모습이 그걸 말해주는 듯 하다. 나이가 무색하게 순진무구한 표정이 있고, 자신이 겪은 차별의 파편이 제 몸에 박히지 않도록 경계해 온 듯 갖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다. 40년을 지켜온 집념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대로 녹아있어 희노애락이 말속에 자연스레 묻어있다.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오 감독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우석대 교수는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계속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해 온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 간토 사건을 이렇게 장기적으로 하는 사람은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매우 귀중하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관을 갖고 기본 주제를 붙들면서도 재일동포들의 밑바닥 투쟁과 연관시켜서 작업하는 시각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당시 2주 남짓한 기간에 일본 당국의 직간접적인 개입아래 최소 6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 일본 당국의 용렬함, 진실 규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국 정부의 무력한 태도가 오랜 세월을 짓눌러 왔다.  

한 세기가 되도록 미궁에 빠져있던 그 날의 진실이 이나마 세상에 알려진데는 오충공 감독의 공이 크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전남 담양 출신인 아버지 오상수와 보성 출신의 어머니 강정애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올해 68세이다.

어느 누구도 그 학살의 현장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학살의 현장이 모두에게서 잊혀져 가는 듯 보일 때, 27살의 영화학도 오충공은 카메라를 들고 그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2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이 자행된지 60년이 다 되가는 해였다.

처음 시작은 대학 중퇴 후 뒤늦게 들어간 영화학교의 졸업작품으로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편집을 바꾸어 봐도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1년 반의 추가 촬영을 하면서 생존 피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와 강덕상 히토츠바시대학교 교수(2021년 작고)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가며 1983년 「숨겨진 손톱자국」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작품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이나 영상자료 한 점 없던 당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이고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현장을 들여다 본 것이 그에겐 숙명이었을까.  「숨겨진 손톱자국」(1983)을 시작으로 「불하된 조선인」(1986), 「93년의 침묵」(2016) 까지 그의 카메라는 40년을 한결같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찍고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다는 것, 명부가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자연스레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2017년에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도 만들었다.

100주기인 올해를 넘기기 전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네번째 다큐멘터리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를 개봉할 예정이다.

오 감독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 지난 100년동안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앞에 화환 한번 보내지 않은 한국 정부를 향해서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숱한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한다는 호소는 간절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영화 3편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한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가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굳은 다짐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어떤 의미인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묻고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16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 참가한 오 감독을 만나 나눈 대화를 시작으로 추석 명절 기간에 전자메일을 주고받으며 진행됐다. 서면으로는 부족하여 10월 16일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를 서울 인사동에서 직접 만나 보충했다.

인터뷰 내용 중 오충공 감독이 '관동대지진'이라고 한 표현은 '외래외표기법'에서 정한 '현지에서 쓰는 언어표기 원칙'에 따라 '간토대지진'으로 모두 바꾸었다. 

다음은 문답 전문.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 감독님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영상제작물 「감춰진 손톱자국」을 만들어 당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기였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려면 남다른 결심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 오충공 감독 : 간토지진 조선인대학살은 조선근대사에 기록되어야 할 제노사이드, 민족최대의 비극이며, 일본이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일반 민중을 포함한 자경단을 동원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살육한 국제법상 인권범죄입니다. 

저는 조선인 6,661명 이상이 학살당한 이 중대한 역사를 고등학생때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9살 무렵 생겼던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네요. 


□ 재일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씀인데,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 저는 재일 조선인 2세로 도쿄의 '밑동네'(아랫동네)인 가츠시카구 다테이시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전남 담양출신인 아버지 오상수는 중학교 중퇴 후 보성으로 내려가 삼촌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사진기술을 배운 뒤 일본의 벳푸 온천에 있던 사진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일했습니다. 갖은 차별을 받으면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강정애는 전남 보성출신인데, 그곳에서 아버지와 결혼해 생활하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남편을 뒤따라 일본으로 들어왔죠. 1955년에 외아들인 저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홉 형제의 큰아들, 종손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국땅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고품팔이'(고물장사)와 비닐 재생작업을 하면서 고향에 있는 늙은 부모의 생활을 지원하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에 며칠간 원인불명의 고열을 앓고 난 후 귀가 잘 안들리는 난청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외아들인 저의 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니며 애를 썼지만 딱히 이렇다할 치료법도 없어서 그저 세월을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착하면서도 차별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인간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한다고 엄하게  키워주신 분이 어머니였습니다.

처음엔 장애인학교가 아니라 집 근처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칠판에서 제일 가까운 앞자리에서 앉아서 선생님의 입 모양을 살피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자각도 없이 다녔죠.

소학교 3학년때인데, 동급생들이 하교하는 저를 집앞까지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조센진! 조센진, 김치냄새 난다!"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9살이던 그때 일본인 동급생들로부터 들었던 '조센진'이라는 소리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학교 작문시간에 '왜 조선사람은 부끄러운 인간인가'라고 쓴 적이 있어요. 제가 쓴 작문을 본 소학교 선생님이 어머니와 상의한 뒤 조선학교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데리고 가보자고 해서 간 적이 있는데, 처음 듣는 장단소리에 아름다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는 조선 여학생들의 민족무용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몸안의 피가 뜨겁게 역류하는 걸 느꼈습니다. ''나에게도 자랑스러운 민족과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첫 체험이었던 같애요. 별 망설임없이 소학교 4학년때 조선학교로 전학하게 됐죠.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내는 동안 축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난청때문에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를 잘 알아들지 못하잖아요. 결국 문지기 전문으로 기량을 닦았어요. 그때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조선말과 글로 조국의 역사를 배웠고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활동한 김달수, 김석범, 이은직, 허남기, 김시종을 비롯한 카프(KAPF)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습니다. 조선인의 문화정서와 민족 정체성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고, 독학으로 시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도쿄 조선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교측과 교섭하면서 신문부를 창설해 학생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조선대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학교에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설비도 없고 강의를 메모해 주는 보조자도 찾을 수가 없어서 갈등 끝에 중퇴하게 되었죠.


□ 「감춰진 손톱자국」은 조선대학교 중퇴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현 일본영화대학) 다큐멘터리학과에 입학한 뒤 찍은 졸업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영화전문학원 입학전에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루야 한다는 결심을 하신 건가요.

■ 조선대학교를 중퇴한 뒤 25살에 영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긴 했는데, 그때만해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살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도 있어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되려고 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을 2년 앞두고 새로 만들어진 다큐세미나에 흥미가 생겨서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들어서게 된 것은 영화학교 입학전에 일본인 모리겐치티 감독이 1981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세계의 사람들에게: 조선인 피폭자의 기록(世界の人へ: 朝鮮人被爆者の記録)」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영화학교 졸업작품의 테마와 소재를 토론하는 세미나에서 한 일본인 학생이 요시무라 아키라 작가가 쓴 「간토지진」을 읽었다고 하면서 '조선인학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없을까'라고 가볍게 말을 꺼냈는데, 누구도 선뜻 답을 하지 않았어요. 졸업작품 제작기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당시 기준으로 59년전에 발생한 조선인학살을 문학작품도 아닌 다큐멘터리로 과연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거죠.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중 그해 8월 TV뉴스를 통해 59년전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유해 발굴을 위한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도쿄 아라카와 방수로의 하천부지 일대에서 첫 시험 발굴을 한다는 보도를 보게 되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죠. 그곳은 다름 아니라 제가 6년간이나 다닌 조선학교로 가는 등교길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해도 졸업작품팀이 만들어지지는 않아서 친한 학생 5명이 비디오카메라를 빌려서 발굴장소로 뛰어갔어요. 

유해 발굴을 제안한 분은 아라카와 방수로가 지나는 아다치구의 소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기누타유키 선생님이었어요. 작은 체구의 그 여선생님은 평소 알고 지내는 노동조합 간부와 상의하고 발굴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사람 한사람 설득하면서 시민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기누타야키 선생님은 큰 비가 올때마다 발생하는 아라카와강 범람을 막기 위해 1911년 첫삽을 뜬 아라카와 간척공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대규모 공사에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간토대지진 이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혹시 학살당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아라카와강 인근에서 군대와 자경단이 저지른 학살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기누타야키 선생님에게 지금도 학살 희생자들의 '유체'(遺体, 시신)가 매몰된 채 그대로 있지 않겠느냐며, 동네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서 어떡하든 유골을 찾아 위령을 해드려야 한다고 당부했어요    


□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한 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어떤 것이었을까요. 

■ 제가 중학생때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의 사촌오빠, 즉 외당숙이 간토대지진 당시 아라카와 근처 무코지마섬에 있는 한 술집의 '오시이레'(押入おしいれ, 일본주택의 붙박이장)에 숨어 있다 살아남은 일화인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때만해도 학살의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라카와 강 옆에 있는 옛 요츠기다리 제방 아래에서 당시 학살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체를 석유로 화장한 뒤 매장했다고 증언한 일본 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발굴 장소를 검토했지만 59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천 부지의 모습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어요. 결국 정확한 장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굴을 시작했죠.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 한 조선인 희생자 발굴작업은 처음에는 대형 포크레인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청년들이 그 안에 내려가서 손과 삽으로 퍼 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하루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살펴보고는 다시 원상회복시킨 뒤 또 다른 구덩이를 파는 식으로 3일간 3개의 구덩이를 번갈아 팠다 덮었다하는데, TV보도를 보고 여기 저기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어요. 구덩이 주위에 선 노인들은 흥분한 어조로 '군대가 조선인을 묶어서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는 등의 증언을 쏟아내는 등 난리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발굴은 3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조사도 하지 못한 채 일단 끝났습니다.

졸업작품으로 내기 위해 시작한 촬영도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출 마감에 쫓겨 편집에 들어갔습니다. 제작에 참가한 학생들과 작품구성에 대해 의논하면서 여러 번  편집을 바꾸었지만 만족한 작품으로 마무리할 수가 없었죠. 3년의 학업을 끝낸 우리가 졸업을 앞두고 뭔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졸업작품으로 내도 좋은지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결정적 증거,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 간토 조선인학살 이후 6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일본 정부의 조선인학살 부정, 학술 연구 부족은 물론이고 학살 가해자의 증언거부,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로 다른 기억 등 시대적 제약과 접근의 한계, 아쉬움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특별히 도움받은 사람,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감춰진 손톱자국」을 완성하는데 제일 큰 애로는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발굴 이후 아라카와 지역과 일본 사회에서는 과연 1923년에 조선인학살이 있었던가? 아라카와에서 조선인이 300명 이상 학살당하고 유골이 매장된 것이 사실인가? 등 목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도 앞서 발굴 현장에서 흥분하며 증언한 일부 노인들은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일본인 7명과 조선인 3명으로 구성된 제작팀내에 조선인학살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감독을 하는 제 자신도 간토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고 영화제작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도 미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학살의 가해자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영화에 등장시켜야 하는데, 59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속에 묻힌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어요.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그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재일 조선인으로부터 1923년 당시 요츠기다리 제방위에서 폭행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피해자가 생존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알려준대로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의 주소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죠.

82세의 고령이었지만 기억이 분명하고 아라카와 발굴 소식을 TV방송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발굴 마지막 날 조인승 할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르신, 발굴 장소에 저와 함께 한번 나갈 수 없을까요?'

할아버지는 발굴현장을 찍는 TV화면을 보면서 '안가겠다. 거기서 뭘하는지...유골이 안나오지 않나'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할아버지는 '그 날을 회상하기 싫다'는 생각이었어요. 본인이 요츠기다리 제방에서 일본 소방대로부터 '도비'(화재현장에서 장애물을 해체할 때 쓰는 막대기에 달린 낫)로 다리를 찔리며 폭행당한 일, 함께 아라카와로 피난 온 조선인 3명이 눈앞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걸 목격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싫었던 거죠. 그날 할아버지의 사촌형도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희가 영화를 완성하는데 증언이 꼭 필요하다고 간곡히 요청하니까, 마지막 구덩이를 다시 메꾸기 2시간 전에 우리 차로 발굴장소로 이동해 부상당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한걸음 한걸음 구덩이 옆으로 다가서서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 안을 쳐다 보셨습니다.

저희는 이미 영화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인승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전문 촬영감독을 영입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학생 몇명은 1년 반동안 구직 활동도 포기하고 영화 완성을 위해 한몸처럼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 온 82년간의 인생을 통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쓰라림과 억울함을 같이 호흡하는 기분으로 배우는 나날이었죠. 제작팀도 하루 하루 작업이 거듭되면서 갈등이 풀리고 민족의 차이를 넘는 우정을 쌓아나가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아쉬운 점도 있었겠습니다.

■ 사실 40년동안 영화를 못찍었던 시절이 있었죠. 돈 벌어가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제가 2017년 부산에서 유족회를 만들었는데, 왜 그랬냐하면 영화를 찍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어요. 여기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곳을 찾아가서 도움도 청하곤 했어요. 여러 말 하기는 어려운데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조선(한국)은 너무 날카로웠어요.

경제적인 문제, 선입견과 이념의 장벽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죠. 영화로만 보면 초기 작품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죠.

19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필름을 썼는데, 이건 한번 걸면 3분밖에 못찍었어요. 두번째 작품(불하된 조선인)에는 조선인 살해에 가담한 일본인 노인이 '죽기전에 마시고 싶은 만큼 술을 사주었다. (조선인이) 원하는대로 총으로 죽이기 위해 들고 있던 칼 대신 돈을 들여서 총을 빌려서는...좋은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어...'라는 증언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행을 감추고 나는 양심적으로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슬쩍 덮어서 했던 말인데, 죽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기억을 해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마음은 알지만 그대로 그냥 기록을 하겠다는 마음이 컸죠.

첫번째 영화(감춰진 발톱)에서 조인승 할아버지가 9월 초하루부터 일본의 조선인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확인해주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학살을 보았다'고만 했던 가해자가 '학살에 가담했다'고 고백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9월 5일 이후에는 조선인을 보호한다고 선전하면서 치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의 수용소에 가두었는데, 전쟁포로로 다룬 조선인들(2만 3,715명-강덕상 『현대사자료 6권』)을 민간 자경단에 '불하'해서 그들이 죽이도록 했어요.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물었더니, '칼 대신 총으로 한 번에 죽고 싶다'고 했다...총을 구해서 조선인을 줄지어 세워 두고 3명을 한 명씩 총으로 쐈다"는 증언으로 그같은 사실이 확인된거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까 중간에 다른 질문을 해서 이걸 놓치면 안되었으니까. 자신이 조선인을 죽였다는 일본인의 증언이 책으로는 있었지만 영상으로는 카메라에 처음 담게 된 것이거든요. 그때 32살이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만, 그렇다면 죽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무슨일을 하다 왔는지, 가정은 있었는지. 보통 사람의 대화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때는 왜 그런 걸 묻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있어요. 그때는 아마튜어였어요.

강덕상, "내가 너한테 반했다"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강덕상 선생님도 그때 처음 만나신거죠.

■ 네. 또 한 분, 「감춰진 손톱자국」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잊을 수 없는 저의 은인이자 인생의 스승인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입니다. 강 선생님은 제가 제작과 편집의 방향을 못잡고 헤맬때 저의 어두운 역사탐구에 바른 눈을 열어준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책으로만 알고 있던 강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해서 자택으로 찾아간 것이 27살때입니다. 영화에 필요한 학살사진과 자경단의 실체를 보고 싶어하는 저의 조급한 마음을 감지하셨는지 강 선생님은 저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싶은가?  지금까지 간토지진에 대해 어떤 책과 자료를 읽고왔는가? 도쿄의 도서관과 공문서관에 가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학을 중퇴했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긴장감과 교양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똑똑한 답을 하지 못하고 선생님 댁에서 나왔습니다. 학살 현장 사진을 하루 빨리 보고 싶었던 제작팀은 '감독이 강 선생님 댁까지 찾아갔다가 사진 한장 보질 못하고 돌아왔다'고 모두 한숨을 쉬었죠.

하지만 선생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신 건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1982년 당시만 해도 일본인 학자와 출판사가 낸 조선인학살 관련 연구서가 많지 않았어요. 더러 있더라도 간토지진의  자연재해 피해나 도쿄 일대에서 자경단이 자행한 일본 사회주의자 학살사건(가메이도사건),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 일가가 육군 헌병대에 살해된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 등을 조선인 학살과 나란히 다룬 책이 주류였습니다.

선생님은 영화 제작 전에 제가 조선인학살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갖고, 자기 발로 도서관과 도쿄도 공문서관, 국립공문서관에 가서 조선인학살에 관한 일본군과 경찰의 문서와 동향, 자경단의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셨던 거죠. 훗날 생각해보아도 선생님의 그 '엄격한 진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간토대지진 당시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목격자와 증인,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영화에 출연시키고 남아있는 지도와 자료를 함께 사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 영상과 기록문서를 담아 찍으면 어떤가 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고생끝에 목격자를 찾아도 카메라 앞에서는 '조선인을 죽였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학살 장면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라카와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입이 무거웠어요. 반면 세월이 지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간 노인들중에는 당시 학살 장면을 그림 그리듯이 증언하는 사람도 있어 촬영이 잘됐던 일도 있습니다.

그 노인들이 보시기에 손주뻘인 저희가 노인들이 다니는 목욕탕에 열심히 쫓아다니고 어떤 날엔 노인들이 하는 게이트볼 경기장에 들어와서 함께 운동도 하니까 당신이 목격한 학살장면만은 이야기해주자는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저도 20대 젊은이였으니까요. 

영화제작이 어려움에 닥칠때마다 일본인 노인들의 증언과 강덕상 선생님의 연구, 무수히 수집한 자료 덕분에 일본 정부가 학살의 흔적을 숨기고  희생자 조사를 방해하고 심지어는 조선인의 유체와 유해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던 은폐의 단편을 하나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1923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배는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오충공 감독은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가해자인 일본인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고 했다.

유언비어만 믿고 왜 조선사람을 그렇게 죽였느냐고 물으면, 가해자들은 "머릿속에 '삐쩍'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조선 정벌, 조선인 토벌'이라는 말이 횡행했었다"고 당시의 광기어린 풍경을 기억했다. 결국 국가가 개인을 집단학살의 가해자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 2년전 별세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은 오 감독님의 영상작업에 평생의 길잡이이자 동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랜 세월 교유한 강덕상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제가 처음부터 강덕상 선생님을 만나서 영화를 만든게 아니고 영화를 만들다가 고민이 생겨서 만난 사람이 그 분이었어요. 강선생님은 영화감독도 아니고 역사학자이잖아요.

강 선생이 저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쓰는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습니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합니다"라고 짐짓 딴청을 부리기도 했지요.

2011년 동일본지진때는 집이 무너지는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는 질책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엄격한 분이었지만 그만큼 저와 제가 하는 영화작업에 기대를 많이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한마디로 감독님에게 강덕상은 어떤 존재입니까. 영화 만드는데 자문도 하시고 주례까지 해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만났잖아요.

■ (얼굴을 감싸쥐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린 목소리로) 두번째 아버지같은 분이지요.
 
돌아가시기 2년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영화를 많이 못만들었다는 자책도 있었고...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이 교수(강덕상 선생의 히토츠바시 대학 제자, 강덕상자료센터 운영위원) 앞에서 말하기 거북한대 강 선생님이 간혹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너한테 반했다"구요.

주제를 가지고 이런 어려운 영화를 만든 젊은이가 있었다고 격려하느라고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마음에 안드신 것도 있었겠지만 그저 반했다고 말씀하신 거겠죠. 너무 고마운 말씀이고 영광스러운 마음이에요. 내가 영화를 많이 만들지 못할수록 강 선생님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마지막 영화는 강 선생님의 그 말씀때문에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네 편의 간토 영화를 만들면서 왜 다른 영화는 만들지 않는지, 밝은 영화는 왜 만들지 않았느냐고요.

그런데 나한테는 테마가 너무 무거웠어요. 아니 테마가 무거운 것보다도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거에요. 알지 않아요. 그런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요. 드라마로 못만들잖아요.

강 선생님은 '논다'고 혼을 내지 '쉰다'고 다정하게 말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일에 엄격하신 분이 내 앞에서 일본말로 '너한테 반했다'고 그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한동안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꼈다.

□ 분위기를 좀 바꿔서 강선생님이 주례 봐주신 이야기 좀 해 주시죠.

■ 재미난 이야기인데, 제가 건방지게 강덕상 선생님에게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첫번째 작품과 두번째 작품 사이에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죠. 그때 나이가 33살이었습니다. 

마누라는 역사도 모르고 내가 영화감독인지도 몰랐어요. 일본에 온지 5~6년밖에 안되는 아가씨였거든. 나를 그저 밥 먹으로 오는 손님인줄만 알았지. 어머니(장모)는 제주도분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사정이 있어서 곱창집을 하고 있었어요. 첫번째 영화를 만들고 두번째 영화를 준비할 때 제 사무실이 그 곱창전골집  바로 옆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그 집에 당시 여자친구하고 밥먹으로 갔다가 거기서 알게된 거에요. 

강 선생님은 대학 교수님이니까 제자가 많이 있는데, 나는 그 제자도 아니잖아요. 우리 마누라는 제주도에서 건너 와서 엄마 일을 돕고 있던 그저 이쁜 아가씨일 뿐이었고. 23살때였거든. 뽀뽀도 안한 여자를 강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는데, 어디 가냐고 자꾸 묻는거에요. 강 선생님은 아가씨가 이쁘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그 많은 제자들 주례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고 난처해 하시다가 결국 해주시긴 했어요. 나와의 인연이란 것도 어릴때부터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 그저 영화를 좀 도와주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주례로서 신랑 신부 소개부터 해야 할 분이 계속 영화해설만 했어요. 하객들을 배려해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주례사를 하는데 너무 오래하니까 제주도에서 온 마누라 집안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 결혼식에 야마다 쇼지라는 간토대지진 연구자가 내빈으로 참석하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도 30분 이상 영화 애기를 하는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집 친척들이 또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렇게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 2023년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이하면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텐데, 먼저 일본 정부의 태도,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움직임,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감독님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고 아베수상이 2016년 무렵에 '아름다운 일본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침략에 사죄를 해야한다는 진보세력과  역사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올해 100주기 조선인추도제까지 7년간 연속해서 추도사를 보내는 일을 거절했습니다. 고이케 도지사는 도쿄올림픽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선언했지만 막상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서 있는 조선인학살 추도비 앞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급기야 10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는 또 다시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극구 부정하고 있는데,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간토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지난 9월 1일 차별주의 단체인 '소요카제'는 도쿄 도립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진실의 위령제'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인 피해자들은 실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변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등 더욱 교묘하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학살을 시도했습니다.

학살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신성한 추도비 앞에서 사자(死者)를 모욕하고 추도제를 더럽히는 '소요카제'의 집회를 도쿄도는 처음부터 허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기동대 경찰과 도쿄도 공원과의 직원들이 소요카제의 가짜 위령제를 보호하듯이 바리게이트로 벽을 만든 그 앞에서 차별과 역사수정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 한국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단결된 힘으로 조선인 추도비를 지켰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상황입니다.


