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보호소라는 곳이 있다.
정부 측 설명에 의하면 ‘일시적으로 외국인을 보호하는 곳(어쩌구)’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10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2007년 2월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에서 드러난 실상은 그곳이 외국인들을 구금하던 ‘감옥’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감옥에 강제로 갇힌 사람들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미국이나 프랑스의 외국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피부색이 짙거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돈이 없는 사람들이 구금대상이 된다.
또는 이주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도 표적단속의 희생양이 되어 그곳에 구금된다.
일전에 여수외국인보호소에 흑인이 한 명 있었는데, 당연히 가난한 나라 출신일 거라고 생각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그가 미국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한다.
고압적인 태도는 사라지고 갑자기 예우를 갖춰 대했다고 한다.
당신이 아나키스트라면 ‘보호소’라는 말이 가진 권위적 성격을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물보호소나 미아보호소에서 느껴지듯 보호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무엇인가 베푸는 것을 말한다.
제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존재에게 온정 따위를 베푼다는 뜻이 보호엔 들어있다.
약자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오만함이며, 강권의 행사인 것이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이나 인간이나 생명체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으며, 지구라는 별에서 공생을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환경보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생태계를 인간이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도 오만한 생각이지만, 매년 2만 여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는 지금의 체제를 인간들의 이윤추구활동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자연과 노동자를 착취의 대상으로 격하시킨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이윤추구활동을 벌이던 자들이 언젠가부터 자신의 추악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슬그머니 꺼내든 깃발이 환경보호인 것이다.
그런 자들은 소나 닭을 생명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산업화된 나라에서 인간이 먹는 동물은 인간과 함께 자라지 않는다.
원래 초식동물인 소들은 비육장과 도축장이 함께 자리한 거대한 공장에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항생제가 가득 든 동물성 쓰레기 사료를 먹고 빠른 시간에 살을 불린 뒤 2초에 한 마리씩 포장되는 고기덩어리로 취급될 뿐이다.
병이 생기면?
몇 백만 마리씩 살처분을 하면 된다.
그냥 땅에 묻는 것이다.
핸드폰이나 알루미늄 캔처럼 이윤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 체제에서 광우병이 생겨난다.
가장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방법까지 총동원을 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짜여진 미국의 자본주의 공장에서 광우병이 생산되는 것이다.
한우가 안전하다고?
글쎄.
목초나 건초를 뜯어먹고 자란 소가 아니라면, 미국을 따라가기 바쁜 한국의 공장형 사육체제에서 미국산 사료를 먹고 생산된 소들이 별로 안전할 것 같지는 않다. (좁디좁은 비육장에 갇혀 우골분 사료를 먹은 소들의 육질이 자유로이 초원을 거닐며 풀을 뜯어먹고 자란 소보다 부드럽다고 한다)
사육장에 불이 나 소들이 불에 타 죽은 모습이 흡사 외국인보호소 같았다.
이는 한국사회가 타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호의 대상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이 아니라 한 번 쓰고 버리는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소들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외국인보호소와 광우병 소를 생산해내는 비육장은 닮은 꼴이다.
이것이 과연 보호인가?
경찰청이 박종철을 고문해 죽였던 서울 용산구 남영역 근처에 있는 대공분실을 ‘인권보호센터’라는 새로운 간판으로 바꿔 달았는데, 그것 역시 ‘경찰이 공권력이라는 힘으로 지켜주겠다’는 권력행사의 의지표명에 불과하다.
인권이란 누가 지켜줄 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굴 지켜줘야 하는 체제가 필요 없어지도록 만드는 과정이 바로 인권을 지키는 것이다.
미국이 보호해준다는 평화가 실은 그 강대국이 지휘하는 질서에 편입되어 열심히 꽁무니를 좇아갈 때 비로소 조금 떨어지는 떡고물을 안심하고 받아먹는 것이지 않은가.
힘으로 불만을 내리누를 때 지켜지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화이며, 가정의 알량한 평화란 것도 실은 가부장의 권위에 복종할 때 지켜지지 않던가.
군복을 입고 촛불집회에 나온 예비군들 역시 이와 같은 권력관계에 자신들과 집회 참여자들을 강제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보호해주겠다는 권력에의 의지를 버리고, 평시민으로 돌아가 촛불을 들라.
사람들은 폭력으로부터 비폭력 방어법을 배운다.
전경의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간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촛불문화제 이후 연일 벌어지는 길거리 행진에서 '다함께' 역시 예비군들이 보이는 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집회 엘리트라고 여기는 다함께 활동가들은 대중을 보호하겠다거나 지도하겠다는 욕망을 갖고 사람들의 자발성을 억눌러버린다.
오죽하면 '확성기 괴담'이 유행할까.
오늘 12회 인권영화제에 가기 위해 캠페인용 탁자와 촛불집회 홍보물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내 홍보물에 '촛불집회에 참석하자'는 커다란 구호가 적혀 있는데, 지하철에 탄 시민들이 그 글을 보면 서로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확성기를 든 사람은 절대 쫓아가지 말래요. 그 사람들 모두 쁘락치라고 그러던데요. 조심하세요."
나는 확성기를 든 사람이 모두 쁘락치는 아니며, 또한 사람들이 요즘 하얀색 확성기를 든 채 길거리 행진을 유도하고 있는 한 여성을 프락치로 오인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다음 아고라(에 가본 적은 없지만)에 이런 '확성기 괴담'이 파다하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보호와 지도를 하겠다는 권력에의 욕망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엘리트주의는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한다.
보호를 해주겠다는 것은 관계에서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놓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보호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보호받을 존재들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운동이 목표로 하는 바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