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가는 "녹천탕"에는 탕 주변에 코팅된 주간지 기사가 여기저기 놓여있다.아마 손님이 탕에서 몸을 푸는 동안 읽으라고 내 놓은 일종의 주인의 배려인 셈이다. 주로 [주간경향]과 [시사인], [시사저널], 어떨 때는 [한겨레21]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주간조선]도 보인다. 종업원의 식견인지 주인의 식견이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주간지를 선정하는 모양이다.

나는 대체로 한국식 TV 코메디는 전혀 안 보는 사람인데, 최근 여러가지 사연으로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아주 재미있으니 한 번 보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애정남"이 말 그대로 느끼한 남자의 애정섞인 그렇고 그런 코메디 코너라고만 생각했지 이 말이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의 줄임말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아래 글을 읽게 된 것도 첫 문장이 TV 코메디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많았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은 언제 생겨나나

전우영│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북쪽에 오랑캐가 쳐들어와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마지막 남은 감!수!성! 감수성에 있는 장군들은 감수성이 풍부했으니…”로 시작하는 ‘감수성(城)’은 KBS2 텔레비전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가운데 하나이다. 감수성이 병적일 정도로 풍부한 장군들이, 왕이 자신에게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것을 아주 심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갑자기 삐치는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었다.

왕이 역모를 꾸민 군사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그들이 숨어 있는 산을 당장 불태우라고 장군에게 명령하면, 장군이 갑자기 “그 산 우리 집안 선산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삐치는 식이다. 왕은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미안하다. 몰랐어”라고 사과한다. 하지만 한번 삐친 장군은 왕이 얼마나 말을 심하게 한 것인지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그 산 우리 증조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묻힌 곳인데….” 왕이 또 미안하다고 해도, “좋겠네요. 돌아가신 아버님께 보일러 놔드리겠네요”라고 끝까지 왕이 말을 함부로 해서 자신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감수성’은 심지어 사약을 받아야 할 포로로 붙잡힌 오랑캐까지도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으면 “나 빈정 상해서 사약 안 먹을 거야”라고 말하고 가버리는 것이 통하는 세상이다.

감수왕, 문제를 신하들의 관점에서 바라봐

‘감수성’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캐릭터는 감수성이 풍부해서 마음의 상처를 쉽게 입고 잘 삐치는 장군, 내시, 오랑캐이지만, 더 주목할 만한 캐릭터는 개그맨 김준호씨가 연기하는 감수성의 왕인 ‘감수왕’이다. 감수왕은 왕으로서 자신이 충분히 해도 되는 이야기나 행동을 했음에도, 신하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감수왕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왕인 것이다.

감수왕의 공감 능력은 감수왕이 문제를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신하들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울고 있는 상대방이 울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울고 있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상황을 보는 것이다. 그 덕분에 시청자들조차 공감하기 힘든 신하들의 슬픔에도 감수왕은 공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상대방에 대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언제쯤 생기는 것일까?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어린이들은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 인지 발달 연구의 아버지 격인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어린이들은 약 7세까지는 타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헬더(Inhelder)와 함께 수행한 실험에서 입체적인 모형 산을 만들었다. 이 산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였다. 먼저 어린이에게 이 산 전체의 모습을 3백60℃ 돌아가면서 보도록 했다. 그 후에 어린이를 산의 한쪽 편에 앉게 하고, 어린이의 맞은편에는 곰 인형을 하나 놓아두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쪽에서 산을 찍은 사진과 곰 인형이 앉아있는 쪽에서 산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두 개의 사진 중에서 어떤 것이 곰 인형이 지금 보고 있는 산의 모습인지 고르게 했다. 결과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보이는 산의 사진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어린이들은 자신의 맞은편에서 산을 보고 있는 곰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산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8세 전후에 자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 고려

피아제는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지 못하는 이러한 어린이들의 사고를 자아 중심적 사고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자아 중심적이라는 것은 어린이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타인들도 자신과 동일한 조망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자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고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5세 전후의 어린이들에게 이른바 명품이라고 불리는 아주 비싼 가방과 뽀로로가 그려진 가방 중에서 엄마에게 줄 선물을 고르라고 하면,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뽀로로 가방을 엄마에게 줄 선물로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엄마도 자기와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볼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엄마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엄마에게 줄 선물로, 엄마가 원하는 비싼 가방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뽀로로 가방을 선택하는 것이다.