□ 올해 간토대지진 학살 희생자 추도제에서는 조선인 희생자와 함께 중국인 희생자 문제를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하구요. 이에 대한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중국인 유족은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자가 약 700명인데, 명단도 다 있습니다. 지금 증손자까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 있어요. 해마다 일본에서 추도제가 있을 때 약 20명 정도가 일본에 옵니다.

그 분들의 요구는 여러가지인데, 첫번째는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가 일본 외무성에 희생자 명단을 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인정을 했어요. 명부도 남아있구요. 일본정부는 그때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희생자 1명에 20만엔을 지급한다는 도장을 찍었습니다.지금도 그 계약서가 남아있는데 일본 정부는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된 거에요.

그래서 중국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 우선 20만엔을 갚으라,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중국인 희생자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유골이나 묘비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인 희생자는 강덕상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최소 6,600명 이상입니다. 더 많은지 모릅니다. 희생자 명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6,661명의 명단도 있습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에도 발표가 나왔는데,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거죠.

중국인 희생자들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한국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정부에 법적인 주장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학살의 증거, 명단이 있어야지요. 유골과 유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어디에 했는가? 일본 정부에 따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에는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20여군데의 시민단체와 총련, 민단이 만든 모임이 있는데 어디나 할 것 없이 유골이 없습니다. 중국인 유가족과 한국인 유가족이 같이 기자회견하면 서로 형편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따로 따로 하고 있어요.

올해 8월 31일에 한국에서 두분만 왔지만 그래도 유족을 대표해서 기자회견을 한 겁니다. 그때 함께 왔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측 변호사가 한국인 유족을 위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한국정부는 올해 100주기까지 진상규명과 추도를 위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한국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 1923년 9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무대신 조소앙 명의로 일본 총리 앞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 항의공문을 발송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 100년동안 역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학살 피해자의 구제를 한번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기나라 국민, 해외공민의 죽음에 애도의 말도 없었고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 앞에 100년동안 화환 한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합니다. 


□ 다큐멘터리 제작 외에도 2017년부터 한국내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는데에도 적극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현황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세편의 간토학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거나 명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났습니다. 2017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를 만들었고 올해 100주기 추도제에는 일본으로 유족들을 모셔가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문(10.16)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회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유족회가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희생자 명부와 유골을 비롯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은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사람'으로서 '살아있던'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아파하고 이같은 학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100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든 영화가 희생자의 넋을기리고 두번 다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사이에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굳은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이 지금 하고 있는 유족 모임 구성을 혼자서 하는 것 보니까 참 벅찬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유족모임과 함께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제대로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안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 이후 일본인의 잠재의식속에 가려져있던 조선인에 대한 열등감이 분출한 사건'이라는 제대로 된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일본에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추도회 실행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오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본 술집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붙잡고 집요하게 딱 작품을 만들었잖아. 그거 대단한 거에요. 그런 작품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라고 그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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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4개 크기 오름에 불 놓는 들불축제가 세계의 자랑거리?

[제주의 녹색분칠] '불 없는 들불축제'라고? 기후위기 역행하는 들불축제 폐지해야

부순정 제주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기사입력 2023.10.27. 07:59:16

 

"제주에선 오름 하나를 통째로 태워야 봄이 온다"는 풍문이 있다. 제주들불축제를 소개하는 블로그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제주도민 입장에서는 참 무섭고 마뜩잖은 말이다. 제주의 봄은 음력 2월 초하루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과 함께 온다. 영등할망은 2월1일에 제주에 와서 보름 동안 온 섬을 돌아다니며 땅과 바다에 생명의 씨를 뿌리며 봄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떠난다. 그래서 영등할망은 '바람의 신'이면서 '봄의 신'이다.

 

그런데 생명들의 터전인 오름에 석유를 뿌리고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는 들불축제가 제주의 봄의 전령사로 둔갑하다니!! 영등할망이 뿌린 생명의 씨앗을 모두 학살하는 일이 제주의 전통으로 각인되다니!!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아니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제주들불축제 ⓒ제주시청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민선 지방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는 축제와 이벤트가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런 문화사업화 전략은 중앙정부가 '5대 국정지표'로 문화관광의 진흥을 설정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고 1997년 제주에서도 북제주군(1946년 8월 1일부터 2006년 6월 30일까지 존재했던 제주특별자치도의 폐지된 자치군)에서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를 시작한다. 구좌면, 추자면, 한림면, 조천면, 애월면의 군민들이 모두 모여 정겹게 즐겼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는 그러나 특별자치도 출범으로 북제주군이 폐지되면서 제주시가 주최하게 되었고 2013년부터는 3월 경칩이 낀 주말로 개최 시기를 옮겨 '제주들불축제'로 이름을 바꾸며 몸집을 키워갔다.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들불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유망축제(2006~2014), 우수축제(2015~2018), 최우수축제(2019), 문화관광축제(2020~2021) 등 각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집행된 예산 규모도 지난 10년간 새별오름 일대에 조성한 광장,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 비용 약 100억 원은 논외로 치고도, 단 4일의 축제를 위해 2023년 기준 16억 9천만 원의 예산을 집행하며 매년 30만 명이 찾는 제주의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대표축제라는 화려한 타이틀 이면에 들불축제는 환경훼손, 기후위기 역행, 오름생태계 파괴, 산불위험 등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왔다. 특히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2022년과 2023년에는 전국적인 산불재난경보 발령으로 최근 4년 동안 행사가 취소되거나 변경되며 그 지속가능성마저 위태로워졌다. 2023년 들불축제는 제주시가 첫날 행사를 치르고 나서야 오름불놓기와 달집태우기 등 불 관련 프로그램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리며 지역사회 혼란, 관광이미지 하락, 예산 낭비, 행정력 낭비 등의 논란이 증폭되기에 이른다 

 

기후위기를 역행하는 반생태적. 반환경적 들불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제주녹색당은 지난 4월 '제주특별자치도 숙의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주민참여 기본조례'에 따라 19세 이상 제주도민 749명의 서명을 받아 숙의형 정책개발을 청구했다. 들불축제의 상징성과 논쟁성을 고려한다면, 숙의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들불축제 존폐에 대해 제주도민들이 직접 참여해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리고 지난 9월 19일, 200명의 도민참여단이 참여하는 '제주들불축제 도민 숙의형 원탁회의'가 열렸고, 10월 11일 제주시장은 원탁회의 결과에 따른 권고안을 받아들여 "탄소배출, 산불, 생명체 훼손 우려가 있는 오름불놓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제주의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축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기획부터 축제 운영까지 시민 주도 축제로 탈바꿈시키고, 새로운 콘텐츠 개발 등을 위해 2024년 들불축제는 개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들불축제가 열리는 애월읍 봉성리 일대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도의원은 '원탁회의에서 결정이 나더라도 제주도가 주도하는 사업이므로 제주시장은 결정 권한이 없다, 예산을 심의하는 도의회가 결정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며 제주도의회가 만든 조례를 도의원 스스로가 무용지물로 만드는 자기 모순적 망언을 이어가고 있다. 10월 제주도의회 임시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이른바 '불 없는 들불축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지구가 불타고 있는 마당에 기름과 화약을 사용해 축구장 4개 크기의 오름에 불을 놓아 불구경하라는 들불축제는 이제 세계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웃음거리' (2023.3.8. 제주녹색당 논평)가 될 것임이 분명함에도 여전히 논란인 이유는 무엇일까? 들불축제 원탁회의에서 오고 간 주장들을 들여다보며 들불축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해보려고 한다. 

 

1. 환경훼손 문제보다 지역경제활성화가 더 중요하다? 

 

2000년 새별오름으로 축제장소가 고정된 이후 새별오름의 환경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이어졌다. 지속적인 불놓기로 인해 다년생 식물이 사라지며 식생이 단순화되고 토양건조 및 토양침식을 가속화시켜 지표면의 사막화도 발생한다(2009.'새별오름의 초지화입에 의한 색생변화 연구', 제주대학교 생물학과)는 조사뿐만 아니라 특히 화약 등의 무차별 살포로 토양오염이 심각하다(2013,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제주지역대학 농학과)는 결과는 땅속으로 물이 잘 스미는 제주 화산지질 특성상 토양오염이 지하수오염과 바다오염으로 이어진다는 문제를 진단하며 통합적인 조사가 시급함을 경고했다. 

 

그러나 제주시는 지난 20여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새별오름훼손, 생태계파괴, 토양오염, 지하수오염, 바다오염, 발암물질로 인한 인체 영향 등에 대한 행정조사와 평가를 시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새별오름 일대에서 30건 이상의 공사를 시행하면서 공사에 대한 소규모환경영향평가를 수차례 회피해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행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행정이 법을 위반하고 환경파괴를 눈감으며 축제는 지속되었고 급기야 오직 '불'을 놓기 위해 놀라운 일들을 벌이게 된다. 

 

정월대보름 시기에 진행되던 초기 들불축제는 강풍과 폭설로 불놓기가 연기되는 경우가 잦았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 2013년부터 3월 이후 경칩이 낀 주말로 개최 시기를 옮겼지만 그 이후도 불놓기가 순조롭진 않았다. 2016년 비 날씨가 예보되었으나 들불축제는 강행되었고 안개와 폭우, 강풍으로 불이 붙지 않자 석유를 쏟아부어 오름에 불을 놓았다. 이를 지켜보는 도민들은 '폭우와 강한 바람으로 연기만 더해갔고 듬성듬성 타다만 새별오름을 지켜보는 것이 씁쓸했다'고 전한다. 석유 사용은 축제 시작되던 해부터 이어지던 것이었고 불똥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을 놓는 주변에 락스를 탄 물을 농약 뿌리듯이 뿌렸댔다고도 한다. 

 

석유사용 비판이 일자 화약과 폭죽을 사용해 불을 놓기 시작하는데 2019년에는 화약 2,650kg을 사용했고, 코로나가 창궐했던 2021년에는 비대면으로 차량 400대만 출입시켜 5,600개가 넘는 폭죽과 1,000kg의 화약을 사용해 오름에 불을 질렀다. 폭죽과 화약을 사용해 오름에 불을 놓았으니 그 잔류물도 오름에 그대로 남았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그 잔류물들이 바람에 날려 주변 식생과 탐방객들에게까지 날아간다. 날리는 재를 맞으며 관광객들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오름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도 진정 제주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지난 20년 동안 식생조사, 생태계조사, 토양오염조사, 탐방객에 대한 피해조사, 지하수오염 및 바다오염 조사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별오름 환경회복을 위해 오름휴식년제 시행해달라는 요청도 이어졌지만 제주시 관광진흥과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들불축제를 진행해야 하므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 번 훼손된 환경을 회복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돈이 들까? 아니, 회복이 가능할까? 지난 20년 오름에 불을 지른 대가를 우리는 어떻게 돌려받게 될까?

 

2. 들불축제는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계승? 

 

들불축제 홈페이지에 따르면 '해충구제를 위해 소나 말을 풀어놓던 방목지에 불을 놓는 제주의 방애불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한다. 제주의 목축문화인 방애(들불)는 중간간 지대 목축민들이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 유충구제 및 잔초제거를 위해 방목지에 방화선을 구축하여 불을 놓던 자연친화적 생태농법이다.

 

그러나 들불축제는 방애불의 자연친화적인 정신은 내던진 채 석유를 쏟아붓고 화약을 터뜨려 인위적으로 불을 지르는 반환경적, 반생태적 방법으로 진행되면서 '방애불 전통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에 더해 화산섬 제주 생성의 근원이 불에서 유래했다며 밑도 끝도 없이 올림픽 성화 채화를 흉내 내고 삼성혈에서 고위공직자들이 채화한 불씨를 제주시청까지 봉송하며 전통을 윤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제주의 전통 목축문화를 계승하는 것이 목표 라면 새별오름을 통째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목축이 행해지던 마을목장을 개발의 광풍에서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 먼저이고 자연친화적인 제주도민들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3. 지역민들이 참여하고 즐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워가는 축제?

들불축제는 1997년 1회 개최 당시 1만3000명이 찾았던 소규모 행사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애월읍과 구좌읍 중산간 마을 공동목장을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치러졌고 당시는 북제주군의 군민 단합대회 느낌이 강했다. 행사가 끝나면 큰 구덩이를 파서 쓰레기들을 한 번에 묻어버렸다는 이야기가 흠으로 전해지지만 말이다. 

 

▲제1회 정월대보름 들불축제 ⓒ들불축제 홈페이지

 

그러나 몸집을 키워 제주시가 개최한 후로는 제주도의회에서조차 지역주민이 즐기는 축제가 아닌 동원된 축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제주시 전 부서가 일제히 동원되어 축제 부스를 운영하는 관주도 축제'(2015년 제주도의회 김용범 의원), '들불축제 찾아온 39만 명 대부분 각 읍면동에서 동원된 도민들이고 전국에서 읍면동별로 천막을 친 곳은 들불축제 밖에 없다'(2018년 제주도의회 안창남 의원) 

 

그리고 '제주시가 들불축제 평가에서 입도관광객 4만 4천명인데 축제엔 8만4000명으로 뻥튀기하고 있다'(2012년 제주도의회 강경식 의원)는 비판도 꾸준히 이어져 '들불축제가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유망축제, 한국축제 50선에 선정될 만큼 제주시의 대표축제이지만 결국은 대다수 도민이 참여하는 도민축제에 불과하다'(2013년 제주도의회 오충진 의원)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체 문화관광축제의 경우 관광객의 비율이 70% 정도라면 들불축제는 관광객 비율이 20% 남짓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김의근, 지역축제의 특성화 발전방안 연구-제주들불축제를 중심으로, 제주관광학연구 제21집, 2018. p35) 

 

매년 16억, 17억 원의 돈잔치를 벌이는데 관광객도 오지 않고 지역주민들조차 즐기지 못한다면 들불축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제인지 묻고 싶다. 

 

4. 제주도민의 역사를 지워버린 들불축제, 새별오름은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전적지? 

 

제주들불축제가 10돌을 맞은 2006년에는 최영 장군이 목호들을 무찔렀던 새별오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추자도 최영장군 사당에서 성화 채화를 한 뒤 제주도 일원을 돌며 봉송행사를 하고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불을 점화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을 가진 승자의 입장에서만 역사를 기억하는 과오이고, 역사에서 제주도민을 지워버리는 만행이다. 당시 도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안다면 감히 행정이 나서 새별오름을 전적지로 추켜세울 수도, 폭죽을 쏘아 올리며 흥겨운 축제를 열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는 1153년 고려에 편입된 후 150년간 지배를 받았고, 이후 83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았다. 원은 제주에 1500명 가량의 군사를 주둔시켰고 제주 목마장은 원 제국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경영되며 제주 사람들은 주둔군의 한 형태인 목호(말 키우는 오랑캐)와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원나라가 저물고 명나라가 고려에 말 2천 필을 요구하자 목호들이 이를 거부하며 결국 전쟁은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살던 제주 사람들의 숫자에 가까운 2만 5천여 고려군은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 변발을 한 자, 목호를 도운 자'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토벌을 자행했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과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무고한 많은 제주 사람들이 죽어갔다. 

 

제주 도민의 입장에서 '목호들을 무찌른 전적지'로 새별오름을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애통하고 한스러운 일인지 행정은 진정 몰랐던 것일까? 게다가 새별오름과 그 주변 노꼬메오름, 유수암 일대는 4.3 당시 소개작전으로 모두 초토화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위령비는 못 세울망정 폭죽을 터뜨리는 축제를 여는 이 역사적 만행을 이제 그만하자는 것이 들불축제 폐지의 또다른 이유이다. 

 

새별오름이 다시 별처럼 빛나기를 

 

▲2021 불놓기 후 새별오름 ⓒ 제주들불축제 홈페이지

 

새별오름은 '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금성처럼 빛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행사가 끝나면 새까맣게 타버린 새별오름을 바라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하던 원탁회의 참가가(50대 남성)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내건 "다함께 미래로, 빛나는 제주"라는 슬로건에서 별처럼 빛나야 할 새별오름은 제외되어 있다. 앞으로 도민들이 참여해 제주의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축제를 찾아가는 과정에 '별처럼 빛나야 할 새별오름'을 다시 복원하는 방법도 꼭 찾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원탁회의 권고안대로 '제주의 생태, 문화적 가치를 지키며 시민들이 참여해 만드는 축제'를 만드는 첫걸음은 특정 세대가 과대 대표된 도민참여단 구성, 운영위원회 운영 등 들불축제 원탁회의 과정을 점검하고 검증하는 일임을 제주도정은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제주투데이, 생태적지혜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같이 실렸습니다. 

 

▲제주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부순정 ⓒ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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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니 검찰이 ‘윤 대통령 보위 수사’ 비판 받는 것”

  • 기자명 윤유경 기자 
  •  
  •  입력 2023.10.27 07:33
  •  
  •  수정 2023.10.27 07:36
  •  
  •  댓글 0

[아침신문 솎아보기] 검찰의 기자 압수수색, 한겨레·경향 1면

박근혜 만난 윤석열, 중앙일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동반자”

동아일보 대기자, 인요한 혁신위에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

검찰이 지난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검사 시절 부실수사 의혹을 보도한 경향신문 전·현직 기자와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 기자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경향신문은 1면에서 본지의 입장을 전했고,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1면부터 2면까지 실은 본지 입장에서 “이 건과 관련한 취재 및 보도 전 과정에서 언론윤리에 저촉될만한 행위를 일체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며 “검찰이 예단에 근거해 언론사를 무리하게 수사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져야할 것이다. 경향신문은 앞으로도 권력 감시·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을 것임을 더불어 밝힌다”고 했다.

▲ 경향신문 1면 기사 갈무리.

만평에선 ‘국민은 늘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돼!’라는 글을 빨간펜을 들고 ‘기자는 대통령이 늘 옳다고 믿어야(해)! 어떤 비판도 해선 안돼!’로 바꾸는 윤 대통령 모습을 그렸다. 경향신문 현직 기자 주거지 압수수색 현장 사진도 지면에 실었다.

▲ 경향신문 만평 갈무리.

▲ 경향신문 사진 갈무리.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 <‘윤석열 검증보도’ 또 압수수색한 검찰>에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검증 보도를 문제 삼아 검찰이 언론인 압수수색을 이어가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기사 <‘의혹보도’를 가짜뉴스 규정…정권 비판언론 잇단 정조준>에선 “‘권력의 입맛’에 따르는 ‘정치 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며 “특히 검찰이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없는 명예훼손 혐의인데도 직접 수사를 확대하고 있어, 재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윤 대통령 처가가 연루된 ‘양평 공흥지구 개발특혜 의혹’을 수사했던 검찰이 핵심 피의자인 김건희 여사 오빠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반년 가까이 청구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도 이어졌다. 이로 인해 검찰이 핵심 증거물이 될 수 있는 김 여사 오빠의 휴대전화는 압수수색 대상에서 빼버렸다는 것이 핵심이다. 관련해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러니 검찰이 ‘윤 대통령 보위 수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한국일보도 관련 사설을 내고 “이런 정도의 취재와 보도가 강제수사의 대상이 되는 건 언론자유에는 재앙 수준”이라며 “오로지 윤 대통령 관련 의혹을 제기한 매체만 수사받는 점도 공교롭다. 더구나 특별수사팀까지 꾸려서 기자들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행태는 전례조차 없었다. 검찰 역사와 언론 역사에서 크나큰 퇴행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 한국일보 사설 갈무리.

 

박근혜 만난 윤석열, 중앙일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동반자”

윤 대통령이 지난 26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제44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27일 대다수 아침신문들은 1면에 추도식에서 악수하는 윤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화답’, ‘통합’이라는 긍정적 단어로 둘의 만남을 묘사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윤 대통령이 국민 통합이 아닌 보수 통합만을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 추도사 ‘박정희’ 8번 언급, 박근혜 ‘우리’ 7번 화답> (중앙일보 4면 머리기사)

<尹 “대통령 돼보니 박정희 위대함 느껴”>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尹, 朴 만나 “박정희 혜안-결단 배워야”…총선앞 보수결집 행보> (동아일보 6면 머리기사)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추도식에…‘변화 다짐’ 무색> (경향신문 1면 기사)

<박정희 추도식 간 윤 대통령, 변한다더니 ‘보수 결집’부터> (한겨레 1면 기사)

중앙일보는 “함께 걸으며 편안한 몸짓과 대화를 주고받는 게 연대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면서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을 동반자라 일컫는다”는 문장으로 1면 머리기사를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위업을 다시 새기고, 이를 발판으로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강조했다. 정치 양극화 속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추모와 재평가를 통해 ‘통합’ 흐름이 속도를 내고 있다고도 평가했다.

▲ 중앙일보 기사 갈무리.

▲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반면, 경향신문은 “윤 대통령의 ‘차분한 변화’ 다짐 이후에도 보수 내부 통합 신호만 두드러지는 모습”이라며 “최근 민생·소통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 행보의 방점이 ‘보수 통합’에 찍히면서 ‘국민 통합’ 신호는 미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또한 “대통령 스스로 ‘내 편 챙기기’와 ‘보수 결집’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며 “이날 행보는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과 대조를 이뤘다”고 비판했다.

▲ 경향신문 기사 갈무리.

김진우 정치에디터는 경향신문 칼럼 ‘에디터의 창’ <착시와 직시>에서 “(윤 대통령이) 지금도 뭘 ‘반성’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며 “협치의 시금석으로 지목됐던 제1야당 대표와의 만남은 거부하고 있다.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달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태원 참사 시민추도식은 ‘정치적 성격’이라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KBS 사장 내리꽂기, 언론에 대한 잇따른 압수수색 등 언론 길들이기 논란은 진행형”이라고 짚었다.

이어 “국정기조 전환 없는 태세 전환은 위기모면용 보여주기일 뿐”이라며 “일단 소나기부터 피하고, 좀 살 만해지면 다시 본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척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면 국민은 다 안다”고 했다.

동아일보 대기자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지난 26일 12명의 혁신위원 인선을 완료했다. 비윤석열계 인사들이 없는데다 혁신 대상에 가까운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변화·쇄신은 없었다’는 신문들의 냉혹한 평가가 이어졌다.

▲ 한겨레 기사 갈무리.

이기홍 동아일보 대기자는 ‘이기홍 칼럼’에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물러나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기자는 “김 대표가 즉각 물러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며 “책임을 져야 한다. 구청장 선거라는 일개 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재확인된 땅에 떨어진 여당의 위상과 중도층 이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아울러 “개혁의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직할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김 대표가 있는 한 아무리 혁신위가 개혁안을 내놓아도 당정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길 국민은 많지 않다”며 “대통령의 운신 폭을 위한 김 대표의 선제적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 동아일보 칼럼 갈무리.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당 안팎에선 ‘돌려막기 인사’란 비판도 나온다. 이대로 혁신이 제대로 추진될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며 “이제라도 혁신위의 권한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얘기하겠다고 큰소리만 치기보다 진짜 할 말을 하고, 혁신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무엇보다 당의 기득권 내려놓기를 주도하려면 혁신위원들 자신의 총선 출마 포기 선언도 필요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비윤’ 못 태운 인요한 혁신위…과반이 여성·MZ세대만 6명>에서 “윤 대통령과 당 주류인 친윤석열계에 맞서 쓴소리할 인사는 없어 혁신이 가능하겠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했다. 사설에서도 “이렇게 해서 여당이 할 말을 하고, ‘용산 출장소’란 오명을 떨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며 “독립성을 잃은 혁신위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혁신위는 ‘윤심만 보는 식물정당’이란 국민 질타를 무겁게 새겨야 한다”고 했다.

