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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07
    탁월한 선택^^... (5)
    곰탱이
  2. 2008/10/07
    잘 살거예요, 냥이^^... (2)
    곰탱이
  3. 2008/10/06
    아 뭔 낙으로 사나... (4)
    곰탱이
  4. 2008/10/05
    얘들아, 너희들 어디서 왔니?! (6)
    곰탱이
  5. 2008/10/02
    오늘은...
    곰탱이
  6. 2008/09/30
    신종 뱀파이어...
    곰탱이
  7. 2008/09/25
    건망증... (2)
    곰탱이
  8. 2008/09/18
    소시민...
    곰탱이
  9. 2008/09/04
    이명박 정권의 또 다른 차별성 - mb야, mb야! 모 하~아~니?(2)
    곰탱이
  10. 2008/09/04
    반바지 입고 수업하게 해 주세여~~~!^^(6)
    곰탱이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앙겔부처님의 [쌍용 자동차 아이들이 아프다] 에 관련된 글.

얼마 전에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이들이 많이 아프단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이번 파업 때뿐이겠는가!

이전에 많은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한 노동자의 아이들이 비슷하게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에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직 많이 아픈 아이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며, 파업을 하였던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또는 이미 당했던 아이들은 노동자인 부모의 파업을 기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력의 증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고 아주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갈등과 모순이 눈에 띄게 드러날 때,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택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파업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하더라도 자본계급은 거의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업투쟁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불안해 하는 것은 자본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옥쇄투쟁을 벌이고는 그 투쟁의 보람과 성과도 없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형태로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자신의 도구인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그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싸움을 결말짓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인 우리는 늘 패배한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자본계급을 비난해 보지만 대체로 허탈해 한다. 이것이 우리가 늘 보아온 싸움의 과정과 결말이다.

우리의 노동계급 투쟁은 늘 패배한다. 물론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이것도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도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에서는 늘 밀리면서 패배를 하게 된다. 어떤 우리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우리는 늘 패배할 것이다, 아니 패배한다. 우리 노동계급은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현실적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먼저 도대체 무엇이 패배이고 승리의 의미인지를 따져봄으로써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순수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아주 드물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막는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유지를 하는 경우를 승리라고 대부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도 아주 쉽지 않은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전술적 의미에서 승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계급투쟁 전선에서 보자면 정규직 쟁취 투쟁은 하나의 회전(전투)에 불과하다.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체할 수 있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최종 목적이 현실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 노동계급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종 목적의 현실화라는 승리와 연관되지 않는, 연관될 수 없는, 또는 연관시키지 못하는 전술적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은 바로 전술적 승리를 유지하여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투쟁력)을 끊임없이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진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노동조합, 즉 개별자본과 대항하는 노동조합 또는 그 연맹은 진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수행하는 돌격대 또는 선봉대이기 때문이다. 이 돌격대 또는 선봉대가 계급투쟁 전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전방위적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고 보급 조달하며 교체할 수 있는 진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지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외부를 건설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진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함으로써 자본을 전방위적으로 뒤흔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기존의 생산력은 자본에 그 수를 이미 읽히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투수가 타자들에게 볼 배합을 읽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에게 그 수를 쉽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새로운 투수가 타자를 요리할 수 있듯이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새로운 생산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생산력은 곧 인간 자신”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새로운 인간 생산을 통한 생산력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계급이다. 맑스가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 것이 있다. 맑스가 ‘잃어버릴 것’을 착취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듯이, 현재의 노동자, 특히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재를 소비하는 ‘타인’, 즉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와 관계가 ‘잃어버릴’ 것으로 남는다.

