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의 분석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8/05/24 18:00
후회없는 공산주의자의 공산주의 성찰 - 사회주의 몰락한 자리 아나키즘이 채워
 
“마르크스주의 깨야 마르크스주의 부활” 무엇이 혁명가를 만드는가에 대한 천착 
 
   김일주 기자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쓴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은 지난 세기 혁명운동을 이뤘던 굵직한 줄기들을 점검하며 “혁명과 관계하는 거의 모든 주요 주제들을 망라”한 책이다. 1961년부터 73년까지 지은이가 발표한 각종 시론과 강연문, 짧은 논문들을 주제별로 엮었다.
 
책은 애초 73년에 출간됐다가 지은이가 자서전 <미완의 시대>를 발표하기 1년 전인 2001년에 재출간됐다. 지은이는 재판 서문에서 “30년이 지나갔고 세계 상황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대’를 논한 그의 시론은 오늘의 현실에 비춰보아도 결코 설명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은이가 글을 발표한 기간에 일어난 ‘68혁명’(사진)은 ‘많은 예언가들을 절망에 빠뜨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68혁명’에 대해 논평하며 그가 던진 아나키즘에 대한 성찰이 특히 눈길을 끈다. 그의 성찰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일고 있는 다양한 대중시위와 직접행동을 이해하게 해주는 통찰력을 제공할 듯하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자리, 대안적 유토피아가 사라진 자리에 아나키즘이 답을 제시하며 그 빈자리를 채웠다고 분석한다. 아나키즘의 ‘원시적 자생성’과 행동주의는 스탈린 사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위기, 도저히 혁명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역사적 상황에서 혁명가들의 곤혹스러움을 뚫고 떠올랐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혁명적 불만이 아나키즘에 불을 지폈다. 지은이는 “지금까지 등장했고 성공한 위대한 혁명들은 대부분 계획된 결과라기보다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며 “때로는 평범한 대중시위처럼 보이는 것에서, 때로는 적들의 행위에 대한 저항에서, 때로는 다른 방식으로 예기치 않게 급속히 성장했다”고 말한다. 물론 “중요한 공헌을 하고 싶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며 따끔한 충고도 날린다.
 
1960년대 들어 되살아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논평하면서도 그는 비판적 성찰의 날을 세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해체”를 통해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산산조각 난 상황”에서, “빙하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 “설명뿐만 아니라 질문도 해야” 하며, “모든 해답을 가진 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옮긴이 김정한씨는 “에릭 홉스봄의 장점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종파주의와 명백히 거리를 두는 데 있다”며 “자신의 신념이나 운동 논리로 역사 분석을 대신하지 않고, 공산당의 오류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한계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자가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한 반성과 성찰에 기초해 있다”고 평했다.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 촉발한, 혁명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밑에는 혁명을 점화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끝까지 고민했던 지은이의 진정성이 깔려 있다. 90평생 ‘극단의 시대’ 한가운데를 ‘참여 관찰자’로,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노학자의 책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형’으로 살아 있는 이유는 ‘좌파 학자’로서의 엄격함과 진정성 덕분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혁명가가 되는가?’란 물음을 천착했던 그의 답이 다음 단락에 축약돼 있다.
 
“혁명에 대한 헌신은 여러 동기들의 혼합에 달려 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 이면에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실질적으로 풍요한 삶에 대한 꿈, 출구가 모두 폐쇄되었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려 열 수 있다는 느낌, 인내와 개량 혹은 점진적인 개선에 대한 호소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절박한 느낌 등 (…) 무엇이 혁명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혁명가를 만들어내는가에 관해 내가 말하는 바는 반복할 가치가 있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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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4 18:00 2008/05/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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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돕헤드 2008/05/24 18:10 Modify/Delete Reply

    에릭 홉스봄이 아나키스트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고 따끔한 충고를 한다.
    개인적으로 난 지금보다 더 진지해지면 안 된다. 지금도 난 충분히 진지하다.
    다만, 이 사회를 바꾸는 운동으로서 아나키즘은 더욱 진지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분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불씨 2008/05/24 21:48 Modify/Delete Reply

    난,아나키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의 실천을 위한 고민과 인류의 평화와 그 수단의 정치 혁명을 위한 철학은 공감한다.

    공감한다고 해서 아나키스트가 될 필요는 없는것 같다.
    동시에 "혁명의 투혼"은 시대의 거대한 정치조직의 과학성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민주적 연합의 집합적 행동 (저 위,어쩌면 탱크앞에서 십여미터도 날아가지 못하는 "짱돌")의 외침과 저항은 진실하다.

    G8! 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하고 이끌고 있는 정치회의체,G8의 저항의 광장에서 그 진실함을 듣고 싶다.

    혁명의 "동기"란, 무엇이 혁명을 만들어 내는가?
    그래서 혁명의 투혼을 리믹스 하라!
    혁명은 에릭스 처럼 혁명론으로 구성되는 이론도 아니며,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가 진본주의 역사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의 민중의 저항의 역사의 진실,시대와 역사의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은 바로 세계평화를 위한 인류적인 것이 아닐까?

    민중의 투혼은 레닌과 아니키스트의 정치투쟁의 과학성에서 모범답안을 찾을수는 없을 것이다.우리의 정치투쟁은 "녹두꽃"에 동학민중의 투혼이 있고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국밥타령에도 있다.

    그들이 지금 생명을 위한 탈이데올기의 입장에서 평화를 상위개념으로 말하겠지만 "아나키스트!" 너의 가슴에 봉건역사가 리믹스한 그 리믹스에서 아나키스트도 그 모든 진본주의의 혁명주의자는 노회되어 갔다.

    너는 G8로,노동자는 사회공공성 투쟁의 광장과 거리로!

    -돕헤드에게 띄우는 불씨의 편지

  3. 돕헤드 2008/05/25 01:27 Modify/Delete Reply

    방금 전까지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생생한 민중들의 열기가 필어오르는, 독재타도와 이명박 탄핵을 외치는 직접민주주의현장에 있다 왔습니다.
    경찰들이 아무리 진압한다고 위협을 해도 해산하지 않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촛불을 든채 민중의 삶을 미국자본의 이익을 위해 팔아넘기는 정권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자율적 공간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모든이들이 G8으로, 촛불집회로, 거리로 쏟아져나와 재벌정권을 끝장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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