▲ 27일 아침신문 1면 갈무리.

 

 

윤유경 기자602@mediatoday.co.kr

#아침신문 솎아보기#김기현#인요한#혁신위#국민의힘#윤석열#박근혜#박정희#국민 통합#보수 통합#압수수색#기자#경향신문#뉴스버스#언론탄압#언론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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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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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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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 비극사 ②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6%의 땅에 살던 31%가 52%를 차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안을 제시했다. 아래 표는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유대인의 비중은 31%였다. 이에 반해 소유하거나 정착하고 있던 땅 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둘째, 31%의 인구가 소유한 땅이 6%였으니,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유엔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52%를 분배하는 안을 제시했다. 유엔은 애당초 편파적이었다. 유엔의 분할안은 공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인근 아랍 국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75만 명이 30%의 물을, 4만 5천 명이 70%의 물을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는 (조사 시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해 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4만 5천 명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으로 가자지구의 수도시설은 거의 파괴되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해야 했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가 사용하는 물의 30%을 75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나머지 70%의 물은 4만 5천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려 죽이려’ 했다.

    분노에 차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봉기에 나섰다.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발단 계기는 이스라엘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들이박아 4명이 즉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지만, 1967년 가자지구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말려 죽이기’ 정책의 결과였다.

     

    미국, 점령지역 도로 건설에 1조 이상을 지원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평화 협상'을 중재했던 것은 미국.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기간에도 정착촌을 늘렸다. 당시 총리였던 네타냐후(지금도 총리!)는 정착촌을 4배로 늘렸다. '평화 협상'의 중재자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를 지원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있는 모든 정착촌을 도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도로 건설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당시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지원한 액수는 50억이었다.

    7년에 걸친 '평화 협상'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PLO가 팔레스타인 측 대표로 참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의 중재에 ‘고분고분한’ PLO에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50% 증가, 팔레스타인은 36% 감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 이스라엘의 GDP는 50% 증가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단지 10%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개국 이상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무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봉쇄 조치는 계속되었다. 아니 정착촌 확대에서 볼 수 있듯이 더 강화되었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0억 달러 이상 손실을 보았고, 그들의 1인당 GNP는 36% 감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업률은 1995년 9월 18.5%에서 1996년 28.4%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라 1997년 유엔 보고서에 적혀있다. '평화 협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했다.

    7년의 '평화 협상' 기간 PLO가 이스라엘을 위한 “추잡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확대되었다. 외교적으로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굴욕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PLO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2006년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한다.

     

    이스라엘 정착민, 7만 5천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어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 정착민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합해 7만 5천 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스라엘 정착민은 급증하여 서안지구에 19만, 가자지구에 5천~7천, 동예루살렘에 19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거주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에도 이스라엘 정착민이 1만 7천 명 이상 거주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정착민이 6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충돌을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래 표는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물리적 충돌로 인한 양측 사망자 통계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2000년 서안지구의 베이드 아리에(Beit Arye) 지역의 한 마을.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는 올리브나무 4,000그루를 제거했다. 미처 제거하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올리브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 이스라엘군이 올리브나무를 베려 하자 이를 막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

    1991년 미국은 PLO에 서한을 보내 “미국은 1967년에 점령된 영토에서 정착촌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해 왔고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1999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 역시 “정착촌 활동이 평화구축에 파괴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이스라엘 정착촌은 몇 배 늘어났고, 미국의 원조금은 정착촌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는 2차 인티파다의 주원인이 되었다.

    2017년 국제 앰네스티 사무총장은 “5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단순히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백하게 국제법을 위반하고 전쟁범죄에 해당할 행위를 하는 불법 정착촌에 자금 지원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세계가 구체적인 국제 행동을 취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6m 높이의 분리 장벽, 65km(가자지구)와 714㎞(서안지구) 길이로 설치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와 달리 폭력적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군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점령지역에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6미터에 달하는 분리 장벽이 가자지구에 65km, 서안지구에 714km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04년 7월 분리 장벽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하고, 철거 조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 장벽을 가리키며 “일리걸”이라고 외친다. 불법(illegal)이라는 것이다. 분리 장벽을 다녀온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옥죄는 뱀”이라고.

    ▲ 가자지구 분리장벽

     

    ▲ 서안지구 분리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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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대선 허위 보도 의혹’ 경향신문 기자 등 주거지 압수수색

검찰, ‘대선 허위 보도 의혹’ 경향신문 기자 등 주거지 압수수색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자료사진) 2022.06.03 ⓒ민중의소리
검찰이 26일 지난 대선 기간 이뤄진 ‘대장동 사건’ 관련 허위 보도 의혹과 관련해 경향신문 기자 등에 대한 강제 수사에 나섰다.

서울중앙지검 ‘대선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팀장 강백신 반부패수사1부장)은 이날 오전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경향신문 전·현직 기자 2명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의 전직 기자 1명의 주거지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됐다.

검찰은 이들이 2021년 10월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수사하면서 대출 브로커 조우형 씨를 봐주기 수사했다는 허위 보도를 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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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 참석하라”

  • 김예리 기자 
  •  
  •  입력 2023.10.26 07:46
  •  
  •  댓글 0

 

[아침신문 솎아보기] UN 사무총장 이스라엘에 즉각 휴전 촉구, 신문들 논조는

이태원 참사 1주기에 생존자 목소리 전하는 신문들

한겨레·경향 사설로 “전현희 표적감사 진상 밝혀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면 봉쇄와 공습이 18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누적 사망자는 6545명을 넘어섰다. 아동 사망자만 2704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봉쇄로 인한 병원 마비로 최악의 보건위기도 닥쳤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즉각 휴전을 촉구하고 나섰다.

26일 아침신문들은 1면에 이스라엘 공습으로 다친 아동과 전기·연료 봉쇄로 인해 병원 외에 불이 꺼진 가자시티 사진을 실었다. 24일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서 공습에 머리를 다친 남성이 상처 입은 아이를 안은 채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26일 아침신문

▲26일 한국일보 1면

▲26일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가자지구 내 누적 사망자가 6500명으로 늘어 15년 동안 이스라엘 공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사망자보다 많아졌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첫 전쟁이 벌어진 2008년 이후 지난 15년 동안 발생한 팔레스타인 사망자 전체(6407명) 규모를 이번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18일 만에 뛰어넘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한 후 지난 15년 동안 가자지구와 총 4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는데 이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과 18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다. 경향신문은 가자지구 보건부를 인용해 “지상전을 앞둔 이스라엘이 공습의 수위를 계속 끌어올리면서 가자지구 사망자는 24일(704명)에 이어 이틀 연속 700명대를 넘어섰다”고 했다.

▲26일 경향신문

▲26일 경향신문

어린이 사망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규모를 넘어섰다. 경향신문은 “어린이 사망자가 2704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41%를 차지한다”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어린이 사망자 535명을 4배 이상 뛰어넘는 규모”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진입해 시가전을 벌일 경우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망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1면 <공허한 인류애…가자 수천명 ‘사경’> 기사에서 “이스라엘의 봉쇄 조치로 가자지구의 물과 연료가 바닥나면서 이곳의 의료 체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진은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수술을 하고 있으며 소독제가 부족해 식초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가디언을 인용해 “공습으로 인한 사상자와 대피하려는 민간인으로 꽉 찬 가자지구 병원들이 자원 부족으로 기능을 멈추고 있다”고 했다. 전쟁 18일째인 이날 기준 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 부족으로 문을 닫은 병원은 6곳이다. 가자지구 보건부 메드하트 압바스 국장은 “비상 발전기를 가동할 연료가 없어 수술실과 중환자실, 응급실이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최근 가자지구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통로’를 통해 식량 등 구호 물품이 반입되면서 연료 공급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스라엘군은 하마스가 연료를 작전상 필요한 곳에 쓴다는 이유로 불허했다”고 했다.

▲26일 한겨레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24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을 논의하려고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게 아니다”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56년 동안 숨 막히는 점령에 시달려 왔다”고 했다. “하마스의 공격은 팔레스타인 국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적 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서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하고, 다치게 하고, 납치하고, 민간 표적에 로켓을 발사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며 하마스를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은 56년간 숨 막히는 점령을 당해왔다”며 “(유대인) 정착촌이 자신들 땅을 계속 집어삼키는 것을 지켜보고, 폭력을 경험하고, 경제가 억압 당하고, 쫓겨나고, 집이 파괴됐다”고 강조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 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26일 한겨레

한겨레는 “미국 MSNBC는 바이든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 민주당 안에서도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당의 일부 진보 성향 의원들은 그가 이스라엘에 휴전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침공 연기를 요구하고 있냐’는 기자들 질문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24일 이스라엘 봉쇄로 인해 연료 공급이 중단돼 구호활동이 중단될 위기라고 전한다. 이날 UNRWA 직원 3명이 사망하면서 지난 18일 간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한 UNRWA 직원 사망자는 38명이 됐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또다른 기사에서 “국제사회의 초점이 하마스에 대한 타격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습에 따른 민간인 참화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며 “초기에는 하마스의 반격 역량을 꺾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던 서방 진영에서도 매일 수백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목격하면서 휴전론이 확산되는 중”이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휴전 논의를 차단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한 국제사회의 압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며 “이스라엘에 자제를 촉구했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연설에서 수위를 대폭 높였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구테흐스 총장의 이 같은 발언을 ‘하마스 공격 두둔 취지 발언 논란’이라고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그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을 두둔하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정부 입장을 반영한 기사다. 조선일보는 “대체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책임론’을 고집하는 가운데, 각국 정상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오면서 또다시 세계가 양분되는 모습”이라고 했다.

▲26일 동아일보

▲26일 조선일보

한국일보는 사설 <벌써 2,300여 명…더 이상 아이들을 죽이지 마라>에서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숨지게 하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이고 범죄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당장 중단돼야 마땅하다. 필수 의약품과 구호품 공급을 허용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했다.

▲26일 한국일보

한국일보는 그러면서도 “살던 땅에서 쫓겨난 뒤 숨 막히는 억압에 시달려온 팔레스타인의 분노엔 이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마스의 기습과 민간인 학살·납치까지 정당화할 순 없다”며 “이스라엘도 하마스 기습이 민간인 230만 명이 거주하는 곳을 무차별 폭격할 권리를 부여하는 건 아니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한겨레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수 없다는 당신에게>란 제목으로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기고를 실었다. 김정희원 교수는 “지상전이 전개되기도 전에 왜 (가자지구 내) 발전소가 멈추는가. 그것은 애초에 연료 공급도, 전기 공급도 이스라엘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며 “전기 공급의 3분의 2는 이스라엘이 통제하며 나머지 3분의 1을 담당하는 가자지구의 유일한 발전소는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폭격한다. 그래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었던 날이 없다”고 했다.

김정 교수는 이어 “가자지구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최소한의 의식주도, 이동의 자유도, 언어와 문화를 지킬 자유도, 직업 선택의 자유도”라며 “당신은 이런 삶을 수십년 간 버틸 수 있겠는가? 오늘 태어난 아이가 기약없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 절박한 투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하마스를 핑계로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회피하지는 말자”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1주기…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 추모제 참석하라”

서울 복판에서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오는 29일 1주기를 맞는다. 신문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과 이들을 돌봐온 사람들을 취재한 기획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1년째 이태원 참사 관련 감사를 하지 않던 감사원이 25일에야 포괄적 ‘재난안전 체계’ 점검에 나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26일 한겨레

한겨레는 1면 인터뷰 기사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가 시달리는 자책감과 트라우마를 전했다. 한겨레는 “‘너는 살아남았다’는 혐오감은 아직도 생존자를 괴롭히고 있다”며 현재까지 책임을 진 정부 관계자는 없는 가운데 생존자인 김효진(가명)씨는 “나는 피해자도 가해자라고 생각한다”는 친했던 이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효진씨는 참사 뒤 답답함이 밀려와 몇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와이어 달린 속옷은 모두 버렸으며 안전벨트를 제대로 매지 못하는 날도 많다고 했다. 생존자 동은진씨도 “내가 그날 그곳에 가서 (밀집도가 올라가) 사람들이 다친 게 아닌가, 끝내 돕지 못해 참사가 커진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오래 했다”라며 자책감과 싸운다고 했다.

▲26일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1면에 이태원 참사 생존자이자 참사로 친구를 잃은 A씨 이야기를 전했다. 22세인 A씨는 이태원 참사로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를 잃었다. A씨는 이후 밀집된 지역이나 지하철 등을 가면 숨이 막히는 증상까지 겹쳐 출퇴근 시간에 붐비는 곳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그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은 건 친구 박씨 어머니의 연락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딸 몫까지 계속 열심히 살아줘야 해’라는 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고 했다.

한겨레는 사설을 내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가의 부재로 벌어진 일이지만, 정부 고위직 중 책임진 이는 없고 희생자 유족들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의 1주기 추모식 참석 여부가 민생과 통합을 향한 국정기조 전환의 가늠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26일 한겨레

중앙일보는 “‘10ㆍ29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지를 고민해온 대통령실이 결국 불참 입장을 정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며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정치집회라는 판단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라고 했다.

▲26일 중앙일보

경향신문은 1면에 “감사원이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이태원 참사를 포함한 ‘재난 및 안전관리체계 점검’ 예비조사에 착수했다”며 “외부 비판을 의식한 요식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전했다.

▲26일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헌법상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윤석열 정부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고도 했다. “통상 감사 착수부터 결과 발표까지 열 달가량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태원 참사의 감사 결과는 내년 4월 총선을 넘겨 발표될 가능성이 크다. 감사원이 총선 전 감사 결과가 나오는 것을 피하고자 감사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뤘다는 비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이태원 참사를 따로 감사하지 않고 여러 재난 관련 대응 체계 감사의 일환으로 축소했다는 지적도 있다”고 했다.

 

경향·한겨레 “전현희 표적 감사 의혹 밝혀야”

감사원의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표적 감사 의혹에 대해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사설을 내고 “의혹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경향신문은 전현희 전 위원장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감사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감사원 등 압수수색 영장 내용을 보도했다. 감사원 압수수색 영장에 ‘권익위 간부의 제보를 받은 대통령실 비서관이 이를 감사원에 전달했다’는 내용이 기재됐다는 것이다. 영장에는 감사원이 권익위에 전 전 위원장 등이 사퇴하면 감사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점도 적시됐다.

▲26일 경향신문

한겨레는 “전 전 위원장을 찍어내기 위해 대통령실까지 나서 감사를 ‘사주’했다는 ‘하명 감사’ 의혹이 사실이라면 감사원의 독립성을 의심케 한다.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실이 비위 의혹을 제보받았으면 직접 감찰 지시를 해야 한다. 몰래 감사원에 제보하는 것은 위법·편법 소지가 다분하다”고 했다.

▲26일 한겨레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감사원은 서해 공무원 월북 피살 사건,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전 정부 관련 사안에 대해 대대적인 감사에 나서면서 정치적 중립 훼손 시비를 불러왔다”며 “정작 본연의 업무에 해당하는 이태원 참사 감사는 1주기가 다 돼서야 뒤늦게 착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이 감사원과 ‘짬짜미’를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진 것이다. 진위에 따라 정권의 도덕성을 의심해야 할 중차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라고 했다.

 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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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극우의 무모한 상상, 바이든의 결정적 실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3/10/26 08:55
  • 수정일
    2023/10/26 08:5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중동의 운명 쥔 세 나라... 민간인 희생 이면에 자리 잡은 국제 역학관계

23.10.26 05:46최종 업데이트 23.10.26 05:46

▲ 이스라엘 남부 스데로트에서 23일(현지시간) 촬영한 가자지구 북부의 모습. 이스라엘군 공습 이후 연기가 치솟고 파편이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가자지구를 향한 이스라엘의 보복 조치가 날로 격화되고 있다. 23일 기준 양측이 발표한 사망자 수는 6100명을 넘었다. 이스라엘 사망자(약 1400명 추정) 다수는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있던 첫날 발생했고 나머지 4700여 명은 이후 가자지구를 향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들이다. 

이스라엘의 대대적 보복 공격이 이어질수록 가자 주민의 피해는 점점 불어나는 중이다. 지구촌 많은 국가들이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를 규탄하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공격에 대한 자제 요청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만약 있을지 모를 이스라엘의 전면적 지상군 투입에도 많은 우려의 시선이 쏠린다. 

이러한 소모적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국가들이 휴전, 또는 적어도 긴장완화를 위한 해법을 고민하지만 미국 등 서방 주요국들은 이스라엘의 '방어권' 보장을 주장하며 휴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마스의 '후견국' 이란은 참전 수위를 고심한다.
   
유엔 193개 회원국 가운데 78개국이 하마스에 대한 규탄을 공식 입장으로 내놓고 있다. 반면 공식 입장으로 하마스에 대한 지지를 밝힌 국가는 16개국이다. 확인되지 않은 49개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50개국은 하마스에 대한 규탄 여부와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군사행동 자제와 긴장완화 촉구를 공식 입장으로 내놓았다.  

국제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들의 입장도 엇갈린다. 유엔 상임이사국 가운데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하마스 규탄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밝히고 그들의 방어권 보장을 주장한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특정 진영에 대한 규탄 또는 지지 없이 해당 지역 긴장완화를 촉구함과 동시에 미국의 책임을 지적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주요 7개국(G7)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반면 브릭스(BRICS) 5개국은 G7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인도가 비교적 서구와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는 반면 브라질, 러시아, 중국은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른 4개국보다 하마스 지지에 좀 더 경도돼 있다. 

전반적으로 하마스에 대한 규탄과 함께 긴장 완화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다수지만 향후 흐름은 이스라엘, 이란, 미국, 이렇게 세 나라의 의중과 판단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중동의 운명을 쥔 세 나라의 결정은 상대의 전략적 판단에 크게 상호 의존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을 놓고 현재 벌어지는 눈치보기 게임은 이러한 역학관계의 산물이다. 
 

▲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한 각 나라별 입장 ⓒ 임상훈

 
[이스라엘] 극우세력의 위험한 질주, 팔레스타인 완전 접수 시나리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현 내각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우 성향을 띠고 있다. 지난해 11월 1일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이스라엘 의회 120석 가운데 32석을 차지했다. 제1당으로서 내각 구성권을 쥔 리쿠드당은 더 극우성향인 정당들과의 연정을 통해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부패와 위법에 연루된 네타냐후는 총리직 아니면 구속 수감이라는 극단적 운명 앞에서 사실상 선택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꺼려하던 극우 근본주의자들과의 동침은 이스라엘에는 불행이지만 네타냐후에게는 정치생명 연장을 구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소수파 극우세력의 국가 지배가 이렇게 이스라엘에서도 가능하게 됐다.  

끝없는 팔레스타인 박해와 이스라엘 사법정의 파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법부 무력화가 이스라엘의 헌법적 가치를 파괴하는 길이었다면 다양한 방식의 팔레스타인 박해는 국제법 위반의 연속이었다. 연정 상대인 샤스당과 종교시오니즘당 등은 궁극적으로 현 거주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추방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서방 정부들과 달리 다수의 학계와 언론에서는 이스라엘 극우 정부의 비합리적 국가경영에서 하마스 준동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 십수 년 동안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를 끝없이 자극했고 하마스는 이에 비이성적 대응으로 맞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구실 삼아 팔레스타인 완전 접수 시나리오를 가동했다. 

[미국] 바이든 외교팀의 심각한 오판

이러한 이스라엘의 위험한 질주가 중동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는 미국에는 '봐도 못 본' 현실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처지에 빠진 미국이 중동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수교만 이뤄진다면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든 외교팀의 심각한 오판이었다. 이스라엘 극우세력이 근본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요르단으로 내몰고,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로 내모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의 당사국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닌 요르단과 이집트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물리적으로 내쫓는다는 발상이 외교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무모한 상상이지만 극우세력은 무모한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 집단이다. 현 이스라엘 내각이 그런 사상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팔레스타인 축출 발상은 근본적으로 아랍 세계를 균열로 이끄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정상적 외교관계를 맺게 된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국 땅으로 내모는 순간, 이들의 외교관계도 파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는 미국이 생각하듯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이란] 하마스 등 무장조직을 지원하는 속내
 

▲ 중동 이슬람권 내 시아파 비율 ⓒ Geopolitical Futures


이처럼 이스라엘 극우 내각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이란 역시 최근까지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수교를 전제로 빈번한 고위급회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가 곪아가는 상황은 모든 계획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다. 이슬람 소수파인 시아파를 이끄는 이란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른 수니파 국가들과는 다른 맥락에 닿아 있다.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으로 이란과 달리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란이 하마스의 후원자 노릇을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 페르시아계와 아랍계의 대립 속에서 중동의 패권을 다투는 페르시아계 시아파 국가 이란은 8800여만 명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국가 단위에서 소수에 해당한다.

그런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란은 수니파 국가 내부의 점조직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견제하고 있다. 일종의 '점조직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연대는 흔히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렇게 이란으로부터 지원받는 점조직들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무장세력'이라 불린다. 

결국 종교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한 원조 관계이고 따라서 종교적 파벌이 달라도 이들의 연대는 성립된다. 그리고 수니파 조직 하마스는 그렇게 이란이라는 강력한 후원국을 두게 된다. 그 외에도 레바논의 반정부 조직 헤즈볼라, 시리아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 이슬라믹지하드 등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조직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가자지구에서 하마스 조직이 궤멸한다면 이란으로서는 큰 타격이고 다른 무장조직들의 동요를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란이 직접 가자지구에 군사개입을 한다면 미국의 개입은 불가피해진다. 결국 헤즈볼라 등 다른 무장조직을 통한 간접 개입의 자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또한 미국과 고도의 정보전, 심리전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
 

▲ 이스라엘 지상군 가자 침공 반대, 폭격 중단을 촉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가 20일 오후 서울 이태원에서 무슬림들과 노동자연대 등 국내 지지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20일째 이어지는 가자지구 민간인 희생의 이면에는 이러한 국제관계의 역학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혹자는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이런 힘의 논리를 숙명론으로 치부하려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세력균형론을 말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 가자지구를 사이에 놓고 벌이는 군사 강국들의 무력 대치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패권주의도, 숙명론도, 세력균형론도 문제해결의 본질을 말하지는 못한다. 근본적으로 지배-피재배의 관계를 고착시킬 뿐 그 이상의 해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뒤치다꺼리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이 지금의 국제분쟁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기능도 못 하는 상황도 이러한 숙명론적 패배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최고 지상권을 가진 국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다. 국제법도 강대국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무장세력 하마스의 국제법 위반을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그동안 숱하게 국제법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야만성 앞에서 우리는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스스로의 눈과 귀를 막아왔다. 