새로운 인간은 바로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여성주의적 노동자 계급이다.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착취 관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착취구조와 관계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착취구조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 물질적 토대는 한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한 개별 가족이 고립적으로 생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생활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데, 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형태에 의하여 대체로 여성들에게 강요된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들어가는 재생산 생산노동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매 비용이지, 그 소비재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노동 비용은 그 임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던 여성들은 임금노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이제 여성은 이중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강요된 임금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재생산과 자식들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거의 투입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착취의 구조와 관계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차출해 낼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생활 방식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인간만이 재생산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를 파탄시키는 행위이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가족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돼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며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개별적 생활 방식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와 억압 구조와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 전반의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내부에 자본의 외부인 노동자 계급의 코뮌을 건설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착취의 관계와 구조를 깨뜨려 나가기 위해서, 이 새로운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 비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과학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판’은 끊임없는 상호소통과 협력‧연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각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인 ‘코뮌’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 있는 자본의 외부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소통, 협력과 연대 과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물적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형성을 위해 대자본 투쟁의 기초인 임금‧단체협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인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은 그들 스스로가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그 생산을 도와야 한다. 이 생산은 ‘자기 비판’ 능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 스스로가 상호소통하며 협력과 연대를 할 수 있는 코뮌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러한 비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이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대중화와 교육 목표는 ‘자본의 공교육’ 체제 아래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 체계’(이는 자본의 공교육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이른바 ‘사교육’을 지양하고 해체하는 체계이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중화와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의 싹에 관한 예로 영화 <우리학교>와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를 들겠다. 우리학교는 조총련계 조선인 학교의 아이들과 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는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고아원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칙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특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이 학교는 일본 공교육 체계 밖에 있는 조선인 공교육 체계로서의 학교이다)라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코뮌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그 학교를 통해 지역 조선인들의 코뮌과 그 코뮌과의 연대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은 기성세대 노동자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세대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맑스가 “교육하는 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토대가 노동자 계급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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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별로 느낌 없다...

그가 오늘 가셨단다...

근데 별로 감흥이 없다...

사람이, 그것도 전직 대통령씩이나 한 사람이 죽었다는데

별 감흥이 없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잘 가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후배들이 조직 사건으로 엮여 달려갔고,

그가 재임하고 있을 때에

천하의 악법 중 하나인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었다.

그 때문에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돌아가실 때 노동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을까...

 

뭐 돌아가신 양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잘 가시라는 말밖엔...

 

민주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말자...

그러면서 추모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도 하지 말자...

 

그저 편히 가시라는 말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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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상태...

계절학기 끝난 다음부터 거의 머리가 공황상태에 이르고 있다.

정말 시쳇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멍한 상태...

맨날 술이나 생각나는...

이러다가 정말 뭔일 내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하여간 정신이 돌아와야 책을 읽던, 글을 쓰던 뭔가 비전을 가지고

뭘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혹시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지금은 머리가 백지 상태라,

예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 같다...ㅠ...

 

제발 정신이 빨리 돌아오라고 광고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어떻게 광고를 내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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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방견찰청장의 어이없는 말

행인님의 [경기지방경찰청장의 법 질서] 에 관련된 글.

 

과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말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육두문자가 입밖으로까지 나왔다...

이런 XXX!!!

 

http://tvnews.media.daum.net/cp/YTN/popup/view.html?cateid=100000&newsid=20090807151505574&p=yt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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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신 분께 드립니다^^...

 

 

학생 자치기구인 생활도서관에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있어서, 

혹시 필요하신 분들이 있으면 드리려고 합니다. 

물건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석유난로 큰 것 1개 

- 14인치 컴퓨터 모니터

- 스티로폼(전지 2~3배크기) 5장.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덧글에 메일 주소 남겨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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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방학이닷!

음하하핫!!!!

좀전에 계절학기 성적 입력까지 다 끝마쳤다.

이제... 제발 조용히 책 좀 읽어보자...

자잘한 게 몇 개 남았지만..

가뿐히 넘겨 주시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공부해 보자,

아니 놀아보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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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와 이상한 나라의 폴...