피아제의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을 약 8세 전후에 획득하게 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관점을 고려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생각보다는 어린 나이에 획득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어린이들은 자아 중심적 사고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엄마가 뽀로로 가방보다는 비싼 가방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자아 중심적 사고로부터 탈출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성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득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판단과 의사 결정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존재는 과연 피아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8세 전후에 자아 중심적 사고로부터 탈피하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힘을 소유하고 있을 때, 이들의 자아 중심적 사고를 카리스마, 추진력, 선명성, 단호함 등의 단어로 포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도 원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믿고 설득하는 것은,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엄마에게 뽀로로 가방이 더 좋다고 설득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특히, 리더십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거나 또는 그런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자아 중심적 사고는, 리더의 결정에 삶이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폭력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감수왕은 자신의 신하들에게도 쩔쩔매는 우스운 왕이지만, 그에게는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쩌면 그 공감 능력으로 자신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 간에 발생했던 오해와 갈등을 조기에 봉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감수성을 지켜내면서 끝까지 오랑캐들과 싸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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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20:53 2011/11/03 20:53

신문종이 향기

좋은글 2011/11/03 20:39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이팟을 가지고 놀기 전까지만 해도 경향신문을 읽기 위해 하루에 1시간 정도 시간을 냈다. 경향신문은 기획기사에서 오피니언까지 참으로 읽을 거리가 많은 신문이다. 경향신문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시간을 내서 읽지 못/안 한다. 아이팟과 아이패드로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신문종이에 인쇄된 문자를 읽기가 영 이상해졌다. 이상해졌다는 표현은 물론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다른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이건 궁색한 말이 아니다. 분명 책을 읽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건 주로 공부고 마음 편하게 책을 읽는 경우는 소설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에 책에 인쇄된 문자와 신문에 인쇄된 문자는 대하는 마음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팟이나 아이패드에 익숙하다 보니 느긋하게 마음을 편히 먹고 글을 읽는 여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 아이팟과 아이패드를 멀리해야 한다. 종이 향기 맡으며 읽는 글이라야 진짜 글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기록은 디지털로 남기기로 한다.

[녹색세상]군식구와 상상력

이문재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slownslow@naver.com

은행잎 구르고, 어깨가 움츠러들 때면 생각난다. 봄이면 바람처럼 나갔다가, 가을이 깊어지면 또 바람처럼 깃들이던 노총각.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였는데 집도 절도 없었다. 10촌형님이었다. 우리는 ‘열춘성’이라고 불렀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간 데다 얼굴이 길었다. 말수가 없었고, 키는 컸지만 등이 구부정했다. 결정적인 흠은 게으른 데다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 있을 때 열춘성은 가구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군식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하지 않았다.

김장철이면 또 다른 식구가 생겼다. 덕적도에서 굴장수 아주머니가 다녀가면, 며칠 뒤 김천에서 꿀장수 할머니가 왔다. 두 분은 이고 온 굴과 꿀을 다 팔 때까지 너댓새 우리집에서 묵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숙박시설이 없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우리집이 ‘민박집’이었다. 숙박비는 따로 없었다. 굴 두어 사발, 꿀 한 대접이면 그만이었다. 늦가을 손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겨울 밤에도 헛기침을 하며, 하룻밤 재워달라는 나그네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군말없이 낯선 사람을 방으로 들였고, 어머니는 서둘러 밥상을 차렸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환대의 문화’가 살아 있었다. 환대하는 문화가 없었다면 나그네, 장사꾼, 순례자, 탁발승은 없었을 것이다. 낯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는 보편적이고 유구한 전통이었다. 언어와 지역, 종교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가정에서는 ‘세 가지 보물’을 상비하고 있었다. 양초, 마른 빵, 담요. 늦은 밤, 낯선 여행자가 문을 두드리면 양초를 켜 문지방을 넘게 하고, 빵으로 허기를 달래준 다음, 담요를 덮고 잠자리에 들게 한 것이다.