어쩌면 이런 무기력증과 숙명론, 현실도피가 2023년 팔레스타인 사태를 만든 주범인지도 모른다. 국제사회의 중대한 사태가 터지면 증시와 유가 상황부터 챙기는 이기적 자국중심주의도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방치한 아랍국가들의 최근 자국 중심적 외교행태가 현 사태를 유발한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알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고 무기력증이 인류의 필연적 거처는 아니다. 국가를 넘어서는 정치학적 상위 가치가, 또는 국가 해체 수준의 새로운 정의가치가 출현하는 미래가 올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부단한 관심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언론이 있고, 독자가 있고, 여론이 있다. 그리고 여론으로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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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철거 논란 때문에 편치 못했던 홍범도 장군 추모식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대전현충원에서 80주기 추모식 진행

  • 기자명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  
  •  입력 2023.10.25 20:15
  •  
  •  댓글 0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10월 25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었다.

추모식 및 기념식은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정용래 유성구청장, 남양홍씨 남양군파 중앙종회 홍성종 회장, 광복회대전지부 양준영 지부장,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조진웅 배우를 비롯해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 25일 오전 11시,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진행됐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홍범도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홍범도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은 “오늘 이 자리에는 독립유공자의 예우를 책임지고 계신 박민식 장관님께서 함께해 주셔서 기념행사에 큰 의미가 더해졌다”고 말하면서도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에 “보훈부의 수장인 장관님께서 마치 동조하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우원식 이사장은 이어 “어제 국회에서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모아 국회의원 181명이 함께 독립영웅 흉상철거와 독립전쟁영웅실철거 백지화를 내용으로 담은 결의안도 발의했다”며, “그런데도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전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흉상철거를 계속해서 추진하겠다고 한다”며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이것은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뿌리이고, 독립군,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라고 하는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보훈부에서 육사 현충관 앞의 독립영웅들의 흉상과 독립영웅실 철거 백지화에 앞장서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작심한 듯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향해 뼈 있는 말을 쏟아냈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추모사에서 “홍범도 장군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최고로 예우하는 것은 국가보훈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며, “이 부분은 국민들이 확실히 믿으셔도 되고,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더더욱 세심하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포상이 실시된 1962년 홍범도 장군님을 서훈하고, 예우하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 그 예우에는 티끌만큼의 소홀함도 없을 것”이라며, “더불어 독립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님의 공적과 역사적 위상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서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외에도 이종찬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광복회대전지부 양준영 지부장이 대독했고, 노송달 대한고려인협회 회장의 추도사를 최예진 부회장이 대독했다. 대전현충원이 위치한 대전 유성구의 정용래 유성구청장도 추도사에 나섰다.

추모식은 홍성종 남양홍씨 남양군파 중앙종회 회장이 축문낭독을 했고,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가 홍범도 장군의 약력을 보고했다.

추모사 후에는 헌화와 분향이 이어졌고, 목원대학교 중창단 ‘시네테노레’의 기념공연도 진행됐다. 추모식 사회는 홍범도기념사업회 오광영 이사(대전모임 대표)가 봤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 앞서 정진채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박석신 화백은 글씨를 쓰며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에 앞서 정진채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박석신 화백은 글씨를 쓰며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추모식에 앞서 박석신 화백과 정진채 가수는 ‘이름꽃시’라는 제목의 드로잉콘서트도 진행되었다. 드로잉콘서트는 정진채 가수의 ‘서시’ 노래 공연에 맞춰 박석신 화백은 흰 천에 ‘홍범도’라는 글씨와 함께 ‘범이 달려 들어도 총알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신념이다’는 글씨를 멋들어지게 썼다. 추모식은 ‘독립군가’를 다함께 부르며 마무리했다.

한편,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했고, 국가보훈부가 후원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추모식 및 기념식에 앞서 현충탑을 참배했다.

홍범도 장군 추모식이 대전현충원에서 개최된 것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지난 2021년 8월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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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문제의 근원,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여야만 한다'는 이념

[장석준 칼럼] 탈시오니즘화 없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사슬 풀 수 없어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기사입력 2023.10.25. 06:36:25

 

10월 7일 하마스에 기습 공격을 당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거점인 가자 지구에 정규군을 투입해 소탕전을 벌이겠다고 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무력 침공은 수많은 민간인의 무참한 대학살이 될 수밖에 없다. 하마스의 무차별 테러 공격은 분명 인도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이에 맞서겠다는 이스라엘의 대응 방향은 전쟁 범죄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실은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른 것 자체가 이스라엘의 이러한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태도 탓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이 협정의 기본정신인 '두 국가 해법'(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의 평화적 분립)에 따른 평화 정착을 방해하고 후퇴시키는 방향에서 움직였다. 협정에 서명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했고, 서안 지역에 줄기차게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됐을 뿐만 아니라,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를 중심으로 정치권 전반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이스라엘 안에는 이런 흐름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최근까지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부 장악 시도에 맞서는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고, 이를 이끈 정치세력, 사회운동들이 있다. 그 중에는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중도파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좌파도 있다. 

 

아니, 사실 20세기 내내 이스라엘은 '좌파'가 주도하는 나라였다. 이스라엘 건국에 앞장서고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를 성사시킨 세력은 (네타냐후가 속한 리쿠드당이 아니라) 좌파정당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왜 이런 모습인가? 강력하던 저 '좌파'는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다는 말인가? 

 

좌우를 불문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모순 

 

진실을 말하자면, 이스라엘 좌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문제의 뿌리 깊은 근원 중 일부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스라엘 좌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이스라엘 좌파는 분명 그렇다. 

 

일단 이스라엘 주류 좌파를 살펴보면, 건국 당시에는 마파이당(이스라엘 땅의 노동자당)과 마팜당(통합노동자당)이라는 두 좌파정당이 정계를 양분했었다[첫 총선에서 리쿠드당의 전신인 헤루트(자유)당은 제4당에 불과했다]. 마파이당과 마팜당은 20세기 말에는 각각 노동당과 메레츠(활력)당으로 이어지며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좌파를 대표했다. 이들의 사회적 토대는 노총인 히스타드루트와 키부츠 공동체들이었다. 

 

한데 이러한 이스라엘 주류 좌파에게는 다른 나라 좌파에는 없는 독특한 공통 이념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시오니즘이다. 즉, 이스라엘의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은 단순한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이 아니다. 시오니즘 +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세력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좌파는 서유럽 어느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정당이나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의 좌파정당과 동렬에 놓고 관찰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면, '좌파' 시오니즘이다. 영어로는 흔히 Labor Zionism, '노동 시오니즘'이라 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시오니즘이다. 2000여 년간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살아가던 유대인의 국가를 팔레스타인 옛 땅에 다시 세운다는 이념이다. 다만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이 유대인 국가가 처음부터 노동계급 중심의 '세속적', 민주적 국가가 되길 바랐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좌파' 시오니즘이 시오니즘 전체의 주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스라엘 좌파가 유별나다는 게 좀 과장인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시오니즘을 단순히 유대인 민족주의로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렇다. 어느 나라든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 역시 어느 정도는 근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웨덴을 '인민의 가정'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여기에서 민족주의의 뉘앙스를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적 길'을 선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주의란, 비록 정도 차이는 있더라도, 어쨌든 근대 정치의 기본 형식이다. 

 

그러나 시오니즘은 다르다. 근대 민족주의의 범주 안에 놓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것은 유대인의 오랜 이주 역사가 낳은 비극적 운명이며, 지금도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비극을 낳고 있는 요소다. 시오니즘은 지구상의 숱한 민족들이 근대 민족주의의 요소들을 서로 모방하며 만들어 낸 근대 민족주의 현상의 일부이되, 그런 '근대' 민족주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근대 민족 관념은 지리, 언어, 역사, 문화 등 여러 요소들이 얽혀 구성된다. 여기에는 종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종교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다. 오히려 종교적 정체성은 근대적 민족 정체성과 충돌하는 측면까지 있다. 근대적 민족 정체성은 오랜 종교적 정체성을 포용하면서도 이와 경쟁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특정 종교에 복속되지 않으며 도리어 종교적 정체성 전반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적 민족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근대 국가는 이러한 근대적 민족 정체성을 그 안정적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런 일반적 경로에서 이탈하는 유일하면서도 결정적인 사례다. 2000년 동안의 이산 역사 속에서 유대인은 근대적 민족 정체성을 구성할 어떠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공통 요소도 갖출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유대인'을 말하는 것은 언어상의 온갖 모순을 감내하는 행위였다. 다만 그럼에도 '유대인'을 실체로 만드는 단 한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교였다. 사실 유대교를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맥락의 종교로 봐야 하는지 자체가 논쟁거리이지만, 아무튼 근대에 들어 유대교는 그런 '종교' 중 하나로 분류됐다. 그리고 유대인이란 유대교도, 즉 유대교를 믿고 실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모든 모순이 비롯되었다.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의 근대 국가를 세우길 원했다. 많은 이들은, 시오니스트들이 하필이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려한 데에서 비극의 씨앗을 찾는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유대인의' '근대 국가'라는 목표 자체가 비극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려면, 우선 '유대인'을 호명하고 그들을 결집시켜야 했다. 한데 현실에서 '유대인'이란 '유대교도'였다. 즉, 유대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근거로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좌파' 시오니스트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대개 유대교 리버럴파에 속하거나 아니면 아예 유대교 신앙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세운 신생국은 '유대인의 국가', 즉 '유대교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중동전쟁 와중이던 1948년에 선포한 '독립선언'은 이스라엘이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근대 국가임을 천명했지만, 또한 신생국의 성격을 '유대인 국가(Jewish State)'라 규정했다.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유대교 국가. 누가 보더라도 불안한 모순어법이었다. 

 

좌파 시오니스트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성문헌법 없이 독립선언과 기본법으로 헌법을 대체했는데, 1985년에 기본법 일부 조항을 수정하면서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당시에 이미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에 맞서 좌파가 주도한 개정이었다. 좌파는 '유대인 국가'라는 규정에 '민주주의 국가(Democratic State)'라는 규정을 더함으로써 '유대인 국가'가 내포한 위험을 방지해 보려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자기 규정은 '유대인-민주 국가(Jewish and Democratic State)'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방지책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민주 국가'는 다른 '민주 국가'와 달리 결혼을 비롯한 여러 사회 제도를 민법을 통해 운영하지 않는다. 유대교 랍비가, 그것도 국가가 공인한 유대교 정통파에 속한 랍비에 한해, 민사재판이나 가사재판의 역할을 떠맡는다. 물론 리버럴 혹은 좌파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특이성을 증명한다. 이스라엘은 태생적으로 '근대' 국가에 미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특이성 탓에 이스라엘 건국 주역이었던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쇠퇴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은 악화하기만 했다. 건국 당시 주류였던 유럽-북미 출신 인구가 상대적으로 줄고 중동 출신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출신이 늘어나면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유대교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노동당이나 메레츠당 지지율은 하락한 반면 극우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들의 지분은 늘어났다. 또한 그럴수록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은 더 잔인하고 가혹해졌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걸어온 역사의 큰 줄기다. 

 

 

 

두 국가 해법, 한 국가 해법, 어떤 것도 쉽지 않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생적 한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일단 당장 필요한 조치는 쌍방이 모든 무력 행위를 중단하고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을 전개하려면, 중장기적 대안의 선택지들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다시금 이스라엘 국가의 숙명이 미래의 가능성들을 교란하거나 봉쇄한다.

 

오슬로 협정 이후에 국제사회 대다수가 공인한 대안은 '두 국가 해법'이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허용하고 더 나아가는 독립국가 수립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국가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이스라엘 정부는 두 국가 해법을 원천 봉쇄하는 방향에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노동당 소속 라빈 총리의 암살 이후 리쿠드당과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들의 극우 연합이 정계를 주도한 탓이다. 노동당, 메레츠당 같은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이 분위기에 끌려다니며 평화 정책을 스스로 후퇴시켰다. 지지 기반도 줄어들고 이념-노선도 흔들린 좌파정당들은 반극우연합의 주도권을 중도우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급기야 작년 11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9%만을 득표하며 의석이 4석(크네세트 총 의석은 120석)으로 쪼그라들었다. 3.16%를 얻은 메레츠당은 아예 원외정당으로 밀려났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유대교 근본주의에 휘둘릴수록 팔레스타인 진영 안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특히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작금의 분쟁에서 보듯이, 양측의 폭력 충돌이 고조되면서 두 국가 해법의 실현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만 있다. 일방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스라엘 편에서 종교 근본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두 국가 해법은 다시 진지한 평화 대안으로 논의되거나 추진될 수 없을 것이다.

 

두 국가 해법을 제외하면, 남는 대안은 '한 국가 해법'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시민,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시민이 하나의 통합국가 안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국가 형태에는 여러 가지 변주가 있을 수 있다. 단일국가일 수도 있고, 연방국가나 국가연합일 수도 있다. 이 중 어떤 국가 형태가 됐든, 종교와 언어, 인종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직 지중해 남동부의 한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시민이라는 정체성만으로 공통의 정치 공동체를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그런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적이기만 한 방안은 아니다. 숱한 폭력 충돌 경험이 걸림돌이 되겠지만, 비슷한 분쟁을 겪고도 단일한 정치 공동체를 이룬 나라들이 없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좋은 비교 대상이다. 오랜 인종 간 갈등과 분리, 억압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보통선거, 즉 1인 1표에 바탕을 둔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은 역시 '유대인 국가'의 업보다. 한 국가 해법으로 나아가려면, 하마스가 이슬람 국가 건설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민주 국가'라는 이스라엘의 국시(國是) 역시 폐기해야 한다. 이스라엘 건국의 기반이 된 시오니즘을 박물관 속 유물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흔히 한 국가 해법에 반대하는 논거로 민주화 이행 이후 남아공의 현실을 든다. 보통선거에 바탕을 둔 통합으로 결국 (백인 지배 체제를 대신하는) 흑인 지배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에도 한 국가 해법의 결말은 아랍인 지배 체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반론은 엄살에 가깝다. 남아공에서는 흑인이 압도적 다수인 반면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는 어느 쪽도 그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점하기 힘들다. 해외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에서 인구가 유입된다 하더라도 해외 유대인 디아스포라 역시 여전히 이스라엘에 새로운 인구를 더할 여력이 남아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라는 점에서는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과거 남아공과 비슷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폐지 뒤의 현실은 남아공과는 또 다를 것이다.

 

결국 걸림돌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국가'여야만 한다는 그 이념이다. 이것이 한 국가 해법을 가로막고 두 국가 해법 역시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리고 있다. 달리 말하면, 가장 강한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사슬은 결코 풀릴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탈-시오니즘화는 가능할 것인가? 

 

과연 이스라엘 사회의 탈-시오니즘화는 가능할 것인가? 이는 "대한민국이 분단반공국가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비슷하다. 2023년에도 여전히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나라가 과연 분단반공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만큼 이스라엘의 탈-시오니즘화 역시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고, 또한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진지하게 돌파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다만 일단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 이 과업을 직시하는 흐름이 미약하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스라엘 좌파가 좌파 시오니즘 일색만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 결정적인 사례는 노동당, 메레츠당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 공산당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공산당은 이스라엘 내 아랍계 시민을 대변하는 정치세력들과 함께 하다쉬('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의 약칭)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하다쉬는 작년 총선에서 노동당보다 많은 3.75%를 득표해 5석을 확보했다. 

 

공산당은 다른 좌파정당들과 달리 오랫동안 '유대인 국가'라는 규정에 반대해 왔고, 하다쉬는 현재 이스라엘 안에서 한 국가 해법에 가장 가까운 대안을 주창하는 정치세력이다. 유대계와 아랍계가 내부에서 공존하며 협력하는 하다쉬 자체가 미래의 통합 세속-민주 국가를 예시한다. 

 

노동당 소속으로 크네세트 의장까지 역임한 원로 정치가 아브라함 버그는 노동당의 퇴행을 비판하다가 2015년 하다쉬로 당적을 옮겼다. 본래 좌파 시오니스트로 출발한 버그는 오슬로 협정의 약속이 깨져나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점차 시오니즘의 기본 내용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한 국가 해법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 결과가 하다쉬 입당이었다.

 

분명 지금 이스라엘 사회는 극우화하고 있다. 그러나 버그의 행보처럼 이에 맞서는 정반대 변화도 있다. 비록 폭력의 스펙터클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희망은 오직 이런 이스라엘 내부의 탈-시오니즘화에 있다. 어렵고 또 어렵지만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 내부의 변화처럼 말이다. 

 

▲ 지난 23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파괴된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 주택가에서 한 팔레스타인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이 이어지면서 양측 사망자는 6000명을 넘어섰다. ⓒ로이터=연합뉴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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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유진그룹 3세, 브랜드 인지도 높이려 방송에 베팅”

  • 기자명 노지민 기자 
  •  
  •  입력 2023.10.25 08:10
  •  
  •  댓글 0

 

[아침신문 솎아보기] YTN 민영화, 보도전문채널 공영성 해칠 거란 우려 속에 강행…’이태원 참사 1년’ 둘러싼 엇갈린 비판

여야가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성이나 야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민생’ 경쟁에 돌입한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오는 31일 윤석열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앞두고 이뤄진 협정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2023년 10월25일자 주요신문 1면

이번 제안은 홍익표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에게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이를 두고 세계일보 <여야 ‘정치 회복’ 첫발… ‘보여주기식 협치’ 회의적 시각도> 기사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매표용 쇄신’에 머물지 않기 위해선 제도 개선과 함께 정치인의 언행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정치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처럼 의원의 부적절한 발언에 국회 전체가 나서 제재를 가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신문 <英의회 질문자까지 국회의장이 지명해 韓, 질서유지권 활용”> 기사는 이종훈 정치 평론가를 통해 “(민주당이 먼저 제안했는데) 이 대표를 겨냥한 여당의 ‘팻말전’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계산이 녹아 있을 것”이라면서 “영국 의회는 질문권자까지 국회의장이 지명한다. (국회의장이) 질서 유지권 등 국회 품위 유지와 원활한 국회 진행을 위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최대한 활용하는 게 맞다”는 의견을 전했다.

한국일보 <정쟁 현수막 제거 이은 노피켓 합의... 총선 앞 정치권 비판 의식> 기사는 “이번 합의는 내년 총선에 앞서 정치권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정쟁 자제’ 차원으로 풀이 된다”며 “특히 국민의 힘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정쟁을 유발하는 현수막 제거에 나서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아울러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앞서 이번 합의가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라며 “지난해 10월 윤 대통령의 첫 번째 국회 시정연설에선 민주당은 당시 중앙당사 압수수색 등을 이유로 헌정사상 최초로 이를 보이콧했다”고 했다.

▲2023년 10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

국민일보 사설(여야 피케팅·고성 중단 합의, 정치문화 확 바꾸는 계기되길)은 “불과 얼마전에도 국방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에서고성과 피케팅을 이유로 국정감사가 파행됐다. 여야 합의가 지켜질지는 오는 31일 예정된 윤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부의원과 장차관이 국회에서 하라는 회의는 하지 않고 지지층을 향해 ‘정치’만하려 하니 정쟁 국회가 더격해진 측면이 있다. 이런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일보 사설(비방 금지 ‘신사협정’ 여야, 협치로 승화시키길)은 “그간 여야의 비방전은 국회 품격을 떨어트리고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후진적 정치의 상징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며 “이번 합의를 계기로 상호 비방이 아닌 존중의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여야가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민생 정책도 성과를 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쟁에 과감하게 선을 긋고, 협치에 방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YTN 민영화’ 속도전에 여전한 의문

▲2023년 10월25일자 한겨레 사설

지난 23일 YTN 공기업 지분 매각 입찰 경쟁에서 유진그룹이 낙찰됐다. 유진그룹이 YTN의 새 최대주주가 되기까지 방송통신위원회의 최다액 출자자 변경만 남은 상태다.

동아일보 <유진그룹 3세 유석훈 사장, YTN 인수 주도...사업 확장하고 인지도 높이려 방송에 베팅> 기사는 유진그룹의 이번 인수 시도 배경에 대해 “이번 인수 시도는 3세 경영인인 유석훈 그룹 경영혁신부문 사장이 미디어 산업에 의욕을 보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을 인수한 호반건설, 헤럴드경제를 인수한 중흥건설 등 건설사들이 언론사 지분 인수를 통해 기업 인지도를 높인 사례가 영향을 미쳤을 거란 업계 해석도 전했다.

경향신문 사설(의혹투성이 YTN 민영화, ‘강행 · 속도전’ 이유가 뭔가)은 “윤석열 정부에서 YTN도 반대하는 민영화가 속도전으로 강행된 터라 언론 길들이기 의심이 일 수밖에 없고, 실제 지분 매각 절차 과정도 의문투성이”라며 “당초 지분 계속 보유 의사를 밝혔던 한 전 KDN 등에 대해 공공기관 자산 효율화 를 내세워 지분 전량 매각 결정을 이끌었다. 또 매각 주관사는 배임 논란 속에 두 회사의 지분을 한번에 파는 통 매각 결정을 내렸다. 인수 기업을 정해놓고 정부가 밀어붙인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온다. 유진 그룹 계열사가 주식 리딩방 연루 의혹을 받고, 사주가 검찰 수사 무마 대가로 검사에게 금품을 준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는 점 등이 드러나 인수기업으로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사설(YTN 지분 매각, 방송 공공성 훼손 우려된다)은 “공기업이 대주주로 참여하는 와이티엔의 공적 소유구조는 친정부 인사를 ‘ 낙하산 사장’으로 내려 보내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와이티엔이 방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더 많다”며 “더불어 민주당은 대통령실의 외압 의혹 등에 대해 검증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매각 절차와 인수자의 적격성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10·29 이태원 참사 1년

지난해 10월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오면서 일부 신문이 지난 1년을 돌아보는 기획보도를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수사기록으로 본 이태원 참사 1년’ 기획 연재를 통해 수사 과정에서 사라진 국가의 책임을 지적했다. 1·3면 <"핼러윈 성지? 홍대·강남역도 있어" …또렷한 책임 회피 기록> 기사는 “참사 발생 사흘 만에 꾸려졌던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지난 1월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 등 24명을 입건하고 이 임재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6명을 구속 송치했다. 경찰청 서울시 행정안전부 등 윗선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며 “검찰은 용산구청 관계자 4명, 용산경찰서 관계자 5명, 경찰 정보라인 3명 등을 기소했으나 재판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그나마 윗선으로 지목된 김광호 서울청장의 기소 여부조차 결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 이임재 전 용산서장 등 책임자들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본인의 책임을 부인해왔고, 이 전 서장 관련 수사기록엔 기동대가 사전 배치되지 않았더라도 당일 집회가 종료된 후 긴급 배치 결정이 이뤄졌다면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내부 보고서도 담겨 있었다.

