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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의 무지·왜곡, 한국 반도체산업 위험하게 만든다

[반도체 특별과외] 호남권 반도체 산단 핑계로 52시간 규제 풀자? 보수 언론들의 낡은 노동관

26.07.07 06:57최종 업데이트 26.07.07 06:57

조선일보 1일 자 사설 <반도체 클러스터 "정권 임기 내 완공", 52시간 규제부터 풀라>조선일보 PDF

[사설] 반도체 클러스터 "정권 임기 내 완공", 52시간 규제부터 풀라 – 조선일보

[사설] '메가 특구' 주 52시간 예외 검토… 지역 국한할 이유 없다 - 동아일보

최근 보수 언론이 연이어 내놓은 사설 제목입니다. 마치 입을 맞춘 듯 반도체 산업을 살리기 위해 당장 주 52시간 근무제를 풀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근로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니, 지금이라도 당장 규제라는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가 그들 주장의 핵심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주 52시간 근무제도를 없애고 노동자를 더 오래 일하게 만들면 대한민국 반도체의 경쟁력이 강화될까요? 해당 기업들은 진정 52시간 규제 해제가 핵심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도, 현장의 현실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일 뿐입니다.

애플이 보낸 협력업체 행동 수칙

저는 얼마 전까지 유럽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회사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에서 10년 동안 매니저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부하직원들의 기술적 성과를 관리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의 근무 시간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각이나 조퇴를 단속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을 더 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매주 금요일이 되면 관리 시스템을 켜고 팀원들의 누적 근로시간을 확인했습니다. 만약 어떤 엔지니어가 열정을 불태우며 주 60시간에 육박하게 일하고 있다면, 당장 연락해 강제로 퇴근시켜야 했습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 회사가 정한 노동시간을 초과하게 되면 매니저인 제가 직접 사유서를 써야 했으니까요.

이유는 단 하나, 글로벌 고객사들이 이를 엄격하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애플은 매년 협력업체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인 "Apple 협력업체 행동 수칙 및 협력업체 책임 기준(Apple Supplier Code of Conduct)"을 업데이트하여 제공합니다.

2025년 버전 기준 109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에서 애플이 가장 촘촘하게 관리하는 항목이 바로 근무 시간 관리입니다. 애플의 기준에 따르면 일부 특수 직무나 예측 불가능한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 연장 근로와 잔업을 모두 더해도 주당 근무 시간은 최대 60시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협력업체는 매 5시간 작업 후 최소 30분의 식사 시간을 제공해야 하며, 기본적인 화장실 이동이나 물 섭취 같은 생물학적 휴식과 합리적인 종교적 편의(예: 기도 시간)를 무제한 유급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오리엔테이션, 생산 계획 회의, 일일 마감 회의 등 모든 의무 교육과 회의는 반드시 정규 교대 근무 시간 중에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심지어 출퇴근 기록을 위해 줄을 서거나 시설 출입 전 보안 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15분을 초과하면 이 또한 근무 시간에 포함해야 합니다.

애플은 이 기준을 서류로만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전문 감사관을 파견해 불시에 실사를 벌입니다. 저 역시 매년 이 까다로운 실사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애플이 이토록 노동시간과 인권 관리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2010년을 전후해 발생한 최대 위탁생산 협력업체인 중국 폭스콘 공장의 연쇄 투신자살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폭스콘은 주당 10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강제 초과근무와 군대식 통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신제품 출시 시즌이 되면 엔지니어와 생산직 노동자들은 극심한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젊은 노동자들이 연이어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했으나, 사측이 내놓은 대책이 고작 '추락 방지용 그물망 설치'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전 세계적인 공분을 샀습니다.

비난의 화살은 원청인 애플로 향했고, 애플에는 '피 묻은 아이폰'이라는 오명이 붙었습니다.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은 애플은 이후 공급망 행동 수칙을 강화하고, 이를 위반하는 업체와는 즉각 거래를 끊는 강력한 페널티를 도입했습니다. 애플의 6대 핵심 규칙 중 첫 번째가 바로 '노동 및 인권'이며, 그 중심에 노동시간 준수가 있는 이유입니다.

팹(Fab: Fabrication Facility)은 제조 공장

여기서 보수 언론이 철저히 왜곡하고 있는 치명적인 현장의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설들은 마치 주 52시간 규제 때문에 반도체 팹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기술 개발이 뒤처지는 것처럼 선동합니다.

그러나 반도체 생산 라인인 팹(Fab)은 석·박사급 연구 인력이 앉아서 밤새 연구를 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팹은 철저히 자동화된 설비 시스템 안에서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가동되는 제조 공장입니다. 팹이라는 단어 자체가 제조 공장(Fabrication Facility)에서 따온 거니까요.