일요일 오전에 우연하게 EBS교육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옛날 초딩, 중딩 시절에 너무 좋아했던 만화영화들이라서

하루 종일 흥얼거렸댔다.^^ 

그래서 함 올려 본다^^.

 

일요일 이른 10시부터 11시까진,

<이상한 나라의 폴>

일요일 이른 11시부터 12시 30분까진,

<은하철도999>

하니깐 시간 나시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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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 청문회를 보고...

아침에 울 어머님 집에서 아침을 먹다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를 한다고 해서 잠깐 보았다.

 

그런데 검찰총장 후보로 나온 자가 아마도 어떤 비리에 연루되어 있긴 하는가 보다.

돈을 누구한테 빌렸는데, 그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이는 구린 데가 있다는 것처럼 야당(민주당)의원이 질의를 해댔다.

 

하여간 뭐 후보로 올라오는 인간들 대부분이 현재는 MB의 총애(?)를 받으니

어찌 구린 데가 없을까...

일단 참으로 썩소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딴나라당 의원들의 노골적인 편들기였다...

정말 희대의 코미디였다.

딴나라당 의원이 마치 검찰총장 후보를 질책하면서 코너에 몰아세우는 듯이

큰소리로 격하게 말을 하는데,

그 말의 내용들이 검찰총장 후보가 공안 검사 출신으로서 얼마나 사명감에 불타고

14억 재산밖에 없어서 얼마나 청렴결백한지를 그 후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 후보자의 얼굴은 참으로 난감하고 당혹스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것들이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거다.

그런 코미디 쇼에 넘어갈 국민들이 어딨을까마는...

이것들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코미디를 하는 꼴이란...

하여간 또 한번의 썩소를 날릴 수밖에...

 

근데 공직자 생활 24년에 14억을 모은 것이 청렴한 것이냐?!

그럼 안 청렴한 것은 도대체 얼마를 해처먹은 것일까... 

아이, 육두문자 나온다...

보지 말았어야 하는... 

 

그래서 그런지 오늘 똥을 두 번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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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펌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관련글: 잠정적 자율지대: 혹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단상들』 중간의 몇 페이지(pp.65-70)를 번역한 것.

 

현존하지 않는 과학의 몇몇 교의들(Tenets of a Non-exsistent Science)

 

여기서는 아나키즘 인류학이 탐험할 만한 이론의 영역 몇 가지를 개괄해 보려 한다.

 

1) 국가에 대한 이론

 

국가는 독특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국가는 제도화된 침략 혹은 갈취 형태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 기획이다. 첫 번째 성격은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동체라면 어떤 곳이든 국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두 번째 특징은 국가가 문자화된 기록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무엇보다 "상상된 총체성"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론에 포함된 대부분의 혼란은 이 점을 무능력 또는 거부감 탓에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는 이념(idea)이었고, 사회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자 통제의 모델로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페르시아, 중국, 고대 그리스 어디에서 왔건, 사회론과 관련된 최초의 저작들이 언제나 국정운영법의 형태를 취했던 이유가 된다. 이로 인해 두 개의 파괴적 효과가 발생했다. 첫째는 유토피아주의가 모욕의 이름이 된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처음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완벽한 기하학적 구성을 지닌 이상적 도시의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왕실의 병영에 기원을 둔다. 단일한 개인의 의지가 전체로 뻗어 나간 기하학적 공간, 전면적 통제에 대한 환상.) 이 모든 것은 최소한으로만 말해도 무시무시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는 국가, 사회질서, 심지어는 사회가 서로간에 상당한 수준으로 조응한다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웅장하고 심지어는 편집증적인, 세계-지배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들이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론적 프로젝트라면 무조건, 아주 거칠게 말해도, 지상에 있는 무언가와는 실제로 대응된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5줄 정도 생략]

 