경향신문 <"김광호·이임재 기동대 배치 요청 안 해 사고 키워" 이태원 특수본 내부 수사보고서에 명시된 ‘팩트‘> 기사는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은 용산경찰서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당일 인파를 관리할 경비기동대 배치를 요청했는지를 두고 이임재 전 용산서장과 진실 공방을 벌여 왔다. 그러나 경찰청 이태원 특별수사본부 수사보고서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경력을 배치하지 않아 참사 피해를 키운 책임이 있다고 적혀 있다”며 “특수본은 피의자 김광호 및 이임재는 경력 조정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태원 핼러윈 현장에 경력을 배치하도록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 고 적시했다”고 했다. <‘이태원 보고서‘ 삭제 전날…김진호·김광호 ‘15분 통화’> 기사는 “이태원 참사 당시 김진호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이 핼러윈 인파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하기 하루 전 김광호 서울 경찰청장과 15분 가량 전화통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2023년 10월25일자 경향신문 기사

▲2023년 10월25일자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는 <정쟁에 묻혀버린 핼러윈 참사 교훈> 기사는 “전문가들은 우측통행과 같은 기초 질서가 지켜졌다면 참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우측통행 등 일상의 기초 질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정치권이 정쟁에 휘말려 문제를 방치한 탓”이라고 했다. 이어 “본지가 지난 9~10월 출퇴근 지하철역과 시내 번화가, 국제 행사장 등을 돌아본 결과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일부 시민은 우측통행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좁은 골목이나 지하철역을 오가던 시민들끼리 부딪치거나 사고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장면도 목격됐다”며 우측통행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을 전했다.

조선일보 <클럽거리·지하철역 뒤엉킨 인파… 우측통행 하면 참사 막을 수 있다> 기사의 경우 “오른손잡이가 많은 우리 나라의 경우 우측 통행을 할 경우 보행자 간 충돌이 줄고 보행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우측 통행을 하면 도로 옆 인도에서 보행자가 차량을 마주 보며 걸어가게 되면서 교통사고도약 20%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고 했다.

 

악질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위헌 논란도

법무부가 이른바 ‘한국형 제시카법’으로 불리는 ‘고위험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법’ 제정안을 26일 입법예고한다. 아동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재범 가능성이 큰 고위험 성범죄자 주거지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중앙일보 <악질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한다> 기사는 “미국은 특정 시설로부터 일정 거리 내 거주를 금지하는 데 반해 법무부가 마련한 법안은 ‘특정 시설 의무 거주’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한상희 건국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신문에 “형벌이 종료된 후 다시 거주지를 제한하는 것은 이중처벌로 볼 수 있다”며 “치안 당국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조두순에게 떠미는 셈이다. 상당히 위험한 정책으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새로운 형태의 감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05년 이중처벌 논란으로 폐지된‘보호감호’ 제도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있다.

 

감사원의 전현희 제보, 대통령실 비서관이 전달

감사원의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표적 감사’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전 전 위원장 관련 제보는 권익위 간부에서 대통령실 비서관을 거쳐 감사원에 전달됐다고 파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은 1면 <“전현희 의혹 제보는 대통령실 거쳐 전달”> 기사에서 공수처가 감사원 등 압수수색 영장에 “최재해 감사원장과 유병호 사무총장이 2022년 7월 권익위 관계자가 전 전 위원장, 이정희·안성욱 부위원장의 사퇴를 목적으로 A 당시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제보한 내용을 A 비서관으로부터 전달받은 뒤 공직감찰본부 특별조사국 등에 지시해 감사위원회의 의결 없이 감사에 착수토록 했다”는 취지로 기재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공수처는 압수수색 영장에 최 감사원장과 유 사무총장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와 함께 B씨와 전 전 위원장을 공동 무고한 혐의가 있다고 적시했다”며 “A 전 비서관이 전 전 위원장의 비위 의혹을 감사원에 전달했다면 위법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감사원은 “제보자와 관련된 사항을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는 없다”, A 전 비서관은 “전 전 위원장 비위 의혹을 전달받거나 이를 감사원에 제보한 사실이 없고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제보자로 지목된 B씨는 “수사 중인 사안이라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이다.

 

중대재해법, 법원과 검찰이 힘 빼고 있나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 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적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추가 유예’ 방침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어렵게 기소된 사건에서도 ‘솜 방망이’ 구형과 판결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겨레 <집유· 집유…중대재해법 힘빼는 법원·검찰> 기사는 “24일 한겨레가 중대재해 처벌법 시행 이후 나온 총 7건의 판결문을 모두 분석해 보니, 사업주(경영책임자)에 대한 선고 형량이 대체로 징역 1년~1년 6개월에 그치고 그마저도 단 1건을 제외하면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돼 실형을 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집시법 시행령 바뀌자 ‘대통령실 앞 집회’ 금지한 경찰

서울 용산경찰서가 오는 11월18일 예정된 트랜스해방전선의 트랜스젠더 추모 집회에 대해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 앞은 주요 도로라는 이유로 부분 금지를 통고했다. 경향신문 <‘집시법 시행령‘ 개정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실 앞 트랜스젠더 집회 부분 금지> 기사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17일 대통령 집무실 인근 도로를 관할 경찰서장 재량에 따른 집회 시위 금지가 가능하도록 개정한 집시법 시행령을 근거로 삼았다. 법원은 트랜스 해방전선이 제기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여성 총파업에 총리도 동참하는 아이슬란드

‘성평등 모범 국가’로 불리는 아이슬란드의 카트린 야콥스도 티르 총리가 24일 ‘여성 총파업’ 참여를 위해 업무 중단을 선언했다. “한국일보 <‘여성 총파업’에 총리까지 동참 성평등 1위 국가의 끝없는 노력> 기사는 “ 야콥스도 티르 총리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업에 동참한 게 아니다. 정부 수반인 ‘총리’로서 이번 총파업에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명하는 차원”이라며 “파업에 따른 총리의 업무 공백을 다른 남성 장관이 기꺼이 메우고 시민들도 이를 이해할 정도로,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위·성별·나이를 불문하고 성차별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다”고 전했다.

 노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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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공격 중단을 촉구하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그림=클립아트

편집자주

지난 7일 하마스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구속해 감금한 팔레스타인인이 5,000여명,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인이 5100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중 절반가량이 아이들이라고 한다. 그 수가 하마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인 1,900여 명을 두 배 이상 넘어섰지만, 네타냐후를 필두로 한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명분 하에 가자지구 지상전을 예고한 상황이다. 네타냐후가 총리로 처음 취임한 2009년부터 양국의 갈등이 더 심해져 올해 9월까지 팔레스타인이 살해한 이스라엘인이 300여 명, 이스라엘이 살해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6,40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네타냐후 극우 정권의 강경 노선은 놀랍지 않다. 그 와중에 하마스의 공격 생존자 중에서 언론에 등장해 적극적으로 평화를 촉구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카운터펀치의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 Meet the Hamas Massacre Survivors Opposing Israeli Brutality in Gaza

 

10월 12일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공보비서관은 아야나 프레슬리, 코리 부시, 라시다 탈리브가 등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촉구한 것에 대해 ‘혐오스럽다’, ‘수치스럽다’고 해 미국이 가자지구의 참상에 얼마나 공조하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10월 7일 하마스 공격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이스라엘 생존자 중에는 완전히 반대된 견해를 가진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극우 정부가 가자지구에서 더 악랄한 만행을 저지를 명분으로 그들의 슬픔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전기, 물, 연료 공급을 차단했고, 북가자지구 ‘정리작업’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아이만 1,000여 명을 살해하고 50여 가구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이스라엘이 가자시티의 알-알리 병원을 폭격해 최소 500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홀로코스트와 대량학살을 연구하는 미국 스톡턴 대학교의 라즈 시갈 교수는 최근 ‘유대인 커렌츠’에 기고한 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정책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교과서적인 대량학살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자제와 화해를 촉구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인 9명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며 제2의 낙바(Nakba)를 저지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연민의 목소리는 주목받을 만하다. (낙바는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이스라엘이 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일으킨 팔레스타인인 75만 명의 디아스포라이다. 현재 6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하마스 폭력이나 반유대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자 학살에 반대할 힘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인의 의견을 강조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이스라엘이라고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상기하자는 얘기다.

요나탄 지겐, 하마스에게 납치된 이스라엘계 캐나다 활동가 비비안 실버의 아들

이스라엘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점령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인을 이스라엘로 데려와 치료받도록 도왔던 실버는 베에리 키부츠에서 하마스에 납치됐다. 그녀가 죽었는지, 인질로 잡혀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버의 아들 요나탄 지겐은 영국 채널4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어머니가 경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기를 많이 죽인다고 이미 죽은 아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평화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목표를 삼은 것은 평화’였다고 말했다.

지겐은 팔레스타인과 화해하자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좁아졌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고통이 다를 수 없다. 나도 키부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함께 운다. 하지만 안전을 확보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화뿐’이라며 ‘복수는 전략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네타 하이만, 하마스에게 납치된 딛차 하이만(84)의 딸

연로하신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간 뒤 하이만은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에 가자지구 공격에 반대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잡아간 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이란에 화를 내면서도 대부분의 분노는 이스라엘 정부에게 쏟아냈다.

‘나는 명절날 어머니를 지키고 보호하는 대신 군대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순찰을 돌게 한 이스라엘 정부에 분노한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가자 국경 지역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온 이 정부에 분노한다. 이 엄청난 실패, 이 혼란은 그들의 책임이다. 4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가 인질의 가족 대부분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들의 책임이다. 나는 이 끔찍한 분쟁을 끝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2000년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정권에 분노한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끔찍한 곳에서 이 악몽이 끝나고 등장할 정부를 향해 외친다. 가자지구를 파괴하지 말라. 그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다음번에 더 잔인한 폭력을 가져올 뿐이다. 그리고 휴전 협상할 때가 오면 그때를 이용해 양측 간에 ‘약정’이 아닌 진정한 ‘평화 협정’을 끌어내도록 노력하라.‘

지브 스탈, 고향을 방문했다가 친구와 가족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인권운동가

스틸은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분리주의 정책을 규탄해온 이스라엘 인권단체 ‘예쉬 딘’의 이사이다. 그녀는 10월 7일 크파아자 키부츠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는 중 친구와 가족을 잃었다. 그녀는 10월 17일 하레츠에 이스라엘의 폭력 중단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작은 소리 하나하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밤중에 총소리 환청이 안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한 가지 강력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죽음의 순환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롭고 안전한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에 모든 힘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억제‘, ’최후의 일격‘, ’결정적 행동‘과 같은 단어로는 이 순환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전은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야 이뤄질 것이다.

내 처제 미라, 같은 반 친구 탈, 어머니의 죽마고우 빌하와 그녀의 손자와 사위, 옆집의 리브낫과 아비브, 그들의 자녀와 손자 손녀, 학창시절 내 상담선생님이었던 미할과 그녀의 아들 등 수백 명이 죽었다. 그러나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7일 공격과 무관한 민간인 학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과 공포, 슬픔과 유가족의 아픔을 연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의 미래, 크파아자 키부츠와 주변 지역의 미래, 이곳에 사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다‘. 

스틸은 지난 20년, 그리고 끔찍한 이번 사태가 증명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도 방어와 안보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다비드 존셰인, 삼촌이 사망하고 사촌이 끌려간 이스라엘 인권단체 브트셀렘의 이사

존셰인은 15일 글에서 이미 가자지구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이스라엘 군인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희생하고 (7일 공격 당한) 오타프 마을에 또다시 유혈 사태를 야기할 복수를 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복수는 비전이 아니다.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계획이 아니다’라며 정부의 말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가자지구 전체를 처벌하려 한다고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네타냐후는 선택된 몇몇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마스와 협상하고 수백만 달러의 카타르 자금이 가자지구로 유입되는 것을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를 강화하려 노력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8일 보도했다. 네타냐후는 2019년 당원 회의에서 하마스와 서안지구를 명목상 통치하는 파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하마스를 강화하려 했음을 시인했다. 지금도 네타냐후는 충분히 하마스와 또다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전쟁의 확실한 대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익명의 생존자, 베에리 키부츠 공격의 생존자

11일 독립 저널리스트 오를리 바레브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군대 강화와 미국의 지원으로 갖춘 돔 미사일 방어 체계를 ‘임시방편적’인 해결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베에리 키부츠에서 불과 4.5km 떨어진 가자지구에 이 사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편히 자겠는가. 나에게 이 사태는 12시간 만에 끝났다. 대피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를 얘기하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엄청난 고통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겪은 나는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힘이 빠진다. 내가 겪었던 일을 똑같이 겪고, 도망갈 곳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수년간 정치적 해결책을 요구해 왔다. 나는 19살이다. 지난 며칠 동안 군인의 신분으로 전장에서 쓰러진 친구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긍심을 갖고 기대했던 군 생활이 그렇게 끝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베에리 키부츠, 나할오즈 키부츠, 크파아자 키부츠의 고통과 가자지구의 고통은 똑같다. 그 키부츠에 떨어진 로켓과 가지지구에 떨어진 로켓은 똑같은 방식,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폭발한다.

네타냐후에 대한 분노가 크다. 나 또한 그렇다. 멍한 상태를 벗어나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마다 강렬한 분노를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100% 네타냐후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흘린 피는 그의 탓이다. 그러나 그가 근원적인 문제의 뿌리인 건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에게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라. 당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당신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그리고 또 물어보라.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당신의 가치에 부합하는가.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그 정치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정말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요구사항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요구하는 건 사실 하나뿐이다. 그것은 평화이다.

마오즈 이논, 부모가 사망한 네티브 하사라의 소년.

이논은 15일 BBC.뉴스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모님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태로 목숨을 잃었고, 앞으로 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멈춰야 한다. 모든 관련자에게 압력을 가해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상황을 동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복수는 더 많은 고통과 사상자를 초래할 것이다. 군인과 가자지구 및 이스라엘 양측의 민간인이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울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 힘든 시기에 이런 인터뷰에 응하는 이유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다. 전쟁을 멈춰 달라. 제발, 전쟁을 멈춰 달라’.
 

10월 16일 이스라엘의 대피 명령을 받고 집을 떠나 피란간 소년이 자기 고양이를 안고 동생과 앉아 있다. ⓒ뉴시스


야코브 아르가마니, 슈퍼노바 축제에 갔다가 납치된 딸을 둔 아버지.

아르가마니는 8일 이스라엘 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과 평화를 이루자. 나는 평화를 원하고 딸이 돌아오기를 원한다. 이제 충분하다. 그들도 사상자가 있고 포로가 있으며 울고 있는 어머니들이 있다. 우리는 한 아버지 밑에 있는 두 민족이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자’. 그리고 CBS 뉴스와의 10일 인터뷰에서 아르가마니는 자기 딸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며 이스라엘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이 카츠만, 7일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차임 카츠만의 남동생.

형의 장례식이 치러진 1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카츠만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의 죽음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지 않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 정부는 이것이 우리에게 안전과 안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정부는 항상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사람을 많이 죽이면 우리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더 나은 삶들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그저 더 많은 테러와 내 형처럼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다. 나는 내 형에게 일어난 일이 가자지구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엘라나 카민카, 이스라엘 군인이었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

카민카는 16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사람이 목숨 잃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것이 누구든 절망할 어머니가 있는 사람이 또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견딜 수 없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생명을 잃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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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에 의한 일본의 불법참전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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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3/10/25 09:38
  • 수정일
    2023/10/25 09:3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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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과 “유엔사” 1 / 이시우

  • 기자명 이시우 
  •  
  •  입력 2023.10.24 19:50
  •  
  •  수정 2023.10.24 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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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사진가

 

목   차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2) 용병

(3) 평화헌법 위반여부

 

(1) 유엔헌장 위반여부

1) 요시다 정부의 유엔협조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신문마다 대서특필했지만 미군 점령 하에 있었고, 장기간 전쟁피로 상태에 있었던 일본국민들은 이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또한 한국사태가 내전이라면 주권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라도 전범국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유엔이 움직이고 일본의 점령정책을 주도하던 미군이 “유엔사”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으로서는 “유엔사”의 행동에 어떠한 방식으로 협력할 것인가라는 대응에 직면하게 되었다.(주1) 즉 유엔이라는 대의명분과 “유엔사”라는 실체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한국전 개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7월 14일, 중의원 시정방침연설에서 요시다 총리는 유엔활동에 참가할 입장은 아니나 가능한 범위에서 이에 협력한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했다. 다음날 유엔에 대한 협력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유엔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협력하거나 가능한 범위에서 협력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주2)

일본정부가 ‘정신적으로 협력’한다는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표명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2개월이 지나서였다. 8월 19일, 외무성은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을 발표하고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자세를 명확히 했다. 이 8월 19일이라는 시기는 “유엔사”가 부산교두보까지 밀렸던 시기이다.

「한국동란과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공산세력에 의한 침략이며, 공산주의 세계와 자유세계의 사상전으로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엔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공산주의 세계에 굴복할 것인가, 유엔에 협력할 것인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하며 “유엔사”에 가능한 협력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일본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기술하고 있다.(주3) 주목할 것은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보다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미국주도의 “유엔사”에 협력한다는 것이었다.(주4)

2) 요코타 기사부로의 경찰행위론

“유엔사”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방침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것은 1950년 당시 일본의 보수적 국제법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요코타 기사부로(橫田喜三郞)였다.(주5)

일본이 평화헌법에 의해 군비철폐를 당한 상황에서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을 어떻게 보장 받을 것인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당시 일본국제법학계의 첨예한 과제였다. 이에 요코타는 1950년 2월 간행한 일본의 강화문제(日本の講和問題)(주6)에서 유엔헌장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헌장 제1조1항)는 규정에 대해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라며 ‘국제’의 용어를 넓게 해석한다.

요코타는 이런 관점에서 일본이 비회원국(주7)의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받거나 그 위험에 접하는 경우에는 국제연합의 집단보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으로부터 희망을 찾은 것이다. 요코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비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의 협력을 통한 재무장의 가능성도 언급한다. 유엔의 군사조치는 전쟁이 아닌 경찰행위이기에 평화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결의에 의거해 많은 연합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통합지휘하에 남측을 원조하기로 되었지만 이 군대의 행동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국제경찰행위로 봐야할 것이다...이 행위는 침략전쟁을 제지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강력한 군사행동이 되어야 한다.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무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형태상 무력행동에 대해서는 무력행동이 행해져 전쟁과 같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개인의 완력을 제지하는 경찰관의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 불법이 아닌 정당한 공무집행의 행위이며 경찰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이나 무력행사를 제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공동의사에 근거하여 국제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게 위해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은 사적인 전쟁이 아닌 공적인 국제경찰행위로서의 성질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법하고 금지되지 않는다. 금지될 리가 없다...유엔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보통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국제연합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는 것은 헌법에서의 전쟁포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주8)

이는 한마디로 유엔군사조치의 경찰행위론이다. 경찰행위이기에 전쟁이 아니고, 일본이 유엔의 경찰행위에 협력하는 것은 참전이 아니므로 헌법위반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요코타의 논리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한국전쟁 발발로 개회된 제8회 국회연설(1950.7.14.)에서 다음과 같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만일 대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군비철폐로 우리 안전보장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국민이 근심하는 바이다. 국제연합의 이번의 조치는 우리의 마음의 안정에 답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로서는 현재 적극적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국제연합의 행동에 참가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 범위에서 국제연합에 협력하는 일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주9)

요시다는 일본인을 참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유엔의 조치는 공개적으로 지지했다.(주10)

그러나 일본과 미국에서의 일부 여론은 “유엔사”에의 협력은 곧 참전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2일 관방장관 오카자키(岡崎勝男) 등이 일본인의 전투참여는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주11) 일본인 참전주장은 일본 정계뿐만 아니라 미 의회에서도 제기되었다. 1주일 후인 1950년 7월 10일 인디아나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호머(Homer Capehart)는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한국전쟁에 일본인을 자원병의 형태로 투입할 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보냈다. 유엔이 일본인을 편성하여 “유엔사”의 지휘 하에 참전시키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주12)

민주당의 아시다(芦田均)는 참전하는 것은 일본이 국제경찰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아시다는 “현재 요시다 정권은 조선전쟁이 주는 기회를 십분 이용함으로써 유엔활동에 적극 협조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3)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여론은 “한일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 사토 의장의 발언처럼 참전 반대의견을 지지하였다.(주14) 미국의 여론도 주류는 반대 입장이었다. <뉴욕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6․25전쟁에 일본인이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주15)

이렇듯 일본인의 참전에 관한 의견들이 분분해지자, “유엔사령관” 맥아더(Douglas A. MacArthur)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는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일본인이 “유엔사”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주16)

그러나 요시다 정부의 신중함과 맥아더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은 비공개적으로, 비밀리에 불법참전의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 있었다.

8월 29일 요시다 총리는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 ‘귀관이 필요로 하는 어떠한 시설 및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가능한 협력을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주17)

그러나 일본의 “유엔사”에 대한 협력은 시설과 노력에 의한 협력에 그치지 않았다. “유엔사”가 부산교두보로 밀리면서 한국내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전투기와 전폭기 출격은 큐슈 등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일본의 비행장은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극동공군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7함대 항모 함재기가 사용되었는데, 그 기지인 사세보는 미해군의 작전기지뿐만 아니라 수송기지의 역할도 했다. 구일본해군의 군항으로서 발전했던 사세보는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무역항으로 그 첫걸음을 디딘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발발로 인해서 중요지역 대부분을 미군이 접수하였다.(주18)

소해부대 파견이나 영덕, 흥남 등 전장지역으로의 선박‧선원파견은 정부가 표명한 「노력제공」범위를 초과한 것이나 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정부방침으로 추진하였고, 일본은 “유엔사”의 가장 큰 군수기지가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일본인들은 요시다 정부의 “유엔사”지원 방침을 상당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던 1950년 9월말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의하면, 유엔에 협력해야한다 56.8%, 협력해선 안 된다 9.2%로, 협력찬성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요코타설을 지지한 오사토 마사오(大鄕正夫)는 1972년 논문에서 “가장 잘 국가실행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설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여 국가실행에 국제학설을 꿰맞춘다는 국수주의적 국제법학관을 대변하였다.(주19)

요코타는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를 신봉하는 대표적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켈젠의 입장과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가 켈젠의 입장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된 것은 일본국의 입장을 수호하는 국수주의학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3) 요코타와 일본정부주장 비판

이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비회원국 권리의무설과 경찰행위설을 검토해보자.

첫째, 비회원국 권리의무설을 살펴보자.

유엔헌장은 회원국 간의 국제법적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조약이다. 그러나 조약일반처럼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헌장 제2조는 제1조에 명시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추구함에 있어 회원국의 행동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회원국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또한 안보리의 결정을 이행하거나 안보리가 정하는 바에 따른 이행조치, 상호원조 제공의 주체는 회원국이다.(헌장25조,48조,49조)(주20) 당시는 일미동맹 등의 지역기구를 형성하기도 전이지만 설령 지역약정이나 지역기관이 결성되어 강제조치를 취하고자 할 때도 안보리의 허가 없이는 불가하다.(헌장53조)(주21) 일본의 참전에 대해 안보리는 허가한 바가 없다. 따라서 이들 헌장조항에 의해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다음으로 헌장29조에 의해 설치된 안보리의 보조기관에는 남녀 개인이 참여할 수 있다.(헌장8조)(주22) “유엔사”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면 아무문제가 없다는 일본 법률가들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최고법원장이던 타나카(田中耕太郞)는 1950년 7월 23일자 신문에 만약 유엔의 요구가 있으면 일본인이 개인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주23) 일본 참의원의장인 사토(佐藤尙武) 역시 일본이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도 일본인들이 개인자격으로 유엔군에 입대하는 것은 헌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주24) “유엔사”를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보면 일본국민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사”는 1994년 유엔법률국이 명백히 밝혔듯 유엔의 보조기관이 아니다.(주25) 따라서 이들 조항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헌장103조(주26)에 의하면 유엔헌장의 우선성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미‧일간의 국제점령법보다 유엔헌장 상의 의무가 우선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켈젠에 의하면 두 가지 규범 또는 두 가지 의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하나의 경우에만 ‘우선적’이면 다른 하나는 유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즉, ‘우선’하지 않는 규범이나 의무는 ‘우선’인 의무를 규정하는 조약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103조는 회원국 간 체결된 불일치 조약과 관련해서는 불필요한 조항이며,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에 체결된 불일치 조약에 대해서는 매우 큰 문제가 된다. 현행 일반 국제법 하에서 조약은 동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조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조 6항(주27)에 따라 헌장이 새로운 일반 국제법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 즉 UN법이 모든 국가에 대해 유효하고 적용가능한 초국가법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회원국과 비회원국 사이의 조약에 관한 제103조의 규정은 현행법과 저촉되지 않는다.(주28) 그러나 유엔헌장은 국가간의 법이지 국가위의 법은 아니다.

