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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꿈꾸던 수재가 조봉암 사법살인·경향신문 폐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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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홍진기 편

가장 뛰어난 사람이 권력에 충성할 때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증명

한일회담서 식민지배 논리 반박했지만

경향신문 폐간 법적 근거도 만들어내

법무장관 때 총장 안 거치고 검사 압박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발포명령

두 차례 사형 선고 받았지만 감형 받아

삼성그룹 이건희 승계의 일등공신으로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홍진기(洪璡基, 1917~1986) 항목의 부제 목록이 그의 생애를 압축한다.

"이승만 정권의 유능한 관료로. 조봉암 사법살인으로 이승만 정적제거. 경향신문 폐간을 주도해 언론탄압. 마산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4·19 발포 총책임자로 사형선고 받았으나 곽영주와 달리 살아남아. 이건희 삼성왕국이 있게 한 장본인."

대통령 후보였던 정적을 죽이고, 신문을 폐간시키고, 시민의 봉기를 빨갱이로 몰고, 발포를 명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살아남아, 결국 삼성그룹의 설계자가 됐다.

 

홍진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17년 서울 왕십리 출생, 경성제대 수재, 학자의 길을 접다

홍진기는 1917년 3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법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음에도 임용신청서를 내지 않고 학자의 길을 택해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수로 사법연구실에 배속됐다. 1942년 그의 논문은 조선인이 쓴 논문으로는 두 번째로 경성제대 학술지에 실렸다. 그러나 조선인 조수 제도가 없어지면서 학문의 길을 접고,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친일행위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일제 판사 경력만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직위범(職位犯)으로 등재됐다.

 

홍진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능력 있는 관료'가 권력에 종속될 때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떠오른다. 독일의 한스 글로프케(Hans Globke, 1898~1973)는 뛰어난 법률가로서 나치 인종법의 시행세칙을 작성했고, 전후 서독에서도 고위관료로 활약했다. 홍진기도 똑똑하고 일을 잘하는 관료였다.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망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던 그 두뇌가, 똑같은 정교함으로 경향신문 폐간의 법적 근거를 만들고 조봉암(1898~1959)을 사법살인으로 제거했다. 능력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1963년의 한스 글로프케(위키피디아)

1958년 4대 총선 부정선거 봐주기, 수사검사 직접 압박

법무부장관이 된 홍진기의 첫 반헌법 행위는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 선거사범을 무더기로 봐주는 불공정 처리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풍문여고 공금횡령 사건에서, 그가 검찰총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울지검 검사 김치열(1921~2009)과 담당 검사 이용훈(1932~2018)을 불러 수사를 압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검찰청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야당은 법무부장관 불신임 결의안까지 제출했다.

 

홍진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8~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과 24파동

홍진기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능가한다는 비판을 받은 신국가보안법 개정을 강행했다. 국회 법사위가 욕설과 난투극으로 변한 '24파동'의 막을 올린 것도 그가 작성한 법안이었다. 무술경관이 의사당에 난입해 농성 중인 야당 의원들을 끌어낸 뒤 법안이 삽시간에 통과됐다. 미 국무부 문서에는 홍진기 자신이 "이 법은 야당억압을 의중에 두고 만든 것"이라고 고백한 기록이 남아 있다.

 

보안법안 3분만에 법사위 통과, 1958.12.20 경향신문

1959년, 조봉암 사법살인과 경향신문 강제폐간

홍진기의 반헌법 행위의 정점은 조봉암 사법살인과 경향신문 폐간이다.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1875~1965)에게 위협적인 정적이 된 조봉암을 간첩·국가변란 사범으로 조작해 제거했다. 1심 판사 유병진이 국가변란·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자 정부는 당혹감 속에 대책을 논의했고, 홍진기는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을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사형됐다.

같은 시기 그는 이승만의 정적 장면(1899~1966)의 핵심 지지기반인 경향신문을 일제 군정법령이라는 낡은 법으로 폐간시켰다. 법원이 정간처분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음에도, 공보실은 판결 7시간 만에 새로운 정간처분으로 맞섰다. 국무회의 비망록에는 폐간이 "이승만의 뜻"이었음이 명시돼 있다.

 

KBS 역사스페셜 –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 KBS 20110421 방송

1960년, 마산을 빨갱이로 몰고, 4·19 발포를 지휘하다

내무부장관이 된 홍진기는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 시민들의 봉기를 적색분자의 소요로 몰아갔다. 그리고 4월 19일, 경무대와 시내 일원에서 경찰의 실탄 발포로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책은 명시한다.

"이 사건의 최고책임자는 내무부장관 홍진기였다."

그는 세 차례 다른 재판을 받았다. 첫 재판은 무죄, 두 번째 특별재판소는 사형,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도 사형이 선고됐으나 상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사형을 면했다. 같은 발포책임자였던 곽영주는 처형됐다. 홍진기는 살았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위키백과)

1963년 사면, 그리고 삼성의 설계자로

1963년 특별사면을 받은 홍진기는 이병철(1910~1987)에게 발탁돼 중앙일보를 창간하고, 동양방송 사장, 삼성그룹 계열사 이사를 거쳤다. 이건희(1942~2020)의 장인이 된 그는 이건희가 삼성후계자가 되는 길을 열었다. 발포명령자에서 삼성왕국의 설계자로, 그의 인생 후반전이 완성됐다.

 

1972년 이병철 선대 회장(오른쪽 세 번째)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조작해 보고 있다. 이병철 회장 뒤에는 이건희 회장, 왼쪽 두 번째는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가운데는 이재용 부회장 삼성그룹 제공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글로프케 같은 '능력 있는 부역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명확하다. 뛰어난 법률 지식이 독재에 봉사할 때 그 피해는 평범한 부역자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홍진기가 학자의 꿈을 접고 권력의 길로 들어선 그 선택이, 조봉암의 죽음과 경향신문의 폐간과 4·19의 유혈로 이어졌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홍진기를 떠올렸다. 가장 뛰어난 사람이 권력에 충성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그의 생애가 증언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거대한 재벌의 설계자라는 영광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지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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