반도체 팹 내부의 모습. 생산을 담당하는 오퍼레이터와 장비를 점검하는 엔지니어의 모습도 보입니다.이봉렬

애초에 교대 근무 시스템으로 3조 3교대 또는 4조 3교대로 조를 짜서 24시간 가동되는 제조 라인은 노동자 한 명을 밤새워 붙잡아 둘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운영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도체 공장 생산 수율이나 가동률은 주 52시간 규제 해제와는 눈곱만큼의 상관도 없습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보수 언론은 반도체 공장과 연구소의 개념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노동 규제를 풀기 위한 핑계로 반도체 산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RBA(책임감 있는 비즈니스 연합)라는 글로벌 무역 장벽

이러한 공급망 관리는 비단 애플만의 독특한 고집이 아닙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역시 이와 유사한 협력업체 행동 수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수칙들은 노동시간 준수뿐만 아니라, 2030년까지 공급망 전반의 탈탄소화를 이루고 재생에너지로만 생산한 제품을 공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이 이토록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중심에는 RBA(Responsible Business Alliance, 책임감 있는 비즈니스 연합)가 정한 국제 표준 규범이 존재합니다. RBA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산업 연합체인데, 과거에는 전자산업 중심이었으나, 현재는 자동차, IT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이 참여해 근로자 인권, 안전보건, 환경, 윤리 경영을 평가하고 개선합니다. 여기서 정한 행동 수칙은 글로벌 비즈니스의 헌법과 같이 작동합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돕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산업 연합체인 RBA(Responsible Business Alliance)는 강령에 주당 근무시간을 60시간 이하로 못 박아 두고 있습니다.RBA

RBA는 회원사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의 맨 앞에 노동 문제를 두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초과 근무를 포함하여 주당 근무 시간은 60시간을 초과할 수 없고, 모든 초과 근무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 대기업이 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인텔은 물론 대한민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RBA의 정식 회원사입니다. 우리 기업들 또한 이미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RBA의 수칙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국제 사회에 공표하고, 그 규칙 체계 안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RBA 스탠더드를 따르지 않는 기업은 글로벌 입찰 단계에서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실질적인 글로벌 무역 장벽이자 비즈니스 라이선스입니다.

삼성전자 협력회사 행동규범이 보여주는 진짜 주소

보수 언론의 사설만 보면, 국내 반도체 대기업들은 노동 규제 때문에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법을 어겨서라도 무조건 잔업을 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시장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애플이나 구글로부터 협력회사 행동 수칙을 받고 따르는 삼성전자 역시 자사의 협력업체에게 "삼성전자 협력회사 행동규범"을 보내고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12년 초본을 발간한 이후 지속적으로 규범을 개정해 왔으며, 최근에는 '결사의 자유' 등 노동 인권과 윤리 조항을 일부 보완한 8.1 버전을 협력회사들에 배포했습니다.

삼성전자가 각 협력업체에 보낸 [삼성전자 협력회사 행동규범]을 보면 "표준 근로시간은 주당 4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되고, 연장 근로를 포함한 주당 총 근로시간은 60시간을 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초과 근무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삼성전자

해당 규범의 서문에는 "본 규범은 RBA 행동규범과 세계인권선언, UN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 ILO 핵심협약 등 글로벌 기준에 기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삼성의 규범 역시 '노동 인권'이 제일 먼저 등장하며, "표준 근로시간은 주당 4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되고, 연장 근로를 포함한 주당 총 근로시간은 60시간을 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초과 근무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못 박아 두었습니다. 애플의 조건과 일치합니다.

원청 기업인 삼성전자 스스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공급망 전체의 노동시간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진짜 주소입니다. 생태계는 이미 글로벌 표준의 궤도 위를 달리고 있는데, 보수 언론은 삼십 년 전 "새벽 세 시의 커피 타임" 시절의 패러다임에 갇혀 지면을 낭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낡은 노동관으로는 결코 미래의 반도체를 설계할 수 없다

반도체 산업은 인간의 지성과 정밀한 시스템이 결합한 고도의 지식 집약 산업입니다. 엔지니어를 공장과 연구소에 가두고 밤새도록 쥐어짜 낸다고 해서 2나노, 1나노의 미세 공정 수율이 기적처럼 잡히고 AI 가속기의 혁신적인 아키텍처(구조)가 설계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첨단 기술의 창의성은 맑은 정신과 충분한 휴식, 그리고 인간 존중을 바탕으로 한 안전한 일터에서 비로소 도출됩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바보라서 노동시간에 상한선을 그어둔 것이 아닙니다.

조선과 동아의 사설은 반도체 산업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무지와 왜곡의 소산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반도체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 52시간 제도가 아닙니다. 글로벌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탄소중립과 RE100 기준을 맞추지 못해 공급망에서 퇴출당하는 것, 그리고 낡은 노동 환경에 실망한 핵심 인재들이 해외로 이탈하는 것입니다.

세계 시장의 룰을 거스르는 낡은 노동관으로는 결코 미래의 첨단 반도체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보수 언론은 이제 반도체 산업을 노동 규제 완화의 도구로 삼는 억지 주장을 멈추어야 합니다. 시장의 진짜 규칙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것이, 대한민국 반도체를 돕는 유일한 길입니다.

#반도체 #주52시간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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