따라서 헌장103조에 의해서도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주장은 불성립한다.

둘째, 경찰행위설을 살펴보자

일본정부는 1952년의 국회질의응답에서 참전행위가 유엔에 대한 협력활동에 해당하나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주29)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요코타의 경찰행위설은 트루먼으로부터 유래한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권고’했다. 트루먼은 1950년 6월 29일 언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전쟁 중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전쟁 중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유엔에 의한 경찰조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데 동의하였다.

유엔헌장의 채택과 관련하여 1943년 미 연방의회에서 이루어진 논의과정 중 상원의원인 페퍼(Claude Pepper)는 연방의회의 전쟁선언권을 국제기구에 위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다만 소규모전쟁(small wars)에 있어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경찰력(police force)으로써 의회의 사전동의없이 미군이 사용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미국역사에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군사적 조치들은 해적과의 전투, 미개척의 해안에 소규모의 해군을 상륙시킨 행위, 멕시코 국경지대의 강도들이나 소떼 도둑을 쫒기 위한 군대동원 등이었다. 이때 사용된 느슨한 경찰조치(police action)라는 개념을 후에 트루먼이 의회의 동의없이 미군을 한국에 파병하는 법적 근거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페퍼의원이 발언하던 당시에 같은 상원의원이었다.(주30)

유엔의 행동이 국제사회를 대표한 경찰행위라면 침략자에 적용될 법은 낡은 전쟁법규가 아닌 새로운 유엔경찰법규가 아니면 안된다. 이같은 경찰법의 제정이 경찰행위에 선행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자에 대하여 「불법으로부터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ex enjuria non oritur jus)라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주31) 그러나 유엔도 미국도 경찰행위에 해당하는 법 개념을 제정한 바가 없다. 비유는 법이 아니다.

그럼 요코타가 경찰행위라고 비유한 유엔의 군사조치에 대해 살펴보자.

안보리는 39조와 42조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회원국들에게 무력사용의 ‘권한을 부여할(authorize)수’ 있다. 42조에 의거한 안보리결정은 2조 4항에 의해 금지된 무력사용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결정이다. 그러나 단지 39조에 의거한 단순한 권고는 이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주32) 39조는 ‘권고’(주33)와 41조와 42조에 따라 취해지는 ‘조치’를 구별하고 있다. ‘권고하기’와 ‘강제조치 결정하기’는 39조 내에서 안보리의 서로 다른 두 기능이다. 39조하의 강제조치는 안보리에 의해 결정, 지시될 수는 있으나 권고될 수는 없다. 만약 안보리가 39조하의 권고하기를 원한다면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평화적 수단만을 권고할 수 있다.(주34) ‘권고’는 오직 유엔헌장 6장에 나열된 평화적 해결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헌장제정 당시부터 명확히 정의되었다.

스톤(J. Stone) 역시 헌장 39조 규정에서 “권고한다”는 것은 평화적 수단의 권고만을 의미하며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포함하지 않으므로, 6월 27일의 결의에서 안보리가 가맹국에 군사원조 등을 권고한 것은 헌장에 입각한 결의가 아니라고 한다.(주35)

따라서 이들 결의에 따른 참전국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일 뿐이다.(주36) 통합사령부든 “유엔사령부”든 간에 그것은 헌장 29조에 계획된 방법대로 창설되지 않았으므로 유엔의 기관이 아니다.(주37)

이리하여 미국은 작전수행상 다수의 국제약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스웨덴 간 「재한 유엔작전에 있어서의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의 참가에 관한 협정」 또는 「남아연방군의 재한유엔작전참가에 관한 미정부와 남아연방정부간의 협정」(주38) 등은 미국이 「주한유엔사의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체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는 이러한 약정조차 체결하지 않았다. 유엔사업무편람에는 “유엔사”가 ‘유엔의 대행기관인 미국 국가통수기구로부터 전략지침 및 지시를 수행한다’(주39)고 되어있다. 그러나 미국이 유엔의 「집행기관」으로 지명된 일은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을 “유엔군”이라 칭할 수 없으며, 「유엔의 조치」라는 표현은 정치적 용어일 수는 있으나 법적의의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주40) 유엔사무국 역시 유엔의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한 통합사령부는 유엔의 지휘와 통제하에 있는 강제조치라기보다는 개별국가에 의해 허가된 무력사용이라는 점에서 걸프전에서 설립된 연합군과 유사하다.(주41)

이로서 요코타와 일본정부의 “유엔사”협력론의 근거는 모두 의심된다. 요시다시게루 총리는 현실적인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지만 유엔의 조치 자체에 대해서는 지지했다. 요코타와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이 유엔에 가입한 것은 1956년이므로 한국전쟁기간동안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어떤 권리나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주42) 또한 유엔의 군사조치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엔참전국들의 조치는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였다. 1951년 요시다애치슨교환공문과 1954년 일본유엔사행정협정의 최대전제인 한국에서의 ‘유엔조치’는 부존재 한다. 따라서 요시다 시게루의 참전결정이후 현재까지 일본정부가 추구해온 유엔조치의 경찰행위설은 의심된다.

4) 일본정부조치의 유엔헌장 위반여부

다음으로 요시다 정부의 행정적 책임을 살펴보자. 소해대에 내린 명령서는 요시다의 유엔헌장위반이 의심되는 증거이다. 요시다는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 제2전대의 함선에 전보 한 통을 최종적으로 보냈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한국해역에서 유엔군의 소해작전에 협력할 것이다.”(주43)

또한 1차 원산소해작전에서의 사고 후 10월 31일 해상안전청 오오쿠보 청장은 특별소해대 타무라 사무총장을 대동하고 오카자키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한반도해역에서 특별소해대 활동에 대한 정부의 의향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전쟁초부터 참전찬성론자였던 오카자키 장관은 요시다 총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일본정부로서는 유엔군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고, 이에 따라 강화조약을 일본에 유리하게 이끌어 갈 생각이다. 추운 겨울 한반도해역에서 노후화된 작은 배로 소해작업에 대단히 노고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최선을 다하여 미해군의 요망에 부응하길 바란다. 일본정부로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심려하지 말라”(주44)

유엔회원국이라도 안보리의 허가없는 강제조치는 헌장위반인데 비회원국이 유엔의 강제군사조치에 참여하거나 원조를 제공하는 것은 유엔헌장위반이다. 또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유엔깃발을 불법사용 했으며 자국의 조치를 유엔의 조치로 기만한 미국의 유엔헌장위반에 그대로 편승한 것이다. 미국의 헌장위반을 추수만 했다고 해서 일본정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상을 보면 일본은 미군주도의 유엔활동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한다고 표명해놓고 ‘기지제공, 후방지원, 작전지원’등 예상을 뛰어넘는 적극적 협력을 했다. 기지제공 측면에서 일본은 주한미군 가족의 긴급피난지, 긴급파견부대의 출격기지, 작전기지, 훈련기지, 군수기지로 “유엔사령부”의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방지원활동을 개관하면 수많은 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군수품 생산과 수송 등에 종사하였으며, 일본국내의 미군기지 등에서 서비스에 종사하였고, 해상수송, 항만기술자 및 하역자로서 한국의 해역 및 항만에 파견되어 “유엔사”활동을 지원했다. 직접적인 작전지원으로서는 소해활동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참전은 외면적으로 ‘유엔군에 대한 협력’이라는 명분을 걸고 내면적으로는 ‘대미협력’을 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지원은 생각지도 못할 사안이었고 한국도 일본의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직접적인 대미협력도 불가능했다. 오직 “유엔사”를 명분으로 한 참전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정부가 ‘미군에 대한 협력’보다 ‘유엔군에 대한 협력’을 선언하게 되는 배경은 야당과 국민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제1야당인 사회당도 ‘미군에 대한 협력은 불가하지만 유엔의 활동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미군이 유엔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유엔사”협력이라는 명분으로 대미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서 “유엔사”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한미안보조약 제3조에서는 ‘태평양지역에서의 무력공격에 한미가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미일안보조약 제6조에는 ‘극동에 대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기여하기 위하여 일본은 미군에게 시설과 구역을 허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두 조약은 한미일 3국이 극동지역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연동되어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된다.(주45) 그러나 “유엔사”는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일본이 직접적으로 한국유사사태에 개입할 수단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유엔사”를 앞세운 일본의 한반도개입은 유엔헌장위반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유엔사 로고. [출처 - 유엔사 홈페이지]

 

(2) 국제전쟁법 위반여부

1) 불법전투원

명확한 기록을 중심으로 “유엔사”와 일본정부의 국제전쟁법 위반여부를 살펴보자. 먼저 불법전투원개념을 중심으로 다음사례를 보자.

1950년 10월 2일 미극동해군참모부장 얼레이 버크소장은 해상안전청 오오쿠보(大久保)청장을 극동해군사령부로 불러, 원산만 소해지원을 요청했다.(주46) 오오쿠보 청장은 즉시 거절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해상안전청(MSA)의 공식지위 문제였다.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비군사적 단체로서의 해상안전청의 지위에 대해 명확히 했다. 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이 법의 어떠한 내용도 해상안전청 또는 그 직원이 군대로 조직되거나 훈련되거나 군사기능을 수행하도록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주47)

따라서 해상안전청법 제25조는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오오쿠보는 버크 소장 요청의 본질에 대해 1981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주48)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총리 요시다 시게루였다. 오오쿠보 청장의 보고를 받은 요시다 총리는 미군의 부대나 화물수송을 위한 용선傭船계약은 체결되었으나 소해작업은 계약하지 않았고 한반도해역에서의 소해작업은 전투행위이며, 해상안전청법 제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라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일본해군이 미군의 지원작전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으로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버크 소장의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주49) 일본정부는 “유엔사”에 대한 협력을 방침으로 결정했다.(주50)

“유엔사”는 요시다 정부에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했고, 요시다 정부는 소해대가 비군사조직이고 교전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법적인 적대행위에의 참가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교전자격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전쟁수행 자격을 국제법적으로 교전자격(facultas bellandi)이라 하고 교전자격을 가진 자를 교전자(belligerents)라고 한다. 비전투원이라 함은 병력에 속하되 직접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법무, 위생, 종교 등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현대 전쟁법에 있어서는 정규군의 구성원이면 비전투원에게도 전투원과 거의 유사한 법적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비전투원이 아무리 전투원의 지위에 근접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적대행위의 권리는 전투원에게만 주어진다.(주51)

비정규군은 전시에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민중의 조직으로서 이에는 민병·의용병 등이 있다. 민병이란 전시에 국가가 소집·편성한 병단이고, 의용병이란 국가의 위급을 인식하고 자진 출원하여 병력에 속해서 전쟁에 종사하는 자로 편성된 병단이다. 그러나 민간공무원인 소해대는 비정규군도 아니었다. 민간인이라면 어떨까?

전투원이 교전자로서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갖는 것과 달리, 민간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행위로 인한 기소 면제와 전쟁포로 대우를 핵심으로 하는 “전투원의 특권”역시도 향유하지 못한다.(주52) 민간인의 전투참여는 전쟁법위반으로 전쟁범죄자가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간공무원신분인 소해대의 적대행위참여는 전쟁법위반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4가지 조건을 갖추면 교전자격을 부여받을 수는 있다.

1907년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의 부속서인 “육전의 법규관례에 관한 규칙 제1조” “1949년 제네바 제3협약 제4조(A)(2)”는 합법전투원으로서 포로지위를 부여받기 위한 4개 조건을 명시했다.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있고,
②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가지고,
③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고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경우에 한하여 교전자격을 인정한다
.(주53)

민병, 의용병, 민간인이라도 위의 4개 조건을 갖추면 합법전투원이 된다 하겠다. 그러나 일본특별소해대의 경우, 고착된 기장부착이라는 두 번째 조건을 명백히 위반하였다. 다음을 보자.

10월 6일 미제3소해대의 스포포드 대령은 일본 소해대가 제7통합임무부대 지휘관 스트라블 중장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일본 제1소해대와 제2소해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였다. 이것을 접수하고 특별소해대 사무총장은 특별소해대의 임무편성을 규정한 명령 특별소해 제1호를 하달하였다.(주54)

“일본 소해부대는 일본 국기 대신 국제 ‘E’깃발(상업용 선박에 사용됨)을 게양할 것이다.”(주55)

선원들은 일본선박이 일장기를 달고 항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법적지위는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했다. 선원들은 일시적으로 더 이상 일본시민이 아니라 미 해군에 고용된 무국적 계약자인가? 소해대 사무총장 타무라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주56)

일본국기 대신 ‘E’깃발을 단 것은 교전자격을 갖기 위한 4개의 조건 중 2번째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원거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고착된 특수기장을 달기는커녕 오히려 고의적으로 위장‧기만한 것이다.

이는 최근 전쟁법 이론인 불법전투원의 조건에 의하면 두 가지나 해당된다. 우선 불법전투원의 조건을 보자.

(i) 정규군이 제복을 착용하지 않거나 기타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간첩행위나 적대 행위를 한 경우,
(ii) 정규군에 편입되지 않은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 대행위를 수행하는 경우,
(iii) 민간인이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주57)

일본소해대는 (i) 고착된 식별표지를 하지 않고 (ii) 비정규군이 합법전투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유엔사”와 요시다 정부가 소해대에 내린 명령과 조치는 국제전쟁법의 위반이 의심된다.

다음은 주일미군기지에 근무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기지노동자들의 사례를 보자.

미7사단 제49야전포병대대 대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상부에서 일본인노동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지침도 없었고 그저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하던 연장선에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주58)

이들은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로 비공식적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의 종군 동기는 대체로 미군부대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또는 아니면 막연히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자원하여 한국행을 자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전투에서 위기에 처할 때나 혹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전투‧적대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는 교전자격조건을 두 가지나 위반한 것이다.

③ 공공연한 무기휴대
④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의 준수

이들은 전투목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기에 공공연하게 무기를 지급하지 않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불가피한 상황에서 전투에 휘말렸다. 또한 미군대대장의 진술에서 확인되듯 지침도 없이 상식선에서 데려갔기에 전쟁에 관한 법규나 관례를 준수할 수 없었다. 다음은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자.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타케시(Matsunobu Takeshi, 28세)는 1950년 7월 4일 이후 사단 포병본부를 따라 통역 겸 기술자로 종군하였고, 대전에서 부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직접 전투를 가담하여 북한군 2명을 사살하였다고 했다.

제24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미네후미(Yoshiwara Minefumi)는 1950년 7월 19연대 G중대와 함께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지연전을 수행하던 중대와 함께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처가 미 187공수연대 군 경찰을 통해 소재 파악을 요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아사이신문>1952년 11월 14일자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52년 10월 14일 극동군사령부는 그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 권유에 의해 참가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주59)

이는 교전자격조건 ⓛ 부하를 위하여 책임을 지는 통솔자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전투원으로서 지휘통솔체계에 속하지 않은 채 적대행위를 한 것이다. 이 사안은 미군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써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맥아더가 일본인의 참전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공표한 상태였기에 조사부대는 이 사건이 미군정책에 명백히 위반된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상부의 특별한 지침이 요구된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안은 특별보안이 유지되도록 통제되었다.(주60) 이처럼 “유엔사”는 불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모츠(Ueno Tamotsu)는 1950년 7월 9일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로 대전으로 갔고 제24사단 34연대 통역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부대와 종군하면서 항상 전투에 참가하여 사격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주61)

후미죠의 경우는 사단 병원에서 근무하였으나 철수작전 시 개성 북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북한군과 사격전을 수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주62)

히라츠카(Shigeji Hiratsuka)는 1950년 7월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E중대에 소속되어 종군하였다가 1950년 9월 4일 낙동강전투에서 교전 중 사망하였다. 1952년 11월 13일 아사이신문에 「조선에서 전사했던 한 일본인」이란 제목으로 히라츠카(平塚重治)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단에서는 예하부대에 그에 대한 의무기록이나 인명손실기록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각 부대의 조사결과 의무기록이나 사망기록이 전혀 없다고 보고되었다.(주63) 미군 당국은 그 이유가 공식적인 승인 없이 밀항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주64)

히라츠카 역시 전투원으로서의 지휘통솔체계 없이 비군사요원으로 부대에 소속되었다가 적대행위에 내몰린 경우이다. 일본인노동자개인의 전쟁법위반보다 그들을 교전자격도 갖추지 않고 전쟁터로 끌고 간 지휘관들의 전쟁법위반이 더 심각하다 하겠다.

코바야시(Sakae Kobayashi, 21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시 제7사단 32연대 H중대의 하우스보이로 종군하였으며, 북진작전에서는 중대장과 함께 정찰을 나가 북한군을 만나 사격전을 수행한 적이 있다고 했다. 중대장은 만에 하나 공산군이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하여 즉시 후방으로 가도록 지시했다고 진술했다.(주65)

이처럼 현장지휘관들도 일본노동자들의 교전행위가 문제가 될 것임을 정확히 자각‧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켄죠(Takatsu Kenzo, 19세)는 1950년 9월 15일 제7사단 32연대 57포병대대에 소속되어 종군하면서 주로 주방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대대가 동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사격전에 참가했으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켄죠의 경우는 중공군과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극동군사령부는 그의 사안에 대해 특별히 비밀등급을 1급 비밀로 상향할 정도로 민감하게 처리하였다.(주66)

제2사단 23연대 1대대 A중대 소속되었던 츠네시데(Shigamitsu Tsuneshide)는 부대의 하우스보이였으나 소총을 지급받았고 북한지역에서 중공군을 만나 사격전을 전개하여 3~4명을 사살하였으며, 자신도 중공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었다고 진술하였다.(주67)

1950년 11월 27일 세이이치가 부산에서 한국군 경찰의 검문에 걸려 심문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은 김두한 외무장관 명의로 미국 대사관을 통해 세이이치의 한국입국경위 조사와 일본으로의 추방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 후에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담당 중대장들이 일본인들을 공식적인 절차없이 허락한 것은 잘못이고, 그들이 그것이 위법사실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면책이 될 수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간 것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주68)

현장지휘관이 위법사실을 몰랐어도 위법은 구성되고, 위법에 대한 처벌도 피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미군 내부적으로 종군 일본인기지노동자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려한 사안이었다. 일본인 종군노동자들의 소재가 공산측에 알려지면 미국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기지노동자들의 불법참전에 대한 전쟁법위반책임은 전적으로 “유엔사”측에 물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요시다는 “유엔사”에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요시다는 국내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때론 어쩔 수 없이, 때론 능동적으로 요구에 응했다. 1950년 6월 이미 요시다는 “유엔사”의 전쟁수행에 광범위한 비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주69) 또한 138척의 일본 상선과 7,550명의 선원을 한반도로 오가는 유엔군과 군수품수송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요시다의 협정이 있었다.(주70) 미국대사를 지냈던 머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선박과 철도전문가들은 숙련된 부하직원과 같이 한국에 가서 미국과 함께 유엔사령부 예하에서 활동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극비사항이었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수천 명의 일본전문가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유엔군은 한국전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주71)

이것은 전쟁에 대한 직접개입의 중요하고 실질적인 형태를 나타낸다.(주72) 이는 “유엔사”와 일본정부 공동으로 전쟁법위반책임이 의심되는 사건들이다.

2) 용병

다음으로는 참전일본인의 용병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뉴욕 타임즈>는 1950년 8월 12일자 사설에서 밝힌 일본인의 참전반대 이유 중 하나가 일본인은 “유엔군”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군의 용병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주73) 다시 소해대의 사례를 살펴보자.

1950년 10월 9일, 특별소해대가 요시다 시게루총리로부터 최종적으로 받은 전보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특별소해대원, 귀하는 항구를 떠날 때부터 항구로 돌아올 때까지 미군에 임시 고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단, 복무기록의 경우에는 계속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한다.”(주74)

일본선박과 선원들이 미해군사령부로 이전된다는 발표는 그들이 일종의 “용병”임을 암시했다. 미육군 공간사에 의하면 맥아더는 일본 소해정의 사용은 계약에 의해 고용된 것이기 때문에 전투목적이 아니라 인도적 목적으로 운용되었다고 국방성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밝히듯 그들은 전투목적으로 운용되었다. 용병으로서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맥아더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국전쟁 후에 발전된 용병관련 국제법은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가 1977년 범용병회의에서 채택한 “아프리카 용병 폐절에 관한 OAU 의정서(용병배제조약),”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엔총회가 1989년에 채택한 “용병모집, 사용, 자금공여 및 훈련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용병금지조약),”(주75) 1977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채택한 제네바 협약에 추가되는 제1의정서(제1추가의정서) 제47조의 정의가 있다. 이 제47조에 따르면 용병은 전투원의 권리와 포로의 권리가 없다.(주76)

따라서 맥아더의 말처럼 소해대가 고용된 용병이었다면 교전자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도적 목적이 아니라 전투‧적대행위를 목적으로 운용되었으므로 용병관련 국제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위반이 의심된다.

 

(3) 평화헌법 위반여부

일본국헌법 제9조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 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 기한다.
② 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교 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일본국헌법 제9조①항 전쟁포기의 주체는 국가가 아닌 일본국민이다. 일본국민이 전쟁에 참여했다면 그는 이 조항의 위반자가 된다. 그런데 그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면 그를 배치한 군대와 지휘관이 위반자가 된다.

타케세(Ito Takeshe, 20세)는 전쟁 이전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과 함께 한국으로 왔으나, 전쟁이 발발한 후 제24사단 21연대 C중대에 소속되어 미군 병사들과 똑같이 군복과 소총 등을 지급받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7개월 동안 전선에서 공산군을 20명 정도 사살하였고 자신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미국정부로부터 퍼플 허트(Purple Heart)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진술했다.(주77) 이 훈장의 수여는 종군한 일본기지노동자 가운데 유일한 경우로 미국정부가 그의 종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는 거꾸로 “유엔사”가 그를 헌법9조의 위반자가 되도록 지휘한 책임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소해대사례를 다시보자.