그렇다면 적실한 국가 이론은 각각의 경우에 해당되는 지배의 이상(아무 것이나 다 될 수 있다. 군대식의 규율을 강제할 필요성, 다른 이들을 고무시킬 은혜로운 삶을 극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능력, 계시를 피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인간 심장을 신에게 바쳐야 할 필요 등등), 그리고 지배의 메커니즘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일치/대응(correspondence)이 필연이라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다.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경험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서구"(the West)의 신화 대부분은 복종과 절대권력의 이상에 기초한 페르시아 제국과, 시민적 자율성, 자유, 평등의 이상에 기초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도시 사이에 발생하는 신기원적 충돌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묘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아이디어들(특히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시인이나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생생한 재현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것 없이는 서구 역사를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바로 그 중요성과 생생함 때문에, 역사가들은 점차 분명해지는 현실 앞에 눈이 멀어 왔다. 즉,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아키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 원문에는 Achmaenid라고 되어 있음)은 그 신민(subject)의 매일매일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가벼운 간섭만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아테네인들이 노예들에게, 스파르타인들이 자신의 농노였던 라코니아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행사했던 통제력의 정도와 비교하면 훨씬 더 사소해 보인다.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진화인류학이 발견해 낸 가장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물리적인(mechanical) 의미에서의 국가가 전혀 없어도 왕과 귀족, 모든 종류의 외적 군주제의 포위가 완벽하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주권" 이론에 대해 그토록 많은 잉크를 소비한 정치철학자 모두에게 흥미로운 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만도 하다. 대부분의 주권자들은 국가의 수장이 아니며 그들이 선호하는 기술적 용어들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 속에서 왕의 권력은 실제로 그 자신의 우주론적 구실들을 주어진 영토의 인구에 대한 진정한 관료제적 통제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서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16세기와 17세기 무렵 출현하기 시작했지만, 시작되자마자 주권자의 인격적 권력은 "인민"(the people)이라고 일컬어지는 허구적 인격으로 교체되며, 관료제가 거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는 한에서 정치철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아직까지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용어를 너무 잘못 선택한 탓이 크지 않을까 의심해 본다. 진화인류학자들은 완성된 강제적 관료제 형태가 없는 왕국(kingdom)을 "추장제"(chiefdom)라고 일컫는데, 이 용어는 솔로몬왕이나 경건왕(Louis the Pious), [중국의] 황제(the Yellow Emperor)보다는 제로니모[아파치 추장]나 시팅불[Sitting Bull, 수 인디언의 대추장]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용어다. 그리고 물론 진화론적 틀 자체는 그런 구조들이 국가에 대안적인 형태라거나 심지어는 국가가 변화하여 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대신, 국가 출현의 바로 전단계인 것으로 여긴다.

 

이 모든 사실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주된 역사적 과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2) 국가 아닌 정치체(political entity)에 대한 이론

 

