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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식아, 너도 해봐"…권력 앞에 무릎 꿇은 학자의 고백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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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황산덕 편

부친이 사상범이라 판사 임용 안돼 도청 근무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가담했다가 서울법대 파면

성균관대 총장 부임 뒤 법무부장관 부름 받아

"국가가 부를 확률 0.03%…자리 거절 못할짓"

오글 목사 추방, 인혁당재건위 진실 덮는 역할

사회안전법 제정 지휘, 문세광 사형 집행 결재

문교부 장관 시절 호국단 창설, 국민의례 강요

전두환과 신군부 지지해 10·27 법난 자금 지원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황산덕(黃山德, 1917~1989) 항목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화는 제자이자 문학평론가 권영민의 회고다. 법무부장관이 된 옛 스승에게 "그렇게도 자신을 미워하던 정권 밑에서 일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황산덕은 이렇게 답했다.

"짜식아, 너도 해봐! 자리 제의를 거절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러고는 덧붙였다.

"국가에서 부를 확률이 0.03% 정도밖에 안 되고,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국민 된 도리로 못할 짓이지."

14년간 권력에 맞서다 대학에서 쫓겨났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가장 솔직하고도 가장 비참한 자기변호였다.

1917년 평안남도 양덕 출생, 3·1운동가 아들에서 학문의 길로

황산덕은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경환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다 구속돼 징역 1년 6개월을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황산덕 자신은 194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모두 합격해 학병 징집을 면했지만, 아버지의 사상범 전력 때문에 해방될 때까지 판사임용이 되지 않아 경상북도청 말단관리로 지냈다. 친일과 항일의 경계선에서 가장 모호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황산덕(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비판자에서 옹호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의 인물이 떠오른다. 비시 프랑스의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 중에는, 처음에는 페탱 정권에 강하게 비판적이었다가 점차 회유와 압박 속에서 체제에 협력하게 된 경우가 있었다. 황산덕의 옛 동료 양호민은 이 변화를 정확히 "코페르니쿠스적 회전"이라 불렀다. 천동설을 믿던 사람이 갑자기 지동설로 돌아서듯, 14년간 권력에 맞서던 지식인이 하루아침에 권력의 나팔수가 됐다는 것이다.

 

황산덕 교수와 고재욱 주필의 구속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62년 8월 4일자 1면 머리기사

1965년, 정치교수로 파면되다

황산덕의 초기 경력은 떳떳했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헌법 개정 절차를 강력히 비판하며 "제정이 되면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논파했고, 이 글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김종필의 직접 신문을 받은 뒤 구속 기소됐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선언에 참여했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14년간 몸담은 서울법대에서 파면됐다. 학문의 라이벌이었던 유기천이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황산덕을 정치교수 명단에 넣어 해직시켰다는 뒷이야기까지 전해진다.

 

1962년의 김종필(위키미디아)

1974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며 입각하다

황산덕의 운명을 가른 결정은 1974년 9월이다. 성균관대 총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 박정희(1917~1979)는 그를 법무부장관으로 불렀다. 황산덕은 회고록에서 "내가 싫어하던 박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 두 사람의 밑에 들어가 장관이 된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거역하면 총장직도 교수직도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과거 정부에 시달렸던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

 

1974년 박정희. 뒤는 차지철.(대통령기록관)

1974~1975년, 인혁당재건위 8명의 사형, 고문을 부정하다

황산덕의 반헌법 행위 정점은 1974년 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그가 법무부장관에 취임한 직후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됐다. 1974년 12월, 인혁당 사건 고문사실을 폭로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오글(George Ogle, 1929~2019) 목사를 박정희에게 직접 추방 건의해 실현시켰다. 1975년 2월에는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의 고문주장을 공식적으로 허위라고 부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상고기각, 18시간 만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법철학자이자 형법학자였던 사람이, 가장 명백한 사법살인 앞에서 진실을 덮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2.9.12. 연합뉴스

1975년, 사회안전법, 문세광 사형 결재

같은 시기 황산덕은 사회안전법 제정을 지휘해 사상범 전력자를 재판 없이 법무부장관 명령만으로 종신 구금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4년 12월에는 8·15저격사건 문세광의 사형집행을 결재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 29주년 기념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했지만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돼 사망했다. 2005.1.20. 연합뉴스

1976~1977년, 문교부장관으로 파시즘적 교육 체제를 세우다

법무부장관에서 문교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황산덕은 교육 영역에서도 유신체제 강화에 앞장섰다. 학생회 대신 국방의식을 강조한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켰고, 국기에 대한 경례·국민교육헌장 암송 등 전체주의적 의례를 학교 현장에 정착시켰다.

 

황산덕(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전두환 정권, 신군부 지지, 10·27법난 자금지원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에도 황산덕은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서 불교계를 탄압한 10·27법난을 자행한 신군부의 불교정화기획자문회의에 자금을 지원하고, 민정당 창당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독실한 불교도였으면서도, 불교 탄압의 주체였던 군사정권에 또다시 부역한 것이다.

 

10·27법난 당시.(나무위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비시 프랑스의 '변절 지식인' 연구는 한 가지 공통된 결론에 도달한다. 가장 흔한 변절의 경로는 거대한 신념의 전향이 아니라, 작은 두려움과 작은 타협이 쌓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황산덕은 권력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거역할 용기가 없어서 무너졌다. 그 정직한 고백이 오히려 섬뜩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황산덕의 그 말을 떠올렸다.

"국가에서 부를 확률이 0.03%인데, 거절하면 그것이 마지막이야."

권력의 부름을 거역하지 못하는 그 인간적 나약함이, 8명의 목숨을 빼앗는 사법살인에 침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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