1950년 10월 4일 미해군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중장에 의한 긴급동원에 불안과 불만을 느낀 소해대원들은 타무라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한 함장은 “어느 바다에서 기뢰제거를 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가 주한 미해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면 강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위헌 아닙니까?”
또 다른 사람은 “우리는 38선을 넘는 것입니까? 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을 넘으면 우리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주78)

부하들 사이의 불신과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타무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미 극동군사령부와 안전한 장소에서만 기뢰제거를 하기로 합의했다.”(주79)

그것이 거짓말임은 금방 드러났다. 한 익명의 해상안전청대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새로 제정된 헌법에서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을 위해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 행정 공무원이다…일본재건 사명을 가지고 일본재건을 위한 국내 소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기뢰제거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주80)

비록 많은 인원이 전직 일본제국해군(IJN) 선원이었지만 전후 일본의 새로운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로서 그들은 평화헌법을 수호하려 했다. 이 사람들에게 다시 전쟁에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후 국가의 정체성과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주81)

일본 특별소해대는 원산항부근 미구축함의 육상포격이 실시되는 가운데 정박예정해역의 소해작업을 실시하였다.(주82) 원산에서의 소해임무는 시작부터 치명적임이 증명되었다.

10월 17일 결국 일본소해함이 기뢰와 충돌했다. 이 폭발로 승무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의 동료선원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던 배의 요리사 나카타니 사카타로오(Nakatani Sakatarō)는 갑판위에 있지 않았기에 기뢰충돌시 즉사했다.(주83)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지 불과 5년 만에 일본선원은 전쟁에서 적대행위의 결과로 다시 한 번 죽거나 다쳤다. 분노한 함장들은 타무라에게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다. 기뢰제거를 중지하라. [우리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주84) “[우리는] 속았다.”(주85)

모인 함장들은 원산작전의 미 해군 사령관에게 일본소해정의 침몰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입안하여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해상안전청 민간고용인의 직무가 아니었다.(주86)

타무라 휘하의 해상안전청부대 2인자인 노세(Nose)대령은 이제 전체작전을 불법이자 부하들의 생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위험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노세는 더 이상의 기뢰제거를 거부하는 부하장교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노세와 그의 동료 함장은 그들의 사령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산에 있는 연합함대 미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상륙부대의 중장인 앨런 스미스(Allen Smith)는 분개했다. 스미스는 타무라에게 다음 날 아침 일본함정이 소해를 재개하거나 작전 개시 후 15분 이내에 일본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주87) 노세는 간단히 말했다.

“쏠 테면 쏴라.”(주88)

이는 전후 일본군 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성공적인 불복종 사례였다.

상선의 광범위한 동원과 해상안전청의 전개는 전후 시대에 일본이 해외분쟁에 직접 가담한 첫 번째 사례임을 의미했다. 요시다 총리와 오오쿠보 청장은 헌법 9조 위반을 합리화했다. 패전 후 해상보안청에서 없어졌어야 될 조직이었던 구해군의 소해대가 은닉하고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정체가 드러났고, 결국 해상자위대의 중핵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속으로는 출동하여 요시다 정권유지를 위한 ‘국내여론의 환기’와 국민경제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특수’로 나서야 했으나 겉으로 제시할 수 없는 처지에서 미국이 제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은 미일 간에 한반도 유사 등 주변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 간의 작전협력항목으로 ‘일본영역 및 일본주변의 공해역에서 기뢰제거와 기뢰정보를 교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일본주변의 공해역이므로 한국의 영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미국이 극동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소해정은 3척에 불과하나 일본 해상자위대는 소해모함 3척과 34척의 신소해정을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 유사시에 소해능력이 부족할 경우에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와 같이 한반도 영해까지 일본의 소해활동을 요구할지도 모른다.(주89) 한미일동맹이 가속화되면서 공동군사연습의 범위는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의 평화헌법위반은 반복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의 “유엔사후방기지”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브룩스 전 유엔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유엔사”를 강화하던지 새로운 극동군사령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유엔사”를 중심으로 한미일동맹이 현실화되는 것은 유엔헌장과 국제전쟁법과 평화헌법을 총체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의심되는 과거역사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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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池井優, 『日本外交史概説』, (東京: 慶応義塾大学出版会, 1992), p.269.

2)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270-27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1

3) 辻清明編, 『資料戦後二十年史』, (東京:日本評論社, 1966), pp.81-82.

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5) 그는 1896년 아이치현 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배우고 1930년 동대학 법학부교수가 된다. 1948년 도쿄대 법학부장, 1957년 도쿄대교수 퇴직, 1960년~1966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하고 1993년 사망했다.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37. 참고로 일본 평화헌법수호운동의 시발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도쿄대 법학부에 1934년 입학하니까 그의 스승 중 한명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1937년 요코타가 아닌 난바라 시게루(南原 繁)의 연구실조수가 된다. 난바라는 일본국체론을 비판한 진보적 정치학자였고 1945년 도쿄대 법학부장이 되니 요코타는 난바라의 후임 법학부장이었던 셈이다. 1946년 난바라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출되어 신헌법심의에 참여했다. 그러니 그의 제자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평화헌법수호운동을 벌인 것은 그의 스승의 길을 따른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는 1949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시 전면강화를 주장하며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정면대립 하였다.

6) 橫田喜三郞, 日本の講和問題, (勁草書房). p.111

7) 일본이 유엔의 회원국이 된 것은 1956년으로, 한국전쟁 당시는 회원국‧가맹국이 아니었다.

8) 橫田喜三郞, 朝鮮問題と日本の將來, (勁草書房,1950), pp.68-71, 208-209; 鄭祐宗, 「戰後日本の國際法學者における朝鮮問題認識」, 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第20号, (2021), p.27

9) 第8回國會施政方針演說, 1950.7.14.; 고영자, 「6·25전쟁과 전후일본;미점령기의 講和문제와 독립회복」, (경희대학교박사논문, 2010), p.246재인용

10) 『每日新聞』, 1950年7月12日字.

11) 『讀賣新聞』 1950年10月30日字.

12) 『每日新聞』, 1950年7月10日字.

13) 『每日新聞』, 1950年8月14日字.

14) GHQ SCAP, Prefecture Press Analysis(27 Aug 1950), MFSN-267(군사편찬연구소소장 자료번호)

15)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16) 『每日新聞』, 1950年8月10日字. 맥아더가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법률문제보다도 오히려 일본인 참전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일본의 군사적 위기 문제였다. 주일 미군이 한반도로 모두 투입되는 상황에서 일본인마저 투입하게 된다면 일본안보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52

17) 神井林二郎篇訳, 『吉田茂=マッカーサー往復書翰集』, (東京: 法政大學出版局, 2000), pp.340-341

18) 佐世保市総務部, 『佐世保市史(政治行政編)』 (東京: 図書刊行会,1982), pp.348-349,41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22

19) 大鄕正夫, 「南北朝鮮統一なめく゛る國際法問題」, レファレンス22(12), 1972, p.113

20) 제25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 헌장에 따라 수락하고 이행할 것을 동의한다. 제48조1.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유엔회원국의 전부 또는 일부에 의하여 취하여진다. 제49조 유엔회원국은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한 조치를 이행함에 있어 상호원조를 제공하는 데에 참여한다.

21) 제53조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22) 제29조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임무의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설치할 수 있다. 제8조 유엔은 남녀가 어떠한 능력으로서든 그리고 평등의 조건으로 그 주요기관 및 보조기관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도 두어서는 아니된다.

23) 『每日新聞』, 1950年7月23日字.

24) 『每日新聞』, 1950年8月5日字.

25)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이 제공한 군대를 미국의 권한 하에 있는 통합사령부에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분명히 안보리는 통합사령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보조기관으로 설립하지 않았다.”UN Office of Legal Affairs, “STATUS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IN KOREA —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4 (1950) OF JULY 1950”,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501

26) 제103조 유엔회원국의 헌장상의 의무와 다른 국제협정상의 의무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이 헌장상의 의무가 우선한다.

27) 제2조6. 기구는 유엔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확보한다.

28) H.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 Frederick A. Praeger, 1950), p.116

29) 山崎静雄, 『史実で語る朝鮮戦争協力の全容』, (東京:本の泉社、1998), pp.310-311;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5

30) Louis Fisher, “The Korean War : On What Legal Basis Did Truman Act?”,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1995, p.25; 崔哲榮, 「미국의 UN참여법과 미군의 6.25전쟁 참전의 합법성문제」, 美國憲法硏究Vol.21 No.3, (미국헌법학회, 2010), p.154

31)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7;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國際法學會論叢Vol.3, (대한국제법학회 1958) p.63

32)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ed., (London: Routledge, 1997), p.390; 김대순, 국제법론제11판, (서울: 삼영사, 2006), pp.1084-1085

33) 헌장 기초자들의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권고’란 단어는 어떤 구속력 있는 병력도 안보리의 조치에 첨가하지 않았다. 유엔헌장제정회의 제7차 Ⅲ/2위원회 회의에서 ‘벨기에 대표는 4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권고”란 단어의 법적 효력에 대해 발기한 국가들에게 해석을 요청했다. 미국 대표는 영국 대표의 관점에 합의하여 말하길, 강요나 강제없음을 상정했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했다. Cf. also U.N.C.I.O. document 1027, Ⅲ/2/31(Ⅰ), p.4.);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444인용

34) 헌장 39조의 권고(Recommendation)가 평화적 수단의 권고를 의미하느냐, 또는 강제적 수단의 권고까지 포함하느냐의 논의에서 평화적 수단의 권고에 한한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다수 학자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932; Hersch Lauterpacht, Oppenheim's International Law, Vol.II 7thed., (London: Longmans, 1972), p.164; Ian Brownlie,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by States (Oxford: The Clarendon, 1963), p.3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230; Grenville Clark and Louis B. Sohn, World Peace through World Law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p.113; L. M. Goodrich and E. Hambro,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2nded., (Boston: World Peace Foundation, 1949), pp.27-28; James Leslie Brierly, The Law of Nations: an introduction to the international law of peace, 6th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394;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서울: 국제문제연구소, 1990), p.20

35)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p.234-235

36) 이들 안보리결의가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개별국가의 조치라는 입장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이한기, 「한국휴전협정의 제문제」, 국제법학회논총제3호, (1958), pp.37-85; 김대순, 『국제법론』(제9판), (삼영사 2004), p.988;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13등이 있고, 국외에서는 Hans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p.936-937;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Routledge, 1997), pp.389-390;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A Treatise on the Dynamics of Disputes and War Law, (Stevens and Sons, 1954), p.231등이 있다. 반대로 그것을 유엔의 행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국내에서는 김명기, 주한국제연합군과 국제법, (국제문제연구소, 1990), pp.52-62; 제성호, 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색, (지평서원, 2002), p.15; 이병조·이중범, 국제법 신강(제9개정판), (일조각, 2003), p.959의 각주3; Chee, Choung II, Korea and International Law, (Seoul Press for 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Legal Studies, Korea University, 1993), p.88, 강병근, 「주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 관한 법적문제」, 한림대학교민족통합연구소총서제2권, (2000), p.207; 배재식, 「한국휴전의 법적제문제」, 『법학』(서울대) 통권33호, (1975), p.52등 있고, 국외에서는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178; D. W. Bowett, United Nations Forces: A Legal Study, (Frederick A. Praeger, 1964), pp.45-47; Finn Seyersted, United Nations Forces: In the Law of Peace and War, (A.W. Sijthoff-Leyden, 1966), p.41; Danesh Sarooshi, The United Nations and the Development of Collective Secur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110, 169이하; Christine Gray,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 2nd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p.199등이 있다.

37) Baxter, “Constitutional Forms and Some Legal Problems of International Military Command”, British Year Book of International Law, (1952), p.334. 순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국사변에 대한 Command의 구조는 일본점령에 채용된 Command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 두 개의 경우에 단일국가가 국제조직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단일국가는 실제의 군사작전에 어떠한 통제도 행사하지 않았다.(Ibid, p.335)

38) 다른 참전국들도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표적 경우가 네덜란드와의 협정인데, 그 협정의 주된 목적은 참전국들이 전쟁물자를 미국으로부터 보충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salyn Higgins,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Documents and Commentary II,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205;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34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7), p.205

39) UNC and CFC Manual(유엔사연합사업무편람), 7 November 1984, p.7-2-2

40) H. Kelsen, “The Recent Trends i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with Supplement, (Steven & Sons, 1951), p.937참조.

41)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42) 이시우(李時雨), 「國連システム と 國連軍司令部」, PRIMEno.41, (東京: 明治學院大學國際平和硏究所, 2018), pp.13-14

43)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4)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31.

45)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p.171-175

46) 大嶽秀夫, 『戰後日本防衛問題資料集․ 第一卷』, (東京: 三一書房, 1992), p.524.

47) “Shōwa nijyūsannen hōritsu dai nijyūhachi gō kaijōhoanchōhō,” E-Gov hōrei kensaku, accessed June 5, 2022.;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8) Shirōchi, Shōwa nijyūgonen, p.2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49) 大久保武雄, 『海鳴りの日日』, (東京: 海洋問題硏究會, 1978), p.209

50)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4

51)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2

52)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37

53) 이광원, 「군인의 법적지위」, (전남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0), p.61. 다만 일각에서는 이외에도 1) 위계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2) 교전당사국에의 소속, 3) 억류국에 충성의무(국적)가 없을 것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추가적으로 요구된다고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Yoram Dinstein, The Conduct of Hostilities under the Law of International Armed Conflict, 3r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pp.54-56참조.

54)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6

55) Shōgo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sōkaitai,” (March 1978),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6)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57) David Kretzmer, “Unlawful Combatants,”in Gordon Martel (ed.), The Encyclopedia of War (Blackwell Publishing, 2012), p.1.; 안준형, 「국제인도법상 불법전투원의 법적 지위」, 서울국제법연구Vol.28 No.1, (서울국제법연구원 2021), p.142

58) 테일러 대대장이 사단포병에게(1951.1.1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1

59) 『朝日新聞』,1952年 11月 14日字.

60) 치카마우가캠프가 서남부사령부에게 실종사건보고(1951.11.26) ; 유엔군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112.20),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1) Ueno Tamotsu,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2)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5

63) 1st Cavalry Division Inspector, Certification(1951.1.26) ; 1st Cavalry Division, Certification(1951.1.28) ; 15th Medical Inspector, Japanese Nationals evacuated through medical channels (1951.1.29.),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4) 『朝日新聞』,, 1952年 11月 13日字.

65) Sakae Kobayashi, Statement,; 8041st Army,, Certification (1951.2.22),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6) 서남부사령부가 일본군수사령부에게(1950.12.20); 일본군수사령부가 극동군사령부에게(1950.12.22); 극동군사령부가 일본군사사령부에게(1950.12.22); Takatsu Kenzo,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7) Shigamitsu Tsuneshid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양영조, 「주일미군기지 일본인노무자의 6·25전쟁 종군활동과 귀환」, 군사No.11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p.69

68) 제1기병사단 감찰참모의 조사보고(1951.1.26),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69) Wada Haruki,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2018), p.138

70) Hisao Ōnuma, “Chōsen sensō ni okeru nihonjin no sansen mondai.” Sensō sekinin kenkyū 31, (Spring 2001), pp.2-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1) 古垣鐵郞譯, 『軍人の中の外交官』, (東京: 鹿島硏究所出版會, 1954), p.44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30

72) Yōji Kasawa, “Dai yon shō chōsen sensō to nihonjin sen’in: gunyōsen nado no jōsōin toshite,” Kaiin, no 10. (October 2007), p.91.;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3) New York Times, 12th August 1950

74) Tajiri, “1950nen genzan Tokubetsu sōkai no kaiko,” p.14;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5) 용병배제조약은 용병의 정의를 ‘국가 및 OAU가 인정한 독립운동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고용된 주체’(제1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용병고용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1조에서 금지된 목적 이외의 용병고용, 예를 들어 앙골라와 자이르에서 반정부 세력을 탄압할 목적의 용병고용, 혹은 개인의 금전적 이익, 분쟁목적에 대한 공감, 병사에 대한 근친감, 개인적인 모험심을 목적으로 한 용병고용을 함으로써 조약의 적용을 면했다. 또한 조약은 적용 확보를 위한 강제수단이 결여되어 용병 배제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유엔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용병금지조약을 채택하여, 용병모집, 용병사용, 용병에 대한 자금 공여, 용병훈련을 금지하였다. 동 조약은 용병행위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사찰조항이나 벌칙규정도 없기 때문에 조약의 유효성에 의문이 있다.

76) 전용태, 「민간군사경비회사(PMSC)의 업무수행과 그 법적문제」, 법학연구Vol.79, (한국법학회 2020), pp.674-675

77) Ito Takeshe, Statement, Hq Camp Mower to CG Southwestern Command, 1951.2.18, RG 338, Entry 11909, Box 46

7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79)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0)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7.;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1)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2)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59

83) Hirama, “Sōkaitei haken,” p.129.;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4)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5)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6) Yamazaki, Shijitsu de kataru chōsen sensō kyōryoku no zenyō, p.260.;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7) 포터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스미스(Smith)소장이 해상안전청(MSA)선박에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타무라와 동료 일본장교들은 스미스가 그들에게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지만 다른 목격자들은 스미스가 타무라에게 그가 “해고당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타무라는 스미스의 의견을 직접 들은 유일한 해상안전청(MSA) 장교였다. 결과적으로, 보강증거를 제공할 일본어로 된 다른 직접적 자료는 없다. 일반적으로 원산에 있던 일본 참가자들의 모든 설명은 스미스의 말을 타무라가 이해하는 대로 이해했다고 한다.;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8) Nose, “Chōsen sensō ni shutsudō shita nihon no tokubetsu sōkaitai,” p.15.; Samuel P. Porter, “In Dangerous Waters: Japan’s Forgotten Minesweeping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The Asia-Pacific Journal, Volume 20 (October 1, 2022)

89) 이종판, 「韓國戰爭당시 日本의 役割에 관한 연구; 日本의 對美協力活動을 中心으로」,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박사논문 2007), p.166-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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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전남에서 전국으로 11.11총궐기 대행진

  • 정강산 기자
  •  
  •  승인 2023.10.24 16:55
  •  
  •  댓글 0
 

 

윤 퇴진 대행진 2회차...전남에서 올라오는 퇴진 열기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11월 11일 총궐기...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발걸음으로

▲23일 오전 11시 30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앞에서 열린 '전남지역 윤석열 정권 퇴진 총궐기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전남 일대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 전국 대행진’ 2회차가 열렸다. 전국 대행진은 11월 11일 ‘윤석열 정권 퇴진 총궐기’를 성사하기 위해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의 열기를 모아가고 있다.

제주에서 1회차를 마친 행진단은 23일 순천 법원 앞에서 전남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전남지역 총궐기 선포식을 가졌다.

이날 회견에는 진보연대 각 지부(화순, 광양, 나주, 무안)와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광주전남추모연대 등 13개 단체가 결합했다.

▲전남진보연대 문경식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전국민중행동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이들은 “윤석열 정부 1년 6개월 간 잘못된 외교와 경제정책으로 수출은 급감하고 민생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며 “윤 정부는 부자감세와 친재벌 정책으로 세수를 감소시켜 놓고서는 복지예산 삭감으로 서민들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 앞에 단 한 번도 비켜서지 않았던 정의로운 전남의 의기와 호남 정신으로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자”고 결의했다.

투쟁 발언에 나선 진보당 이성수 전남도당 위원장은 “윤석열 퇴진과 동시에 개헌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정권교체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검찰청을 기소청으로 전환하여 정치검찰을 뿌리뽑고, 정치기본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며 자산불평등을 일소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윤석열 퇴진투쟁을 결의했다.

그는 “11월 11일 민중총궐기가 그야말로 민중대행동이 되어 개헌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전남이 앞장서겠다”고 전했다.

회견 이후 대행진단은 여수로 이동하여 흥국체육관 일대에서 거점 행진과 선전을 이어갔다.

버스를 필두로 14대의 차량이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11.11총궐기 소식을 전했고, 단원들은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노조법 2,3조 개정,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등 당면 현안을 알리며 퇴진 선전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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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총궐기...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발걸음으로

이날 전국 대행진의 피날레는 ‘전남 윤석열 정권 퇴진총궐기 한마당’이었다.

오후 6시 여수 이순신광장에 모인 대행진단은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부르며 버스킹 공연을 진행하는 한편,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분쇄 서명 부스와 함께 포토존을 운영했다.

이순신광장은 공연을 관람하는 시민들과 더불어 ‘모이자 11월 11일 민중총궐기로!’라는 구호가 적힌 포토존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시민들로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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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킹 무대에서 발언에 나선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의 윤부식 본부장은 “곧 추운 겨울이 오는데 윤 정부는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더니 난방비와 전기요금을 올려 서민들이 제대로 난방도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 민주노총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라며 “국민들이 좀 더 잘 살려면 윤 대통령이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라 말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윤석열 정권 들어 노동절에 건설노동자가 분신하고, 조선소 하청노동자가 0.3평 창살에 갇히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을 좀 바꾸자”고 독려했다.

윤 수석부위원장은 “이에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모두가 11월 11일 거리로 나오기로 했다”며 “그날 새로운 대한민국의 탄생은 전남 시민이 함께할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권 퇴진 전국 대행진’은 오는 25일 전북에서 3회차를 거쳐, 오는 11월 10일 서울까지 대장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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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부식 민주노총 전남지부 본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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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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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국민의힘 실세들도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세 필요"

  • 장슬기 기자 
  •  
  •  입력 2023.10.24 07:04
  •  
  •  댓글 2

 

[아침신문 솎아보기] 24일자 신문 만평들, 인요한 혁신위 역할에 의구심

유진그룹, 3199억 원으로 YTN 인수…조선 “정치 간섭에 벗어날 기회”

기상천외한 동물학대, 영역동물 고양이 포획해 낯선 공간에 방사 환경변화 탓에 죽기도

국민의힘이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에 임명하자 24일자 아침신문들은 여당 개혁에 대한 기대감과 필요성을 나타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를 계기로 현 정부에 대한 냉혹한 심판이 있었다는 평과 달리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0일이 넘도록 혁신위원장을 구하지 못했고 여의도에선 ‘김 대표 입맛에 맞는 인사를 찾기 위해 늦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인요한 위원장이 전권을 약속받는다 해도 여전히 당 1인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며 향후 당 혁신 과정에서 당내 기득권 반발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관련해 이날 상당수 아침신문 만평에선 인요한 혁신위가 제대로 여당을 개혁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는 메시지를 그려냈다.

보도전문채널 YTN의 공공기관 지분 매각에서 유진그룹이 최종 낙찰자로 결정됐다. 이에 YTN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현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라는 평가를 내놨다. 여러 우려 속에서 조선일보는 소유 구조 변화가 오히려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고 전했다.

현재 법에서는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적극적 행위를 학대로 보고 처벌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법을 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동물을 학대하고 학대방법을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까지 등장했다. 관련 대응이 필요한 실정이다.

▲ 24일 주요 아침신문 1면 모음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 진짜로 당 개혁할까

조선일보는 사설 <인요한 “국힘, 통합하고 의생하고 다 바꿔야” 관건은 실현>에서 인 위원장에 대해 “4대째 한국에서 선교·의료 봉사를 해온 미국 린턴가 자손으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며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의료인이 집권 여당의 쇄신작업을 이끌게 됐다”고 소개했다.