그래서, 그건 한 개의 프로젝트가 된다. 즉, 국가를 유토피아적 상상체, 그리고 도주와 습격의 전략(strategies of flight and evasion)이나 약탈하는 엘리트, 조절과 통제의 역학을 포함하는 혼란스러운 현실 사이의 관계로 재분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국가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많은 정치체들이 최소한은 베버적 의미에서 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 이론 문헌이 아직까지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우리가 국가주의 틀의 바깥에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표인 듯하다. 여기에 딱 맞는 좋은 사례는 국경이라는 제한을 없애자고 주장해 온 "반세계화"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화(globalize)할 것이라면, 우리의 주장은, 정말로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국경을 없애자.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가게 하며, 맘에 드는 곳에서 살 수 있게 하자. 이 요구는 종종 일종의 세계시민권(global 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용어들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대 또한 떠오른다. "세계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일종의 세계국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그런 것을 원하나?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국가 바깥의 시민권을 이론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종종 심원하고 극복 불가능한 딜레마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만약 문제를 역사적인 방식으로 고려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근대 서구(Modern Western)의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의 개념은 대개 두 전통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하고 다른 하나의 주요 줄기는 중세 잉글랜드(마그나 카르타나 권리청원 등등에서 왕에 대한 귀족의 특권을 선언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고, 그 이후에는 동일한 권리가 나머지 인구까지 점진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고대 아네테나 중세 잉글랜드가 국가이기나 했는지의 문제에서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선은 시민권이, 그리고 둘째로는 귀족의 특권이 그토록 잘 정립되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로 존재했던 최소한의 국가장치가 시민층이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노예들에 의해서만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국가장치에 의한 힘의 독점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국가가 아테네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아테네의 경찰력은 현재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수입된 스키타이 궁수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법적 지위와 유사한 것은, 아테네의 법률에 따르면, 고문(torture)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노예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수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추장제"? 전문적이고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존왕을 "추장"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을 법 하지만, 페리클레스에게 그 말을 적용하는 것은 정말 우스워 보인다. 고대 아테네가 아예 국가가 아니었다면 "도시국가"라고 계속 부를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적 도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문제가 국가형태, 혹은 보다 최근에는 국가와 유사한 정치체들에 대한 유형학에도 적용된다. 스프루이트(H. Spruyt)라는 이름의 역사가는 16세기와 17세기의 영토국가들이 유일한 선수(only game in town)이기는 힘들었다고 추측한다. 최종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게 되었지만(최소한 즉각적으로는) 본래적인 유효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다른 가능성들도 있었다(실제로 국가였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주권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개념을 포함했던 상인연합인 한자동맹 등). 나 자신은 영토 국민국가가 승리하게 된 까닭은, 이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서구 특권층이 국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균질한(uniform) 인구를 지녔던, 당시로서는 유일한 국가였던 중국을 모델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균질한 인구는 유교 용어들을 빌면 주권의 근원이고 고유한 문학의 창조자이며, 단일한 법률에 종속되고, 고유한 문학으로 수련받아 그 덕성에 따라 선출된 관료들에 의해 행정이 진행되는 존재다... 현재의 민족국가가 겪고있는 위기, 그리고 국가와 같은 일을 많이 하지만 훨씬 덜 추악한 국제 제도들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 바로 옆에서, 그에 맞서는 형태로 정확히 국가는 아님에도 여러 면에서 그만큼이나 추악한 국제 제도들이 급증하는 현상을 볼 때, 그런 이론의 결여는 진정한 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이담에 오는 주제들(tenets)은...

 

3) 또 다른 자본주의론

4)권력/무지, 혹은 권력/멍청함

5) 자발적 연합의 생태학

6) 정치적 행복감에 대한 이론

7) 위계

8) 고통과 쾌락: 욕망의 사유화에 관하여

9) 소외에 대한 하나 이상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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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과학사 스터디 시작!^.~

다음 주 토요일, 즉 7월 4일부터 과학사 스터디를 시작합니다.

시간은 늦은 2시부터 6시 정도까지 하고요,

그 이후엔 저녁 겸 간단하게 뒷풀이를 합니다요^^.

 

스터디 방식은요,

조금씩 조금씩 부분 부분 진도를 나가면서,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마도 진도는 처음에 더디 나갈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좀 지나면 좀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예비모임 때 모인 분들이 의욕이 넘쳐나서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 부분만 제가 발제를 하고,

그 이후부터는 희망하는 사람 위주로 발제할 내용을 아주 조금씩 해서

발제를 해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스터디 시간이 토요일 오후로 잡혀 있는데,

7월 11일에 다시 스터디 시간을 조정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계속 토요일 오후로 할지, 아니면 평일에 하게 될지를 말입니다.

 

예비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스터디 같이 하실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덧글 달아주셔요.

그리고 덧글에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 주셔요.

스터디 자료 보내 드릴 테니까요.^^

 

아, 참!

스터디 장소는 건국대학교 제2학생회관 220호 생활도서관입니다.^^

 

그리고 지금 스터디하실 분들은 저 빼고 13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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