이슬람 문명에도 환대가 엄연했다. 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루미의 시에는 여행자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문밖까지 나가 웃으며 맞이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방인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미래에서 온 안내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은 토착사회에서는 낯선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문화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저 환대의 문화를 추방한 것은 근대였고, 자본주의였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방인을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참외 서리가 절도로 규정되고, 무전여행이 무전취식으로 지탄받으면서 환대의 문화는 소멸됐다.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사람은 ‘무단 침입’ 가능성이 있는 예비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환대는 죽었다.

세계 인구가 70억명을 넘어섰다. 이주와 디아스포라(離散)가 지구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체류 외국인이 114만명을 넘어섰다. 낯선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차이의 공동체’는 요원하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대중목욕탕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국인과 외국인은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인과 젊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강북과 강남 등 국경 안에서도 수많은 차이가 수시로 부딪친다. 하지만 차이는 여전히 차별의 근거다. 환대를 초대해야 한다. 환대가 차이를 다양성의 원천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첫서리 내리면 ‘열춘성’의 희멀건 웃음이 떠오른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서울 변두리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 고향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겨울이면 고향집으로 돌아가 한철을 나야 할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이 원룸과 고시원, 옥탑방, 반지하방, 지하도에서 웅크리고 있다. 추방당한 삶들이 생존의 극지로 몰려 가 있다. 환대의 문화를 현재화하는 첫 걸음은, 도정일 교수가 말한 대로 문학적 상상력을 복원하는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감정이입을 통해 나그네와 이방인을 맞아들이지 못한다면, 의인화를 통해 물과 나무, 땅과 별을 반기지 못한다면, 미래는 우리를 비켜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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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20:39 2011/11/03 20:39

나는 어른같은 아이를 싫어한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편인데, 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여를 불문하고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좋아한다.(하긴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아이를 싫어한다.) 대중 목욕탕에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서 어떨 때는 눈물이 나려고 할 정도다. 그래도 나는 어른 같은 애들은 싫어한다. 간혹 영화를 보다 분명 어린 애인데 말이나 행동이 성인 같은 아이를 보면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심하면 보지 않고 중간에 나오거나 모니터로 볼 경우 그냥 끈다.

[여적]어른 그늘 속의 아이들

  김철웅 논설실장

롤링 스톤스가 부른 ‘눈물은 흐르는데(As Tears Go By)’에서 ‘나’는 어느 저녁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웃고 있지만 날 위해 웃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듣고 싶었지만, 들리는 건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뿐. 아이들은 내가 예전에 자주 했던 놀이를 하고 있었고, 지켜보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듣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그 눈물엔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을 거다. 그렇다, 어린 시절은 어른에게 그리움이며 회한이다. 워즈워스가 시 ‘무지개’에서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마냥 뛰누나”라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결론 내린 건 순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표현이었다.

한 시골학교에서 성탄절 연극 공연이 있었다. 선생님은 머리가 조금 모자라는 빌리에게도 역할 하나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요셉이 “빈 방 있습니까” 물을 때 “없어요”라고 딱 한마디만 하면 되는 여관 주인역을 맡겼다. 막이 올라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온 요셉이 방이 있냐고 묻자 빌리는 뜻밖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선생님까지 나서 작은 목소리로 “없어요”라고 대답하라고 재촉했다. 그래도 한참 서 있던 빌리가 마침내 따뜻한 목소리로 꺼낸 말은 “내 방 쓰세요”였다.

가수나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 그려진 백지이며 빚는 대로 빚어지는 찰흙 같은 존재임을 안다. 아이는 수정처럼 맑은 거울도, 일그러진 거울도 될 수 있다. 그건 거의 전적으로 어른 하기에 달렸다.

무상급식이 전학년으로 확대된 엊그제 서울 초등학교에서 여러 정경들이 펼쳐졌다고 한다. 새로 무상급식을 받게 된 5·6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에 약간씩 온도차가 있었나 보다. 가령 강남의 한 어린이는 “무상급식을 하면 세금이 필요 없는 데까지 들어가는 거라 안 좋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아이는 “이것 때문에 다른 쪽 예산이 깎였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 학교 교사는 “애들에게 무상급식 토론을 시켜봤는데, 어른들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아 중단시켰다”고 말했다. 무상급식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마저 그 무슨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분석을 해보지만 이 또한 살풍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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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19:52 2011/11/03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