인 위원장은 “국민의힘의 많은 사람이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많은 변화를 예고한다”며 “지금 국민의힘은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고 4년 동안 편하게 의정 생활을 해도 되는 영남권 의원들이 주축”이라고 했다. 이어 “큰폭의 인적 쇄신이 불가피하다”며 “국민의힘을 이 지경으로 만든 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른바 ‘실세’들도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 24일 조선일보 1면 사진기사

조선일보는 당의 개혁이 쉽지 않은 구조적 이유를 짚었다. 이 신문은 “국힘은 야당이 아니기 때문에 인 위원장이 전권을 약속받는다 해도 여전히 당 1인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며 “인 위원장의 통합, 희생, 변화 추진은 모든 고비마다 거센 당내 기득권의 반발을 부르게 된다. 결국 어느 순간에 대통령 앞에 이 반발과 갈등이 다 모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많은 정당의 혁신위가 중간에 좌초할 때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혁신위가 요식행위에 그칠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통령과 당 대표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당내 기득권을 침해하지 못할 혁신위원장이 임명될 수밖에 없고 혁신을 추진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 위원장은 “(내) 권한이 정확하게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대표가 ‘전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조선일보는 “혁신위원장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는 통합, 희생, 변화를 추진하면서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라며 “당장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흉내만 내는 혁신위인지, 아니면 이대로면 경제 사회 개혁을 해보지도 못하겠다는 위기감 속에 진심으로 하는 개혁인지가 드러나면 국민은 그것을 보고 내년 총선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이번 국민의힘 혁신위의 과제를 강조했다. 사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 ‘용산 출장소’ 오명부터 벗어야>에서 “여당이 이렇게까지 무기력·무능력할 수 있냐고 비판받는 것은 ‘친윤’ 지도부가 대통령실에 종속돼 윤 대통령에게 찍소리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친윤·영남에서 벗어나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공천제도를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혁신위가 쇄신의 한계를 정해놓거나 대통령실·당 지도부 입김에 휘둘린다면 그 결과는 볼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에선 이날 만평에서 인요한 혁신위가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자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에선 인요한 혁신위가 민심과 동떨어졌다는 내용을 담았다.

▲ 24일 서울신문 조기영의 세상터치

서울신문 조기영의 세상터치에선 강서구청장 보선 이후 여당의 위기 분위기를 담았다.

▲ 24일 국민일보 국민만평

국민일보 국민만평에선 인 위원장이 실제 국민의힘 개혁 운전대를 잡은 것이 맞는지, 윤 대통령이나 국민의힘 지도부의 바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지 의문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 경기일보 경기만평

경기일보 경기만평은 인 위원장의 혁신에 대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전망을 담았다.

▲ 24일 중부일보 최경락 만평

중부일보 최경락 만평에선 인 위원장을 의사에 비유해 윤 대통령과 김 대표에 대한 대수술을 진행할 수 있겠냐는 메시지를 담았다.

▲ 24일 매일경제 4컷만화 아이디

매일경제는 4컷만화 ‘아이디’에서 의사 출신 인 위원장이 당내 보신주의와 당내 비판을 내부총질이라고 비난하는 분위기를 수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YTN 지분 매각, 낙찰자 유진기업

YTN 지분 매각을 진행 중인 한전KDN과 마사회는 23일 입찰에서 “최종 낙찰자로 유진그룹 지주사인 유진기업을 선정했다”고 했다. 유진그룹이 한전KDN(21.43%)과 마사회(9.52%)가 보유한 지분 30.95%를 인수하면 그동안 정부 산하 공기업이 소유하던 YTN의 첫 민간 최대주주가 될 전망이다. 유진그룹은 계약 체결 30일 이내 방송통신위원회에 최다액 출자자 변경 승인을 신청하고 60일 이내 승인을 받으면 정식으로 YTN 새 최대주주가 된다.

▲ 24일자 경향신문 사진기사

 

이에 언론노조 YTN 지부는 성명을 내고 “윤석열 정권의 언론 장악 시도”라며 “언론 장악 하청업체는 YTN에 발 못 붙인다”고 했다. 이러한 반발 목소리와 함께 조선일보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계속되어온 YTN의 이른바 ‘공적 소유 구조’ 변화가 오히려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고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고 전했다.

 

기상천외한 동물 괴롭힘?

한겨레 <동물학대에 관한 슬픈 사실들>이란 칼럼에서 방혜린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는 최근 동물보호단체에 취직했는데 기상천외한 동물학대 방식에 대해 알게됐다며 이를 소개했다.

칼럼에 따르면 ‘고양이 무단방사’라는 동물학대인데 멀쩡히 자기 구역에서 사는 길고양이를 포획해 수십 km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방사시키는 행위다. 고양이가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준비 없이 극단적인 환경 변화를 겪으면 적응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행법상 적극적인 가해행위만 처벌하기 때문에 처벌하기 어렵다. 인터넷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안티캣맘 갤러리’에는 무단방사 행위에 경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고 합법이라는 주장부터 고양이 급식소 철거를 위해 지자체나 기관에 ‘민원 테러’를 하는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방 전 활동가는 칼럼에서 “군인권센터에서 근무한 지난 5년 동안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많은 사건을 통해 접했다”며 “사람에서 동물로 옮겨와 보니 또 다른 끔찍한 세계가 있다”고 한 뒤 “나보다 약한 생명체를 거리낌 없이 착취하며 이득을 얻고, 괴롭히면서 즐거워하고 전시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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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 기자wit@mediatoday.co.kr

#고양이#학대#동물학대#인요한#의대교수#혁신위원장#김기현#윤석열#국민의힘#만평#동물보호단체#YTN#유진기업#조선일보#방송통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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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되돌려도, 1.5도 이상 오르면 되돌릴 수없는 기후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 ③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이명선)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  기사입력 2023.10.24. 05:01:55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지정학과 경제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전쟁 피로감은 높아지고 무고한 피해도 늘어나고 있지만, 종전이나 평화 회복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미·중 전략 경쟁도 조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러·우 전쟁과 미·중 경쟁은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사안을 포함해 세계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합리적인 선택을 도모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에 창간 22주년을 맞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외교광장 및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 속 한국의 선택"을 주제로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아래는 이날 토론회 발표를 맡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의 '전쟁과 신냉전의 시대, 새로운 게임 체인저를 찾아서' 발표문 전문입니다.

 

 

 

 

이 글에서 '전쟁'은 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의미한다. 물론 이 전쟁 이외에도 지난 10년간 세계 도처에서 무력충돌의 빈도수와 이에 따른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고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면서 중동 정세도 크게 위태로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우 전쟁이 전 세계에 걸쳐 지정학적·경제적·이념적 파장을 크게 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에 남한은 우크라이나를, 북한은 러시아를 지지하면서 전쟁의 파장이 한반도로도 뻗치고 있다. 

 

또 '신냉전'은 주로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을 일컫는다. 양국 관계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중 관계가 1970년대 초반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고 경쟁과 대결 국면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에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양국과 그 동조국들이 '힘에 의한 평화'를 앞세우면서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냉전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조지 오웰의 통찰을 호출한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과 동맹국들의 생존을 절멸의 무기인 핵무기에 의존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미중 역시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적인 힘에 의한 생존과 권력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글의 핵심어인 '게임 체인저'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게임 체인저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에서 결과나 흐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을 만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집단, 사건, 사고, 제품 등"이다.

 

여기에는 결과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뒤바꿔 놓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도 존재하고, 결과나 흐름을 더더욱 예측 불허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또 예견된 게임 체인저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것도 있고, 이미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지만 외면·무시당하는 것도 있다. 아울러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전쟁과 신냉전의 시대에 새로운 게임 체인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화되고 여기에 헤즈볼라, 이란, 미국도 가세하면서 확전이 일어나면 글로벌 지정학의 불확실성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또 내년 11월에 치러질 미국 대선과 중간선거도 중대 변수이다. 트럼프의 승리 여부, 상하원 의석의 변화, 선거 이후 미국의 정치사회적 대혼란의 수습 여부 등은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정세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냉전 시대 비동맹운동에 비해 영향력과 위상이 더욱 커진 '글로벌 사우스'가 제3지대를 형성해 러-우 전쟁 및 미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이다. 

 

'자유주의 연대'를 주창하고 있는 한국의 윤석열 정부와 '반미 연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선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다. 남북한 상호간의 적대성과 한반도 군비경쟁이 역대급으로 치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의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도 남북한의 갈라치기 외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에 '다 걸기'를 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선택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선택은 미중 전략 경쟁과 러-우 전쟁의 향방에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되고 있다. 한국이 이미 세계 6위의 군사강국으로 올라섰고, 북한 역시 핵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과 기우에서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신냉전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게임 체인저는 존재할까? 돌이켜보면 냉전 시대의 게임 체인저는 핵무기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경쟁은 냉전을 격화시킨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절대무기에 생존을 의지할수록 모두를 파멸시킬 위험도 커진다는 자각도 일어났다. 이러한 자각은 '핵무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는 각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냉전을 종식할 수 있었던 지혜로 작용했다. 

 

이제는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경쟁의 위험을 직시하면서도 '기후위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기후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져야 할 시기이다. 강대국과 주요국을 향해 갈수록 거주 불능의 땅이 되고 있는 지구를 둘러싼 허망한 경쟁과 대결을 멈추고 살만한 지구를 만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자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전쟁과 군비경쟁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여러 국가들이 상대를 위협이자 적으로 삼아 전쟁과 군비경쟁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체를 위협하는 실존적 위협이 진짜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기후위기다. 

 

그런데 전쟁 및 군비경쟁과 기후위기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군사 활동 자체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또 전쟁은 물론이고 지정학적·전략적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후위기 대처에 필수적인 국제협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위기를 넘어 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변화가 국제분쟁의 주요 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전쟁과 신냉전 시대에 기후위기를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나날이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보다 못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3월 "화석연료 중독이야말로 상호확증파괴(MAD)에 해당된다"며 인류가 "몽유병자처럼 기후재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올해 7월에 전 세계 곳곳이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폭염으로 몸살을 앓자 이제는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이 와중에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군비경쟁은 여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각종 군사 무기와 장비를 만들고 이것들을 운용·연습·훈련·작전하는 과정에서, 지구촌 곳곳에 퍼져 있는 군사 시설과 부대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또 분쟁과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세계 각국의 군사 활동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5-6% 정도를 차지한다는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민간 분야의 항공(1.9%), 해운(1.7%), 철도(0.4%), 파이프라인(0.3%)을 합한 것보다 많다. 또 세계의 군사 활동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국가 단위로 환산하면, 중국, 미국, 인도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군사 활동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군용기, 함정, 전투차량 등 주요 무기와 장비가 대부분 다량의 화석 연료로 기동되고 연비도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개 자동차의 연비는 30mpg(휘발유 1갤런 당 운행할 수 있는 마일) 정도이다. 이에 반해 전투용 지프차(험비)는 자동차의 5분의 1 수준인 6mpg, F-35 전투기는 50분의 1인 0.6mpg, B-2 전략폭격기는 100분의 1인 0.3mpg에 불과하다. 

 

다량의 연료 소비와 낮은 연비는 다량의 탄소 배출로 연결된다. 1회 작전 임무 수행시, 전투용 지프차는 260 kgCO2e(이산화탄소 환산량), F-35는 27,800 kgCO2e, B-2는 251,400 kgCO2e를 배출하는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또 폭등하는 군사비는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소중한 자원의 낭비를 수반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미 많은 탄소를 배출했고 또 현재도 그러한 선진국들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개발도상국들의 동참도 반드시 요구된다. 개발도상국들이 경제발전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저탄소형, 혹은 탄소 제로형 인프라와 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자체적으로 이에 필요한 재원과 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의 기후협약 이행을 위해 매년 100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2010-2016년까지는 500억 달러 안팎을 맴돌았고 그 이후에도 8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처럼 기후 기금 재원 조달은 크게 미달된 반면에,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주도해온 세계 군사비는 크게 높아지고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한 세계 군사비의 흐름을 보면, 2020년 화폐 기준으로 2000년대 후반에 1980년대 후반기를 넘어섰고, 2021년에는 사상 최초로 2조 달러를 돌파했다.

 

또 2022년 세계 군사비는 2조 24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군비지출이 가장 높았던 1980년대 후반보다 약 6000억 달러가 많다. 그런데 앞으로 세계 군사비 상승폭은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세계 양대 군비지출 국가인 미국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국방비를 늘리고 있고, 주요 국가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노벨상을 수상한 50여 명의 사람들은 2021년 12월 "인류를 위한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세계 각국이 5년 동안 매년 2%씩 군사비를 줄이고 이 가운데 절반을 전염병, 기후변화, 극한 빈곤 해결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안"에 호응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군비경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고 장기화·확전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기후위기 대처를 위한 국제협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대표적으로 세계 양대 탄소배출국이자 군비지출국인 미국과 중국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도 기후변화 대처에는 협력을 다짐했지만 아직까진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과 군비경쟁은 양립할 수 없다. 인류가 '냄비 속의 개구리'로 전락하는 신세를 모면하려면 냄비를 가열시키고 있는 군비 활동도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단 속에서는 지금까지 사각지대로 존재해온 국가안보와 군사 분야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국립대구과학관 실내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기후위기가 찾아온 지구를 나타내는 SOS시스템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군축은 기후위기 대처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 대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 가스 배출을 줄여 지구 온도 상승폭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나면 돌이키기 어렵다. 섭씨 1.5도, 혹은 2.0도는 이를 대표하는 수치이다. 이 수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인류의 안전 및 생태 보전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선'으로 제시한 수치이다. 각국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대비 2도, 더 나아가 1.5도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고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와 그 이후 기후변화회의에서 채택한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2019년 배출량 기준으로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84%를 줄어야 하고 이에 앞선 2030년까지는 43%를 줄어야 한다.

 

또 하나는 변화되는 기후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초창기 적응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기후위기에 취약한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기후위기가 몰고 오는 영향이 선진국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적응에 대한 논의 또한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홍수, 가뭄, 태풍 등 극한 기후가 빈번해지고 빙하와 만년설 해빙과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면서 변화된 기후환경에 대한 적응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군비통제와 군축은 이러한 기후위기 대처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우선 군사 활동의 축소는 탄소 배출의 감축으로 이어져 기후위기 '완화'에 기여하게 된다. 2022년 기준으로 군사 분야의 탄소 배출이 전체 탄소 배출의 5.5%를 차지한다면, 이는 연간 약 27.5억 톤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탄소예산'은 얼마 남지 않았다. 탄소예산은 상승하는 지구의 기온을 특정 온도 이내로 붙잡아두기 위해 허용되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의미하는데, '1.5도 이하' 목표 달성을 위한 탄소예산은 2500억 톤밖에 남지 않았다. 매년 380억 톤을 배출한다고 가정하면 7년 이내에 바닥나는 셈이다. 

 

그런데도 전 세계의 군사 활동은 나날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를 감안해 2023년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량을 30억 톤이라고 가정해보자. 또 2024년부터 2030년까지 7년간 군사 부문의 연간 탄소 배출량을 2023년 가정치(30억 톤)에서 10%를 줄인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하면 7년 동안 군사 부문에서만 21억 톤을 줄일 수 있다. 20%를 줄이면 감축량은 42억 톤이 된다. 42억톤은 전체 탄소예산의 6%에 근접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 감축은 기후위기 완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군사 활동은 국방비 책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만큼, 국방비 감축과 감축한 예산의 기후위기 대처 투입은 '완화'와 '적응' 모두에 기여할 수 있다. 국방비 감축은 해당국의 탄소 배출 감축 및 기후 위기 적응 예산 증대에도 도움이 된다. 또 개발도상국들에게 지원하는 기후금융 규모를 늘릴 수 있어 이들 나라의 탄소 배출 저감형 산업구조로의 재편 및 기후변화 적응에 기여할 수 있다. 이는 2020년에 책정된 기후 재원(완화와 적응 포괄)과 실효적인 대처를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재원, 그리고 글로벌 국방비 감축 효과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산하 재정상설위원회의 <5차 기후재원 흐름 보고서 (2022)>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글로벌 기후 재원 규모는 8170억 달러이다. 이는 2020년 세계 GDP의 약 1% 수준이다. 이에 반해 지속가능발전 국제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ustainable Development, IISD): IISD는 기후 완화 및 적응에 필요한 금액을 세계 GDP의 약 5%에서 7%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기후대응 예산을 늘리고 있어 이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크게 부족한 현실이다. 

 

부족한 부분은 매년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세계 국방비의 절감을 통해 상당 부분 채울 수 있다. 가령 세계 국방비를 2024년부터 2030년까지 7년 동안 연 2조 달러 수준으로 묶어두고, 이를 예상되는 국방비 증액과 비교해보자.

 

2022년 세계 국방비가 2조 2400억 달러였고 올해 세계 국방비 증액을 감안하면 2023년 세계 국방비 총액은 2조 3000억 달러 규모가 될 것이다. 또 2024〜2027년 세계 국방비 증가율을 2%로 가정해보면, 7년간 세계 국방비의 합계는 17조 4410억 달러가 되고 7년간 순 증가분은 3420억 달러가 된다. 

 

이에 반해 2024년부터 7년 동안 세계 연 국방비가 2조 달러로 동결된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7년 동안 절약할 수 있는 재원은 3조 4410억 달러에 달한다. 이렇게 절약한 재원의 절반을 기후위기 대응에 사용한다면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 수 있다. 

 

불가능한 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과거 사례를 복기해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중후반 세계 군사비는 1조 6000억 달러였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1조 1000억 달러까지 떨어진 바 있기 때문이다. 군비 축소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복합위기 대응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은 그 당위성에 비해 현실성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1997년 교토의정서에서 군사 분야 탄소 배출량 보고를 제외키로 했고 2015년 파리협정에선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사항으로 담겨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안보 예외주의는 기후위기 대처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국들을 중심으로 군비 축소를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이고 기후위기 대응 예산을 늘리자는 주장에 동의할 국가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명확하다. 기후위기 대처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군축을 통해 평화와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계 시민의 역할과 분발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핵 운동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핵무기를 '금기의 무기'로 만들고 냉전을 촉발·격화시킨 무기를 냉전을 종식시킨 무기로 둔갑시킨 데에는 세계 시민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핵무기를 만든 핵물리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반핵 투사로 변신했고, 의사와 과학자들이 핵실험과 핵무기 사용이 얼마나 인체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지 밝혀냈으며, 평범한 시민들이 핵전쟁의 공포에 맞서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반핵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글로벌 시민의 힘이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레이건 등 국가 지도자들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발판으로 삼아 이제는 '기후위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기후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를 결집해 각국 정부와 유엔 등 국제기구 대한 설득과 압박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 이를 통해 군축을 통한 기후정의 실현에 나설 수 있는 행위자들을 찾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단번에 군비 축소에 합의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선도국의 역할을 떠올려볼 수 있다. 우선 세계 양대 탄소배출국이자 경제대국이며 군비지출국가인 미국이나 중국의 솔선수범에 나서야 한다. 2023년 미국의 국방비는 약 9000억 달러이고, 중국의 국방비는 약 3000억 달러이다. 이 가운데 10%를 줄여 기후위기 대응 재원으로 전환한다면 획기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 미중 가운데 어느 나라가 먼저 이러한 선택을 한다면, 상대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냉정하게 볼 때, 이상론에 가까울 수 있다. 군산복합체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고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도 대중 견제심리가 매우 강한 미국이 솔선수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중국은 역대 탄소 배출량이 미국보다 현저하게 적은 반면에 국방비는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들어 먼저 나서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에 대한 설득과 압박의 수위는 계속 높여야 한다. 군축을 통한 기후위기 대처의 선도국이 되는 것이 배타적이고 악의적인 경쟁을 선의의 경쟁으로 전환시키고, 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라는 점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의 민심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나은 방법은 미중이 협력해서 두 나라가 함께 나서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중이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기후협력을 도모하는 것은 조지 오웰이 말한 '이중사고'(double-think)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군비통제와 군축 협력과 기후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때마침 바이든 행정부는 11월 경 미중 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미가 협력해야 할 이유는 천 가지가 넘는다"며 양국의 협력에 인류운명의 향방에 달려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미중 정상회담을 촉구하면서 핵심 의제로 양국이 군비통제를 통해 긴장완화와 기후위기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일국적, 양자적 차원을 넘어 다자적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포함된 다자주의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그룹과 G20을 떠올려볼 수 있다.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G20이 지구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총량의 75-80% 수준이다. 또 G20 소속 국가들은 국방비 지출에 있어서도 대부분 상위권에 들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G20이 군사 활동 축소를 통해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고 국방비 감축을 통해 기후위기 대응 재원을 마련키로 결의하면 큰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주도해 '군축을 통한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결의'를 채택하는 방법도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크게 두 가지 특권적 지위를 유지해왔다. 하나는 공식적인 핵보유국이라는 지위이고, 또 하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이다. 

 

이러한 지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국제 평화와 안정을 지킬 책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런데 기후위기가 국제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임이사국들은 이에 눈감고 있다.

 

더구나 이들 5개국은 지구 온난화에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다. 5개 상임이사국들은 1750년부터 2021년까지의 탄소 배출에 있어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압도적인 1위이고, 중국은 2위, 러시아는 3위, 영국은 5위, 프랑스는 8위이다. 또 이들 5개국의 2022년 국방비 합계는 약 1조3,700억 달러에 달해 세계 국방비 총액의 60%에 육박한다.

 

이러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특권과 현황, 그리고 책무를 고려할 때, 군비 조절을 통한 기후위기 대처 기여에 P5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령 P5가 2022년 대비 국방비를 10% 줄이면, 연간 1370억 달러를 기후위기 대응 예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모습. ⓒAP=연합뉴스

 

미국·영국·프랑스와 중국·러시아가 군비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의는 상호호혜의 맥락도 품고 있다. 또 유엔 안보리 결의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엔의 다른 회원국들의 동참도 이끌어내는 데에 효과적이다.

 

인류는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이 와중에 격화되고 있는 군비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상호간 경쟁심, 적대감, 배타성을 품고 있다. 그런데 서로 싸우고 다투다가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다고 한다. 

 

오늘날 외계인의 침공에 해당하는 실존적 위협은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기후위기이다. 실마리는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위기이기에 인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흐름과 결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핵무기를 호출해본다. 핵무기와 기후위기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공통점이 이를 대표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핵전쟁은 통제할 수도 억제할 수도 있다. 반면 기후위기는 '1.5'를 넘어서는 순간 통제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다. 하여 이제는 서로를 겨냥한 총을 내려놓고 1.5도라는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군축의 종말 시대를 딛고 군축을 통해 평화와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장정에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이다. 

 

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함의도 언급해보고자 한다. 한반도는 기후변화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이자 군비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군사 문제에 있고 그 비중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에 반해 남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 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도 매우 희미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한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지구적 차원의 노력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군비경쟁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라는 지구적 차원의 각성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이 힘을 얻으면, 한반도에서도 '쌍중단', 혹은 '쌍축소'를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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